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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연재]<어스> 나는 나의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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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림자는 내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야 지당하다. 주인공 애들레이드(루피타 니옹고, 이하 애디)가 아름다운 발레 동작을 선보이면 그림자가 따라서 춤추듯이. 그러나 그림자는 몇 번이고 넘어지고 휘청이며 자신만의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애디를 찾아와 귀를 긁는 목소리로 말한다. 사실 너야말로 내게 묶인(tethered) 그림자라고.
<어스>는 전형적인 공포 영화다. 날씨 좋은 시기에 휴가를 떠나면 아주 혼쭐난다는 것을 우리는 <호스텔>에서, <트루스 오어 데어>에서, 혹은 <미드소마>에서 이미 봤다. 한밤중에 정상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집을 침입하는 경우는 <더 퍼지>나 <노크: 낯선 자들의 방문>에서 본 것 같다. 인물들이 통통 튀는가 하면 글쎄. 이 가족은 아주 매력적이지만, 우리는 그들과 구면이다. 애디 가족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국인’들이다. 꼭 심슨네 가족들처럼, 아둔한 아빠와 모성이 강한 엄마, 똑 부러지는 딸과 조금 덜 큰 아들의 조합은 영화 초반부에 이미 관객을 완벽히 영화 속 세계에 적응하게 한다.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 이제 전형적인 가족이 전형적인 장소에서 전형적인 사건으로부터 무사히 벗어나면 이 전형적인 영화의 공포는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어스>의 스토리는 전형적이지 않은 반전을 수반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사실 어린 시절 지상으로 탈출한 복제 인간이며, 레드야말로 지상 출신의 ‘진짜 애들레이드’란 것을 알게 된다. 레드와 사투 끝에 납치당한 아들을 구출한 주인공은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나고, 뒷자리에 앉아 진짜 애디가 길을 잃고 자신과 만나 뒤바뀌었던 때를 회상한다. 그리고 문득 아들을 쳐다보다가 묘한 미소를 짓는다. 아들은 늘 가지고 다니는 주황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가족이 탄 차는 계속 달리고 길에는 복제인간들의 퍼포먼스가 길게 이어진다.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하지만 찝찝한 공포감은 끝나지 않은 채, 손에 손을 잡고 선 복제인간들처럼 불길하게 늘어져 있다.
이 영화가 독창적인 지점은 침입자에 대한 공포로 시작해서 자신에 대한 공포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야기 초반부에서 의문의 침입자는 나와 닮은 남이었다. 물론 얼굴이 닮은 기이한 자들에 대고 아들 제이슨은 “그들은 우리잖아. (They are us.)”라고 말하지만, 사건이 진행되면서 한번이라도 주인공 가족이 침입자들을 ‘나’라고 느낀 적이 있었나 싶다. 게이브는 에이브러햄을 처치할 때 주저했나? 제이슨은 플루토의 화상을 보고 동정심을 느꼈나? 백인 친구의 집에서 그들의 복제 인간을 죽였을 때도 마찬가지다. 친구의 얼굴을 한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고민은 일 분도 할 수 없다. 사유지를 침입하지 말라던 중산층 가족은 이제 다른 중산층 가족의 사유지에서 복제인간 일가족을 전멸시키는 전사로 거듭난다. 그들은 우리지만, 우리는 그들이 아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애디의 숨겨진 과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애디만이 죽어가는 엄브레를 안타깝게 쳐다보고, 플루토를 향해 손을 뻗는다. 애디가 레드를 처치하는 장면에선 그녀는 웃으며 괴성을 지르는데 그 모습이 언뜻 지하인처럼 난폭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아들 제이슨은 안아주는 엄마에게 팔을 두르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고, 엄마의 미소에 화답하는 대신 가면을 쓰고 얼굴을 숨긴다. <어스>의 공포는 여기에 있다. 공포를 야기하는 원인과 그것을 느끼는 대상의 경계는 일차적으로 서로 꼭 닮은 겉모습을 통해 흔들리며, 반전을 통해 완전히 전이되어 버린다.
그림자는 내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야 지당하다. 주인공 애들레이드(루피타 니옹고, 이하 애디)가 아름다운 발레 동작을 선보이면 그림자가 따라서 춤추듯이. 그러나 그림자는 몇 번이고 넘어지고 휘청이며 자신만의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애디를 찾아와 귀를 긁는 목소리로 말한다. 사실 너야말로 내게 묶인(tethered) 그림자라고.
<어스>는 전형적인 공포 영화다. 날씨 좋은 시기에 휴가를 떠나면 아주 혼쭐난다는 것을 우리는 <호스텔>에서, <트루스 오어 데어>에서, 혹은 <미드소마>에서 이미 봤다. 한밤중에 정상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집을 침입하는 경우는 <더 퍼지>나 <노크: 낯선 자들의 방문>에서 본 것 같다. 인물들이 통통 튀는가 하면 글쎄. 이 가족은 아주 매력적이지만, 우리는 그들과 구면이다. 애디 가족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국인’들이다. 꼭 심슨네 가족들처럼, 아둔한 아빠와 모성이 강한 엄마, 똑 부러지는 딸과 조금 덜 큰 아들의 조합은 영화 초반부에 이미 관객을 완벽히 영화 속 세계에 적응하게 한다.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 이제 전형적인 가족이 전형적인 장소에서 전형적인 사건으로부터 무사히 벗어나면 이 전형적인 영화의 공포는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어스>의 스토리는 전형적이지 않은 반전을 수반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사실 어린 시절 지상으로 탈출한 복제 인간이며, 레드야말로 지상 출신의 ‘진짜 애들레이드’란 것을 알게 된다. 레드와 사투 끝에 납치당한 아들을 구출한 주인공은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나고, 뒷자리에 앉아 진짜 애디가 길을 잃고 자신과 만나 뒤바뀌었던 때를 회상한다. 그리고 문득 아들을 쳐다보다가 묘한 미소를 짓는다. 아들은 늘 가지고 다니는 주황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가족이 탄 차는 계속 달리고 길에는 복제인간들의 퍼포먼스가 길게 이어진다.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하지만 찝찝한 공포감은 끝나지 않은 채, 손에 손을 잡고 선 복제인간들처럼 불길하게 늘어져 있다.
