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싸롱 : 맛있는 서비스 2
- 감독
- 김성종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이민정, 수지, 지성, 민우, 이미선
유신에서 신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1970~80년대에 대해 ‘한국영화 암흑기’라는 레이블을 붙이는 건 정설처럼 보인다. 사실이었다. 영화는 TV에 밀리고 있었고, ‘반공’과 ‘새마을 운동’을 내세운 국책 영화에 얽매인 영화계는 점점 뒤틀려 갔으며, 사전 심의와 사후 검열 속에서 크리에이티브는 서서히 증발했다. 산업적 토대의 붕괴, 불합리한 제도, 미학적 고갈이 동시에 진행되었던 이 시대는 몇몇 감독들의 개인기로 돌파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시스템이 붕괴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무분별한 트렌드 추종이다. 1980년대는 그 정점이었다. 멜로드라마와 문예 영화와 스타 시스템을 토대로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무너졌고 1980년대에 난장판이 되었다. 멜로는 여전히 만들어졌지만 예전 같은 힘을 잃었다(진부한 신파의 클리셰에 빠져 있었다). 그 개념은 조금 모호하지만 ‘양질’의 문학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던 ‘문예 영화’는 더 이상 영화화할 만한 소스를 구할 수 없었다(대신 1970년대부터 최인호나 조해일 같은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다). 과거의 스타들은 일거에 물러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만한 스타는 도착하지 않았다( 안성기 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시대였다). 1. 한수산 원작의 <거리의 악사>(정지영, 1987) 2. 이문열 원작의 <레테의 연가>(장길수, 1987) 3. 김홍신 원작의 <인간 시장>(김효천, 1983) 4.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 가장 심각한 건 ‘소스 부족’이었다. 1960년대엔 근대 단편 소설들이 ‘문예 영화’라는 이름으로 애용되었다(여기엔 ‘우수 영화’에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지는 현실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라디오 연속극도 각광 받았고, 때론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그대로 가져온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는 서서히 재료가 떨어졌고 1980년대에 오면 바닥을 드러낸다. 새로운 광산이 채굴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나타난다. 심하게 말하면, ‘돈 될 만한’ 건 뭐든지 끌어다 썼던 1980년대였다. 여전히 ‘문학’은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1970년대 최인호와 조해일에 이어 1980년대엔 한수산 이외수 이문열 박범신 등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영화계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1980년대엔 훨씬 더 대중적인 콘셉트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시장』 시리즈의 김홍신은 대표적이었으며 김성종 유홍종 백시종 김병총 등의 작가들도 가세했다. ‘시대정신’이었던 에로티시즘도 영향을 미쳤다. 외설 시비에 휩싸였던 염재만의 소설 『반노』가 대표적. <빨간 앵두> (박호태, 1982)도 최희숙의 소설이 원작이며, <매춘> (유진선, 1988)은 『매춘: 전국 사창가와 창녀 실태』라는 사회학 서적에서 온 것이었다. 전통의 부활도 있었다. 한동안 맥이 끊어졌던 문예 영화의 흐름은 에로티시즘을 통해 재등장했고 나도향과 김유정이 소환되었다. 일본 소설도 영화화되었다.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은 큰 흥행을 거두었고 호즈미 타카노부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미례, 1984), 하시다 스카코의 <오싱>(이상언, 1985), 나쓰키 시즈코의 <W의 비극>(김수형, 1985형) 그리고 이쿠시마 지로의 <한쪽 날개의 천사>(이성민, 1987) 등이 이어졌다. 1960년대 한국영화가, 당시 문화 교류가 없던 일본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가져가 음성적으로 번안해 영화화했다면 그 원천을 밝혔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모습이다. 미즈키 교코 원작의 만화 『캔디 캔디』도 영화화되었다. 1.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최재성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다. 2. <신의 아들>은 최민수의 데뷔작이다. 3. 강철수 원작의 <팔불출> 4. 한희작 원작의 <한희작의 러브러브>. 가장 강력한 소스는 만화였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장호, 1986)이 장안을 뒤흔들기 전, 1980년대 초부터 꾸준한 시도가 있었다. 그 시작은 길창덕 화백의 <순악질 여사>(김수형, 1980)였다. 이야기보다는 ‘순악질 여사’라는 캐릭터를 가져온 면이 강하며, 장미희가 주인공을 맡았다. 