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서독
- 감독
- 왕가위
- 제작년도
- 1994
- 출연
- 임청하, 장국영, 장만옥, 양조위, 장학우, 양가휘, 유가령, 양채니
짧은 여행의 기록(2) 3-1: 내 나이 42세, 이젠 오직… 위트앤시니컬이 있는 대학로는 내게 추억의 장소다. 90년대 후반, 나우누리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을 만나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아니면 신촌이거나. 그래서 매일 밤 채팅을 통해 우정을 쌓아가던 라이터37(나희도)과 인절미(고유림)가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는 장면이 내게는 반갑고도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때 그곳에서 그들을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음 울적한 날에 거리를 걸어 보다가, 혹은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다가… 모두 동년배니 꼭 그곳이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한번쯤 마주쳤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이제 우리도 슬슬 관리해야 하는 나이인데 다들 건강은 괜찮은지…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다. 오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번개’나 ‘추억여행’ 같은 걸 위해서가 아니다. 상을 (대신) 받기 위해서다. 처음 대리 수상을 부탁받았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냥 3단계면 끝나는 일 아닌가? 그러니까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기 위해서는 냉장고 문을 열고, 코끼리를 넣고, 냉장고 문을 닫으면 되는 것처럼. 1. 시상식장에 간다. 2. 상을 받는다. 3.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3단계면 끝나는 일이 맞긴 하다. 그 사이사이에 놓인 민망하고 귀찮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제외한다면… 늦지 않게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동양서림으로 들어가는데, 어쩌면 내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책을 구경하고 있는 김정환 선생(시인, 69세)의 옆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나는 2018년에 출간된 내 책 [아무튼, 택시]에서 김정환 선생과의 에피소드를 가볍게 언급한 적이 있다. 바로 이렇게. …파마를 하고 며칠 뒤 김준성문학상 뒤풀이에서 김정환 시인을 만났다. 김정환은 내게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개를 좋아하는 생계형 서평가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며 지금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후장사실주의 동인인 동시에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을 맡고 있는, 전에도 몇 번 선생님에게 인사드렸던 37세 금정연이라고 말했다. 젠장, 나는 자기소개가 정말 싫다. “뭐? 진짜?” 김정환이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처럼 안 생겼는데.” 누군가 물었다.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은 어떻게 생겼는데요?” “문학에 대한 고뇌로 얼굴이 아주 썩었지. 이인성처럼. 근데 여긴 달라. 얼굴에 문학에 대한 고뇌가 전혀 보이지 않아. 훤해. 잘생겼어. 나랑 똑 닮았어.” 김정환 시인은 1954년생이다. 그리고 윌리스를 닮았다…… 몇 주 후에 문학과지성사 시상식장에서 김정환 시인을 다시 만났다.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날은 미안했소……” 나는 괜찮다고,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했다고 말했다. 나는 시상식장을 나서며 두 번 다시 파마 따위는 하지 않겠노라고 문학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윌리스는 “내 나이 35세, 이젠 오직 돈 생각뿐이다”라는 밈으로 유명한 루이 말 감독의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의 주인공이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안녕하세요” 작은 목소리로 인사한 다음, 그 상태로 시인을 지나칠 때까지 몇 걸음 걸어간 다음에야, 고개를 들고 위트앤시니컬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며칠 전에 새로 파마한 머리가 이마를 부드럽게 간질이는 게 느껴졌다… 시상식장에서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좋은 소식. 스무 명 남짓한 규모로 치러지는 시상식이라 사람이 많지 않다. 다음은 나쁜 소식. 그중 절반이 나와는 조금 어색한 사이에 있는 ‘선생님’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시 부문 수상자인 신해욱 시인의 내가 모르는 지인들이다… 들어가자마자 오늘도 문학에 대한 고뇌로 가득해 보이는 이인성 선생(소설가, 70세)이 있어서 꾸벅 인사했다. 이인성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 근데… 누구시더라? 나는 개와 고양이를 좋아하는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이며 지금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후장사실주의 동인인 동시에 한때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하며 선생님과 몇 번 서로 다른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던 42세 금정연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냥 금정연이라고. 그러자 이인성이 말했다. 아, 금정연씨! 어떻게 지내시나? 요즘도 맨날 글 쓰고 그러고 있나? 나는 하하 뭐 그렇죠, 대꾸하며 마음 속으로 정지돈에게 과연 상금의 몇 퍼센트를 요구하면 좋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위: 영화 <앙드레와의 저녁식사>에 출연한 김정환 시인, 아래: 영화 < 강변호텔 >에 출연한 김정환 시인) 3-2: 복사꽃 그날 일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시간의 베일 뒤로 수치스럽고 민망했던 그날의 기억들이 반딧불처럼 잔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구태여 그걸 끄집어낼 필요는 없을 거라고 믿는다. 물론 좋은 기억들도 있다. 그것들에 대해서라면 언젠가 또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영화 < 동사서독 > 중에서) 4-1: 꿈에 악!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와 나, 그리고 또 나밖에는… 오스스 몸이 떨려와서 주섬주섬 이불을 찾아 몸을 덮었다. 기억은 서서히 돌아왔다. 어제는 시상식이 있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뒤풀이를 했다. 그리고 술을 마셨는데, 물론 그 술은 한 잔만 마셔도 지난 일을 모두 잊게 해준다는 취생몽사 같은 건 아니었다. 그냥 테라, 기네스(생), 편의점에서 파는 세계맥주 몇 개… 나는 텅 빈 방 안에 멍하니 앉아 두서없이 떠오르는 간밤의 기억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복사꽃, 복사꽃 아님, 복사꽃,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복사꽃 아님…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건 정말 어젯밤의 기억인가? 어쩌면 내가 ‘한영한사’ 마지막 연재를 준비한답시고 홍상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건 아닌가? <강변호텔>과 < 소설가의 영화 >를 보며 시인으로 나오는 기주봉이 김정환 시인이랑 너무 똑같이 닮아서 영화를 보는데 자꾸 다른 생각이 들었던 것처럼, 아니 정확히 반대로, 어제 만난 김정환 시인이 <강변호텔>과 <소설가의 영화>에 나오는 기주봉과 너무 똑같이 닮아서 현실과 픽션이 뒤섞여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그냥 꿈을 꾼 것인지도 모르고. 하지만 마지막 가설은 이내 기각되었다. 간밤에 실제로 꾸었던 꿈의 조각들이 의식 위로 불쑥불쑥 떠올랐던 것이다. 평론가 임재철과 대통령 윤석열과 영부인 김건희가 나오는 꿈이었다… 씻고 설거지 하고 어제 (대신) 받은 꽃다발 꽃병에 꽂고 나윤이랑 영상 통화했다. “아빠! 나 여기 안산 할아버지네 집에 있어!” 나윤이가 말했다. 나윤이 안산 할아버지네 집 가고 싶어했잖아, 가니까 좋아? 물으니 “응, 전에 할머니랑 아빠랑 같이 차 타고 왔잖아”라고 했다. 그래, 바로 어제… 그러다 갑자기 내일 서울 할머니네 집에 가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하니까 표정이 바뀌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나한테 안 물어봤잖아…” 그래서 미안하다고, 다음부터 꼭 물어보겠다고 했는데 단단히 마음이 상한 모양인지 안 가겠다고 해서 내일 다시 생각해보자고 했다. 행신에서 출발해서 광주송정으로 향하는 12시 18분 KTX-산천 417호 열차를 타기 위해 집에서 나섰다. 시간이 조금 남아서 근처 복권방에 들러 로또와 연금복권을 한 세트씩 샀다. 그리고 버스를 탔다. 마지막으로 행신역에 왔을 때는 공사중이었는데, 공사가 끝난 지금은 제법 넓고 환해 보였다. 연휴의 첫날이라 그런지 엄마 아빠를 따라온 아이들이 많았다. 저마다의 속도로 걷고 뛰고 말하는 아이들. 나는 나윤이를 생각했다. 아이의 눈과 코와 입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표정들을, 무언가를 설명하기 전에 몇 번이나 곱씹는 말의 처음과 거기에 동반되는 손과 발의 움직임 같은 것들을. 이것들을 모두 버리고 나는 무엇을 얻고 있는 것일까요? 하는 질문이 절로 들었다… 물과 초코바를 사서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내 상식과는 달리 에스컬레이터가 중간에 있는 게 아니라 1호차 쪽에 있어서 18호차를 타려면 반대편 끝까지 걸어야 했다. 아마 5키로미터 정도는 걸은 것 같다. 그러면서 나는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와 미국의 철도 전쟁, 그리고 영화의 탄생에 대해 숙고했다(리베카 솔닛의 [그림자의 강]을 참고할 것). 거짓말이다. 그저 [마틴 에덴] 오프닝 시퀀스에 짧게 지나가는 기차 장면에 대해 조금 생각했을 뿐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로또와 연금 복권은 꽝이었다. 나는 대통령 꿈을 꾼 또 한 명의 복권 당첨자가 되는 대신 그냥 윤석열 대통령 꿈을 꾼 사람이 되었다. (위: 에드워드 머이브리지, ‘Railway Tracks. P.R.R. Quadruple Tracks Monmouth’ 아래: 영화 < 마틴 에덴 >의 한 장면) 4-2: 빵과 장미 김재욱이 너무 많다. < 커피프린스 1호점 >과 <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에 출연한 배우 김재욱, ‘안녕하세요 제니퍼에요’라는 유행어로 유명한 코미디언 김재욱, [쇼미더머니 11] 2차 예선에서 댐핑 좋은 붐뱁을 선보이며 심사위원 올 패스를 받은 래퍼 김재욱, 바로 오늘 내가 주문한 [데이비드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를 한국어로 옮긴 번역자 김재욱… 하지만 내가 아는 김재욱은 한 명뿐이다. 90년대 중반에 나우누리에서 만나 신촌과 대학로와 홍대와 그밖의 많은 곳들을 함께 싸돌아다니던 김재욱(아이디 gokjw). 지금 우리는 광주에 있다. 김재욱과 나. 광주는 두 번째였다. 그렇지만 처음이나 다름없다. 십년 전, 지금은 만나지 않는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도착해서 축의금을 내고, 사진을 찍고, 밥을 먹고, 다시 관광버스를 타고 돌아간 것이 전부였다. 광주에 도착해서 처음 느낀 건 빛이 다르다는 거였다. 과연 빛의 고을이었다. 우리는 광주송정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문화전당역에서 내렸다. 마침 광주프린지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쏟아지는 사람들, 빛들, 노랫소리들. 금남로를 건너 김재욱이 검색해서 찾은 ‘맛집’을 향했다. 월계수식당. 김재욱은 특제 소스와 함께 비벼 먹는 삼선볶음밥을, 나는 우삼겹짬뽕을 주문했다. 없던 숙취까지 몽땅 가시는 맛이었다. 지금 내게 숙취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직 GV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다. 우리는 충장로를 걸어 광주극장을 향했다. 중앙로를 사이에 두고 분위기가 갑자기 변하는 게 조금 신기했다. 식당이 있던 위쪽은 조금 북적북적한, 전국 어디에나 있는 ‘로데오 거리’ 같은 느낌이었다면 광주극장이 있는 아래쪽은 의상실과 금은방 등이 있는 좀 더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광주극장과 잘 어울리는 거리라고 해야 할까. 