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연재
언어를 건너 재생을 향하여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2022 영화 글쓰기 키트: 영화 기자가 알려주는 리뷰 작성>의 과제 선정작입니다.
이 영화를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하얀 눈밭 위에 놓인 빨간 자동차일 것이다. 이는 상처받은 두 사람이 만나 치유하는 서사의 정점이다. 끌어안은 두 사람의 형상에서는 다소 직접적이고 고전적인 위로와 연대가 묻어난다.
감독은 전작 <아사코>, <우연과 상상>에서도 두 인물의 만남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했다. 아사코는 우연히 전 남자친구와 동일한 얼굴의 남자를 만났다. <우연과 상상>3부의 나츠코는 우연히 첫사랑과 닮은 여자를 만난다. 여기 <드라이브 마이카>도 예외는 아니다. 우연히 배정된 드라이버는 꼭 가후쿠처럼 가족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여기서도 가후쿠가 우연의 힘을 빌려 위로받고 나아가도록 만들까? 앞서 언급한 설산의 이미지를 보면 이는 결과적으로 사실이다. 하지만 <드라이브 마이카>에는 차별점이 있다. 그동안의 서사에서 연기자는 주인공이 아니라 상대편에 부여된 몫이었다. 주인공은 첫만남에 상대를 오인하는 쪽인 관객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인공 가후쿠가 아예 연극배우로 설정되었으며 그의 연극은 극중극 이상의 존재감을 갖는다. <아사코>와 <우연과 상상>을 떠올리면 주인공을 미사키로 설정하는 서사도 있음직하다. 그녀가 연극배우인 가후쿠와 그의 연극을 차례로 만나 상실을 극복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왜 이번에는 관객, 즉 연기를 듣는 위치(청자)의 시선이 아니라 연기자, 즉 연기를 발화하는 위치(화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여줄까.
“그의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그렇게 되면 난 이 역에 자신을 바칠 수가 없어.” 부인 오토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이어지는 씬은 가후쿠의 클로즈업한 눈물도, 오토가 떠난 빈 집도 아니다. 그것은 연극<바냐 아저씨>의 실연 장면이다. 여기서 가후쿠는 공연 도중 연기를 중단한다. 무대에서 뛰쳐 나온 가후쿠의 등 뒤로 “나도 말할거야. 내 아내는 달아났다고.”라는 대사가 지나간다. 영화를 위해 발췌된 <바냐아저씨> 대사들은 매번 가후쿠의 상황에 부합한다. 하지만 이를 보고 대사가 곧 그의 속마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1차원적이다. 그보다는 연기가 불가능한 상태를 선언하는 이 장면이 영화 2부의 시작임에 집중해보자. 시간이 흘러 2부의 마지막은 이전처럼 연기가 가능해진 상태의 가후쿠를 보여주며 닫힌다. 사실 그는 배우들의 뒷모습만 보고도 ‘무언가 일어났음’을 캐치하는 능숙한 연기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된 2부는 그가 대사를 발화할 수 없는 순간에서 시작해 대사를 발화할 수 있는 순간까지의 과정이다. 영화는 연기불가능 상태에서 출발해 가능 상태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을 우리가 따라가게 만든다.
발화의 사전적 의미는 ‘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현실적인 언어 행위를 하다’이다. 부인 오토가 죽던 날, 가후쿠는 자동차 안에서 시간을 끌면서 대화를 미루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실은 가후쿠를 이 상황 속에 가둔다. 오토는 첫 등장부터 흐릿한 형체와 또렷한 목소리를 보여주었고 딱 그 모습대로 자동차 속에서 반복재생된다. 2년 후, 달리고 있는 자동차의 바퀴는 여전히 카세트테이프의 릴과 겹쳐 보인다. 가후쿠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청자인 오토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바냐아저씨’의 자리를 빌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후일 미사키에게 ‘아내는 2년 전 죽었어. 그 테이프를 듣기가 무서워졌니’라고 물은 적이 있다. 2년 전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듣는 행동은 스스로도 무섭다고 생각한 걸까. 그럼에도 오토에게 할 말이 남아있는 한 가후쿠가 선택할 수 있는 언어는 ‘바냐의 언어’밖에 없다.
가후쿠가 연출하는 연극 <바냐아저씨>에는 독특한 점이 눈에 띈다. 다국적 배우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대사를 하되 연극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점이다. 2부가 새롭게 시작되는 표면적인 이유는 가후쿠가 이 ‘다국어 연극’의 연출직을 위해 히로시마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곧 2부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영화를 추동하는 힘이다. ‘바냐의 언어’에 갇힌 가후쿠의 앞에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언어들이 기다리고 있다.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터뷰에서 “연기의 바탕에는 불안이 깔려 있다”는 사고방식을 밝힌다. 이 말은 야외 리허설 장면에서의 연출가 가후쿠를 떠올리게 한다. 연기 현장의 하마구치 감독과 가후쿠는 둘 다 ‘날 것의 섬세한 무언가를 어떻게 지켜낼지’ 고민하며 그 불안을 누그러뜨리려 노력한다. 야외 리허설 장면에서 소냐와 엘레냐 역의 배우들은 연기 도중 가후쿠를 등지고 선다. 가후쿠는 연기를 볼 수 없음에도 확신있게 “방금 무언가가 일어났어”라고 외친다. 여기서 가후쿠가 발견한 ‘무언가’를 탄생시킨 주체는 잎사귀를 주워 내민 이유나의 손이다. 수화언어로 연기하는 이유나의 등장마다 우리는 그녀의 손이 보여주는 움직임에 빨려 들어간다. 첫 등장인 오디션 장면에서 카메라는 ‘손의 언어’를 복잡한 동선과 숏의 변화 없이 차분하게 보여준다. 다른 배우들의 다국어 오디션이 카메라로 쪼개지고 붙여지는 동안에도 침묵 속 ‘손의 언어’는 굳건하다. 유나와 윤수가 마련한 식사자리 장면 또한 마찬가지이다. 카메라가 나머지 세 사람 의 등을 비추며 어둠 속에 위치할 때도 그녀의 손은 중앙의 빛나는 공간에 놓여있다.
