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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흥사와 장안사

일제강점기극장 5

연흥사와 장안사 대표 이미지

연흥사(演興社)와 장안사(長安社)는 러일전쟁 직후 만들어진 조선인 극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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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흥사는 1907년 11월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송지만(宋芝萬), 이준동(李俊東), 이종진(李鍾振) 등이 절골, 즉 사동(寺洞) 장윤직(張潤稙)의 집을 개조하여 연희루(演戱樓)를 건축하고자 경시청에 청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연희장이 연흥사가 아닌가 한다.

이 정확한 위치는 탑골공원 왼편 훗날 조선극장 자리로,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30번지이다. 1912년 연흥사에서 연극공연을 본 바 있는 연극인 박진(朴珍)의 회고에 따르면, 동향(東向)에 비계목(飛階木)으로 만든 이층짜리 건물이었으며 일층 객석은 나무로 만든 장의자를 길쭉길쭉하게 놓았고 이층에는 삿자리를 깔았다고 한다. 당시 여느 조선인 극장과 마찬가지로 객석은 성별에 따라 나누어져 있어서 일층은 남자석, 이층은 여자석이었다. 1912년 여름에는 극장 천장에 선풍기를 달아 관객들로 하여금 한여름의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하여 관람의 편의를 높였다. 

 

사진 2. 딱지본 소설 『산천초목』의 표지에 그려진 연흥사의 모습(이해조, 유일서관, 1912)
 
초기 극장이 대게 그러하듯 운영자는 자주 교체되었다. 1908년 연흥사는 박원근(朴元根)이 총무를, 송종오(宋鐘五)가 감독을 맡았다. 개장 초기에는 창극을 주로 공연했으나, 극장을 경영해본 경험이 일천했던 데다가 전황으로 경영난이 닥치자 극장을 방매한다. 이후 전당포 주인 석숭환(石崇煥) 등이 돈을 대어 유지해 나갈 수 있었는데, 1909년 당시 석숭환이 연흥사에 투자하여 손해 본 액수만 3만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연흥사가 언제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단, 1908년 초부터 신문지상에 연흥사 광고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대 들어 연흥사는 다른 어떤 극장보다 신파극을 자주 공연한다. 이로써 경영난을 극복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신파극은, 1910년대 초반 조선인 극장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는데, 특히 연흥사는 신파극 공연을 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신파극 전용 극장이라 선전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진 역시 연흥사에서 이뤄진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 공연을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당대 사람들에게 연흥사는 신파극의 본산으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혁신단의 연흥사 공연은 1912년 2월 18일 <육혈포강도>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수전노(守錢奴)>, <소위휘선사자친죄(少尉揮善捨子親罪)> 등의 작품을 올렸는데, 쌀값 폭등으로 불경기가 도래하자 임시로 공연을 중단, 다시 개연하여 <선탐후개(先貪後改)>, <서승어적(庶勝於嫡)> 등을 공연했다.

이후 <눈물>이나 <장한몽> 같은 대표적 신파극 레퍼토리 공연이 큰 인기를 끌면서, 임성구의 혁신단은 신파극의 대표 주자로 인정받게 된다. 예컨대 <눈물> 공연을 본 ‘사동생’이라는 이름이 독자는, “나는 눈물 연극 구경을 갓다가, 부인셕에셔 일졔히 우는 것을 보면은, 졀로 눈물이, 것잡지 못하게 쏘다져요”1라며 극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장한몽>을 본 '애극생'이라는 관객은, “연흥샤 쟝한몽 연극은, 참 재미잇습듸다. 사람은, 엇지도 그리도, 만히 드러 가는지 매일 여젼하던 걸이오. 잇흔날브터는 즁편이라지오, 샹편 보고, 즁편 안 볼 슈 잇나, 불가불 일즉 언이 가, 보아야 하겟스니, 할인권 백인 신문이나, 오날은 일즉이 돌이게  하십시오”2라며 연흥사의 신파공연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을 표현했다. 

신파연극의 흥행 성공과 더불어 연흥사는 탕자음부가 모이는 곳이라는 오명도 쓰게 되었다. 이에 조산부(助産婦)양성소의 자선연주회 같은 공익적 역할의 공연을 개최하는 등 인식 개선에 나서기도 했다.

1914년 10월 8일, 연극장이 협소하여 공연하기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경무청에서 허가를 취소함으로써 연흥사는 돌연 문을 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이 바로 철거되지는 않았는데, 신파극을 대신하여 김창환, 이동백 등 명창들의 판소리 공연장으로 활용되다가 1915년 5월 무렵 철거된다. 철거된 자리는 빈터로 남아 있다가 7년 뒤인 1922년에 조선극장이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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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사는 동구(洞口) 내(內) 장대장동(張大將洞) 장사골에 건립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진은 장안사의 위치에 대해 “낙원동과 익선동 사이, 즉 단성사에서 동관대궐이라던 창덕궁을 향해 가는 큰 길과, 낙원동에서 경운동으로 가는 큰 길과의 사이”에 “동궐나뭇장(柴場)이라고 해서 넓은 공지가 있었는데 그 공지가 장안사가 있던 터”라고 회고했다. 

