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 없는 5일
- 감독
- 마리아나 체닐로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페르난도 루한, 아리 브락맨, 안젤리나 페라에즈, 막스 켈로우, 베로니카 랜저, 엔리크 아레올라, 후안 카를로스 콜롬보, 마리나 데 타비라
사진: 필자 제공 회생(回生) < 회생 >(2026)은 제목 그대로 회생(回生)에 관한 영화다. 거의 죽어가다가 다시 살아가고자 하는 그 지난한 과정이 얼핏 담겼다. 곡절을 겪는 메마른 인물들이 언젠가 흠씬 웃기도 하고 때로는 비난이 칭찬으로 바뀌기도 하며 무겁던 세속도 일순간 탈속으로 변하기도 한다. 언뜻 회생이란 것이 타자의 구원이라거나 은총을 매개하여 전제하는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변화란 다만 자신의 고통만을 전제한다. 구제를 자처하거나 이에 도통하려는 타자의 개입은 별개의 문제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주체는 나 자신 말고는 없다. 살아내는 것도 스스로 살아내는 것이고 스스로를 사지로 내모는 것도 나 자신이다. 그간 마셔보지 못했던 환희의 숨이 내 몸에 스며드는 순간에 선행되는 것은 다름 아닌 숨 끊길 듯 숱하게 비애를 몰아쉬었던 자신의 고통이다. 날마다 심폐소생을 받아야 할 만큼 저마다 꽉 막힌 삶을 살아가고 있으나 겨우 숨 붙들고 그런대로 곧잘 살아가는 이유, 변화의 가능성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 있다. 고통은 변한다. 그리고 변화는 그 대가를 안다. 평상심을 얻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변화는 격정에 쫓기던 시절을 기억한다. 자칫 욕심내거나 성내게 되면 감당 못 할 채무를 떠안는다는 걸 기억한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비범한 나날을 좇으려는 어리석음으로 회생 불가의 지경에 이른다는 걸 잊지 않는다. 그리하여 변화는 괴로움에 급급하여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삶의 구체적인 면면에, 평안에 이르기 위한 원리금을 꾸준히 상환하고자 한다. 고통과 격정으로부터 다시 빚 독촉을 받지 않기 위하여 변화는, 주고받음이 정확한 우리 삶에 실재하는 대차(貸借) 관계, 곧 업(業)에 따라 간신히 처신한다. 이러한 변제 행위는 기도가 된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 이문재의 시 「오래된 기도」 중 회생한 자가 있다면, 거의 죽어가던 끝에 원인 모를 힘이 생겨 갑자기 살아낸 것이 아닐 것이다. 위와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에 자신을 일일이 맡겨보려는 무의식과 더불어 일상을 껴안게 된 몸이 저절로 평안을 찾아갔을 터이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기만 해도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걸 한 번 믿어보려 했기에 엉겁결에 회생이란 변화를 맞이한 것이 아닐까. 업(業) <회생>의 영어 제목은 카르마(Karma)다. 그래서 이 작품은 ‘행위’에 관한 영화다. 카르마란 불변의 법칙도 운명도 아니다. 나의 사소한 몸짓과 말씨, 스치는 한 생각으로도 빚어내는 행위들이 언젠가 자기 삶에 크고 작은 굴곡을 남긴다는 오래된 상식에 가깝다. 당장 갚지 못할 금전 채무이든, 오래도록 쌓인 마음의 빚이든 이러한 상식선에서 정확하게 나타나고 또한 사라진다. 문제는 무지(無知)다. 고통의 근원이다. 과도한 빚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파산에 이르기 전까지는 스스로 어떤 행위를 짓고 살아가는지 좀처럼 모르는 것이다.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가고 있으면서도 이를 모른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끝내 죽는다. 자신의 서슴없는 행위들이 자의에 의한 죽음에 일조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 반면 알게 되면, 즉시 멈춘다. 빚에 대한 오해가 깊다. 빚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이는 아군을 향한 오인 사격과 같다. 빚은 다만 출현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너무나 모르고 살았기에 이를 넌지시 일러주고자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고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고 걷기만 해도 남 부럽지 않은 충만에 이를 수 있다는 삶의 신비를 부디 모르고 살지 말라며 삶으로부터 부득이 요청되는 것이다. 빚은 마치 제 할 일을 다한다는 듯 무지와 인위에 허덕이는 이들을 저마다 찾아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국, 빚은 단지 삶의 불화와 갈등이 몸 밖으로 드러난 통증에 지나지 않는다. 과도한 빚을 진 자가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제야 그는 그동안 곪아 있던 속살을 마주한다. 돌연 조급해진 그에게 상처는 안중에도 없다. 애꿎게 자신과 타인을 꾸짖는다. 죄책감은 속살 깊이 파고들어 상처를 더욱 곪게 한다. 그러나 별안간 본모습을 드러낸 빚을 맞이할 수 있다면 기어이 치유의 겨를이 생겨난다. 오랫동안 차마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던 그 환부를 보살필,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때 빚은 짐이 아니다. 새살이 움트는 자리가 된다. 