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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화 감독 양종해: 대한원조(對韓援助)와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 감독 양종해: 대한원조(對韓援助)와 국립영화제작소 대표 이미지


최근 뉴스영화와 문화영화를 중심으로 비극영화(非劇映畫) 연구가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데에는 해방 후의 문화공보선전에 관한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역시 구술사 프로젝트와 수집⋅발굴 활동을 통해 꾸준히 비극영화(非劇映畫)에 관한 연구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발간된 구술 편집본 『한국영화사 구술총서』 시리즈를 비롯해 2008년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와 『한국영화사 구출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그리고 험프리 렌지(Humphrey W. Leynse)의 문화영화 컬렉션과 시어도어 R. 코넌트(Theodore Richards Conant)의 문화영화 컬렉션과 수집자료 해제 『이방인이 기록한 전후 한국, 영화: 시어도어 코넌트 컬렉션』 등이 소위 비극영화에 해당하는 다양한 영화인들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그 중 2006년 구술을 진행한 양종해(梁宗海, 1929~2009)는 문화영화 감독으로는 첫 번째 구술자로 선정되어 이후 문화영화 구술을 설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60년 <발전은 협력으로>로 아시아영화제 비극영화 부문에서 한국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수상하며 1950~1960년대 국립영화제작소의 대표적인 문화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1971년 국립영화제작소를 퇴사한 후에는 서울문화프로모션을 설립해 다수의 문화영화와 광고영화를 제작했다. 양종해 감독의 구술이 문화영화 조사⋅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데에는 그가 국립영화제작소를 대표하는 감독이기도 했지만 국립영화제작소의 설립과 문화영화의 제작 배경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제시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의 구술을 바탕으로 국립영화제작소와 대한원조의 상관관계를 살펴 볼 것이다. 

 

[사진 1] 국립영화제작소 건물

 
공보실 영화과와 대한영화사

1955년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신태양사(新太陽社)에서 기자로 취직한 양종해는 대학 시절부터 관심 있던 영화 일을 하고 싶어 안양촬영소 설립을 기획 중이던 수도영화주식회사 사장 홍찬을 찾아간다. 당시 안양촬영소 설립을 통해 한국의 할리우드를 꿈꾸던 홍찬은 양종해에게 영어를 공부해서 다시 찾아올 것을 조언한다. 안양촬영소의 개소를 기다리며 서울대학교 어학원에서 영어를 공부하던 양종해는 1956년 우연히 공보실 공무원 채용 소식을 듣고 응시하여 합격한다. 공보실 영화과에 입사한 그에게 주어진 첫 업무는 영화과 업무의 통과의례나 마찬가지인 <대한뉴스>의 기획이었다. “테레비(television)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여서 “노상 청탁이 올” 정도로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대한뉴스>를 담당하게 된 그는 공보실 영화과 대한영화사에서 녹음과 현상, 편집 등의 후반작업을 “곁눈질로 배우며” 습득했다.
 
"그 당시는 나이 들은 오래된 사람들이 있었지. 그 사람들한테 배운 거지, 곁눈질로. 기술진은, 그때 영화관데 영화과의 방계(傍系)회사가 대한영화사라는 방계회사가 있었어. 기술진 다 거기 속해 있는 거야. 왜 그러냐 하면 영화과의 공무원 직급 가지고는 이 사람들 월급을 줄 수 없어. 그리고 직급이 없잖아. 녹음 기사라는 직급이 없으니까 그렇게 대한영화사라는 방계회사를 만들어가지고 거기 다 있어가지고. …… 영화제작소 생기기 전에는 대한영화사에 다 있었어. 그 안에 있었어. 그 후에 영화제작소가 생겨나서 이건 없어진 거지." 1

양종해의 구술은 1950년대 중반 당시 공보실 영화과와 대한영화사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공보실 영화과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1월 설치되었는데 미군정청 공보국 영화과가 담당했던 행정업무를 이어받았다. 전쟁 전까지 공보실 영화과의 주요업무는 검열과 극장에 관한 정책수립과 이행이었다. 공보실 영화과는 한국전쟁 시기까지 부족한 기재와 인력으로 인해 사실상 영화제작을 통한 교육⋅선전을 수행했다기보다는 외국영화의 극장 상영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 업무를 진행했다고 볼 수 있다. 공보실 영화과가 영화제작을 중심에 둘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 한정된 영화 인력들이 공보실뿐만 아니라 미공보원, 미502부대, 육군, 해군, 공군 등에 설치된 영화과 또는 영화촬영대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중복⋅관련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때문에 1949년 영화과 산하에 영화제작 업무를 담당하는 대한영화사가 설치되었지만 이곳에서 실질적인 제작 업무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휴전 후인 1953년 이후로 볼 수 있다. 공보실 영화과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인 부산에서 월 2~3회 <대한뉴스>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환도 후에는 미공보원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 이하 UNKRA) 영화과에 재직했던 이형표를 사무장으로 촉탁하고, 박희영, 유장산(촬영), 김흥만(편집), 이경순(녹음) 등의 영화 인력들을 영입해 대한영화사를 재정비했다. 