이후 1980년대에 약 20편가량의 만화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스포츠 신문 연재나 만화 가게나 당시 쏟아지던 만화 주간지를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터에 흥행성이 꽤 괜찮았다. 이현세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이 시기 만화 원작 영화의 주요 인물은 강철수였다. <팔불출>(고응호, 1980)의 원작자였던 그는 이후 영화 쪽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랑의 낙서>(심재석, 1988)엔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고, 1989년엔 <발바리의 추억>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는다. <가루지기>(1988)의 고우영 감독도 만화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잠시 업종 전환을 한 케이스인데, 1980년대의 만화는 충무로에 원작뿐만 아니라 인력도 공급한 셈이다. 그리고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다. 당시 프로야구 열풍과 이현세의 만화에 대한 컬트적 반응을 힘입은 이 영화는 영화 제목에 ‘공포’가 들어가선 안 된다는 당시의 심의 규율 때문에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개명해야 했는데, 이것이 액땜이 되었는지 서울에서 약 28만 7,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빅 히트를 기록한다. ‘까치’ 오혜성 역을 맡았던 최재성은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으며, 동네 전파사마다 정수라가 부른 주제가 ‘난 너에게’(“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흘러나왔다. 프로야구의 인기, 이장호 감독의 흥행력 등 이 영화의 성공 원인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핵심은 이야기였다. 당대 한국영화와 비교해볼 때 이 영화가 지닌 극적 요소는 두 배 정도는 셌다. 강한 승부욕, 목숨을 건 순애보. 팽팽한 긴장 관계, 뼈를 깎는 극기 정신…. 떡볶이로 치면 고추장이 아닌 캡사이신 맛이었고, 그 강렬함에 젊은 관객들은 반응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일련의 스포츠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박봉성의 『신의 아들』, 이현세의 『지옥의 링』,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등 복싱 소재 만화들이 영화화되었다. 1980년대 ‘복싱’은 여전히 있기 있는 스포츠였고, 여기에 혹독한 트레이닝과 청춘의 고독과 비극적 로맨스가 결합되었다. 안타까운 건 원작을 따라가지 못했던 인기였는데 완성도가 문제였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트렌드는 역시 ‘에로티시즘’이며 스포츠 신문 연재를 통해 성인 만화의 흐름을 이끌었던 한희작과 배금택은 주역이다. <서울 손자병법>(김현명, 1986)이 한희작의 원작이 지닌 지명도에 기대 제목 정도만 가져 왔다면, <한희작의 러브러브>(윤석태 김정진, 1991)은 아예 제목에 작가의 이름을 드러낸다. 당대의 섹시 아이콘인 강리나는 만화 캐릭터를 별 위화감 없이 소화하는데, 이후 배금택 원작의 <변금련>(엄종선, 1991)에서도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화 원작 영화의 흐름은 1990년대엔 뜸해진다. 이현세가 직접 연출을 맡은 <아마겟돈>(1996)이나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1996) 등 극장용 애니메이션 쪽에서 성과를 냈고, 이현세의 『카론의 새벽』을 옮긴 <테러리스트>(김영빈, 1995)와 허영만 원작의 <비트>(김성수, 1997)가 흥행했지만 1980년대만큼의 양적 성과를 내지 못한다. 다시 그 붐이 일게 된 건 2000년 이후. 여기엔 웹툰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1. <멋대로 해라>의 혜은이와 김동현. 그들은 이후 부부가 된다. 2. <너무 합니다>의 원작자이자 주인공인 김수희. 3. 박남정 주연의 <새앙쥐 상륙 작전> 4. <담다디>의 이상은과 민규.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아이돌 출신 연기자들의 활약이 돋보이긴 하지만, 가요계와 영화계의 크로스오버 현상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전 1960년대부터 주제가는 영화 흥행의 중요한 요소였고,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슈퍼스타들이 은막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는 남달랐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지만, 이 시기엔 당대의 히트곡 제목을 그대로 딴 영화들이 쏟아졌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출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영화 내용도 노래 가사와 대부분 무관했다. 오로지 노래 제목의 인지도를 이용한 경우들인데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비련’, 와일드 캣츠의 ‘마음 약해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윤시내의 ‘난 모르겠네’와 ‘열애’, 이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김현준과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이선희의 ‘J에게’, 최성수의 ‘풀잎 사랑’ 등 수많은 히트곡들이 그 제목을 충무로에 빌려주었다. 