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자료 해제
<안개>의 검열과 불륜서사의 재정위
나르시시스트와 거울
시골 출신으로 서울에서 성공한 부르주아 남성이 고향을 찾아 한 여인을 만난다. 그런데 그 남자에게는 이미 가정이 있다. 소설에서나 영화에서 흔한 불륜 이야기이다. 영화 <안개>(김수용, 1967)는 여기에 시골 풍경에 의해 좀처럼 소실될 것 같지 않는 여인을 더하면서 불륜의 흔한 서사를 재정위한다. 하룻밤 연애로 끝내려는 여인과 사랑이라 우기다 결국 인사도 없이 떠나는 엔딩은 남자의 무책임을 강하게 환기한다. 그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영화에서 불륜의 서사는 밀애가 발각되어 타의에 의해 파국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여인 수난사가 부각된다. 따라서 영화가 끝나고 남는 것은 남거나 떠나간 여인에 대한 원망 또는 연민이 대부분일진대, <안개>는 남자의 무책임을 끝까지 붙들어 둔다.
플래시백과 내레이션, 그리고 주제가 ‘안개’의 무한 반복, 영화 <안개>의 특징이다. 김수용의 영화 <안개>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1964)을 각색한 영화이다. 「무진기행」은 1960년대, 폐허의 현실에 대한 리얼리즘적 재현이나 윤리의식의 재정비 등이 문학성의 기준이 되었던 기존의 문단과는 이질적인 소설로 출현한다. 한국어에 대한 세련된 조탁과 사회문제나 윤리의식으로부터 한결 가벼워진 자아의 형상화 등으로 인해 감수성의 혁명 또는 그 기원으로서 「무진기행」이 자리매김 된다. 우리의 1960년은 사실 새로움에 대한 갈망 또는 신생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로부터 출발한다. 1960년의 4.19는 새로움이나 신생의 정치적 기원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 원천이 형성되는 장이기도 하다. 소설과 영화는 1960년에 형성된 새로움과 신생의 가능성을 서둘러 수용하려 했으며, 김승옥과 김수용이 그 앞자리에 서게 된다. 현실의 기표보다는 내면의 기의를 시청각적 이미지로 재현하는 데 몰두했던 김수용이 영화 <안개>를 통해 시적 영화라는 도약을 전유한 사실은 둘의 만남이 1960년대 ‘신생’이라는 문화적 원천의 실험과 실천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보여준다. 소설은 그 시절 소설에서는 꽤나 낯선 인물과 사건, 그리고 시공간적 배경의 결합을 보여주며, 영화는 이를 당시 영화로서는 가장 낯선 표상 장치를 통해 전달한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의 낯선, 그래서 문제적인 장면들을 살펴보는 일은 「무진기행」과 <안개>의 시대적 위상과 문화사적 의의를 동시에 규명하는 중요한 작업이 될는지 모른다.
일상의 균열과 주체의 소외
소설 「무진기행」으로부터 영화 <안개>로의 각색과정은 소설 속 핵심 사건이나 등장인물들의 행위와 대사는 물론, 서술된 문자 대부분이 영화에 기입됨으로써 '원작 그대로의 각색(the literal adaptation)'에 가까이 다가선다. 소설 「무진기행」과 영화 <안개>는 사실 서사의 구조가 정확히 일치한다. 서울을 떠나 무진에 도착하고, 다시 무진을 떠나기까지 소설의 주인공이 겪는 개별적인 사건은 영화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영화의 첫 장면이 무진행 버스에서 시작하는 소설과 달리 서울 사무실에서 시작하는 점만 제외하면 시간의 흐름 또한 대체로 동일성이 유지된다. 영화의 입장에서 보자면 소설의 첫 회상장면, 즉 무진행 버스에 오른 주인공이 무진으로 가는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의 주름을 펴 순차적인 시간 배열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자아 또는 세계에 대한 인식 역시 두 텍스트 사이의 차이는 별로 크지 않다. 서울에서 성공한 부르주아 남성이 자신의 고향 무진에서 과거의 자아와 조우하고, 그와 인정투쟁을 벌이다 실패하고 결국 자기모멸감에 빠지는 과정, 자신에게 예정되어 있는 세계로부터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무기력한 개인의 좌충우돌은 소설과 영화의 공유항이다.
