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감점기 극장
황실희대(협률사, 관인구락부, 원각사)
일제강점기극장 2
개항장에 극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이후, 이에 영향 받은 조선인들도 극장을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은 황제가 사는 공간이라는 상징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 보니 한성의 극장 역시 황실 의례와 관련해 시작되었다.
조선인이 한성에 설립한 최초의 상설극장은 대한제국 황실에서 1902년 세운 희대(戲臺)이다. 희대는 고종황제의 망육순(望六旬)[필자 주: 육순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51세를 가리킴.]과 어극(御極) 40년을 기념하는 칭경예식(稱慶禮式)을 위해 봉상시(奉常寺) 내에 500석 정도의 규모로 설치되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반영하는 원형의 2층 건물로 계단 형태의 객석과 직사각형 모양의 무대를 갖추고 있었다.
황실희대는 통칭 ‘협률사(協律社)’ 혹은 ‘원각사(圓覺社)’라고 불렸다. 이는 희대를 빌려 연희를 공연하던 회사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칭경예식의 날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1902년 9월 토사병이 유행한다. 칭경예식은 다음 해 4월로 연기되었으나, 다음해 4월에도 영친왕의 천연두 발병 등을 이유로 또 다시 연기된다. 이후 칭경예식은 유야무야 되거나 약식으로 치러진 것으로 보인다.
칭경예식을 위해 많은 예인들이 한성에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칭경예식에 소용하는 예인들을 관리하던 삼패도감(三牌都監)의 장봉환(張鳳煥)과 모종의 세력이 합세하여 연희 회사를 세우고 이름을 협률사라 불렀다. 협률사는 칭경예식에 참여하기 위해 한성에 올라온 남녀 예인들의 공연을 희대에 올렸으며 잠시 활동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활발히 전개되던 협률사의 희대 공연은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1904년 3월경 폐지되었다.
이처럼 협률사는 황실 극장인 희대가 만들어지고, 칭경예식을 위해 전국에서 올라온 예인들을 이용하여 돈을 벌어보고자 했던 일군의 사람들이 예인을 관리하던 삼패도감의 장봉환과 함께 수익 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협률사의 등장과 더불어 비슷한 전문 연예단체들이 생겨나면서, 이들 단체에서 극장을 대여하여 흥행을 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동대문활동사진소를 빌려 사용한 광무대의 박승필을 비롯하여, 박춘재, 김재종 등 유명 연예패들과 임성구, 이기세, 윤백남 등 신파극단을 이끌던 인물들이 극단과 더불어 연흥사, 원각사, 개성좌(開城座) 등의 극장을 함께 운영했다.
러일전쟁 이후, 극장을 이용하여 수익도 얻고 선전장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협률사가 복설(復設)된다. 다방면의 노력 끝에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 2월 하순에 복설된 협률사는 김용제(金鎔濟), 최상돈(崔相敦), 고희준(高羲駿)이 조직한 순 사영(私營)의 연예회사였다. 당시 협률사의 운영비는 친일조직인 ‘일진회’(一進會)가 댔으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려는 세력이 후원했다.
협률사의 복설은, 러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한 일본이 조선인의 관심을 흥행물에 돌리기 위해 강구한 조치였다. 따라서 협률사를 혁파해야 한다는 의견이 속출했다. 봉상사(奉常司) 부제조 이필화(李苾和)의 상소로 결국 고종은 1906년 4월 협률사를 혁파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일본인 임차인이 오히려 위약금 25만원을 청구하면서 협률사 혁파는 흐지부지된다.
1907년 2월,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에서 협률사가 운영하던 희대를 사용하여 각종 연희를 올리고 활동사진을 상영한다. 이어 1908년 7월 26일, 이완용(李完用)의 비서로 일제의 조선침략에 동참하고 있던 이인직(李人稙)과 박정동(朴晶東) 등이 경시청으로부터 희대를 연극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고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연희를 시작했다. 원각사에는 김창환(金昌煥)을 위시한 창부(唱夫) 40명과 가기(歌妓) 24명, 총 64명의 예인(藝人)들이 있었다.