장안사의 건설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성사, 연흥사와 비슷하게 1907년 말에서 1908년 초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개장 초기에는 전통 연희를 비롯하여 중국의 경극을 상연하고, 활동사진도 상영했다. 개관 초기에는 관람자가 적어 여타 극장들처럼 경영난을 맞았지만, 연흥사나 단성사에서 연행하지 않는 “꼭두각시의 홍동지, 박첨지놀음과 광대 줄타기, 남사당패의 무동 서기, 서도잡가, 경기 입창 등”의 전통 연희를 주요 레퍼토리로 삼아 공연하면서 장안사만의 전문성을 살려 나갔다. 

 

사진 3. 장안사에서 상연된 중국연희 공연(《황성신문》, 1909년 4월 21일자, 3면.) 

장안사는 최홍석(崔弘錫)이 사장이던 1910년 4월 무렵 활동사진 영사기를 도입하여 프랑스 파테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시작했다.3 이에 학부(學部)에서는 장안사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을 중등 이상의 학교 교육에 활용하도록 지도하기도 했다.4 같은 해 5월부터는 파테회사가 아닌 일본인 흥행업자 가즈토키(和常)와 필름 배급계약을 체결하고 일본에서 오는 필름을 상영했다.5 1912년에는 잠시 서양인이 극장을 임대하여 지만관(志滿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요컨대 1910년대 초반 장안사는 활동사진관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12년 말 대정관, 우미관, 황금관 등 본격적인 활동사진관이 설립되어 운영되기 시작한 이래로는 송만갑, 김창룡 등의 명창이나 채란, 해선 등의 기생들에 의한 노래 공연이나 소위 구(舊)연극을 상연하는 장소로 더 유명했다.

장안사는 1915년경에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단성사가 화재로 소실된 뒤 단성사에서 연행하던 김재종(金在鍾) 일행이 장안사로 옮겨 연행을 계속한다는 기사가 있는 한편, 그들이 연흥사에서 연행한다 기사도 있다. 미루어 짐작컨대, 장안사의 극장 상태가 공연에 부적절했다기보다 시설이 괜찮은 연흥사를 택해 연행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장안사는 아마도 이즈음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1) 「독쟈구락부」, 《매일신보》, 1913년 10월 29일자, 3면.
2) 「독쟈구락부」, 《매일신보》, 1913년 11월 4일자, 3면.
3) 「광고」,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1일자, 3면.
4) 「교육에 활동」, 《황성신문》, 1910년 4월 17일자, 2면.
5) 「활동사진 계약」, 《황성신문》, 1910년 5월 17일자, 3면.



* 참고문헌
유민영, 『한국근대극장변천사』, 태학사, 1998, 116~151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50~52쪽.

* 사진1(상단). 혁신단 단장 임성구(《매일신보》, 1914년 2월 11일자, 3면.)


[자료] 《대한매일신보》, 1906.03.30. 
奉常劃提調李苾和氏가 人民敎育하기를 爲하야 上䟽한 全文이 如左하니 續
此臣所謂敎育一事庶可以爲日後來復之基也雖然所謂敎育者亦有古今之異其泥於古而昧於今者子莫之執也
若專尙今而棄舊則忘其本者也盖有國有民必有宗敎故宗敎興則其國興宗敎衰則其國衰環天下亘萬古不易之典也
夫孔孟之道我 國之宗敎也惟我邦國之不振由於宗敎之不興如欲振興其邦國必先懋興其宗敎也
今以遭世界更新之運不得不學今之學者又事勢之不得已也孔孟之敎係是三綱五常之道也必使幼冲之子弟經之以三經五常之道使不失其本然之彜性然後學今之學則中散萬事末合一理可以並行之不悖矣臣願 陛下深留聖意於斯亟令學部益勵敎育之責任
規模則先興孔孟道學之宗敎次修開明之新學節次則特加尊崇文廟仰瞻羹墻而俎豆絃誦升降拜揖使靑年子弟咸知慕聖之本義而尊重其宗敎焉
以成均舘爲大學校而京師則一署各置一中學校而一面各置小學校一里各置一村塾
小學校卒業之人陞之中學校焉中學校卒業之人陞之大學校焉定其課程第其高下歲拔其優等者薦之於政府而充補其相當職不出十年之間而仕於 朝者皆大學校卒業之人至於農商工亦莫不然而隨其人才派送各國各修其藝焉
又錄其敎師之勤者而薦用之又採私立學校者優施補助者而褒賞之不數年之內不費國金而學校之設必遍滿於 國中
然則三千里內養成之聰明子弟亦不少矣夫何患乎人才之不能就乎雖然敎育一事爲近日之例套語而已則終未見其效而今日之勢惟在實踐二字而已
臣願 先下詔勅令學部改定敎育一致之法上自太學至于各郡鄕校置大中小學校實行其作成人才之方
今漢城及各道道臣上 奏學校私立之人以勳章褒章以勸以奬焉臣雖不學的知今日 國家之興惟在敎育之興惟在宗敎之興故
忘其僭陋而爲 陛下國家一言之伏乞 陛下勿以臣之卑微而少 垂察其言則 國家幸甚生民幸甚 完


