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수전사 루나발가
- 감독
- Shigenori Kiyoyama
- 제작년도
- 1991
- 출연
- Yuzuru Fujimoto, Nobuyuki Furuta, Michie Tomizawa
고백하자면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못한다. 반응속도가 느려 적을 처치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방향치에 지도 독해력까지 떨어져 게임 공간에서도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다. 연결/협력 플레이도 선호하지 않아 다중접속롤플레잉 게임들은 피하고 콘솔용 싱글 플레이에 집중해왔다. 선호하는 게임 장르도 편협하다. 게임 자체에 깊은 재미를 느껴서라기 보단 디지털 영화 연구의 연장선에서 게임을 시작해 그런지 게임 목록은 주로 ‘영화적인’ 스펙터클의 체험을 제공하는 오픈 월드 어드벤처나 영화적 장르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롤플레잉 장르로 한정된다. 게임도 잘 못하고 좋아하는 게임도 많지 않은데 도대체 무슨 재미로 플레이 하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고독을 즐기기에 게임 세계만큼 좋은 장소는 없다.’ <폴 아웃>, <엘더 스크롤>, <레드 데드 리뎀션> 시리즈 같은 오픈 월드 어드벤처 게임을 할 때 (자의든 타의든) 이곳저곳을 헤매다 어느 새 미션은 잊고 압도하는 자연 풍경 속에서 디지털 시뮬레이션이 만들어 놓은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서 있을 때면 평온하면서도 비로소 고독할 수 있다고 느낀다(그런 점에서 지나치게 디테일한 미션이 많은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개인적으로 불호였다). 특히 주요한 서사적 장소 혹은 필수적인 미션 수행의 장소가 아님에도 개발자와 디자이너들이 공들여 만든 곳에 할 일 없이 내가 플레이 하는 아바타를 그저 존재하게 할 때면 더욱 그렇다. 아바타는 거기에 어떤 목적 없이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플레이어와 아바타 간의 연결이 완전히 끊긴 건 아니다. ‘거기 있음’이라는 액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게임 플레이의 수많은 다른 순간들과 달리 목적 없는 순간은 아바타와 그 아바타에 연결된 플레이어의 존재의 감각을 고조시킨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이 있다. 다수는 아닐 테지만 어느 플레이어든 그 장소를 방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개발자와 디자이너들이 공들여 만든 창조적 노동의 호의가 한편에 있다면, 그 세계가 물리적 세계와 마찬가지로 ‘나’와 상관없이 존재할 것이라는 디지털 객체의 존재론적 감각이다. 디지털 세계와 물리적 세계는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되어 있고, 인공적이면서도 자연적이다. 지나치게 사실적인 흔들리는 갈대, 나의 움직임에 상호작용하는 부서지는 햇빛들, 너른 지평선 같은 자연풍경속에 서 있을 때면 낯선 친숙함, 언캐니(uncanny)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지평선을 바라볼 때면 그 세계가 무한으로 연장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트루만 쇼’의 바로 그 벽, 즉 게임에서 늘 더 이상 접근 불가능한 바다, 넘어갈 수 없는 높은 산과 절벽들에서 버둥거려 본다. 이번에 선정한 ‘사사로운 리스트’에는 작품성이나 영화적 쟁점에 있어 < 니트 아일랜드 >보다 뛰어난 영화들이 다수 있다. 그럼에도 이 다큐멘터리가 정말 사사롭게 나의 어떤 마음을 정확하게 건드렸기에 리뷰를 쓰기로 결심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내가 디지털 게임의 가상 세계에서 느꼈던 그 존재론적 외로움을 발화하다. 장편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니트 아일랜드>의 감독은 세 명의 프랑스 청년, 에키엠 바르비에, 길렘 코스, 캉탱 렐구아크이다. 이들의 영화제작 현장은 <DayZ>(Bohemian Interactive, Dean Hall, 2013)라는 멀티플레이어 온라인 생존 게임의 가상세계이다. 가상의 소비에트연방 공화국, 체르나루스가 배경인 게임 세계는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공간과 사물에 접근할 수 있는 오픈 월드로 구성되어 있고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미션이나 주요한 서사진행이 많지 않아 높은 자율성을 보장한다. 제작팀은 전작에서는 <Grand Theft Auto 5>(록스타, 2013)의 게임 플레이 장면을 녹화하고 편집해 단편 <말로위 드라이브>(2017)를 만든 바 있다. 이 경험을 바탕삼아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인 <DayZ>를 963 시간 플레이하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엔딩씬을 제외한 모든 장면이 게임 내의 플레이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을 만나기 위해 긴 거리를 떠돌아다닌다. 