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영화 <미망> 제작기
영화 <미망> 하성국 배우, 이명하 배우
2019년 여름, 종로에서 공간 드로잉을 배우고 있었다. 배워두면 언젠가 영화의 스토리보드를 작업할 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고, 이 또한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이라 여겼다. 그 그림 수업에는 4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1. 지울 수 없게 펜으로 그릴 것.
2. 틀리더라도 그대로 두고 계속할 것. 고치기 위해 선을 덧칠하면 오히려 지저분해질 뿐, 다 그리고 나면 조금 틀린 건 아무것도 아니다.
3. 한 번에 할 수 있는 만큼 선을 최대한 길게 쓸 것. 선을 짧게 사용하는 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4. 시작을 하면 반드시 완성할 것.
이 원칙은 삶의 원칙처럼 다가오기도, 영화를 만드는 자세로도 다가왔다. 돌이켜보면 이 네 문장이 코로나라는 미로를 통과하는 길잡이가 된 것 같다.

영화 <미망> 이명하 배우
수업을 듣기 위해 종로를 걷던 어느 날.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뒤돌아 마주한 얼굴은 배우 이명하였다. 반갑게 인사하는 그녀는 서울극장에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길을 잘 알지 못했고, 나는 그림 그리며 광화문과 을지로, 종로 일대의 골목들을 속속들이 알게 된 덕분에 그녀가 예매한 시간에 늦지 않도록 길을 안내해 줄 수 있었다. 서울극장에 도착한 우리는 다음에 꼭 영화를 찍자는 인사와 함께 헤어졌다. 그 인사가 ‘영화 그리기’의 시작이었다.

영화 <미망> 이명하 배우
그해 여름, 선을 지울 수 없게 선택했던 도구는 카메라가 됐고, 이명하 배우와 헤어지며 약속했던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길을 헤매던 남자와 여자가 우연히 만나, 서울극장을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촬영을 마치던 날, 나는 할 수 있는 한 선을 최대한 길게 쓰라는 두 번째 규칙을 떠올렸다. 영화 속, 서울극장 앞에서 여자와 헤어져 다시 발걸음을 돌린 남자는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서울극장에 간 여자는 어떤 영화를 보고, 누구를 만나게 됐을까. 그 질문으로 이야기는 다음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각자의 시간을 보낸 뒤 두 사람이 어디선가 다시 만나 함께 걷게 되는 구조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그러나 영화를 곧바로 촬영할 수 없었다. 제작비는 첫 번째 파트를 촬영할 수 있는 정도가 전부였고, 후반작업을 하면서 다음 파트를 촬영할 제작비를 준비하고 있을 때 코로나가 시작됐다. 그로 인해 제작비 마련도 어려웠을뿐더러, 촬영을 위한 인원들이 모일 수 없었다. 게다가 다음 챕터는 서울극장에서 시작해야 했는데, 실내 촬영 협조 또한 불가능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이 계속됐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것이라는 예상은 때마다 빗나갔다. 그럼에도 시작을 했기에 반드시 끝을 내야 했다. 그것이 시작하며 다짐한 규칙이기 때문이었다.

영화 <미망> 하성국 배우
앞서 촬영한 영화를 우선 편집하여 단편으로 선보이고, 그 결과를 발판 삼아 다음으로 이어가야겠다는 막연한 계획을 세웠다. 영화는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됐다. 첫 번째 파트는 <달팽이>라는 제목으로 관객들과 영화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다음 시나리오를 더 보완해 나갔다.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는 환경은 조성되지 않았고, 생계를 위해 조감독으로 일하던 공연 극장마저 코로나를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영화를 찍기에 앞서 생존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문을 닫는 극장에 대한 아이디어를 두 번째 에피소드로 끌어오게 된 계기가 됐다.
오랫동안 공연을 이어왔던 무대를 추억으로나마 남기기 위해 배우들과 스태프들과 함께 단편 영화를 만들었다. 후에 서울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또 하나의 공간이 사라지기 전에 그 공간을 담아내려는 마음을 되새겼다. 영화를 만들기 위한 환경은 작아져갔지만, 이야기와 영화를 통해 사라지는 것들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커지는 시기였다.
상업 영화와 독립 영화 구분 없이 제작에 착수할 수 없어 생계 전선에 뛰어든 많은 동료들처럼 나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야 하는 일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견뎌낸다는 개념이 아닌,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날들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코로나 이전에 영화를 만들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됐다. 이듬해인 2021년, 영화진흥위원회는 코로나를 극복하기 위한 지원 사업을 실행했고 많은 영화인들이 참여했다. 나 또한 그 사업을 통해 한편의 단편 영화를 만들었는데, 다시 동료들과 현장을 실감하며 멈춰있던 영화라는 선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동료들은 이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영화를 찍을 수 있는지 궁리했다. 그리고 작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토대로 영화를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를 낸 친구의 영화를 제작했다. 아마도 코로나 이후 독립영화들이 주로 한 공간 혹은 야외에서 소수의 인물들이 끌어가는 대화 위주의 이야기였던 것은 이처럼 환경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 <미망> 박봉준 배우, 이명하 배우
2019년 촬영을 시작하고 그 뒤로 두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하고 한 편의 장편영화에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시간은 흘렀고, 서울극장은 결국 문을 닫았다. 그간 준비했던 시나리오는 제작지원을 받게 됐다. 모든 분량을 제작할 만큼의 제작비는 아니었지만, 서울극장의 외관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촬영을 시작했다. 코로나 또한 소강상태로 서울시는 실외 마스크 해제를 실시했다. 3년 만에 다시 모인 스태프와 배우들, 그리고 영화의 배경이 될 공간들은 비슷한 듯 달라져 있었다. 달라도 지울 수도 없었거니와, 덧칠하여 지저분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길게 찍고자 시작했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내며 나아간 영화는 4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끝을 보았다.
2023년, 영화 <미망>은 전주국제영화제 워크인프로그레스에서 특별상을 수상했고,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첫 공개될 예정이다. 완성된 영화에는 코로나로 인해 당연했던 일상의 순간들이 사라졌던 경험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그로 인해 이야기는 뚜렷한 사건이 아닌 작은 일들과 순간의 정서로 이루어져 있다. 관객분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각자의 일상을 떠올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극 중의 대사에 담았다. 극장 문을 열고 나가면 여러분의 소소한 일상이 한 편의 영화로 계속되길 바란다는 대사처럼, 코로나를 보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의 삶이 소중하게 계속해서 이어지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