극장 바로 옆에는 < 김군 > 포스터가 크게 붙여진 ‘소년의 서(書)’라는 이름의 서점과 ‘빵과 장미’라는 이름의 빵집이 있었다. 물론 ‘빵과 장미’라는 이름은 켄 로치가 감독한 동명의 영화에서 따온 것이다. <빵과 장미>는 우리나라에서 2002년 5월 24일 개봉했다. 누적관객은 444명. 그 444명 중에 나도 있었다. 2002년의 초여름, 당시 만나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와 맞은편의 웬디스(Wendy’s) 2층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난다. 양배추 조각과 여기저기 묻은 빨간 케찹과 애드리안 브로디의 콧등 위로 떨어지던 햇빛 같은 것들이.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다. 정말이지 시간은 늘 없다. 오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극장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에 빠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중 하나)에서 서이제 작가와 함께 [마틴 에덴] GV를 하기 위해서다. 오해하면 안 된다. 이제 와서 내가 갑자기 극장을 찬양한다면 그건 제법 우스운 일이 될 거라는 사실을 나도 안다. 나는 유운성 평론가가 말하는 ‘빛 마니아’가 아니고,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씨네필 테스트도 통과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나는 우리의 기억이 형성되는 방식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고 싶다. 어떤 책의 페이지를 (다시) 펼쳤을 때 문득, 그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더라도 종종 그것을 읽던 당시의 빛과 바람, 손에 들린 종이책의 감촉과 냄새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어떤 영화에 대한 기억은 극장과 분리할 수 없이 달라 붙어 나라는 관객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기도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서울극장에서 본 바즈 루어만의 < 로미오와 줄리엣 >, 고등학교 시절 녹색극장에서 단체 관람했던 < 콘에어 >와 <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 이대 영화마당에서 교복을 입고 본 < 셰익스피어 인 러브 >(미성년자 관람불가), 동기들과 ‘국문학 입문’ 강의를 째고 강변 CGV에서 봤던 < 친구 >와 < 신라의 달밤 >, 군대에서 휴가 나온 기분으로 불광 CGV에서 친구와 함께 봤던 < 박쥐 >, 기타 등등… 그건 어디로도 닿지 않는 개인적인 기억일 뿐이지만, 어쨌거나 그건 나의 기억이다. 프란체스코 카세티의 말처럼, 손상되기 쉽지만 기억은 과거를 되찾으려는 욕망의 원천이다. 그리고 욕망은 우리를 살게 한다. 기억이 없이는 ‘나’라는 존재도 없다. 꼭 있어야 하는 건지는 둘째치고… 그러니까 내 말은, 광주극장이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는 거다. 얼마 전에야 광주극장에 처음, 그것도 일 때문에 가본 사람이 하기에는 조금 머쓱한 말이긴 하지만. 이 부분을 쓰며 나는 혹시 모를 기억의 오작동을 방지하기 위해 구글에 ‘광화문 웬디스’라고 친다. 나무위키의 ‘웬디스’ 항목 다음으로 나오는 것은 2018년 2월 17일에 올라온 클리앙 게시물이다. 제목은 이렇다: “광화문에서 웬디스 먹어봤으면 아재 인정” 어 인정… (빵과 장미, 외부와 내부) 4-3: (Unexpected) Guest Visit 그렇게 싸늘한 반응의 행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2015년 12월의 어느 날 정지돈과 함께 명동 CGV에서 했던 빔 벤더스 감독의 < 에브리씽 윌 비 파인 > GV에 버금갈 정도였다(당시 행사 직후 SNS에 ‘올해 최악의 지브이’라는 평이 올라왔다). 관객은 40명 남짓, GV가 시작할 때는 30명 정도였고, 끝날 때는 그보다 더 적었다. 몇 명이 되었건 모두들 많은 것을 잊고 복사꽃이 좋았던 것만 기억하시기를. 그러니까 서이제 작가의 멋진 말들만… (영화 < 마틴 에덴 > 중에서, 혹은 GV를 끝낸 어느 Guest의 마음) (참고로, 그날 내가 GV에서 (하려고) 했던 말들은 여기 에서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민망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한 마음으로 광주극장을 나서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떤 남자의 목소리로 몇 시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6시”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6시예요, 영화는 이미 끝났어요”라고 말했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의 남자였다. 광주에는 이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곧 나는 잃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잃을 게 아무것도 없어!”라는 말을 큰 소리로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 같아서 그 문장을 큰 소리로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남자는 시계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시계를 잃어버린 후로는 이따금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 않을 수 없다오.”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시계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거요.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을 거요.” 그는 내가 6시라고 말한 후에야 6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고 보니 오늘 아홉 시간 동안 한 가지 생각만 하면서 쉬지 않고 걸어 다녔다는 걸 알게 된 것 자체가 무척 흥미롭다고 말했다. “쉬지 않고 말이오. 왔다 갔다 한 게 아니라 곧장 앞으로만 걸어갔지. 그런데 이제 보니 원을 그리면서 걸어 다녔군. 미친 짓이지, 그렇지 않소?”하고 그가 말했다. 그는 “나는 자주 저 극장에 갔었다오” 하고는 내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름을 곧 잊어버렸다. 나는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누구나 어느 날엔가 마지막으로 극장에 가듯이 나도 어느 날 마지막으로 극장에 갔지. 웃지 마시오”하고 그는 말했다. “무슨 일이든 언젠가는 마지막이 있기 마련이오. 웃지 마시오!” 4-4: 인터내셔널의 밤 (ㄱ) 트뤼포에 앉아서 트뤼포를 마셨다. 소설가 박솔뫼가 추천한 곳이었다. 나는 언젠가 ‘박솔뫼의 맛따라 멋따라’라는 제목으로 박솔뫼가 전국 각지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먹는 유튜브를 기획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기획은 여전히 유효하며 투자자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영화에 대한 우리의 오디오비주얼 에세이가 그런 것처럼… 다만 트뤼포는 솔뫼가 직접 가본 곳은 아니었고, 이름을 듣고 언젠가 가보겠다고 기억해둔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갔다. 한쪽 벽면이 DVD로 가득한 작고 아담한 느낌의 바였다. 손님도 많았다. 시그니쳐 메뉴인 트뤼포는 조금 달달한 우롱하이 같은 맛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분명 고다르라면 질색을 할 맛이라는 부분이 특히 좋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사실이 아닌 것은 한 글자도 쓸 수 없는 나의 다큐멘터리스트적인 본성이 발목을 잡았다. 고다르가 시가를 피우는 모습은 많이 봤다. 와인을 마시는 모습도 본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어디서? 나는 구글에 ‘did jean luc godard drink a lot?’이라고 검색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2002년 9월에 작성된 더글로브앤메일의 기사였다. 제목은 ‘외로운 밤들과 장 뤽 고다르와 함께 한 술자리(Lonely nights and drinks with Jean-Luc Godard)’. 25년간 토론토 국제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일하다 올해 은퇴를 선언한 스티브 그레이브스톡의 부인인 케리 허프먼이, 남편이 영화제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동안 자신은 ‘Festival Widow’나 다름없다고 자조하며 구술한 기사였다. 그렇지만 정말 멋진 순간들이 있긴 해요. 허프먼은 말한다. 어떤 영화를 보면 좋을지 내부 정보들을 얻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스티브가 감독을 위해 준비한 칵테일 파티나 저녁 식사에 참석하기도 하죠. 그런 자리가 아니면 백만 년이 지나도 못 만날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요. 몇 년 전에는 장 뤽 고다르랑 같이 술을 마셨는데요. 정말이지 인상적인 사람이었어요. 모두들 그에게 푹 빠져서 자기들이 뭔가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했지 뭐예요! 두 번째는 2015년 6월에 작성된 더스튜디오EXEC의 ‘장 뤽 고다르의 우유를 마십시다 캠페인’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하며 눈을 크게 뜨고 봤는데 알고 보니 패러디 기사였다… 상반된 분위기의 기사가 이어진다. ‘와인과 와인문화에 초점을 맞추는 잡지’ [와인 스펙테이터],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고, 낫고, 빠르게 변해가는 위스키 업계에서 누구보다 빠른 소식을 전해주는 증류주 전문지’ [위스키 애드버킷]과 함께 M. Shanken Communications에서 발간하는 ‘좋은 삶과 시가의 세계를 즐기는 데 전념하는 잡지’ [시가광Cigar Aficionado] 1997년 9/10월 호에 실린 ‘프랑스 영화의 주저하는 천재’라는 제목의 인터뷰다. 인터뷰어는 LA타임스의 스콧 크래프트.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장 뤽 고다르는 극소수의 관객이 감상하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그는 변화할 생각이 없다.” 25년 전에 이미 66세였던 고다르는 말한다. 나는 모든 종류의 영화를 하고 싶다. 모든 영화 속에 있고 싶고,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고 싶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나는 사운드를 발견한 감독 중 하나가 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사운드를 발견한 사람들의 슬픔도 알고 싶다. 요즘은 쫓겨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오늘날 영화를 만드는 건 애플 컴퓨터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 스위스 시골에 은거하는 괴짜 예술 감독을 인터뷰 하라며 자기에게 돈을 쥐어준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노련한 저널리스트 크래프트는 곧이어 이렇게 쓴다. 몇 해 동안 고다르는 스위스에서 개당 20달러에 판매되는 코이바를 피워왔다. 하지만 그는 조금은 나른한 끽연가다. 인터뷰를 하며 그는 열두 번도 넘게 시가에 다시 불을 붙였고, 세 시간이 지나서야 한 대를 겨우 끝냈다. 값비싼 쿠바산 시가를 피우는 게 그의 유일한 부르주아적인 약점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했다. 나중에 전화를 통해 시가에 대한 그의 분명한 사랑에 대해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그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군요." 파리에 있는 그의 조수는 고다르가 자신의 영화 < 포에버 모차르트 > 때문에 우울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고다르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촬영 직전까지 기다리는데, 그것이 그의 습관이다… (ㄴ) 나 역시 원고를 쓰기 위해 습관처럼 마감 직전까지 기다리고, 때로는 마감이 나를 기다리기도 한다. 그럴 때 담배는 도움이 된다. 나는 몇 해 전에 [담배와 영화: 혹은 나는 어떻게 흡연을 멈추고 영화를 증오하게 되었나]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가끔은 영화를 증오하기를 깜박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흡연을 멈추기를 잠깐 멈추기도 한다. 사실 내가 담배를 끊은 건 아이가 생겨서였다. 그렇다면 오늘처럼 아이와 떨어져 밤을 보낼 때는 한 대쯤 피울 수 있는 거 아닌가? 혹은 두 대, 어쩌면 세 대 정도는… 트뤼포를 두 잔씩 마시고 우리는 트뤼포를 나섰다. 포플레이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서였다. 광주극장의 김형수 이사가 추천해준 곳이었다. 