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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활동사진소(광무대)

일제강점기극장 3

동대문활동사진소(광무대) 대표 이미지

동대문활동사진소는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에서 전등의 편리함을 알리고 종업원을 위안한다는 명목으로 1903년 세운 극장이다. 1908년부터 그 이름을 광무대라 불렀다.

한성전기회사는 고종이 세운 황실기업이었다. 1896년 말 고종은 한성전기회사 자본금 총 20만원 중 내탕금(內帑金)으로 10만원을 내어 이근배(李根培), 김두승(金斗昇)의 명의로 창업을 준비시키고, 1898년 한성전기회사를 세웠다. 회사의 운영과 설비는 경인철도 부설공사의 청부인으로 조선에 들어와 있던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과 보스트윅(M. R. Bostwick)에게 맡겼는데 이때 이들로부터 차관 10만원을 받았다. 이때 받은 차관으로 말미암아 소유자인 황실과 운영자인 콜브란 측 사이에서 채무 분쟁이 발생한다. 이 문제는 1901년 7월 콜브란이 한성전기회사 사옥에 게양된 태극기를 성조기로 바꿔 달면서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1902년 8월 대한제국 정부는 한성전기회사에 대한 문부조사(文簿調査)를 실시하여 콜브란 측의 잘못을 따졌으며, 1903년 조선인들은 콜브란 측의 부당한 처사에 항거하는 뜻으로 통문(通文)을 배포하고 전차안타기 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움직임에 당황한 미국은 해병 100명을 파견하여 한성전기회사 사옥 주변을 경계시키는 등 사태를 악화시켰다. 

한성전기회사에서 동대문활동사진소를 만들고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시작한 시점은 서병달(徐丙達)이라는 사람이 전술한 채무 분쟁과 관련하여 종로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콜브란을 성토하다 경무청에 구금되는 사건이 일어났던 1903년 6월이었다. 아래는 활동사진 상영을 알리는 신문광고이다.

 

[사진 2] 최초의 활동사진 상영 광고
“東門 內 電氣會社 機械廠에셔 施術 活動寫眞은 日曜 及 陰雨를 除外에每日 下午 八時로 十時지 設行 大韓 及 歐美 各國의 生命 都市 各種 劇場의 絶勝光景이 具備외다. 許入料金 銅貨 十錢”1
 
콜브란은 기계창 안의 창고를 활동사진관으로 만들어 수익 사업을 펼치는 동시에 한성전기회사에 대한 조선인들의 좋지 않은 감정도 무마시키고자 했다. 순회 영사나 1회성 상영이 아닌 상설 상영을 추진한 배경이 여기에 있었다.

한성전기회사는 활동사진 기계를 구입하여 전차 기지가 있던 동대문의 전기회사 기계창과 전차 종점인 서대문 근처의 황실희대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이때 상영된 것들은 대한제국과 구미 각국의 도시 모습을 담은 실사영화와 짧은 길이의 극영화들이었다.

그러나 활동사진관이 개관한 이후에도 콜브란과 고종 사이의 채무 분쟁은 해소되지 못했다. 손진민(孫振玟) 등 민족주의적 성향의 인물 10여명이 한성 각 통에 전차안타기 운동에 참여하자고 촉구하는 통문을 배부하는 등 반외세 운동도 절정에 달했다.

악화되던 채무 분쟁은, 러일전쟁 발발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원한 고종이 한성전기회사를 미국에 넘기면서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한성전기회사는 미국에 본사를 둔 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로 바뀌었고, 고종은 일개 투자자로 남게 된다. 

