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자료 해제
세 편의 <청춘극장>과 검열의 추이
<청춘극장>(1959, 1967, 1975) 검열서류 해설― 1)
‘청춘대로망’ <청춘극장>1)
<청춘극장>은 김내성의 동명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김내성의 『청춘극장』은 1949년부터 1952년까지 3년에 걸쳐 5권으로 출간되어 당대에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물론 1990년대까지도 역대 가장 재미있는 대중소설 중 하나로 회자되었다. 그 인기를 증명하듯 이 소설은 영화화만 세 번 되었는데,2) 세 편의 영화 또한 모두 크게 흥행했다. 한편 영화 <청춘극장>은 공모를 통해 주연 여배우를 발탁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60년대와 1970~8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의 주역이었던 윤정희와 정윤희가 각각 1967년, 1975년 <청춘극장>을 통해 데뷔하였다.
영화 <청춘극장>은 1959년, 1967년, 1975년에 제작되었다. 원작소설은 1939년 2월부터 해방이 되는 1945년 8월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영화는 1939년 2월부터 1943년까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영화는 1967년과 1975년 영화이고, 1959년 영화는 시나리오조차 남아있지 않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다만 1959년 영화가 성공했기에 이후 영화들이 리메이크될 수 있었음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시대 배경 설정은 1959년 영화에서부터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원작의 비극적 결말이다. 원작에서는 해방과 함께 귀환한 주인공 백영민이 결국 자살하고 만다. 영화에서는 해방 전인 1943년 시점에서 마무리함으로써 해방을 희망으로만 표현할 수 있었고 원작의 부담스러운 결말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화 <청춘극장>은 원작이 보여준 해방기의 비극성은 은닉한 채 식민지시기를 배경으로 청춘의 사랑과 모험을 집약한 ‘청춘대로망’이 되었다.
이 영화의 서사는 크게 로맨스와 청년들의 모험으로 구성된다. 우선 로맨스는 지주의 아들로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다니는 ‘백영민’과 그의 고향집에 있는 정혼자 ‘운옥’, 그리고 백영민이 일본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유경’의 삼각관계로 이루어진다. 청년들의 모험은 전문학교 동창생 관계인 삼총사, 즉 법관을 꿈꾸는 ‘백영민’,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장일수’, 문학청년 ‘신성호’의 역정을 통해 전개된다. 여기에 삼총사의 동창이면서 친일파로 살아가는 ‘최달근’과, 백영민을 짝사랑하는 기생 ‘춘심’, 그의 오빠이자 운옥을 노리는 밀정 ‘준길’, 그리고 백영민의 은사이면서 처음에는 전쟁에 반대하다가 태평양전쟁 막판에 참전하는 일본인 지식인 ‘야마모토’ 등이 이야기를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인물들이 조선, 일본, 중국에 걸쳐 만나고 사랑하고 싸우고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이 영화는 백영민을 가운데 둔 두 여성과 두 청년의 파란만장한 청춘을 보여준다. 1975년 <청춘극장>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이러한 영화의 정체성을 집약해준다.
장일수 군의 예언대로 우리는 조국의 해방을 맞이했고
전쟁의 불길 속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와 중국에 걸쳐서 펼쳐졌던 우리들의 청춘대로망도 일단 그 막을 내렸다.
전쟁의 불길 속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와 중국에 걸쳐서 펼쳐졌던 우리들의 청춘대로망도 일단 그 막을 내렸다.
해방 이후에는 분단이 되어 대륙으로는 길이 끊긴 채 실질적으로는 섬이 되어 버린 남한에서 광활한 땅, 즉 한반도, 일본열도, 중국에 걸친 사랑과 모험의 세계는 그것이 비록 식민지 시기라 하더라도 낭만적인 상상계로 구현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한 수십 년에 걸친 대중의 호응은 이 영화가 보여준 상상계의 유효성을 지속적으로 증명했다.