 

[사진 2] 이형표 감독
 
1950년대 중반 <춘향전>(이규환, 1955)과 <자유부인>(한형모, 1956)의 흥행 성공으로 한국영화 제작 열기가 일어나기 전까지 공보실 영화과는 극영화의 인력을 활용하여 문화영화를 기획⋅제작했다. 이 시기 극영화 인력과 결합해 제작한 대표적인 영화로는, 한형모⋅이성휘 촬영의 한국 홍보 기록영화 <한국의 시각(Korean Perspective)>(이형표, 1953~1954)과 전창근 감독, 한형모 촬영, 나애심 주연의 극영화 <불사조의 언덕>(1955) 등을 들 수 있다.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제작이 보다 더 활발해진 이후에도 대한영화사는 반관반민의 성격을 유지하며 공보실 영화과의 뉴스⋅문화영화 제작소의 역할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한국 극영화 후반 작업을 수행하는 포스트프로덕션의 역할을 했다.
 

[사진 3] 영화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촬영 현장


 
대한원조로 이루어진 국립영화제작소 설치

1958년 공보실 영화과에 미국의 원조가 이루어지며 양종해는 본격적인 문화영화 감독으로서 활동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때는 영화과고. 나중에 어떻게 됐냐면 이 영화과가 그때 미국이 전쟁복구 원조를 많이 했다고. 미국 원조기관이 크게 있었어. 운크라(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국제연합한국재건단)도 있고, 거기에서 우리나라 영상 관계의 진흥을 위해서 120만 불이면 큰 돈이야.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도 그래 이제 문교부하고 우리 공보처하고 서로 가져갈라고 싸움이 붙은 거야. 결국 공보처가 이겨가지고 우리한테 온 거야. 그래 오니까 엄청난 큰 돈이거든. 그때 영화제작소를 짓고 거기서 뭣이 왔는고 하면 우리 교육 시켜주는 미국 시라큐스대학에서 왔어. 거기서 뭐 하여간 일곱 명이 왔어. 제일 책임자가 매카론(James W. McCaron). 그리고 또 연출하는 사람이 있었어, 메이브리(Mably)라고."
2
 

[사진 4] 국립영화제작소의 전경(출처: e영상역사관)
 
양종해의 이 간략한 설명에는 1950년대 후반 공보실 영화과에 이루어진 대한원조의 세부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대한원조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국립영화제작소의 설립과 전문 인력을 투입한 교육이 그것이다. 공보실 영화과는 대한원조의 카운터파트로서 원조정책 홍보와 교육계몽을 위해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상영했다. 

"변화가 많았지. 우선 시설이 동시녹음 스튜디오가 생기고, 칼라 현상을 하고, 기자재가 많이 들어오고 사람들도 뭐 한 열댓 명이 더 늘어서 120명 정도 늘어나고 공채를 하고 그런 식으로 외적으로 변화가 많았고, 내적으론 영화는 우리나라 별로 예산이 많지 않아 가지고 많이 못 만드는데, 미 원조기관에서 몇 십 편 만들었잖아. 그래서 바빴고, 농촌 순회하는 것도 그때 생긴 거고."
3

