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감점기 극장
개항장에 들어선 최초의 극장
일제강점기극장 1
우리나라에서 처음 극장이 만들어진 시기는 18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이 위안과 집회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극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인부좌(仁富座)라 지었다.
1892년 인부좌에서 이루어진 자선연예회 공연이 당시 인천에서 발행된 일본어 신문 《조선신보》에 게재되었다. 자선연예회와 관련한 이 신문기사는 조선에 설립된 극장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랜 기록이다. 인부좌에서 열린 자선연예회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1892년 4월 5일 인천과 부산을 오가던 일본상선 이즈모마루(出雲丸)가 전라남도 소안도 인근에서 침몰해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부산에서 공연을 마치고 인천으로 들어와 인부좌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자그라 소이치(ジヤグラー操一)는 이즈모마루 침몰 사건이 일어나자 사상자 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인천에서 조난자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자선연예회를 개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재난이 닥치면 피해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구제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선연예회를 개최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다. 자그라의 생각에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새로 지어진 인부좌에서 자선연예회가 열렸다. 참고로 이 ‘이즈모마루 침몰 의연 자선연예회’를 주최한 자그라 조이치는 본명이 아다치 하치사부로(安達八三郞)[필자 주: 아다치 하치사부로를 ‘安達八三郞’이외에 ‘安達初三郎’로 쓰기도 한다.]이며 “자그라”라는 예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저글링으로 유명한 마술사였다.
자선연예회는 1892년 5월 28일 오후 2시 반 시작되었다. 오후 4시 경에는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극장 안을 메워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3~400명의 관객들이 극장에 입장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인천에 살던 많은 일본인들이 자선연예회에 관객으로 참여했으며 그들 중 몇몇은 스스로 무대에 서기까지 했다. 프로그램 중에는 자그라 조이치의 마술뿐만 아니라 무용, 조루리(淨瑠璃), 수용(手踊) 및 연극 등 다채로운 볼거리들이 흥미를 돋았다.
이 자선연예회가 개최된 인부좌는 인천 일본영사관 뒤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선회 당일 극장 안팎의 모습을 살펴보면, 극장 밖에는 나뭇잎으로 장식한 문을 만들고 그곳에 일본 국기를 비롯하여 자수로 ‘자선회’라 적힌 큰 현판을 걸었으며, 조선신보사로부터 기증받은 ‘자선연회’라고 쓰인 큰 깃발을 세웠다. 입구의 우측에는 자그라 조이치가 디자인하여 만든 목조 ‘자선회비(慈善會碑)’를 두었고, 좌측에는 인부좌의 극장주로부터 기부받은 목조비를 두었는데 여기에는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위혼비’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또한 극장 안 한 쪽을 각국의 국기와 신호기들로 장식했으며, 밤이 되면 극장 밖에 산(山) 자 형태로 높게 홍등을 켰다.
이후 인부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건, 인부좌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는 1890년대부터 조선에서 극장이 만들어져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들 극장은 일본 거류민들 문화의 일종이었지만, 빠른 속도로 조선의 관객들에게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이는 1895년 정치국(丁致國)이 인천에 만들었다는 조선인 연극장 협률사(協律舍)[필자 주: 1902년 황실에서 설립한 희대(협률사,協律社)와는 다른 곳이다.]에 관한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인천협률사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고일(高逸)이 쓴 『인천석금(仁川昔今)』(경기문화사, 1955)이다. 고일은 정치국이 인천 용동에 창고 같은 벽돌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극장 협률사라고 기록했다. 최성연(崔聖淵) 역시 『개항과 양관 역정』(경기문화사, 1959)에서 인천의 부호 정치국이 운영하던 협률사를 애관(愛館)의 전신으로 추정하면서 청일전쟁 중 지은 창고를 연극장으로 전용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기록은 인부좌가 들어선 인천에 조선인 연극장도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쉽게도 신문이나 잡지처럼 시기를 명확히 밝혀주는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아 인천 협률사의 존재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위의 기록들은 19세기말 개항장에 조선인 극장이 들어섰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간접 증거로서 의미가 있다.