그런데 유독 영화에서 주인공 윤기준을 문제적인 인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장면은 무엇인가. 영화의 첫 장면은 서사의 전개방향과 연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긴요하다. 영화 <안개>의 첫 장면은 자본주의화된 근대 도시 서울의 일상을 전면화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영화의 첫 신은 시간과 공간을 지시하는 별도의 기호 없이, 전화벨 소리와 타이핑 소리만으로 서울의 한낮이라는 시공간을 드러낸다. 전화벨 소리와 타이핑 소리의 간섭, 즉 기계 소음으로 구성되는 리듬은 자동차 경적 소리로 이어져 서울 한낮의 일상에 배어있는 리듬을 완성한다. 자동차 경적 소리야말로 사무실 안과 밖을 하나로 연결하여 도시의 일상을 전면화하는 표상 기호이다. 사무실 내부로 흘러들어오는 자동차 경적음, 주인공 기준의 동선을 따라 창밖 자동차 경적음이 포착되는 순간 서울의 한낮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화벨 소리, 타이핑 소리와 결재서류에 지쳐 글자가 벌레로 변하는 환시에 빠지는 주인공은 그래서 자본주의화된 근대 도시의 일상에 피로해진 주인공을 드러내고 전달하는 영화적 장면에 다름 아니다. 얼핏 청각을 배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결재서류 역시, 전화벨 소리와 타이핑 소리가 매개하는 산물이라는 점에서 리듬이 주로 의존하는 청각의 세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리를 뜨고 창가로 가보지만 거기서 그가 맞닥뜨린 것은 한층 더 견고해진 리듬, 즉 도시의 일상이다. 이쯤 되면 영화의 주인공 윤기준에 대한 하나의 판단이 가능해진다. 근대 도시의 고유한 리듬 안에 있으면서, 또 그 내부의 그것과 불협하는 한 문제적 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간상의 주름을 펴는 영화 첫 신의 연출은 서울이라는 일상적 기호의 표현과 서울과 무진이 대비하거나 공모하는 세계라는 기의의 함축을 통해 깊이를 만들면서 넓이를 이동시키는 일종의 주름운동으로서 이 영화를 원작으로부터 도약하며 신생하게 한다.
리듬은 관계의 산물이다. 불협의 리듬이 생겼다는 것은 이 관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징후이다. 실제로 주인공 윤기준에게는 분명 관계의 이상이 발생했다. 제약회사 전무이사 승진 기회가 생겼으나 자기의 운명이 결정되는 그 자리에서 본인은 정작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 불협 리듬은 주체로서 그의 불안으로부터 기인한다. 주체가 되지 못하는 그의 상태, 그렇다면 주인공 윤기준이 도시의 일상적 리듬과만 불협하는지, 즉 주체로서의 불안이 시공간적 고유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인공 기준은 시공간적 고유한 리듬에 너무 급하게 화하고 또 너무 빨리 불협한다. 무진에 간 윤기준은 마을 어귀부터 무진의 리듬에 몸을 내던진다. 소금기와 햇빛과 안개의 수면제 같은 리듬에 너무 빨리 화한다. 문제는 이 과정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언제 어디서든 주체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는 점이다. 이 상태라면 주체가 된다 한들 늘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으며, 주체가 되지 못하더라도 살아갈 수는 있다. 의사-주체 상황이자 주체로서의 결핍이라는 그의 특이성은 영화에서 순환-선형적 시간성이라는 거대한 리듬으로서 무진과 만나면서 더욱 뚜렷해진다.
