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연재
[테마연재]<플로리다 프로젝트> 인물의 ‘등’을 통해 입장하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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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이 켜지면 그늘에 몸을 기대고 지루해 보이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어린 아이 둘이 등장한다. 이내 한 아이가 달려오며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고, 아이들이 개구지게 웃어 보이며 영화는 생기를 얻는다. 달려오는 아이는 등을 보이며 뛰어온다. 영화는 이렇듯 ‘등’으로 생명을 얻는다. 이렇게 등으로 시작한 영화를 열어보면, 관객은 이내 이 영화가 본질적으로 ‘등’에 위치하는 영화임을 알 수 있다. 영화는 꿈과 환상의 세계인 디즈니랜드 인근의 빈곤한 모텔촌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디즈니랜드의 어두운 ‘등’에 위치한 사람들의 등 뒤에서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삶을 조명한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에 등장하는 한 아이의 등은 관객을 그들의 세계로 초대하는 초대장과 다름이 없다. 관객은 아이의 등을 따라서 영화 속으로 입장하게 된다.
영화에는 수많은 등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등장인물들의 등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등을 수차례 조명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인물들의 등을 따라 이동하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한다. 이러한 화면은 인물들의 앞면, 즉 얼굴을 관객의 시야에서 차단함으로써 표정을 읽지 못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까지 차단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표정과 감정을 관객의 상상으로 채워 넣게 함으로써 인물들의 정서에 관객 자신의 정서가 섞이게 한다. 이 덕분에 관객은 보다 뚜렷하고 선명한 감정들을 아이러니하게도 인물의 등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감정의 종류에 따라 인물들의 등은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먼저 어른의 등이다. 어른의 등은 정적인 등이라 할 수 있다. 모텔 매니저인 보비나 무니의 엄마인 핼리를 통해서 등장하는 어른의 등은 체념과 포기 같은 씁쓸한 정서를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가 지고 일과가 마무리 된 저녁에 홀로 담배를 피우는 보비의 등이라던가, 몸을 팔기로 결정한 직후 담배를 피우는 핼리의 등에는 닥친 상황에 굴복한 이들의 모습이 깃들어 있다. 모텔의 주민들에게 진심 어린 애정을 가지고 있는 보비는 상사에게 굴복해야만 하고, 핼리는 사회의 등 뒤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폭력의 온전한 피해자이다. 이 때문에 보비는 보기 흉한 것들을 모텔 뒤편으로 치우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고, 핼리와 무니가 방을 빼게 한 뒤 사장의 등 뒤에서 몰래 꾸며진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다. 또한 그래서 핼리는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싸 온 와플을 집어 던질 수밖에 없으며, 향수를 놓고 올 수밖에 없었고, 발을 구르고 응시하는 소심한 복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모두 각자에게 필연적일 정도로 느껴지는 어쩌지 못하는 상황들에 갇혀 있다. 그 때 이들은 등을 보인다. 이 때의 등은 이들이 마주한 현실에서 잠시 뒤돌아서서 숨을 고르는 등이다. 그 때문에 어른의 등은 대체로 움직임이 없고,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이는 어른의 등은 현실을 마주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으로 잠시 등을 지고 서있는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수많은 등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등장인물들의 등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등을 수차례 조명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인물들의 등을 따라 이동하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한다. 이러한 화면은 인물들의 앞면, 즉 얼굴을 관객의 시야에서 차단함으로써 표정을 읽지 못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까지 차단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표정과 감정을 관객의 상상으로 채워 넣게 함으로써 인물들의 정서에 관객 자신의 정서가 섞이게 한다. 이 덕분에 관객은 보다 뚜렷하고 선명한 감정들을 아이러니하게도 인물의 등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감정의 종류에 따라 인물들의 등은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먼저 어른의 등이다. 어른의 등은 정적인 등이라 할 수 있다. 모텔 매니저인 보비나 무니의 엄마인 핼리를 통해서 등장하는 어른의 등은 체념과 포기 같은 씁쓸한 정서를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가 지고 일과가 마무리 된 저녁에 홀로 담배를 피우는 보비의 등이라던가, 몸을 팔기로 결정한 직후 담배를 피우는 핼리의 등에는 닥친 상황에 굴복한 이들의 모습이 깃들어 있다. 모텔의 주민들에게 진심 어린 애정을 가지고 있는 보비는 상사에게 굴복해야만 하고, 핼리는 사회의 등 뒤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폭력의 온전한 피해자이다. 이 때문에 보비는 보기 흉한 것들을 모텔 뒤편으로 치우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고, 핼리와 무니가 방을 빼게 한 뒤 사장의 등 뒤에서 몰래 꾸며진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다. 또한 그래서 핼리는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싸 온 와플을 집어 던질 수밖에 없으며, 향수를 놓고 올 수밖에 없었고, 발을 구르고 응시하는 소심한 복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모두 각자에게 필연적일 정도로 느껴지는 어쩌지 못하는 상황들에 갇혀 있다. 그 때 이들은 등을 보인다. 이 때의 등은 이들이 마주한 현실에서 잠시 뒤돌아서서 숨을 고르는 등이다. 그 때문에 어른의 등은 대체로 움직임이 없고,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이는 어른의 등은 현실을 마주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으로 잠시 등을 지고 서있는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등은 이와는 사뭇 다른 정서를 품고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현실을 등 지지 않을 뿐더러, 아이라는 이유로 현실과 격리되어 있지도 않다. 아이들은 오히려 놓인 현실을 마주본다. 현실을 아는 것과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능력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알고 그것에 나름의 천진한 해석을 덧붙인다. 그래서 어른들의 우는 얼굴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아이들에게 마약 소굴은 수 백 년 전에 지어진 집이자 댄스룸이고, 소 떼들이 모인 평지는 사파리이며, 다시 집에 찾아 온 성구매자 남성은 화장실이 급해서 돌아온 것이다.