한성전기회사가 미국 자본의 한미전기회사로 바뀐 뒤에도 동대문활동사진소의 운영은 계속되었다. 1906년 당시 한미전기회사의 활동사진 수입은 1,181.39원으로 회사 전체 수입의 0.6%를 차지했다. 1907년에는 625.84원으로 전체 수입의 0.2%, 1908년 1~8월에는 138.10원으로 전체 수입의 0.1%에 머물렀다. 결국 동대문활동사진소는 1908년 광무대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사진3] 『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 표지

동대문활동사진소로 운영될 당시의 시설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동대문활동사진소가 광무대로 이름을 바꾼 후의 극장 모습은 노래 책인 『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필자 주: 1910년대 일반에 유행하던 노랫말을 수록한 잡가(雜歌)집. 1915년 유일서관(惟一書館) 발행.]의 표지에 그림으로 남아있다. 이 그림으로 추정컨대 극장의 객석은 2층 규모로, 2층 객석 한쪽에는 만국기가 걸려있고 활동사진관으로 이용해서인지 무대의 폭이 좁은 편이었던 듯하다. 가부키 등을 공연할 때 필요한 화도(花道)는 없다. 이는 다음의 회고를 통해서도 개략적인 확인이 가능하다.
 
무대에는 미국긔와 됴선긔를 그린 휘장을 처놋코 그 휘장 압헤 굵은 줄을 가로 매여 놋코 맨- 먼저는 少女 광대가 나와서 줄을 타고 그 다음에 휘장을 거더 치우더니 조선 녀자가 춤(僧舞 等)을 몃 가지 추고 그리고 불이 지는 고로 『익크 활동사진이 나온다』 하고 기다렷더니 한참이나 캄캄한 대로 잇다가 식언 외투를 닙은 서양 사람 한 가 웃둑웃둑 서잇는 것이 환-하게 빗취엿다.2
 
1908년 개장한 광무대는 1909년부터 박승필(朴承弼)이 운영을 맡는다. 이후 전통연희 상연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활동사진 상영을 그만 둔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프랑스의 파테사(Pathé)가 파격적인 가격으로 필름을 판매, 싼 가격의 필름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이것이 상하이를 통해 조선에까지 들어와 광무대에서 상영되었다. 활동사진 전용관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광무대는 조선인들이 활동사진을 관람하던 대표적인 장소였다. 

1909년 한미전기회사가 일한와사전기회사(日韓瓦肆電氣會社)에 인수되면서 광무대 연극장도 와사전기회사가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1913년 와사전기회사가 이 연극장을 창고로 쓰기로 하면서 광무대는 지금의 을지로 4가에 위치했던 황금유원(黃金遊園) 내 연기관(演技館)으로 이전되었다. 박승필은 이 연기관 역시 광무대라 이름 붙여 운영했는데, 1918년부터는 단성사의 운영권까지 획득하게 된다. 이후 박승필은 광무대를 구극(舊劇) 전용극장으로,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그 기능을 구분하여 운영하였다. 

이런 식의 구분은 단성사가 직접 활동사진을 제작하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1924년 7월 단성사에서 이필우를 중심으로 촬영부가 조직되고 <장화홍련전>을 제작한다. 단성사의 변사와 광무대의 배우들이 동원되어 만들어진 <장화홍련전>은 1924년 9월 5일 개봉되었다. 이렇듯 박승필은 자신의 흥행 사업에 광무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전통연희보다는 활동사진과 연극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깨닫고, 광무대를 토월회(土月會)에 장기 임대하여 토월회가 광무대 시대를 활짝 여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27년 봄, 박승필은 자신이 일으켜 키운 광무대의 운영을 인척 박승배(朴承培)에게 넘기고 단성사 운영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그러던 중 1930년 5월 2일 화재로 광무대가 소실된다. 

광무대가 사라지면서 토월회와 단성사의 박승필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단성사를 전용관으로 이용하려던 토월회 단원들이 건물주인 다무라 미네(田村みね)에게 접근하여 단성사의 운영권을 뺏으려 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토월회가 단성사를 포기하면서 일단락됐지만, 광무대가 사라지고 난 후 발생한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1) 《황성신문(皇城新聞)》 1903년 6월 24일자.
2) 「활동사진 이약이」『別乾坤』1926년 12월호, 91쪽.