회생은 빚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둠은 다만 빛의 부재이다. 따로 어둠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무지는 앎이 비추는 곳에서만 걷히고 빚 또한 회복을 상실한 삶이 드러낸 양태에 불과하다. 불교식 표현을 빌리자면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곧 괴로움과 깨달음은 애초에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깊은 번뇌야말로 삶을 크게 돌이키는 인연이다. 회생이란 삶을 다시 배워가며 보듬어보는 일이다. 회생(懷生) 빚 몇천 몇억 탕감받기 위해 그저 회생절차를 이용하고자 법무사사무소에 구비서류만 툭 내던져놓고 가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살면서 이런 곳에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끝내 통곡을 두고 가시거나 지나온 삶의 회한에 이제는 말조차 잃은 듯 허공만 바라보다 가시는 분들이 있다. 이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말이 과연 무얼까 고민이 짙었다. 어쩔 줄을 몰랐다. 차분히 말 듣는 것과 맡은 일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말이 있으려나 싶었다. 그런데 마주한 자의 비감을 견디질 못하고 몇 마디라도 건네야 할 것 같으면 사무원으로 일하는 나 역시 법무사인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라 말하곤 했다. 처음 보는 제 앞에서 어렵게 눈물을 보이셨지만 그래도 빚을 갚으며 살아내려는 당신의 모습이 되레 제게는 큰 위로가 된다며. 더는 말을 아끼고 속으로 되뇐다.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당신의 사망진단서와 폐쇄 가족관계등록부 몇 장으로 가족들이 대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당신 스스로 온 것이니까. 그래서 <회생>을 처음 기획하면서 언젠가 완성이 되면 고개 푹 숙이고 있는 분들에게 그저 군말 없이 이런 영화도 있으니 시간 되실 때 한번 보시라 말씀드리고 싶었다. 이 영화가 회생(懷生), 모든 살아 있는 무리, 곧 중생을 위한 영화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서원이었다는 것을 날마다 절감한다. 예컨대 1999년경 사망한 어머님 생전의 1989년 발생한 은행 채무를 2026년이 되어서도 상속받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채무가 발생한 1989년 이후 30여 년 동안 총 네 차례나 양도된 채권을 최근까지 보유한 대부회사가 2026년 들어 시효연장의 소를 제기했다는 사실을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 사람에게 이 <회생>이라는 영화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인간 영혼의 불안을 잠재울 그 어떤 예술과 종교도 그 채무를 대신 없애주지는 못한다. 대물림을 막기 위해서는 시효연장 소장을 송달받은 날부터 14일 안에 추후보완항소를 제기해야 하고, 상속채무의 존재를 알게 된 날부터 3개월 안에 특별상속한정승인심판을 청구해야 한다. 결국 현실의 채무를 해결하는 것은 법률이다. 그렇다고 예술이 무력한 건 아닐 것이다. 영화 < 죽은 시인의 사회 >(피터 위어, 1989)에서 키팅 교수는 “법률과 의술, 사업과 기술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고귀한 일이지만, 시와 아름다움, 낭만과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라 말하지 않던가. 영화는 상속채무의 대물림을 막아낼 수는 없겠지만, 빚을 짊어진 한 인간을 이해하게 한다. 내면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삶의 목적이다. 금전 채무를 당장 탕감받는다고 해서 삶의 근원적인 병폐가 곧바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회생과 파산사건에는 법률대리인을 둘 수 있을지언정, 법적 절차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알 길 없는 내면의 문제만큼은 그 어떤 대리인도 선임할 수 없고 그 어떤 절대자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다. 삶이 요구하는 것은, 그저 자기 마음을 스스로 제때 돌보는 일이다. 마음이 문드러졌다면 그 또한 몸처럼 치유의 대상이 되며, 그 치유에도 적절한 시기와 나름의 절차가 있다. 오랫동안 몸집을 키운 상속채무를 떠안지 않기 위해서는 추후보완항소와 특별상속한정승인심판 청구를 정해진 기간 안에 해야 하듯, 마음이라는 세계에도 놓쳐서는 안 되는 시기가 있다. 적기를 놓쳐버리면 누군가는 끝내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그때 그 마음은 이미 오래도록 무거운 짐에 짓눌려온 육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랜 세월 사무원으로 일하며 시를 써온 김기택 시인은 마음을 두고 이렇게 썼다. 마음이란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육체이다. 살처럼 꼬집거나 때리면 아프고 상처가 난다. 닭살도 돋고 주름살도 생기고 때도 낀다. 마음이란 육체이므로 음식과 물을 주지 않으면 굶어 죽는 것은 당연하다. 햇빛과 공기가 닿지 않으면 말라가는 것은 당연하다. 늙는 것도 병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 여느 육체와 마찬가지로 잘생긴 것과 못생긴 것이 있고 큰 것과 작은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있다. 