물론 가수가 직접 영화에 출연한 경우들도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던 전영록이나 송골매, 김형용 같은 청춘 영화의 스타들은 대표적인 경우. 이외에도 <나를 보러 와요>(이유섭, 1980)의 방미, <슬픈 계절에 만나요>(박남수, 1981)의 백영규, <잊혀진 계절>(이형, 1984)의 이용, <담다디>(김응천, 1989)의 이상은, <울고 싶어라>(배해성, 1989)의 이남이, <앗싸! 호랑나비>(원정수, 1989)의 김흥국 등은 노래의 주인공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서는 경우들이었다. <너무 합니다>(남석훈, 1984)은 김수희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녀는 원작자이자 주연 배우로 참여한다. 노래와 상관없이, 가수 자체의 인기로 영화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낌없이 바쳤는데>(박호태, 1980)의 심수봉, <멋대로 해라>(김정현, 1980)의 혜은이(1970년대부터 배우 활동),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1)의 조용필,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강대선, 1982)의 이은하, <흑녀>(강대선, 1982)의 인순이, <졸업 여행>(오성환, 1985)의 김범룡, <새앙쥐 상륙 작전>(김정진, 1989)의 박남정 등이다. 연기력을 인정받진 못 했지만, 당시 이 영화들은 그 화제성으로 이슈가 되었다. 당시 가요계와 영화계의 끈끈한 관계는, 가요 쪽의 붐에서 기인했다. 트로트 중심이었던 한국 대중가요는 1980년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며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아이돌 문화를 형성했다. 이 시기 침체기를 지나던 영화계는 가요계의 호황을 이용하려는 수많은 기획을 시도했고, 그 결과 수많은 ‘가요적 영화’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영화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흐름은 한국영화가 자생력을 서서히 지니기 시작하는 1990년대가 되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충무로가 수혈받았던 또 하나의 원천이 있었다면 바로 TV의 코미디언과 개그맨이었다. 이전에도 영화와 방송을 겸하는 수많은 희극인들이 있었고 그 전통은 이주일로 이어졌다. 특히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조용히 살고 싶다>(김수형, 1980)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등의 ‘유행어 영화’는 작은 트렌드를 이뤄 <웬일이니>(김종성, 1983) <난 이렇게 산다우>(남기남, 1985) 등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대중문화의 인기를 영화로 끌어오려는 기획이었다. 새로운 경향은 개그맨들의 진출이었다. ‘아동용 SF 액션’에 대한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 1980년대의 수많은 개그맨은 SF 프랜차이즈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들은 아이들 영화를 벗어나 성인용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다. 이외에도 서세원 주병진 김명덕 김형곤 김병조 등 당대의 인기 개그맨들은 대부분 영화계와 만났으며 전유성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디오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의 이주일. 2. <회장님, 우리 회장님>(엄종선, 1988)은 개그 프로그램을 영화화했다. 3. 주병진과 이미숙이 주연을 맡은 <가슴 깊게 화끈하게>(김수형, 1981) 4. 리메이크 영화인 <미워도 다시 한번 1980 - 1부>(변장호, 1980). 1980년대는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강렬한 생존 욕구로 인해 숱한 하이브리드 현상이 일어났던, 용광로 같은 시기였다. 대중 문학계든 가요계든 만화계든 희극계든, 노래 제목이든 유행어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접목시켰으며 그 중엔 적잖은 성공도 있었고 대부분의 실패가 잇따랐다. 수많은 속편 영화들이 있었고 리메이크도 적잖았으며 애교(?) 섞인 표절도 종종 있었다. 아무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했던 시절이었다. 새삼 던져보는 질문. 1980년대는 과연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나?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면을 살짝 엿보면 이 시대만큼 역동적이었던 시대도 드물다. 장르적으로 매우 다양했고, 영화 이외의 분야와 끊임없이 접점을 만들어갔다(그런 점에서 2000년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분투. 1980년대는 천박한 상업주의와 여기에 저항하는 힘, 과거의 관습을 지속하려는 의지와 돌연변이 같은 존재들이 뒤엉켜 기묘한 연대기를 써 가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이토록 미로처럼 뒤얽힌 상황 때문일 것이다.
