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
- 감독
-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 제작년도
- 1969
- 출연
- 울리 롬멜, 한나 쉬굴라, 피터 벌링,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작년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스티브 최(Steve Choe) 교수 는 영화와 미디어 이론에 대한 미학적 접근에 기초해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독일과 영미권 출신 작가뿐만 아니라 박찬욱 , 이창동 등을 중심으로 한국영화 감독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관련 논문을 집필했다. 최근에는 한국드라마에서 ‘감정’을 묘사하는 방식을 개념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기도 하며, 현재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영화비평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Sovereign Violence: Ethics and South Korean Cinema in the New Millennium (2016), 그리고 논문 “The Paradoxical Universal of Korean Cinema(2022)”, “Park Chan-wook beyond Globalization(2022)”, “Sympathy for the K-Drama(2024)” 등을 집필했다. ※ 본 강의는 영어(순차통역)로 진행되었으며, 원 제목은 "Korean Cinema and English-Language Film Studies"입니다. 미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한국계 영화학자로서의 여정 미국과 유럽의 영화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반갑다. 나는 영화에 관한 서적을 몇 권 집필했고, 그중 한 권은 한국영화를 주제로 한다. 오늘은, 대학원을 시작으로 영화학계에서 내가 학술적으로 전개해 온 노력과, 그 과정에서 느낀 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한국영화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나의 연구는 바로 이 책, Sovereign Violence (2016)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그로부터 8~10년 전부터 이미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써왔다. 2007년에 박찬욱 감독에 관해 쓴 에세이가 시작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한국영화에 대해 영어로 작성된 연구 결과물이나 자료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영화와 관련해서는 어떤 작품 또는 감독이 중요한지, 한국영화를 둘러싼 이론은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한국영화의 미학은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도 전무했다. 그래서 독일영화라는 나의 연구 분야를 토대로, 한국영화 연구의 이러한 공백을 메우고, 학계에 새로운 방식으로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Sovereign Violence: Ethics and South Korean Cinema in the New Millennium (2016) 위에 언급한 책은 1960년대에 출생한 감독들의 작품이,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통해 제기된 윤리적·도덕적 질문에 응답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흔히 ‘한국영화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2001년부터 2013년 정도까지의 시간 동안 발표되었고 비평적 접근 역시 가능한 예술영화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관련 감독들은 1996년 즈음 처음 개막한 국내 영화제(부산국제영화제 등)들에서 출품한 작품을 바탕으로, 일부 고전영화가 과거에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윤리나 도덕성을 교육했던 방식 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단순히 장르의 일종으로서가 아니라, 관객의 ‘ 감정적 공감 ’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또는 내러티브의 구조로서의 멜로드라마 영화를 비판하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특히 복수를 다루는 작품에서 2000년대 이후 작품들은, 관객이 어떻게 영웅에게는 감정을 이입하고 악인에게 이입하지 않게 되는지, 과거의 상업영화가 이러한 공감 구조를 어떻게 직조하는지를 포착해 비판한다. 멜로드라마는 UC 버클리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던 시절, 내가 훈련받은 학술적 연구 영역이기도 하다. 지도교수님들 중 한 분이셨던 린다 윌리엄스(Linda Williams) 교수님은,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영화계의 맥락 안에서 멜로드라마를 재정의하는 데 관심이 많으셨다. 예를 들어, 인종과 민족적 정체성을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 영화에서, 인종에 관한 편견이 투영된 인물에게 관객이 어떻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지 등을 연구하셨다. 나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멜로드라마의 영향을 2000년대 초반 한국에 맞게 맥락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는 이라크 전쟁의 발발로 인해 자국의 도덕성과 정의에 의문을 표하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미국적’ 가치나 도덕성을 비판하며 정치적 측면에서는 진보 세력이 보다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박찬욱 또는 봉준호 감독과 같은, 한국고전영화 와 할리우드영화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아온 국내 영화인들이 작품 연출 과정에서 윤리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를 (린다 윌리엄스 교수님께서 할리우드 상업영화가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요소라고 말씀하신) 기존 멜로드라마에서의 감정 이입 방식과 연관 지었다. 마치 사진이 찍힌 것처럼 영화에 그대로 반영된 문화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엿보이는 사고(Thinking)의 방식 이 궁금했다. 이와 같은 방향의 연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대학원 시절까지 미국에서 지냈기에, 일생 동안 미국식 인문학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학부에서는 인류학을 전공했지만 미학 이론에도 관심이 있어 니체, 프로이트, 앙리 베르그송, 푸코 등으로부터 비롯된 논의를 자주 접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에 영화와 관련된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첫 주에는 < 순정에 맺은 사랑(All That Heaven Allows) >(더그라스 서크, 1955)이라는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 작품에 대해, 그다음 주에는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1974)에 대해 배웠다.