그러나 마음이란 성감대보다 민감하고 오감보다 예민한, 섬세한 그만큼 망가지기 쉬운, 육체이다. - 김기택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 중 법무사사무소에는 상처 입은 마음이 찾아온다. 목을 매기 직전에 가까스로 어머니의 몸을 들어 올린 아들의 마음, 실종신고 끝에 차 안에 홀로 있던 아들을 겨우 찾아낸 아버지의 마음, 이자율 1000%가 넘는 불법 사채에 휘말린 자식 좀 도와달라며 울며 발만 구르는 어머니의 마음이 밀려온다. 그러한 마음에는 아직 새살이 돋을 겨를이 없다. 깊이 패인 상처는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 흉터가 되기 전까지 붕대로 감겨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큐멘터리가 함부로 담아서는 안 될 한 가지가 있다면,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다. 흉터가 되었거나, 적어도 회복의 기미가 보여야 지나온 흔적을 다른 이에게 어렵사리 꺼내 보일 수 있다. 다큐멘터리는 상처를 내맡긴 대상과 믿음을 나누는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그렇기에 이 예술이 되려 상처를 헤집게 된다면, 법과 종교의 오래된 폐단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다만 작품의 소재로, 사건의 구실로, 끝내는 구원의 대상으로까지 여기게 된다면 정작 돌보아야 할 저마다의 마음을 놓쳐버릴지 모른다. (그 믿음은 촬영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함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스태프와 감독 자신까지 이어진다. 2023 DMZ Docs 피치에서 만난 <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의 김영조 감독은 다큐멘터리는 세 가지 신뢰 위에 선다고 말해주었다. 감독과 스태프 사이의 신뢰, 감독과 대상 사이의 신뢰, 그리고 감독 자신에 대한 신뢰.) 다시 회생(回生) 법무사 아버지를 더 미워하다가는 내 마음에 더 큰 병이 날 것만 같았다. 그가 세상 떠난 뒤에 미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 싶었다. 그래서 그가 숨이 붙어 있는 한 함께 채무를 갚아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내고서부터 이상한 일들이 이어졌다. 정말 하늘이 감응한 것인지 사무실 수입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매달 고정된 변제금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형편이 갖추어졌다. 밥 굶지 않고 잠잘 곳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생계는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매달 둘이서 힘겹게 번 돈이 변제금으로 모두 나갈 때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기분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 허탈한 리듬에 몸과 마음이 곧바로 적응한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번 달 변제금은 겨우 마련했는데 다음 달은 어떻게 하지 또 어떻게 버티나’ 하는 걱정이 컸다. 그러나 매달 새로운 의뢰인들이 이곳을 찾아왔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또 한 달이 지났다. 6개월, 24개월, 48개월이 흘렀다. 언제부터 빚을 갚기 시작했는지 또 얼마의 빚이 남았는지 세어 본들, 돈이 뚝 떨어지고 빚이 갚아지나 싶었다. 도대체 몇 건의 회생 파산과 채무 관련 사건을 다룬 것인지조차 모를 지경에 이르렀고 그렇게 아홉 해가 흘렀다. 빚을 갚아나가는 삶의 운율이 이제는 아예 몸에 배어 버렸다. 혹여나 한꺼번에 남은 빚을 모두 청산할 기회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또 다른 업이 되어 되돌아올까 두렵다. 업무를 두고 법무사님과 의견이 엇갈려 서로 화를 내고 감정이 상할 때면 문득 언젠가 찾아올 그리움에 대해 떠올려보려 한다. 그러면 화가 좀 가라앉는 것 같다. 아, 이 순간도 언젠가 얼마나 그리워질까. 그렇게 여기면 좀 진정이 된다. 제발 청소 좀 하라며 핀잔을 늘상 주어도 기어코 구정물 묻은 신발로 사무실 바닥을 누비고 다니는 그 발자국이 얼마나 그리워질까. 방금 전까지 다시는 말 안 걸 것처럼 다투다가도 ‘어제 쓴 서면 꽤 잘 썼더라’라는 한마디에 토라진 마음 풀리는 일은 또 얼마나 그리워질까. 서로 뭔가를 끼적여 각자의 자리 벽에 붙여놓고는 훈훈한 날이면 ‘이건 어디서 주워온 글이냐’며 서로 품평하는 시간도. 각자 퇴근한 뒤에 서로 미안하다며 자기 전 짧게 문자를 주고받는 일은 언젠가 또 얼마나 그리워지려나.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의 시 「묵화」 어떠한 종속이 현실을 외면하는 체념이 된다면 그보다 지독한 구속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종속이 현실을 긍정하는 수용이 된다면 외려 그 안에서 자유를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 나는 믿고 싶다.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마음을 품고 지내다 보니 그제야 나는 어머니에게 마음의 깊은 빚을 지고 살아왔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빚을 줄여나가도 끝없이 다채로운 빚이 찾아오는 이곳에서야 그녀와의 인연이 지닌 무게를 헤아릴 수 있었다. 