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감점기 극장
남촌의 일본인 극장들
일제강점기극장 6
‘남촌’이란 원래 서울의 남쪽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남산 왜성대에 일본영사관이 들어선 이후 그 일대에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지금의 충무로역 부근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 거류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일본인 거류지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남촌의 범위도 확대됐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일반적으로 청계천이나 황금정길을 경계로 그 이남 지역을 남촌이라 불렀다.
남촌의 일본인 거류지에 언제 처음 극장이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인 흥행업자가 19명이나 거주하고 있던 1902년 즈음에는 상설극장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경성 거주 일본인 수가 급격하게 늘면서 극장 역시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 경성의 일본인 이주민의 수는 3만 8천명을 넘어섰는데, 얼마 지나지 않은 1914년에는 6만 6천명으로 러일전쟁 직후보다 6배 정도의 증가를 보였다. 1914년 당시 남촌의 일본인 상설영화관은 대정관(大正舘), 제2대정관, 황금관(黄金舘) 등 세 곳이었고, 수좌(寿座), 수관(寿舘), 어성좌(御城座) 등 몇 곳의 연극장도 존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10년 이전 경성에 일본인 극장이 몇 개나 있었고, 이 극장들을 누가 어떻게 설립했으며, 이것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등의 전모를 알려주는 확실한 자료는 없다. 경성 거주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에 그러한 내용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이 중 강점 이전 경성의 일본인 극장에 대해서는 『경성번창기(京城繁昌記)』에 소략하게 설명되는데, 이에 따르면 러일전쟁 직후인 1907년을 전후한 시기 일본인 거류지 중 수정(壽町) 3정목에 수좌, 남대문 밖에 어성좌(御成座), 욱정(旭町) 1정목에 가부키좌(歌舞伎座), 본정(本町) 2정목에 본정좌(本町座), 본정 7정목에 경성좌(京城座) 등 총 5개의 극장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2. 수좌의 모습(岡良助, 『京城繁昌記』, 東京: 博文社, 1915년.)
『경성번창기』에 언급되지는 않지만 당시 신문자료를 토대로 살펴보면, 1906년 11월 일본인 거류지인 본정 7정목에 송도좌(松嶋座)라는 극장이 있었고 여기서 활동사진을 상영한다는 기록이 있다. 송도좌는 1907년 2월 4일 화재로 전소되었는데, 당시 기사를 보면 건물은 2층 양옥으로 확인된다. 또한 화재 진압에 감사하는 신문 광고를 보면, 일본인 다니가와(谷川與一), 이치가와(市川熊太郞), 미즈노(水野庄太郞) 등이 송도좌와 관련되어 활동했다고 한다.
송도좌의 경우처럼 언제 처음 건설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06년 무렵에는 확실히 일본인 거류지에 극장이 존재했다. 당시 경성의 일본인 거류지인 수정 2정목에는 경성좌가 있었다. 경성좌 역시 설립자나 운영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바, 대신 연설회 개최를 알리는 기사가 1906년 9월 《조선신문》에 실렸고 1907년에도 인천가부키좌에서 상연했던 연극을 경성좌로 옮겨 공연한다는 기사가 실리는 등 다양한 공연 기사를 발견할 수 있다. 1908년 8월 경성좌는 수정 2정목(본정 4정목)에서 본정 7정목으로 자리를 옮긴다. 보통 새로운 극장은 이전에 극장이 있었던 자리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경성좌는 화재로 사라진 송도좌 자리로 이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의 충무로역 대한극장 건너편 옛 극동극장 부근이다. <단장록(斷腸錄)>, <금색야차(金色夜叉)> 등 유명한 신파 레파토리를 공연했던 경성좌는 1911년 3월 시설 낙후를 이유로 폐관되었다. 조선인들에게는 혁신단의 임성구가 일하며 신파 연극을 배운 곳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강점 이전 경성의 일본인 극장을 대표하는 곳은 경성가부키좌였다. 1907년 1월 5일 낙성식을 거행하고 개관한 경성가부키좌의 좌주는 이토(伊藤)라는 인물이었는데, 1910년 무렵의 좌주는 노구치(野口松五郞)였다. 건물주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기간을 두고 흥행업자에게 대관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가부키공연을 할 수 있는 규모의 대극장으로 다양한 흥행물 공연이나 활동사진 상영은 물론, 경성에 주재하던 일본인들의 각종 행사까지도 치룰 수 있는 장소가 경성가부키좌였다. 1911년 8월 26일에는 ‘키네오라마’라는 장치를 설치하여 극장의 설비를 강화하는 등 경성의 일본인 극장을 대표하던 경성가부키좌는 1912년 2월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경성의 다른 유서 깊은 극장으로는 판본좌(坂本座)와 그의 후신인 수좌를 꼽을 수 있다. 판본좌가 설립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인 지금의 충무로 남산스퀘어빌딩 북편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뒤에 이야기 할 본정좌와 더불어 경성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었으나 공연 내역을 밝혀주는 자료는 많지 않고, 1907년 5월 사카이(酒井)일좌가 공연했다는 기록 정도가 남아 있다. 1908년 판본좌를 헐고 그 자리에 수좌(壽座)가 건립된다. 수좌는 남촌의 일본인 극장을 대표하며 1919년까지 영업을 지속하다가, 같은 자리에 경성극장(京城劇場)이 신축되면서 사라졌다.

