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최저임금 동결 규탄 결의대회-우리의 부모님들이 뿔났다
- 제작년도
- 2010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 본 글에는 <색깔있는 남자>의 반전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80년대 한국영화 산업은 여러 면에서 척박했던 시기로 회자된다.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한국영화 산업의 첫 르네상스라 평가됐던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와 80년대는 독재 권력의 감시 하에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검열이 극심해지면서 산업적 토대와 시스템이 허약해진 시기로 평가된다. 1970년대부터 대중추수적인 에로티시즘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1975)처럼 청춘을 다룬 영화들을 중심으로 주제와 형식 측면에서 저항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이 간간이 출현했다. 또한 1980년대 후반에는 한국영화의 전면적 시장개방이 일어나면서 한국영화 점유율이 급격히 떨어지긴 했지만, 영화제작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검열제도가 심의제도로 전환되고 저항적인 학생영화운동을 포함해 새로운 영화세대가 부상하면서 독립영화와 코리안 뉴웨이브의 싹이 틀 수 있는 움직임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 색깔있는 남자 >(김성수, 1985)가 개봉된 1980년대 초중반은 전두환 정권의 적극적인 3S(Sex, Screen, Sports) 정책, 선정성과 폭력성이 극대화된 1970년대 후반~1980년대 할리우드 장르 관습, 흥행작의 끝없는 시리즈화, 컬러 비디오라는 새로운 부가시장의 저예산 문법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면서 한국영화 산업 전반이 에로영화에 몰두한 것처럼 보인다. <색깔있는 남자> 역시 에로틱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다. 이 영화는 당시 대부분의 에로영화들처럼 다양한 정사 장면을 넣기 위한 지나치게 복잡한 인물 구도와 설득력 없는 급작스러운 반전, 컬러 비디오 시대에 걸맞은 화려한 색상과 조명, 줌 쇼트와 프리즈 프레임 등의 과도한 사용을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선정성을 목표로 두면서 느슨해진 서사 그리고 부족한 예산과 시스템을 메우기 위한 표현적 과장은 오히려 이 영화를 급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이 지점에서 김형석 은 <색깔있는 남자>를 < 디아볼릭 >(앙리 조르주 끄루조, 1955)이나 < 원초적 본능 >(폴 버호벤, 1992)과 같은 놀라운 반전 서사를 가진 1980년대 대중영화의 숨겨진 걸작에, 이문우(「1980년대를 퀴어링하기」)는 범죄화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레즈비언을 가시화한다는 측면에서 퀴어적 독해의 텍스트로 위치시킨다. <색깔있는 남자>는 제목만 보면 김성수 감독의 전작, 장미희 와 이영하 주연의 < 색깔있는 여자 >(1980)의 후속작처럼 보이지만, 두 영화는 장르적 방향성이 완전히 다르다. <색깔있는 여자>가 신파적 특징이 강한 여성수난사라면, <색깔있는 남자>는 냉철하고 잔인무도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팜 파탈과 여성 착취적이고 이기적인 옴 파탈이 대격돌하는 스릴러 영화다. 이 영화는 당대 몇몇 에로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선정적 재현을 위해 비규범적 성적 욕망과 관계를 소재로 가져온다. 유사 근친상간, 사도매저키즘, 양성애와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묘사할 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있어서도 전통적 젠더 역할을 뒤집는다. 영화는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패션 디자이너 샤르망 최( 임성민 )의 귀국 기자회견으로 시작한다. 세련된 매너에 잘생긴 얼굴을 가진 그는 돌아오자마자 여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샤르망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여자들의 사랑과 욕망을 이용하는 데 거침이 없다. 샤르망은 공사 모두에서 누나 같은 변수린( 오수미 )의 돌봄과 지원을 당연하게 받고 있지만 정작 그의 집착 어린 사랑은 모른 척한다. 