그녀가 왜 비구니가 되었는지, 정확히는 왜 다시 비구니가 되었는지는 어린 내가 알 리 없었다. 자식을 둔 비구니라는 사실은, 어린아이가 알아가는 세상과는 도무지 들어맞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존재를 숨기기에 바빴고 가까운 이들이 이를 알게 될까 늘 무서워했다. 학창 시절은 물론 성인이 된 뒤에도 나는 늘 그랬다. 군대 신병교육대 수료식 날에도 보살님들과 함께 나를 보러 온 그녀에게 그냥 차 안에 계시라 했다. 그녀는 가만히 차 안에서 날 기다렸다. 군 제대 하고 2주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금 네 아버지 곁에 누군가 좀 있어야 할 것 같다며 주변에 그를 도울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제대한 뒤에야 이 이야기를 내게 꺼낸 것은 그녀 나름의 배려였던 것 같은데, 당시 나는 세상 다 무너진 것처럼 꽤 충격을 받았다. 내 첫 반응은 그랬다. 어쩌라고. 나보고 어쩌라고.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몇 있다. 사법고시를 공부하러 고시원에 간 그가 부처님 오신 날이면 절에 와 연등을 달고, 눈 많이 오면 눈 쓸러 오거나 절의 작은 하꼬방에 기숙하러 왔다가 넷마블 알까기를 하던 모습. 다시 무거운 가방을 들고 고시원으로 향하는 뒷모습. 그런 희미한 기억 품고서 법무사를 한다는 그의 사무실로 갔다. 꼬질꼬질한 모습이 그대로였다. 이 사무소에서 수많은 이들의 기구한 사연과 삶의 몸짓을 듣고 본 뒤에야 나는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녀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남긴 사찰 빚을 대신 갚고자 다시 승복을 입고서 아무도 갚지 않으려는 빚을 스무 해 넘도록 묵묵히 갚아왔다는 사실이 비로소 가슴에 사무쳤다. 새벽녘 도량석을 마치고 향냄새 풍기며 어린 내가 자는 곁으로 와 다시 잠들던 그녀가 지금의 나처럼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는 걸 그토록 몰랐다.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원망은 지금도 나를 부끄럽게 하고 아직도 나를 짓누른다. 비구니 스님은 어린 내게 라면을 종종 끓여주었다. 라면 냄비 안에 떠 있는 긴 머리카락을 발견하고는 나는 스님에게 투덜거렸다. 왜 머리카락이 여기 있느냐며, 머리카락이 들어간 음식은 먹기 싫다고. 나는 머리카락을 끄집어내고 다시 라면을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스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스님은 제 머리카락 하나에 씩씩대며 다른 이를 탓하는 어린 내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아버지의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그의 빚을 굳이 드러내고자 했던 내 욕망은, 그간 어머니의 존재를 숨기느라 그녀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고자 했던 부채감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그 청산 과정에서 시심(詩心)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사무소 출퇴근길마다 많은 시인들의 시를 외웠다. 언젠가 그들처럼 살아보겠노라 다짐했으나 내게는 시 쓰는 재주가 없다는 걸 일찍이 알았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고마운 시를 내어준 시인들에게도 참 많은 빚을 졌다. 그러다 운 좋게도 다큐멘터리와 연이 닿았다. 이 인연은 또 언젠가 얼마나 큰 빚으로 남게 될는지. 부모에 대한 영화를 만들며 안도현 시인의 시론 [1] 을 여러 번 읽었다. 시는 부모와 절대자에게 마음을 바치는 양식이 절대 아니라고 한다. 부처를 우러르면 불경을 읽고 절을 하면 되는 것이고 부모를 공경하면 지극히 효도를 다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부처와 예수와 부모를 시에다 쓰고 싶어 못 견디겠으면 부처의 말씀을 관념의 테두리 안에 가둬버리고 실천할 줄 모르는 자들에 대해 쓰고 또 부모의 비겁함과 치부와 죄를 찾아 쓰라 한다. 무엇을 위해서도 누구를 위해서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나는 역시나 시 쓰기에 실패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먼저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시든 시적인 것이든 그 이후의 일이다. 이 영화의 한글 제목 ‘회생’이 법무사(아버지)라는 외피를, 영어 제목 ‘KARMA’가 비구니(어머니)라는 내피를 나란히 품기를 바랐다. 어린 시절의 내게 이 둘은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세계였다. 다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승과 속이 본래 둘이 아님을 믿고 싶었다. 서로를 배척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세계를 한 스크린에 놓아두고자 그 사이에서 나는 좀 앓았다. 비구니 스님이 울린 범종 소리로 끝맺는 <회생>의 마지막 장면은 앞서 언급한 이문재 시인의 시 「농담」 [2] 의 마지막 연에 빚을 졌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 [1] 안도현,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한겨레출판, 2023. 3. 17. [2] 이문재, 『제국호텔』, 문학동네, 2012. 12. 17. 김면우(영화감독) l < 회생 >(2026) 연출.