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상업적 멜로드라마를 파스빈더와 같은 감독이 예술영화의 형태로 리메이크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럽의 예술영화가 할리우드의 상업영화로부터 영향을 받되 그 바깥의 무언가를 달성해 낼 수도 있을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영화 연구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이때부터 하게 되었다. 또한 내가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와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 영화의 관계에 접근하고자 채택해 온 방법론 역시 이때 깨달은 내용에서 비롯되었다. <순정에 맺은 사랑>(1955) (사진: "All That Heaven Allows", IMDb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 (사진: "Angst essen Seele auf", IMDb ) 현재 미국에서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구분하는 기준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아도르노가 전개한 문화산업론에 여전히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 그의 논의와 일맥상통하게,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대중을 조작하고 감상성을 내세운 상업영화는 기피하고, 비판적 시선을 담지한 내셔널 시네마와 같이 섬세한 예술영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배우게 된다. 나 역시 아도르노의 이론에 흥미를 가졌다. 하지만 나는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그리 선호하지는 않는데, 단어 자체가 ‘재생산’ 또는 ‘대중문화’ 같은 개념을 단정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문화가 어떻게 상업적이게 되는지 , 지나치게 대중적으로 변모하게 되는지 (소위 ‘나빠지는지’)를 먼저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학부 재학 중 관련 주제로 아도르노와 베토벤에 관해 논문을 썼다(아도르노에 따르면, 베토벤은 작곡한 곡에 대해 대가를 받았으면서도 시장의 자본주의 질서에 저항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고 한다). 이후, 대학원에서는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 대해 연구했다. 독일에서는 연극이나 문학과는 구분되는 ‘영화’만의 특징이 무엇인지가 논의되곤 했다. 특히 영화가 처음 등장한 1895년부터 유럽의 예술영화가 주목받은 1920년대 사이에 이러한 논의는 두드러졌다. 영화만의 차별점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개념은 ‘ 생동감 있는 움직임 ’이다. 비인간 존재들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이, 역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뱀파이어, 골룸,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로베르트 비네, 1919)에 등장하는 인물과 같은 비현실적 존재들은 오직 영화에서만 살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항상 ‘ 죽음 ’의 개념도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은 영화인들의 작업에는 죽음이나 무생물적인 요소가 잠재되어 있고, 오히려 이들 자체가 영화의 특징인 ‘움직임’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하나의 장면을 선택하고, 말씀드린 알레고리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짚어내며 연구를 진행했다. (좌)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 / (우) < 노스페라투 >(1922) 마지막으로, 몇 년 전 집필한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William Friedkin)에 관한 책 한 권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작년에 작고했으며 < 프렌치 커넥션 >(1971), < 엑소시스트 >(1973), < 소서러 >(1977) 등의 작품들을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올드 할리우드’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새로운 자본이 유입되고 검열이 해제됨에 따라 예술영화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영화, ‘ 뉴할리우드 ’를 개척한 감독들 중 하나이다. 이런 뉴할리우드의 경향은 내셔널 시네마에 한해서만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하더라도, 투자금 유치, 검열 완화 등의 조치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나 재현 방식을 반영한 영화가 탄생하는 데도 분명히 기여했다. 영화 영문 연구의 현재, 그리고 한국영화 이제 영어로 진행되는 영화학에 관한 주요 쟁점 두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영화학의 특성과 소재가 변화하는 양상을 다뤄볼 수 있다. 영화학 연구의 영역은 점차 미디어 분야로 확장되며 학문 자체가 ‘ 매체학 ’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의 영화연구는 매체고고학(Media archaeology)적 접근과 더불어 미디어가 사회 기반시설 중 하나임을 전제한다. 그리고 인간이 세계를 감지하는 인터페이스로서의 주변세계(umwelt)에 더욱 주목함에 따라, 이제 영화학계에서는 영화라는 예술 자체에 대한 연구에 비해,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 , 즉 네트워크, 클라우드, 플랫폼 등에 대한 연구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동시에 아카이브를 통해 관련 문서를 조사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해졌다. 예를 들어, 특정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작성된 계획안, 공연에서 스모크 머신을 사용한 방식, 미술 전시에 쓰인 공간 등 개별 작품이나 작가가가 아니라 그것을 지원한 요소들에 대한 기록에 집중하게 된다. 해당 문서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고 있다면 훨씬 유리한데, 이를 통해 국내 매체의 기반시설을 영어로 연구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쟁점은 대학에서의 한국영화 연구가 대개 ‘ 한국학 ’이라는 분과 내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 학계에서 한국영화는 한국학을 포함한 동아시아학, 즉 미디어학이 아닌 특정 문화권 관련 언어문명학부에서 연구된다. (북미와 남미, 유럽 지역 학생들이 한국에 관해 가지고 있는 모든 종류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분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한국영화 역시 이러한 학문 분과의 특성에 맞게, 실질적이고 사회과학적인 방법론 (팬문화 연구 등)을 바탕으로 연구되고 있다. 내가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럽 중심의 인문학적 접근법이 도입되는 사례가 드물어 아쉽다. 나는 SNS를 통해 팬들이 생성한 해시태그 개수를 측정하기보다, 보다 인문학적인 관점 에서 국내 미디어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본 강연을 진행하신 다른 연구자분들께서도 이에 관한 내용을 전달해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서 말씀드린 학계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인문학 중심의 방법론을 지향해 영화를 연구하고 계신 데 경외를 표한다. 