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_아카이브 ver.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 일상과 비일상, 족쇄와 탈출의 경계선에서
영화 <귀로>(1967)에 나타난 공간적 배경을 돌아보며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이 글을 접하는 누구나 한 번쯤은, 일상의 답답함과 울적함을 주체할 수 없어서 기차를 타거나 마실을 나가는 것으로 어떻게든 해 보고자 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그러한 일상에서 비일상으로의 탈출이 본질적인 해답은 되지 못하곤 한다.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간다 해도 완전히 야반도주라도 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머지않아 반드시 본래의 거처로 돌아와야 하며,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일상과 마주해야만 한다. 바로 귀로(歸路)에 서야 하는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 <귀로>(1967)는 바로 이런 현대인의 고뇌를 서울과 인천이라는 두 도시 간의 이동을 통해 명징하게 드러낸 수작이다. 지금까지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 연재에서는 당대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1960~80년대의 여러 한국영화를 돌아보았지만, <귀로>와 같이 주인공의 심경과 처한 상황이 두 도시 간의 반복적인 이동(통근과 통학이라는 ‘일상’이 아닌)을 통해 비유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드물었다. 이미 많은 비평에서 <귀로>를 ‘멜로드라마 최고의 걸작’ 혹은 ‘세월의 흐름을 타지 않는 세련된 구도’ 등으로 호평하고 있는 만큼, 본 연재에서는 본 작품의 또 하나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공간적 배경에 대해 주목해 보고자 한다.
주인공 지연(문정숙)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으로, 하반신 마비로 인해 성불구자가 된 남편 최동우(김진규)와 14년째 그 어떤 것도 만족되지 않으며 족쇄와 같은 결혼 생활을 인천의 어느 양옥집에서 이어 나가고 있다. 지연에게 있어서 족쇄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남편의 신문 연재소설 원고를 서울 서소문의 신문사에게 전달하러 가는 시간뿐이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이러한 지연의 인천(지연의 집)-경인선 열차 3등 칸-서울역-서소문(신문사 소재지)을 오고 가는 이동 동선을 반복적으로 비춘다. 집을 떠나 인천역에서 경인선 디젤동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서 서소문으로 향했다가, 잠시 남산 중턱에서 시내의 경치를 내려다본 후 다시 서울역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열차에 올라타는 행적의 시퀀스를 되풀이해 목도하다 보면, 마치 지연의 일탈을 몰래 지켜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카메라는 1967년의 서울-인천 간의 이동을 세련되게 잡아낸다. 지연의 궤적을 뒤쫓아가며, 주목할 만한 공간적 배경을 짚어보도록 하자.
경인선 열차
지연은 서울에 원고를 전달하러 오고 갈 때마다 항상 경인선 열차, 3등 칸을 이용한다. 이 시기 경인선은 복선화가 완료되어(1965년), 시간당 1편의 열차가 운행되었으며 차내 모습은 극 중에서도 비치듯이 긴 의자에 손잡이가 달린 사실상 지금의 수도권 전철과 유사한 분위기를 띠었다. 지연은 열차를 타는 본인의 심경을 딱 한 번 대사로 읊는데,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시원스러워서 타고 싶은데 막상 타고 나면 답답해요(36:52경)”가 바로 그것이다. 본인을 옥죄는 가정에서 벗어나 서울행 기차를 타지만, 그곳조차도 완전한 도피가 되지는 못하는 상징으로서 경인선의 디젤동차 열차가 등장한 것이다.

인천역에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경인선 디젤동차의 내부 모습

경인선 열차를 타는 이유를 강 기자에게 털어놓는 지연
서울역과 인천역
인천역은 지연에게 있어서 족쇄와 같은 일상을 상징하는 공간일 것이다. 반면에 서울역은 그러한 일상에서 조금이나마 물리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관문이자, 동시에 그마저도 남편의 원고를 전달해야 한다는 일상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에서 지연에게 경인선 열차와 유사한 공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작중에서 서울역과 그 앞 지하도는 총 네 차례 등장하는데, 처음 두 번은 지연 혼자서, 세 번째는 지연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강 기자(김정철)와 함께, 그리고 네 번째는 강 기자 혼자서 지하도의 계단을 오르내린다. 자연스럽게 지하도가 지연의 원치 않았던, 하지만 거스를 수 없었던 일탈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셈이다. 나아가 서울역의 1번 플랫폼 또한, 지하도와 유사하게 지연의 일탈과 포기(혹은 체념)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으로서 비친다.