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The Apartment Pictures) 1978년 3월 16일 아침 9시 10분. 이탈리아 총리를 2번이나 역임한 기독교 민주당 대표 알도 모로가 붉은 여단에 의해 납치되었다. 그날은 기독교 민주당이 서구 사회에서는 처음으로 공산당과의 연합정부를 구상하고 신임투표에 들어가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일명 ‘역사적 타협’의 설계자였던 모로는 당 안팎의 우려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납치, 살해, 테러, 총격전이 횡행했던 이탈리아의 가장 어두운 시기, 이른바 ‘납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서는 좌우간의 타협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이 가장 폭력적인 시대의 희생자 아이콘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모로는 납치 당한 지 55일 만에 시신으로 돌아왔다. 다섯 명의 경호원이 죽고 모로가 납치된 그날로부터 빨간색 르노 자동차 트렁크에서 모로의 시신이 발견되는 날까지, 수백만 명의 시청자가 TV에 붙어 있던 55일 간의 일을 벨로키오는 오랫동안 곱씹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모로 사망 40주기가 되던 해에 그는 국가적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그 55일의 이야기를 다성적이고 기념비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기로 결정했다. 모두의 간절한 바람과 기도를 저버리고 거대한 비극을 상영했던 (벨로키오의 비유에 따르면) ‘거대한 TV 극장’은 실제 사건으로부터 44년 후에 (이번에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이탈리아 TV를 통해 다시 한번 송출된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The Apartment Pictures) < 익스테리어, 나잇 >(2022)은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의 첫 시리즈 작품이다. 6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러닝타임 330분에 이르는 이 시리즈는 애초 TV 방영을 위한 프로젝트로 시작되어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자 극장용 영화로 확장되었다. 제작 방식뿐 아니라 작품의 릴리스 방식 또한 무척 이례적이고 예언적이다. 시리즈물로서는 영화제부터 극장, TV, 무료 스트리밍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배급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례적이고, 이 사례가 예외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예언적이기도 하다. 사실 시리즈물이 유수 국제영화제의 한 섹션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2022년 칸영화제는 <익스테리어, 나잇>을 칸 프리미어 섹션에 초청했다. OTT 영화에 대한 거부를 공식적으로 표명해온 칸일지라도 83세 이탈리아 거장의 시리즈물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익스테리어, 나잇>은 칸에서의 프리미어 상영 즈음에 두 파트로 나눠 이탈리아 극장에 순차적으로 개봉됐고, 이탈리아 TV에서 방영된 다음 이탈리아 넷플릭스와 무료 플랫폼 라이플레이(RaiPlay)에서 다시 공개되었다. 적어도 이탈리아인이라면 누구나, 언제나, 쉽게, 다양한 통로로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럼 그들은 여기서 무엇을 보았을까? 1978년의 TV 극장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엇을? 벨로키오는 2003년에 모로 사건을 이미 한차례 영화로 만들었다. < 굿모닝, 나잇 >(2003)은 붉은 여단의 관점으로 밀실에 감금된 모로를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내부 시선의 영화라면, <익스테리어, 나잇>은 시선을 외부로 전환하고 확장한, 리버스 버전의 영화다. 자연스럽게 여기엔 주인공이 여럿이다. 벨로키오는 정치인, 교황, 가족, 붉은 여단원을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 삼아 사건에 얽힌 그들의 내면 풍경을 자꾸만 반복 변주되는 악몽의 사이클로 재현한다. 에피소드 1에서는 기독교 민주당과 공산당의 연립정부를 구상하는 모로의 정치적 이상 뒤에 숨겨진 그의 불면과 연약함, 관용과 사랑을 그린 다음, 에피소드 2에서는 그의 정치적 동지인 내무부 장관 코시가의 죄책감과 정신분열적 망상을, 에피소드 3에서는 모로를 구하기 위해 온갖 방도를 강구하는 교황 바오로 6세의 절박한 무력감을, 에피소드 4에서는 붉은 여단 내부에 번져가는 정치적 의심을, 에피소드 5에서는 모로의 아내 엘레오노라의 고통과 소외를 거쳐 에피소드 6에 이르러 환상과 상상, 꿈으로는 바꿀 도리가 없는, 총체적인 파국으로 맺는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The Apartment Pictures), IMDb (촬영: Anna Carmerlingo) 에피소드마다 불현듯 끼어드는 초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환상과 꿈이 구현하는 것은 대개 알도 모로의 환생이다. 역사적 비극을 다각도로 재고하는 벨로키오의 상상력은 불가역적인 역사의 결말을 그렇게 뒤집는다. 공히 모로 사건을 다룬 <굿모닝, 나잇>과 <익스테리어, 나잇>에 또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면 바로 그 점이다. 