당연하게도 실시간 게임 플레이와 결과물로서의 영화는 다르다. 최종적으로 영화에 무엇을 담았는가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 영화는 ‘게임적인 것’이 아니라 ‘영화적인 것’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들은 963 시간을 플레이하기 위해 좀비와 싸우거나, 다른 생존자와 전투를 벌이거나, 아이템을 찾거나, 때로는 죽어서 게임이 초기화되는 과정을 여러 번 겪었을 것이다. 실제로 죽음의 위기에 처하면 점진적으로 흑백으로 변하고 죽고 나면 기본 아이템만 소지한 채 해변으로 돌아와 처음부터 게임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들은 가상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화면이 흑백으로 변하지 않게 생명력을 적절하게 관리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일종의 카메라 뒤의 장면, 즉 그 세계에 살아남기 위해 플레이했던 게임적 순간들은 편집되어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제작팀은 가능한 사살되지 않기 위해 ‘PRESS’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카메라를 들고 인터뷰 대상을 찾아다닌다. 좀비로 인해 인류가 멸망해 가는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뿔뿔이 흩어져 생존해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듣고 기록한다. 국가를 비롯한 기존의 사회 체제가 사라진 세계에서 개인 혹은 부족은 자기들만의 삶의 모습과 가치를 만들어 간다. 아포칼립스의 그리스 어원은 ‘덮개를 걷어내다(uncovering)’라는 뜻을 갖고 있다. 우리의 정체성과 관계를 반강제적으로 제한하고 정의하는 기존의 체제가 무너질 때 우리는 오히려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회와 관계를 만들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사실 그다지 원하는 바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더불어 인터뷰 대상과 세계가 제작자들에게 생존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다큐멘터리의 제작 조건을 새삼 고심하게 된다. 제작팀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좀비나 적대적인 생존자들에게 언제든 살해당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필수적인 물과 음식, 의류, 의료 용품, 무기 등의 보급품을 수색하고 채집해야 한다. 물리적 환경에서도 강도는 다르지만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이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영화는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신념과 생존방식을 취하는 부족들에 대한 민족지적(ethnographic) 호기심 그리고 비의미의 풍경으로서의 지평선을 조명한다. 제작팀은 처음부터 신뢰를 얻을 수는 없기에 우선은 ‘PRESS’ 뱃지에 의존해본다. 그들에게 카메라는 그들을 보호하는 무기가 된다. 그들은 자신들을 영화제작팀이라 밝히고 죽이지 말라고 요청한 후 플레이어들에게 다가간다. 900 시간이 넘는 긴 여정에서 약탈적인 갱단, 자기들만의 신과 교리를 만들고 사마리아 윤리를 따르는 종교적인 집단, 호박을 키워 자급자족하는 사람들, 사람이 거의 없는 광활한 자연 속에 자기만의 비밀 아지트를 만들고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호기심 많은 방랑자들을 만난다. 특히 오프닝에서 제작팀과 관객은 윤리적인 충격에 직면한다. 카니발리즘으로 악명 높은 갱단 ‘다크 에즈 미드나잇’의 리더 아이리스는 게임에서 현실에서라면 하지 못할 짓을 마음껏 하며 플레이 한다. 제작팀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장난감’이라 부르는 죄수를 말 그대로 가지고 놀다가 총으로 쏘아 죽인다. 선정적인 이 장면은 다큐멘터리 제작의 윤리적 갈등을 드러낸다. 아이리스는 카메라, 즉 제작팀이 있기 때문에 더 위악적으로 행동했을 수 있다. 제작팀은 이미 아바타의 삶과 죽음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상황은 게임이기 때문에 그다지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아이리스와 그녀의 무리들이 인간의 형상을 한 아바타를 포박하고 죽이면서 노는 것을 기록하고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것이 게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픽션은 아니다. 