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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 수 있는 직업으로서의 ‘영화평론가’

<플란단스의 개>(봉준호, 2000)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으로서의 ‘영화평론가’ 대표 이미지
<플란다스의 개>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 질문. 영화평론가와 아닌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때는 비평의 태도로 영화글을 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비평’의 의미를 정의해보려고 했고, 내 안에서만 작동하는 매우 보수적인 기준을 세워보려 했던 시절도 있었다. (《씨네21》이나 《부산일보》 등 매체에서 평론상을 받고 등단한 사람? 적어도 영화 관련 전공 대학원 석사 이상 학위를 소지한 자?) 요즘은 그냥 본인을 영화평론가라고 지칭하느냐 마느냐, 에 달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보기엔 쓰는 글에 차이가 없는데 누군가는 “어이쿠, 제가 감히? 어떻게? 영화평론가인가요? 그냥 리뷰어, 리뷰어!”라고 손사래를 치고 누군가는 영화평론가라고 본인을 수식하며 강연을 다닌다. (이것을 자신감의 차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그런데 영화평론가는 ‘영화력’의 등급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 아니었나. 이를테면 내가 이른바 언론고시를 준비했었고 ‘취재’를 직업적 정체성으로 생각하며 12년 동안 일했던 사람인지라 스스로를 ‘기자’라고 먼저 정의하는 것처럼. 어찌 됐든 자아 성찰 끝에 스스로를 ‘영화평론가’라고 지칭할 근거를 찾고 주변에서도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는 사람들, 이라고 얼렁뚱땅 정의를 내린 후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한국에서 ‘영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은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비평가의 정체성이나 비평의 의미를 논하는 글이 아닌,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취미로 영화평론을 한다면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 브런치에 글을 올리거나 뉴스레터를 발행해도 되겠지만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글을 기고할 수 있는 매체를 확보하는 것이 권장된다. 영화 잡지가 여럿 존재했던 전성기(너무 아득해서 역사책에 나오는 얘기 같다)를 지나 지금은 비평을 실을 수 있는 매체가 얼마나 있는가? 그러니까 이 시장이 충분한 독자층을 갖고 있나? 구독 매출만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기성 지면 매체는 결국 광고 없이 생존할 수 없다. 영화 관련 지면에 가장 많이 들어올 법한 광고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영화다. 광고 집행을 결정하는 광고주 그리고 그들이 파는 영화를 비평하는 글이 실리는 매체의 협력 때로는 신경전은 그 역사가 참 유구해서 새삼스럽게 언급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그 와중에 영화 시장은 어려워지고 마케팅 트렌드가 급변했으며 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다. 멋진 독립 잡지들을 기획하고 발행하는 업계 동료들은 매체의 딜레마와 극장 산업 하락세, 비평의 위기 속에서 나름의 전략을 갖고 비평이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창구를 확장해 가고 있다. 늘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다.

