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한 미공보원과 주한 원조 기관의 시청각 공보 활동 1945~1967』

윤상길, 2025 (컬처룩)

『주한 미공보원과 주한 원조 기관의 시청각 공보 활동 1945~1967』 대표 이미지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삶을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길에 우연히 접어드는 일이 있다. 뜻하지 않은 길이기에 우선 두려움이 앞서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막다른 길에 무엇이 기다릴지 혹은 누구를 만나게 될지를 상상하며 설렘의 감정에 빠져들기도 한다. 필자가 연구를 시작하게 된 상황과 정확히 같다.

학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일제강점기 전화의 역사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한 후, 잇따라 통신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미디어인 유선방송의 역사를 정리하거나 신문용지 또는 신문배달원, 옥외광고, 노래방, 통신교육 등 ‘간과된 미디어’의 역사에 관심을 두고 연구해 오던 차에, 그리 친하지 않은 선배 연구자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그간 주로 도서관이나 헌책방을 뒤져가며 수집한 국내 자료와 일본 자료를 가지고 연구해 오던 필자에게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아카이브 자료를 가지고 함께 연구하자는 제안이었다.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두려움이 앞섰던 이유는 간단하다. 한 번도 본격적으로 시도해보지 않은 아카이브 연구이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이 앞섰지만, 주로 일국사적(一國史的) 관점에 서 있었던 시야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컸다. 또 아카이브 연구에 대한 경험은 일천했으나 역사 연구의 원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두려움은 진정되었다. 사실 역사 연구의 원리는 간단하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야기를 짜는 일’은 ‘베를 짜는 일’에 그 연원을 둘 만큼 기본적으로 ‘엮는 일’이다. 즉, 수집한 사료를 읽고 정리하고 분류해서 일정한 관점에 따라 (실로 엮듯이) 엮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기대를 어긋나게 하듯, 이후 수십만 장의 미국 공문서들이 공포스럽게도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한 미공보원의 영화 공보 활동과 주한 원조기관의 활동에 대한 주제를 구상한 계기는 그간 유선방송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필자의 잠재의식에서 묻혀 있던 의구심이었다. 4.19 혁명 직후 국내 유선라디오 방송사 설립 붐이 있던 시기에, 부족한 전선을 메우기 위해 미국 원조기관의 지원을 통해 미8군의 군용선을 사용했다는 기록을 처음 접했을 때, 필자에게 든 의구심은 한국의 미디어들이 성장하는 데 있어 미국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집필 과정에서 미국문서를 통해 사실적으로 확인해 보니, 1950~60년대에 걸쳐 미디어 분야에 있어서 미국의 영향은 매우 컸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한국 미디어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미국의 세계 공보 전략의 일환으로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매우 체계적인 커뮤니케이션 개발 철학에 의해 수행되었고, 그 핵심에는 자본주의적 심성의 전수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1956년 3월 2일 당시 주한 미공보원의 문화원과 한국 문화원 현황
(사진: Meetings of Cultural Center Directors, March 2, 1956(RG 306, W-347, John P. McKnight, USIS-Korea → USIA-Washington, Box 134)

처음 경험해 보는 아카이브 연구이자 미디어 분야의 한미관계를 주제로 한 연구였지만, 책을 집필한 이후에도 여전히 남는 질문이 있다. 과연 냉전기 미국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인가? 과거 한국의 미국화에 대한 우려 섞인 논평들도 있었고 그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역사 연구가 진행되기도 했다. 나름의 적실성 있는 지적과 성과이지만, 사실 집필을 마친 후에도 여전히 이 질문은 해소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주된 이유는 아마도 필자가 미처 사실에 기반하여 명확히 해명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일부 규명되긴 했으나 주한 미공보원이 제작해서 배급·상영했던 수많은 영화의 내용과 한국인들의 반응에 대한 사실적 해명은 물론이고, 미국이 이식하려고 했던 자본주의적·개발주의적 심성이 한국 정부 관료와 일상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해명 또한 필요하다.

1961년 국립영화제작소의 영화촬영반 차량 (사진: “국립영화제작소”, 국가기록원)

집필 이후에도 수많은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이지만, 우연에 의해 시작되었던 연구 여정의 끝은 개인적으로 의도하지 않았던 큰 깨달음이었다. 집필 중에도 한국 국가기록원의 아카이브 자료를 이용한 한일 간 전파월경(spill-over)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일국사적 관점에서 탈피하게 된 것은 의도한 것이었지만, 학술공동체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될 줄은 짐작도 못했다. 선배 연구자의 후학을 배려한 마음에서 집필이 시작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저서를 발행하는 과정과 발행 이후에 출판사와 학계 선후배가 전해주는 따뜻한 격려는 새삼스레 학술공동체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계기였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 이제 수많은 어려움이 동반되는 아카이브 연구에 임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역사 연구에 입문하기를 꺼리는 세태 속에서, 필자가 겪었던 체험이 혹여 이 글을 읽고 있을 젊은 연구자나 독자에게 작은 희망을 선사해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느 후배가 필자의 저서에 대해 남긴 말이 있다. 필자가 동참한 일련의 시리즈 연구서가 간행된 것으로 보면서, “냉전기 한국 미디어 문화에 대한 집단 연구로 인해 이제 냉전기 한국 미디어사 연구는 어느 정도 종결되었고, 앞으로 새로운 시작점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 말을 단순히 후배의 호의 어린 평가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이유는, 현 시점에서 미국 넷플릭스의 공습으로 인해 국내 콘텐츠 산업 안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화 초기였던 1980년대 초반의 상황도 지금과 유사했다. 1950년대 말부터 한국인들의 안방극장 중 한 자리를 차지고 있던 AFKN-TV가 1983년 위성중계를 결정하자, 당시 한국사회에는 ‘미국 대중문화의 침투’를 ‘문화 제국주의’라 칭하며 우려했다. 지금 국내 콘텐츠 산업의 담당자들 또한 ‘문화 제국주의’를 운운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국면 속의 미국을 다시 만나야 할 시간이다.



윤상길(언론정보학 연구자) l 미디어의 인프라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다양한 미디어 역사 연구를 해왔으며, 
최근에는 1980~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국면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작으로는 『19세기 동아시아 통신 네트워크와 국제 정치』(2019, 동북아역사재단)가 있다.

관련 영화인

불러오는 중입니다.

관련 영화글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