오픈 월드에서 그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한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충격과 두려움, 호기심과 경외가 뒤섞인 제작팀의 가상 카메라의 움직임과 마이크를 통해 전달되는 제작진의 실제 숨소리는 이 상황이 현실의 삶과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디지털 시대에 다큐멘터리 윤리가 어떻게 새롭게 정립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이처럼 게임 플레이와 영화제작, 현실과 가상세계는 구분되지 않고 서로에게 침투한다.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감독들과 다큐멘터리 등장인물들은 게임 속 아바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현실에서의 그들의 외양과 정체성을 알 수 없다. 성별, 인종, 패션 등은 아바타를 꾸미기 나름이다. 하지만 아바타의 움직임은 플레이어들에 의해 조종되고 행동되어진다. 더 중요하게는 마이크를 통해 플레이어들의 실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대화뿐 아니라 마이크를 통해 현실에서 들려오는 앰비언스 사운드는 실제 삶의 레이어를 중첩적으로 드러낸다. 사운드가 다큐멘터리에서 리얼리티를 뒷받침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예증한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라고 꼽는 장면 중 하나는 아이를 재우고 밤에 게임을 하는 여성 플레이어와의 만남이다. 이 플레이어는 지하에 있는 방에서 게임을 하는 시간이 양육에서 벗어나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라고 말하는데 그 순간 넘어져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현실의 삶이 게임에 깊숙이 들어온다. 플레이어는 양해를 구하고 아이를 돌보러 잠시 컴퓨터 앞을 떠난다. 플레이어의 컨트롤이 해제된 아바타는 말 그대로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다. 흔적이나 유령 같은 몸은 외로워 보인다. 이 장면은 두 세계가 나눠져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신체가 현실에도 가상세계에도 분주하게 분유되어 있음을 각인한다. 영화는 뒤로 갈수록 생존을 위한 투쟁이나 위악적인 기행보다는 다른 감정과 가능성들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제작되는 중간에 코로나19가 발발한 것과 연관이 깊을 것이다. 유럽을 비롯한 지구의 일부 지역들은 봉쇄되었고 고립된 그들은 그들의 아포칼립스 세계를 닮아가고 있는 현실을 벗어나 게임공간에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우정과 공존의 실마리를 찾는다. 특히 하늘에서 헤엄칠 수 있게 디자인된 자신들의 비밀 아지트에 초대해준 부부 플레이어, 채소를 키우고 자립생활을 하는 농부 플레이어들, 고립된 이들을 받아주는 종교적인 단체, 밤에 함께 캠프파이어를 하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지친 현실을 위로한다(DJ가 된 플레이어들이 현실에서 음악을 재생하고 마이크를 통해 공유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장 강렬하게 남기는 감정은 실존적 외로움이다. 현실의 봉쇄에 지친 이들은 함께 게임세계의 끝으로 모험을 떠나기로 한다. 하염없이 몇날 며칠을 지평선을 향해 걸었지만 광활한 공간 뒤에는 다시 광활한 공간이 나올 뿐이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얼마만큼 가야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코로나19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우울감에 빠졌던 것처럼, 누군가는 그저 함께 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만 다른 누군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것에 절망하고 게임 속에서 자살한다. 자살한 후 남겨진 아바타 주위에 모여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뭉클한 감정을 자아낸다. 그들은 외로움을 공유한다. 부재와 상실을 애도하는 순간(사실 플레이하는 동안 현실의 일부를 잃고 게임에 몰입한다는 점에서 게임하기는 반드시 상실을 동반한다), 지평선을 바라보는 장면, 끝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걷는 사람들, 의미를 넘어선 ‘거기-있음’, 그저 함께 있음을 즐기는 사람들, 바다에 다다라 유유히 헤엄치던 종교집단의 리더인 카우보이 스톤 목사가 그의 현실 이름을 말하며 “나는 프랭크일 뿐이에요”라고 나직하게 고백하는 장면은 모두 외로움과 상실의 감정을 자아낸다. 이 장면들은 오히려 대립되는 세계라고 여겨지는 현실과 가상이 모두 물질적으로 절실하게 촉지되는 순간들이다. 간격이 있지만 그럼에도 내 신체를 매개삼아 레이어링되는 두 세계의 물질성은 오히려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 외로움은 세계가 내가 있든 없든 존재한다는 진실이다. 그것이 실제 삶이든 게임의 가상세계든 말이다. 저기 어딘가에 내가 모르는, 혹은 지금은 보고 있지 않은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소외가 아니며 오히려 부재이고 상실을 통한 강력한 실존적 감각이다.