양종해가 설명하는 것처럼 <대한뉴스> 제작을 제외하면 극영화의 포스트프로덕션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던 공보실 영화과는 원조를 통해 큰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원조는 공보실 영화과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산업이 변화하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대외원조의 결과로 영화 인력의 이동이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영화에 대한 미국과 UN의 대한원조는 직접적인 재원 원조(UNKRA, ICA), 전문 인력의 파견과 연수(ICA, OEC), 시설과 기재 원조(UNKRA, 아시아재단) 등 여러 기관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원조의 직접적인 수혜대상이 공적기관인 공보실 영화과가 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경우에 따라서 공보실 영화과는 이러한 원조를 연결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1958년 “현대식 영화제작 시설이자 시청각에 의한 매스컴의 총아로써 영화가 지닌 사명을 다하는”4  영화제작소의 완성을 앞두고 공보실과 OEC는 이 시설의 향후 운영과 활용을 위해 시라큐스 계약 교육진을 투입하고, 연출, 촬영, 미술 등 영화제작 각 분야의 신진인력을 공채 모집했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 USIS 출신의 인력을 일부 흡수했다. 이러한 과정은 1958년부터 급증한 한국영화 제작 편수로 알 수 있는 한국영화의 성장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 부분으로서, 이 과정 자체가 기존의 반관반민의 성격을 갖고 있던 한국영화가 상업 극영화와 비극영화로 분명하게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기존의 영화 인력들인 이형표(신필름), 이경순, 손인호(안양촬영소→한양녹음실)를 비롯한 상당수의 인력이 극영화로 이동하고, 그 자리에 신진 인력이 충원됨에 따라 공보실 영화과의 세대교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58년을 전후로 충원된 영화과의 인력은 USIS에서 이동한 배석인(연출), 정윤주, 백명제(이상 음악), 김형중(기술, 녹음‧현상), 김영권(아나운서, 행정), 정도빈(작화), 공채로 입사한 양종해, 김행오, 임학송, 한호기, 나한태, 강대철, 황왕수(이상 연출), 한규설(촬영), 박영일, 김인태, 봉상균(미술), 이은덕, 강신규, 이재웅(이상 녹음), 배동순(연출/행정) 등이다.
 

[사진 5] 국립영화제작소의 인력들

 
시라큐스 계약의 영화교육 

영화과의 기존 인력들은 교육영화보다는 뉴스영화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고, 문화영화 연출 경험이 있는 감독도 양종해, 배석인 등 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이 제작한 문화영화도 실상은 <대한뉴스>의 특별판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시라큐스 계약의 영화교육이 시작되자 제작 경험이 있는 양종해와 배석인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후일 연출력을 인정받아 국내 교육용 영화뿐만 아시아영화제를 비롯한 해외 영화제 출품용 비극영화와 해외 배포용 한국 홍보영화를 도맡으며 국립영화제작소를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다. 어찌되었든 경력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신규 인력들과 함께 영화제작의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시라큐스 계약의 개요는 “시라큐스 인력들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규 교육에 주안점을 두고 글쓰기, 연출, 촬영, 편집 및 사운드 녹음 분야에 대해 매주 교육을 실시하고, 프로그램 목표에 부합한다면 영화 관련 행정 업무, 프로그래밍 등의 관련 업무에 관해서도 기술 지원을 제공하는 것”
5 이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2년에 걸친 교육과정을 ‘정규 교육’과 ‘현장 실무(on the job training) 교육’, 2단계로 나눠 계획을 세웠다. 작업보고서에는 “시나리오 작가-감독은 50%의 시간을 정규 교육에, 50%의 시간을 ‘현장 실무’ 교육에 할애”6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실제로 감독 양종해는 오전에는 콘티 작성법을 비롯해 실무에 필요한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작업을 했다고 증언했다.7  학교 수업처럼 진행된 이와 같은 정규 교육은 대략 1년 6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사진 6] 시라큐스의 인력들(출처: 이성철 기증 자료)


[사진 7] 시라큐스와의 계약 서류

 
(콘티 작성법을) 교육받으면서 배운 거야, 이건. 이게 아주 좋아. 그러니까 첫째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거지. 이걸 벽에 탁 붙여 놓거든 매일 본다고. 봐야 돼. 누구 불러다 “너 이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이야. 이런 식으로 시나리오 하기 전에 이 기본 골격을 한눈에 볼 수 있어야 돼. 그래 안하면 그림 생각해야지, 효과 음악 생각해야지, 복잡하다고. 이건 예를 들어서 효과 무슨 효과다. 음악이 뭐다. 문화영화엔 하나 또 있어, 해설. 그러니까 해설이 있어야 되거든, 문화영화는. 이게 제일 좋은 것이 해설 있고, 음악 있고, 또 해설 있고, 효과 있고, 이런 식의, 이게 바란스(balance)가 잘 맞아야 돼. 너무 음악만 있으면 그렇고 너무 해설만 있으면 그렇고. 이것도 종이로다 해보면 여긴 해설 두고, 여긴 음악 두고, 이런 식으로 해두면 녹음해두면 비슷하게 바란스가 맞는 거지. 8

 