역사에 환상과 상상, 그리고 꿈의 이미지를 덧대어 숨겨진 진실의 일단을 들춰 보이는 것. 어쩌면 결론이 바뀔 수도 있었다는 깨달음. 그 환영의 세계에서 모로의 운명은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 <익스테리어, 나잇>은 그렇게 <굿모닝, 나잇>의 엔딩에서 다시 시작한다. <굿모닝, 나잇>은 감금된 밀실에서 탈출한 모로가 새벽 거리를 비척대며 걸어가는 몽환적인 장면으로 끝나고, <익스테리어, 나잇>은 로마 병실에 누운 모로가 문병 온 동료 정치인들에게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매우 초현실적이고 거의 신화적이기까지 한 이 오프닝의 환영은 러닝타임 330분을 관통하는 일련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거기서 모로는 코시가의 방음된 밀실 문을 열고 들어오고, 침실 의자에 앉아 불면의 밤을 보내고, 홀로 십자가를 진 채 고난의 길을 걷고, 동료 정치인들과 함께 익사한 시신으로 강물에 떠내려가고, 르노 자동차 트렁크에서 마침내 눈을 뜨고 걸어 나온다. “그 남자는 그리스도처럼 죽어야 했다.” 벨로키오는 감독 노트에 그렇게 적어놓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의 수사가 아니라 실제의 이미지로 우리 눈앞에 재현해 보인다. 그는 아무것도 새롭게 밝히지 않으면서도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간다. 허구를 통해, 오직 상상력만으로. (좌) <굿모닝, 나잇> 중 / (우) <익스테리어, 나잇> 중 / 사진: IMDb( 1 , 2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탈리아가 기묘한 열병을 앓고 있던 시기다. 벨로키오는 그 시대의 풍경을 장대한 프레스코화처럼 펼쳐놓고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걸어 나온 듯한 인물들을 차례로 무대 중앙에 세웠다. 1막이 오르고, 2막이 오르고, 3막에서 또다시……. 그렇게 여섯 개의 장에 330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다. 모로의 정치적 동지와 정부가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사실을 영화는 낮은 톤으로 서늘하고 선명하게 우리에게 일러준다. “이 영화, 아니, 시리즈, 이게 뭐라고 불리든 간에” 벨로키오는 자신의 첫 시리즈물을 만들면서 그걸 무어라 규정하든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이 영화, 아니, 시리즈, 이게 뭐라고 불리든 간에’ <익스테리어, 나잇>은 영화제와 극장 스크린, TV와 OTT 플랫폼을 가로지르며 시네마의 경계가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지를 즐겁게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완전한 몰입의 330분이 지나고 나면, 이걸 뭐라고 부르든 간에 저 멀리 제 길을 가는 시네마의 발걸음을 좇느라 바빠진다. 실은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영화는 매번 시네마의 경계를 탐문하느라 머뭇대는 우리를 저만치 앞질러 간다. 강소원(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l 영화제에서 일한다. 매년 엄청난 편수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
일단 < 클로즈 유어 아이즈 >(빅토르 에리세, 2023)를 골랐다. 이 영화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 룸 넥스트 도어 >(2024) 사이에서 몇 초 망설였는데 그래도 빅토르 에리세의 신작을 넣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에리세의 영화를 내 리스트에 넣을 기회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올까. 어떤 때는 이 정도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스페인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파블로 베르헤르의 < 로봇 드림 >(2023)인데, 아직 쌍둥이 빌딩이 건재했던 1980년대 뉴욕을 기가 막히게 재현한 애니메이션이다. 거기에 절절한 로봇과 개가 주인공인 멜로드라마를 넣어서. 오로지 애니메이션을 통해서만 가능한 마법이다.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오시야마 키요타카의 < 룩백 >(2024)이다. 창작과 창작자에 대해 깊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짧지만 강렬하고 아름다운 예술가 영화다. 예술가 영화도 두 편이 더 있다. 하나는 위에 언급한 <클로즈 유어 아이즈>. 다른 하나는 모나 아샤쉐의 < 리틀 걸 블루 >(2023)로, 감독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여러분이 프랑스어권 유성애자 여성작가의 피학적인 오토 픽션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무언가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를 멀리하시기 바란다. 하지만 그런다면 여러분은 마리옹 코티아르가 펼친 최고의 명연 하나를 놓치게 된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냐고? 그렇긴 한데 그와 상관없이 감독은 코티아르에게 자기 어머니 역을 시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해가 간다. 