사실 한국영화와 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는 점에서 그에 관한 연구도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충분히 진행될 수 있지만, 해외 학계의 제도적·언어적 장벽, 경제적 지원의 한계 등으로 인해 이들은 거의 매번 동아시아학 관련 분과에 소속되어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현 시점에서 한국영화를 연구하는 이들은,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역사를 연구해 인간, 윤리, 도덕, 전통과 모더니티의 관계,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구조적 기반 등에 관한 커다란 질문 에 답해야 한다. 나 역시 Journal of Japanese and Korean Cinema 라는 학술지의 공동 편집자로서, 최근에 투고된 국내 영화배우 문예봉 에 관한 글과 같이, 한국 출신 인물이나 한국에 관한 기타 인문학적 주제에 대해 매체학적으로 접근하는 글을 더욱 받아보고 싶다. Journal of Japanese and Korean Cinema 페이지에 대한 설명 한국드라마가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 정서적 막간 위의 내용을 마무리하며, 이제 한국의 영상 콘텐츠에 관한 나의 최근 관심사로 주제를 바꿔보고자 한다. 연구자 이민주는 한 논문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어모으며 발생한 초국가적 미디어 및 관광 현상으로서의 한류를 설명한다. *주1 그는 기술이 지리적·문화적 경계를 가로질러 감정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기에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단어는 ‘ 감정 ’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아도르노는 감정은 가치 없고 상업적인 것이라며 비판했는데, 그의 관점대로라면 보는 이의 감정을 상업적인 의도로 북돋는 콘텐츠가 가득한 최근의 뉴스와 미디어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는 수많은 미디어의 스토리텔링이 갖가지 감정을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발생시키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여기서 ‘한국드라마’는 감정과 미디어의 관계 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는 데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한국드라마가 감상자의 감정을 발생시키는 데 특화되었다는 점에는 많이들 공감하지만, 이 감정이 ‘어떻게’ 불러일으켜지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하다. 관련하여 내가 소개하고 싶은 개념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 정서적 막간(Affective interlude) ’이다. 한국드라마에서 대사와 대사 사이에 음악이 흐르며 화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되거나 인물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을 말한다. 인물들이 자신에게 아픈 기억을 안겨 준 다른 인물을 회상하는 등의 장면에 주로 사용되고, 현재로 돌아왔을 때 등장하는 첫 쇼트에서 감상적 의미가 부여된 소품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동안 끊이지 않고 연주되는 음악은 감상자가 리듬에 맞춰 장면 속 인물들의 감정에 동화되도록 한다. 여기서만큼은 인물들이 나누는 대사가 아니라 드라마의 미학적 특징이 모종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1920년대의 독일영화들처럼, 그 자체로 알레고리인 장면(단 한 장면일지라도)을 통해 모든 의미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한국드라마 특유의 기법은, 감상자가 ‘무언가를 느끼게 하려는’ 의도로 강박적일 정도로 지속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물의 여왕> 중 (사진: tvN ) 예를 들어, 최근 드라마 <눈물의 여왕> 중 백현우( 김수현 )가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홍해인( 김지원 )에게 느끼는 감정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정서적 막간이 자주 사용되곤 했다. 홍해인이 본래 백현우가 사랑한 아름답고 미덕을 갖춘 인물이며, 그런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백현우가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점이, 흐르는 음악과 슬로우 모션의 반복 등을 통해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다. 정서적 막간은 이렇게 인물이 경쟁적인 사회 환경으로 인해 본래와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되더라도 사실 연약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드러내고, 이를 계기로 관객이 그의 진심에 이입하게 만든다. 한국드라마의 정서적 막간에 대한 연구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의 순간에 밀착해 세밀하게 분석하는 방법으로 진행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박사 과정 중 작품을 분석할 때 자주 떠올렸던 질문, 즉 미학적 측면에서 특정 작품의 관객은 누구인지를 중심으로 한국드라마에 접근해보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드라마에 대한 연구 전반의 다양성과 깊이가 향상되는 데 기여하고 싶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정지현, 2022) 속 정서적 막간 역시 보여드리려고 한다. 이 장면은 서로 물리적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연결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드라마의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내가 진행하는 수업을 듣는 학생들처럼 한국드라마를 좋아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해외 팬들이 한국적 감성에 다가서는 계기를 마련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미디어를 통해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서는 사전에 어느 정도의 ‘거리’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중 (사진: 유튜브 tvN DRAMA) 이 장면에서 두 인물은 서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지만, 백이진( 남주혁 )은 화면이 분할된 경계를 넘어 나희도( 김태리 )의 손을 잡고 그를 자신의 공간으로 데려오고, 등대를 향해 뛰어간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이진이 과거에 남긴 음성메시지를 희도가 반복적으로 듣는 모습이 나타난다.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는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 음성메시지를 재생하는 공중전화기를 매개체로 설정한 이 장면은 더더욱, 팬데믹 기간 동안 서로 분리되어 있던 이들의 시공간을 이어준 미디어 기술의 효과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장면의 시간적 배경 역시 국내에서 외환위기가 발발한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8년으로 설정함으로써, OTT 플랫폼을 이용하는 수많은 해외 감상자들이 한국인들만이 느낄 수 있던 감정과 애환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미디어는 물리적 거리를 둔 채 떨어져 있는 시공간을 봉합하는 역할을 한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중 (사진: 유튜브 tvN DRAMA) 그리고 나희도는 음성메시지를 반복 재생하기 위해 공중전화기의 버튼을 계속 누르고, 그가 눈물짓는 모습 역시 소프트 포커스에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한국드라마나 영화를 스트리밍할 수 있는 OTT 플랫폼은 사실 한국인들의 감정을 아카이빙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감정들을 지속적으로 접하기 위해 이용자는 이 장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재생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는, 매체의 생태학과 연관된 측면 역시 이 장면에서 지각할 수 있다. 