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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사100년]리얼리즘과 멜로드라마의 절묘한 이중주

[한국영화사100년]리얼리즘과 멜로드라마의 절묘한 이중주 대표 이미지
<지옥화 스틸>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

전후 한국 사람들의 상처를 위로한 것은 역시 영화였다. 전쟁 중에도 영화제작을 멈추지 않았던 영화인들은 폐허나 다름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바로 제작에 착수했다. 영화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물론 영화는 크든 작든 자본의 투자와 회수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산업임이 틀림없고, 분명 개인 창작자로서의 욕망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영화인들에게는 한국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의 열정이 가장 중요한 동기였을 것 같다. 환도한 이승만 정부도 이를 파악하고 1954년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로 한국영화 지원책을 단행한다.

전후 한국영화 부흥의 기폭제가 된 작품은 이규환의 <춘향전>(1955)이다. 1955년 벽두에 국도극장 한 관에서 개봉한 이 작품에 관객들은 2개월간의 장기 흥행으로 보답했다. 영화인들은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확인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영화로 채산을 맞추는 것을 넘어 큰 수익도 올릴 수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춘향전>의 성공으로 이듬해까지 <심청전>(이규환, 1956) <장화홍련전>(정창화, 1956) 등 사극·시대극이 유행했고, 관객들이 싫증을 낼 틈도 없이 멜로드라마 현대극 장르가 열기를 이어갔다. 이를 주도한 것은 한형모인데, 대학교수와 교수 부인의 각기 다른 연애를 다룬 <자유부인>(한형모, 1956)으로 전후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후 여성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역시 멜로드라마였다. 특히 홍성기가 <애인>(1956), <실락원의 별>(1957) 등을 연이어 내놓으며 상업영화 감독으로서는 1인자의 자리를 누렸다. 영화사가 이영일은 특히 <자유부인>에 방점을 찍어 “시대 풍조의 멜로드라마”로, 홍성기의 영화는 “전형적인 애정 멜로드라마”로 정의하지만, 이 시기 어떤 멜로드라마든 전후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심리를 충분히 반영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무명의 영화청년 신상옥의 등장

잘 알려진 것처럼 신상옥의 영화적 스승은 ‘남한’영화의 시원이라 할 최인규다. 한형모가 일제 말기 최인규의 영화에서 도제를 시작했다면, 그는 해방 이후 최인규의 문하에 참가하면서 영화 일을 시작했다. 장르에 충실하고 기술에 뛰어난 한형모가 테크니션으로서 최인규의 적통이라면 신상옥은 이는 물론이고 영화작가로서의 면모까지 확실히 이어받았다. 어쩌면 1950년대에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한 최인규의 영화세계를 완전히 계승한 이가 바로 신상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말기 최인규의 영화에서 미완에 그쳤던 리얼리즘의 화법과 장르적 세계의 결합은 신상옥이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일곱 번째 작품<지옥화>다.

사실 신상옥의 초기 영화들은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흥행에 실패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26세 때 만든 데뷔작 <악야>(1952)는 전쟁 시기 양공주를 그린 작품인데, 그 역시 증언했던 것처럼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염세적인 프랑스영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어 전쟁 중 대표 장르였던 세미 다큐멘터리 <코리아>(1954) 그리고 시대극 <젊은 그들>(1955), <꿈>(1955), <무영탑>(1957)을 연출했다. 영화계의 주류가 아니었던 그의 초기 필모그래피는 확실히 한형모가 보여준 참신함이나 세련됨이 느껴지지 않는다. 훗날의 신상옥다운 과감함이 제대로 발현된 작품은 1958년 만들어진 <지옥화>였다. 현대극·멜로드라마의 유행과 1958년부터의 악극을 원작으로 한 이른바 ‘신파물’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 이 영화는 당시 한국영화 경향에서 완전히 돌출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악야>에서 다룬 바 있는 양공주를 소재로 전후 한국 사회의 단면을 리얼리즘 화법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강렬한 파토스(pathos)를 드러내는 멜로드라마적 화법이 절묘하게 결합한 작품이었다. 물론 이 영화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다.

기지촌을 통해 드러낸 전후 한국 사회

<지옥화>는 동두천 기지촌을 배경으로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들과 미군 부대의 물건을 훔쳐 암시장에 내다 파는 갱단이 등장하는, 한국영화사 전체를 훑어봐도 매우 흥미로운 소재의 영화다. 영화는 형 영식(김학)을 찾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동식(조해원)이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어지러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의 가방을 훔치는 날치기를 쫓으려던 동식은 불량배들의 시비로 자기 가방마저 잃어버려 망연자실하고, 이를 본 남대문의 지게꾼들은 세상을 한탄한다. 결국 동식은 남대문시장에 장물을 팔러 온 형을 발견하고 동두천으로 따라가게 된다.