이 영화가 독창적인 지점은 침입자에 대한 공포로 시작해서 자신에 대한 공포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야기 초반부에서 의문의 침입자는 나와 닮은 남이었다. 물론 얼굴이 닮은 기이한 자들에 대고 아들 제이슨은 “그들은 우리잖아. (They are us.)”라고 말하지만, 사건이 진행되면서 한번이라도 주인공 가족이 침입자들을 ‘나’라고 느낀 적이 있었나 싶다. 게이브는 에이브러햄을 처치할 때 주저했나? 제이슨은 플루토의 화상을 보고 동정심을 느꼈나? 백인 친구의 집에서 그들의 복제 인간을 죽였을 때도 마찬가지다. 친구의 얼굴을 한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고민은 일 분도 할 수 없다. 사유지를 침입하지 말라던 중산층 가족은 이제 다른 중산층 가족의 사유지에서 복제인간 일가족을 전멸시키는 전사로 거듭난다. 그들은 우리지만, 우리는 그들이 아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애디의 숨겨진 과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애디만이 죽어가는 엄브레를 안타깝게 쳐다보고, 플루토를 향해 손을 뻗는다. 애디가 레드를 처치하는 장면에선 그녀는 웃으며 괴성을 지르는데 그 모습이 언뜻 지하인처럼 난폭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아들 제이슨은 안아주는 엄마에게 팔을 두르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고, 엄마의 미소에 화답하는 대신 가면을 쓰고 얼굴을 숨긴다. <어스>의 공포는 여기에 있다. 공포를 야기하는 원인과 그것을 느끼는 대상의 경계는 일차적으로 서로 꼭 닮은 겉모습을 통해 흔들리며, 반전을 통해 완전히 전이되어 버린다.

나와 똑같은 존재인 ‘도플갱어’에 대한 공포는 사실 퍽 오래된 소재다. 이 소재를 가지고 가장 대중적으로 어필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가 나온 게 벌써 1886년의 일이니까. 이렇듯 나를 닮았으나 더 흉포한 존재, 말하자면 무의식 속 리비도에 대한 불안은 오랫동안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변주되어 왔다. 도플갱어 호러는 좀비나 언데드에 대한 공포를 닮았다. 한때 죽어 묻혔던 것들이 기이한 모습으로 귀환하는 좀비 호러처럼, 도플갱어라는 소재에는 내 손으로 목을 졸라 무의식 깊은 곳에 묻어 놓은 흉측한 나, 열화된 나, 어두운 나의 귀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
<어스>는 이 불쾌한 공포감을 극대화하여 귀환하는 자와 나 자신의 위치를 전복 시켜 버린다. 애초에 내가 귀환한 자다. 내가 바로 흉측한 나, 열화되고 어두운 자다. 그래서 관객은 애디의 시점을 공유하며 스토리를 따라가다가, 애디가 과거를 떠올리고 미소 짓는 그 순간 함께 미소 짓는 어정쩡한 처지에 놓여야만 한다. 당황스러운 이 순간이 이 영화가 선사하는 경험이다. 주인공의 시점이 도플갱어의 시점으로 급속하게 전환되고, 우리도 그 순간 도플갱어의 시점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영화 속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생하던 ‘저들’의 이야기가, 나와 나의 무의식 속 도플갱어인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지옥은 나와 나 사이의 가느다란 경계를 따라 존재한다.
그러므로 애디의 불길한 미소는 우리가 ‘진짜 나’라고 느끼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빼앗기는 순간이다. 조던 필 감독의 전작 <겟 아웃>이 신체 강탈의 공포를 담았다면 <어스>는 정체성 강탈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결말 부분에서 인물의 정체성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애디는 누구인가? 애디가 지하인이라는 이유로 이제껏 살아온 모든 일상을 부정해야 하는가? 그러나 애디라는 존재가 분명 따로 존재했는데, 애디의 이름으로 애디의 삶을 살았다고 그가 진짜가 되는가? 한편 레드는 가여운 피해자인가, 미친 사이코패스인가? 그러면 이제까지 애디를 응원한 나는 누구 편인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영화가 끝나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래서 <어스>는 무섭고 거북하다. 쿨한 음악과 강렬한 색감으로 무장했지만, 정체 모를 터널처럼 어둡고 끝이 없다.
영화 초반으로 돌아와서, 의미심장한 인상을 남기는 예레미야 11장 11절의 내용은 이렇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이니••••••.”
아무렴, 우리는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신이 내린 최악의 재앙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