물론 극장상영 문화 역시 여전히 중요하지만, 시공간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감상자의 마음에 사적이면서도 친밀한 문화로 자리매김한 ‘스트리밍’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것이다. 콘텐츠에 대한 근본적 물음의 중요성 한국영화의 영문 연구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리면서 강연을 마치고 싶다. 젊은 학생이나 연구자들이라면, 한국영화와 미디어에 대해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기를 바란다. 물론 기존에 발표된 논의를 많이 살펴보고 존중할 필요도 있지만, 여기에는 미디어를 통해 상기하게 되는 유의미한 질문들이 빠져있을 때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방법,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법, 정의에 대한 이해, 한국이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한 성찰과 같이 아직 충분히 답해지지 못한 질문들에 집중해보자. 한국드라마의 매력을 분석하는 연구 분야에 한해서는 특히 ‘감정’이라는 주제가 더 많이 연구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한국영화와 드라마는 한국인들이 본능적으로 친숙함을 느끼는 영역인 만큼, 한국인들이라서 더욱 민감하게 분석할 수 있는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와 관련된 연구를 체계적인 학술 프로젝트로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연구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 질문과 답변 * (질문1) 영화나 미디어와 관련해 주로 연구하고 계신 윤리, 도덕성, 감정 등은 상당히 초국가적인 주제인 것 같다. 그런데 ‘한국영화와 드라마’라는 내셔널 시네마에 근접한 개념 을 활용해 이를 연구하신다면 약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을 듯한데, 관련하여 고민하고 계신 부분이 있으실지 궁금하다. 동시에, 한국영화나 드라마가 초국가적 콘텐츠가 되면서 다른 국가의 콘텐츠 창작에 발휘하는 영향력 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답변)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는, 국가성을 띤 개념을 활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위험을 안고서라도 연구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관련 주제를 연구할 때 주로 참고하는 텍스트는 롤랑 바르트의 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 1980)로, 바르트는 여기서 사진에 항상 죽음과 시간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논의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촬영된 어머니의 사진을 다루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집필을 이어간 시점에서 해당 사진을 통해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덧붙인다. 이렇게 사진이나 영상의 이면에는 ‘ 인식 ’을 필요로 하는 요소들이 있음을 잊지 않은 채로 영화를 연구했으면 한다. 이미지에 대한 빠른 소비는 오해와 오독, 정치적 편향을 낳기 쉽다. 어떠한 인식을 전제로 이미지에 접근하는 것이 위험할 수는 있지만, 바르트 역시 사물이나 현상의 ‘전체’를 드러낼 수 없는 사진만을 주제로 위 논의를 이어갔기에, 그 역시 어느 정도의 위험을 품고 이미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시도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콘텐츠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보면 국가 또는 남성주의적 의도를 읽어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영화연구에도 이 관점을 적용하고자 한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답변 드리자면, 사실 최근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콘텐츠가 초국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국가의 창작자들이 한국 콘텐츠를 얼마나, 또 어떻게 모방하고 있는지는 구체적으로는 알기 어렵다. 다만 나는 ‘감정’의 발생을 강조하는 한국드라마나 영화가, 영상 매체의 내러티브에 잠재된 감정 전달 능력을 활성화 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므로 해당 연구 주제는 한국 콘텐츠가 아니라 ‘ 미디어 ’와 관련된다고 이해해할 수 있다. (질문2) 한국영화와 드라마의 인지도가 갈수록 높아지면서 작품들이 활발히 제작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에 대한 연구는 오히려 해외에서 주로 이뤄지고 있는 듯하다. 지역을 북미 로 한정한다면, 북미 내에서 한국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연구들이 어떤 방식과 비전 을 가지고 발전해야 한다고 보시는지도 여쭤보고 싶다.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학술지를 편집하다보면, 한국영화와 드라마를 주제로 한 원고가 최근 상당히 많이 투고되고 있다. 다만 필자들은 대부분 인도나 동유럽, 러시아 출신이고, 영어권 필자들의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몇몇 연구자들은 그 이유가 근래 한국영화의 중요도가 낮아져서, 혹은 K-팝이나 한국드라마를 분석하는 방법론이 여전히 모호해서라고 이야기한다. 나와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연구자들이 과거에 학계에서 교육받은 내용은 이제 구시대적인 방법론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새로운 연구 방법론 을 찾고, 최근 영화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주 관심사인 동시대 한국영화 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편의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한국에서 발표된 상업영화들은 아쉽게도 ‘상업영화’라는 이유로 학술적으로 충분히 연구되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작품들에 대한 영문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으므로, 누군가가 시작하여 텍스트를 마련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질문3) 한국드라마의 정서적 막간에서 올드 미디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주신 점이 인상적이었다. 최근 그룹 뉴진스의 <Ditto> 뮤직비디오에서 등장한 비디오테이프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한국드라마와 K-팝(뮤직비디오)의 미학적 정체성 이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시는지가 궁금하다. 더불어, 시간의 정치성에 관해서도 여쭤보고 싶다. 