< 대괴수 용가리 >(1967)는 한국영화에서 거의 처음으로 우주적 시점이라고 할만한 것을 보여준다(정확히 말하자면 <대괴수 용가리>가 등장하던 그해 동시도착한 < 우주괴인 왕마귀 >와 함께). 검은 화면에 반짝이는 별, 카메라의 긴 패닝, 이윽고 보이는 푸른 별 지구. 이곳은 우주이다. 곧이어 정체불명의 대규모 폭발을 조사하기 위해 신혼여행지에서 차출된 우주비행사 광남이 지구에 대한 조망 속에서 사건의 발생 장소(핵실험이 일어난 장소)를 정확히 찾아내고, 버섯구름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거대한 지면의 균열을 목격한다. 한편 이 균열에서 시작된 움직이는 지진, 괴지진의 발생지점과 이동경로는 서울에 차려진 괴지진대책본부의 대륙 지도에 투명하게 드러난다(이 지도는 한쪽 면을 가득 채운 유리에 그려져 있다). 중국 서북부(영화에 명시되기는 오비리아라는 가상의 대륙)에서 발생한 괴지진은 황해도를 지나 시시각각 남하해오고, 휴전선 부근에서 솟아나 판문점을 부순다. 괴지진의 정체가 밝혀진다. 용가리의 현현. 이윽고 용가리는 인왕산에 우뚝 솟아 전모를 드러내고 중앙청과 서울시민회관, 서울시청과 남산에 이르는 서울의 중심부를 초토화시키고 급기야 한강다리를 파괴한다. <대괴수 용가리>의 이 지정학적 상상력은 이 영화를 한국전쟁과 그 결과 형성된 이 분단국가의 강렬한 냉전적 상상력의 우화로서 읽게 만들기에 충분해 보인다. “6.25 전쟁 때 북한군 침공의 육로 코스 그대로” 1) 를 밟고 있는 용가리는 이를테면 “괴수 김일성”과 유사해 보인다. 2) 1967년의 시점에 중국 서북부에서(이 지역은 중국이 1964년과 67년에 원폭과 수폭실험을 행하고 있는 장소이다) 발생하여 거듭되는 남하를 거쳐 판문점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서울을 파괴하는 괴수라니! 그런데 이 괴수는 한국영화사 안에서 예외적 형상이지만, 피폭괴수물이라고 할 수 있을 일종의 ‘공통’ 장르의 소산이기도 하다. 만약 이 공통 장르라는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용가리라는 형상이 지닌 공통성과 특수성은 무엇이며 그것은 각각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걸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괴수 용가리>는 동시기의 일본 괴수영화 <대괴수 가메라>(1965)로부터 포맷과 기술을 빌려왔다. <대괴수 가메라>는 당시 도호의 고지라 시리즈에 대항하여 다이에이가 시도했던 괴수영화였다. 고지라 시리즈의 1960년대적 전회에 발맞춰 보다 아동친화적인 성격을 띄고 있던 이 시리즈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1960년대 중후반 다이에이의 달러박스로 기능하였다. 오해하지 말 것. 나는 지금 <대괴수 용가리>가 일본 괴수영화의 일종의 아류작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향관계가 보여주는 바는 피폭괴수물이라는 장르에 내재된 공통성에 다름 아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대괴수 용가리>는 당시 일반적인 한국영화보다 훨씬 고가로 해외시장에 팔렸으며, 일본을 거쳐 이런 류의 B급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배급한 대표적인 프로덕션 중 하나였던 AIP(American International Pictures) 배급으로 1969년이라는 빠른 시기에 미국의 지역 방송국 채널에서 방영되었다. Yongary, Monster from the Deep 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이 영어 버전은 현재 남아있는 <대괴수 용가리>의 유일한 완전판이기도 하다. 과연, 1950, 60년대 미국과 일본의 흥행장에는 방사능 피폭괴수라고 할만한 것들이 범람하고 있었다. 이 영화들은 지독히도 닮은 패턴을 고집하는데 시작은 항상 동일하다. 지구 어디선가 핵실험이 있고 방사능에 피폭된 거대 생명체가 등장한다. 이를테면 거대한 개미떼(<뎀! Them!>(1954)), 거대한 독거미(<타란튤라 Tarantula>(1955)), 거대한 문어(<놈은 바닷속으로부터 왔다 It Came from beneath the Sea>), 거대한 메뚜기(<비기닝 오브 디 엔드 Beginning of the End>(1957)), 거대한 파충류 등등. 이 괴수들은 한결같이 도시로 향하고, 그들의 습격으로 도시는 초토화된다. 