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관(제국관, 중앙영화극장, 동보문화극장, 동보중앙극장, 중앙극장)
일제강점기극장 14
중앙관은 1921년 10월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에서 영락정 상품진열관 앞에 세운 영화관이다.
중앙관을 세운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朝鮮活動寫眞株式會社)는 1920년 8월 나카무라 히코(中村彦) 외 두 명이 영락정 상품진열관 건너편에 극장을 짓기로 출원하자, 이를 계기로 세키상점(關商店)의 운영주이자 경성상업회의소 상의원 대표인 세키 시게타로(關繁太郞)와 마쓰모토 민스케(松本民介), 이와모토 요시후미(岩本善文), 후지토미 구니다로(藤富國太郞), 나리키요 다케마쓰(成淸竹松), 사노 히고쿠라(佐野彦藏), 미나미 겐베이(南源兵衛) 등 경성의 일본인 실업가들이 중심이 되어 자본금 50만원에 불입금 12만 5천원 규모로 세운 흥행 목적의 주식회사이다.
1921년 4월 설립한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에서는 활동사진관 신축에 나서 1921년 10월 15일 중앙관을 개관했다. 개관 당시 중앙관은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 직영관이자 제국키네마(帝國キネマ) 특약관으로 “막대한 자본과 좋은 입지조건, 그리고 비교적 잘나가는 변사와 오케스트라로 경성 키네마계를 지배”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앙관에서 상영한 필름은 제국키네마에서 제작한 일본 영화와 이태리 영화가 중심이었다.
중앙관 신축을 시작으로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는 경성과 인천에 있는 활동사진관을 인수하여 흥행 및 배급을 강화하고 영화촬영소를 세워 영화제작에 나설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풍부한 자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의 이러한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앙관에 근거지를 둔 영화제작 조직은 극동영화구락부(極東映畵俱樂部)였다. 극동영화구락부는 1922년 9월,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의 주요 인물들인 나리키요 다케마쓰, 이와모토 요시후미, 이와타 센타로(岩田仙太郞)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나리키요 다케마쓰의 아들인 쇼치쿠 촬영기사 나리키요 에이(成淸榮)가 전속 촬영기사였으며 중앙관에서 연쇄극을 공연했던 오미 후미노스케(五味文之助)가 이끄는 연쇄극단이 전속 배우로 합류하였다.
극동영화구락부에서는 가장 먼저 경성일일신문사(京城日日新聞社)에서 주최한 오사카마이니치신문사(大阪毎日新聞社)와 만철(滿鐵) 간의 야구경기의 실사 영화를 촬영했고 이어 극영화 <국경>을 제작했다.
극동영화구락부에서 제작한 <국경>은 조만국경 지역을 배경으로 조선인 무장독립운동가들로 상상할 수 있는 마적단을 토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23년 1월 13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조선인 학생들의 야유로 인해 상영이 중단되었고 이후 상영이 재개되지 않았다. 영화 개봉 하루 전, 경성 시내에서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조선인을 자극시킬 만한 내용의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경찰이 금지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극동영화구락부는 제대로 된 활동 없이 문을 닫았다.
1920년대 중앙관은 제국키네마의 영화를 비롯해 마키노키네마, 동아키네마 등의 영화를 상영했다. 개관 당시 중앙관은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 직영으로 제국키네마의 영화를 상영했는데 1922년 10월에는 제국키네마가 중앙관을 직영하게 되면서 이름을 제국관(帝國館)으로 바꾸었다. 제국키네마에서는 새로운 경영진을 보내 중앙관을 운영했는데 개관 당시 경영을 맡았던 히라노 후쿠마쓰(平野福松)를 비롯해 나카야마 로게쓰(中山朧月)가 다시 경영자로 들어왔으며 변사진도 새롭게 바꾸었다. 하지만 제국관으로의 전환은 큰 효과를 얻지 못한 채 적자만 누적되자 문을 닫게 된다.
1923년 제국관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이름을 중앙관으로 다시 바꾼 인물이 오모토(大本)와 모리(森) 두 사람이었다. 이들 새로운 경영자들은 제국키네마와 관계를 끊고 오사카로 건너가 쇼치쿠 을부(乙部)영화를 수입하기로 하고 쇼치쿠 특약관으로 전환했으나 경영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관은 경성의 유서 깊은 여관인 파성관(巴城館) 주인이자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의 주주인 마쓰모토 민쓰케가 경영권을 인수한 후 후지모토 쇼죠(藤本省三)를 지배인으로 내세워 경영을 시작했다. 후지모토는 쇼치쿠 영화를 대신하여 마키노키네마의 영화를 상영하였는데 마키노 영화에 대한 호평이 늘어나면서 중앙관의 운영은 점차 안정되었다.
1925년 마쓰모토 민쓰케가 중앙관 운영에서 손을 떼고 마키노키네마와 합병한 도아키네마(東亞) 직영으로 바뀌었으나 마키노 쇼죠가 도아키네마에서 나와 마키노프로덕션을 설립하게 되자 중앙관은 도아키네마 직영에서 마키노프로덕션 직영으로 바뀌게 된다. 자연히 중앙관의 영화도 마키노 계통의 영화를 상영하였다.
이 시기 중앙관은 다른 영화관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불황과 1926년부터 시행된 필름검열 수수료 부담으로 인한 비용 증가 등으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따라 1930년 8월 15일부터는 위층 20전, 아래층 10전의 입장료를 받는 등 프로그램에 따라 입장료를 탄력적으로 운용하면서 경성의 일본인 상설관의 가격 인하를 주도하였고 캐러멜회사와 제휴하여, 입관자들에게 캐러멜을 위층 6개 아래층 4개씩 나눠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중앙관은 1930년 1월 경성의 일본인 극장 중 처음으로 토키영화를 상영하였으며 1930년 4월 25일 데이코쿠키네마의 히트작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가>(何が彼女をさうさせたか)를 시작으로 데이코쿠키네마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조선극장에서도 상영되었는데 5년여 동안 조선으로부터 차단된 제국키네마 영화가 조선에서 상영되는 계기였다.
1931년 11월 중앙관은 오다 유키치(小田勇吉)가 경영을 맡았다. 이 당시 데이코쿠키네마가 신코키네마로 바뀌면서 중앙관 역시 신코키네마의 특약관으로 있었다. 하지만 중앙관 운영권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기자 중앙관 경영자 오다는 1934년 11월 경성흥행협회 회장인 경성극장(京城劇場)의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와 부회장인 조일좌(朝日座)의 오이시 사다시치(大石貞七)를 공동경영자로 끌어 드렸다.
1936년 들어 약초극장과 명치좌, 황금좌 등 신축 영화관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경성의 영화관은 크게 요동치게 된다. 같은 해 9월 중앙관은 신코키네마와 절연하고 다이토영화사의 조선봉절관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되지만 경영 악화로 인해 고전하게 된다.
1940년 10월 17일 중앙관 역시 새롭게 개장 후 개관하게 되면서 이름을 중앙영화극장으로 바꾸고 신코키네마 2번관이 된다. 운영자 역시 바뀌어 조일좌 운영주 오이시 사다시치가 맡았다. 하지만 중앙영화극장은 인근에 위치한 신코영화 봉절관인 경성극장에 비해 입장료가 불과 10전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에 관객들을 유치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경성극장이 영화관으로 전용된 후 경성의 일본인 전용 연극극장이 전무하던 상황이었기에 운영자 오이시는 중앙영화극장을 연극극장으로 전환할 것을 고민하게 된다.
오이시는 가장 먼저 조선악극단에 위탁경영을 제의했으나 교섭에 실패했다. 이어 조선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던 도호와 협의를 시작하여 1940년 12월 중앙영화극장을 신코영화의 2번관에서 도호의 2번관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이름도 동보문화극장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문화극장이라는 이름이 문화영화와 시사영화 전문 상영관이라는 인상을 주었기에 1941년 7월 이름을 동보중앙극장으로 개칭하였다. 영화배급 통제가 실시되면서 홍계 상영관으로 있었던 동보중앙극장은 1944년 9월부터 연극장으로 전환하게 되면서 중앙극장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1945년 5월에는 전창근, 김태진 등이 주축이 된 극단 태양을 전속 극단으로 두었다.