선생님께서는 독일과 미국, 한국의 영화를 다루심으로써 초국가적 비교연구를 진행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했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이야기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자본주의와 산업화가 발생한 시대에 근대적 및 전근대적 요소를 비롯한 이질적 사회적 요소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이라는 개념도 적용할 수 있을 듯한데, 세 국가의 시간성을 어떻게 병합하여 비교연구를 진행하고 계신지 에 대해 듣고 싶다. (답변) 한국드라마에서의 정서적 막간이 K-팝 뮤직비디오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는 데 동의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도 이 정서적 막간에서만큼은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같은 감정을 포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음악과 이미지가 관계를 맺음 으로써 이것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이미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시공간의 제한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 자체로 초국가적이면서 마법과 같은 힘을 지닌 요소이다. 그래서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한국드라마에서의 정서적 막간이 K-팝 뮤직비디오와 유사한 구조를 갖추게 되는 듯하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연구에 임할 때 내 자신을 ‘지식인’으로 설정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언급해주신 블로흐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간이 비껴간(untimely) 세계 에서 지식인 으로서 활동하며 세 국가에 내재된 시간성 사이를 오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보다 동시대 학생들이 주목하는 주제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진다.) 연구를 시작한 초반에는, ‘독일 분과의 유일한 한국인’ 또는 ‘영화학과에서 윌리엄 프리드킨에게 관심을 가진 유일한 학생’과 같은 신분이었기에, 연구자로서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설득해 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여러 국가나 문화권의 이론을 참고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한국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감상하기는 하지만, 이를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사실 아직 ‘외부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지금의 젊은 세대의 학생이나 연구자들에게, 현재 본인들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대해 주저하지 말고 연구를 시작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과거에 연구를 시작한 시점의 나 역시, 미국에 위치한 한국계 지식인으로서 내가 가졌던 관심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 여정을 블로흐의 개념을 빌려 해석해주신 점이 정말 흥미롭다. (질문4) 현재 비교문학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함께 연구하는 동료 중, ‘한국드라마’를 소재로 설정한 이들은 대부분 해외 출신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드라마 연구를 위한 적당한 방법론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영화처럼 분절된 텍스트가 아니기에 드라마 특유의 연속성을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지, 상업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비평적으로만 독해해서 단순히 문화산업의 산출물 중 일부로만 취급할 것인지 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고민을 안고서라도 한국드라마를 연구 주제로 선택하는 이들이 대부분 외국인이라는 점이 특별하다. 그래서 어쩌면, 드라마와 관련하여 한국인들이 연구 주제라고 생각하지 못했거나 굳이 연구를 시도하지 않았던 부분을 새로운 연구 대상으로 부상시키는 주체는 외부인 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면서도 이 점이 명확하게 느껴졌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여쭈어보고자 한다. (답변) 나 역시 수업 중 외국인 학생들을 만나 그들이 한국드라마의 어떠한 부분에 흥미를 가졌는지를 물어야 할 때가 있다. 다만 그들과 나는 출신 국가는 물론 성별이나 연령이 다른 경우가 많기에, 그들이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특정 작품이나 장면을 인상적이라고 느꼈는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인류학적 연구 방법론으로서, 외부인이 특정 집단을 이해하기 위해 그 집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구성원들을 지켜보는 참여 관찰법 (Participant observation)에서와 같은 태도를 갖춰 보기를 권한다.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외국인 연구자들의 드라마 감상 후기에 대해 직접 문의하고 대화 함으로써, 그들이 한국드라마에서 새롭게 짚어낸 지점을 발견해보자. *** 주1. Min Joo Lee, “Touring the land of romance: transnational Korean television drama consumption from online desires to offline intimacy”, Journal of Tourism and Cultural Change , vol. 18., No. 1., 2020, pp. 67~80.
열 편 모두 사사로운 이유에서 선택한 영화들이지만, < 디아만티노Diamantino >(가브리엘 아브란테스/다니엘 슈미트, 2018)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 리스트의 취지에 가장 어울린다는 생각에서이다. 가장 공감했거나, 탁월하다고 생각한 영화는 아니었다. 여러 유형의 영화들을 참신한 조합으로 선보일 수 있는가를 항시 고민해야 하는 직업의식의 발로에서 <디아만티노>를 봤을 때, 이 영화는 무논리, 무정형, 무감각의 진공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완력이 대단했다. <디아만티노>는 이민 위기, 민족주의, 트럼프, 인공두뇌학, 젠더 바꾸기, 정치적 부패, 인터넷 범죄 및 글로벌 스포츠 비즈니스의 뒤안을 구불구불 훑어간다. 포르투갈 출신의 영화감독 가브리엘 아브란테스와 미국인인 다니엘 슈미트가, 몇 편의 단편영화를 거쳐 공동으로 연출한 첫 번째 장편영화이다. 아브란테스와 슈미트는 허접한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와 설익은 특수효과, 이미지 훼손, 장르 횡단, 불경스러운 상상력을 오가며,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아방가르드 SF 코미디를 창조해냈다. 글로벌 축구 스타 디아만티노 마타모로스(미겔 고미스의 < 타부Tabu >(2012), < 천일야화As mil e uma noites >(2015)에 나온 배우 카를로타 코타가 뇌리에 각인되는 연기를 보여준다)는 타고난 운동능력이 아니라면, 세상 물정에 어두운, 공허한 청년이다. 페널티킥을 실축함으로써, 그가 이루려 했던 마지막 목표인 포르투갈의 월드컵 우승을 이루지 못한 디아만티노는 자신의 지평을 넓히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기로 결심한다. 그 자신의 실책 때문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아버지를 향한 부채감으로 선한 사역에 복무하기로 작정한 디아만티노는 모잠비크를 탈출한 난민 소년 라힘을 입양한다. 