이런 식의 피폭 괴수영화의 시작은 1953년 레이 해리하우젠의 스톱모션으로 완성된 거대 공룡 리도사우르스가 등장하는 < 심해로부터 온 괴물 The Beast From 20000 Fathoms>이었다. 이 영화의 성공은 곧 무수한 피폭 뮤턴트들을 양산해내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괴수들 중 가장 성공적이고 지속적이며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어낸 것은 일본의 <고지라 ゴジラ>(1954)였다. 2016년의 <신 고지라>에 이르기까지 28편의 시리즈를 낳은 이 영화는 모스라, 가메라, 라돈, 킹기도라 등의 수많은 일본산 괴수들이 출몰하게 될 특촬영화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냈다. <고지라>의 성공은 일본 내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의 영어 편집 버전은 미국과 유럽에서 또한 흥행에 성공했으며, 그 여파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고지라> 이후 일본 괴수영화는 미국과 유럽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일본영화가 되었고, 고지라는 서구에서 성공한 일본산 서브컬처의 첫 번째 ‘캐릭터’가 되었다. 이 장르의 역사를 상기해보건데, <대괴수 용가리>라는 피폭괴수물은 약간의 지체를 두고 이곳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가 등장하던 당시 미국의 피폭괴수물은 이미 그 장르적 사이클을 소진했다. 일본의 경우 ‘고지라’ 시리즈는 1960년대 이후 극적인 성격전환을 거쳤다. 무시무시한 파괴의 괴수 고지라는 <킹콩 대 고지라 キングコング対ゴジラ>(1962)에서 외래의 것(킹콩)에 대항하는 내셔널한 것으로서 자리매김되었으며(고지라는 일본 국회의사당 꼭대기에서 미녀를 희롱하는 킹콩과 맞서 싸운다), <3대괴수 지구최대의 결전 三大怪獣 地球最大の決戦>(1964)에 이르러서는 우주 최강의 괴수 킹키도라에 맞서 지구를 구하는 정의의 사도, 아이들의 ‘친구’로 변모하였다. 이 피폭 괴수영화들이 1945년 이후 핵이 초래한 ‘불안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이 영화들의 등장 이전까지 유일한 괴수영화였던 <킹콩>(1932)이 원시의 섬에서 온 거대 유인원이 뉴욕을 초토화시킴으로써 제국-문명-도시가 식민지-야만-원시에 대해 갖는 공포와 불안을 상징화하는 것이었다면, 1950년대산 피폭괴수 영화들은 핵의 공포를 시각화한다. 이들은 바다 혹은 강 위로, 사막에서, 산꼭대기에서 불현듯 나타나는데, 이 급작스러운 출현이야말로 핵의 위협의 편재성(omnipresence)에 관한 시각적 대응이라고 할 만하다. 동시에 이 괴수가 각각의 개별국가의 영토 내로 들어와서 구체적인 장소를 점유할 때 그 장소의 역사성과 현재성이 불현 활성화된다. 이를테면 제국, 식민지, 전쟁, 냉전의 현재. 종종 이 영화들에 관한 해석이 개별국가의 역사적 상흔과 관련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를테면 <고지라>에 관한 비평들에서 고지라가 전전의 공습(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폭격까지를 포함하여)을 감행하는 미군이자 그곳에서 죽어간 수많은 ‘전쟁의 사자’들의 망령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은 장소의 역사성이 이 폐허의 풍경 위에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시간대를 겹쳐놓기 때문이다. 고지라와 용가리가 미국의 피폭괴수에 비해 훨씬 더 역사적 기억의 활성화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간단히 말해 도쿄와 서울이라는 장소가 전쟁의 장소였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를테면 <심해에서 온 괴물>의 리도사우르스가 뉴욕을 공격할 때, 그 풍경은 어디까지나 미래시제의 일에 불과하지만(미국 본토에서 전쟁은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폐허가 된 도쿄와 서울의 풍경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불러온다. 따라서 이 일본과 한국의 괴수들이 역사적 기억 자체가 가지고 있는 훨씬 더 다의적인 복잡성과 연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피폭괴수는 두 개의 테크놀로지컬한 계보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괴수들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면(리도사우르스로부터 시작되는 저 수많은 피폭괴수들의 위대한 창조자는 레이 해리하우젠이다. 