[사진 8] 양종해 감독과 연출 교육을 담당했던 메이블리

위의 구술에서 알 수 있듯이 시라큐스 교육진이 지속적으로 강조한 것은 명확한 주제 전달을 위한 연출 기법이었다. 말하자면 정해진 시스템 안에서 각 부처 정책에 따른 주제를 변주해야 하는 영화제작소 교육영화의 특성에 맞춰 기본적인 틀을 반복해서 제시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게다가 적은 자본과 인력으로 진행해야 하는 제작 여건상 연출자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교재로 삼을 풍부한 견본들이 필요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견본을 밑그림으로 영화제작소의 감독들은 소위 1인 제작 시스템이라 불린 환경을 조성하고 영화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사진 9] 문화영화 촬영 현장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의 역할 모델이 된 <발전은 협력에서>

시라큐스 계약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농촌 지도’를 주제로 하는 다수의 교육영화들이 만들어졌는데 <발전은 협력에서(둑)>(1959)는 이러한 원조정책의 대표적인 영화였다. 양종해 감독의 대표작이기도 한 <발전은 협력에서>는 강원도 명주군 모전리 주민들의 협력으로 제방이 건설된 것이 화제가 되며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완성 후 대대적인 상영회를 통해 농촌 각 지역에 ‘협력과 자립’이라는 교훈을 주었고 모전리는 성공한 시범부락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또한 영화가 1960년 도쿄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아영화제 비극영화 부문에서 기획상을 수상하며 원조 당국과 공보실 그리고 한국영화계 모두에 서로 다른 의미의 성공을 안겼다. 그리고 이 수상 경력은 이후 <발전은 협력에서>가 공보실 영화제작소와 국립영화제작소의 대표적인 문화영화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아시아영화제 수상으로 <발전은 협력에서>는 원조 당국으로부터 대한 경제 기술 원조의 성공사례로 활용되는 동시에 이승만 정권의 선전물로 활용되는 모순을 보여주는 아이로니컬한 상황에 직면했다.

 

[사진 10, 11] <발전은 협력에서(둑)>(양종해, 1959) 속 장면들(출처: e영상역사관)
 
실제 현장에서 주민들이 참여하는 이러한 방식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 영화의 특징을 강조하는 동시에 실제 지역사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사업이 아닌 특정 마을의 사업을 원조기관과 정부 부처의 신(新)사업의 성과로 포장하여 시범마을과 농촌교육영화의 역할모델로 활용해 선전에 활용하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기획은 매우 성공적인 전략이 되어 향후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 사업의 보급⋅육성에서 핵심적인 선전영화의 역할모델로 이용되었다. 1970년대 초반 새마을운동의 대대적인 선전에서도 사업 시행에 앞서 완성형의 마을 혹은 마을 지도자의 성공사례를 ‘실화’라는 특징을 앞세워 마치 새마을운동의 성과물처럼 제작한 경우가 다수 있는데 이 영화들의 형식과 구성은 명백하게 <발전은 협력에서>를 모델로 하고 있다. 
 

[사진 12] 1960년 제7회 아시아영화제에 참가한 한국 대표단의 모습(출처: 이성철 기증 자료)


[사진 13] 제7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발전은 협력에서>는 비극영화 부문 기획상을 수상했다. 
사진 왼쪽부터 남우주연상을 받은 김승호, 당시 영화과 과장으로 있었던 이성철, 감독상을 받은 성동호(출처: 이성철 기증 자료)

 
덧붙여 정치적 격변 속에서 공보실 영화제작소가 오히려 그 위세를 확장해 독립된 국립영화제작소로 재탄생하게 된 배경에 선진화된 시설과 영화제작 교육을 받은 전문 인력을 갖춘 영화제작소의 시스템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자금투자가 필요 없는 최적화된 공보선전 기관으로 활용 가능한 영화제작소의 존재를 매력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 출범 후 공보국이 공보부로, 영화제작소가 ‘국립’영화제작소로 격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전은 협력에서>를 비롯한 한미협조 교육영화들은 문화영화로 재구획 되고 국립영화제작소 농촌계몽 문화영화의 역할 모델이 되었다. 
 



주)
1. 공영민, 「양종해 편」,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한국영화사구술총서03 :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이채, 2006, 253쪽.
2. 공영민, 「양종해 편」,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한국영화사구술총서03 :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이채, 2006, 256~257쪽. 
3. 공영민, 「2006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양종해 편>」,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52쪽. 
4. <Welcome to Motion Picture>(1959).
5. "Work Plan-Contract No. ICA/W-644 between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Syracuse University",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앞의 책, 171~178쪽. 
6. Ibid.
7. 앞의 책, 「양종해 편」, 256~258쪽.
8. 앞의 책, 「양종해 편」,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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