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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극장문화사 10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대표 이미지

1937년 벽두 《삼천리》에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경무국장에게 보내는 아등(我等)의 서(書)」1라는 제목으로 실린 공개서한은 식민지 조선 대중의 자본주의적 욕망과 문화적 욕구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자료로서 그동안 자주 언급돼 왔다. 이제는 너무 익숙한 제목과 내용이지만, 이 공개서한을 다른 맥락과 겹쳐 읽는 것으로 이 글의 서두를 열고자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공개서한에 연명한 이들은 “대일본레코-드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 조선권번 기생 오은희, 한성권번 기생 최옥진, 종로권번 기생 박금도, ᄲᅡ- <멕시코> 여급 김은희, 영화 여우(女優) 오도실, 동양극장 여우 최선화”이다. 한 명의 남성과 일곱 명의 여성. 일곱 여성들의 직업은 마담, 기생, 여급, 여배우로 그들은 모두 근대 도시의 유흥과 여가에 종사한다. 공개서한의 수신자는 부임 3개월째를 맞는 미쓰하시(三橋) 경무국장이었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라는 도발적인 제목과는 달리 “미쓰하시 경무국장 각하여”라며 공손한 어투로 시작된 서한은, ‘댄스홀’이 문명 도시를 가늠하는 상징적인 기준이며 ‘댄스’가 얼마나 건전하고 명랑한 오락인지를 극도의 존칭과 경어를 사용하며 조목조목 설득한다. 여기서 경무국장에 대한 존경과 자신들에 대한 겸양은 다소 과도할 정도인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당돌해 보이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이 공개서한은 경무국장에게 보내는 진지한 호소라기보다 경무국장에게 ‘댄스홀’ 허가를 요청하되 그 결과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의미 없는 메시지’임을 과시하는 ‘넌센스(nonsense)’다. 

식민 도시 경성에서 벌어진 이 ‘넌센스’는 문자 그대로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에 누구도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다. 수신자인 ‘미쓰하시 경무국장’조차 이 공손한 서한에 공식적으로 화를 내지는 못했을 터이다. 그러나 경성의 모든 풍속에 대하여 취체의 책임이 있는 경무국장으로서, 그는 통제의 대상인 공개서한의 발신자들―끽다점, 권번, 바, 레코드, 흥행업 종사자들―과 《삼천리》의 독자들이 구성하는 공감 속에서 기실 유머의 대상이 되고 있다.2 미쓰하시는 원래, 1936년 8월 조선에 부임한 미나미 지로 총독이  소위 ‘동아 정국’, 그러니까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한 정간된 상황에서 경무국장으로 임명한 인물이었다. 일본의 청년 장교들이 천황의 친정을 명분으로 쿠테타를 일으켰던 5.15 사건 이후 점차 짙어졌던 군국주의 기운이 조선에도 여파를 미치던 시점에서, 경무국장에게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는 내용의 서한을, 그것도 경성에서 술과 노래와 음악과 연기를 업으로 하는 이들이 보낸다는 것 자체가 당돌한 일이리라. 그렇다면 이 넌센스는 그저 의미 없는 농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이들이 놓인 권력의 위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긴장을 돌발적으로 노출한 사건일 수 있다. “만주사변 직후에 우가키 전(前) 총독은 서울 있는 신문 기자를 향하여 국가 비상시에 딴스는 허가할 수 없다고 말했읍니다. 그러나, 만주사변은 모다 이제는 평정하게 되고 평화의 기상이 세상에 차고 있지 않읍니까”라는 호소는 일본과 조선에서 ‘비상시(非常時)’라는 말이 다시 유행하는 상황을 우회적으로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계엄령이 내려지고 도쿄에서도 댄스홀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던 터에, 식민지의 도시 경성에 댄스홀이 허가될 리 없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근 8년간은 ‘전쟁의 시대’이자 ‘총동원의 시대’였다. 식민지 조선의 삼천리 방방곡곡에 ‘총동원 체제’가 가동되고 ‘비상시’가 장기화됨으로써 ‘비상시의 상시화’라는 상황적인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된다. 1937년 벽두 ‘댄스홀을 허하라’는 이 느닷없는 호소문의 넌센스는 ‘비상시의 상시화’라는 상황적 아이러니에 대한 예보, 비상시의 일상에서 수도 없이 발생하는 ‘의미의 과잉’과 ‘무의미의 의미’에 대한 예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상시가 아니다’라는 이 단순한 의미의 ‘비상시(非常時)’는, 1937년 이후 보다 구체적인 맥락에서 사용된 ‘전시기(戰時期)’나 ‘전환기(轉換期)’, ‘신체제(新體制)’ 등과 계열을 이루게 된다. 중일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엘리트들 사이에서 이미 유행했던 ‘전환기(轉換期)’라는 표현이 어떤 혼란이나 불안을 내포한 것이었다면, 1940년 제2차 고노에(近衛) 내각이 출범하면서 내걸었던 ‘신체제’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전시체제에서의 선명한 수행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비상시’는 이러한 ‘전환기’의 불안과 ‘신체제’의 수행을 모두 아우르는 동시에,  통치 주체로 하여금 전시에 발생하는 그 어떠한 제도적 폭력과 비합리성도 정당화하면서 아무런 기약 없이 정상화를 유예할 수 있게 하는 주문과 같았다. 

