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치좌(국제극장, 시공관, 명동예술극장)
일제강점기극장 19
명치좌는 1936년 10월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가 명치정에 세운 최신식 영화관으로 해방 후 시공관으로 사용되었다.
명치좌가 자리한 곳은 조선철도호텔(현 조선호텔)에서 조지아백화점(롯데영플라자)을 지나 명동성당과 중앙관(중앙극장)으로 이어지는 명동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길 한 가운데 있었다. 명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간 곳인데 그 초입에는 1909년 설립된 낭화관이라는 작은 극장이, 명치좌에서 명동성당 방향으로는 1922년에 들어선 활동사진전용관 중앙관이 있었고, 명치좌에서 본정 방향으로는 1915년 설립된 닛카츠 영화의 개봉관인 희락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명치좌를 세운 인물은 명치정 마루빌딩(丸ビル)의 경영자 이시바시 료스케였다. 원적이 나가사키현(長崎縣)인 그는 일찍이 조선으로 건너와 카페와 마루빌딩을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1935년 5월 마루빌딩의 한 모퉁이 부지 100평을 14만 5천원에 매수한 후 이곳에 영화관 설립을 추진한다. 그는 우선 쇼치쿠 영화의 경성 흥행권을 획득하기로 하고 만주 관동군의 실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동생 이시바시 이치로(石橋一郞)를 통해 도쿄영화계에 접근했다.
동생 이시바시 이치로는 고바야시 도쿠지로(小林德次郞)를 통해 쇼치쿠의 중역들과 쇼치쿠 흥행권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였고, 쇼치쿠의 기도 시로우(城戶四郞) 소장, 시노야마(篠山) 차장, 이노우에(井上) 오사카지점장, 시라이 신타로(白井信太郞) 상담역 등을 움직여 이시바시 료스케가 쇼치쿠 흥행권을 얻을 수 있게 힘썼다.
기존 쇼치쿠 흥행권을 가지고 있던 송죽좌의 도쿠나가 구마이치로는 쇼치쿠 측에 부율 조정을 제의한 상태에서 미쓰코시 뒤편에 극장 신축을 추진하고 있었다. 부율 조정을 요구한 도쿠나가의 행동에 불쾌함을 가지고 있던 쇼치쿠의 중역들은 미쓰코시 뒤편 보다는 명치정 한가운데 극장을 설립하는 편이 경쟁회사인 닛카츠의 영화를 상영하는 희락관을 견제하기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이시바시 료스케와 계약을 체결하기로 한다.
결국 1935년 7월 13일 도쿠나가가 쇼치쿠 상영권을 포기하자, 이시바시 료스케는 7월 23일 도쿄로 건너가 28일 쇼치쿠 영화에 대한 선만봉절 계약을 체결했다. 이시바시는 아직 극장을 설립하기 전이라 극장이 설립되기 전까지 쇼치쿠영화를 낭화관에서 상영하기로 한다. 이로써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낭화관이 1935년 9월부터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이시바시는 극장을 신축하기 위해 용산 개성좌의 흥행권을 인수받아 설립허가를 신청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성좌가 자리했던 용산 지역이 아닌 본정서 관내에 영화관 설립을 신청하였기에 허가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정서에서는 경성의 영화관을 쇄신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 명치좌의 신축을 허가해 주었다.
명치좌는 대지 505평에 건평 856평, 총공사비 536,000원을 들여 지은 지하 2층, 지상 4층의 철근콘크리트 영화극장이었다. 다마타(玉田)건축사무소의 설계와 미키(三木)합명회사의 청부로 1935년 11월 공사에 착수, 1936년 10월에 낙성을 보게 된다.