가후쿠가 히로시마에서 만난 새로운 언어는 ‘손’외에도 존재한다. 그 중 한 가지는 침묵하되 매번 섬세한 응답을 보내 주는 드라이버 미사키의 언어이다. 미사키는 어디든 가 달라는 가후쿠의 질문에 긴말없이 ‘있다가 없어진 흔적의 공간’으로 차를 몬다. 가후쿠의 과거사를 들은 뒤엔 “소중하게 대해 온 게 느껴져 그의 자동차가 좋다”는 말을 고른다. 그 정점은 가후쿠가 생각할 만한 장소를 물을 때 그녀가 자동차를 툭툭 두드린 몸짓이다. “차 안이 좋겠네요”같은 말은 구태여 하지 않는다. 어쩌면 겉으로는 상응하지 않는 듯 보이는 문답이지만 드라이버 미사키가 가진 ‘운전수의 언어’는 결국 가후쿠를 아픔에서 건져낸다. 그를 설산 위의 빨간 자동차까지 데려간다. 다시 하마구치의 말로 돌아와 보자. 섬세한 연기의 탄생은 불안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 불안은 ‘바냐의 언어’를 붙잡고 싶은 가후쿠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정해둔 청자를 놓치기 싫은 불안감이다. 자신이 선택한 언어는 곧 자신이 선택한 청자와의 연결통로를 만든다. 이 다국어 연극 속에서는 상대배우의 낯선 언어가 끊임없이 낯선 연결통로를 만들고 있다. 가후쿠는 이 연극의 연출가로서 배우들이 감정을 제외하고 대본의 글자만 읽게끔 지시한다. 미리 결정하고 외워서 재현하는 감정표현과 그것을 서로의 큐사인으로 사용하는 순간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정작 가후쿠 자신은 그것에 실패했다. 그는 오토가 가진 ‘꿈의 언어’를 습관적으로 되돌려 주었을 뿐이다. 꿈이야기의 소녀처럼 징표를 남기고 싶어한 오토의 부유를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가후쿠가 ‘대본의 언어’뒤로 숨고, 오토가 ‘꿈의 언어’뒤로 숨었을 때 둘은 ‘좀 더 제대로 상처 받았어야’ 했다. 경계했어야 했다. 야외 리허설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유나가 상대 배우를 등 뒤에서 껴안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는 불쑥 상대의 눈 앞으로 수화를 등장시킨다. 통상의 음성언어에서는 두 사람이 한 방향으로 서 있을 때 껴안지 않아도 의사 전달이 가능하다. 하지만 낯선 손의 언어는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나뭇잎을 주워 주며, 바냐 아저씨의 가슴과 턱을 두드리며 말한다. 이 낯선 연결통로의 생성은 ‘무언가’를 만든 힘이고 가후쿠와 미사키가 서로를 안아주게 한 동력이다.
“실제로 섬세한 연기가 탄생하는 것과 가후쿠를 비롯한 상처받은 영혼들이 재생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 전개가 딱 맞아떨어진다”는 감독의 대담 속 한 구절을 통과하며, <드라이브 마이카>의 차별점에 대한 실마리가 보인다. 물론 영화는 전작들의 장기인 ‘어긋남과 기다림’의 테마를 가후쿠-오토의 관계 속에 능숙하게 녹여낸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숏은 ‘오토를 외면한 가후쿠가 상처를 직면하고 나아간다’는 하마구치 식 서사구조 역시도 또렷히 전달한다. 다만 이번에는 여기에 연기자 가후쿠의 시선을 덧붙인다. 연기 불가능 상태인 가후쿠에서 시작해 연기 가능상태인 가후쿠에 도착하는 과정. 가후쿠가 연극을 둘러싼 새로운 언어들을 만나 불안을 겪고, 그 불안에서 탄생한 섬세한 위로를 경험하는 과정. 왜 이번에는 맞은편인 연기자의 시선을 경험하게 하면서 이 서사구조를 보여주었을까.
<아사코> 속 아사코의 맞은편에는 새 남자친구인 료헤이가 있다. 료헤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아사코가 전 남자친구와 갔던 사진관에 놓인다. <우연과 상상> 속 나츠코의 맞은편에는 미카가 있다. 미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대화 속 첫사랑의 자리에 놓인다. 이때 주인공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상대를 오인하고 맞은편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가후쿠의 시선을 경유하며 이 시간이 단순한 오인이나 관찰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연기를 ‘요구’하는 중임을 안다. 맞은편의 상대에게 낯선 언어와 낯선 연결통로를 제안하는 중임을 보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 제안이 상대방의 재생을 촉구한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이는 그동안 스크린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관객석에도 해당된다. 우리도 가후쿠처럼 하마구치 영화에서 주인공의 맞은편에서 자리한 채 낯선 언어를 제안받아 재생을 경험했을지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냐는 야외리허설 장면과 동일한 정면샷으로 가후쿠를 안아준다. 하지만 객석을 등을 지는 것이 아닌 정면으로 마주보며 안아준다. 그렇게 연습 당시 두 배우 사이에 일어난 ‘무언가’가 드디어 객석의 미사키에게도, 스크린을 보는 우리에게도 허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