서울역 1번 플랫폼에 도착한 경인선 열차. 현재 이 플랫폼에서는 천안행 1호선 급행열차가 발착한다.

서울역 지하도를 올라가는 지연의 뒷모습. 일부러 사선 구도를 취함으로써 6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어색함이 전혀 없다.
서소문 건널목과 서소문 고가차도
서울 도심 유일의 기차 건널목인 서소문 건널목을 이렇게까지 중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담아낸 영화는 아마 본 작품이 유일할 것이다. 나아가 당시에 갓 준공되었던 서소문 고가차도(당시엔 ‘서소문 육교’라고도 불렸다)도 함께 등장함으로써 단절(건널목)과 소통(고가차도), 혹은 고즈넉한 인천의 집과는 다른 복잡한 근대도시 서울을 효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서소문 건널목은 작중에서 지하도와 마찬가지로 총 네 차례 등장한다. 처음 두 차례는 서울역과 서소문의 신문사를 오고 가는 지연 혼자서, 세 번째는 지연을 무작정 뒤쫓는 강 기자의 갈팡질팡하는 시선(1:01:01경)으로, 네 번째는 다시 지연 혼자서 건널목 앞에 멈춰 서는 시퀀스에서 서소문 건널목은 등장인물들의 막막한 심정을 대변하듯이, 마치 단절을 의도한 것 마냥 육중한 기관차가 스크린을 가로지른다.

지연을 무작정 뒤쫓는 강 기자의 시선에 서소문 육교와 사방으로 향하는 도로 안내판이 담긴다.
아마도 지연에게 마음을 빼앗겨 갈팡질팡하는 강 기자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인천의 집까지 쫓아온 강 기자 앞에서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직후, 지연은 서소문 건널목 앞에서 육중한 화물열차에 길이 가로막힌다.
참고로, 작중에서 딱 한 번, 지연이 서소문 건널목이 아니라 그 위를 가로지르는 서소문 고가차도를 도보로 건너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나 지금이나 서소문 고가차도는 자동차 전용 도로로서, 보행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서소문 고가차도 보행 장면은 <워커힐에서 만납시다>(한형모, 1966)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데, <귀로>에서의 해당 씬은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의 그것과 거의 유사한 위치에서 촬영되었다. 물론 맥락과 의도는 두 영화가 완전히 다르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1년 간격으로 똑같은 씬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여러 의미를 고려하게 만든다.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에 등장한 서소문 고가차도 보행 씬


본 작품에서 유일하게 서소문 건널목이 아닌 고가차도를 건너가는 시퀀스. 오른쪽 뒤편으로 중앙일보 사옥, 대한빌딩 등이 관찰된다.
<귀로>는 대사량이 그렇게 많은 영화가 아니다. 물론 주인공 지연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처럼 내뱉는 중요한 대사가 삽입되어 있지만, 러닝타임의 상당 시간은 지연의 뒷모습(어떤 비평에서는 문정숙을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라 칭하기도 했다)을 비추며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음악과 공간적 배경만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연출 덕에, 처한 상황이 지연과는 다소 다를지라도 1967년 공개 당시는 물론이요, 거의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귀로>를 보며 지연의 심경에 공감하거나 나아가 감정 이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귀로>를 보고 난 후, 시청 앞과 서소문 일대를 거닐며, 철거 공사 중인 서소문 고가를 올려다보고 그대로 서울역으로 향해서, 경인선 열차에 올라타 인천역에 내려보는 일종의 <귀로> 성지순례 체험을 해 보는 것 또한, 본 작품을 온전히 즐기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그만큼 현대인에게 주는 울림이 큰 작품이니 말이다.
김영준(도쿄대학 특임연구원)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