개관 이후 명치좌는 경성의 조선인, 일본인 관객 모두를 휩쓸었다. 1940년 신년 3일간 관객 집계를 보면 명치좌가 1만 6천여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2위인 희락관의 9천 8백명과는 큰 차이로 관객수를 압도했다.
명치좌가 약진하면서 조선의 영화흥행계를 주도하게 된 이시바시 료스케는 전통적으로 서양영화를 즐겨 보는 조선인 관객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 일환으로 1939년에는 박정현이 운영하던 단성사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명치좌 체인 안에 넣었다. 1907년 개관 이후 조선인의 손으로만 운영되었던 단성사가 이시바시 료스케에 의해 운영되는 것은 조선 흥행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이시바시 료스케에 의해 인수된 단성사는 명치좌의 2번관으로 전락하여 이름도 대륙극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기억해야할 부분은 명치좌와 같은 대형 토키영화관이 들어서고 남촌의 대형 영화관에 조선인 관객들이 몰리면서, 지역과 언어에 의해 구분되던 종래의 극장문화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시바시 료스케가 단성사를 인수 한 후 명치좌는 단성사가 이름을 바꾼 대륙극장과 더불어 조선영화를 다수 개봉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명치좌를 통해 개봉된 주요 조선영화만도 1939년 <애련송>, <국경>, <새출발>, 1940년 <수업료>, 1941년 <반도의 봄>, <그대와 나> 등이 있었다.

[자료] 명치좌에서 개봉된 최인규 연출의 <국경>(《매일신보》, 1939.05.19)
개관 이후 조선의 영화흥행계를 좌우했던 명치좌는 8·15해방 후 적산극장으로 미군정의 관리를 받게 된다. 조선에서 가장 가치 있는 영화관이다 보니 이를 불하받아 운영하려고 손을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중 미군정의 인맥을 가진 김동성이 적산 관리인이 되어 국제극장이란 이름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이 영화관이 조선영화흥행계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보니 문화예술계에서는 이 극장을 공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다. 과거 서울시민들의 각종 행사와 공연이 펼쳐지던 부민관을 해방 후 미군이 사용하면서, 시민회관이 없었던 서울시는 국제극장을 인수하여 시공관(市公館)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시민회관으로 사용하게 된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쟁터가 된 서울을 대신해 부산이 임시 수도였다. 1954년 서울로 환도하면서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소실된 국가기관을 대신할 건물을 물색할 때 국립극장으로 활용되던 과거 부민관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게 되자 국립극장은 시공관을 활용하도록 했다.
국립극장이 시공관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민회관이라는 본래의 기능과 옮겨온 국립극장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 문제는 새롭게 시민회관을 신축하고 과거 시공관을 오롯이 국립극장으로만 이용하기로 정리하면서 해결된다. 이를 위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우남회관이라는 이름의 시민회관을 짓기 시작하였고 이 건물은 4.19이후 완공되었는데 우남회관이란 이름 대신 시민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게 된다. 시공관이 시민회관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이전까지 시공관 건물은 명동예술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국립극장으로 활용된다.
명동예술회관은 본래 영화관 건물이라 연극 공연에는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다. 1961년 연극공연에 걸맞게 대대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진 후 명동예술회관은 1962년 3월 21일부터 본격적으로 국립극장의 역할을 맡게 된다. 명칭도 명동국립극장으로 불리게 된다. 1973년 10월 17일 남산 국립극장이 개관되면서 10여 년간 국립극장으로 역할해온 명동예술회관은 대한투자금융(현 대한종합금융)에 매각되어 금융업체 건물로 사용된다. 이후 이 건물은 경매에 붙여져 낙찰가에 따라서는 헐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다행이 문화관광부가 2002년 명동 국립극장을 복원하기로 결정, 2004년 400억원에 건물과 땅을 사들여 건물을 공연장에 맞게 다시 수리하여 2009년 ‘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하게 된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명동국립극장 당시의 모습(국가기록원)
[자료] 《매일신보》, 1939.08.20.