또한 그는 김여사( 홍명진 )의 애인 노릇을 하며 후원을 받아 패션사업을 키워나간다. 그러는 와중에도 다른 젊은 여자들과의 성적 관계를 거절하지 않는다. 저돌적으로 그에게 다가오는 부티크 직원( 오경아 )과 다른 여자들과 달리 자신에게 성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재미교포 사업가 주은몽( 오혜림 )이 그들이다. 모든 여자의 욕망의 대상인 샤르망은 이 모든 관계의 중심인 것처럼 보인다. 샤르망을 연기한 임성민은 TV와 스크린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한 스타로 신성일 이나 남궁원 같은 이목구비 뚜렷하고 키 큰 ‘미남배우’의 계보에 있긴 했지만 훨씬 세련되며 때로는 유약하기도 한, 그래서 이성애 여성들에게도 위협적이지 않은 성적 대상이 될 수 있는 미묘한 스타성을 갖고 있었다. 임성민이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장길수, 1994)에서 수많은 여성의 이상형으로 꼽히는 (그래서 여성운동 활동가 강민주에게 전략적으로 납치당하는) 스타 배우 백승하로 캐스팅된 것은 그의 실제 스타 이미지에 일부 근거한 것이기도 했다. 매너 좋고 유약한 남성성에서 오는 그의 스타성은 에로영화의 선정적 노골성을 약화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런 면에서 임성민은 에로영화의 타겟 관객을 이성애 여성으로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실제로 여성 주인공들보다 임성민을 중심에 놓고 “에·놈·쌍쉬엘(Un homme sensuel)”이라는 카피를 전면에 내세운 포스터는 주인공 남성을 성적 대상으로 스펙터클화 하려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좌) <색깔있는 남자> 포스터 (우) <색깔있는 남자> 중 배우 임성민 하지만 이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샤르망은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자신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옴 파탈이다. 샤르망은 사업 확장을 위해 공장을 구매할 자금이 필요하다며 김여사를 부추기고, 김여사는 기어이 병들고 늙은 (가학적 성욕을 가진) 남편( 변희봉 )을 복상사하게 만든다. 범죄와 그에 따르는 불안과 집착은 연쇄성을 갖게 되고 영화는 점점 에로보다는 스릴러에 집중한다. 자금을 확보한 샤르망이 김여사를 귀찮아한다는 것을 눈치챈 변수린은 그렇잖아도 질투 때문에 마땅치 않던 그녀를 차로 여러 번 치어 살해한다. 변수린의 범죄를 알게 된 샤르망은 자신을 향한 집착이 부담스러워지고 재미교포 사업가 주은몽과 새 삶을 계획한다. 주은몽은 다른 여자들과 달리 그에게 집착하지 않는 ‘쿨’한 여자다. 결국 그는 변수린을 기찻길에서 잔인하게 살해한다. 하지만 주은몽과 형사들은 그를 살인자로 의심하고 변수린이 살아있는 것 같은 이상한 징후들이 그를 불안에 휩싸이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반전을 내놓는다. 그 반전을 예상하지 못한 건 영화가 반전을 위한 서사를 거의 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디아볼릭>을 넘어선 파격적 혹은 허술한 반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완전히 주변부 인물, 즉 조연이었던 직원과 영화 후반부에 등장해 존재감이 미미했던 주은몽이 이 모든 계략을 지배하며 완전범죄를 저지른 레즈비언 커플이었음이 매우 급작스럽게 밝혀진다. 주은몽은 변수린에게서 벗어나고픈 샤르망의 욕망을 자극해 공장을 판매한 대금을 자신에게 투자하도록 유도했으며, 아마도 사적, 공적 공간 모두에서 프레임 바깥에 상시적으로 존재했을 직원은 온갖 정보를 수집해 완전범죄를 계획하고 변수린과 샤르망의 대화를 녹음해 변수린이 살아있는 것처럼 꾸밀 수 있었을 것이다. 변수린, 샤르망, 주은몽을 훔쳐보는 제3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종종 암시하지만 서사적으로 그 눈이 직원의 것일 거라는 예측을 하기는 어렵다. 프레임 바깥 존재인 그들의 비가시성과 유령성은 완전범죄와 ‘완벽한(예측 불가능한)’ 반전 서사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비가시적이고 유령적인 레즈비언 커플이 변수린의 유령을 위장하고 무대화할 때 과장되게 연출된 줌 쇼트, 화려한 번쩍이는 조명, 사각앵글 등은 그들 스스로 유령적 존재였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매우 아이러니하다. 변수린이 김여사를 살해할 때 부띠크 직원을 용의자로 몰기 위해 그의 모습으로 변장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과장과 위장은 1980년대 에로틱 스릴러의 문법이기도 하면서 자신들을 드러낼 수 없는 레즈비언 커플의 유령적 현현의 비틀어진 알레고리가 된다. 