바로 옆옆 건물이었는데, 그전에 담배를 사기 위해 편의점을 찾아 십 미터 정도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갑자기 골목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바로 직전까지는 늦은 시간의 종로 뒷골목 같은 느낌이었다면 갑자기 쿵쿵쿵! 비트가 쏟아지는 클럽, 클럽형 소주방, 혹은 대형 헌팅 포차…들이 연이어 있었다. 모두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다. 그때야 김형수 이사의 말이 떠올랐다. 거기 가면 아주… 시끄럽죠, 혹자는 광주가 어떻게 이러냐고 하기도 하던데. 그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우리에게 물었다. 광주가 그러면 뭐, 도대체 어쩌라는 걸까요?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젊음이 드럼 비트처럼 뿜어나오는 골목에서 우리 두 명의 늙은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금연 거리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니까) 에어컨 실외기 뒤에서 담배를 피웠다. 보헴 시가 1미리. 오랜만에(어제 시상식장 뒤풀이에서도 강보원의 담배를 빌려 피우긴 했지만) 담배를 피우니 머리 끝까지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쯤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우리는 포플레이를 향해 올라갔다. 포플레이에는 아무도 없었다. JBL4344 스피커와 가게를 꽉 채운 70년대 소울풍의 음악, 그리고 살 빠진 월터 화이트를 닮은 사장님을 제외하면. 사장님이 우리를 보았고, 우리도 사장님을 보았다. 잠시 아무도 말이 없었다. 우리가 방해를 했나, 나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쑥스러운 듯 말씀하셨다. “제가 이 베이스를 좋아해가지고, 조금 크게 듣고 있는데 손님이 왔네…” 우리는 자연스럽게 바에 앉았고, 사장님은 메뉴판을 주는 대신 음악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베이스를 치는 건 흑인밖에 없어요. 그런 농담도 있잖아요. 신은 흑인에게 운동능력과 음악을 주었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 적절하진 않은 농담이지만요. 저는 아직도 미국이라는 나라를 모르겠어요. 버드 파월이 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경찰이 차를 세웠어요. 그리고 문을 열라고 하더니 운전대를 잡고 있는 파월의 손을 경찰봉으로 내려친 거죠. 한 대, 두 대, 세 대… 사정없이요. 미국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을 망가뜨린 거예요. 단지 흑인이 차를 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요. 그런 나라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이 돼? 그건 좋은 일이지만 그런다고 얼마나 달라질까 싶은 거예요. 그래서 파월 노래를 들으면 슬퍼요. 아무리 신나는 노래라도, 자꾸 그런 게 생각나서 여기가 너무 아파요. 아주 미치겠어요… 근데 그거 제프 다이어 [그러나 아름다운]에 나오는 이야기 아닌가요? 김재욱이 물었다. 아시는군요! 사장님이 반색하며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좋아하세요? 우리는 몇 잔의 보드카 토닉을 마시고, 사장님이 내려주는 커피도 그만큼 마셨다. 크림 치즈와 누텔라를 바른 크래커를 먹었다. 소울과 재즈, R&B를 들었고 조르디 사발이 연주하는 비올의 소리를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시간에 대해서, 잃어버린 꿈들과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에 대해서, 변해버린 것들에 대해서,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서, 이제 아무 상관없는 것들,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 그때 다른 손님들이 들어와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스콧 매켄지의 ‘샌프란시스코’와 스팅의 ‘셰입 오브 마이 하트’를 신청했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일어나자 사장님이 계단 위쪽에 재떨이가 있으니 그곳에서 피우라고 했다. 좁은 계단 아래로 살짝 보이는 길거리는 술집 조명으로 대낮처럼 환했다. 반대로 우리 위쪽은 어두운 심연처럼 보였다. 그 사이에서 담배를 끊은 우리 둘은 거듭해서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계단 아래 빛 / 계단 위 어둠) 슬슬 일어날 시간이었다. 우리는 마지막 잔을 부탁했다. 사장님이 김재욱에게 메모장을 주고는 이름과 생년월일을 써달라고 하더니 두꺼운 책을 뒤적이며 사주를 봐주었다. 똑닮은 자식이 있다고 나오네요. 김재욱이 자식은 없다고 하자 사장님이 말했다. 만약 자식을 낳으면 똑닮은 자식이 나올 거예요… 내년에 내게 딱 맞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인연을 만난다고 나오네요. 이미 결혼을 했으면 어쩔 수 없고요… 그러더니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와우! 내년이죠? 43살부터 63살까지 20년 동안 모든 일이 잘 풀리는 시기네요. 영어로 골든 이어즈. 앞으로 20년 동안 전성기라는 말이에요, 무슨 일을 해도 잘 돼요. 축하합니다. 이렇게 좋은 사주를 보니 저도 좋네요. 다음은 내 차례였다. 사장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내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힌 메모장을 들여다보았다. 일종의 데자뷰가 느껴졌다. 결혼 전에 대출을 받으러 은행에 갔을 때 내 소득증명서를 받아본 은행 담당자의 표정이 딱 그랬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무슨 일인지 한동안 언성을 높이며 통화하던 사장님이 한층 더 심각해진 얼굴로 메모장을 들여다보다가 내게 물었다. 혹시 결혼하셨어요? 네, 결혼했어요. 아! 다행이네요. 이런 사주는 결혼 안 하면 큰일나는 사주거든요. 이유는 묻지 않았다. 어쩐지 겁이 나서 물을 수가 없었다… 사장님이 계속해서 말했다. 여태까지는 조금 일도 잘 안 풀리고 겨우겨우 살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망하거나 잘못되지는 않아요. 저를 믿으세요. 이건 진짜에요. 그리고 자식 복이 있어요. 나중에 자식 덕을 좀 볼 거예요. 내가 너무 사랑하고 나를 무척 사랑해주는 자식이 있어요, 라는 말을 듣는데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아이와 함께 지낸 후로 눈물이 많아졌다. 그리 좋은 사주는 아닌 모양이라고, 그래도 다행이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손님 술을 만들어준 사장님이 다시 책을 들춰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약간 노래방 보너스 타임 같은 느낌으로. “49살부터 69살까지 전성기네요! 정말 두 분 다 전성기가 아직 오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제가 이렇게 보는데 전성기가 지났으면 할 말도 없고 속상하거든요. 그런데 두 분은 이제 잘 될 일만 남았어요. 정말 축하합니다!” 나는 월트 화이트를 닮은 사장님에게 진심으로 몇 번이나 거듭해서 감사드렸다. 동시에 마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지나치게 영화적인 경험이 아닌가? 만약 내가 통 속의 뇌라면? 어떤 미친 홍상수가 끊임없이 자신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는 거라면…? 견우야,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영화 관객인가봐… (흑백 장면: <강변호텔>, 컬러 장면: < 엽기적인 그녀 >) 0-0: 집으로 그날에 대해서라면 약간의 이야기가 더 남아 있다. 하지만 이쯤에서 다음 날로 우리의 시계를 돌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아침. 우리는 광주극장에서 잡아준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아침밥을 먹고 헤어졌다. 나는 기차를 타러 광주송정역으로, 김재욱은 혼자 국군광주병원 옛터로. 광명역에서 내린 나는 택시를 타고 안산으로 갔다. 나의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밥을 남기면 미스터 온실가스가 나오잖아.” 핑크퐁 기후변화 동요에서 온실가스의 존재를 알게 된 나윤이가 평소와 달리 밥을 싹싹 비웠다. 그러더니 박수 치는 엄마 아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향해 밥그릇을 들어보였다. 의기양양하게, 마치 상패라도 보여주듯이… 이어 아내가 내가 없는 이틀 동안 있었던 일들을 들려줬다. 한번은 나윤이가 손을 뻗어 크게 움직이면서 “해가 이렇게 떠서 여기(가장 높은 곳) 오면 아침이고 이렇게 가면 저녁이야”라고 해서 아내가 이렇게 뜨면 바로 아침이고, 가장 높은 곳에 가면 점심이고, 이렇게 가면 저녁이라고 정정해주었다고 했다. 그러자 나윤이가 아니라고 짜증내서 한참 그걸로 이야기하다가 아내가 그래 알았어, 그럼 그렇게 생각해, 하고 넘어갔는데 한참 지나서 나윤이가 귓속말로 소곤소곤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해가 이렇게 뜨면 아침이야…”라고, 마치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하는 갈릴레오처럼… (미스터 온실가스) 한동안 [뽀롱뽀롱 뽀로로]에 푹 빠져 지내던 나윤이는 [아기상어]와 [핑크퐁], [꼬마버스 타요], [로보카 폴리], [바다나무], [꼬모], [따개비 루], [엉뚱발랄 콩순이] 등을 거쳐 요즘은 [캐치! 티니핑] 시리즈에 과몰입 중이다. 차에 탈 때마다 티니핑 노래를 틀어달라고 하고, 티니핑 인형을 안고 자고, 본인은 ‘사랑해 하츄핑’ 엄마는 ‘솔직해 끄레핑’ 아빠는 ‘다정해 꾸래핑’이라고 역할을 분배해 놀기도 하며, 티니핑 게임에서 나오는 카드를 모으고, 이빨을 닦거나 밥을 먹을 때면 아빠에게 티니핑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고,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가 티니핑 놀이동산을 선물해주지 않을까봐 엄마 아빠 말을 잘 들으려고 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정작 [캐치! 티니핑] 애니메이션은 단 한 편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몇 번인가 보여주려고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런 게 바로 본편은 보지 않고 설정과 2차만 판다는 건가. 한 번은 내가 물었다. 나윤아, 왜 티니핑 만화는 안 봐? 그러자 나윤이가 말했다. “나는 안 봐도 다 알아.” 실제로 나윤이는 [캐치! 티니핑]의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 노래나 스티커북이나 카드를 통해서 혹은 다른 친구들에게 들은 거 반, 스스로 지어낸 거 반. 어쩌면 지어낸 게 더 많을 수도 있고… 내가 프린세스 로미라고 하면 자꾸 “프린세스 로미가 아니라 롱이!”라고 고쳐주는 게 약간 짜증날 때도 있지만(‘로미’가 맞음), 안 봐도 다 안다는 나윤이의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거다. 나는 한때 (상업 영화라면) 한국 영화와 미국 영화와 유럽 영화를 가리지 않고 보던 사람이다. 물론 미국 영화를 제일 많이 보고 한국 영화도 적지 않게, 유럽 영화는 가물에 콩나듯 보긴 했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점점 더 영화를 보지 않게 되었고, 이 연재를 시작할 무렵에는 극장에는 전혀 가지 않고 1년 동안 보는 영화를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영화와 멀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도망친다고 해도 결코 도망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나. 그리고 영화. 영화는 어디에나 있다! 주말 밤, 아이를 재우고 아내와 함께 앉아 돌리는 채널 사이사이에. 어느새 씨네필로 가득해져버린 트위터 내 타임라인에. 책장에 꽂힌 책들 속에—특히 적지 않은 존재감을 자랑하는 영화책들에 가득. 내가 구독하지만 보지는 않는 스트리밍 서비스에.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영화를 보는 정지돈과의 대화와 또 다른 사람들과의 스몰 토크 속에. 정말이지 영화는 어디에나 있고, 나는 내 손가락에서도, 발가락으로도, 나를 둘러싸고 있고 끊임없이 자라나고 있는 영화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바람에 쓰여 있고,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 정말 그렇다. 다만 내가 그것들을 보지 않을 뿐이다. 질문. 내가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영화도 나를 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영화와 영화에 대한 담론, 플랫폼, 매체, 2차 컨텐츠, 기타 등등을 마구잡이로 섞어서 말하고 있다. 