그러나 열심과 정성을 다해 살뜰히 돌보았던 이 소년의 정체는 포르투갈 정부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레즈비언 요원 아이샤. 아이샤는 디아만티노의 사악한 쌍둥이 자매가 연루된 돈세탁 작업을 조사하기 위해 저택에 잠입하였다. 여기에 국가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무적의 슈퍼 팀과 위대한 포르투갈 재건을 위해 디아만티노를 복제하려고 하는 미친 과학자 람보르기니 박사가 준동한다. 더하여 이 미끈한 축구 아이콘의 공상 속에 등장하는 초고층 빌딩 크기의 털북숭이 강아지도 있다. 인물의 유형, 공간, 사건, 묘사의 수준에서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디아만티노>는 전 지구적인 대격변을 현장에서 경험하는 축구 스타의 고통스러운 환상을 보여준다. 과연 다음 이야기는 무엇일까? 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중심을 상실한 채 흘러가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달리 요약할 방법은 없다. 사건은 빠르게 진행되지만, 전개가 혼란스럽지는 않다. 강인한 육체를 가진 어린아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디아만티노는 모든 측면에서 메트로 섹슈얼 슈퍼스타 축구 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연상시키는 아바타이다. 대리모를 통해 아들을 입양한 호날두처럼 디아만티노는 아프리카 이민자 소년을 입양한다. 그러나 영화에는 다음과 같은 자막이 태연자약하게 달려 있다. “여기서 본 이야기, 모든 이름, 등장인물. 사건은 실제가 아닙니다. 실존 인물, 장소, 제품, 유전적 절차 또는 거대한 강아지에 대해 어떠한 유추도 해서는 안 됩니다.” 뻔뻔스럽기까지 한 이 경고는 스스로를 희롱하려는 듯한 이 영화의 어조를 닮았다. 디아만티노를 어떻게 볼 것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판단은 곤란해진다. 우리의 주변에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항존한다. 탄탄한 근육과 아름다운 몸을 가진 뇌가 텅 빈 사람. 그는 순수한 인간이거나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대해 무지한 저능아이다. 디아만티노는 그가 처한 상황에서 늘 소외된다. 딱한 처지의 난민들을 동정하는 그의 선의는 너무 순수해서 가장(假裝)한 것처럼 보인다. 디아만티노의 순수함과 유치함, 성실함은 이렇듯 심각한 세계와 대비되면서 풍자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빚어놓은 듯 단단한 육체는 디아만티노의 자선 의지와 한 몸을 이룬다. 성실한 육체에 깃든 성실한 의지. 디아만티노의 어린애 같은 태도는 경멸의 대상이지만 영화는 순수성의 인격화를 표상하는 이런 태도야말로 가장 위대한 인류의 자산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변화하는 캐릭터로서 디아만티노의 전환점은 난민의 위기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개인 요트와 저택에 파묻힌 그가 아는 유일한 고통은 축구경기에서 레드카드를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별안간 그는 현실 세계의 고통을 알게 된다. 이 부조리극이 어떤 심각한 정치 드라마보다 논쟁적이 되는 것도 이 순간부터이다. 여기서부터 관객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미친 시대’를 목도하게 된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디아만티노>는 오만가지 장르, 작가의 계보를 활발하게 혼성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초기작들을 연상시키는 인물들, 특별히 디아만티노의 쌍둥이 누이는 알모도바르적인 캐릭터의 전형이다. 글을 조각내어 다른 순서로 재조합한 윌리엄 버로우즈의 콜라주 플롯, 리차드 켈리의 < 사우스 랜드 테일Southland tales >(2006)의 허무주의, 존 워터스의 터무니없는 컬트 고전들, 한나 바르베라의 풍자만화, 제임스 본드의 패러디, 심지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성 정치학적 비전에 이르기까지 이질적 요소들의 접붙이기를 펼쳐 보인다. 서사는 고전적 팝 컬쳐, 신앙심이 깊은 시네필리아, 초현실주의 대중문화 아이디어의 융합이다. 아브란테스와 슈미트는 유럽을 잠식한 난민 위기, 네오-파시즘, 블랙시트, 감시 테크놀로지, 빈곤, 스포츠 애국주의, 인간복제와 같은 현대적인 주제들을 한밤중의 소동극 위에 얹는다.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흔들어댄 칵테일마냥 각각의 주제는 어떤 초점도 만들지 않고 평평해진다. 감독은 진정성 있게 이들 주제를 다루고 있는가? 이 유치한 ‘병맛 코미디’는 무엇을 표방하려는가? <디아만티노>는 하나의 상태에서 무작위적으로 확장해나가는 일종의 자유 형식을 채택한 영화이다. 이미지의 전략도 같은 맥락을 따른다. 어수선하고 화려한 색채, 지글거리는 16mm 필름의 터프한 룩, 한편으론 미끄러질 것처럼 블링블링한 상업광고의 비주얼, 의도적으로 장난스럽게 만들어진 CGI 화면을 합쳐 놓은 이 영화의 미학은 스토리텔링만큼 거칠고 우연적이다. 관념보다 이미지를 선호하는 영화감독은 일류가 될 공산이 크다. 숱한 연상을 자유로이 불러일으키면서도 편협한 목적으로 위해 소비되지 않는 이미지를, 이 영화는 보여준다. 총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디아만티노>는 2018년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출품되어 그랑프리를 받았다. 카오스적인 무논리가 횡행하는 키치 미학에 비평가들이 호응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이다. 평론가들의 눈이 어떻게 된 것일까? 영화의 표면에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폭력적인 체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 균질화된 표현의 영역 바깥으로 탈주하려는 욕망이 넘실댄다. 남발되는 시각효과는 기술적으로 하자가 있고, 참혹한 수준의 발 연기에 한숨이 나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화에는 개성을 더한다. 이 반(反) 미학이 겨냥하는 바는 명확하다. 어떤 영화로부터의 영향도 거부하지 않는, 그 무엇과도 다른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 <디아만티노>를 본 뒤 며칠간 한 편의 영화가 머리를 계속 맴돌았다. 스탠리 큐브릭의 < 시계태엽 오렌지Clockwork orange >(1971)이다. 물론 두 영화는 다르다. 누군가는 “격이 다르다”고 화를 낼 수도 있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교화되지 않는 앙팡테리블 알렉스와 <디아만티노>의 백치 축구 선수 디아만티노는 불가역적인 강압과 제도적 폭력의 희생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적 성정(性情)은 교정되지 않는다. 알렉스의 내면화된 폭력 성향에 의해, 디아만티노의 순진무구함에 의해 그들은 바뀌지 않는다. 두 영화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철저히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그것을 조롱하기보다는 인간의 결점을 즐긴다. 심지어 그 결점이, 살면 살수록 나빠져만 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을 구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디아만티노의 백치미는 그 우매한 순수성으로 인해 규범화된 폭력과 정치적 위선을 도드라져 보이도록 한다. 언제나 문제는 상상력이 아니겠는가. 오랫동안 인류를 사로잡았던 예술작품이 보여주었던 것도, 일상을 풍요롭게 할 최상급의 공상도, 그것이 없다면 영화를 볼 이유가 없는 희열의 기원도 모두 상상력에 있다. 행여 <디아만티노>는 모든 관객이 즐거이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열광적으로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상하지만 용감한, 올해의 영화를 뽑으라면, 나는 여기에 한 표이다.