전말이 드러나는 에필로그, 즉 마지막 장면 바로 직전 쇼트에서 샤르망은 자신을 체포하려는 형사들에게서 도망쳐 기차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간다. 기차와 부딪히기 직전 그의 신체는 프리즈 프레임 효과 속에서 동결된다. 기차의 헤드라이트 때문에 하얗게 날린 스크린은 종결보다는 다른 이미지와 서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하얀 스크린과 샤르망의 신체가 한중간에서 찢겨나가기라도 하듯 바로 이어지는 쇼트에서 창문 양쪽이 열리고 하얀 커튼이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누드로 침대에 누워 있는 두 여자, 부띠크 직원과 주은몽이 등장한다. 그녀들은 샤르망의 신체와 스크린(그리고 이성애 서사)을 찢고 나온 것처럼 보인다. 마치 < 에이리언 >(리들리 스콧, 1979)에서 에일리언과 접촉했던 남자 승무원의 배를 찢고 아기 에일리언이 나오는 장면이, 직유적으로 (불가능한) 남성출산을 가리켰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까지 어떤 서사적 암시도 없었기에 그 반전은 그야말로 영화 전체를 헤집고 뒤집는 얼룩이 된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여자 등친 돈, 여자가 돌려받았을 뿐이야”라고 그럴듯한 범죄 동기를 던져줌에도 이 반전은 전혀 납득할 수 없다. 이 예측 불가능한 에필로그는 철학자 질 들뢰즈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를 분석하며 그의 회화가 구상이나 추상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으며, 오히려 구상을 뒤흔들고 해체하는 힘의 운동(강도)에 가깝다고 분석한 것에 가깝다. 들뢰즈가 ‘돌발흔적’이라고 부른 것 말이다. 돌발흔적은 구상에 가까운 그림 위에 우발적이고 맹목적으로 던져진 국지적이고 질료적인 손의 흔적을 지칭한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에서 퀴어적인 것은 영화 내내 이어진 팜 파탈과 옴 파탈 간의 연쇄 범죄도, 비규범적 섹슈얼리티도, 레즈비언 커플이 가시화되는 에필로그도 아니다. 그보다는 국지적인, 흰 스크린 위의 얼룩과도 같은, 마지막 한 씬으로 영화 전체를 뒤흔들고 반향을 만드는 힘의 강도다. 무엇도 선명하게 의도되지 않고 혼탁하기 그지없다. 외삽도 내삽도 아닌 방식으로 존재하며 우발적으로 스크린을 찢어내며 등장한 돌발흔적. 레즈비언 커플은 그야말로 샤르망의 몸, (혹은) 스크린을 찢고 자진 탄생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기존의 (이성애) 서사를 완전히 망쳐 놓는다. 영화는 새로운 영화를 시작하듯 “아... 색깔있는 남자여 안녕”이라는 대사를 던지며 웃는 주은몽의 얼굴로 다시 한 번 프리즈 프레임하며, 샤르망의 프리즈 프레임을 취소시키고, 그 자신의 얼굴로 끝을 낸다. 에필로그 ‘얼룩,’ ‘돌발흔적’에 그칠 수밖에 없던 레즈비언 커플은 기껏해야 하나의 씬, 비밀스러운 작은 침실에서만 가시화될 수 있었다. 최근 개봉을 앞두고 있는 두 편의 퀴어 장편영화 < 딸에 대하여 >(이미랑, 2023)와 <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2024)는 사회와 공동체에 의해 지워버려야 하는 얼룩과 불쾌한 냄새로 취급되는 레즈비언 커플의 가족구성권 혹은 자기 자리와 공간의 확보를 다루고 있다. <색깔있는 남자>의 ‘에필로그’는 국지적인 것이 바탕을 바꾼다는 면에서 퀴어적으로 독해될 수 있지만 분명 한계가 있다. 반향을 만들어내는 얼룩의 자리는 강제된 것이고 실제로 그 자리 이외의 것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에 대하여>와 <럭키, 아파트>는 레즈비언 커플들이 더 이상 얼룩과 냄새로만 남아있지 않을 것이며, 돌발흔적은 오히려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넘어 상상된 관계들과 공동체들의 이접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말한다. 돌발흔적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촉지될 수 있다. <딸에 대하여>, <럭키, 아파트> 중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얼굴 자체를 물음으로 만드는 영화적 순간들이 있다. 운동을 동결하는 프리즈 프레임처럼 무리 없이 흘러가던 기존의 판단과 감정을 괄호치고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섣불리 의미화 하지 않게 하는 정초(定礎)의 얼굴들. 특히 엔딩에서 인물들 간의 관계를 넘어 스크린 바깥으로 급진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얼굴들 말이다. 