‘비상시가 상시화’되고 사회의 전분야가 전시체제로 재편되는 가운데, 식민지 조선의 각 주체들은 지역별(도시와 농산어촌), 직능별(노동자, 농민, 지식인, 문인 등등), 젠더별(‘청년’, ‘소국민’, ‘총후부인’ 등)로 자신이 어떻게 ‘봉공(奉公)’하고 ‘보국(報國)’하는지를 전시했다. 주체들의 이러한 자기 전시 혹은 자기 증명은 전시체제 속에서 ‘진술적인(constative)’ 언어들이 ‘수행적인(performative)’ 언어로 전환되는 과정과 겹쳐지기도 한다. 예컨대, ‘나는 총후부인이다’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진술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참과 거짓의 판단과 연관되기보다는 오히려 ‘총후부인 되기’를 선언하는 것으로, 이를 끊임없이 자각하고 수행하는 실천을 동반하게 된다. ‘봉공(奉公)’이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이때의 ‘나’는 ‘나의 것’이기도 하며 ‘나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비상시의 ‘국민(國民)’이라면 심지어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는 것까지 일상의 매순간을 국가와 연관지어야 하며 ‘비국민(非國民)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공중(公衆) 앞에서 과잉된 언어와 제스추어로 자기를 전시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사회의 모든 혼란과 무질서의 원인이 ‘비상시’로 수렴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이해득실이나 생존의 문제도 ‘비상시’라는 말뚝에 얽매여 있었다. 

그런데 제국주의 전쟁이 초래한 ‘비상시’의 일상 속에서 이 수행적 언어들이 갖는 동원의 효과는 어디까지였을까. 전쟁이 장기화되고 비상시가 더 이상 비상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일상의 모든 것이 시국(時局)과 연관되어 있는 한편으로 그 시국의 긴장감은 둔화되어 버린 순간, ‘신체제’니 ‘봉공’이니 ‘보국’이니 하는 말이 어떤 감흥도 없이 상투어처럼 내뱉어지는 순간, 이러한 순간순간들에 ‘비상시’는 필연적으로 ‘의미의 과잉’이나 ‘무의미의 의미’를 낳는 것이 아닐까. 전시체제하 개개인의 신체가 일상적으로 국가적 의례와 결부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국가와 결속시키는 그 순간순간들에서, 의미의 충만을 넘어선 과잉들은 필연적으로 어떤 전도(顚倒)를 초래하지 않을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는 가장 ‘숭고한 것’이 가장 ‘통속적인 것’이 되고 ‘비속한 것’이 ‘성스러운 것’으로 뒤집히는 상황이다. 