그 대상은 역시 박선생과 조한수이다. 영화는 윤기준과 박선생과의 만남을 으레 있는 반복적인 것으로 다루면서, 조한수와의 만남은 일회적인 것으로 서술한다. 박선생은 여전히 순수하기 이를 데 없으며, 조한수는 성공에 대한 자신의 욕망에 투철하다. 영화에서 윤과 박, 윤과 조의 만남을 보여주는 태도 역시 뚜렷하게 구별된다. 조한수의 집에서 먼저 일어선 박선생을 윤기준이 배웅하는 장면은 안개 자욱한 밤 개천의 빈 배로 채워지는 대신, 조한수와의 만남은 다음 날 아침 그의 세무서에서이며, 한창 업무중인 직원들의 움직임들로 구성된다. 이렇게 박선생은 무진의 순환적 시공간성의 표상이라면, 조한수는 무진에 내재하는 선형적 시공간성의 표상이 된다. 윤기준이 이 둘과의 만남에서 조화를 이루거나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윤기준은 박선생과의 만남을 약속해 놓고서도 지키지 못하거나, 조한수와의 만남에서도 하인숙을 가운데 두고 불편한 관계를 맺는다거나 서울에서의 일상을 떠올리며 외면하기 때문이다. 윤기준에게 박선생이 그에게 내재하는 과거의 억압이라면, 조한수는 그에게 미완의 현재에 다름 아니다.
「무진기행」에는 존재하지 않고 <안개>에만 설정된 장면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조한수의 세무서를 찾은 윤기준이 그들의 업무를 관찰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도 이질적이어서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는데, 앞서의 논의를 따르자면 무진이라는 순환적 시간성에 내재하는 선형적 시간성,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서울에 대한 모방이다. 세무서장 자리에 앉아있는 조한수에게 직원들이 결재를 받으러 오고, 전화벨이 울리자 직원이 대신 받아 조한수에게 바꿔준다. 조한수가 권위적인 태도로 전화응대를 하고 응답이 없자 전화를 끊는다. 다른 직원이 결재를 받으러 오다가 돌아가는 직원과 충돌을 하고 똑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이 익살스러운 미장센은 결국 그들의 행위가 서울에 대한 모방임을 보여주는 효과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선형적인 행위 자체가 하나의 순환적 행위로 구성되고, 윤기준은 그 행위들로 구성된 풍경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조롱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것으로부터의 소외라고 보는 편이 맞다. 왜냐하면 그 장면에 느닷없이 영화의 첫 장면, 전화벨이 울리고 타이핑 소리 요란한 서울의 일상, 즉 윤기준이 애초에 소외된 도시적 일상의 선형적 리듬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서울의 일상과 무진의 자연적 상태와 그에 내재하는 도시화된 일상 모두로부터 소외된 윤기준의 불안한 주체를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의사-유령(pseudo-specter)적 자아의 조우
<안개>의 윤기준은 서울의 일상이나 무진의 일상으로부터도 철저히 소외된 인물로 존재한다. 데리다는 과거로부터 억압받은 기억 혹은 미완의 미래적 열망이 엉겨 붙어 현재를 떠도는 존재를 ‘유령(specter)’에 빗대었다. 윤기준은 과거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현재를 살아가지만, 미완의 현재로부터 이탈되어 과거의 억압이 현존하는 무진에 도착해 있다. 그리고 철저히 두 세계로부터 소외된, 말 그대로 유령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현재의 시간성으로부터 탈각되어 초현재적으로 현존하는 유령의 모습은 영화에서 플래시백으로 편집될 때에만 온전한 자기를 드러내는 장면을 통해 무수히 확인된다. 그런데 데리다의 이 유령은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존재함으로써 삶에 대한 성찰과 가르침을 실어오는 존재이나 윤기준에게 그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서울이라는 현재와 무진이라는 과거의 경계에 존재하면서 현재 자기 삶에 대한 성찰과 가르침을 구하기는커녕, 과거로부터의 구원도 현재의 주체적 삶도 불가능한 자기를 발견한다. 이러한 자기 발견이 주체로서의 불안을 각성케 하고, 주체적 삶에 대한 욕망을 스스로 불러일으켰다면 몰라도, 이 유령된 자아는 타자 지향적인 책임성과 정의를 표상하는 데리다의 유령 정반대편에 서게 된다. 이러한 형상은 결국 그가 잘못 맺은 대타자와의 관계로 인해 생긴 억압으로부터 비롯된다. <안개>는 윤기준의 이러한 형상을 현재의 자아와 과거의 자아가 분열된 채로 대면하는 장면을 통해 암시한다.