모녀 이야기는 <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조지 밀러, 2024)의 도입부를 여는 중요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꼭 필요한 무언가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2015)가 그랬던 것처럼 끝내주게 재미있는 액션물이고, 이 영화의 실망스러운 흥행성적은 관객들이 뭘 모를 때가 많다는 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알려준다. 하긴 관객들은 개봉 당시 존 카펜터의 < 괴물 >(1982)도 대충 넘겼다. 그냥 그렇다고. 로즈 글래스의 < 러브 라이즈 블리딩 >(2023)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는 필름 누아르로, 몸과 섹스와 퀴어성에 대해 정말 신나고 뻔뻔스러운 장면들을 엮어대는 오락물이다. 아, 그리고 재미 이야기가 계속 나와서 하는 말인데, 션 베이커의 < 아노라 >(2024)와 모함마드 라술로프의 < 신성한 나무의 씨앗 >(2024)이 주는 재미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성노동자가 연결된 계급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룬 인디 영화와 마흐사 아미니 시위를 다룬 사회파 이란 영화가 이렇게 갑자기 대중적으로 (심지어 거의 고전 할리우드스럽게) 재미있어지면 관객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당황스러움과는 별도로 재미있는 영화들이 주는 즐거움을 주제의 무게나 구질구질함을 두려워하며 버릴 필요는 없다. 한국영화를 두 편 골랐다. 더 고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사방에 종말론적 예언이 나팔처럼 울려퍼지고 있었지만 올해 한국영화를 보는 경험은 여러모로 즐거웠다. 그런 경험을 제공해준 영화가 주류영화가 아니었을 뿐이다. 올해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퀴어, 특히 여성 퀴어 영화들의 공습으로, 어떤 때는 네 편의 영화가 동시에 극장에 걸려 다들 어리둥절해 하기도 했다. 당사자성 넘치는 사실주의극인 <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2024)부터 올해 가장 뻔뻔스러운 길티 플레저인 < 히든 페이스 >(김대우, 2024)까지 다양하기도 했다. 세상이 바뀌는 걸 느낄 수 있는데, 그 때문에 드라마 < 정년이 >(2024)의 비겁함이 더 짜증난다. 오정민 의 < 장손 >(2023)은 거의 임권택 과 이두용 의 직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이다. 이러면 당연히 올드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텐데, 아니다. 이 영화도 ‘재미있다.’ 거의 1세기에 가까운 한반도의 역사를 가족사에 녹여낸 재주, 대한민국 가부장제에 대한 냉정한 고찰만큼이나 신기한 건 이런 주제로 신선한 재미를 끌어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열 편 중 아홉 편은 호오도를 떠나 대중적으로 매우 재미있다. 마지막으로 고른 영화가 남궁선 의 < 힘을 낼 시간 >(2024)이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이유로 내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열다섯 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케이팝 아이돌에 대한 영화라는 것이다. 수없이 이야기하는 거 같은데,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면 전보를 쳐라’라는 옛 할리우드의 격언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놓고 뻔뻔스럽게 교훈과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재미있고 훌륭한 영화들은 많다. 전보로 전달한 텍스트의 다발과, 주제에 공감하는 작가와 감독, 배우들이 결합한 결과물의 차이는 엄청나다. 당연히 ’공익영화’는 비하 단어가 될 수 없다. 다른 모든 영화가 그렇듯 좋은 공익영화와 나쁜 공익영화 그리고 그 사이에 걸쳐진 광대한 스펙트럼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힘을 낼 시간>은 여러모로 일단 효율적인 공익영화다.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는 러닝타임 안에서, 선정적인 실제 사건의 구체적인 재현 없이 한국 연예계의 문제점들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정리해서 보여주는 영화가 얼마나 되는가. 이것만 해도 엄청난 성취인데, <힘을 낼 시간>은 이 모든 정보와 메시지를 다 담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매력적이다. 공익영화로서의 기능은 영화의 매력에 어떤 핸디캡도 되지 않는다.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일부이다. 이 영화의 다음 성취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지금까지 케이팝이라는 장르에 봉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상물을 만들려는 시도는 많았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초창기의 시도는 김기영 (동명이인이다)의 < 진실게임 >(2000)이다. 아마 더 이전 작품도 있을 거고 사실 여기서 정확한 경계선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 그래도 20년은 더 됐다. 