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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안쪽

<세계의 주인>(윤가은, 2025)

상처의 안쪽 대표 이미지
사진: “세계의 주인”, 네이버영화


* 본 글에는 극중 일부 장면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계의 주인>(윤가은, 2025)을 아무런 정보 없이 관람할 때, 관객은 필연적으로 오류 혹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초반의 시퀀스들은 수수께끼에 가까운 불규칙한 배열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작은 교복을 입은 커플이 학교로 보이는 폐쇄된 장소에서 키스에 몰두한 모습이다. 곧 영화의 중심이 될 주인(서수빈)은 키스 도중 남자 친구(김예창)의 얼굴이나 손을 지속해서 교정한다. 이 장면은 성행위를 묘사한 웹툰 스케치로 넘어가는데, 마치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처럼 보인다. 방금까지 키스를 나누던 주인은 단짝 유라(강채윤)가 그린 웹툰이 담긴 화면을 바라보면서 다음 상황을 궁금해한다. 체육 시간에는 운동장에서 배구 연습을 하는 도중 자리를 이탈해 장난을 치다가 다른 학생에게 부딪히기도 한다. 이때 부딪힌 남학생 수호(김정식)와 주인은 이후에도 부딪히는 일이 잦다. 수호의 어린 여동생은 주인의 엄마(장혜진)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다닌다. 주인은 엄마를 따라 방문한 병원에서 팔에 깁스를 한 수호의 동생을 만난다. 그날 수호는 동생을 씻기다가 목덜미 근처에 난 꼬집힌 자국을 본다. 다음날 어린이집에 찾아가 CCTV를 보여달라고 말하지만, 어린이집 교사는 곤란해하며 자리를 피한다. 수호는 마을 어귀 담벼락에는 빨간색 라카로 성범죄자의 집이라고 적힌 곳을 지나친다. 주인의 동생 해인(이재희)은 마술을 배워서 가족 앞에서 상연하는 것을 좋아한다. 빨간 공을 손안에서 사라지게 하는 마술 등 대부분 무언가를 사라지게 하는 마술이다. 해인은 주인의 앞으로 온 편지를 몰래 숨겨두거나, 신발에 흙을 묻혀 오는 등 어떤 비밀이 있어 보인다. 주인의 엄마는 텀블러에 양주를 넣어서 몰래 마시곤 한다. 주인은 진로를 정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선생님(이상희)과 개별 면담 시간에 파티션 위에 놓인 사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숨쉬기 곤란해하는데, 알레르기가 있냐며 당황해하는 담임에게 주인은 장난이었다며 웃어버린다.

정확한 숏의 순서를 정리하기 어려운 일련의 몽타주 속에서 특정 인물이나 상황에 마음 두기 힘들다. 그러다 개별적인 상황을 한데 모으는 꼭짓점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복역 기간을 끝낸 성범죄 피의자의 학교 인근 마을로의 복귀가 임박해지자, 수호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성범죄자 복귀 반대 서명을 받는다. 주인은 홀로 서명에 반대하는데, 이유는 서명을 독려하는 문구 중 피해자의 아픔을 과장해서 묘사한 부분 때문이다. 피해자는 이 일로 인해 평생 씻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는 문구는 클리셰에 가깝지만, 이것이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과 피해자성을 강요하는 문구가 될 수도 있다. 주인이 문구에 이의를 제기하는 순간, 어쩌면 그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일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네가 뭐 성폭력 피해자라도 돼?”라는 일갈에 주인은 “그래, 나 성폭행 피해자다.”라고 답한 뒤 곧이어 농담이라고 무마해 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농담이 아님을 관객은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주인과 그를 둘러싼 모든 비밀스러운 상황과 행동에 하나의 질서가 생긴다. 아버지의 부재도, 편지를 숨기거나 마술을 배우는 동생도, 술을 마시는 엄마도, 주인의 활발함도, 모두 성폭력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불규칙한 것처럼 보였던 배열이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질서로 통합되는 것을 느끼면서, 이에 대한 경계와 의심이 동시에 피어오른다. 이러한 해석이 결국 인물을 사건에 가둬두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서명문 속의 클리셰와 비슷한 짓을 내가 인물에게 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에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느낀다.