내 인생의 한국영화 중 궁극의 한편은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다. 시각·청각·이야기 등 영화의 전 층위에서 ‘종합적’으로 그만한 감흥·충격을 안겨준 우리영화는 아직까지는 없다. 정서적 측면으로 한정하면, 그것은 장선우 감독의 < 우묵배미의 사랑 >(1990)이다. 이 땅의 보통사람들의 구질구질한 일상을 그만큼 그럴 듯하게 극화한 사례와 조우하질 못했다. 한편 고심 끝에 선정해 대중음악 전문 사이트 www.izm.co.kr의 CINEMA & OST에 발표한 ‘2000년대 한국영화 베스트10’ 1위작은 봉준호 감독의 < 살인의 추억 >(2003)이다. “시대사와 개인사의 환상적 결합! 난 여태 이 영화만큼, 치사할 대로 치사하고 파쇼적일 대로 파쇼적이며 남루할 대로 남루했던 1980년대 우리 사회를 실감 넘치게 포착, 묘사한 예를 기억하질 못한다.” ‘한국영화 걸작선’이란 취지를 감안하면 따라서 이 지면에서 소개해야 할 영화는 위 셋 가운데 하나여야 마땅할 테다. ‘2000년대 이후’로 그 시기를 확대시킬 경우, < 살인의 추억 >과 정상 자리를 놓고 큰 다툼을 벌일 이창동 감독의 < 시 >거나. 하지만 끝내 그 네 걸작 중 한 편을 택하긴 싫었다. 이미 다뤘거나, 너무 ‘뻔해’ 싱거운 선택으로 여겨질 수 있어서였다. 또 다른 함의를 띨, 다소는 의외적인 선정을 하고 싶었다. 그 결과, 장고 끝에 고른 그 한 편은 < 형사 Duelist >(2005)다. 위 ‘2000년대 한국영화 베스트10’에서 <살인의 추억>과 < 올드 보이 >( 박찬욱 , 2003), < 망종 >( 장률 , 2006), < 복수는 나의 것 >( 박찬욱 , 2002)에 이어 5위에 위치시킨, 이명세 감독의 기념비적 문제작! < 형사 >는 평소 ‘매혹’Attraction/s이라는 프레임으로 영화는 물론 오락·예술 전반을 즐기고 평하는 내 관점·접근에 완벽히 부응했다. 영화에서의 매혹은 시각ㆍ청각ㆍ내러티브ㆍ주제 등 전 층위에서 관객을 끌어당기는, 그로써 관객에게 감각적ㆍ감정적ㆍ심리적ㆍ지적…으로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소들을 가리킨다.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해왔지만 <형사>는 무엇보다 시ㆍ청각 층위에서 압도적 매혹을 뿜어내는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적 텍스트다. 주ㆍ조연 배우들의 호연 등 상투적 덕목들에 대해선 언급하지 말자. 단적으로 슬픈 눈( 강동원 분)과 남순( 하지원 )의 검투에선 가히 발레적 아우라가 발산된다. 수준급 완급의 리듬 속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검무는 황홀경 그 자체다. 더욱이 그 함의는 외연적 칼싸움을 넘어 맺어질 수 없는 두 연인 간의 사랑 행위다. < 와호장룡 >(이안, 2000)의 그 유명한 대나무 시퀀스에서의 대결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잘 알고 있다. < 형사 >가 내러티브와 연관해 적잖은 평자들로부터 크고 작은 비판·비난 세례를 적잖이 받았다는 것쯤은. 후에 영평상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수상 등 크고 작은 호평을 받기도 했으나, 영화는 선보이자마자 비평적으로 최악에 가까운 혹평ㆍ질타를 받았다. 흥행적으로도 고작 1백만 선을 넘는데 만족해야 했다. 저주에 가까운 악평의 요지는 “그림은 좋은데 이야기가 영 아니”며 “스타일 과잉”이라는 것이었다. 실패한 화제작들에 으레 쏟아지곤 하는, 식상하다 못해 지겹기까지 한 천편일률적 단죄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숱한 비판·비난들에 동의하진 않는다. 우선 < 형사 >의 내러티브가 엉터리, 라는 등의 단죄부터가 그렇다. 영화는 조선 왕조를 배경으로, 가짜 화폐 유통 사건을 둘러싸고 펼쳐진다. 여느 그렇고 그런 대중영화들과는 달리 영화는 ‘사건’에만 집중하질 않는다. 김성수 감독의 < 무사 >(2001), 장훈 감독의 < 고지전 >(2011) 등이 그런 것처럼, 사건보다는 캐릭터들의 ‘사연’에 방점을 찍는다. 플롯 위주의 단순한 무협 액션물에 그쳤을 수도 있을 영화는 그럼으로써, 여형사 남순과 무명의 자객 슬픈 눈 사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숙명적 대결을 그리는 멜로 시대극으로 비상한다. 두 연인을 축으로 전개되는 메인플롯에 곁들여진 일련의 서브플롯들이 영화의 입체성을 배가시킨다. 남순-안 포교( 안성기 )와 슬픈 눈-병판( 송영창 ) 간의 유사부성 드라마 등이 그것들이다. 