카세티가 말하는 ‘재배치’를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영화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가—미세먼지나 방사능이 그런 것처럼—세상에 흘러 넘쳐서 좋든 싫든 우리는 영화의 영향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한국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한국 영화처럼 생각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어떻게? 0-1: 잠언 영화가 꿈이라는 오래된 비유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더 이상 그것이 인간의 꿈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극장이 꾸는 꿈이다. 영화는 기계들이 꾸는 꿈이고, 사물들이 꾸는 꿈이다. 세계가 꾸는 꿈이고, 그것은 종종 세계와 구분되지 않는다. 0-2: 마지막 편지 친애하는 지돈씨에게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제 차례의 마지막 원고를 보냅니다. 2년 가까이 이어진 우리의 원고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스티븐 샤비로의 [탈인지], 이언 보고스트의 [에일리언 현상학], 프란체스코 카세티의 ‘영화의 재배치’ 같은 글들을 읽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인간의 꿈이 아니라 사물들이 꾸는 꿈이라는 아이디어는 그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물론 그건 어디로도 닿지 않은 채 공상에 더 가까운 짧은 질문의 형태로 남았을 뿐이지만요. 그때그때 떠올랐던 자잘한 아이디어를 하나의 원고로 만들기 위해 저는 쉼없이 자르고 붙이고 버리기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미끄러운 바닥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춤을 춰야 하는 불운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왜 이런 압박을 느낀 걸까요? 그건 아마도 ‘한국 영화’가 제 안에 있는 것들, 너무도 강렬하게 발현하고 있기에 외면할 수 없던 많은 것들을 불러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글을 쓴다는 것이 기호 속에 포착해 넣은 그 무언가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매번 글을 쓰고 나면 저의 정신은 그 문장들을 들여다보고 뒤집어보고 마치 새로운 양식인 것처럼 씹고 또 곱씹어보았습니다. 글을 써 나갈수록 수많은 질문들, 끝없이 속아나는 수수께끼들을 반추하게 되었고, 깨어 있는 삶과 잠들어 있는 삶, 저의 모든 삶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며칠 전 이 원고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도, 이제 원고를 보내드리는 것도 아마 이러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일 겁니다. 정처 없이 떠난 여정과도 같은 이 글에는 밝혀내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그리고 특별하기보다는 사소한 것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한국 영화’ 그리고 그곳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라는 존재에 다가갈 수 있었기를, 그 존재가 자신의 말을 할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 글을, 이 책을 당신에게 맡깁니다. K정연 0-3: 끝 “헤이 클로버, 캐치 티니핑 노래 틀어줘” 나윤이가 말하면 클로버는 “바이브에서 캐치, 티니핑 율동 동요 앨범을 재생할게요”라고 말하며(요즘 나윤이는 그 말을 따라 하는 데 재미 붙였다) 노래를 재생한다. 빛나는 마법을 보여줘 (캐치캐치!) 예쁜 마음을 모아 티니핑 타임 가끔 그건 내게 마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말이다. (구글 번역기에서 언어 설정을 잘못해서 발생한 오류, 그런데 이건 정말 오류일까?) *이 글에는 늘 그런 것처럼 다른 작품들의 인용이 있고, 대부분은 본문에 출처가 명시되어 있다. 가독성이나 여타 다른 효과를 의도하고 일부러 명기하지 않은 부분은 아래와 같다. 4-3 두번째 문단의 "갑자기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에서 해당 장의 마지막 "웃지 마시오!"까지의 내용은 토머스 베른하르트의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김현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모자])에서 아주 약간의 수정과 함께 인용했다. 0-0 중 “정말이지 영화는 어디에나 있다…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 부분은 Wet Wet Wet의 노래 ‘Love Is All Around’의 가사를 조금 수정해서 인용했다. 0-2 편지라는 형식과 몇 개의 문형, 그리고 문장들은 뤽 다르덴의 [인간의 일에 대하여](조은미 옮김, 미행 펴냄)의 서문에서 빌린 것이다. 특히 “왜 이런 압박을 느낀 걸까요?”에서 마지막 문장까지는 아주 약간의 수정과 함께 그대로 인용했다.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아, 명동! 일본 야쿠자 영화에 신주쿠가 있고 홍콩 누아르 영화에 침사추이가 있다면 한국 다찌마리 영화에는 명동이 있다. 고영남 의 < 명동44번지 >(1965)와 < 명동의 12 사나이 >(1971), 김효천 의 < 명동출신 >(1969)과 < 명동노신사 >(1970)와 < 명동사나이와 남포동사나이 >(1970), 김기덕 의 < 명동부르스 >(1970) 등 당대 다찌마리 영화의 대부분은 종로가 아닌 명동 중심이었다. <김두한> 혹은 < 장군의 아들 > 시리즈를 통해 종로가 건달들의 주 무대로 떠올랐을지 모르지만, 과거 다찌마리 영화의 본고장은 바로 홍콩의 밤거리만큼이나 별들이 소곤대던 금융과 패션의 중심지 명동이었던 것. 영상자료원에서 통계를 내주면 좋을 것 같다. <명동> 시리즈, <김두한> 시리즈, <왼손잡이> 시리즈, <용팔이> 시리즈 중 과연 어떤 제목이 가장 많은지... 당시 명동의 모습 아무튼 명동은 왠지 ‘명치정’이라 불러야 그 살벌한 다찌마리의 느낌이 살 것 같다. 일제 강점기 명치정(명동), 황금정(을지로), 본정(충무로) 등 일본인들이 자기 식대로 정(町)을 갖다 붙인 곳들이 주로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고, 조선인들은 종로와 동대문을 중심으로 한 경성 북쪽에 거주했다. 바로 그 명치정에 대한 허장강 의 간략한 소개로 시작하는(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 명동잔혹사 >는 변장호 , 최인현 , 임권택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다. 서로 다른 감독과 배우들이 시대별로 명동 뒷골목 주먹의 역사를 훑어 내려가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허장강만이 역사의 산증인처럼 세 편 모두 출연한다. 변장호 감독의 1화 <시끄러울 것잉께>는 일제 강점 말기 명동 뒷골목을 주름잡던 친일파 황두식( 황해 )과 감옥에서 막 나온 박민( 박노식 )의 대결을 그리고, 최인현 감독의 2화 <갖고 싶은 여자>는 암흑가 생활을 청산하려고 마음먹은 현( 최무룡 )이 숙( 윤정희 )과 결혼을 앞두고 보스의 계략에 빠져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뒤 복수를 꿈꾼다는 얘기다. 가장 힘주어 얘기하고 싶은 임권택 감독의 3화 <대결>은 상( 김희라 )이 자신을 돌봐준 보스( 장동휘 )의 복수를 실행에 옮기며 명동의 오랜 폭력의 역사를 마무리하는 작품이다. 변장호, 임권택 감독은 물론 당대 최고 액션 스타들이 총출동했는데, 당시 영화제작 실패로 힘들어하던 최인현 감독을 돕기 위해 무보수로 나선 것이라 한다. 그 우정에 감동했는지 영화의 포스터에는 대문짝만하게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국영화사상 전무후무한 ‘영화인전체’가 참가한 우정영화! 쇽크 초대작!” 1. 박노식 , 황해 / 2. 최무룡 , 윤정희 , 3. 장동휘 , 김희라 내용보다 참여하는 사람들의 일정이 더 중요한 이런 ‘품앗이’ 영화는 감독과 배우는 물론, 시나리오 작가까지 ‘시간 되는대로’ 급조해서 뭉치는 B급 기획영화의 일종이다. 더구나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 ‘성금을 모아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상업적일 수밖에 없다. 함께 참여한 변장호 , 임권택 감독 중 누군가 괜히 ‘예술’을 하려 했다면, 급전이 필요한 최인현 감독으로서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 것은 빤한 이치다. 게다가 이런 영화가 가능하려면 그 나라의 영화계가 잘 돌아가고 있어야 한다. 한가한 ‘듣보잡’ 영화인들이 뭉쳐봤자 관객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것이다. 잘 나가고 바쁜 사람들이 품앗이를 해야 돈벌이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 명동잔혹사 >는 당시 한국영화계의 전성기를 방증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 명동잔혹사 >와 비슷한 예, < 흑전사 > 포스터 가까운 예로 과거 1990년대 초반까지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한 홍콩영화계를 돌아볼 수 있다. 중국 수재민들을 돕기 위한 성금 모금을 목적으로 < 호문야연 >(1991)이 만들어졌고, 역시 홍콩감독협회에서 자선기금을 모으기 위해 < 쌍룡회 >(1992)를 만들었으며, < 동사서독 >(1994)의 제작이 지연되자 추가 제작비도 마련할 겸 그 배우들이 그대로 출연해 만들어진 B급 코미디 < 동성서취 >(1993)도 있었다. 이들 영화가 정말 변변한 시나리오도 없이 그저 배우들의 개인기에 기대 말 그대로 속전속결로 만들어진 영화라면, 아마도 < 명동잔혹사 >와 가장 비슷한 예가 될 만한 영화가 바로 나름의 선 굵은 서사를 갖췄던 < 흑전사 >(1987)일 것이다. 홍콩 무협영화의 전설 장철 감독의 말년 살림살이를 풍족하게 해줄 요량으로 후배 영화인들이 똘똘 뭉쳤던(오우삼이 연출을 맡고 강대위, 이수현, 주성치 등이 출연했다) 영화로, 오우삼 감독 특유의 거침없는 액션 연출을 엿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준비나 촬영 기간이 짧다보니 두서없는 아이디어들을 마구잡이로 뒤섞었는데, 그것이 뜻하지 않게 묘한 B급 쾌감을 불러일으켰던 것. 혹시나 오우삼 감독의 마음속에는 ‘내가 바쁜 시간 쪼개서 도와주는데, 뭐 좀 어설프다고 설마 나한테 항의라도 하겠어?’ 하는(그러니까 정작 자기 영화 연출할 때는 별로 가져보지 못했던) 여유로운 마음이 생기진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태도가 오히려 뒷걸음질치다 쥐 밟는 격으로 명장면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명동잔혹사>가 주는 의외의 쾌감도 그와 멀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임권택 의 다찌마리 영화는 주로 < 장군의 아들 > 3부작(1990-1992)으로 기억되지만, 그는 과거 꽤 많은 ‘주먹’ 영화를 만들었다. 실제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대표는 과거 그의 다찌마리 영화들에 깊이 매료돼 있었고, “요즘은 사내다운 사내가 없는 세상 아닙니까. 진짜 사내를 보여 줍시다”라며 <장군의 아들>을 제안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그 제안을 듣고 임권택 감독이 ‘왜 또 그런 영화를 만들라고 허는 거요’라며 버럭 화를 낸 일도 유명하다. 그는 같은 해 < 명동잔혹사 >에 참여하고 <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1972)를 만들며 그 세계를 완전히 떠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다찌마리 장르를 다루며 언제나 ‘손 씻고 떠나려는’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존 포드가 그러하듯 보통 한 장르의 달인이 되어가면서 그런 성찰적 주인공에 이끌리는 법인데, 그는 아예 처음부터 주먹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그렸다. '(허걱 형님...)' / '똘마니가 건방지게 법률공부냐' '형님, 쉽게 살겠어요.' / '재주가 있는 놈들은 다 빠져 나가란 말이야.' - <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 중에서 그런데 그런 지나친 강박이 B급 상상력으로까지 느껴지는 순간도 종종 있었다. ‘엽기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압권의 장면은 (당시로선) 그의 마지막 다찌마리 영화 <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에 있다. 모범수로 출소한 민수( 신성일) 는 대학 진학에 실패해 어머니 볼 면목이 없어 조직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인물이라(그러고 보면 2004년 작 < 하류인생 >에서 영화 속 조승우 가 모시는 선배 상필도 의대를 다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조직에 몸담은 인물이다), 부하들을 닥치는 대로 대학에 보내려 한다. 법대 출신 건달 준( 윤양하 )이 관리하는 나이트클럽에서 법률 책을 펴놓고 고시 공부를 하고 있자, 민수는 재주가 있으면 이 습한 곳에서 다 빠져 나가라고 독려한다. 문득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CF 카피가 떠올랐다. 