그는 <킹콩>의 창조자 윌리스 오브라이언의 수제자였다) 일본의 경우, 모형을 만들고 이를 사람이 뒤집어씀으로써 해결하는 방식, 즉 수트형 괴수로 이를 구현하고자 했다. <고지라>의 제작자들이 대규모 자본의 노동집약적 산물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포기하고 수트형 괴수로 전환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에, 특히 <고지라>를 만들어내고 있는 영화사 도호(東宝)에 축소된 공간 및 사물의 구현, 즉 미니어처와 이것들의 정교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조정 기술의 풍부한 집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 전쟁 프로파간다가 해군의 대규모 공중전 재현으로 넘어갔을 때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미니어처와 조정 기술이었다. 1942년 진주만 공격 1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하와이 말레 해전 ハワイ・マレー沖海戦>은 이 기술의 놀라운 성과를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1500평방미터의 수영장에 6백분의 1의 미니어처를 통해 재현된 진주만 공습은 전전 일본 최대의 공중 스펙터클을 선사했으며, 대동아공영권 최대의 히트작이 되었다. 이 실제를 방불케하는 스펙터클을 창조해내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이후 고지라의 창조자가 될 츠부라야 에이지(円谷英二)를 필두로 한 도호의 특수촬영 기술진들이었다. 전전 일본 해군 프로파간다 영화의 기술적 역량 속에서 만들어진 <고지라>는 미니어처에 기반한 ‘리얼’한 공간을 창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괴수의 무시무시한 난동을 실감나게 그릴 수 있었다. 이 순간에 발명된 수트형 괴수와 미니어처 촬영은 일본 피폭괴수와 미국 피폭괴수를 결정적으로 차이지운 핵심 표상이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스톱모션의 움직임은 수트형 괴수, 인간의 동작이 배어나올 수밖에 없는 고지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비해 간헐적이고 단속적이며 부자연스럽다. 유인원(킹콩)에서 파충류(리도사우르스)로의 이동이 낳은 지평, 그 형상이 보유하는 인간으로부터의 거리만큼 더 배타적인 타자성의 영역으로 이동해간 이 형상의 ‘낯섬’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인간적 움직임과의 거리에 의해 배가된다. 킹콩의 직접적인 후예로서 리도사우르스는 비록 단독의 거대괴수이지만 그 타자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여타의 군집 괴수들, 이를테면 개미, 거미, 메뚜기 등과 그리 다르지 않다. 또 일본 특촬 괴수들의 눈동자가 강조된 눈은 이들로부터 어떤 ‘감정적’인 것을 유추하도록 만든다. 종종 그들은 화를 내거나 두려워하거나 슬퍼하거나 당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 인간적인 특징이야말로 고지라에게 그토록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미국영화의 괴수들처럼 명백한 타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관객인 우리는 그들이 결국 인간에 의해 제거되는 순간에, 그리하여 드디어 재난이 수습되고 안정이 찾아오는 순간에 안도하지만, 동시에 통쾌함보다는 마음이 상함을 느낀다. 고지라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또한 연민과 동정, 심지어 희망의 대상이다.(야마네 박사는 피폭을 ‘견뎌낸’ 고지라를 연구함으로써 ‘인류’의 미래에 공헌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짧은 희망을 피력한다). 