인상 깊었던 한국영화의 그러한 순간들을 거칠게 꼽아보자면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 < 길소뜸 >(임권택, 1986), < 시 >,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같은 영화들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들 얼굴-물음의 성격은 모두 다르다. 메타 영화인 <반도의 봄>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 <춘향전> 제작기와 이성애 로맨스를 서사화한다. 이 영화는 일본이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군국주의적 착취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영세한 조선 영화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영화인들의 성장서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과 기술을 앞세운 총독부의 국책회사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조선영화를 통제하기 위한 명분을 쌓는 프로파간다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영화는 여러 어려움과 오해에도 결국 영화를 완성시키고 애정을 확인한 두 영화인 남녀가 선진영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 유학길을 떠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 쇼트로 행복한 연인이 아닌 플랫폼에서 배웅하는 동료 영화인들의 어두운 얼굴 클로즈업을 선택한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현실에서 그들이 기차의 선로를 따라 뻗어 나갈 수 없음을, ‘발전’은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실제로는 진퇴양난에 몰려있음을 드러내는 당혹감, 즉 픽션과 스크린을 넘어 현실의 시간성을 묻는 얼굴들이다. <길소뜸>은 1980년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와 가부장적 민족주의가 결합된 방식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국가적 미디어 이벤트였던 ‘이산가족찾기’가 가진 이면을 보여준다. 화영(김지미)은 한국전쟁 중 잃어버린 아들과 연인을 극적으로 찾게 되고, DNA 검사로 그가 아들임을 확인받는다. 그러나 화영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아들 부부를 끝내 뿌리치고 부인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차를 운전해 도로를 달리는 가운데 검사를 진행한 의사의 내레이션이 깔린다. 의사가 ‘과학’의 이름으로 민족과 가족의 가치를 설교하는 가운데 화영은 되돌아가려는 듯 차를 멈춘다. 그리고 카메라는 화영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살짝 눈시울이 불거진 얼굴은 ‘본능적 모성’이 그녀를 막은 것처럼 보이지만, 화영은 단호하게 다시 가던 길을 간다. 그녀의 행동은 민족-국가와 대중이 기대하는 얼굴을 부인하며, 부인을 재확인한다. 화영은 그로써 대중매체와 과학이 강요하는 가부장적 민족주의와 혈연주의뿐 아니라, 여성 스타를 거대서사의 반응(reaction) 스크린으로 만드는 얼굴 이미지를 이중적으로 질문한다. 한편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 사건을 담당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한 박두만(송강호) 형사가 시간이 흐른 뒤 피해자의 시체가 발견된 평화로운 논밭을 다시 찾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장면은 박두만이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으로, 즉 직설적으로 스크린 너머의 현실을 응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종종 밝혔듯이 박두만의 얼굴-물음 쇼트는 당시에 아직 잡히지 않은 범인을 호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박두만의 표정은 아련하게 무언가를 추억하는 것처럼 보일까? 박두만은 그 시절을 ‘실수가 좀 있었지만 열심히 산 시절’로 추억할 수 있다. 여기서 범인과 동시에 그 얼굴을 질문받아야 하는 대상은 박두만을 비롯한 경찰 공권력 그 자체이다. 서태윤(김상경)도 처음에는 인권적이고 과학적인 수사를 도입하려 하지만 결국 대책 없고 폭력적인 박두만과 조용구(김뢰하)의 방식에 물든다. 박두만은 질문하는 얼굴인 동시에 질문 받아야 하는 얼굴이다. <시>의 얼굴-물음은 위의 영화들과는 다르다. 