그림1. 「극장에 늘어선 사람들에게 일감을 준다면」
출처: 《신시대》1941년 5월호, 182쪽




그림2. 「악극단」
출처: 《신시대》1941년 5월호, 180쪽

중일전쟁 발발 이후 식민 도시 경성의 극장가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어트랙션(attraction)’은 ‘비상시’가 초래한 넌센스의 상황들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관객을 극장으로 유인하기 위해 메인 프로그램에 부수적으로 편성된 쇼를 일컫던 어트랙션은, 당시 경성에서 연극이나 영화와 거의 맞먹을 정도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여 때로는 연극과 영화의 아성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1930년대를 지나며 담론화되었던 ‘도시=소비/농촌=생산’의 이분법적 구획이 전시체제기에는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한편에서 도시에 집중되었던 극장을 농산어촌, 공장, 광산 등의 생산지대로 확산시키는 ‘이동극장’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숙(自肅)’과 ‘내핍(耐乏)’이 강조되는 사회적 분위기라고 해서 전쟁 전에 이미 팽창해 있었던 문화적 욕구들이 경성의 극장가에서 아주 사그라진 것도 아니었다.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서양영화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던 시기 프로그램의 공백을 메워가던 악극과 어트랙션이 전쟁의 장기화와 더불어 점차 프로그램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상황, 그리고 그 버라이어티 쇼가 반서구 정책에 의해 부정되었던 ‘재즈(Jazz)’나 ‘양풍(洋風)’을 풍부하게 접속할 수 있는 장소로서 위치된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근대의 극장은 언제나 국가 권력의 통제 아래 있었지만, 철저하고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1)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경무국장에게 보내는 我等의 書」《삼천리》1937년 1월, 162~166쪽. ‘친일’과 ‘반일’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무너뜨리며 식민지 시기의 다채로운 풍경에 주목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김진송의 저서―『현대성의 형성: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현실문화, 1999)―가 이 공개서한의 제목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은 상징적이다. 

2) 이 공개서한은 일본의 시인 사토 하치로(サトウ・ハチロー, 1903-1973)가 만주사변을 전후한 시점에서 발표했던 ‘넌센스’들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소설가, 수필가, 동요 작사가 등으로도 활동한 사토는 방탕과 기행을 일삼았다고 전해지는데, 단편집 『아사쿠사(浅草)』(素人社, 1931)는 특유의 넌센스가 넘치는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 「경시청감에게 드리는 글(警視総監に与ふるの書)」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는바, 어쩌면 이서구는 공개서한의 제목을 구상하며 사토 하치로의 넌센스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사토 하치로의 넌센스와 관련한 아이디어는 미리엄 실버버그의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근대 일본의 대중문화』(강진석·강현정·서미석 옮김, 현실문화, 2014)에서 얻었다.

* 상단사진 1. 《삼천리》에 실린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기사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雙Q生「[거리의 수첩] 애트랙슌론(論)」《조선일보》1940년 6월 27일자, 4면.

흥행업자들에게 있어서 일 년 중 네 절기에 있어서 여름 같이 또 싫은 『씨-즌』은 없다. 우선 더워서 사람이 안 들어오니까 짐이고 낭패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름철만 어떻게 극장 문을 닫아버리고 그야말로 무슨 학교나 그런 곳 같이 ‘하기휴가’를 할래야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소위 요즘에 하나의 유행 같이 횡행하고 있는 『애트랙슌』인 것이다. 
지금 서울서 우리가 『써-비스』 받고 있는 『애트랙슌』이란 얼른 말하자면 영화를 보고 또 거기다가 덤으로 노래나 춤을 공으로 보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애트랙슌』은 이러한 본질적인 의의에 견주어보아서라도 어디까지나 가볍고 명랑하고 즐거워야 한다. 한다가 아니라 했으면 한다. 그렇지 못하고 그저 우리들로서는 뭐가 무엇인지 이해키 어려운 것을 가져다가 그저 아쉬운 대로 『애트랙슌』이란 딱지만 붙여 내놓는다면 이거야말로 『애트랙슌』으로서는 낙제하지 않을 수 없을 비참한 『애트랙슌』이다. 
그야 사람에 따라서는 그 사람의 취미나 교양에 따라서 영화보다도 『애트랙슌』에 끌리어 단순히 그것만을 보러 가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러한 관객이 하나라도 는다면 느는 그대로 극장으로서는 성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여튼 이 점에서 영화상설관은 연극상연단체나 극장보다는 유리하고 편리하다. 반대로 극단이나 연극만을 상연하는 극장은 그야말로 선전 『발류-』(value)가 찬란한 『애트랙슌』이 없이는 이 여름 한철을 무난히, 다시 말하면 결손 없이 돌파하기는 힘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화상설관에서는 『애트랙슌』이라는 미명 아래 값싼 오락물을 질서 없이 덤 주듯 한다면 이 역시 단순히 『애트랙슌』만을 보러 가지 않는 우리로서는 할 이야기가 과연 많을 줄 안다. 그것은 불평도 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항의도 될 수 있다. 