해방 후 중앙극장은 연극전용관에서 영화관으로 바뀌었으며 흥행업계에서 오랫동안 활약하던 김상진(金尙鎭)이 적산관리인으로 있었다. 1950년대 벽산그룹의 모태가 된 불이무역(不二貿易)의 김인득(金仁得)이 소유하고 있던 중앙극장은 1998년 3개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영화관으로 전환하며 이름을 중앙시네마로 바꾸었으나 벽산그룹이 도산하면서 2010년 폐관하였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 [사진](상단) 중앙관 개관 광고(《경성일보》, 1922.10.15)
[자료] 매일신보, 1921.03.09.
경성(京城)에 우(又) 상설관(常設館) / 일홈은 즁앙관이고 자본금은 오십만원
경셩의 연예계ᄂᆞᆫ 종ᄅᆡ로 잘 발뎐이 못되고 도리혀 쇠하야 가ᄂᆞᆫ 모양이오 졈졈 활동사진을 인하야 시민의 연예와 오락 ᄎᆔ미가 ᄉᆡᆼ기여 오ᄂᆞᆫ 바 현ᄌᆡ는 내디인 편이 활동사진 상설관이 셰시나 잇고 됴션인 전문의 상설관은 다만 둘밧게 업ᄂᆞᆫ데 또 이것ᄲᅮᆫ으로도 시민의 긔ᄃᆡ를 맞츄어 줄 설비와 ᄉᆡ로운 ᄉᆞ진을 속히 뎨공하지 못하ᄂᆞᆫ 것이 유감되여셔 이 결ᄒᆞᆷ을 보츙하고 ᄯᅩ 됴선 만주에 자랑ᄒᆞᆯ만한 완전히 설비한 상설관을 건설하야 보려고 지ᄂᆞᆫ번 ᄅᆡ로 시ᄂᆡ 유지ᄌᆞ들에 의하야 그 계획이 진ᄒᆡᆼ되ᄂᆞᆫ대 이번에 아죠 허가를 엇어셔 됴선활동사진주식회사가 츌현하게 되엿ᄂᆞᆫ대 ᄌᆞ본금은 오십만원이요 쳐소ᄂᆞᆫ 영락뎡 1뎡목 상품진렬관 압이오 ᄅᆡ월에 챵립 총회를 열고 쇽히 역사를 하야 ᄶᅡ른 긔ᄀᆞᆫ에 쥰공하고 즁앙관(中央館)이라고 일홈을 진다ᄂᆞᆫᄃᆡ ᄆᆡ우 찬셩자가 만타더라.
[자료] 매일신보, 1921.03.08.

