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운영화리스트
어나더 라운드
토마스 빈터버그, 2020
잔뜩 술을 마시고 아침이 되어 숙취에 시달리다 보면, 웬수같은 술을 두 번 다시 마시나 봐라,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러나 술을 끊는 일은 없었다. 언젠가부터는 그런 상투적인 말도 하지 않는다. 과하게 마시는 것을 피하기만 한다면, 술은 언제나 좋은 친구다. 오랜 친구와 절교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술은 평생 가야 하는 친구다. 술과의 적당한 관계를 조절하는 일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어나더 라운드>는 과하게 술을 마시는 청년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덴마크에는 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맥주 한 상자를 비우는 대회가 있나 보다. 호수 둘레를 뛰다가 한 병을 마시고, 토하면 한 병이 추가되고 등의 규칙이 있다. 참으로 무모하다. 열차에 탄 청년들이 병나발을 불고, 승객들에게도 술을 권하며 한바탕 놀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어리석은 난동으로 보일 짓이다. ‘젊음은 무엇인가? 꿈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 키르케고르의 말이 나온 후 <어나더 라운드>가 보여주는 청년들의 음주 장면은 유쾌하다. 다음 날, 어제의 난동을 알게 된 학교에서는 이후 학생들의 음주를 금지하지만.
고등학교 교사인 마르틴은 평범하고 지루한 중년을 보내는 남자다. 같은 학교의 교사인 니콜라이, 페테르, 톰뮈도 다르지 않다. 인생의 방향은 이미 결정되었고, 새로운 길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생의 마지막까지 변화는 없을 것이다. 그 중 마르틴의 권태가 가장 심각하게 보이기는 한다. 역사 수업에서 했던 말을 또 하고, 진도를 잊어먹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 학생들이 단체로 문제제기를 하면서 심각한 위기에 몰린다. 마르틴의 인생에는 아무 열정이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니콜라이의 생일, 함께 술을 마시던 네 명의 남자는 의기투합한다. 심리학을 가르치는 니콜라이는 새로운 학설을 알려준다. 인간의 혈중 알콜은 늘 부족한 상태이기에, 알콜 농도 0.05%가 되면 보다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것이다. 막다른 길에 몰린 마르틴은 술을 마시고 수업에 들어간다. 그러니 정말로 달라진다. 열정적으로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학생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진다. 가정에서도 적극적이고, 활기차고, 다정해진다. 소원했던 아내와의 관계도 훨씬 좋아진다.
니콜라이, 페테르, 톰뮈도 마르틴의 길을 따른다. 적당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어떤 문제가 있어도 그저 귀찮아서 외면했던 과거와 달라진다. 적극적으로 학생들의 상황에 개입하고,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네 남자의 변화, 활약상은 그야말로 놀랍다. 하지만 영화가,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극이 예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정도는 누구나 예감한다. 모든 이익, 행복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한때 덴마크는 세게에서 가장 술을 많이 마시는 나라였다. 지금은 러시아나 한국이 더 많이 마신다고 한다. 술에 대해서는, 우리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잘 알고 있다. 워낙 술을 많이 먹는 인간이 많다 보니, 주취 감경이라는 비합리적인 법률까지 존재할 정도다. 술을 마시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으니 벌을 감해준다는 것이다. 강제로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자기가 즐거워 마신 술에 취해 타인에게, 사회에 해악을 끼쳤는데 왜 죄를 용인해주는 것일까. 자신의 행복을 위해 술을 마셨고, 그로 인해 타인에게 죄를 지었다면 스스로 갚아야 한다. 술에 지나친 관용이나 애정을 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술의 긍정적인 효과에 도취한 마르틴과 친구들 역시 가혹한 결과를 맞는다. 술은 적당히 먹으면 약이고, 과하면 독이다. 모든 상황이 좋아지자, 더 좋아지기 위해 그들은 술을 더 마신다. 과음을 한 탓에 학교에서 실수를 하고, 더 마시다 기억까지 잃어버린다. 감정을 멋대로 발산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마르틴의 아내는 떠나버리고, 톰뮈는 직장을 잃는다. 당연한 결과다. 욕망의 끝은 언제나 파멸이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모든 상승은 언젠가 속절없이 낙하한다.

<어나더 라운드>는 결론을 말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세상의 법칙 같은 것은 없다. 누군가는 평생 혈중 알콜농도 0.05%를 유지하며 흥겹고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인생을 포기할 수도 있다.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 <어나더 라운드>는 네 명의 친구들이 걸어가는 길을 담담하게 따라갈 뿐이다. 1995년, 라스 폰 트리에와 함께 도그마 선언을 주도했던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어나더 라운드>는 순수하다. 지나친 의미 부여가 없고, 치밀하게 상징을 파고들지도 않는다. 관습적으로 인물들을 나열하지도 않는다. 익숙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상을 느슨하게 따라가면서, 결국은 빛나는 성찰의 순간을 던져준다. 희망도, 절망도 함께 껴안는다. 도그마 선언은 희미하게 지워졌지만, 빈터베르그는 여전히 정갈한 눈으로 인생을 바라본다.
마지막 장면, Scarlet Pleasure의 "What A Life"가 흐르면서, 한때 재즈 발레를 배웠다는 마르틴이 춤을 춘다. 그들이 가르친 학생들이 서로 졸업 축하를 하는 흥겨운 거리 풍경 속에서, 한동안 멀리 했던 술을 다시 마시며 춤을 춘다. 마르틴은 춤에 빠져들어 격정적으로 몸을 움직인다. 톰뮈는 죽음을 선택했고, 마르틴은 안정된 생활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마르틴이 더 옳은 선택을 했다거나,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은 때로 가혹하게 벌을 내린다. 아무 죄가 없어도, 아무리 성실하고 선하게 살았어도 감내해야만 한다. 술 때문이 아니라, 운명이 그들을 서로 다른 길로 이끌었다. 술은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어나더 라운드>는 취한다는 것의 매혹을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한다. 동시에 빠져들 수 있는 지옥의 구렁텅이까지. 모든 것이 인생이고, 무엇이 어느 순간 나에게 다가올지는 알 수 없다. 매 순간 생각하고, 매 순간 선택하며 나아갈 수밖에. 그러니 때로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취해야만 한다. <어나더 라운드>의 매순간이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