나와바리를 뺏기고 수금을 못 해와도 좋으니 공부만 잘 하면 된다는 조폭 보스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감독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당시 만들기 싫은 다찌마리 영화를 억지로 만들게 하는 제작자를 ‘맥일려고’ 그런 장면을 넣은 것은 아닌가, 하는 몹쓸 생각까지 살짝 해봤다. 바꿔 말해 다찌마리 장르를 떠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너무나 간절했다. 이후 < 잡초 >(1973)와 < 족보 >(1978) 등을 만들며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게 그의 결심은 성공한 것이다. 그의 첫 번째 다찌마리 영화 < 욕망의 결산 >(1964)에서 밀수꾼들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았던 신성일이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에서는 새사람이 되어 출소하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작과 끝인가. 그런데 같은 해 만들어진 < 명동잔혹사 > 속 <대결>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가 또 다른 다찌마리 걸작 < 사나이 삼대 >(1969)와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1971)를 만들며 터득한 장인의 세공술이 만개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장현수 감독의 < 게임의 법칙 >(1994)처럼 복수를 끝낸 박노식 이 젊은 송재호 에 의해 죽음을 맞는 1화 <시끄러울 것잉께>도 흥미로웠지만, 역시 <대결>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과 놀라운 액션 연출은 앞의 두 작품을 압도한다. 당시 장동휘와 박노식을 잇는 다찌마리 장르의 ‘젊은 피’였던 김희라 는 라스트에 이르러 적들을 궤멸시키려고 작정한다. 장례식에 온갖 조폭 떨거지들이 모일 것을 알기에 다이너마이트까지 준비한다. 선글라스를 끼고 단신으로 장례식장을 찾아간 그의 카리스마가 진정으로 멋지다. 장동휘나 박노식이 보여준 어딘가 ‘구수한’ 멋과는 확실히 다른 세련된 느낌이다. 선글라스 카리스마 바로 여기서 오우삼의 < 흑전사 >가 떠올랐다. 임권택 은 돈을 벌어야 하는 영화의 기획의도에 맞게, 철저하게 관객들을 현혹하는 가공할 라스트 액션신을 마련한 것이다. 그는 평소 자신의 다찌마리 영화보다 더 나가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정작 자신의 단독 연출 장편영화에서는 보지 못한 액션들이 속출한다. 김희라 는 수적 열세에 몰려 총상을 입으면서도 거의 전성기 홍콩 누아르 영화의 주인공처럼 옆으로 몸을 날려 총을 쏘아댄다. 당시 이처럼 총기류를 액션영화에 사용한 한국영화가 있었나 싶다. 결국 다이너마이트까지 동원해 그야말로 적들을 싹쓸이하는데, 임권택 감독이 이후 총기류를 다루는 대규모 액션영화를 연출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 정도다. ‘외인묘지에서 주인공이 일당백으로 싸운다’는 설정만 두고 그는 그렇게 막무가내로 신나게 연출했을 것이다. 다이너마이트에 불 붙이고, 몸을 날려 총 쏘고 그런데 그 무대는 바로 (지금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합정동 외국인묘지다. 천주교 성지라 불리는 절두산순교성지 바로 옆인 그곳은 좋은 일 많이 하신 외국인 선교사들이 묻혀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그래서 뭔가 주인공의 종교적 속죄를 위해(바로 오우삼 영화의 성당 같은 그런!) 그런 곳을 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그는 그 엄청난 라스트신을 미련 없이 이 지긋지긋한 다찌마리 장르와의 성대한 작별인사라고 여겼을 것이다. “오늘의 명동에는 사랑과 낭만 우정이 있을 뿐, 지난날의 악몽은 가신지가 오래다. 명동이여 영광 있으라”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이제는 너무나 늦은 얘기겠지만, 진정으로 <대결>의 장편 확장판을 보고 싶다. / 글: 주성철 (씨네21 기자) PS.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의 ‘임권택 전작전’은 이례적으로 영화제 개막일보다 열흘 앞선 9월 23일(월)에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시작해 영화제 기간까지 계속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다찌마리 영화들도 당연히 포함돼 있으며, 9월 28일(토) 오후 4시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상영 후에는 오승욱 감독, 주성철 기자의 GV가 있습니다. 박노식 황해 최무룡 윤정희 김희라 장동휘 감독 변장호 , 최인현 , 임권택 개봉극장 아세아극장 개봉일 1972-06-04 관람인원 37,200(서울)명
고백. 내가 영화에 홀린 까닭은 단순하다. 영화가 활동사진이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직접적으로 말하고 싶다. 사진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간, 거기서 더 이상 사진이기를 중단하고 갑자기 새로운 시간이 시작하는 순간, 내 눈앞에 있는 모든 현실이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이 그 무언가의 힘 안으로 들어가 버린 다음 거기서 시침 뚝 떼고 다시 세상이 시작할 때, 거기서 나는 새로운 세상의 일부가 되어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거기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나는 몇 번이고 거기서, 라고 썼다. 거기서, 라는 지칭. 오랫동안 영화에서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들>을 보았을 때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거기서 내가 왜 그렇게 영화에 홀렸는지를 보았다. 똑같은 이유로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 스트롬볼리 >를 보았을 때 그걸 확인하게 되었다.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예술이 아니다. 그와 똑같은 의미로 꿈을 구성하는 예술이 아니다. 영화는 현실과 나 사이에 놓여진 간격의 세상을 창조하는 예술이다. 영화를 보는 나는 그 간격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영화를 향해서 질문을 던질 때 그것은 그 간격의 구성 방법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그때 영화는 둘 사이의 매개가 아니다. 그건 그 자체로 하나의 활동하는 형상을 만들어내는 시간이다. 우리는 영화를 담론 안에 살게 하면 안 된다. 이 기나긴 싸움. 담론과 형상. 물론 언어는 침식하듯이 다가와서 형상적인 것들을 잡아먹으면서 분절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언어가 그것을 자기의 체계 안으로 내재화시켜도 끝내 바깥에 머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중단된 이행. 그 사이의 침묵. 말하자면 침묵은 언어 바깥에 머물 것이다. 그때 나는 침묵에 시선을 돌릴 것이다. 침묵을 보는 일. 그게 영화를 지키려는 내가 할 일이다. 그 침묵을 통해서 비로소 영화가 언어에 의해서 상실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침묵의 가장자리에 놓여진 입구로서의 액션이라는 활동을 보게 된다. 이때 액션은 이미지이자 동선이며 시간이자 감각이고 무엇보다도 활동하는 형상이다. 아니, 차라리 나는 그걸 시네마틱 센스의 제 일 법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말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나는 이 법칙을 앞으로 좀 더 발전시킬 것이다. 영화적, 이라는 능력의 첫 번째 의미. 영화를 부정하려는 모든 이미지의 위협으로부터 이겨낼 수 있는 우리들의 투쟁을 위한 첫 번째 방어선. 여기엔 다소 긴 서문이 필요하다. 나는 지금 여기서 두 편의 영화를 오가게 될 것이다. 임권택 의 < 장군의 아들 >과 왕가위의 < 일대종사 >. 1990년과 2013년. 종로 우미관(優美館) 앞과 광저우의 불산(佛山, Foshan) 금루(金樓). 일본 제국주의. 김두한과 엽문. 그 둘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다. 대신 그 둘은 서로를 보충하고 있다. 그 둘이 서로에게 무언가가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도 없다, 내가 여기서 하려는 것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 놓여진 간격을 경유하여 이것을 저것의 자리에서 서로 각자 자기의 것으로 끌어당기려는 것, 바로 그 힘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거기에 놓인 유일한 교집합. 액션이라는 동선. 액션이라는 설계. 액션이라는 이미지. 액션을 둘러싼 시청각 기호들. 액션이라는 감각. 그리고 액션이라는 시네마토그래프. 활동하는 사진. 하지만 활동을 시작하자 사라져버린 사진. 서로 다른 카메라의 능력. 거기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가. 두 개의 활동하는 힘. 나는 둘 사이를 과도하게 도식적으로 묶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지금 액션만을 생각하고 있다. 이 위험한 생각. 내게 조언을 하고 싶을 것이다. 그건 스펙터클의 문제에요. 나는 지금 황홀, 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고 있다. 그 말을 파토스에 국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에서 액션은 동물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거기서 영화의 수학을 본다. 왜 그렇게 영화에서 액션은 기술(記述)하기 어려운 기술(技術)일까. 나는 여기서 설명하는 대신 단지 기술할 것이다. 그때 이 기술은 선과 속도, 점과 위치, 그리고 방향과 강도의 문제가 될 것이다. 한 가지 더. 이 둘을 놓고 아무것도 이것을 저것에로, 혹은 저것에서 이것으로 환원하지 않을 것이다. 액션은 접촉이라는 문제라는 걸 생각해주기 바란다. 나는 두 영화를 가져다 놓은 다음 조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접촉의 방법을 확인하고 거기서 교차하는 영화적 경험을 보고 싶다. 단순하게 말하자. 여기서는 하나의 장면을 절단한 다음 저기에 올리고 저기의 것을 끌어다가 여기에 연결시켜서 하나의 집처럼 만든 다음 두 개의 층을 번갈아 오가게 될 것이다. 각각의 층. 나는 서로의 층이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 둘 사이에서 마치 하나의 활동처럼 연결 지어져 있는 선을 따라가 볼 것이다. 왜 그럴 필요가 생겼는가. 하나를 본 다음 다른 하나가 즉각적으로 떠올랐다. 아니, 차라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요청하고 있었다. 나는 그 둘을 분리하는 대신 하나 안에서 출현하는 다른 하나를 겹쳐놓아 보기로 하였다. 말 그대로 배치. 그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을 설득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당신이 현재라는 시간을 바탕으로 이끌어낸 내 기억의 발견과 그 안에서 진행되는 미래의 배움을 공감해주었으면 좋겠다. 인상에 대한 믿음. 거기서 시작된 감각. 나는 순진한 시선으로 그 둘 사이를 따라가 볼 것이다. 그때 서로에게 부여하는 다양한 힘의 방향들, 서로 다른 간격의 문턱들, 편집의 층위들, 동선의 단층들을 둘러볼 것이다. 단지 둘러보기. 그 말을 당신이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두한. 엽문 물론 좀 더 친절한 유사성이 있긴 하다. 먼저 < 장군의 아들 >. 청계천 수표교 다리 밑에서 자란 김두한은 우연한 기회에 싸움에 말려들어 종로 주먹패들 안에 들어가게 된다. 종로패는 혼마치깡(지금의 충무로)를 점령한 일본인 하야시패와 서로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김두한은 차례로 아래서부터 자신과 맞서는 상대를 무릎 꿇게 만들면서 위로 올라간다. 종로패 우두머리 김기환은 김두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위기에 처한 학생패 신마적 엄동욱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 하야시와 그가 고용한 (김두한의 어린 시절의 인연이자 유일한 싸움 경쟁자인) 김동회를 물리친다. 엄동욱은 김두한에게 종로를 넘겨주면서 그를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그런 다음 2편으로 이어진다.) < 일대종사 >. 궁보삼은 북방 무술과 남방 무술이 서로 교류하는 장을 만들고 자신의 은퇴 이후에 ‘일대종사’라는 명예를 넘겨줄 무술가를 찾기 위해 불산 금루에서 대결의 연회를 연다. 여기에 영춘권을 익힌 엽문이 양광 국술계를 대표하여 차례로 아래서부터 물리치고 올라선다. 궁보삼의 제자 마삼도 그 자리를 탐내지만 궁보삼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마삼은 스승에게 반기를 들고 궁보삼은 대결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딸 궁이는 정혼을 파기하고 마삼과 대결하여 그룰 굴복시킨다. 엽문은 ‘일대종사’가 되지만 홍콩으로 건너가 쓸쓸한 말년을 보낸다. 모두가 그렇게 역사 속에서 잊혀져간다. 