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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어렵지만 그럼에도 꼭 하고 싶었던 몇 마디 말

<복합 장애>(프레더릭 와이즈먼, 1986)

여전히 어렵지만 그럼에도 꼭 하고 싶었던 몇 마디 말 대표 이미지
사진: “복합 장애”,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어릴 때부터 장애가 있는 혈육 또는 이웃들과 별 이질감이나 불편함 없이 살아왔다. 20대에는 몸이 불편한 학우들의 활동 보조도 해보았다. 30대 이후, 장기 입원을 하거나 중병을 앓는 가족의 간병도 해보았다. 돌이켜 보면 삐거덕거리고 비틀대고 휘청이는 다양한 몸들과의 여러 활동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러한 활동들이 돌봄이란 단어로 일원화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의 활동 보조를 할 때도 돌봄이나 돌봄 노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못했다. 그야말로 보조였고, 치료를 받는 이의 간병인이었으며, 집이 필요한 고양이와 공간을 나눠 썼을 뿐이다. 모두 돌봄으로 환원할 수 없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돌봄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때, 영국의 한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부터 배리어프리 상영을 제안받았다. 우리의 영상이 시각장애인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궁금해 흔쾌히 허락했다. 상영일에 모니터를 가리고 사운드만 키운 채 영상을 청취했다. 영상의 사운드와 함께 누군가 장면 하나하나를 문장으로 읊어주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이미 수십 번도 더 보아왔던 영상을 오직 사운드에 의존해 각 장면을 떠올리며 관람했다. 그때 함께 했던 시각장애인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그렇게 듣는 관람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시각장애인이라는 관객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야말로 우리 안의 장벽(barrier) 하나가 허물어진(free) 셈이다. 그때서야 ‘배리어프리’가 장애인들만이 아니라, 비장애인들에게도 새로운 감각을 열어주는 장치임을 알게 됐다.

<복합 장애> 포스터 (사진: “Multi-Handicapped”, IMDb)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복합 장애>(1986)를 보는 내내 몇 년 전 배리어프리 상영회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의 해방감이 상기되었다. 물론 이 영화에는 감독이 의도한 인터뷰나 설명 같은 건 전혀 없다. 헬렌 켈러 학교란 곳에 재학 중인 감각 장애가 있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교육활동으로부터 발생한 다양한 신체 언어와 공간 소음이 전부다.
 
게다가 영화 속 복합장애인들이 주고받는 고요한 수어 이미지와 그들의 신체가 외부 자극에 의한 감각을 다스리기 위해 내는 자기 자극음은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이다. 생각해보면 수어와 점자는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이 배우지 않아 모르는 언어인데, 복합 장애를 단순히 잘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몸의 어느 기관이나 감각의 결핍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외부 자극이 과도할 때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소 괴성처럼 지르는 소리를 내거나(자기 자극음), 상대의 소리를 그대로 따라하는(반향어) 등, 매우 적극적으로 신호를 내보낸다. 복합장애인들의 세계에서 비장애인들이 맞닥뜨리게 된 장벽(barrier)에 대해 감독은 굳이 해석해주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언어를 받아들이고 교감할 수 있는 길을 터준다. 각자가 마주한 장벽을(barrier) 허무는(free) 것은 관객 본인의 몫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눈과 귀를 예민하게 열고 감독의 카메라 워킹을 따라가야 한다.

감독의 카메라는 복합장애인들의 교육 활동에 어떠한 서사도 부여하지 않는다. 가령 학생들이 수업을 받거나 선생님들이 커리큘럼을 고민하는 과정은 문학으로 치면 묘사와 대사로만 이뤄진 씬들이 교차편집되어 있을 뿐이다. 매일 매시간 학생들의 수업 내용이 달라지듯이 영화 또한 다양한 장애를 지닌 여러 학생들과 선생님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교육 활동의 나열만으로 그들의 하루를 보여준다.

수평적으로 연쇄되는 각 씬 사이에 영상적 빈칸은 없다. 다만 비순차적으로 병치된 씬들이 축적될 때마다 마치 문단 사이의 여백 같은 것들이 생성된다. 그 빈칸을 채우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감독의 발걸음을 쫓으며 머리 속에서 자꾸 생성되는 공란을 채워나가다 보면 비로소 발견되는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관람 중인 ‘나’의 눈과 귀가 어디에 붙들렸는지,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장애를 둘러싼 세간의 윤리와 편견에 앞서 일단 잘 모르던 세계를 영화로나마 경험하고 감각해 보는 게 우선이다. 

사진: “복합 장애”,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물론 이 영화를 통한 경험이 VR을 쓰고 여러 감각 장애를 체험해 보거나 복합장애인이 되어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적어도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는 관람객들은 시각과 청각이 어느 정도 온전하게 기능하는 자들이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처럼, 그의 카메라와 녹음기기처럼 관람객들은 오직 두 눈과 귀에 의지해 복합장애인들의 하루를 지켜봐야만 한다. 영화에서는 때때로 이 부분이 충돌을 일으킨다. 이 충돌이 윤리적인 문제로 확산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에 감각 장애를 앓고 있는 학생들을 어떻게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 와이즈먼의 다소 차갑고 거침없는 카메라 워킹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뇌경화증을 앓고 있는 사촌동생을 만날 때마다 그가 내는 괴성과 자해에 가까울 만큼 세게 몸을 치는 행위가 어릴 땐 좀 무서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소리와 급변하는 온도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른들은 우발적이라며 그를 제지하는데 급급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때 그의 몸은 더욱 크게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요동치는 감정이 그의 몸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까이서 지켜보고 감각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아니면 평생 그를 무섭고 괴팍한 장애인으로만 여기며 기피했을 거다. 그를 마주할 때 교육받은 윤리의식과 사전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끊임없이 소통의 방식을 찾아야 하는데, 그 과정이 좀 느리고, 광범위하며, 때때로 막막해 다소 시간이 걸릴 뿐이다.