영화는 이렇듯 일면 천진한 아이의 시점을 꾸준히 유지한다. 카메라를 내려 아이의 눈높이로 시선을 맞추고, 달려가는 아이들의 등을 마치 일행이 된 것처럼 따라간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대부분 그들보다 어른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점은 아이들이 보지만 해석하지 못하는 것들을 증폭시킨다. 아이들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핼리나 선정적인 노래나 춤을 따라하고, 호객 행위를 하는 무니를 보면서 관객은 아이들은 알지 못하지만 그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폭력의 형태를 고스란히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의 등 뒤에서 그들의 시점으로 영화를 보고 있기 때문에 관객마저 보지 못하는 것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른들 사이에 놓인 아이들은 어른들의 대화에 관심이 없고, 시끄러운 노래를 들으며 목욕하는 무니는 엄마가 자신을 더 이상 씻겨주지 않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관객 역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짐작만 할 뿐이며, 무니의 엄마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관객의 시선이자 아이의 시점인 카메라는 아이들이라는 얇은 가림막에 막혀 한 장면의 다른 앵글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내 그 각도가 잠깐 수정되면서 관객이 그 가림막 너머를 볼 기회가 생긴다. 무니가 욕조에서 위치만 옮겼을 뿐인데, 무니를 보호해주던 커튼은 사라지고 한 남성을 마주하게 된다. 당황하고 긴장한 표정으로 성급히 커튼을 다시 쳐보지만, 가림막 바깥의 현실을 이미 마주한 상태이다. 그래서 무니는 나름의 해석을 붙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이들의 등은 역동적인 등이다. 마주한 현실을 천진한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들은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마주한 방향으로 달릴 수 있다. 무지개를 보면서 그 밑에 묻힌 황금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요정을 쓰러트리려 달려 나간다. 어른들이 빈대가 드글거리고 내부는 어두컴컴하기만 한 모텔을 예쁜 색으로 페인트칠 하는 동안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계단 뒤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웃음꽃을 피운다. 이들은 등 뒤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거나 가리려 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찾고, 그것을 향해 달린다.
마지막 시퀀스에 핼리와 무니의 얼굴을 확대해서 보여준 두 장면은 이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등으로 보여지던 인물들은 마침내 돌아서 카메라를 마주하고 감정을 표출한다. 핼리는 여태껏 했던 욕설 중 가장 크고 진심이 담겨있을 욕을 하고, 무니는 울음을 터트린다. 소심한 복수를 하면서 등 지고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던 어른은 비로소 앞을 보고 욕을 내뱉고, 한 구석이라도 반짝이던 현실이 잔인하게 날을 세웠을 때 아이는 등을 돌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이들의 삶이 가장 강하게 압박을 당하고, ‘어쩔 수 없음’이 가장 극심하게 엄습해올 때 이들은 그제서야 오래 전에 이미 표출했어야 할 무언가를 터트린다. 아이들의 반짝임과 파스텔 톤의 화면에 흐려져 있었던 이들의 현실이 이 마지막 장면에서야 비로소 저항도 아닌 폭발로써 관객들에게 성큼 다가오는 것이다.
내몰린 상황 속에서 어른은 비로소 앞을 봤다. 하지만 여태껏 앞을 보고 있던 아이는 처음으로 마주한 현실이 두려워 등을 돌리고 쓰러졌다. 그런 무니의 손을 잡아 다시 달린 것은 비슷한 처지인 친구 잰시였다. 잰시 덕분에 방향성을 잃었던 무니의 등은 다시금 움직임을 갖고 디즈니랜드로 향한다. 밴드가 있어도 들어갈 수 없었고 특별한 날에 바깥에서 쳐다만 볼 수 있었던 디즈니랜드, 즉 그들 삶의 앞면을 향해 아이들은 달려나간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의 질감은 이전까지와 완전히 달라지고, 흔들림은 심해진다. 이전 장면들과 다른 톤과 분절 쇼트 등은 아이들이 정말 디즈니랜드를 향해 달리고 있는 건지 의문을 품게 한다. 그럼에도 단 한가지 명백한 것은 어쨌든 꿈과 희망의 상징인 디즈니랜드의 성을 향해 아이들이 달려나가고 있다는 것이고, 현실에 막혀 쓰러진 무니는 비록 당장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지라도 쓰러진 채로라도 자라고 있다는 점이다.
성 앞에 다다른 아이들의 등은 군중 속으로 사라지고 관객들에겐 디즈니랜드가 남는다. 거대한 성의 등 뒤에서부터 함께 달려온 아이들이 성 앞에 관객을 내려놓고 다시 달려 사라질 때, 이들의 등을 줄곧 따라온 관객은 어딘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아이들의 등이 올바른 앞면을 향했으므로, 이들이 결국 우리를 디즈니랜드로 데려다 줬으므로, 아이들도 밝은 디즈니랜드로 달려올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이들은 관객보다 앞으로 나아가 성의 정문을 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