(그림 1) (그림 2) (그림 3) 위쪽부터 1959년, 1967년, 1975년 <청춘극장>의 포스터.
1959년 영화에서는 김진규, 황정순, 김지미가, 1967년 영화에서는 신성일, 고은아, 윤정희가,
1975년 영화에서는 신영일, 김창숙, 정윤희가 각각 백영민, 허운옥, 오유경 역을 맡았다.
1959년 영화에서는 김진규, 황정순, 김지미가, 1967년 영화에서는 신성일, 고은아, 윤정희가,
1975년 영화에서는 신영일, 김창숙, 정윤희가 각각 백영민, 허운옥, 오유경 역을 맡았다.
세 편의 <청춘극장>은 낭만적이고 파란만장한 서사에서 주인공을 맡은 스타들의 면모와 그에 따른 각 편의 변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그런데 이러한 흥미로움 속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영화가 8년에 한번 꼴로 제작되면서 달라지는 검열제도의 적용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에 동일한 원작, 유사한 서사로 리메이크된 세 편의 <청춘극장>의 검열 서류를 비교해보면 각 시기 검열의 변화가 한눈에 포착된다. (1959년 영화는 시나리오조차 현전하지 않으나 다행히 검열서류는 남아있어서 이러한 고찰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1959년 <청춘극장>(홍성기)과 왜색의 문제
1959년 <청춘극장>의 검열서류에는 상영허가신청서, 작자승낙서, 작곡자승낙서, 검열위원위촉의 건, 검열의견서, 그리고 대본이 첨부되어 있다. 사전 시나리오 검열이 명문화되어 체계적으로 시행되는 것은 1966년 제2차 영화법 개정부터이다. 그러나 체계적이지 않았을 뿐 시나리오 검열은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 시기 검열은 문교부에서 주관하였으며 검열위원으로는 내무부 치안국장, 서울지방 검찰청, 국방부 정훈국장, 법무부 검찰국장이 위촉되었다. 검열의 주관 부처와 참여 기관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기본적으로 치안, 교육, 안보에 관련된 기관은 계속 검열에 개입하게 된다.
<청춘극장>의 제작사는 1959년 3월1일에 문교부에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했고, 3월2일에 검열위원이 위촉되었다. 위촉된 각 기관의 검열위원들은 문교부 검열실에 모여 검열 회의를 진행하고 각 기관별로 검열의견서를 따로 작성하였는데. 검열의견서는 3월2일부터 3월4일 사이에 제출되었다. 그리고 <청춘극장>은 3월4일에 바로 상영이 ‘무제한 허가’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승만 정부에서 승인한 ‘무제한 허가’는 무효가 된 것으로 보인다. 3년 후인 1962년 2월22일에 <청춘극장>의 재상영허가신청서가 공보부에 제출되고, 3월20일에 재상영허가 결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허가기간은 1962년 3월20일부터 1963년 3월19일까지 1년간이었다. 이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국립영화제작소3)에서 제작한 문화영화 <국토방위 이상 없다>가 재상영허가의 조건으로 첨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림 4) 국산영화 <청춘극장> 검열위원 위촉의 건





(그림 5) 국산영화 <청춘극장> 상영허가의 건





(그림 5) 국산영화 <청춘극장> 상영허가의 건
1959년 <청춘극장>의 검열에서 유일한 제한사항은 왜색의 문제였다. [그림 5]를 보면 검열자들이 이 영화를 “가혹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한국청년들과 여성들의 활약상과 이들 젊은이들의 애정 문제를 묘사한 내용”이라고 요약하여 그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화면 중 일본복색에 관하여는 국정회의에서 논의하였고 차관님께 보고하였음.”이라는 참고 사항을 말미에 달고 있다. 식민지시기를 재현하는 영화에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일본복색’이 국정회의에서까지 논의되었다는 기록은 당시 ‘왜색’ 문제가 국가적으로 얼마나 중대하게 취급되었는가를 말해준다.
해방 이후 ‘일본’과 관련된 남한의 정책은 1960년 4.19와 1965년 한일수교, 그리고 1972년 유신헌법 공포를 기점으로 변화한다. 4.19 직후에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한일 문화교류에 대한 기대 심리 속에서 식민지 경험에 대한 접근이나 일본에 대한 재현이 잠시나마 다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분위기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현해탄은 알고 있다>(김기영, 1961)이다. 이 영화에서는 학병으로 끌려간 조선인 청년이 일본 여성을 사랑하면서 일본 옷을 입고 일본 음식을 먹으며 일본의 전통 음악과 춤을 감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비하면 1959년 <청춘극장>은 불과 1년 전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를 알려준다.
그러나 왜색에 대한 비교적 자유로운 재현은 1965년 한일협정 이전까지만 허용된다. 한일수교 이후에는 ‘왜색’에 대한 검열이 오히려 강화되는데 이는 반공주의 강화와 연관된다. 한일수교로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자 유치에 성공한 박정희 정부는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강화한다. 그리고 영화계에도 ‘반공영화에 대한 포상’이라는 당근과 ‘용공에 대한 엄격한 제재’라는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는 정책을 편다. 1965년을 전후로 하여 일본은 북송선 문제로 남북한의 대결을 격화시키는 데 매개가 된 국가였기 때문에 한일수교가 성립되었다 하더라도 반공주의 차원에서 볼 때 용공국가였다. 따라서 일본은 영화에서 재현하기에 껄끄러운 대상이 되었다. 일본에 대한 재현이 한일수교 이후에 오히려 과거 식민지 시대로 집중되고 일본이 ‘적’과 ‘악’으로만 재현되며 북한과 유사한 표상을 지니게 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현상이었다. 1967년 <청춘극장>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변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다.
1) <청춘극장>에 대한 정보와 분석은 졸고, 「남한영화에 나타난 태평양전쟁의 표상」, 『한국극예술연구』 44집, 한국극예술학회, 2014, 123-130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2) <청춘극장>은 KBS 22부작 드라마로 제작되어 1993년 10월23일~1994년 1월2일에 방송되기도 했다.
3) 국립영화제작소는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에 공보처에 설치되어 뉴스, 기록영화, 문화영화 등을 만드는 부서로 존속했다. 그런데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6월에 개정된 정부조직법 규정에 따라 박정희 정권의 대국민 홍보 및 선전을 위한 기관으로 새롭게 발족하게 된다.
키워드
- #청춘극장
- #김내성
- #홍성기
- #검열
- #왜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