이 영화는 스크린 바깥에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얼굴 자체를 물음으로 만들어 버린다. 앞에서 말한 정초의 얼굴에 가장 가깝다. 최종적으로 미자는 자신의 자리에 타자의 얼굴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신의 얼굴을 기꺼이 희생하는 급진적 선택을 한다. 양미자(윤정희)는 딸이 맡겨둔 손자 종욱(이다윗)과 함께 살고 있다. 60대의 미자는 신산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여전히 소녀 같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꽃과 시에 진심인 미자는 어느 날 한 자신의 손자가 집단강간 가해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시>의 오프닝과 엔딩은 수미상관을 이룬다.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물이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프레임 밖에서 들리는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소리를 따라 카메라가 패닝한다. 강가 모래밭에서 놀던 한 아이가 하늘을 보다 물에 떠내려 온 희진(한수영)의 시체를 발견한다. 시체는 뒤집어져 있고 우리는 희진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카메라와 소녀의 시체가 서로 가까워지며 소녀의 뒤통수가 화면 안에 가득 찰 즈음 ‘시’라는 제목이 화면의 왼쪽에 떠오른다. 집단강간 피해 후 자살을 한 소녀는 ‘시’가, ‘영화’가 될 수 있을까? 더 정확히 말하면 희진이 시와 영화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조건은 무얼까? 영화는 알츠하이머를 앓아 언어를 상실해 가는 미자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의 죽음, 영화의 죽음 또한 반복적으로 선언되고 있는 시대에 말이다. 이 영화는 무언가를 상실하고 죽어가는 것들의 연대를 말한다. 영화에서 ‘봄’은 시/영화 쓰기의 핵심적 실천으로 언급된다. 이 영화가 말하는 시적/영화적 봄은 김용탁(김용택) 시인이 사과를 두고 말한 것처럼, 존재(방식)에 관심을 두고 돌보며 이해하고자 하는 현상학적 봄이다. 현상학적인 봄에서는 주체와 대상이 이분법적으로 나눠져 있지 않고(나의 봄은 언제나 당신의 봄과 얽혀 있다), 관습적인 사용방식, 즉 도구화에 질문하면서 존재의 다양한 역량이 드러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시상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듯 현상학적 봄도 쉽지 않다. 미자는 꽃을 비롯해 보기에 예쁜 것을 좋아한다. 챙이 있는 하얀색 모자에 하늘하늘한 꽃무늬가 있는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늘 웃고 다니는 미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곱고 예쁘다는 평가를 듣는다. 미자 역시 자신을 곱다고 하는 주변 사람들에 늘 “저 멋쟁이에요?” “나 예쁘다고 생각해요?”라고 되묻는다. 하지만 이들은 의미 없이 화제를 돌리기거나 자기 기준에 맞춰 에둘러 비난하기 위해 그들의 첫인상을 거리낌 없이 평가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상대방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빠르게 판단하고 도구적으로 이용한다. 손자 종욱과 함께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아버지들은 희진을 불쌍해 하지만 자기 아들들을 위해선 그녀의 피해를 지워버리려 하고, 희진 엄마를 쉽게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며, 심지어는 미자에게 “같은 여자”, “혼자 손자를 돌보는 불쌍한 할머니”로서 희진 엄마에게 사정을 해보라고 한다. 공적 책임이 있는 기자와 교감조차 희진을 진정으로 대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익에 따라 이용한다. 간병을 받는 김노인 역시 미자를 일방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풀 성적 대상으로 본다. 그렇다고 피해자나 약자 역시 도구적 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희진 엄마는 결국 돈을 받고 합의를 해주기로 하고 미자 역시 김노인을 협박해 돈을 받아내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자는 희진의 죽음과 울부짖는 희진 엄마를 가십거리처럼 동네 슈퍼에서 전한다. 