영화평론가를 꿈꾸는 어느 20대 학생에게 “글만 쓰면서 먹고 살 수 없다”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더니 “관객과의 대화(GV)를 다수 진행하며 커리어를 키우고 싶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냉정하게 계산해 보겠다. 영화글과 GV 모더레이터 활동을 병행하는 것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매달 원고지 200자 기준 70~100매의 원고를 쓸 수 있는 (원고료를 후려치지 않고 입금이 밀리지도 않는) 안정적인 지면이 마련되어 있고 매달 5~10개의 GV를 진행해야 한다. 그러면 최저 임금 수준의 돈을 벌 수 있다. 글을 기고할 수 있는 매체든 GV든 이미 탄탄한 네트워크를 만든 선배들과 한정된 자리를 갖고 경쟁해야 하는 것도 명심할 것. 이 와중에 진행비를 안 받거나 최소한만 받고 하겠다는 더 유명한 사람이 나타나면 나라도 그 사람에게 맡길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자기 PR’의 기회로 삼아 방송 출연 기회까지 가닿는다면 돈벌이 면에서 나아질 수 있다. 당연한 소리지만 방송 출연료가 원고료나 모더레이터 진행비보다 들이는 시간 대비 수입이 높다. 방송 경험을 인정받아 안정적인 방송인으로 활동할 수 있다면 ‘영화평론가’여도 나름 괜찮은 수입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고정 방송 스케줄이 존재하는 영화평론가나 기자가 몇 명이나 있는지 떠올려보길 바란다. 요즘 영화 자체가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GV 문화가 사라진다면? 지금이야 존재하지만 딱히 대체할 마케팅 방식을 찾지 못해 지속되는 것일 뿐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안다. 나는 모더레이터 일을 병행하는 사람 중에 “언젠가 이 시장이 사라질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방송 출연 스케줄이 있는 사람들도 똑같이 말한다. 그밖에 대표적인 부업으로는 대학이나 교육기관 강연, 영화제 심사 등등이 있다. 그렇게 믿을 구석 없는 프리랜서는 알아서 경력 쌓고 인맥 만들고 일거리를 따와야 한다.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배들은 비평 기고, 모더레이터, 교육기관 강연, 영화제 심사가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멋지게 개척했다. 역시 저 정도 기획력과 추진력이 있어야 오래오래 살아남는 걸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아, 한 가지 확실한 길이 생각났다. 바로 영화과 교수가 되는 것이다. 본업은 교수, 부업은 평론가라니, 할 수만 있다면 갖고 싶은 부러운 삶이다. 그러려면 석박사 학위부터 필요하겠지? 물론 쉽지 않다. 십 년 전쯤 “다 때려치우고 뉴욕의 모 영화 학교나 갈까?” 하고 정보를 알아볼 때 억대 학비와 생활비가 들어간다는 그 학교에 이미 다니고 있는 학생이 “여기 한국인이 되게 많고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그럼 우리끼리만 해도 경쟁률이…. 저요? 요즘 《씨네21》 영화평론상 준비하고 있어요”라고 말해서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이 난다. 석박사 학위, 그리고 꽤 많은 돈이 깨지는 유학 경력만으로 보장되는 것은 없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잘 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이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였다. 예술가보다는 인문대 시간 강사가 영화기자 및 평론가의 상황과 비슷해서라기보다는, 극중 캐릭터들이 처한 곤궁과 선택이 닮아서였다. 윤주(이성재)는 “여성들이 원하는 배우자의 직업 순위 48위 광부, 49위 농부”보다 순위가 낮은 “50위 인문계 대학원생”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인문대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지만 교수 임용이 되지 못해 경제적으로 아내에게 의지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내 개 짖는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린 그는 결국 강아지들을 납치해 감금 혹은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 시작하는데, 정작 임신한 아내가 반려견을 집에 데려온다. 아내가 애지중지하는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가 실수로 잃어버린 후 윤주의 입장도 달라진다. 아파트 경비실 경리 현남(배두나)과 함께 강아지를 찾아 헤매던 그는 마지막 남은 양심을 걸고 자신이 독거 할머니의 강아지를 죽인 범인이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만취한 현남은 알아채지 못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한국의 일상적 공간에서 장르성과 정치 역학을 포착한 뒤 치밀하게 때로는 분방하게 교차해 온 봉준호 감독의 인장을 일찌감치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복도식 아파트, 지하실, 경비 사무실은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의 가능성을 시험할 수 있는 무대이자 한국 소시민 사회의 축소판이다. 현남은 사회 정의 실현으로, 윤주는 명예와 물질적 보상으로 일종의 신분 상승을 노리지만 완벽히 실현되지 못한다. 공교롭게도 현남에게는 명예와 물질적 보상이 부족했고, 윤주는 윤리를 저버린 타락한 소시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남의 행위는 대가가 허무했고(할머니가 남긴 건 무말랭이가 전부다) 그의 영웅적 행위는 널리 알려지지 못한다(그는 인터뷰에 응하지만 TV 뉴스는 그의 존재를 지운다). 강아지를 구한 자신의 인터뷰를 편집한 TV 뉴스에 실망한 현남은 아파트 경비실 경리직에서도 근무 태만으로 해고되고 친구와 함께 산으로 도피한다. 윤주는 아내가 퇴직금으로 마련한 천오백만 원을 뇌물로 바치면서 교수 임용에는 성공하지만, 마지막 양심 고백이 가닿지 못해 윤리의 최저선을 방어할 기회를 무산시킨다.
 
   
현남과 윤주

새로운 영화 담론을 제시해 사유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비평의 욕망에는, 이런 행위가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을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시킬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가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비평의 자리가 좁아지면서 나의 행위가 누구에게 전해지고 있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직업적 자아실현과 ‘먹고사니즘’이 충돌할 때 우리는 때로는 타협한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A지만, 꾸준히 A를 할 수 있는 미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B와 C까지 하는 것이라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 생계 압박이 낳은 조바심이 내가 설정한 하한선을 위협할 때, 아니 그 하한선을 어디까지 더 내려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찾아온다. 영화기자와 영화평론가의 현실적 고민은 대체로 윤주와 현남 사이를 오간다. 그래도 윤주의 선택이 현실에 가깝다고 자조하기보다는 현남의 소우주에서 싹튼 정의감이 소소하게라도 이어졌으면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런 성향의 인간이라 아직 좋은 글과 좋은 영화가 주는 성취감을 믿고 악착같이 붙잡고 있다.



임수연(영화기자) l 어렸을 때는 물리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니 영화기자가 되어 있었다.
《씨네21》에서 영화를 포함한 미디어 업계 전반을 취재하며 다양한 심층 리포트를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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