이두용 감독의 < 최후의 증인 >을 처음 본 건 TV를 통해서였다. 1980년대와 90년대 초반 사이에는 TV에서 뜬금없이 한국영화를 틀어주는 일이 빈번했는데, 이 영화와의 만남도 그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문제는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시원시원한 전개와 팽팽한 미스터리 구조가 눈길을 붙잡았음에도 이야기가 어찌나 비약을 거듭하는지 결국 기억에 남은 것은 하명중 이 입에 권총을 넣고 자살하는 마지막 장면 정도였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이 영화가 그토록 이해 불가 수준이었는지 이유를 알게 됐다. 애초 150여 분이었던 러닝타임이 검열을 거치면서 40분 넘게 들어내면서 쪼그라들었던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원본 네가 필름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최후의 증인>은 영원히 괴이한 영화로 기억됐을지도 모른다. 김성종이 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 최후의 증인 >은 한 형사의 집요한 추적극이자 한 여인의 끔찍한 수난사이며 한 남자의 서글픈 고행기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문창경찰서의 오병호 형사( 하명중 )다. 서장의 특별지시로 양조장 주인 양달수( 이대근 )의 살인사건을 수사하게 된 그는 이 사건이 한국전쟁 뒤 지리산에 잠입했던 빨치산과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양달수는 당시 우익 청년 대장으로 빨치산 유격대를 소탕하는 데 공헌을 세웠던 인물. 오 형사는 수많은 사람을 탐문한 끝에 양달수가 유격대장의 딸 손지혜( 정윤희 )와 유격대장이 남긴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그녀의 보호자 황바우( 최불암 )에게 살인 누명을 씌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오 형사는 손지혜가 유격대원들 사이에서 위안부 취급을 당했을 뿐 아니라 양달수가 살해된 뒤에는 술집과 다방을 전전해왔으며 손지혜를 지키려다 살인자로 몰린 황바우가 사실은 가련한 역사의 희생양이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 최후의 증인 >은 외양상으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영화처럼 보인다. 오 형사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수사를 진행하며, 그 과정에서 애초 단순한 살인으로 보였던 사건은 가면 갈수록 거대한 실체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퍼즐 조각 맞추기가 아니다. 강원도에서 강 노인으로부터 첫 번째 결정적인 증언을 듣는 순간, 오 형사는 자신이 쫓고 있는 대상이 단순히 살인범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빨치산 투쟁, 손지혜의 고난, 황바우의 희생, 양달수의 음모 등 썩고 뒤틀어지고 얽히고설킨 과거사는 사건 해결의 단초일 뿐 아니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대상으로 발전한다. 이야기가 서서히 추리에서 역사 드라마로 전환됨에도 <최후의 증인>의 영화적 흥미는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와 과거가 서로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침에 따라 극적 긴장은 강화되고 호흡은 가빠진다. 이 영화에서 역사적 진실 규명은 책임감 수준으로 발전한다. 과거를 덮으려는 한동주의 세력에게서 공격을 받고 가까스로 살아난 오 형사는 서장에게 “이 사건은 제가 꼭 해결하고 싶습니다… 경찰도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오 형사에게 이 사건은 단순한 직무를 넘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해결해야 할 임무가 된 것이다. 이 말은 “당신이나 나나 안일 무사하게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져야 할 책임을 그 친구가 대신 십자가를 지고 하고 있소”라는 서장의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이 ‘(역사적) 책임감’은 궁극적으로 이두용 감독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이두용 감독은 < 최후의 증인 > 시작 부분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놓았다. “구악을 일소하고 새 질서를 확립하려는 1980년 이 시대에 어제의 진실이 무엇이고 가짜가 무엇이라는 것을 한 수사관의 집념적인 인간보호를 통해 가식 없이 토론하고 싶었다. 얘기도 어두운 얘기, 화면도 어둡다. 80년대엔 이런 어둠이 사라졌으면 한다.” 또 그는 <씨네21>과 인터뷰에서 “무지하지만 착한 사람들이 권력에 마모되고 상처받는 그 광경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도 말했다. <최후의 증인>은 주로 호쾌한 액션영화를 만들었고 멜로드라마와 사극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던 이두용 감독으로선 흔치 않은 사회 드라마였지만, ‘인간보호’정신, 즉 휴머니즘을 긴장력 있는 극적인 형식과 결합해냄으로써 뛰어난 성취를 이뤄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영화 안에서만 발현된 게 아니었다. ‘구악을 일소하고 새 질서를 확립하려’ 한다는 전두환이 이끌던 당시 정부는 이 영화에 극약 처방을 내렸다. 40여 분을 걷어냄으로써 영화의 맥락마저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양달수와 결탁한 검사가 황바우를 선처하겠다고 속인 뒤 손지혜를 자기 방에 들이는 장면이 정권을 불편하게 만들었으리라는 게 이두용 감독의 회고지만, 그보다는 ‘얘기도 어두운 얘기, 화면도 어둡다.’는 점이야말로 이 영화가 고난을 겪은 진짜 이유일 것이다. 빨치산이라는 역사의 어두운 금칙어를 당당하게 들이밀 뿐 아니라 ‘인간보호’와는 정반대 노선을 통해 부와 권력을 획득한 세력을 직설적으로 비난하는 이 영화에 대해 당시 기득권 세력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 최후의 증인 >은 복원사업의 의의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과거 검열의 가위질에 의해 누더기가 된 영화에 애초의 가치를 돌려주는 일 또한 오랜 독재의 나날을 겪었던 우리에겐 각별히 중요한 사업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