고지라의 형상으로부터 유래된 이 양가성은 정확히 1950년대 핵을 둘러싼 강력한 프로파간다, 파괴와 절멸의 무기로서의 핵과 평화와 번영으로서의 핵이라는 저 가상적 분할선을 반영한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언명 ‘평화를 위한 핵’이라는 가상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프로파간다일 것이다. 그것은 핵 유토피아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내면서 욕망에 어필하였다. 아마도 이 지점이야말로 1960년대 이후 원전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완성되는 것과 맞물려 미국의 파괴로서의 피폭괴수가 사라진 이후에도 일본 피폭괴수가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원전국가 일본으로의 이동 속에서 특촬 괴수들은 점점 더 인간적 형질이 배가되어갔다. 심지어 이들은 가족을 건사하고(미니라), 아이를 구하고(가메라), 지구를 지킨다(고지라).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1967년의 <대괴수 용가리>는 이 순간 도달한 한국에서의 핵의 관점을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피폭괴수의 계보 속에서 무기로서의 핵의 파괴성을 일별하는 한편, 그럼에도 그것이 능히 조절가능하다는 믿음을 설파한다. 과학입국을 선언한 한국의 어린 남자아이는 빛이 나오는 기구로 용가리를 춤추게 한다. 트위스트풍으로 편곡된 아리랑에 맞춰. 그리고 이 믿음 위에서 알다시피 이제 곧 한국 역시 원전국가로 이동해갔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풍요와 번영의 핵 이미지를 그 어떤 의심도 없이 수용하였다. 조절가능한 핵, 춤추는 용가리에 대한 믿음은 이곳에서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비록 1979년 스리마일섬에서, 1986년 체르노빌에서, 2011년 후쿠시마에서 파괴와 죽음의 무기/풍요와 번영의 에너지로서의 핵 사이를 긋고 있는 이 분할선이 핵 그 자체 안에서 이미 분할불가능한 것임이 그토록 파괴적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1) 이영미, 『광장의 노래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인물과사상사, 2018, 119쪽. 2) 김소영, 『근대성의 유령』,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0, 27-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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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를 지낸다는 게, 누구에겐 항상 벅찬 감동이겠지만 내게는 딱히 이럴 것도 그럴 것도 없는 뭐 대충 시계 침 돌아가는 걸 보다가 해가 졌구나, 해가 떴구나, 어딜 가야 되는구나, 뭘 해야 되는구나, 하는 참으로 시시한 것이다. 그러다 보면 화가 나기 마련이다. 나는 왜 제육 덮밥을 먹을 걸 콩나물국밥을 먹었나, 샤워할 걸 왜 세수만 하고 말았나, 담배를 조금 적게 피웠어야 했는데, 커피를 좀 비싼 걸 살 걸 싸구려를 1kg 나 사서 버리지도 못하고 계속 맛없는 커피를 마셔야 하는 게 서럽고... 침대에 누워 이런 구질구질한 것들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내 인생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정말이지 깜깜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병구( 조현철 )은 주목받는 권투선수였다. 그는 ‘판소리 복싱’(!)을 기반으로 세계를 제패할 인재였다. 그럴싸하다. 격투 운동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주먹 (혹은 발)을 주고받으며 타격을 한다는 것은, 나의 리듬을 사용해 상대의 리듬을 흐트러트리는 게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는 누적된 충격으로 인해 펀치-드렁크 현상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방금 전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의사는 그에게 치매 판정을 내린다. 그러던 어느 날, 어렴풋이 기억해낸다. “저도 예전엔 안 이랬던 거 같아요.” 