2. 요시무라 고도* 씨 담(談)「전시(戰時)의 생활 이대로 좋을까④ / 극장 앞에 늘어선 풍경 아메리카풍의 재즈와 레뷰 환영은 국민의 수치」《매일신보》1942년 1월 21일자, 4면. 

생활에서 영미 양풍을 쫓아내자

총후를 명랑케 하는 수단으로서 건전한 오락을 건설하는 것은 국민을 위하여 국가에서 대단히 생각해온 바입니다. 
시국과 관련하여 그처럼 건전 오락이 특별히 문제가 된 것은 지금까지의 오락이 건전치 못했던 때문이올시다. 그럼 지금까지의 오락이 왜 건전치를 못했나 하면 그것은 그 오락이란 것이 근대의 그 개인주의와 향락주의의 소산으로서 대개가 국민의 생활과 떠나서 순전히 향락적인 것으로 퇴폐해 갔기 때문이올시다. 만일 그 오락이 무슨 생활과 관계가 있었다면 그것은 도시의 유한(遊閑)한 젊은 남녀의 소비적인 향락 취미 생활에 뿌리를 박고 있었을 뿐일 겝니다. 그러니까 국민의 전체 생활로 보면 아무 관계없는 오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락이 저급해지고 타락이 된 데는 한편으로는 그것을 보아 온 여러분의 오락 취미가 그렇게 떨어져버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네가 자기의 취미를 돌아보면 잘 아실 겝니다. 극장에서 그 아메리카 풍의 재즈라든가 경박한 레뷰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극장 앞마다 장사의 진을 치고 젊은 남녀가 서로 어우러져서 몰려섰는 풍경은 이 시국에서 가장 보기 창피스러운 풍경의 하나인 줄 생각합니다. 이번 대동아의 전쟁이 되면서부터 당국에서도 적극적으로 통제를 하고 지도도 해서 일반 악극 단체에서도 많이 자숙해져서 이른바 악극에서 아메리카의 요소를 뽑아버리려는 노력도 있고 해서 퍽 색채가 달랐지만 근본 문제는 그 문제보다도 여러분 자신들의 오락에 대한 취미문제올시다. 여러분의 오락 취미로선 아직도 그런 아메리카의 경박한 향락적인 레뷰나 재즈를 좋아하는 경향이 마음에 남아 있다고 하면 이것은 국민으로서의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요, 또 자신네의 오락의 취미로서도 여간 부끄러운 바가 아닌 줄 압니다. 우리들의 모든 생활면에서 영미의 요소를 조사해가지고 청산해 버려야 할 이때에 우리 일상생활의 중요한 부분인 오락의 취미에 아직도 미국 같은 곳의 저급한 오락을 환영하는 경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것은 당국이나 지도 측에서 노력하고 지도할 점도 많겠지만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자진해서 깨닫고 오락에 대한 건전한 취미를 길러 가시기를 바랍니다. [강조는 원문]

 
*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 :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소설가 등으로 활동했던 박영희(1901∼?)의 창씨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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