솔밭에서 하인숙을 만나 해안가를 걷는 동안 윤기준은 자기의 현재 삶을 과거의 자아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상상을 한다. 영화는 이 장면을 윤기준 역을 맡았던 신성일과 용모가 비슷한 배우를 등장시켜 함께 걷는 쇼트로 구성한다. 영화의 트릭을 배제하고, 트릭이라고 해봐야 같은 길을 걷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비추는 정도로 최소화한 이 장면은 윤기준의 유령적 존재를 가시화하는 데 성공적이다. 동일한 공간에서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을 초월한 존재의 만남은 그 자체로 유령적 상황을 암시하는 영화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밤에 만난 사람들’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영화적 장면에서 박선생과 함께 조한수의 집으로 가던 윤기준은 강물에 비친 과거의 그가 물에 빠지는 장면, 즉 과거 자아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런 과거 자아와의 만남이란 유령의 출현을 암시한다. 현재의 윤기준은 과거의 그에게 질문한다. “사실 나는 감상이나 연민으로써 세상을 향하고 서는 나이도 지난 것”이고 “빽이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만난 것을, 반드시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되었다고 생각한다”라는 소설의 문장을 질문으로 바꾸어 던지자, 과거의 그는 그저 침을 뱉고 만다. 이로서 이 인정투쟁은 잠정적 유보이거나 실패로 끝날 것으로 암시된다. 자신의 현재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한 이 인정투쟁의 유보나 실패는 결국 그가 과거로부터도 현재로부터도 주체적 자립의 불가능성에 대한 확인이다.
이 과거 자아와 현재 자아의 분열이자 만남이라는 유령적 자아의 출현은 영화의 말미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위의 첫 번째 출현이 현재 자아의 질문으로 시작되었다면, 두 번째 출현은 과거 자아의 응답으로 시작한다. 서울로부터 급히 올라오라는 전보를 받은 윤기준이 갈등에 휩싸이자, 과거 자아는 ‘협잡꾼’이라는 말로 침을 뱉었던 행위의 후반부를 이어간다. 그를 추출했던 서울의 도시적 일상으로 회귀할 시점이 되고 무진에서 자신의 행위에 면죄부를 주려고 하자, 과거 자아는 무진에서 그의 행적을 과거 자아의 시점으로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하인숙과의 첫 만남과 그녀를 배웅하는 밤길에서 그녀를 응시하는 음흉하고 욕정에 휩싸인 시선과 해안가의 하숙집 주인에게 집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장면을 차례로 보여준다. 특히 이 장면은 영화에서 한 번 등장했던 쇼트와 이질적이거나, 새로 삽입된 쇼트라서 영화의 서사 자체를 부정 내지는 교란하는 것인지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현재의 윤기준은 무진에서의 삶을 하나의 사실로 만들고, 그에 진실성을 부여함으로써 개인적 신념과 사회적 합의를 구축하려 하지만, 과거의 윤기준은 오히려 이것은 물론 이와 연관된 여타의 허위의식마저 들추어냄으로써 현재의 그를 보다 비판적으로 논쟁되고 성찰될 수 있도록 한다.
어쨌든 이 장면은 유령된 자아의 첫 출현에서 유보되었던 인정투쟁에서의 패배를 확증한다. 이 인정투쟁의 실패는 곧 무진으로부터의 소외이며, 과거의 억압으로부터도 미완의 현재로부터도 추출당한 윤기준의 실체를 폭로한다. 데리다의 유령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타자 지향적인 책임성을 표상한다고 했을 때, 이 실패한 유령은 무책임의 세계로 축소된다. 편지를 쓰고 찢는 행위는 오히려 한층 더 완고하게 자신의 현재를 강화하는 윤기준의 위장적 사과를 봉쇄한다. 무진을 떠나는 윤기준 위로 보이스오버되는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이라는 소설 문장은 현재와 과거, 그리고 그 둘이 공존하는 무진이라는 거대한 세계로부터의 패배에 대한 자기모멸감을 여실히 표출한다. 과거의 억압과 미완의 현재가 엉겨 붙어 현재를 떠도는 윤기준의 의사-유령(pseudo-specter)적 존재는 결국 책임, 즉 약속이나 사과 등의 수행적 언어가 애초에 불가능한 상황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약속이나 사과 등 수행적 언어가 충족되기 위해서는 행위의 수행 여부 및 그 효과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윤기준에게는 장인과 부인이라는 대타자의 존재로 인해 하인숙을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말한 내용이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조건과 진실성의 결여, 그리고 둘 사이에 언어와 행위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는 관계가 파편적이라는 점에서 윤기준의 자기모멸감만 극에 달하게 되는 것이다. 인정이란 주체가 자기 형성을 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자 매개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과거 자아로부터 인정투쟁에 실패한 이 의사-유령적 자아야말로 윤리적 인식과 삶이 실현 불가능한 주체로서의 불안에 대한 확증이다.