이렇듯 복합 플롯의 영화는 기-승-전-결 등 주류 영화 특유의 도식적 구성을 따르는, 손쉬운 노선을 걷지도 않는다. 도입부부터가 그렇다. 설정 쇼트ㆍ시퀀스를 통해 내러티브의 발단에서 출발하지 않고, ‘사건의 중심으로’In Medias Res 전격 뛰어들어 스토리를 추동시킨다. 따라서 애초부터 안일한 영화보기는 불가능하다. 더욱이 도입부 이후 펼쳐지는 사건들은 시간적으로 얽히고설키어, 이야기를 따라가려면 두뇌를 적절히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일정한 지적 노력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야기가 엉망이라고? 그처럼 관객의 능동적ㆍ적극적 참여를 유인하는 지적 작업이 요구되는 멜로드라마를 가리켜? 천만의 말씀, 이다. 그런 비난은 내러티브의 원 재료로서 스토리와, 그 스토리의 구성ㆍ배치인 플롯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내러티브적 몰이해·무지에서 비롯된 것일 공산이 크다. 역설컨대 < 형사 >처럼 지적 자극ㆍ감흥을 선사하는 러브스토리는, 국적 불문하고 흔치 않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1974>), 페드로 알모도바르(< 그녀에게 , 2002)>, 이창동 (< 오아시스 , 02>) 등의 극소수 예가 떠오르긴 해도……. ‘스타일 과잉’도 그렇다. 이명세 감독의 스타일리스트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장편 데뷔작 < 개그맨 >(1988)부터 최근작 < M >(2007)에 이르기까지 그만의 연출 스타일로 개성 만점의 영화세계를 구축해온 문제적 명장이다. 그 정점에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1999)와, 이 영화 < 형사 >가 위치한다. 스타일 과잉 운운하며 <형사>를 비난하는 건 따라서 이명세의 영화세계를 부인하는, 몰상식적 처사로 비칠 공산이 크다. 스토리텔링보다 시·청각적 연출에 보다 더 큰 공을 들였다 한들 그게 어찌 스타일 과잉이며 비난거리가 된단 말인가! 그렇다면 <형사>와 여로 모로 비교될 법한 이안 감독의 < 와호장룡 >도 스타일 과잉이라 문제란 말인가? 2000년대 이후 세계 영화사의 그 기념비적 걸작 무협 멜로물이? 사운드 연출에 세심히 주목하면 < 형사 >의 매혹은 한결 더 커진다. 영화는 음악은 말할 것 없고, 캐릭터들의 대사 및 음향효과마저도 음악적 리듬에 실어 표현한다. 촛불의 떨림, 다시 말해 묵음Silence의 순간까지도 사운드 이펙트처럼 구현한다. 놀랍지 않은가. 그 정교한 사운드 연출에서 <형사>와 비견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우리영화는 < 복수는 나의 것 > 정도다. < 형사 >의 더 야심찬 매혹은 특별한 편집으로서 몽타주에서 감지된다. 무용적 이미지와 음악적 사운드 사이의 충돌·조화미는 단연 주목할 만한 값진 성취다. 세르게이 M. 에이젠슈테인이 주창한 바, ''''''''''''''''''''''''''''''''''''''''''''''''''''''''''''''''내적 몽타주''''''''''''''''''''''''''''''''''''''''''''''''''''''''''''''''Internal Montage는 가히 압권이다. 일찍이 지면이나 강의 등에서 피력한 바 있듯, 코믹하거나 슬프거나 공포스럽거나…대중영화는 대개 단일 쇼트 내에선 어떤 감정 상태를, 하나의 주된 톤으로 표출하기 마련이다. 관객을 영화가 원하는 특정 감상 모드로 몰입시키고, 그로써 관객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형사>는 그러나, 박찬욱 감독의 < 복수는 나의 것 > 등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쇼트 안에서 복수 톤을 부여하는, 탈 대중영화적 실험을 감행한다. 그 실험이 긍정적 성공으로만 귀결된 건 아니어도, 좀처럼 맛보기 힘든, 독특한 너무나도 독특한 영화체험을 안겨주면서 말이다. 그것은 뭐니 뭐니 해도 남순의 성격화Characterization와, 튀는 캐릭터 남순을 예측 불허의 해석력으로 소화한 하지원의 연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흥미롭게도 하지원은 코믹과 멜로, 액션 연기를 일거에 선보인다. 영화 전체에서만이 아니라 동일 쇼트 안에서 멜로로 시작해 액션으로 넘어가 코믹 연기로 마무리하곤 하는, 전례 없는 고난위 연기를 능수능란하게 해낸다. 이만하면 ‘한국영화 걸작선’으로 < 형사 >를 고른 이유가 어느 정도는 전달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