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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 시점의 계보

헤어질 결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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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11번째 장편영화 <헤어질 결심>(2022)의 제목은 주체의 ‘의지’를 강조한다. 제목의 주체는 이별을 방해하는 것에 대항해 자기 의지를 다지고 필요한 전략을 실행하고 목표에 도달하고자 한다. 제목만 보면 이 영화는 낭만적인 주체의 세계 대 자아 혹은 자율적인 이성 대 (무)의식적인 욕망 간의 투쟁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의 실체는 정반대다. 인간중심적인 주체의 의지를 강조한 이 제목은 반전을 위한 ‘미끼’다. 실제로 영화가 강조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들 사이의 정서적이고 투쟁적인 관계를 넘어,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 인공과 자연, 물질과 비물질, 감정과 행위, 데이터와 의미, 사건과 시스템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행위자들(actors)의 복잡한 배치와 네트워크이다.

그렇기에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영화와 가장 닮은꼴을 찾아본다면 <파란만장>(2011, 33분)일 수 있다. 이정현과 오광록 주연의 <파란만장>은 KT의 제작지원을 받아 미디어아트 작가인 박찬경과 함께 작업한 단편으로 당시 신형이었던 아이폰4로만 촬영을 해서 극장 개봉을 했다. 이 영화는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던 시점에 전문가적 역량을 어디까지 구현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캠페인 영화였다. 두 감독은 각종 취미 및 생활기계가 하나의 기기 안에 통합돼 있으면서도 휴대성과 편재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개별 기기들의 고성능 라인에 근접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있던 스마트폰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귀신의 시공간에 접속할 수 있는 영매의 역량으로 은유화 한다. 즉 비인간 기계와 초월적인 영적 존재 사이의 경계를 허물면서 이질적인 것들을 채널링하는 그들의 공통역량을 조명한다.
 

<헤어질 결심>은 짐짓 ‘나’의 정체성을 허물 정도로 깊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의 파괴적 관계에 집중하는 전통적인 멜로드라마를 가장한다. 그러나 자아와 타자의 경계와 정체성의 “붕괴”는 인간들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시대 행위자들의 경계는 어떤 면에서 이미 ‘나’ 아닌 것에 매개되고 ‘지금-여기’ 아닌 시공간에 연결되어 있기에 이미 붕괴되어 있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근대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감정언어로 최종적으로 번역되기 이전의 현상, 즉 다층적으로 배치되고 네트워크 되어 있는 행위자들과 그들이 모이고 교차하는 마디점들(nodes)의 감각적 민족지학에 더 관심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의지(의식의 의미화)와 감정(정동의 의미화)이 있기 전의 사건들을 관찰한다. 경찰인 해준이 졸음 방지를 위해 동료인 수완(고경표)과 통화를 하며 밤 운전을 하는 장면에 나온 대사는 인간주체의 의지를 먼저 앞세우는 습관에서 벗어난 인과관계의 전복을 보여준다. 주체로서의 ‘너랑 나랑’을 강조하는 수완에게 해준은 “잠복해서 잠 부족이 아니라 잠이 안 와서 잠복근무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영화는 이러한 경계의 무너짐과 네트워크 현상을 강조하기 위해 의인화를 탈피한 비인간 중심의 응시를 곳곳에 배치하고 이질적 시공간을 오고가며 낯설게 사건들을 연결하는 교차편집 기술을 부각시킨다. 특히 시체와 휴대폰부터 디지털 워치, 소프트웨어, 유튜브 플랫폼, 오늘날의 영화체계, 산과 바다, 폭력적이고 잔인한 이민 체계와 가부장제까지 무생물과 비물질의 응시가 이 영화에선 탈인칭 쇼트뿐 아니라 시점 쇼트로도 작동한다. 그래서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와 감정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영화 전반적으로 매우 소란스럽다(내가 끝내 이 영화에 몰입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뿐 아니라 다종다양한 무생물 행위자들도 네트워크에 연결된 자기의 행위성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시끌벅적한 눈들은 일종의 평등함을 부여받는다. ‘인간중심의 좌표를 벗어난 주체의 해체, 비인간적 주관성은 인간도 물질적이고 창발적인 세계의 질료 중 하나가 되게 만든다.’ (스테이시 알라이모)

비인간 시점은 영화사에서 여러 감독들에 의해 다양한 목적을 갖고 사용되어 왔다. 동물, 유령, 신, 사물들, 자연 풍경, 기계와 시스템은 비인간 시점을 표현해온 대표적 행위자들이다. 이 비인간-눈들은 장르적이든 그렇지 않든 대개는 친밀하고 낯선 기이함(the uncanny)의 느낌을 통해 자아와 타자, 내부와 외부,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흔들면서 불안정성을 만드는 데 기여해왔다. 비인간 시점의 미학적 실천은 최근 들어 한층 빈번해지고 있는데 주요하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기후위기에 대한 발본적 성찰로 인간중심성을 해체하려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디지털화로 인한 물질적인 것의 재규정이다.
 