문체의 번역과 검열
소설 「무진기행」이 발표되고 곧바로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비평가들의 극찬과 함께 새로운 소설 독자들을 불러들이자, 이를 계기로 또 다른 실험이 감행된다. 이어령, 황혜미 등이 김승옥을 부추겨 시나리오 각색 작업까지 마치고 함께 김수용을 찾아간다. 문예영화에 대한 관심과 감각적인 영상언어에 대한 탐색을 막 시작할 무렵의 김수용은 선뜻 내키지는 않으나 영화 연출을 결심한다. 김수용의 회고에 따르면 김승옥은 김포의 외딴 갯마을에 차린 로케이션 촬영장에서 거의 함께 생활했다 한다. 소설이 영화로, 자신의 문장들이 쇼트라는 시청각적 이미지들의 결합으로 재탄생되는 순간 그가 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신생의 진정성 아니었을까. 자기의 문장들이 자기로부터 빠져나와 도약하는 동안, 김승옥은 더 이상 원작 소설가의 지위를 고집할 수 없었을는지 모른다. 이때 김승옥은 김수용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아들인다. 엑스트라로 출현하게 된 것. 소설이 시작하는 장면, 무진으로 가는 버스 안의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영화 속 장면에 넋을 잃고 있을 그 순간, 윤기준의 뒷자리에 앉은 밀짚모자 쓴 청년이 눈에 띤다. 승객들 대부분 나이가 지긋하고 왜소한 체형인데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역할들만 충실히 수행하고 있을 때, 시선을 좌우로 교차하고, 손으로 턱을 괴기도 하다가, 급기야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담배 하나를 피워 물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 청년, 그가 바로 김승옥이다.
김수용의 회고에 의하면 김승옥의 엑스트라 출현은 계산된 것이라기보다 매우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우연한 계기로부터 의미를 발견하거나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기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 우연성이 작품 바깥에서 원작 소설가의 지위를 버리는 일과 겹침으로써, 원작으로부터의 도약을 통한 신생을 오히려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만드는 데 공모할 가능성은 눈여겨 볼만하다. 무명의 버스 승객으로서 김승옥은 소설에서 영화로의 각색에 대한 비판적 응시의 주체를 포기하고 영화 안에 흡수됨으로써, 그저 관조적 관찰자를 자처하는 선언과도 같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행위는 사실 소설의 문체와 영화의 편집이 유발하는 효과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주어가 뒤로 물러나는 것, 영화에서 주인공의 클로즈업 쇼트가 대부분 롱 쇼트 다음에 위치함으로써 주체로서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것 사이의 유사성은 역설적이게도 원작으로부터 영화의 해방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문예영화가 더 이상 원작 그대로의, 또는 원작에 충실한 각색, 또는 원작의 문학성에 기댄 영화 너머 새로운 세계에 도달할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영화 <안개>가 하나의 사건이라면 그것은 기존 문예영화에 내재하는 간극이나 적대 등을 발견하게 하고, 그것의 지양 방법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영화 <안개>에 대한 당대의 평들이 대체로 긍정적이거나, 이때 긍정적인 평들 사이에서도 플래시백과 내레이션, 그리고 주제가 ‘안개’의 반복이 무진의 억압과 정체, 그리고 서울이라는 미완의 기획이 공모하는 성급한 근대화와 그로부터 소외된 주체의 불안을 가시화하는 시적 영상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즉 영화의 새로움과 완성도에 대한 호평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은 김승옥과 김수용, 소설 「무진기행」과 영화 <안개>의 만남이 우연적이라기보다 신생의 문화적 원천에 대한 실험과 실천으로서 필연적인 만남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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