헬렌 켈러 학교 학생들을 보며 사촌동생과의 소통의(혹은 소통불능의) 경험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들의 배움은 깜깜한 눈, 적막한 귀, 무성의 입 중 2개 이상이 교집합 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다. 가만히 있으려 해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이상한 소리가 삐져나오는 몸으로는 수건 하나 접는 일조차 쉽지 않다. 비장애인들이 너무도 익숙하고 쉽게 해내는 모든 일들을 이들은 매우 느린 속도로 배우고 익히며 각자의 고비를 꾸역꾸역 넘어서야 그나마(학교와 선생님들의 교육이 지향하는) 사회화가 가능하다. 

그 배움에 나이와 단계에 따라 자동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일관된 커리큘럼은 없다. 시계를 읽지 못하는 학생, 이름과 주소를 겨우 읽어내는 학생, 상대의 수어를 직접 만져야 대화가 되는 학생 등. 헬렌 켈러 학교라는 하나의 교육기관 안에서 작동되는 교육 과정은 온전히 학생들의 신체 상태에 맞춰 갈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수어로 대화가 가능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혼자서 몸을 일으켜 밥을 먹는 것조차 쉽지 않다. 때문에 학생들 각자의 배움과 앎의 과정에 학년, 과목 등 시스템에서 정한 용어를 붙이기가 어려워 보인다. 어느 정도의 사회화와 점자, 수어 등 기본 언어도구를 익힌 뒤 그들은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 직업을 구하기 위한 교육을 받지만 그마저도 쉬워 보이지 않는다.

복합 장애를 극복하고 대학에 진학 후 사회 운동가가 되었던 기적의 헬렌 켈러는 영화 속 복합장애인들이 재학 중인 학교 기관으로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영화 속 선생님들은 수돗가에서 짐승처럼 날뛰던 7세의 헬렌 켈러를 헌신적으로 붙잡고 그녀의 손에 끝내 “WATER”란 글자를 새겨 무지를 깨우쳐준 설리번 선생처럼 할 수 없다. 그들은 헬렌 켈러 학교에 재직 중인 피고용인이다. 교육 제도와 학교의 교육 시스템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 학생들이 받는 수업과 생활지도 또한 학교의 예산안과 지침 하에 시행된다. 그들이 소속된 교육기관의 목적은 헬렌 켈러의 기적이 아니다. 복합 장애 학생들은 학교에서 필요한 교육을 받고 장차 직업을 구해 사회인으로서 기능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교육 시스템의 고리가 느슨해질 때가 있다. 식사 후 휴식 시간이다. 휴게 공간의 티브이가 켜지고 아이들과 선생님들 각자 편한 자세로 앉아 쉰다. 교육의 공백 속에서 아이들은 몸을 뱅글뱅글 돌리거나 반복적 입소리를 내고, 목적 없이 뛰어다닌다. 신기한 건 앞이 잘 안보이고 몸의 제어가 힘든 상황에서도 부딪치지 않게 서로의 간극을 조율해 나가기도 한다. 이때 허밍음 혹은 가스펠 같은 나지막한 한 선생님의 노래소리가 들린다. “One more river to go”로 시작되는 노래다. 가사는 ‘건너야 할 강’의 반복이다. 우선 ‘내’가 건너야 하고, ‘그녀’가 건너야 한다. 마치 선생님 자신과 그녀의 학생들을 위한 노래 같다. 선생님과 학생들의 느리고 더뎌 힘든 교육 활동이 일단락된 순간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노래가 또 있을까.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눈앞의 강이었던 배움 하나가 또 그렇게 실현된 셈이다.

영화는 헬렌 켈러 학교의 하루를 넘어 또 다른 하루인 주일로 넘어간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도 하에 교회에 간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아름다움이란 말이 오직 신으로 일원화된 곳에 놓여 있다. 아이들의 수어는 설교와 찬송가의 내용을 번역하는 수단이 되고 성경과 신에 대한 의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곳에서도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잘 말하지 못한다. 그들의 몸이 흔들리며 반향어를 내뱉어도 돌아오는 건 신을 향한 찬양과 성경구절뿐이다. 교회에 가기 전까지 이어졌던 무수한 몸짓, 소리, 그들의 언어가 모두 무력화 되어버린 것 같다. 설교자는 아이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직 성경의 내용만 전달한다. 모든 것들이 교회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 같다.



무진형제(미디어 작가 그룹) l 무진형제는 3명으로 구성된 작가 그룹이다.
세간의 지배적인 가치와 믿음체계로 굳어져버린 것들을(眞) 의심하고 해체시켜(無) 동시대의 ‘인간-환경 시스템’을 재구성한다.
<삼속(三俗)의 담(談)>, <궤적(櫃迹)-기술된 선인(善人)들> 등을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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