사진3. 수관의 개관 광고(《朝鮮新聞》, 1912년 12월 26일 자.)

사진4. 수관의 무대(岡良助, 『京城繁昌記』, 東京: 博文社, 1915년)

사진4. 수관의 무대(岡良助, 『京城繁昌記』, 東京: 博文社, 1915년)
본정좌는 판본좌와 마주하고 있었다. 이곳은 심훈이 19세기 말 영화가 처음 상영된 장소라고 지목한바,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보면 1907년 7월 30일 개관했고 당시 흥행주는 이토(伊藤友松)였다. 다만, 1907년 이전 동일한 이름의 극장이 다른 장소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본정좌는 경성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일본인 신파 극단 기타무라(北村)일좌의 근거지였으나 1909년 2월 16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됐다. 1912년 본정좌 자리에 새로운 극장이 설립되어 이름을 수관(壽館)이라 했다. 수관은 1920년대 중반 다시 이름을 본정좌라 바꾸어 운영하기도 했으나 곧 사라졌다.
남대문통에서 명치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한 낭화관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샤미센을 뜯으며 창을 하는 나니와부시(浪花節) 공연을 위해 만든 작은 규모의 극장이었다. 현재 명동1가 65-2번지 자리로, 1909년 12월 1일 개관했으며 관주는 니시다 가죠(西田嘉三)였다. 라쿠고(落語)와 같은 작은 규모의 공연이 주로 펼쳐졌고 1930년대 영화관으로 개축되었으나, 해방 후 낭화관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명동극장으로 바꾸었다. 1974년도에 폐관되었다.
남대문 밖에 위치한 어성좌는 강점 직전인 1910년 5월 31일 낙성식을 열고 영업을 개시했다. 1913년 당시 좌주는 다나카(田中駒次郞)라는 인물이었고 조루리와 인형 연극과 같은 작은 규모의 흥행물 공연을 주로 했다. 1910년대 중반 사라진 어성좌의 현재 위치는 남대문 YTN타워 주변이다.

사진5. 1920년대 초반 낭화좌의 모습
이들 극장 외에 1910년 이전에 만들어진 극장으로 영락정(永樂亭)이 있었다. 강담(講談), 라쿠고(落語), 나니와부시(浪花節) 등 일본의 전통 연희를 전문으로 흥행하는 이른바 요세(寄席)였다. 1910년대 중반에는 신정(新町) 유곽 입구에 극장이 들어섰다. 이 극장은 시기에 따라 문락좌(文楽座), 도하좌(稻荷座도화자? 桃花座?), 낭화좌(浪花座), 조일좌(朝日座)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나아가 1910년 경성에 포함된 용산 지역에는 용산좌(龍山座), 좌구랑좌(佐久良座=사쿠라좌) 등이 있었다. 특히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발달하기 시작한 1910년대, 신용산과 구용산 지역에 각각 한 개씩의 극장이 있었다. 신용산에서 구용산으로 들어서는 길에 위치한 영정(榮町)에는 1906년 용산좌(龍山座)가 들어섰는데, 1910년대에 이름을 개성좌(開盛座)로 바꾸었다. 신용산이라 불린렸는 용산역 앞 한강통에 자리잡은 사쿠라좌(櫻座) 역시 구용산에서 신용산이 만나는 자리에 있었다.
* 참고문헌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 사진1(상단). 황금유원 관련 기사(《매일신보》, 1913.06.23.)
[자료]
"경성 활동사진계의 내막 - 기대가 무너진 유락관과 수좌는 어떻게 되나?"
- 「京城活動寫眞界の內幕-當て事の外れた有樂館と壽座は何うたる」,『朝鮮及滿洲』, 통권 103호(1916년 2월호), 122~124쪽: 김태현 편역, 『일본어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39~47쪽.