1911년 10월, 한시적으로 《조선신문》 언문판이 발간된 적이 있었다. 그 기념호에 실린 「연극의 월조(月朝)」라는 글에는 경성고등연예관에서 상영한 <엄비국장(嚴妃國葬)>[필자 주: ‘엄비(嚴妃)’로 알려진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의 장례를 찍은 실사를 일컬음.]과 원각사에서 개연한 ‘금강산 환등 대회’가 소개되어 있다.
△ 일젼에 엄비국장이라ᄂᆞᆫ 활동광고를 돌이기에 본긔자가 일ᄎᆞ 구경즉 쳐량 감상도 나고 조션 고속된 졀ᄎᆞ도 젼야 구경치 못 ᄉᆞᄅᆞᆷ의 안목에 가히 흥감ᄒᆞᆯ 만즉 연극 즁 활동ᄉᆞ진은 더욱 진젹 거동을 구경ᄒᆞᆯ 만다고 탄식얏더니...
△ 원각에셔 금강산환등을 갈가 단다 기에 슈삼 지긔를 잇글고 완상즉 금강산 일만이쳔봉이 완연이 안즁에 나렬지라 (중략) 일사십여쳐를 완상니
△ 본 긔가 의 금강을 구경지 우금 삼십이년이라 영숙 산쳔과 긔이 고적이 반가온 마음이 졀로 나고 조션에도 여차 셰게에 랑 만 명산 쳔이 잇슴을 감탄엿슴으로 연극장 쥬무를 방문야 그 환등의 력사를 무르니 리희직(李熙直) 김진우(金振宇) 량씨 본래 지사인 사진사 신장균(申章均)씨와 동행야 금년 오월에 금강산 탐험로 쳔신만고를 불구고 외산 명승고젹을 촬영야 환등에 삽입야 구경치 못 동포의 안공에 구경케니 삼군의 지긔도 흠탄거니와 구경시 동포도 응당 감상이 게시고 신션 졍신도 환셩지로다1
위 기사에서 기자는 <엄비국장>에 대해 ‘진적한 거동을 구경할 만하다’고 언급하는 데 그친 반면, 140여장의 금강산 사진에 대해서는 극장 주무자(主務者)를 만나 환등을 제작, 상연한 내역까지 물어 듣고 감탄 어린 소감을 늘어놓는다. 이는 <엄비국장> 상영보다도 ‘금강산 환등 대회’가 조선의 관객들에게 더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켰음을 의미한다. 실제로도 ‘금강산 환등’은 조선인 관객들의 환영을 받아 원각사에서 장안사로 옮겨 흥행을 이어 갔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관객들은 왜 활동사진보다 환등에 더 흥미를 느꼈을까? 당시 활동사진 설명은 전설(前說)뿐이었다. 다시 말해, 간단한 설명 후에 10분 내외의 활동사진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필름은 대부분 쇼트 몇 개를 일정한 속도로 배열한 것이었고, 그 속도에 맞춰 변사가 설명하는 중설(中說)은 당시로써 구사하기 힘들었다. 반면 환등은 하나의 사진을 변사(설명자)가 자세히 풀어줄 수 있었다. 요컨대 관객들은 활동사진보다 환등의 사진을 보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취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활동사진을 상영할 때나 환등을 비출 때나 다 변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이 탄생하고 나서야 조선에 변사가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경성고등연예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변사의 연행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황실희대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하는데,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畯)이 변사들에게 활동사진 연설의 방침을 전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관객들은 왜 활동사진보다 환등에 더 흥미를 느꼈을까? 당시 활동사진 설명은 전설(前說)뿐이었다. 다시 말해, 간단한 설명 후에 10분 내외의 활동사진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필름은 대부분 쇼트 몇 개를 일정한 속도로 배열한 것이었고, 그 속도에 맞춰 변사가 설명하는 중설(中說)은 당시로써 구사하기 힘들었다. 반면 환등은 하나의 사진을 변사(설명자)가 자세히 풀어줄 수 있었다. 요컨대 관객들은 활동사진보다 환등의 사진을 보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취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활동사진을 상영할 때나 환등을 비출 때나 다 변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이 탄생하고 나서야 조선에 변사가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경성고등연예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변사의 연행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황실희대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하는데,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畯)이 변사들에게 활동사진 연설의 방침을 전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이다.
사진 2. 변사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애국부인회 활동사진 기사(《황성신문》 1908년 6월 24일자.)