서명을 부탁하는 수호와 반대하는 주인 (사진: “세계의 주인”, 네이버영화)

사실 확정을 위한 고백은 일종의 법정에서 이뤄진다. 문구를 수정했다는 수호의 말이 거짓임을 간단히 확인한 주인은 자리를 피하지만, 수호가 끈질기게 붙잡으면서 몸싸움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표출된 주인의 분노는 그가 가진 본래의 성격만을 표시할 수 있는가. 그 안에 잠재한 성폭행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그의 행동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문제의 그 문구를 상연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과연 영화가 지속하는 동안 인물은 이러한 잣대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 교장실에 불려 간 주인과 수호는 서로를 마주 본 위치에 앉는다. 수호는 서명받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주인은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며 결국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차분히 고백한다.

가장 문제적인 장면이 이어진다. 차 앞좌석에 나란히 앉은 엄마와 주인은 세차장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것은 다소 노골적인 의식이자 클리셰다. 세차가 이뤄지는 공간 내부의 소음이 주인의 울부짖음을 가리는 동안, 주인은 엄마를 향해 원망의 말을 마구 쏟아낸다. 세차가 끝나고 울음이 잦아질 즈음 엄마는 말없이 휴지와 물을 건넨다. 그러고는 ‘한 바퀴 더 돌까?’라고 묻는다. 이 장면에서 수호가 쓴 서명문 속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문구가 속절없이 떠올랐다. 세차장 장면은 이를테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씻으려 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상처의 당사자인 이들은 상처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 다행히 그 안에서 주인은 혼자가 아니다. 주인의 엄마는 바깥에서 상처를 바라보거나 낫게 할 수 없다. 다만 그는 상처 안쪽에 함께 있는 사람이다. 이들과 함께 뒷좌석에 무단 탑승한 카메라 역시 상처 안쪽에 자리 잡으려 한다. 세차장 장면의 핵심은 무언가를 씻어내는 정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들의 위치에 있다. 외면했던 안쪽에서 여전히 울부짖거나 억눌린 상처들이 존재하고, 주인은 잠시 그 상처가 되어 아우성쳐 보았을 뿐이다.

세차장 기계 속 차 안, 엄마 태선과 주인 (사진: “[세계의 주인] 메인 예고편”, 바른손이앤에이)

안쪽에 자리한 사람들이 있다. 법정 장면에서 친족 성폭력 피해자인 미도(고민시)가 피고 측 변호인의 심문에 맞서 증언할 때, 미도의 뒤편에서 슬쩍 손수건을 건네주는 인주(백현주)와 동료들은 상처의 안쪽에 있는 사람이다. 심문을 마치고 식당 부엌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미도는 가족이 찾아왔다는 동료의 말을 듣는다. 두려운 듯 커튼 뒤에서 슬쩍 바깥을 내다보았을 때, 뜻밖에도 창밖에 있던 주인이 시선에 잡힌다. 미도는 주인을 그 장소에서 가장 깊은 곳인 주방 안쪽으로 들인다. 둘은 그렇게 상처의 안쪽에 있다.

사건 이후 주인은 무리 짓던 친구들과도 어쩐지 데면데면해진다. 주인의 교실 책상 서랍 안쪽 깊숙한 곳이나 책 사이에서는 적대적인 느낌을 주는 쪽지가 발견되기 시작한다. 그 쪽지를 쓴 자가 누구인지는 관객 역시 알 수 없다. 그리고 복도를 촬영하는 카메라의 시점이 불현듯 등장했을 때, 카메라 뒤에 있는 자가 쪽지를 쓴 미지의 인물일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방금 카메라 앞을 스치고 지나간 주인이 갑자기 렌즈 가까이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방금까지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깨어진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사건 이후 유독 멀어진 친구 유라다. 유라와 주인은 머리를 대고 방금 찍힌 영상을 함께 확인한다. 이로써 유라, 혹은 미스터리한 쪽지를 쓴 이들 역시 상처의 안쪽에 자리한 사람이 된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대개 카메라 안에서 벌어진 일들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이라 여겨지지만, 이들 역시 내부에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침범과 공유다.

영화는 거의 모든 이들을 상처의 안쪽으로 초대한다. 나 역시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에서 제목이 곧 개인의 존엄을 표시하는 모두의 구호가 된 것처럼, <세계의 주인>에서도 ‘나, 주인’임을 기억할 수 있는 이들을 소환한다. 내 몸과 내 상처의 주인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 상처의 안쪽에서 때로는 욱하는 마음이 들고, 상처의 바깥에서 이 마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의심스러워도 상처와 함께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물론 여기에 동참할 수 없는 이들이 존재하리란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탓은 아닐 것이다.
 

사진: “세계의 주인”, 네이버영화
 


김소희(영화평론가) ㅣ 영화를 보는 동안 느낀 감정의 격랑이 내가 쓴 글 안에 거짓 없이 찍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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