청일전쟁 이후 인천에는 인부좌가 사라지고 인천좌라는 다른 이름의 극장이 들어섰다. 인천좌가 들어선 시기는 1897년 이전으로 추정되는데, 『인천부사(仁川府史)』의 기록을 보면 일본인 거류민을 위해 화도(花道)[필자 주: 일본식 극장에 존재하던 무대와 연결된 장소로 주로 배우의 등·퇴장에 이용된다. 주요 배우의 연기가 펼쳐지기도 한다. ]를 갖춘 100석 규모의 극장이 일본영사관 서측인 중정(仲町) 1정목에 자리하고 있었고 이것이 1897년 산수정(山手町) 2정목으로 이전, 후에 인천좌(仁川座)라 불렸다고 한다. 물론 객석의 숫자 등 기재상 세부적인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은 인부좌가 자리를 옮긴 후 이름을 인천좌로 바꿨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인천부사』에 실린 기록을 더 살피면, 인천좌에서는 만자이(漫才), 고단(講談), 가쿄쿠(歌曲) 등 일본 전통 연희물을 상연했으며 인천가부키좌 건립 후에 충남 대전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인부좌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에서 극장 설립은 개항장의 일본인 거류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지방의 극장사(劇場史) 연구가 현재 걸음마 단계이기 때문에 부산, 인천 등 개항장에 언제 어떻게 극장이 만들어졌는지 그 전모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몇몇 연구들이 부산, 인천 등 개항장의 일본인 극장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사진2. 인천가부키좌 앞에서 단원들의 모습 (『경성부지권(京城府之卷)』)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인천 빈정(濱町)에 부지 300평, 건평 160평 규모의 2층 건물이 들어서서 이름을 가부키좌(歌舞技座)라 불렀다. 이름처럼 전형적인 가부키 전용극장이었으며 입장정원도 999명이나 되는 대형극장이었다. 이 건물은 재인천일본인상업회의소회두(在仁川日本人商業會議所會頭) 가라이 에이타로(加來榮太郞)가 세웠는데 건축비 1만 4천원, 도구 및 의상비 6천원으로 총 2만원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1915년 당시 인천가부키좌의 주요 프로그램은 신파극이 총 흥행일수의 3분의 2를 차지했고, 그 밖에 구극 상연, 활동사진 상영, 각종 연예회 등이 열렸다.

사진3. 부산좌의 외관(『부산요람(釜山要覽)』, 부산상업회의소, 1912)
1903년 당시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는 행좌(幸座)와 송정좌(松井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행좌는 일본인 거류 1세대인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가 1903년 이전에 남빈정(南濱町) 끝자락(지금의 중구 광복동)에 세워 운영한 극장이었다. 하자마 후사타로는 1880년 이오이(五百井)상점 부산지점에 부임한 후 무역과 부동산업으로 큰 부를 쌓고, 거류민단 의원을 역임하는 등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상공인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행좌의 주요 프로그램은 일본연극, 일본씨름, 마술, 비파, 조루리 등과 활동사진이었다. 1915년 행좌는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재건축되면서 행관(幸館)으로 이름을 바꿨다.
행좌 부근에 있던 송정좌는, 개항 직후 부산으로 건너온 마쓰이 고지로(松井幸次郞)가 세운 극장이다. 1903년 이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1911년경에 폐관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는 부귀좌(富貴座, 1905~?), 부산좌(釜山座, 1907~1923), 동양좌(東洋座, 1912?~?), 변천좌(辨天座, 1912~1916), 질자좌(蛭子座, 1912~1918), 욱관(旭館, 1912~1916) 등이 세워졌다.
1897년 개항된 목포에는, 1904년 지금의 복만동에 목포좌(木浦座)가 생겨났으나 운영되지는 못했고 1908년 문을 닫았다. 목포좌가 없어진 1908년 상락동에 상반좌(常盤座)가 문을 열었다. 상반좌는 1914년 138평 규모의 2층 건물로 증축되었으며, 1929년 9월 30일 폐관되었다.