미자가 다니는 병원 로비에선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팔레스타인 엄마가 고통스럽게 인터뷰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미자는 정말로 왜 그렇게 아름다움을 보는 행위에 집착하는 걸까? 시 강좌에서 ‘내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을 고백하는 미자의 말에서 우리는 실마리를 포착할 수 있다. 미자는 자기 인생의 첫 번째 기억으로서 서너 살 즈음 아픈 엄마 대신 일곱 살 차이 나는 언니가 자신을 돌보며 예쁜 옷을 입혀주고 애정을 담아 돌봐줬던 순간을 기억한다. 언니의 ‘예뻐해 줌’은 존재의 첫 각인으로 남는다. 언니의 사랑은 그녀가 존재함을 감각하게 한 원초적 기억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언제나 ‘아픈 엄마’처럼 고통과 함께 한다. 미자는 시를 쓰려고 노력하고, 알츠하이머로 언어를 잃고, 더 이상 손자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없게 되면서 관습적인 관계와 이해를 벗어던진다. 미자는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으로 실천을 시작한다. 미자의 추도식에서 액자에 담긴 희진의 사진을 훔쳐오고, 그 액자를 손자가 보도록 식탁에 놓는다. 하지만 손자는 그 얼굴을 외면하고 크게 마음 쓰지 않는다. 미자는 다른 아버지들에게 떠밀려 합의를 요구하기 위해 희진 엄마를 찾는다. 농사일을 하고 있는 희진 엄마를 찾아 떠나지만, 미자는 곧 자신의 목적을 잃고 따뜻한 햇살, 살랑대는 바람, 초록이 싱그러운 나무와 꽃들에 마음을 뺏긴다. 희진 엄마를 마주치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지를 읊는다. 미자는 뒤늦게 그가 희진 엄마였음을 깨닫고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마주한다.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기 위해선 어쩌면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봐야할지 모른다. 미자는 이후 자기에 대한 몰입에서 스스로의 얼굴을 질문하고 비우는 것으로 간다. 희진이 자살했던 다리를 찾아갔을 때 더 이상 습관처럼 적어 내려가던 아름다운 글귀들을 적지 못하고 비운 채로 남아있던 시상 노트는 미자의 얼굴이 된다. 자기를 비우고 타자의 얼굴을 위한 자리를 남겨둘 때야 원초적인 존재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 미자는 희진의 존재를 삭제하지 않기 위해 홀로 손자를 경찰에게 신고해 수사가 이뤄지도록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드디어 수강생 중에서 유일하게 시를 쓴다. 희진의 세례명을 딴 ‘아네스의 노래’라는 제목을 가진 미자의 시는 김용탁 시인이 읽으려고 하는 제스처에서, 미자의 목소리로, 그리고 아마도 희진의 목소리로 옮겨간다. 미자의 보이스오버로 시가 낭독되는 가운데 화면은 미자가 살았던 집, 미자의 집에 온 딸, 아파트 앞의 평상과 커다란 나무, 자주 이용하던 버스와 정류장을 따라간다. 우리의 신체 중에서 유일하게 직접 볼 수 없는 부위는 얼굴이다. 눈이 포함된 얼굴은 다른 신체 부위를 직접 볼 수 있지만 스스로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렇기에 존재론적으로 얼굴은 비움이자 물음이 된다. 이 장면은 미자가 보아 온 삶의 흔적을 훑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삶-이미지의 흐름 자체가 얼굴이기도 하다. 얼굴은 고정하거나 규정하지 않을 때 타자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타자의 얼굴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서 미자는 시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아네스의 노래’는 미자와 희진이 함께 쓴 시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를 미자와 희진의 목소리로 읽게 하고 그 둘의 시점으로 보는 삶의 이미지들을 연달아 보여준다. 희진의 목소리로 낭독되는 시의 중반부터는 희진이 애정 어린 눈으로 보았을 장면들이 주관적 시점으로 이어진다. 학교 운동장, 수업하는 교실, 희진의 집과 반가워하는 강아지, 버스와 경주하는 희진의 남동생, 그리고 희진의 친구들. 마침내 다리 위에 도달했을 때 카메라는 드디어 희진의 얼굴을 보여주며 스크린 너머에 있는 관객들의 얼굴을 질문한다. 당신은 희진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비워두고 있는가? 다시 카메라는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대부분 영화팬들은 이용민 을 60년대 한국 호러영화의 대표작인 < 살인마 >의 감독으로 기억할 텐데, 그는 이 작품 이외에도 < 악의 꽃 > < 목 없는 미녀 > < 공포의 이중인간 >과 같은 구미 당기는 제목의 영화들을 많이 만들었다. 