위 사진의 기사는 경성고등연예관에서부터 변사 연행이 본격화되었다는 일반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조희문 역시 경성고등연예관 설립 이전에도 직업적 변사는 아닐지언정 일시적으로 활동사진 설명에 나선 인물이 있었으며, 단성사, 연흥사, 장안사 등 조선인이 세운 극장이 탄생하던 1907~8년 무렵에는 이미 조선인 변사도 나름의 위치를 차지했음을 여러 명의 변사가 실증한다고 주장한다.2
나아가 위 기사는 변사의 시조로 불리는 우정식(禹正植)이 원각사에서부터 변사 활동을 시작했다는 심훈(沈熏)의 증언도 뒷받침 해준다. 기사에 언급된 관인구락부는, 상술한바 원각사의 전신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변사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극장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된 것을 계기로 등장했으며, 관인구락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서양 혹은 일본의 선진 문물을 조선의 관객들에게 소개해 주는 강사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문물을 경험해 본 관리 중에 선택된 인물들이 주로 변사로 활동했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기사에 언급된 인물 중 정운복(鄭雲復)은 오사카상업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영국유학과 구미 각국 시찰을 경험했던 인물로, 일제의 조선침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언론 계통의 인물이었다. 김상연(金祥演)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에서 활동한 바 있는 언론 계통의 친일 관료였다. 한석진(韓錫振) 역시 《황성신문》과 그 후신인 《한성신문》에 관여했다. 이처럼 최초의 변사들이라 할 만한 인물들은 서구문물을 경험한 이들로서, 신문물을 조선에 소개하고 근대화를 주장하는 웅변가의 역할을 수행했다 할 수 있다.
1910년을 전후하여 유광관(有光館)이라는 활동사진과 연극장으로 사용되던 원각사는 아쉽게도 얼마가지 못해 영업을 중지했으며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1) 「연극의 월조」 《조선신문》 1911년 10월 1일자.
2) 조희문, 『한국영화의 쟁점 1』, 집문당, 2002, 130쪽 참고.
* 본문은 필자의 『조선영화의 탄생』((주)박이정, 2018) 40~42, 209~211쪽의 내용을 발췌,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사진 1(글 상단). 황실희대(원각사)의 외관
[자료] "논설: 술객문", 《황성신문》 1903.01.17.
◎歲月이 荏苒야 於焉之間에 陰曆年終이 又迫니 歲暮天寒에 北風其凉고 梅花淡屋에 雪月이 滿庭이라 有鄕居一客이 孤枕冷燈에 耿耿無寐야 起拂布袍고 徘徊月庭이라가 負手緩步야 行訪一名士之家러니 適値諸名士ㅣ 與京鄕友朋으로 爛漫會飮이라 客이 亦參座末이러니 數盃酒闌에 滿座酒人이 詼諧談笑로 各自論懷더니 一人曰 吾輩 從今以後로 無用於世로다 何事를 爲業지 欲看書而懶厭고 欲聚財而無資니 除非親舊之尋訪이면 終日老屋에 無聊消遣니 沁沁難耐일셰 子 有何消日고 一人曰 吾亦 云云일셰 近日 某友家에셔 西廂記를 借來얏더니 此亦語錄을 難解야 滋味가 殊沒일네 一人曰 我 某友某友로 一分기쑤시기로 漿羹飯을 每夜 喫之지 然이나 細雨도 濕衣라고 그럭저럭 十餘元을 見失네 一人曰 吾儕가 今夕에 花鬪나 이볼가 一人曰 且置고 協律社 귀경이나 가셰 壯觀일네 眞壯觀일네 春香이와 御史出道壯觀일네 一人이 顧謂鄕客曰 彼公은 무엇려 京來나 朝飯夕粥 喂牛突에 進士主가 上福이지 一齋郞 一主事나 宕巾味를 甞랴고 旅舘客苦 何如고 無錢면 쓸업 鄕客曰 아모리 無錢야도 令監이나 進賜셔 數生日만 苦待오 說麼執事네가 數生야 大臣協辦 地境에 此漢區處아니가 一人曰 數 무슨 數인가 世上貌樣觀之니 어늬 時節數生길지 鄕客曰 齋郞借啣은 何事故로 아니터지고 沓沓여 發狂이오 一人曰 必也터지지면셔 終宵諧謔다가 聞鷄罷歸야 爲余道其問答之說일 余ㅣ 曰 悲夫라 彼好地閥 好家數之諸人이 若在舊日則 淸班華秩과 監留宰相이 卽其倘來之職而不幸當此時節×야 官雖淸要나 無一權利고 如彼冷寞이 極甚可咄니 雖一藝一業과 一文一字라도 務欲勤苦做工야 進就學識 然後 可不受他日之欺侮어 不此之爲고 閒游懶怠야 只以骨牌 花套 西廂記 演戲場之類로 以爲沁沁破寂之資니 非但此等名士也라 我韓全國에 從前 兩班儒士爲名之人은 擧皆如彼고 鄕客은 尙此以依賴求乞於宰相之門으로 錮筋着髓야 牢不可破니 如此細瑣가 雖若無關係於國勢나 國勢之萎靡衰頹에 日漸濱危며 日漸墜險은 實因此而然也니 豈可謂之以細故而不深憂也哉아 嗟乎咄哉로다
[자료] "논설: 원각사 관광의 향객정담", 《황성신문》, 1908.10.13.