1899년 개항된 마산에서는, 마산 최초의 극장 희락좌(喜樂座)가 1906년 늦은 여름 경정(京町)의 고이즈미 시게조(小泉繁藏) 오복점 뒤편에 만들어졌다. 희락좌는 건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07년 2월 1일 실화로 소실되었다. 이 직후인 1907년 늦은 봄, 신마산의 유정(柳町)에 환서좌(丸西座)가 세워졌다. 환서좌는 가부키 극장으로 회전 무대를 갖췄고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 경영자는 나카무라 초(中村肇)였다. 가부키, 나니와부시를 비롯한 일본 전통 연희물이 상연됐으며 활동사진도 상영했다.
그 외 원산, 군산 등의 개항장에도 1910년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극장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떤 극장이 있었는지는 현재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의 극장이 일본의 극장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극장의 구조, 흥행방식, 용어 등이 일본식이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 본문은 필자의 『조선영화의 탄생』((주)박이정, 2018) 23~33쪽의 내용을 발췌,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사진1(글 상단). 《조선신보》에 실린 인부좌 관련 기사(《朝鮮新報》 1892년 6월 5일자.)
[자료] 「자선연예회 - 인천 개항 이래의 구경거리」(《조선신보》 1892년 6월 5일자), 발췌 번역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유족을 위로하는 의연금을 구하기 위해 아다치 하치사부로(安達八三郞=자그라 소이치)가 발기, 오타니 마사나리(大谷正誠) 씨가 위원장, 고리 긴자부로(郡金三郞), 미쿠라 마사히로(三倉正寬), 모토하시 세이지로(本橋淸二郞), 이와다 가에몬(岩田嘉右衛門), 아사오카 도시키치(淺岡利吉), 스이쓰 세이조(水津淸三) 제씨가 위원, 노세 다쓰고로(能勢辰五郞), 니시와키 초타로(西脇長太郞), 사다케 진소(佐竹甚三), 헤이세이 데쓰사부로(平生欽三郞), 무코야마 시게히라(向山茂平), 우에다 호사쿠(上田豊作), 구마모토 에이치로(隈本榮一郞) 제씨가 찬성자가 되고, 기타 여러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다하여 5월 28일 오후 2시 반부터 야마노테(山手)[필자 주: 인천의 일본인 조계지에서 만국공원이 있는 언덕 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인천 송학동으로 불리는 산수정(山手町)과 꼭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지역의 신극장 인부좌에서 ‘이즈모마루 침몰 의연 자선연예회’가 열렸다. 자선회가 열린 것은 인천 개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상류 사회의 사람들이 많이 주선했다고 하는데, 특히 이 자선회는 인천 거류민들과 아주 관계가 깊은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유족을 위로한다는 면에서 개회 수일 전부터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당일 방문한 사람들은 무려 800여 명에 달하며, 회장이 꽉 차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4시경 이후로는 회장을 찾아와 허무하게 출입구에서 거절당해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는데, 3~4백 명은 될 것이다. 회장 문밖에는 상록수로 커다란 녹문을 만들어 국기를 매달고, 또 털실 세공으로 ‘자선회’라고 적은 큰 액자를 걸었으며, 본사가 기증한 ‘자선연예회’라고 크게 쓴 대형 기도 매달아 세웠다. 입구의 우측에는 자그라 소이치가 디자인한 자선회비(慈善會碑, 목조)를, 좌측에는 극장주가 기부한 길이가 1조(一丈)[필자 주: 약 3m이다.]에 가까운 목조비에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위혼비’라고 크게 적어 세웠다. 장내 한 쪽에는 각국의 국기 혹은 신호기로 찬란하게 장식하여 넋을 빼앗았다. 밤이 되면 회장 밖에 山 자 모양으로 높게 홍등을 켜서 특별한 미관을 더했다. 만사에 주의하여 꼼꼼하게 이리저리 장식하고 배치를 완전하게 한 데는 주선한 유지들 모두의 연일의 노고가 담겨있다. 이 자선회의 특색이라면 2층과 아래층 두 곳에 귀부인 따님들이 음식물 매점을 열어서 자선바자회를 모방했다는 것이다. 연예는 오후 3시경부터 시작했는데, 십 수 가지의 연예가 있었다. 이중에서 가장 관람객들의 갈채를 받았던 것을 들자면......
키워드
- #개항장
- #인부좌
- #인천좌
- #인천가부키좌
- #최초의 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