둘의 공통점,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 둘은 (영화 제목이 부여하는) 명예의 자리에 오른다. 그런 다음 엽문과 그 모든 인물들은 위에서 아래로 역사의 힘에 의해서 추락한다. 세 편의 이야기 끝에 김두한은 김동회의 부축을 받으면서 종로를 떠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둘 사이의 줄거리의 유사성을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단지 장면 안의 인물들의 동선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칭하는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서만 이 줄거리를 이용하기 바란다. 임권택 그리고 약간의 사연. < 장군의 아들 >은 임권택 이 이어나가던 창작의 선 안에서 일종의 만곡처럼 보인다. 1972년 <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를 만들고 난 다음 임권택은 두 번 다시 다찌마와리 영화를 연출하지 않았다. 나는 이상하리만큼 이 영화의 제목이 그 자신의 선언처럼 읽힌다. 그런 다음 < 잡초 >를 만들었다. 새마을영화, 전쟁영화, 반공영화를 만들었지만 다찌마와리에 대해서는 마치 돌아보기도 싫다는 듯이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이 장르의 영화가 몰락한 것도 아니다. 그런 다음 < 족보 >를 만들었다. 차례로 자기의 탐구를 이어갔다. < 만다라 >는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 길소뜸 >과 < 티켓 >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이어지면서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새로운 미학적 형식의 기준이 세워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건과 인물, 형식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 씨받이 >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 개벽 >. 천도교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전기. 더 높이 더 멀리 뛰면서 이 땅의 개벽을 소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다음 갑자기 <장군의 아들>을 찍었다. 장르영화에로의 복귀. 물론 누군가는 <개벽>에서 <장군의 아들>로 이어지는 인물의 전기에 대해서 설명할지 모른다. 하나의 선. 나는 가능한 (모델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군의 아들>은 초상화와 같은 탐구가 없다. 여기서 김두한은 캐리커처처럼 단순해졌고, 종종 배경은 평면적이거나 흐릿해져서 공간적인 설정이 아니라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나는 이 영화에서 그런 단순함을 사랑한다. 하지만 거기서 인물의 가시성이라는 문제를 생각한다. 가시성의 형상. 가시성의 장소. 가시성의 방법. 방법의 배열. 인물에게 비치는 빛과 그림자. 불투명성과 투명성 사이의 긴장. 보이는 것과 볼 수 없는 것 사이의 분배. 우리는 영화에서 그려내는 초상화가 가시성의 체계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임권택은 좀 더 직접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당시 < 아제아제 바라아제 > 이후 < 하류인생 >까지 영화를 제작했던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이 나한테 자꾸만 한번 하자는 거예요. 처음엔 화를 냈다니까. 그런데 자꾸만 마음속 한 구석에서 이걸 해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게 보고 싶어진 거지요” <장군의 아들>은 임권택 자신에게 (그의 첫 번째 다찌마와리 영화인) 1964년 < 욕망의 결산 >에서 1972년 <떠나야 할 자와 돌아와야 할 자>에 이르는 (<잡초> 이전까지의) 영화와 다시 대면하는 영화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여기서 배수의 진을 쳤다. “압구정 거리를 걸어가다 보면 참 사내답지 않은 아이들이 지천인 거예요. 그 아이들을 데리고 1930년대 경성 거리에서 살아간 사내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거죠” <장군의 아들>에서 ‘협객’으로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처음 영화에 출연하는 신인들이었다. 남자 배우도 그렇고 여자배우도 그렇다. 한 번도 연기 경험이 없는 배우들. 그 ‘아이’들은 종종 발성이 되지 않았으며, 연기의 동선을 알지 못했고, 씬의 연결에 대해서 현장에 와서 처음 구경했다. “내가 영화를 찍다 중간에 겁이 덜컥 나보기는 처음이에요. 어쩌려고 내가 이런 건가, 라는 순간을 매번 촬영 때마다 마주친 거요. 그래도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활기라는 게 있잖아요, 내가 그걸 놓치면 안 된다, 라는 심정으로 찍어나간 거죠” (아직은 시인이었던 영화감독) 유하 가 양귀자 의 소설 제목 <바람 부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를 패러디해서 <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를 막 발표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 시인을 문학과 지성사는 104번째 시집으로 초대하였다. 압구정 거리와 경성 종로통. 두 시대의 ‘모던 뽀이’들. 왕가위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왕가위는 < 화양연화 >와 < 2046 >을 만들고 난 다음 잠시 멈추었다. 물론 캘리포니아에 잠시 다녀온 짧은 바캉스와도 같은 <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가 추신처럼 그 뒤에 달려있다. 나는 <화양연화>의 월드 프리미어 시사를 2000년 9월 18일 오후 7시에 홍콩에서 보았다. (그해 5월 칸 영화제에서는 워크 프린트가 상영되었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만찬회장으로 가는 차를 함께 타고 갔다. 왕가위는 이제야 끝났다는 약간 지친 표정으로, 다소 상기된 얼굴로, 언제나처럼 호화찬란한 홍콩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화양연화>를 지금 막 본 다음이었기 때문에 출렁이는 내 마음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이 영화는 이제까지 당신이 만든 모든 영화들보다 더 훌륭합니다. 왕가위는 선글라스는 벗으면서 고마워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문득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이제는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에요. 이 수상한 첨언.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냥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말처럼 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 말은 수수께끼처럼 내게 머물렀다. 그때는 그 말을 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왕가위의 타이밍. 기다리고 있는 배우들. 양조위, 장만옥. 그의 스텝들, 장숙평. 박수소리. 예술적 승리. 술과 요리들. 나는 그 말을 곧 잊었다. 그날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그리고 한참 뒤에, 그러니까 5년이 지난 다음, <2046>을 보다가 문득 극장에서 그 말을 떠올렸다. 집(home)은 그가 살고 있는 집(house)이 아니라 그의 고향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왕가위를 처음 만났을 때 질문했다. 홍콩은 당신에게 어떤 곳인가요. 왕가위는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홍콩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상하이에서 태어났고 단지 홍콩에는 아버지를 따라와서 잠시 머물고 있는 것뿐입니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왕가위는 다섯 살에 상하이를 떠나 홍콩에 왔다. 다섯 살의 어린 아이. 그 아이는 홍콩에서 살면서 그 후로 한 번도 여기가 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 떠돌고 있는 주인공들. 발 없는 새. (< 아비정전 >)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무사들. (< 동사서독 >) 홍콩에서 캘리포니아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 중경삼림 >) 불면증에 시달리는 킬러. 홍콩의 밤. (< 타락천사 >) 세상 끝에 가보고 싶어요. (< 해피 투게더 >) 앙코르와트. 내게 만일 표가 두 장 있다면 함께 떠나주실래요. (<화양연화>, 혹은 <2046>) 그리고 이번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다시 한 번 홍콩을 반복한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1997년을 지난 지 10년도 넘게 지났다. 1936년 광저우 불산. 왕가위는 (이소룡의 스승으로 알려진) 엽문의 전기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오랜 동안 < 상하이에서 온 여인 >을 찍으려던 계획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엽문은 북방무술과 남방무술의 교차로인 불산에서 ‘일대종사’가 되지만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 공산당의 전쟁 중에 홍콩으로 거취를 옮긴다. 거기서 어린 이소룡에게 영춘권을 전수하지만 영화는 그 전에 끝난다. < 일대종사 >는 이제까지 홍콩을 떠나거나 떠나지 못하는 이야기를 만들었던 왕가위의 영화와 반대의 지리적 방향으로 진행된다. 혹은 역사적 수순을 따른다. 왕가위는 < 일대종사 >를 만들겠다고 결심하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중국 전역에 흩어져있는 무술 명가의 일대종사들을 차례로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무술을 ‘감상’하고, 그들의 안무를 촬영하고, 그런 다음 조언을 구했다. “<일대종사>는 내게 중국의 정신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중국에서는 과거의 유산이 많이 사라졌거나 아니면 바뀌어버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치도 버리거나 부서져버렸습니다. 아직 유산을 담고 있는 무언가를 잡아야만 했습니다. 나는 무술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정신의 방법을 알고 있는 스승(Master, 一代宗師)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왕가위는 마오쩌둥의 노선에 대한 비판을 조심스럽게 피하고 있다. 해방 이후 유교전통과의 투쟁. 195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의 분서갱유. 문화혁명과 조반유리(造反有理). 일부 수정주의 노선에 따라 자본주의 시장을 표면적으로 개방했지만 여기는 지금 중국 사회주의 한복판이다. 나는 좀 더 < 일대종사 >의 배경을 설명하고 싶다. <일대종사>는 왕가위의 첫 번째 무술영화이다. 이 영화는 두 번째 무협영화가 아니다. 물론 왕가위는 자신만의 무협영화를 만들었다. < 동사서독 >. 명백히 호금전의 그림자 아래 놓인 영화, 후 샤오시엔을 감탄시킨 사막의 풍경화. 서극은 <동사서독>을 보고 난 다음 탄식을 했다. 나는 이제 더 빨리 찍을 수 밖에 없어요, 왕가위는 가장 느린 무협영화를 만들었어요. 명백히 서극은 < 칼 >을 찍으면서 왕가위를 의식하고 있다. (게다가 이 영화의 미술은 장숙평이다) 장르 안에서의 경쟁. 말하자면 장르라는 경기장. <일대종사>를 만들었을 때 왕가위는 무술 영화의 전통 안에 처음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이건 그가 해본 적이 없는 장르이다. 물론 왕가위는 재치 있게 대답했다. “<일대종사>는 쿵푸영화가 아니에요. 이 영화는 쿵푸에 관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같은 말이다. 그때 왕가위는 이번에는 장철의 영화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장철은 < 복수 >를 전환점으로 해서 무협영화에서 무술영화에로 옮겨갔다. 새로운 동작들. 검(劍)은 권(拳)이 되었고, 피아노 줄은 수명을 다했으며, 트램펄린과 편집의 이음새는 좀 더 정교해졌고, 대결의 거리는 좁아졌으며, 더 많은 피를 흘리는 대신 뼈가 부러지는 사운드가 가세하였으며, 몸은 새로운 형태의 도면이 되었다. 피와 살. 신경조직들. 그때 새로이 몸에 자리한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시지각의 관계 안에서 몸이 불러일으키는 반응. 때로 타격을 받아 산산이 부서져버리는 몸. 그 안에서 흩어져버리는 생명. 각자의 고유한 몸. 살과 고기. 액션의 대상으로서의 육체라는 물(物). 쇼 브라더스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골든 하베스트는 홍콩 액션영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결정적인 새로운 스타 이소룡, 그의 죽음 ‘이후’ 성룡. 비극에서 희극에로. 정창화 (가운데) 나는 여기서 희미하게, 거의 지워질 듯 하면서도, 그 사이에서 가까스로 그 둘 사이를 연결하는 이름을 호명하고 싶다. 