[자료] 《황성신문》, 1906.04.19. 
●李氏上疏 奉常副提調李苾和氏가
皇帝陛下께 上䟽한 全文이 如左하니 伏以臣向以興學校振敎育一事猥陳荒說優蒙 聖批至有令政府禀處之旨旣而大 詔煥發如綸如綍使於敎育人才事方專心講究俾有實効臣伏讀 詔書感極涕發窃有少湏臾無死之願而計以爲此時此 詔不啻若大旱之逢甘霈則其舉而行之宜必汲汲如不及以對揚休命矣伏竢累日以臣之躁妄實不能無滋惑焉盖今日百獘之本惟以虛文二字爲詐飾若幷此敎育一事而亦歸虛文則臣所謂國家來復之基永無其望矣然則臣安得不心枯膓焦疾聲㪅籲於
天陛之下哉我國素穪文明而至于近日禮義都毀而學問盡味則昔之爲文明者旣不可復見矣又於新學問者亦未有一人能窺其藩籬者然則可謂東敗西傷矣爲今之計莫如尊重太學申明先聖之道責任學部篤習當時之務使宗敎復明繼聖訓開來學以忠愛爲義務然後弱可爲强野可爲文國權可以光復文運可以賁篩臣旣以敎育不行爲憂而冒此煩陳則固不當㪅攙他說而區區忠激之意有不容不一陳者尙有數事焉其一即掌禮院旌褒例納錢事也夫忠孝烈旌閭乃是國家所以扶植綱常敦尙風化之大柄也有其實者亦當精擇審知然後可許其棹楔之典况乎無其實者乎今則不然不問事行之虛實惟視例納金八百之有無而許之碍之則是行迹爲虛而例納爲實也雖有忠孝烈實蹟必湮沒於千古而不得闡揚於世矣此豈 廟堂立法之本意哉伏乞 亟下嚴勅于掌禮之臣永革其旌閭例納錢凡干係 恩典者必令道臣博釆而審知之然後 奏聞請褒若有循私納賄誣虛而爲實者該呈狀人及道臣幷論罪以勵風化千萬幸甚其一即判任官及地方官俸金與兵丁巡檢掖庭所屬吏胥皂隷之月料事也夫仕者祿足以代其耕然後可以忘父母妻子之憂而能盡心職事不生他念矣今夫判任官及地方官之俸給僅足以資其一身而不能食其父母妻子則雖持心淸白者不爲事勢所牽者鮮矣書曰旣富方糓富而後能善古昔帝王之使臣工先富其身而使善其心此所以必先重祿使之忘其憂也伏乞陛下垂察焉內而府部院廳判任官巡檢兵丁掖庭所屬吏胥皂隷之屬外而觀察守宰鄕將吏輩使喚之屬當厚其俸給使之忘其家憂而盡其職事如是而有不用命者論罪而正法綱焉則千萬幸甚其一卽協律社貽獘事也臣聞孔子於顏子以爲邦之道必曰放鄭聲今夫協律社者臣雖不知其主倡之爲何人然臣聞其通宵設戱男女雜遝鬪爭易起亂淫相屬此豈非鄭聲乎大抵習舞演劇之戱於外國亦皆有之不過是俳優丐賤之軰區區營生者而如今協律社之穪以 宮內府所管發票營利者東西列邦所未聞見事也淫聲亂色眩惑耳目傷風敗俗年少之學問實業一不留心淫風從生實爲國家人民憂者此也伏乞
陛下亟令警廳不日嚴禁以絕亂階申飭掌樂之臣復講法樂千萬幸甚右臣所言諸條雖皆當今之可行而語其最急且大者則果能上下一心務進敎育之實而國家人民之知識一開則如貪賂之俗淆雜之風亂淫之戱雖不禁而人自耻焉而不爲矣伏望
陛下留 神裁察焉하소셔하얏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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