◎有兩個鄕客이 來遊京師라가 一夕은 月色이 如晝야 九街가 如洗라 携手同伴야 料理店의 盃酒를 沽飮고 因야 圓覺社의 演劇을 觀光고 拾二點鍾에 歸來旅舘야 該社情况을 互相評論이 如左더라
甲曰余가 在鄕야 新聞을 閱覽니 大韓新聞社長李人稙氏가 我國의 演劇이 淫靡不雅것을 改良기 爲야 圓覺社를 設立고 人情風化에 有助 歌舞로 倡夫와 妓女를 敎導다얏스니 氏 社會上開明紳士로 拾餘年海外文明國에 滯在야 文明空氣를 吸収며 文明學術을 鍊習얏고 其歸國也에 新聞의 機關을 掌握며 小說의 著術을 發行얏스니 國民을 開導고 風俗을 改良 事業에 對야 宜乎好個方針을 研究發明지라 於是乎演劇을 改良 主義로 圓覺社를 設立이니 吾儕가 思惟기를 該社演劇에 乙支文德姜邯贊의 英雄事業이나 論介桂日香의 貞烈芳跡等으로 新演劇을 發明야 國民의 思想을 鼓發이 有리라얏더니 今에 該社情况을 目覩 則猶是舊日風流에 沈靑歌、春香歌等而已니 何者로 演劇改良이라 謂지 此로 開明紳士의 事業이라 謂난지 知得키 難 事로다
乙曰李人稙氏의 事業은 姑舍고 該社에 對야 同情贊成 者가 誰也오면 皆我國上流社會에 高等官人이오 昨日今日에 聯翩觀覽者 誰也오면 現政界에 某某大官이라 其政治改良도 圓覺社의 演劇改良과 如지 不知거니와 目今我韓에 國步의 艱棘과 民生의 塗炭이 何如 境遇에 在가 若個有志者流가 國家思想과 國民義務로 敎育을 倡導다 實業을 奬勵다야 家產을 傾고 心力을 竭야도 目下經濟의 困難으로 一個事業도 略無起色니 其舌이 獘고 其淚가 枯야 晝夜憂嘆 情况을 凡有人心者ㅣ孰小矜惻이며 加之地方騷擾가 經年不息야 一般同胞의 死亡이 不絕고 流離가 相續 情况은 骨爲之冷이오 鼻爲之酸이거 當局諸公은 此를 不聞不知지 惟是演劇塲을 愛好고 顧存야 無日不額額니 諸公의 意向은 維新의 功業을 已建고 太平의 福樂이 無窮줄노 認홈인지 果然諸公으로여곰 內閣을 愛홈이 圓覺社를 愛홈과 如면 演劇改良보다 政治改良의 實效가 有지어 胡爲乎內閣을 愛홈이 圓覺社 愛만 不如지 此도 知得키 難 事라고 長吁浩歎타가 一大白을 滿引고 頹然而臥야 東方의 旣白을 不知얏다 云 有人이 其談話顚末을 報道 其言이 雖涉於愚戇이나 其意가 實出於憂憤故로 爲之記載如右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