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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된 주체성, 뿌연 환상

<도라지 불고기>(2025)

허락된 주체성, 뿌연 환상 대표 이미지
<도라지 불고기> 중


타인의 삶이 모이고 흩어지는 한 순간을 
카메라로 붙잡기로 결심한 또 다른 순간에 대해, 
프레임 밖에서 감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기획 배경

<도라지>의 주인공인 XX형과 나는 대학 동기다. 우리는 시각디자인과 축구 소모임에서 함께 뛰었다. 어느 날 형은 자기가 초·중·고교를 조선학교에서 보냈으며, 그곳은 일본에서 교포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 사실에 특별한 호기심이 생기지 않아 더 묻지 않았다. 2학년을 마친 뒤 나는 군대에 갔고, 형은 휴학 없이 졸업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포수>(2022)로 처음 영상 매체를 다루기 시작했을 무렵, 내겐 다큐멘터리를 많이 찾아봐야만 할 것 같은 긴장감이 생겼다. 그러다 조선학교를 다룬 영화를 접하게 되었고, 이어서 비슷한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영화들이 내는 목소리에 대체로 동의할 수 있었다. (동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영화임에도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차별 속에서도 조국과 정체성을 잊지 않고 투쟁하는 영웅’으로 그려져 있었다. 영화는 그들을 ‘우리 민족’이라 강조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상을 지우는 방식으로 그들을 철저히 ‘그들’로 격리하는 것 같았다. 

이 영화들의 시선은 그들이 일본에서 핍박을 받더라도 조국을 잊지 않고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잊고 살아왔기 때문에 ‘늦게나마 돌봐야 할 불쌍한 사람들’이거나, ‘아픈 우리 역사의 교보재’였다. 선과 악, 피해와 가해의 구도가 분명하게 설정된 구조를 보며 ‘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라는 소재가 어떤 정치적 필요에 의해 선택된 대상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XX형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지만, 좀처럼 겹치지 않았다. 


불온한 이미지 

다큐멘터리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대체로 이렇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조선인을 향한 배제는 오늘날 조선학교를 향한 행정적 차별로 이어지고 있다.
고교무상화 제외는 제국주의의 잔재이며 우리 민족을 향한 차별이다.
이에 맞서 학교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조선학교 진학을 선택하고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더 훌륭하다거나, 일본인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지탄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이름 아래 존재하는 수만 가지의 삶을 윤리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 어쩌면 스스로를 규정하려는 개인에게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은 이제 안식처가 아닌 억압의 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학교와 총련의 영향력이 점점 옅어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일 것이다. ‘북한’이라는 짐을 굳이 짊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조선학교가 북한을 미화하거나 찬양하는 등 인권의 가치에서 벗어나는 교육 내용을 유지하는 한, 일본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교육은 정치를 떠나 보편적인 인권의 영역이며, 아이들의 학습권이 정치적 논리에 의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인권’의 문제가 양쪽 모두에 공존한다. 이렇게 학생 수 감소나 고교무상화 배제의 이유를 일본인의 차별로만 단순화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영화는 이 복잡함을 가린다.

<도라지 불고기> 중

밝히자면 나 역시 조선학교가 고교무상화에서 늘 제외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곳은 다양한 정체성의 가능성을 유지하게 하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이 논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면 먼저 가려져 있던 것들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슬픈 얼굴들을 앞세워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을 가리는 수법에 더 이상 진보가 있을까. 감출수록 더 미심쩍게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가려졌던 것들을 드러낸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하고 싶었다. 북한과의 연관성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남한과 일본 사회를 벌벌 떨게 할 만큼 실체적인 위협인지 되묻고 싶었다. 그래서 ‘불온한 이미지’를 원했다. 너무 당연한 모습이지만 조선학교와 재일조선인을 다루는 영화에서는 금기처럼 여겨질 법한 것들. 그러나 너무 당연한 모습들. 


촬영 과정

XX형에게 종종 나고야로 놀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마다 나는 나고야에 갈 바에야 도쿄에 가겠다며 진심을 담아 거절해 왔다. 그런데 막상 ‘찍을 거리’가 생기니 촬영 장비를 꾸려서 쫄래쫄래 나고야에 갈 계획을 세우는 내 모습이 꽤 머쓱했다. 

브이로그 형식을 택한 현실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오랜만에 보는 형은 물론, 처음 만나는 사람들까지 대뜸 카메라에 담아야 했다. 그러니 비교적 작은 카메라가 서로에게 덜 민망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작업에서 나는 사명감 넘치는 다큐멘터리스트가 아니라 재치 있는 브이로거여야 했다. 앞서 언급했듯, 실재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지우고 그들을 하나의 범주로만 불러내는 방식에 대해 나름의 대답을 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별다른 사건 없는 일상을 담기로 했다.

   
<도라지 불고기> 중 / 편집된 장면 중

다행히 형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무사히 나를 소개해 주었고, 다들 내 카메라를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나 역시 촬영을 위해 웃기고 귀여운 동생처럼 보이려 부단히 노력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의 부모님에게는 늘 호감을 샀다는 경험에서 나온 자신감도 있었다. 서울과 나고야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많이 가까워졌다. 물론 내겐 꿍꿍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는 된 것 같았다. 덕분에 <불고기>를 촬영할 때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본격적인’ 카메라를 들이밀 수 있었다.