수지타산이 맞을 것인지 아닌지
눈 쌓인 북한산에서 매섭게 불어오는 찬바람이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전봇대 위에 걸쳐 있는 전선이 꽁꽁 얼어서 소리 나는 추운 밤에도, 마음이 굳세고 당찬 과부가 울며 탄식하는 듯 한 겨울 밤비가 조금 내렸다. 지나가는 저녁에도, 시내의 좁은 골목에 위치한 ‘활동사진 거리’로 불리는 앵정정(櫻井町) 부근에는 행인의 발걸음을 붙잡는 요란한 색채의 그림간판이 버젓이 걸려 있다. 그리고 펄럭이는 깃발, 향락적인 느낌을 자극하고 조장하는 녹일(綠日)날 행사의 악대소리, 이 악대 소리가 황금정의 큰 도로를 슬픈 소리를 내면서 가로지르는 노면 전차의 울림 사이사이로 간간히 들리고 있다. 재작년 연말 언저리부터 작년 여름 사이에 경성 흥행계 전체를 장악할 기세였던 활동사진은, 공진회가 결성된 전후부터 금년(1916년)까지 흥행의 변화추이를 살펴보면, 다소 열기가 식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다른 흥행물과 비교해도 여전히 현격한 차이가 날 정도로 대단한 기세이다. 현재 경성 활동사진상설관은 대정관, 황금관, 유락관, 수좌, 우미관 이외에 용산에는 황금관의 분관 용강관(龍江館)이 있다. 이것들을 세어보면 모두 6관이 있다. 그 중 조선인 전용관 우미관을 제외하면 일본인 전용 상설관이 5개가 된다. 경성과 용산을 합하여 일본인 인구 7만에 불과한 곳에 상설관 5개의 존재는 조금 많은 감이 없지 않다. 비록 조선에 육군사단 설치를 염두에 두고 장래 발전을 기대한 설립이었지만, 지금 상태로 각 상설관이 수지타산이 맞을 것인지 상당한 의문이 든다.
세계관의 권리 5천원!
이중에서 유락관, 수좌 2개관은 한 달에 2주간 밖에 흥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에는 2개관의 경영자들은 대정관, 황금관과 마찬가지로 연중 내내 흥행을 하고 싶었다. 수좌는 종전 체재를 완전히 바꾸어 활동사진 흥행 상설 전문관으로 신장개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개축은 어떻게든 허가를 받을 수 있었지만, 흥행은 총독부로부터 장기간 흥행불허 판정을 받았다. 유락관은 수좌의 전례를 여러 방법으로 검토하고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판단 하에 고육지책을 내놓았다. 그 결과 지금은 없어졌지만, 동양척식주식회사 옆에 있었던 세계관의 권리를 5천원 가까운 금액으로 구입하였다. 이 정도 조건이라면 불만은 없을 것이며 틀림없이 장기간 흥행허가가 승인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의외였다. 기대가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 근처 다카기 도쿠야(高木德彌), 미쓰코시(三越)오복점, 백삼십은행, 쓰카타니(塚谷)잡화점 등에서 “이렇게 여염집이 즐비하게 늘어진 장소에서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천만한 활동사진을 연중 내내 상영한다면 과연 괜찮을 것인가? 그렇게라도 해도 억지로 활동사진 흥행 전문관을 만들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도 생각이 있다.”는 강한 항의도 있어서 첫 번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5천원으로 구입한 세계관의 권리도 거의 무용지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것을 처분, 양도한다면 한 달에 2주간 했던 흥행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동일한 닛카쓰 작품으로 3개 상설관 경쟁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겨우 활동사진관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이 시기부터 활동사진에 대한 시민들의 열기도 그리 뜨겁지 않았다. 이러한 힘든 상황 속에서 생긴 2개의 상설관을 위해서 시민들이 다시 발길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시민의 활동사진 열기는 상설관 증설과는 무관하게 반대 방향으로 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연일 입장객 만원을 꿈꾸고 있던 2개관 업자들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고, 흥행하면 할수록 경영은 점점 악화될 뿐이었다. 왜냐하면 유락관이든 수좌이든 둘 다 대정관과 동일하게 닛카쓰와 계약을 맺어 닛카쓰 영화만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 상설관은 서로 제휴도 연락도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 영화는 거의 같은 밭에서 수확한 작품을 반복하여 상영하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같은 회사의 영화로 경쟁하려고 하니 돈은 돈대로 나갔고 관객에게는 ‘아 그래 바로 이것이야’라는 자극도 주지 못했다. 더군다나 비록 2주간 정도밖에 할 수 없는 흥행이라고 해도 상설관 입장에서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악대, 변사, 매표소 직원에게 상당한 보수를 지불하고 자리를 지키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 힘든 것은 이들의 급여는 일본과 비교하면 이외로 상당한 고액이여서 수좌와 유락관에서는 변사를 융통하는 문제가 제기될 정도였다. 하지만, 쌍방이 자신들의 주장만을 펼쳐 결국 협상은 결렬 되고 말았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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