하지만 성공작이 뭐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다들 주저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들은 < 내일부터 우리는 >(윤성호, 2017), < 아이돌 권한대행 >(윤성호, 박현진, 2017), <탑 매니지먼트>(2022)로 이어지는 윤성호 의 시리즈들이다. 만드는 사람들의 아이돌 문화에 대한 애정과 지식이 개성적인 유머 속에서 조화를 이룬 작품들인데 이 작품들이 아이돌 스토리텔링의 주류가 된 적은 없다. 아쉽게도. 나머지는 대부분 성공보다는 실패로 기억된다. 그 중 가장 처참한 실패는 아무래도 드라마 <청춘시대 2>(2017)였던 거 같은데. 일단 이 시리즈는 왜 아이돌 이야기를 왜 굳이 거기서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건 여러모로 최악의 오타쿠적 선택이었다. <힘을 낼 시간>은 소위 ’망돌‘이라는 소재를 공유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면에서 <청춘시대 2>와 반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장점이다. 일단 영화는 왜 이 영화가 ‘망돌들’의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한 아주 명쾌하고 당연한 이유를 갖고 있다. 주인공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세 주인공 중 망돌은 ‘파이브 갓 차일드‘라는 남자 아이돌 그룹 멤버였던 태희( 현우석 )뿐이다. 여자 아이돌 그룹 ‘러브앤리즈’의 멤버 수민( 최성은 )과 사랑(하서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제법 히트한 노래도 한 편 이상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래보다는 이 팀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더 먼저 떠올리고 제대로 정산을 못 받고 은퇴한 건 태희와 다를 게 없다. 하여간 이 셋은 전재산 98만원을 챙겨들고 제주도 여행을 오는데, 그만 첫날에 한 명이 사고를 내 돈 대부분을 날려버린다. 이 정도면 너무 어이가 없어 슬슬 웃음이 나오는 가학적인 블랙 코미디를 기대해 볼 만도 한 상황이다. 이 영화의 감독이 얼마 전에 < 십개월의 미래 >(2020)를 만든 남궁선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보다 평화롭고 진지한 길을 간다. 세 사람은 귤 따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고 자기들을 알아보는 케이팝 팬도 만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힐링’이라는 단어를 빼고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따분하게 들린다면 미안하지만, <힘을 낼 시간>은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치유의 과정에 대한 영화이고 여기에 진지하다. 이 영화에서 치유라는 단어는 결코 가볍게 쓰이지 않는다. <힘을 낼 시간>의 가장 큰 장점은 ‘좋은 의미로’ 머글스럽다는 것이다. 이 영화엔 다른 케이팝 아이돌 관련 작품들에서 쉽게 발견되는 징그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는 케이팝 아이돌의 친숙한 이미지를 따르고 그걸 페티시적으로 활용하는 대신 부당한 노동 조건 속에서 시달리다 버려진 젊은 노동자들을 그린다. 이 영화가 정공 공익영화로 기능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렇게 쓰면 무지 재미없게 들리는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은 대부분 대중적 재미가 풍부한 작품이다. 그건 일단 이 진지함의 정공법이 드라마에서 제대로 작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영화엔 더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오타쿠적인 선택 대부분을 피해가고 있고 일부러 아이돌 캐스팅도 하지 않은 영화인데도 여전히 아이돌스러운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대 장면 하나 나오지 않고 ‘가상의 아이돌 그룹 만들기 게임’에 집착하지 않으며 골수팬을 등장시키지 않는데도 영화는 부서진 홀로그램 조각처럼 케이팝 그룹을 이루는 수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노력한 팬이라면 러브앤리즈 팬픽을 쓰는 게 가능할 정도다. 영화의 의도는 전혀 아니겠지만. <힘을 낼 시간>은 최선 또는 최악의 타이밍에 개봉한다.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정치 상황이 모든 이슈를 잡아먹었으니 개봉하는 영화에겐 타격이 크다. 하지만 뉴진스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사람들이 아이돌의 노동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바로 그 정치적 상황 속에서 수많은 아이돌 팬들이 응원봉을 국회 앞에서 휘두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 이 영화에 맞는 시기가 있을까. 듀나(영화평론가) l SF 작가이고 영화 컬럼니스트다. 영화 관련 저서로는 『가능한 꿈의 공간들』(2015),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2022),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2019),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202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