조선활동진보(朝鮮活動進陟)
경성 영락정 상품진열관 전(前)에 상설관을 건설하고 활동사진 급(及) 차(此)에 부대하ᄂᆞᆫ 영업을 행ᄒᆞᆯ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는 기보와 여(如)히 창립사무가 진척하여 발기인의 부담주를 정한후 찬성주의 할당에도 착수하였ᄂᆞᆫᄃᆡ 하여간 자본금 50만원으로 총 주수 1만주에 불과ᄒᆞᆷ으로 주주를 광(廣)히 일반 시민에 모집하고 발기인의 독점의 폐를 피(避)키 위하야 발기인의 특주ᄂᆞᆫ 150주씩 4천주로 정하였ᄂᆞᆫ대 발기인 중에 다수히 주를 요구하ᄂᆞᆫ 자가 유하야 점차 주식분배 상 부심(腐心) 중인바 여하여간 유리한 활동사진흥업의 영리 회사임으로 찬성인이 속출하야 기히 이배 반의 신입 성적을 거(擧)하얏스며 일양일(一兩日) 중에 찬성주의 할당을 요(了)하고 일천주를 할(割)하야 일반에 모(募)하기로 ᄒᆞᆯ 터이며 창립사무소를 영락정 경매조합에 치(置)하야 창립사무를 급속히 하ᄂᆞᆫ 중이라더라.
[자료] 매일신보, 1921.03.16.

조활창립총회(鮮活創立總會)
조선 활동사진 회사 래(來) 십구일부터 이십삼일지에 제일회 불입을 료(了)고 래 사월 칠일 창립 총회를 개최 터인대 창립 총회 종료와 공(共)히 직(直)히 상설관 건축에 착수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21.10.11.

중앙관 개관(開館) 피로(披露)
예(豫)히 공사중이든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 경영에 의한 중앙관(영락정 1정목)은 수(遂)히 공사 준공 되얏슴으로쎠 10일 당국 검사를 종료하얏슴으로 13일 개관피로연을 겸하여 제국활동사진을 시사ᄒᆞᆯ터인대 초대 인원은 관민 유력자 신문기자 주주 전부에 긍(亘)하야 약 1,500명의게 각각 초대장을 발하얏더라.
[자료] 매일신보, 1924.06.26.

미국영화 상영중지 / 대정관과 중앙관
일본이 미국의 쳑하 형셰 로 고됴되야 최근에 이르러셔 젼국에셔 각죵 물품을 쳑하 동시에 일반 화(華客)의 환심을 사고 부심하 민쳡 상인들은 벌셔브터 간판(看板)의 미국이라 글발을 삭졔하며 혹은 미국품을 팔지안는다 광고를 널리하야 연히 미 긔분이 농후하야 가는 터인바 경셩 활동진 상셜관(活動寫眞 常設舘)에셔 내디 각 디방에서 미국 「필림」을 쳑하 영향을 바다 관들도 미국 사진을 죠와하지 안는 경향이 잇슴으로 대졍관(大正舘)에셔 솔션하야 불일간 미국영화(米國映畵)를 즁지하고 시대물(時代物)로써 보츙하고 계획한다하며 한 동업 즁앙관(中央舘)에셔 이에 공명하야 미국 진 대신에 목야(牧野)의 독특한 시대극(時代劇)으로쎠 보츙하고자 게획중이라대 대졍관에셔 벌셔브터 문압을 장식하야 잇 만국긔에셔 미국긔를 여바렷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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