<헤어질 결심>의 비인간 시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사랑으로 번역된 것의 네트워크에는 두 사람의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인간과 비인간의 동맹이 있다. 영화는 그것을 종종 쇼트와 역쇼트를 하나의 쇼트 내에 보여주는 유사-주관적 시점으로 보여준다. 크레딧 타이틀 이후 나오는 첫 씬에선 서래의 남편인 기도수의 시체의 눈 안쪽으로부터의 응시를 보여준다. 시체 내부로부터의 시점으로 인해 눈동자의 실핏줄과 망막 위를 기어 다니는 클로즈업된 개미가 보인다. 그리고 저 멀리 역쇼트에 해당하는 암벽을 오르는 해준과 수완이 한 프레임에 담기게 된다. 쇼트에 해당하는 보는 주체와 역쇼트에 해당하는 보이는 대상이 한 프레임 안에 담긴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적인 주관적 시점이 아니다. 시체를 ‘보고 있는 주체’로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영화는 보고 기록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기계와 같은 시스템으로 표현할 뿐이다. 해준이 그 시체를 보지만 시체 또한 해준을 보고 있다. 그 눈은 살인의 증거를 보았던 눈이기도 하고 살아있을 적에 서래를 폭력적으로 소유하고 통제하던 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눈이 현재 어떤 인간적인 욕망과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표현은 특히 병원의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띄워진 서래 몸의 멍든 사진을 보며 해준이 마우스로 이미지를 확대해 픽셀이 가시화될 때, 휴대폰으로 서래와 문자를 나누거나 녹음된 음성파일을 들을 때 두드러진다. 화면 내부로부터의 시선, 즉 시스템의 시선은 해준과 기계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해준과 서래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이포와 부산에 떨어져 있을 때, 해준은 밤에 잠이 오지 않자 서래와 문자를 주고받는다. 서로만 아는 방식으로 농담을 할 정도로 관계가 발전해 가는 상황에서 서래가 문자를 쓰고 있는 중임을 표시하는 “…”는 해준의 마음을 동요시킨다. 그것은 기대와 설레임 등으로 언어화할 수 있다. 이 순간 카메라는 다시 휴대폰 내부로부터의 시선을 유지하며 스크린에 표시된 “…”와 휴대폰 스크린을 보고 있는 해준의 얼굴을 디졸브 시킨다. 해준은 “…”의 표현(농도, 깜박임, 지속시간 등)을 포함한 휴대폰의 문자 시스템과 동맹 중이다. 서래와 해준이 서로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번역기와 녹음기를 사용하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번역기 사용으로 인해 둘의 표현은 문어체에 가깝거나 직설적이게 되고, 심지어 오역을 만들어 낸다. ‘마음’은 ‘심장’으로 번역된다. 사극 드라마를 통해 배운 서래의 한국어는 고풍스럽다. 해준은 서래가 ‘꼿꼿해서’ 좋다고 고백한다. 소프트웨어와 미디어의 사용은 서래를 더 ‘꼿꼿한’ 이미지로 만들어 준다.
 

해준과 서래가 이포에서 재회한 후, 해준은 서래가 입은 옷의 색상에 집착한다. 그 옷은 청색인가, 녹색인가. 서래를 목격한 사람들은 동일한 드레스를 저마다 달리 증언한다. 그리고 해준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진다. 이 장면은 다분히 2015년 즈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드레스의 색상 논란을 염두에 둔 농담이다. 당시 같은 드레스를 놓고 흰색 바탕에 금색 줄무늬로 보는 사람들과 검은색 바탕에 파란색 줄무늬로 보는 사람들로 나뉘어 뜨겁게 논쟁을 했다. 드레스의 주변 밝기가 동일한 드레스를 다르게 보이게 한 것이다. 인간은 대상만을 떼어내 색을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밝기에 맞춰 원래 색을 판별하려 한다. 뇌는 환경에 맞춰 색체보정을 하고 여러 번 보다보면 학습에 의해 색은 새로운 정보에 상관없이 고정된다. 해준은 서래를 판단함에 있어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 때마다 지속적으로 조정한다. 해준은 끊임없이 정보를 찾고 주변 환경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며, 사건이 종결되기 전까지 의미는 고정되지 않은 채 열려 있어야 한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는 이상 잠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해준은 꾸준하게 정보를 잘못 읽는다(서래의 몸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운다고 착각했던 것을 생각해 봐라). 오늘날의 세상에서 정보는 쉴 틈 없이 생산되고 또한 왜곡되기 때문에 세계(사건)의 종결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서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종결하는 법을 안다. 그는 살인자다. 그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삶마저 언제 끝낼지를 주체적으로 정하려 하는 이다. 서래는 주변 환경에 크게 휘둘리지 않고 욕망을 응시하는 이다. 그렇다고 비인간 네트워크를 거부하는 자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가 갖고 있는 기기들을 목적에 맞게 이용한다. 스마트폰의 위치기록 기능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 기능을 역으로 사용해 정보를 기록하고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든다. 시스템에는 구멍이 있다. 해준은 ‘사랑’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이 없지만 서래는 해준이 범행증거를 없애버리라고 한 말과 해준 자신이 붕괴되었다는 말을 ‘사랑’으로 번역한다. 해준이 정보 수집가라면 서래는 번역하는 사람이다. 해준이 미결자라면 서래는 종결자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상대적으로 꼿꼿한 사람이고, 스스로 소프트웨어 혹은 시스템이 될 줄 아는 사람이다. 서래는 해준이 멀리 바다에 던져버리라던 휴대폰 대신 스스로를 바다에 묻는다. 위치기록 소프트웨어에서 그의 위치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사랑의 네트워크에 구멍을 낸다. 이제 사건 혹은 의미화의 종결은 구멍으로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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