나고야를 방문할 때마다 약과와 참기름, 고춧가루, 안동소주, 도라지즙, 쫀드기 같은 것들을 챙겨갔다. 누나들과 형들의 어머니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정도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됐다. 비록 나의 불순한 의도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어느새 그들은 내게 소중한 친구들이 되었다. 그래도 이제는 나고야보다 도쿄에 가고 싶다.

   
   
(상) 편집된 장면 중
(하) <도라지 불고기> 중 / 서울에 놀러온, 나고야에서 만난 친구들 (사진: 양지훈)


지워낸 얼굴

얼굴을 블러 처리한 선택은 예상보다 많은 말을 낳았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이를 두고 “존재를 부정당한 저들의 실체가 없는 아이덴티티의 시각화”라고 리뷰했지만, 그렇게 정의하면 내 의도와는 반대가 된다. 아마도 그 문장은 내 작업을 보호하기 위해 덧붙여진 수사였을 것이다. 보편의 윤리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익숙한 방식으로 묘사하는 편이 모두에게 안전했을 테니까.

블러 처리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나는 누군가 나를 카메라로 찍는 일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특정한 범주로서 누군가의 카메라 앞에 서야 한다면, 아마 더 힘들 것 같다. 그런데 바로 그 일을 내가 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근원적인 미안함이 있다. 그래서 가렸다.

<도라지 불고기>(2025)에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자연스럽고 정당한 선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카메라에 기록되어 특정 범주 안에 위치 지어질 가능성을 생각했을 때, 그게 꼭 의미 있거나 유익한 방식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늘 미안함은 욕망에게 지곤 한다. 그들의 삶에 기대지만, 얼굴까지 팔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맨얼굴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고 싶었다.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에 대상이라는 매개가 있고,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의 ‘날 것의 얼굴’은 관객에게 가장 좋은 구경거리다. 우리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마주 볼 수 없다. 일방적으로 응시할 뿐, 타인에게 얼굴을 내어주지는 않는다. 가려진 얼굴을 보며 관객들이 이 불균형한 관계를 자각하기를 바랐다. 이미지(를 보는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얼굴을 탐닉하고 점유해 왔다. 그것을 윤리라고 믿는 방식으로.

편집된 장면 중


드러낸 주체성

얼굴을 블러 처리한 선택 때문에 많은 비판을 전해 들었다. 비판은 대체로 한 곳으로 향한다. “감독이 대상의 개별성과 주체성을 소거했다”라는 의견이다. ‘개별성’을 소거했다는 지적은 겸허히 받아들인다. 얼굴은 그 사람을 증명하는 상징이다. 그 얼굴들을 모두 같게 만듦으로써, ‘재일조선인’이라는 집단화된 이미지를 내가 가장 적극적으로 생산한 모양새가 되었다. 작업의 가장 핵심적인 형식이 정작 작업이 문제 삼으려 했던 것을 스스로 앞장서 재현하고 말았다. 내가 극복하지 못한 부분이다.

하지만 ‘주체성’의 문제에서는 다르게 생각한다. 나는 창작자가 누군가에게 주체성을 주거나 뺏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도라지 불고기> 밖에서 그들은 각자 자기 삶의 주인이다. 하지만 작업(영화)의 주체는 작가(감독)이다. 프레임 안에 가둔 대상의 주체성을 드러내 보겠다는 고민은, 어쩌면 감독이 자기 윤리를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감독이 전권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대상의 주체성을 논하는 일은 그 자체로 시혜적이다. 감독이 ‘드러낸’ ‘주체성’이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며, 편집자의 손끝에서 빚어진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창작자가 제작 과정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태도는 자신의 욕망을 가장 앞에 두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욕망을 명분 뒤에 숨길수록, 영화를 향한 비평은 도덕의 문제로 치환되고 만다. 작품이 아닌 ‘의제’를 방패 삼아, 비판하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나쁜 위치에 세워버리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창작자는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숨어든다.

누군가를 위해 카메라를 든다는 사람의 말은 아직까지 믿지 못하겠다. 그 말은 카메라의 작동 원리를 타인에게 전가하며, 자신을 선한 주체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타인의 삶을 연료 삼아 예술가로 살아가려는 창작자의 야심과, 타인을 안전하게 관음하려는 관객의 시선이 만나는 지독히 탐욕적인 장소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 비대칭적이고 폭력적인 구조를 ‘대상의 주체성’이나 ‘재현의 당위’라는 말로 포장하는 순간, 예술은 비겁해진다. 감독이 ‘구원자’의 탈을 쓸 때 대상은 ‘수혜자’로 전락하지만, 감독이 ‘욕망하는 창작자’로 설 때 대상은 비로소 그 욕망과 거래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당사자가 된다. 물론 당장 이 기울어진 무게추를 평평하게 맞추지는 못하겠지만, 어쩌면 대상의 주체성이 생겨날 수 있는 희미한 가능성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불고기> 촬영 현장 (사진: XX형)



양지훈(시각예술가) l 다큐멘터리 제작에 수반되는 본질적인 폭력에 주목하며 다큐멘터리 이미지를 만든다.
<포수>(2022), <테이큰>(2023), <도라지 불고기>(2025)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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