* 본문은 필자의 『조선영화의 탄생』((주)박이정, 2018) 42~45쪽의 내용을 발췌, 수정하였으며 일부분 유민영의 『한국근대극장변천사』(태학사, 1998)를 참고하여 가필했음을 밝힌다.
* 사진 1(글 상단). 동대문활동사진소가 자리했던 한성전기회사(후신 한미전기회사) 기계창

 

[자료] 「유완조액(游玩遭厄)」《황성신문》 1903.07.10.

 

近日 東大門 內 電氣鐵道社 中에 活動寫眞 機械를 購入하야 士女의 觀玩에 供으로 觀玩者가 下午 八時로 十時지 電車에 搭載하야 紛紛往觀하난人山人海를 簇聚하야 每夕 票價 收入額이 百餘元이오 車票價도 亦然한三昨日은 新門 內 協律社에도 如彼機械 一坐를 排置하고 觀玩켸 으로 玩客 游女 數千人이 聚集하얏다가 忽然 電火가 裂破하야 滿屋 火光이 奮迅으로 衆人이 一時 驚動하야 自相 踐踏하며 或 數仞 墻垣에 自墮하야 衣冠毀裂者와 破頭折脚者와 傷脅壞肢者의 類가 無數한데 翌朝에 視之한 則 錦貝纓 香佩 等屬이며 靴子 繡鞋 等屬이며 紗羅 衣幅 等屬이 或 半截 或 一隻 或 一片이 紛紛堆積하얏다더라



[자료] 광고, 《황성신문》 1907.10.26.


○本院 經費補充기 爲야 慈善演奏會를 東大門 內 前光武臺에셔 陰 九月 二十六日 爲始야 限 三日 開會야 順序가 如左오니 慈善신 僉君子枉臨시와 觀覽심을 望홈

順序

一 奏樂

一 有志 紳士 慈善演說

一 世界에 有名 活動寫眞

一 衛生幻燈

一 奏樂

一 臨時야 滋味잇演藝도 잇소

京城孤兒院 告白



[자료] 특별대광고, 《황성신문》 1908.05.26. 

東大門 內 光武臺에셔 陰 本月 二十七日브터 諸般演藝를 一新改良야 古今 奇絕事를 摹倣고 聖世風流를 敎演擴張야

僉君子의 性情과 眼目에 感發愉快케 玩賞品을 設備얏오니 及期 光臨심을 敬要

順 序

官妓男舞 佳人剪牧丹

劔 舞 梨衣舞

僧 舞 閑良舞

性 眞 舞 矢射舞

舞 鼓 電氣光舞

地 球 舞 舞童

項 莊 舞

法國 巴京에셔 新購入 活動寫眞

隆熙二年 五月 日

時間 下午 七時半으로 同 十一時지

入 埸 券

英美烟草株式會社에셔 製造有名紙券烟草 空匣을 持來시면 許入

북     표   二十匣          刀      票   十匣

히 이 로   十匣                    滿      月   十匣

오 루 도   十匣                    自行車票   五匣

人 物 票   十匣                    鷄      票   五匣

만       부   十匣                     靑 紙 烟    五匣

環       票   十匣                     黃 紙 烟    五匣

以上 各種 中 一種만 持來시면 一人의 代金을 當

但 紙烟匣이 無야 不得已境遇에代金도 収入



[자료] "참신 굉장 활동사진", 《대한매일신보》, 1909.06.09.

佛蘭西 巴里城 떼兄弟商會 漢城 特派員이 東大門 內 光武臺에셔 來 六月 捌日부터 每日 午后 八点鍾半에 活動寫眞을 開設 空氣를 應用야 發出 留聲器로 歐米 各國 奇妙歌曲과 壯快軍樂을 吹奏며 仝 風景風俗을 撮寫야 新鮮美 麗畵本을 每日 別種으로 交換 恒常 보아도 롭슴니다

觀覽料

壹等 四拾錢

二等 二拾錢

三等 拾錢


5. 「극장 파순(泒巡) 보호」《황성신문》 1910년 2월 16일자.

近日 東大門 內 光武臺에 光觀人이 多數故로 何等 爭鬪가 不無다 야 東部警察署에셔 巡查 八名을 再昨夜에 該臺에 泒送保護얏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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