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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춘

Yun Bong-chun · 尹逢春

분야
감독, 배우, 제작/기획
데뷔작품
들쥐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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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 2

영화제명 개최연도 수상부문 작품명
제16회 대한민국예술원상 1971 연극·영화·무용 부문 -
제1회 춘사국제영화제 (춘사영화제) 1990 특별공로상(추서) -

주요 경력

1954년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
1956년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 회장
1963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1993년 8월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영화인 정보조사

윤봉춘의 정확한 고향은 함남 정평이지만, 실제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함남 회령이었다. 그는 회령에서 평생 친구인 나운규와 사귀게 되었고, 이 인연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고 할 수 있다. 윤봉춘은 회령 신흥학교를 나와 북간도 명동학교를 다녔으며, 이후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3ㆍ1 만세시위와 ‘도판부’ 사건으로 두 차례 검거되어 대략 1년 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출옥한 이후 회령으로 돌아가 교회에서 서무를 보며 지냈다. 윤봉춘을 영화계로 이끈 것은 친우 나운규였다. 나운규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스틸을 보내며 그의 서울행을 권유하였고, 결국 윤봉춘은 1927년 조선키네마 작품으로 나운규가 감독을 맡은 <들쥐>를 통해 배우로서 데뷔하였다(이영일6). 나운규가 조선키네마를 탈퇴하고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했을 때도 윤봉춘은 나운규프로덕션으로 옮겨서 나운규의 <잘 있거라>에 출연하였다(동아일보a). 나운규와 함께 여러 영화에 출연하던 윤봉춘은 나운규의 독단에 반기를 들고 나운규프로덕션에서 나온 이후, 1931년 대구 대동영화사의 제1회 작품으로 김영찬 원작의 <도적놈>을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였다. <도적놈>은 노동과 야학활동을 하던 젊은이들이 세상의 세파에 의해서 결국 무서운 도적놈으로 변했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였다. 주인규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검열당국에 의해서 가위질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조선일보a; 조선일보b; 동아일보b; 조선일보c). 이어서 두 번째 작품으로 엑스키네마 제2회 작품인 <큰 무덤>의 감독을 맡았다. 이 영화는 간도에서 일본군이 독립군과 민간인에 자행한 대량살육을 영화화한 것이었다. 아마도 1920년 일본군이 감행한 ‘간도출병’의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큰 무덤’이란 영화 제목은 일본군이 학살한 독립군과 민간인을 파묻은 무덤을 뜻하는 것으로 매우 민감한 내용이었지만, 당시 검열자들이 이런 제목의 의미를 알지 못했고, 영화 내용도 각색을 했기 때문에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이영일6). 참고로 윤봉춘이 감독을 맡은 <도적놈>과 <큰 무덤>에 출연한 신인여배우 하소양은 당시 윤봉춘과 결혼한 사이였다. 둘은 1929년 왕덕성, 김보신 부부의 소개로 결혼을 하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1933년 결별하였다고 한다(조선일보d; 이영일6). 1931년에는 이명우, 이경선, 이구영, 박제행 등과 함께 화조영화동인제작소를 조직하고, 조선고대극 제작에 노력하기도 하였지만, 1932년 다시 나운규와 재회하여 <개화당 이문>(1932)에 김옥균 역으로 출연하였다(매일신보; 동아일보c; 이영일6). 이후 나운규가 죽기 전까지 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특히 한양영화사 한강통촬영소에서 나운규가 감독을 맡아 만든 전발성 영화 <아리랑 제3편>에서 김선생 역을 맡아 나운규, 신일선 등과 함께 출연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첫 번째 전발성 영화를 목포로 했었지만, 기술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이명우 감독의 <춘향전>(1935)에 그 자리를 내어준 영화였다(동아일보d; 동아일보e; 이영일6). 식민지 시기 윤봉춘의 영화계 활동은 1940년 최인규의 <집 없는 천사>가 마지막이었다. 해방 이후, 윤봉춘은 계몽문화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윤봉길 의사>, <유관순> 등의 영화를 연출하는 것으로 영화계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경향신문a; 경향신문b; 경향신문c). 감독이자 제작자로 활발히 활동하던 윤봉춘은 나운규 20주기를 기념하는 추모기념작 <아리랑>(1957)에 신일선, 석금성 등 왕년의 배우들과 함께 출연하기도 하였다(경향신문e). 감독, 배우 이외에도 영화계 원로로서 다양한 단체 활동에도 관여하였다. 우선, 1955년부터 논의되어 오던 영화인단체 통합 노력의 결과인 한국영화인단체연합회에 참여하여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경향신문d). 그리고 1962년에는 한국영화인협회 초대 이상장이 되었으며, 1963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동아일보f; 경향신문f). 1968년에는 영화계의 원로 복혜숙, 성동호, 김성춘, 이규환, 이창근, 임운학, 김일해, 이재명, 양주남과 함께 한국영화최고회의를 발족시켰다. 61세 이상의 영화인으로 30년 이상 영화계에 종사한 이들이 모인 이 단체는 자신들의 과거 활동을 중심으로 한 자료수집을 통해 영화사를 복원할 계획을 가진 단체였다(경향신문g).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던 윤봉춘은 1975년 10월 21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는 영화인협회장으로 치러졌다(동아일보g).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7년 10월 12일 3면. 동아일보b 1930년 10월 30일 5면. 동아일보c 1931년 4월 11일 4면. 동아일보d 1936년 2월 7일 5면. 동아일보e 1936년 5월 14일 3면. 동아일보f 1962년 1월 6일 4면. 동아일보g 1975년 10월 21일 7면. 조선일보a 1930년 8월 24일 석간5면. 조선일보b 1930년 9월 20일 석간5면. 조선일보c 1930년 10월 31일 석간5면. 조선일보d 1931년 2월 28일 석간5면. 매일신보 1931년 4월 10일 5면. 경향신문a 1946년 10월 8일 4면. 경향신문b 1947년 11월 23일 4면. 경향신문c 1948년 8월 8일 2면. 경향신문d 1956년 3월 7일 4면. 경향신문e 1957년 1월 24일 4면. 경향신문f 1963년 3월 2일 5면. 경향신문g 1968년 7월 22일 5면.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윤봉춘>>6, 소도, 2004.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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