명치정 환락가에 대화(大火), 작야(昨夜), 전반소(全半燒) 십사호(十四戶), 손해 삼만원
십구일 오후 십시 십분쯤 부내 명치정(明治町) 이정목 오십사번지 전중심길(田中甚吉)의 목제 이층집에서 불이 나서 불길은 삽시간에 그 집을 다 태우고 옆집으로 올마부터 강본(岡本), 지전(池田), 최(崔)의 집과 편산(片山)려관 석광(石光) 『아파-트』 추강어망(秋岡魚網)점의 창고, 명치좌 『ᄲᅩ-이』 방 등 팔호를 전소시키고 불길은 다시 그칠 줄을 모르고 좌등(佐藤)빙수점, 추강어망점, 북곡(北谷)양산점, 연희(延禧)식당 등 육호를 반소시킨 후에 소방대와 부근 가정방화조합원들의 필사적인 활동에 의하여 열시 사십분쯤 진화하엿다. 손해는 약 삼만원 가량이라고 하는데 불탄 집들은 통틀어서 집주인인 명치좌에서 일만 오천원의 보험에 들엇고 가장 집물은 제각기 보험에 든 사람도 안든 사람도 잇슴으로 자세치 안타. 화재원인은 목하 본정서에서 조사 중인데 불난 곳이 환락가(歡樂街)의 중심지엿음으로 부근 일대는 갈팡질팡하는 사람과 구경꾼으로 일대 혼잡을 이루웟다.
그런데 불난 바로 엽힌 명치좌에서는 마침 영화가 끝나기 바로 전이었는데 손님들은 불난 것을 몰낫기 ᄯᅢ문에 다행히 큰일은 업섯스나 불을 ᄭᅳ든 경성소방조 소방원 관춘웅(關春雄)(三二)은 전치 ○주일가량의 타박상을 입엇다.
[자료] 《동아일보》, 1940.02.09.

구경열(熱)은 40도 이상, 정원초과와 위생, 풍기 상 나뻐, 입장요금까지 통제
요사히 본정서(本町署) 관내에 잇는 영화극장으로 명치좌(明治座)를 비롯하여 기타 극장에서는 일반의 관극열(觀劇熱)이 고조됨을 기화로 하여 부당한 고급 요금을 증수함은 물론 정원(定員) 이상의 사람을 입장시켜 소위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초만원을 일우어 관극 목적을 다 할 수 없음은 물논 위생 상 또는 풍기 상 조치 못한 점이 만허 경기도 경찰부 보안게에서는 그대로 방임할 수 없다 하여 미구에 입장요금의 통제는 물논 정원 이상의 입장을 엄금할 방침이라 한다.
특히 요사히 비와 눈이 오지 안허 각지에서 화재가 발생하야 총후 물자 확보정책에 반하는 사실이 속출하는 현상에 비추어 보아 무리한 관객 수용과 입장자 초과가 화재발생의 위험성도 잇는 만큼 방화의 필요와 기타 재해, 풍기, 위생 각 점을 생각해서 단호한 방침을 세우기로 확정하엿다 한다.
본정서 좌등 보안주임 담(本町署 佐藤 保安主任 談)= 극장에서 입장요금을 올리는 것은 이제부터 절대로 허가하지 안흘 방침이다. 영화렬이 팽창한 것을 기화로 해서 입장료를 함부로 올리는 것은 업자들로서 반성해야 될 점이다.
정원 이상의 입장에 대하여서도 풍기, 재해방지 등 필요에서 도경찰부의 지시가 잇는대로 단호히 통제할 방침이다. 운운
[자료] 《매일신보》 1941.07.25.

명치좌 기구 확충, 송죽·SY계 제휴강화
시국 하 영화의 사명이 점차 중대하여서 기(其) 사회적 발전에 박차를 가하여 오고 있는 이ᄯᅢ 시내 명치좌에서는 이에 상반(相伴)한 기구 확충과 내용 강화를 꾀하여 종래는 단지 송죽의 봉절관인 관계엿든 것을 다시 확대하야 긴밀한 제휴 강화의 계약을 맷고 금후는 종전의 배가한 비약을 ᄭᅬ하리라고 한다. 이리하여 금후 명치좌에서는 전(全) 송죽계의 『애트랙슌』은 물론 S·Y계의 양화 상영도 일층 확장하기로 되어 그 약진은 자못 주목된다.
松竹○의 책임자는 神戶 松竹座 지배인 大矢○信씨로 결정되어 근간 부임하기로 되었다.
[자료] 《매일신보》, 1941.10.15.

『반도의 봄』 내월(來月) 명치좌 봉절
명보영화의 이색편. 신인 이병일 감독 작품 『반도의 봄』은 그간 봉절권 획득의 문제로 봉절관이 결정되지 못하고 잇든바 송죽과 타협되여 내월 중순경 경성 명치좌에서 상영키로 되엇는데 송죽계로 전국 봉절하게 되리라고 한다.(사진은 그 한 장면)
키워드
- #명치좌
- #국제극장
- #시공관
- #명동예술극장
- #이시바시료스케
- #단성사
- #애련송
- #국경
- #새춢발
- #수업료
- #반도의봄
- #그대와나
- #김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