정창화 . 임권택 에게는 (그 스스로) 영화를 가르쳐준 스승이라고 부르는 사람. 그는 정창화 이외의 감독에게서 연출부를 한 적이 없다. “내가 만일 < 장군의 아들 >에서 해낸 액션 장면들이 인상적인 것이라면 대부분은 정창화 감독의 연출에서 가져온 경험들인 거예요” 정창화는 1968년 홍콩 쇼 브라더스에 가서 액션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 천면마녀 >는 홍콩에서 만든 다음 서울에서 개봉하였다. (그리고 유럽에 개봉하였다) 나는 그 영화를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보았다. < 아랑곡의 혈투 >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 철인(天下第一拳) >을 연출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영화는 미국에 <5 fingers of Death>로 개봉하여 주말 박스 오피스 1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타란티노는 2002년 영국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 투표에서 자신의 10 베스트 영화중의 한 편으로 선정하였으며,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이 사운드트랙을 < 킬빌 >에 인용하였다. 정창화가 홍콩 쇼 브라더스에서 연출할 때 장철은 같은 스튜디오의 경쟁자였다. 그리고 오우삼은 장철의 연출부였다. 물론 오우삼은 정창화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걸 오우삼이 < 첩혈가두 >를 찍을 때 물어보았다. “정창화의 연출은 하나의 전통이 되었지요. 그 전에는 드라마와 액션 장면을 서로 다른 것으로 여겼어요. 하지만 정창화는 드라마 없는 액션은 감정이 없다고 생각 했어요” 정창화의 시간은 짧았다. 그는 한국에 돌아왔고 1981년 홍콩 뉴 웨이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오우삼은 파토스가 충만한 액션 활극을 연출했다. 그게 전적으로 정창화의 영향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종종 주윤발의 코트자락, 적룡의 표정, 장국영의 노래 부르는 것만 같은 제스처들에서 그림자가 묻어난다. 임영동은 두 번째 새로운 물결이 되었다. 임영동은 오우삼의 전통에 저항했다. “난 장르 안의 리얼리즘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왕가위는 그를 위해서 시나리오를 썼다. 약간 소설처럼 쓰고 싶다. 그는 저 멀리 잠시 동안 머문 다음 떠나간 한국인을 쳐다보았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정창화의 영화들은 홍콩영화의 고전이 되었다. 그때 정창화는 무협에서 무술영화에로 이행하는 (혹은 접합하는?) 시기에 잠시 걸쳐 서 있었다. 나는 둘 사이에 있을 지도 모르는 영화적 진동판을 건드려보고 싶다. 영화라는 커뮤니티. 영화사라는 시간적인 울림. 배움의 전이. 경험의 공집합. 방법의 정식화. 자기의 유한 세계 안에서조차 자신이 포함된 세계의 법칙들에 따라 움직이는 방법을 완전하게 무시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하지만 이건 위험한 가설이다. 여기서 왕가위 영화의 뿌리는 1960년대 쇼브라더스 무협영화가 아니라 1950년대 광동 오페라양식의 멜로드라마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그는 몇 차례이고 광동 오페라에 대한 자신의 매혹을 반복해서 고백했다. 그리고 그 고백을 < 동사서독 >, < 화양연화 >, < 2046 >, 여기에 그 어떤 영화보다도 < 일대종사 >에서 메아리처럼 듣는다. 일그러진 균형. 계속해서 사라지는 등장인물들. 군무와 아리아. 사람들은 이 영화를 대부분 오해했다. 경극과 오페라의 기기묘묘한 착종. 이 무대로부터 영향을 받은 1950년대 홍콩영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들은 (이 장르의 호사가들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다음 왕가위는 1950년대 할리우드영화와 1960년대 유럽 영화들에 이끌렸다. 그는 십대 소년시절을 영화관에서 보냈다. 왕가위는 그만큼 임권택과 멀리 있다. 왕가위가 그의 첫 번째 영화 < 열혈남아 >를 만들었을 때 임권택은 < 아제아제 바라아제 >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 아비정전 >을 촬영하고 있을 때 <장군의 아들>이 제작되었다. 나는 좀 더 밀고 나가고 싶다. 이미 말했지만 강제로 임권택 과 왕가위의 선을 연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둘을 하나로 묶는 것은 내게 방법에 관한 전략의 문제이다. 영화에서 액션은 결국 과정을 보는 기술이다. 그때 우리는 방법의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 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그것을 보는 지식에 대한 일련의 질문을 위치지어야 한다. 액션의 성질, 동선의 출발. 이 선이 연결하는 변주들. 그 사이의 법칙과 목표 사이의 긴장. 물론 우리는 상황을 놓치면 안 된다. 나는 액션의 시퀀스란 결국 집합의 문제틀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움직이는가. 거기서 집합은 어떻게 분산되고 다시 하나로 모이는가. 누가 장소를 채우는가. 그 장소를 어떻게 채우는가. 동시적인 질문. 말하자면 영화적 순간들의 활용이라는 문제와 우리는 여기서 정면으로 대면하게 된다. 이때 왜 그 둘이 필요해졌는가. 나는 여기서 임권택을 임권택이라는 집합으로부터 빼내오고 싶다. 우리는 자칫하면 잘못된 운동의 가능성에로 휘말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세 편의 < 장군의 아들 >은 이 영화들을 둘러싼 < 개벽 >과 < 서편제 >로부터도 이상한 방식으로 떨어져 나와 있으며, 동시에 1960년대 임권택의 다찌마와리로부터도 달아나있다. 그러므로 나는 같은 방법을 따르고 싶은 것이다. 차이와 반복은 여기서 우선적으로 피해야 할 방법이다. <장군의 아들>을 보면서 이 주변을 둘러싼 영화들과 연결 지어 동일하게 다루는 관점을 먼저 피한 다음 모든 것이 뒤에 남겨진 다른 모든 영화들로부터 만들어진 연결과의 차이로부터도 나와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바르뜨의 말을 흉내 내서 말하자면) 나에게는 가시적인 것의 가시성과 가시성의 가시적인 것 사이에서 <장군의 아들>에서 내가 본 것을 < 일대종사 >가 (마치) 설명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결국 보는 것 속에 위치 지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Ceci n´est pas une pipe 내게 약간의 유머를 허락해주었으면 좋겠다. 말하자면 르네 마그리뜨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 파이프라는 형상. 그때 그 곁에 애매하게 달려있는 언표. 그 설명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푸코는 간명하게 대답했다. 이제부터 상사(相似)는 자신에게로 되돌아갑니다. 자신으로부터 출발해 펼쳐졌다가 다시 자신 위로 접히는 것입니다. 나는 같은 방법으로 설명을 흉내 내고 싶다. 그 둘을 동일한 운동 안에 집어넣은 다음 그 둘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서로가 동시에 활동하는 영화적 법칙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그때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형상에 대한 언표의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다. 말하자면 형상으로서의 언표. 언표로서의 형상. 그때 여기서는 어느 쪽에도 우선권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핵심은 둘 사이의 성격과 형질, 그리고 동선과 과정이 다르더라도 그 안에서 법칙은 언제나 영화라는 과정 안에서의 결정이 행사하는 방식에서 출발하고 그런 다음 귀결된다는 것이다. 나는 결정을 보고 싶은 것이다. 임권택 의 결정. 왕가위의 결정. 대부분 영화에서 그 결정은 과정 안에 신비롭게 숨어있다. 나는 그걸 끌어내서 가시성의 할 수 있는 한 가장 순수한 이것임, 을 설명할 수 있는 긍정의 아니다, 에로 데려가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액션의 방법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방법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보려는 것이다. 첫 번째 활동. < 장군의 아들 >에서 김두한의 첫 번째 대결은 영화가 시작한 다음 24분 55초, 그러니까 영화가 시작하고 4분의 1이 거의 다 되었을 때 처음 나온다. 이 씬 앞에 김두한이 종로패에 들어가는 계기가 된 싸움, 신마적 엄동욱과 구마적의 우미관 앞에서의 대결, 그리고 전라도에서 올라온 망치와 김두한의 싸움이 있지만 여기까지는 싸움의 규칙, 인물들 사이의 관계, 지리적인 이동의 체계, 종로와 충무로, 무대로서의 공간의 소개를 위한 것이며 사실상 <장군의 아들>에서 액션 장면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씬은 양적으로 매우 짧다. 고작해야 1분이고 그리고 조금 넘은 다음 몇 초 정도를 더한다. <장군의 아들>에서 액션 씬들은 예외 없이 모두 짧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고 나면 내내 액션 장면들만을 보고 나온 기분이 든다. “액션은 결국 분위기인 거예요, 거기다가 몰아넣기까지가 힘든 거요, 그러고 나면 그다음에는 빨리 거기서 빠져나올 궁리를 해야만 되요. 이게 길어지기 시작하면 허점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제 억지를 부리게 되는 건데, 싸움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기예를 익힌 선수들의 시합을 보아도 정말 잘하는 게 무언지는 그 세계를 아는 사람들의 눈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거기서 내가 무엇을 찍으려는 건지를 먼저 정한 다음 그걸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찾아야 되는 거예요.” 이 장면은 김두한이 종로패에 막 들어가고 난 다음 거리에서 조선 학생 깡패들과 일본학생 깡패들의 싸움에 휘말려 드는 대목이다. 약간의 설명. 1930년대 경성에서는 조선학생들과 일본학생들이 종종 싸움이 붙었으며, 이 싸움은 민족주의적 파토스가 거기 함께 담겨있어서, 일종의 자존심 대결 같은 양상을 보였다. 물론 이 설명은 역사적인 배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후일 이 시대를 다시 재각색하면서 만들어진 일종의 신화일 것이다. 홍성유의 원작소설에서 김두한과 그의 종로 깡패들을 협객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은 싸움에서도 예와 의를 지키면서 승패를 겨루었다. 그건 일본 혼마치깡패도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현실 세계 안에 공존하는 일종의 상상적인 또 하나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장르의 규칙이라는 이름 아래 보호받는 또 하나의 세계. 김두한은 여기서 현실세계로부터 장르 안의 세계 질서 안으로 옮겨간다. “거 주먹세계, 거 별거 아니더라구” S#_1 S#_2 S#_3 S#_4 S#_5 S#_6 S#_7 S#_8 S#_9 S#_10 S#_11 S#_12 S#_13 S#_14 S#_15 상황의 설명. 풍미당 빵집에서 지금 막 큰 형님으로부터 가죽 잠바를 물려 입고 배부르게 빵을 먹고 있는 김두한을 청계천 수표교 다리 밑 움막에서 함께 지내는 친구 진영이 찾아온다. 진영에게 우쭐해진 김두한은 그에게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주면서 책을 사보라고 한 다음 자기는 돈이 필요 없는 자리에 갔다고 큰소리친다. “거 주먹세계, 거 별거 아니더라구”라고 하자 진영은 “너 그러다 종로 휘어잡겠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그 말에 문득 김두한은 자세를 고치면서 “잡지, 잡고 말고”라고 대답한다. 말하자면 종로패의 우두머리를 위한 첫 걸음. 이제 그 자리를 향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상승이라는 선. 당신은 이 방향을 유심히 보아야 한다. 물론 선과 함께 활동을 시작하는 드라마의 운동. 김두한은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혹은 운명이 그를 그 자리에로 이끈다. 마치 그 대답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두 개의 대답의 차이) 그때 종로패 한명이 뛰어 들어와 김두한에게 다급하게 말한다. “두한이 형, 일본 학생하고 조선 학생하고 한판 붙었는데, 그 왜 있잖아, 오찌아이라는 깡패 두목 그 놈한테 걸린 모양이야”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선. 이때 풍미당 바깥으로 나가면서 김두한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간다. 동선이라는 문제. ( S#_1) 두 가지 설명. 이 대결에 김두한이 가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데도 김두한이 달려간다. 효과의 이유. 김두한은 의협심이 있으며, 게다가 일본인에게 조선인이 맞는 상황을 참지 않는다. 말하자면 장군의 아들. 아버지 김좌진의 피. 하지만 이 효과는 심리적으로 김두한을 다르게 설명할 수도 있게 허락한다. 