지금은 비호감에 답답한 사람이지만, 원래는 카리스마 있고, 신명 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친구 교환(구교환)의 흥겨운 장구 장단에 맞추어 적들을 갈아 마시던 시절이 떠오르자, 병구는 다시 글러브를 끼우길 원한다. 그러나 관장(박종환)이나 민지( 이민지 )는 그런 그가 걱정스러울 뿐이다. 거의 떼를 쓰는 병구에게, 민지는 자신과 한 판 붙어 이기면 다시 권투를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훈련에 돌입하는 병구. 하지만 그의 옆엔 휘모리, 자진모리, 굿거리장단을 맞춰줄 교환이 이제 없다. “사람들 다 미안할 짓하고 사는 거잖아요. 괜찮아요 코치님” 다른 기억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교환에 대한 미안함만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병구에게 민지는 말한다. 병구가 아직 멀쩡했을 때, 권투를 그만두고 나이트 기도를 하던 어느 날 교환은 그를 찾아와 간절히 돌아오기를 요구한다. 길거리에서 장구를 펼쳐놓고 장단 뽑아내던 교환은 비장하게 말한다. “너는 판소리 복싱으로 세계를 제패할 거야.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니까!” 하지만 병구는 그런 교환이 짜증스럽기만 하다. 꺼지라는 말과 함께 친구이자 파트너를 내치고 결국 병구는 망가지고 말았다. 인제 와서 왜 그런 생각이 다시 나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참회하고 싶다. 링 위에서 말이다. < 뎀프시 롤: 참회록 >은 농담 같은 영화다. 일단 ‘판소리 복싱’이라는 것도 그렇고, 병구가 구사하는 동작들을 보면 이건 복싱이 아니라 오징어 춤을 추는 동작이 더 비슷할 지경이다.(그런 게 있다면 말이다.) 게다가 교환의 장구 솜씨는 영 형편없다. 그나마 민지의 잽과 스트레이트가 나름대로 각이 조금 잡혀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어쩐지 다시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체육관 안이 아니라 밖에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넌지시 전한다. 미안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서, 괴로움에 대해서, 그것 자체를 받아들이라고. 부정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기를.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으리니... 이미 우리는 죽어가고 있고 지난 것들에 사과할 방법은 없다. 참회, 그리고 다시 해 나가는 것만이 주어졌을 뿐. 영화의 마지막 부분, 병구는 민지에게 스트레이트를 제대로 맞고 다운된 상황에서 과거를 떠올린다. 교환이 떠나기 직전에 해준 재미있는 이야기. “옛날에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있었대. 그런데 남자는 다른 여자랑 결혼했고, 여자도 다른 남자랑 결혼했대. 재밌지?” 다운된 상태에서 깨어난 병구는 긴 꿈을 꾼 거 같다고 한다. 꿈속에서 판소리 복싱 같은 걸 했던 거 같고, 관장님도 나오고, 친구도 나오고, 민지 씨도 나오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사랑하는 남자랑 여자가 있었는데... 어, 뭐더라... 아, 맞다. 결혼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대요. 농담 같던 영화가 뭔지 모를 진득한 정서로 갈아입는 순간이다. 하여튼 오늘도 별다른 일 없이 해는 지고, 때가 되면 침대에 눕겠지만, 아마도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싶다. 조금 덜 구질구질한 내일을 좀 그리고 싶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판소리 복싱으로 적들을 갈아 마시는 상상을 하던, 병구와 같은 마음을 가진 적이 있지 않았겠는가. 대단할 것 없이, 시시하게, 조금은 다른 기억을 쌓고 싶다. 내일부터는. P.S : 본 작품은 K’ART 미디어 콘텐츠센터에서 볼 수 있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최근에 막혀 버린 것 같다. (등록된 작품이 전부 막힌 거로 보인다.) 지금 볼 수 있는 경로는 독립영화 감독들의 옴니버스 작품 <서울 연애>를 통해 관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