김일안 이 원안을 쓴 < 무덤에서 나온 신랑 >은 63년 작인데, 포스터와 캐스팅만 봐도 알겠지만 코미디 비중이 높은 편이다. 시작하자마자 타이틀롤이 나온다. 혁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다. 길가에 쓰러진 그는 지나가던 택시에 올라타고 부상을 당했다며 집으로 데려달라고 한다. 집에 도착한 그는 돈을 주겠다며 기사에게 따라오라고 하지만 겁에 질린 기사는 달아나고 만다. 이 정도면 혁이 정말 귀신이긴 한 건가 의심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귀신 맞나 보다. 그러니까 귀신이 택시 타고 집에 찾아오는 영화다. 택시에 탄 귀신 이야기는 역사가 꽤 긴 편이니 이는 호러가 될 수도 있고 코미디가 될 수도 있다. < 살인마 >의 도입부를 생각해보면 둘 다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날은 당연히 혁의 제삿날로, 그의 친구 맹갑과 삼룡이 제상 앞에 앉아 있다. 혁은 자기가 귀신과 결혼해서 신혼 첫날에 이 꼴이 되었으니 오대산 백년골이란 곳에 가서 원수도 갚고 저승길에 갈 때 꼭 필요하니 거기 있는 자기 양복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맹갑과 삼룡이 가는 백년골이란 곳은 ‘삼칠 기도를 드리면 병 가진 사람이 완쾌해서 백 년을 산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 좋은 곳인 거 같은데 그곳까지 가는 길은 호러 경험의 연속이다. 무시무시한 할머니가 나타나기도 하고 선경이란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다가 달걀귀신과 만나기도 한다. 단지 시나리오에 그냥 ‘달걀귀신’이라고 나와 있는 것이 진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선경이란 여자가 목욕하는 걸 훔쳐봤는데 선경이 갑자기 달걀귀신이 되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훔쳐보고 있는 맹갑 앞에 갑자기 달걀귀신이 나타났단 말인가. 계속 읽다 보면 후자인 것 같지만. 둘은 탈박노인이 살고 있는 폐옥에 도착한다. 그들은 자기가 왜 여기에 왔는지 이야기하고 노인은 원수를 갚을 생각이냐고 묻는다. 그냥 사연을 듣고 원혼을 위로할 생각이라고 하자 노인은 그들에게 방을 내어준다. 단지 조건이 있다. 이 마을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살아날까 봐 한 달 스무날 동안은 장사를 지내지 않는데, 마침 한 달 스무날이 된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두 개 있으니 두 사람이 차례대로 다녀와 못을 박으라는 것이다. 삼룡은 허겁지겁 임무를 완수하지만 겁에 질린 맹갑은 온갖 소동을 연출한다. 임무를 마친 둘은 오월이라는 여자가 약사대전에 들어가는 걸 목격한다. 몰래 훔쳐보니 오월과 탈박노인은 고양이에게 약을 먹여 독살하고 있다. 이 묘사를 보면 걱정이 된다. 당시 충무로 사람들이 고양이를 얼마나 험악하게 다루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 살인마 >에도 수상쩍은 장면이 하나 있다. 엿보다 들킨 둘은 화살을 쏘며 쫓아오는 탈박노인을 피해 달아나지만 결국 잡히고 만다. 이제 그들은 억지로 마을에 머물며 삼칠기도를 드려야 한다. 노인은 계속 약초를 기르며 무슨 실험을 계속하는 거 같은데, 아무래도 아까 잠시 등장한 선경이라는 여자가 그 노인의 딸이고, 노인은 딸의 치료법을 찾고 있는 듯하다. 삼룡은 선경이 혁의 신부라고 확신하고 어떻게 된 거냐고 따지지만 선경은 오히려 결혼해달라며 삼룡을 유혹한다. 그러는 동안 맹갑은 오월이와 엮인다. 그 뒤로 사람인지 귀신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들과 벌이는 소동들이 이어진다. 이 장면들을 보다 꼼꼼하게 묘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유감스럽게도 내가 갖고 있는 시나리오의 지문은 빈약하기 짝이 없으며 몇몇 장면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아마 내가 이렇게 탈락시킨 장면들이 진짜로 괜찮았을 가능성이 높다. 결말에 가서야 진상이 밝혀진다. 알고 봤더니 선경은 몽유병 환자였고 탈박노인은 지금까지 그 병을 치료하려고 연구 중이었다. 혁은 선경이 몽유병에 걸려 떠도는 선경을 보고 놀라 죽었던 것이고. 다행히도 선경은 치료가 되었고 삼룡은 선경의, 맹갑은 오월이의 짝이 된다. 합동결혼식을 올리겠다며 호들갑 떠는 결말은 발랄하기 그지없는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저승에 입고 갈 양복을 가져오길 기다리고 있는 혁의 귀신을 기억하는 것 같지 않아 조금은 걱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