김두한은 즉흥적이며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 미처 계산하지 못한다. 종종 김두한이 (전체 안에서) 수동적인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능동성에 이끌리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행동의 결정은 시종일관 반복된다. 그리고 이 결정이 종종 사건을 만들어낸다. 또 하나의 설명. 김두한은 운명에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답의 자리에서 자신의 말을 증명해야 한다. < 장군의 아들 >은 먼저 말한 다음 거기에 대해서 사건이 다가오고 그것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때 마치 김두한은 자기의 운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중적인 반어법. 김두한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항상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기가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때 그래도 김두한이 하는 것은 언제나 대결이다. 우리는 이 대결의 성격을 설명하지 않으면, 임권택 의 말을 빌리면, 싸움의 분위기 안으로 들어서지 못할 것이다. 항상 이미 거기에 있었던 대결. 그 자리에 불려가는 김두한. 우리는 이 대결이 일종의 소급효과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운명의 벡터. 김두한이 달려간 장소는 좁은 골목 안이다. ( S#_2) 김두한과 그를 부르러 온 종로패 사내를 뒤따라 카메라는 그 안으로 약간 흥분한 듯이 함께 안으로 흔들리며 직진한다. 이때 보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그 흔들림의 신호와 음악의 청각적 기호이다. 이 영화는 대부분 카메라를 레일 위에 올려놓았거나 안전하게 크레인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마치 들고 찍은 것처럼 움직일 때 그 흔들림이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감정적인 신호처럼 가시화된다. 물론 이 장면은 장소의 힘이 불러일으키는 구도의 긴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두 개의 사선으로 이어진 깊이 안으로 우리를 이끌 때 여기에는 두 개의 운동이 있다. 하나는 카메라가 김두한과 종로패 사내와 함께 우리를 이끌고 들어가는 전진의 인력이지만 다른 하나는 사선의 깊이 안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가상선의 교차점에 서 있는 오찌아이의 존재감이다. 이 골목에는 오로지 직선밖에 없다. 그리고 그 선은 양쪽으로 교차하듯이 가운데를 향하고 있다. 거기서 김두한은 자기의 첫 번째 대결을 치러야 한다. 이때 이 골목이 단지 수평 직선이 아니라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이어지는 상승의 방향으로 저 뒤쪽 배경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유심히 보아야 한다. 여기서부터 올라서야 하는 계단. 그 첫 번째 대결의 장소. 일종의 장면을 설정하는 쇼트(master shot). 김두한의 자리에서 멀리 있던 카메라가 단숨에 대결 장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임권택은 오찌아이에게 얻어맞는 조선학생이 땅바닥에 뒹구는 모습으로 바로 뛰어 들어간다. ( S#_3) 이 쇼트는 앞의 쇼트에서 이어져야 할 두 개의 다이어그램에서 김두한을 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시선의 교차점을 잘라낸 것이다. 시선의 교환 사이의 데쿠파주. 김두한은 구경꾼의 자리에 있으며 오찌아이를 바라보고 있지만 오찌아이가 그를 바라보는 것(reverse_shot)은 아니다. 하지만 이 시선을 성립시키지 않으면 그 둘을 대결의 관계로 이어붙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 둘 사이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두 개의 집합 중에 바깥의 블록으로부터 내부의 블록 안으로 시선의 고정점을 들여보내야 한다. 오찌아이를 찍은 다음 장면( S#_4)에서 그는 손가락을 들고 화면 정면을 향하여 “다음 놈은 나와라”라고 소리친다. 물론 그 손가락은 조선 학생들을 향한 것이지만 ( S#_5) 앞의 장면과 마주보는(reverse_shot) 다음 쇼트의 9명의 인물 중 가장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은 김두한이다. 이때 임권택(과 정일성 )은 오찌아이와 김두한 사이를 오가면서 두 인물의 크기를 거의 동일하게 맞춰놓았다. 이 장면은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9명을 세워 놓으면서 아무도 인물들 사이에서 겹쳐 세워진 사람이 없다. 그래서 이 9명은 좁은 골목 안에서 반대로 수평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느낌을 준다. 여기에 김두한을 제외한 모든 인물에게 학생복을 입혔기 때문에 짧은 쇼트지만 시선은 김두한을 꼭짓점으로 하여 옆으로 벌어져 보인다. 임권택은 골목의 사선과 면 사이에 인물을 세워놓을 때 반복적으로 수평 구도로 늘여놓는다. 패배감에 조선학생들이 등을 돌려 돌아가려 할 때 김두한은 그들과 함께 등을 돌리면서 슬그머니 가죽 잠바를 벗는다. 등 뒤에서 오찌아이가 “이제 없는가?” 라고 물어볼 때 ( S#_6) 김두한이 돌아서면서 “여기 또 있다”라고 대답한다. 이 쇼트는 하나의 행동을 둘로 나눈 것이지만(double_action) 동시에 방향을 바꾸면서 상대방에로 시선을 돌리는 매우 간단한 방법이다. 이때 임권택은 동시에 9명 속에 섞여있었던 김두한을 그들로부터 떼어내는 효과를 동시에 활용하고 있다. 김두한이라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때 이 골목은 너무 좁아서 45도로 비틀기에 적절한 위치가 없다. 어쩌면 벽면의 붉은 색 벽돌은 이 골목의 연속성으로부터 인물의 행동을 고립시킬 수도 있다. 임권택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돌아보는 김두한과 그 시선을 따라가면서 벽면과 사선으로 평행이 되도록 세워 놓았다. 김두한의 대답이 오찌아이가 돌아보는 쇼트(reverse_shot)를 성립시킨다. ( S#_7) 구경꾼들이 배경으로 수평으로 늘어서 있고, 돌아가려는 일본학생들이 멈칫 할 때 오찌아이만이 마치 조건반사처럼 정확하게 돌아본다. 그들 사이에서 최고의 싸움꾼. 김두한과 겨뤄야 할 첫 번째 상대. 그가 보여주는 예민한 신경. 그 힘을 다시 이쪽으로 옮겨오기 위해서 거기에 먼저 힘을 실어야 한다. 오찌아이는 일본학생들 사이를 걸어 나온다. 정면으로 직진하는 오찌아이를 바라보며 그 앞으로 나서는 김두한의 얼굴을 가까이 다가갈 때(close_up) 거기서 보는 것은 얼굴이 아니라 표정 속의 눈이다. 마치 상대방을 반사하는 것만 같은 눈 안의 빛. 얼굴 위에 덧 쓰여진 표정. 그 위에 상대방을 향하는 시선, 그 시선의 방향을 따라 김두한이 화면 바깥으로 이동할 때(out_of_frame) 그는 마침내 오찌아이의 프레임 안으로(into_frame) 들어서는 것이다. 이제 두 개의 다른 블록이 하나가 된다. 혹은 여기서 저 안으로 이동한다. ( S#_8) 이때 김두한과 오찌아이는 먼저 서로를 마주보면서 상대방을 가늠한다. 물론 김두한이 블록 안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먼저 김두한의 등 뒤에서 오찌아이를 바라보고 ( S#_9) 그런 다음 (reverse_shot) 오찌아이의 등 뒤에서 김두한을 쳐다본다. ( S#_10) 여기서 오찌아이가 김두한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할 때 그를 마주보는 김두한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당연한 동선의 일치이다. 탐색전을 벌이던 두 사람을 동일하게 한 프레임으로 잡을 때 갑자기 카메라가 그들의 머리 위로 올라간 다음 수직으로 내려다본다. ( S#_11) 그들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의상밖에 없다. 이 프레임의 구도는 오찌아이를 왼쪽에 세우고 김두한을 오른쪽에 세운 다음 골목을 마치 경사 앵글처럼 비스듬하게 세운다. 이 구도가 이들의 대결을 역동적으로 만든다고 설명하는 것은 상투적인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이 쇼트는 독립적인 프레임이 아니라 리듬 안에 놓여진 것이다. 김두한과 오찌아이가 서로를 마주볼 때 이 좁은 골목에서조차 오찌아아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내려왔고( S#_9) 김두한은 아래서 위로 오찌아이를 올려다보면서 올라간다. ( S#_10) 결합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위와 아래. 이 높낮이를 만들면서 동시에 이 균형관계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카메라는 구태여 왼쪽과 오른쪽으로 조금씩 이동해서 중앙 소실점의 성립을 피하고 있다. 그런 다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때 수직으로 내려다보이면서 동시에 경사진 구도에서 오찌아이가 왼쪽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움직일 때 김두한은 오른쪽 아래서 올려다보는 것처럼 움직인다. 물론 이 시선은 영화를 보는 쪽에서만 성립되는 높낮이이다. 그러나 임권택은 두 인물을 각자의 동선을 따라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동시에 이 둘을 하나로 만드는 블록 안에서 높이의 배치를 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 둘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S#_12) 갑자기 구경꾼들 바깥으로까지 빠져나간 다음(long_shot)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좀 더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내리 누르듯이, 찍은 구도에서 오찌아이가 저 멀리 보이고 그 앞에 금방이라도 달려들 자세를 취하는 김두한의 위치는 잘못된 배치이다. 영화 문법적으로 이 두 사람의 배치는 김두한과 오찌아이의 상상선이 맞지 않는다. 약간 에매하지만 둘 중의 하나가 맞지 않거나 혹은 위치가 바뀌었다. 하지만 수직으로 내려다본 카메라의 위치가 완전히 이 시선 바깥으로 나갔기 때문에 마치 이 쇼트는( S#_11) 일종의 인서트처럼 쇼트 사이를 그냥 건너간다. 물론 이 쇼트 자체는 인서트가 아니다. 간단한 설명. 이 쇼트를 삭제하면 두 개의 쇼트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 S#10_ S#_12) 여기서 갑자기 이상한 쇼트의 교환이 일어난다. 완전히 구경꾼 바깥으로 빠져나갔다가 김두한이 결정적인 일격을 가할 때( S#_13) 카메라는 두 사람 사이 안으로 가깝게 들어와서 순간적인 디테일을 보여준다. 단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액션의 속도 자체에 변화를 주어서 스텝 프린팅의 방법으로 다시 변속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재빨리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 S#_14) 이때 앞의 디테일의 쇼트와 다음 장면을 연결시키는 것은 스텝 프린팅의 변속으로 이어지는 액션의 리듬이다. 이 효과는 우리에게 클로즈 업 다음에 바로 뒤이어 완전히 뒤로 물러난 롱 쇼트로 찍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 디테일의 전부를 하나의 연속된 장면으로 본 것만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다음 김두한의 발아래 땅바닥에 쓰러진 오찌아이를 다시 가까이 다가가서 보여준다. ( S#_15) 이 4개의 쇼트는 단순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까다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 쇼트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힘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선택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어떤 미학적 원칙에 따른 것인지 간단하게 대답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무언가 각 쇼트마다 서로 다른 결정을 내린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게 만든 다음 서로 유기적인 체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그룹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자, 나는 같은 질문을 왕가위의 < 일대종사 >를 보면서 다시 던져볼 것이다. 물론 그런 다음 다시 < 장군의 아들 >로 재빨리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대종사>를 돌아볼 것이다. 궁가 64수의 창안자인 궁보삼은 최고의 필살기 노원괘인을 마삼에게 설명한다. “이 초식의 정수는 고개를 돌려보는 것이다. 타격이 아니라 돌아보는 것이지” 나는 그 말을 믿어볼 참이다. (첫 번째 이야기 끝, 두 번째 이야기 계속) 장군의 아들 1990년 108분 컬러 1.85 감독 임권택 제작 태흥영화㈜ 각색 윤삼육 촬영 정일성 조명 차정남 편집 박순덕 음악 신병하 박상민 김두한 신현준 하야시 이일재 김동희 방은희 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