<지옥화>의 서두는 마치 기록영화인 듯 미군 부대 앞 시장통 풍경, 미군과 양공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영화 곳곳에서 다큐멘터리적 질감이 활용되는데, 단순히 기록영화적 화면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장르영화의 문법과 결합시키는 연출이 무척 흥미롭다. <자유부인>에서 한형모가 영화 속 볼거리로 댄서의 장면을 보여준 것을 기억할 것이다. 신상옥 역시 당시 관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미군 부대의 댄스홀 장면을 넉넉히 보여주지만, 영식 일당이 양공주들의 도움으로 미군 부대에 잠입해 물건을 훔치는 장면까지 덧붙이고 있다. 즉 댄서들의 공연 장면을 기록영화를 보는 듯한 숏들로 구성하는 한편, 교차 편집을 통한 장르적 긴장감까지 만들어내는 것이다.

리얼리즘 화법과 결합한 멜로드라마 양식

영화는 영식과 그와 동거하는 양공주 쏘냐(최은희) 그리고 동식과 그를 좋아하게 된 주리(강선희)를 주요 인물로 배치한다. 쏘냐가 동생 동식을 유혹하고 둘이 가까워지면서 영화는 본격적인 멜로드라마의 세계로 진입한다. <지옥화>의 전단지에 붙은 “물결치는 관능의 파도”라는 문구처럼 사실 이 영화의 애정 묘사는 <운명의 손>(한형모, 1954)의 키스신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해진다. 영식과 쏘냐가 침대나 풀밭 또는 강변에서 보여주는(마치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프레드 진네만, 1953)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러브신, 쏘냐가 동식을 유혹하는 장면과 이후 둘의 러브신이 숨가쁘게 이어지는 것이다. 

영화학자 벤 싱어(Ben Singer)는 무대 멜로드라마에서 시리얼 퀸(serial queen)의 연속 영화(serial film)로 이어지는 멜로드라마적 특성으로 파토스, 과도한 감정, 도덕적 양극화, 비고전적인 내러티브 구조뿐만 아니라 육체에 위험을 가하는 스펙터클, 스릴, 폭력, 액션의 강조로 정의되는 ‘선정주의’를 거론한 바 있다. <지옥화> 역시 멜로드라마의 이러한 관점에 정확히 일치하는데, 영화는 영식, 동식, 쏘냐의 복잡한 관계로 야기되는 액션 신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전체 러닝타임(86분) 중 후반부 30분 동안 펼쳐지는 기차 액션신은 이 영화의 핵심적인 스펙터클이다. 신상옥 사단이자 훗날 스릴러·액션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떨친 강범구 감독이 달리는 열차 위에 밧줄로 몸을 묶고 촬영했다는 바로 그 장면이다. 영식 일당은 미군 부대의 물자를 실은 열차칸을 탈취하기 위해 떠나고, 쏘냐는 동식과 달아나기 위해 헌병대에 이들을 신고한다. 일당은 탈취에 성공하지만 헌병대가 이들의 차량을 쫓고, 이를 안동식은 형을 구하기 위해 이들을 쫓아가고, 쏘냐마저 영식을 쫓아가는 3중의 추격전이 펼쳐진다. 헌병대와 총격전을 벌이던 영식 일당의 차량이 전복되고 영식은 겨우 살아남아 동식에게 발견되지만, 뒤따라온 쏘냐를 본 그는 그녀를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지금 성수대교 근처의 당시 사근동 늪지대에서 찍었다는 마지막 장면은 단연코 이 영화의 백미다. 쏘냐와 동식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며 사투를 벌이고, 칼로 쏘냐를 찌른 영식 역시 죽은 그녀 옆으로 기어가 운명을 다한다. 진흙으로 가득 찬 늪은 영화의 초입 남대문의 지게꾼이 말한 “어지러운 세상”의 축도였다. 다행히 영화는 동식과 함께 시골로 떠나는 주리의 장면으로 해피엔딩을 맞는다. 쏘냐는 ‘지옥화’로 남았고, 동식과 주리만이 그 지옥을 탈출해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19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중심에 서다

이후 신상옥은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자매의 화원>(1959), <동심초>(1959) 등 서구영화를 지향한 세련된 멜로드라마를 선보이며 성공 가도를 달린다. <성춘향>이 크게 성공한 1961년, 신필름을 설립한 그는 1960년대 한국영화 전반을 리드하게 된다. 당시 한국영화계를 부르는 별칭 ‘충무로’는 신필름과 그 외 영화사로 나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신필름이라는 영화왕국의 군주였다. 영화제작자로서 양산 체제를 지휘하는 한편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작가로서의 작업도 유지한, 세계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축복받은 존재였다.

1960년대 초반 영화산업의 외양이 급격히 확대되었고, 1962년부터 연간 제작편수가 100편을 넘게 된다. 한국 영화산업은 규모의 경제뿐만 아니라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가 보여주는 예술성으로 깊이가 확보될 때 힘을 받았다. 200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앞둔 1996·1997년 홍상수·김기덕·이창동이 차례로 데뷔한 것처럼, 1960년 김기영이 <하녀>를, 1961년 유현목이 <오발탄>을, 신상옥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는 한국영화사의 위대한 걸작을 내놓으며 1960년대 르네상스의 폭과 깊이를 두루 만족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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