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닝
- 감독
- 스티븐 힐리아드 스턴
- 제작년도
- 1979
- 출연
- 수잔 앤스패치, 마이클 더글라스
올해도 10편의 영화를 뽑았는데, 유감스럽게도 빈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벌새>는 나에게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다. 하지만 부산 영화제에서 먼저 본 다른 필자들이 이미 작년 리스트에 올리는 바람에 올해 리스트에서는 누락시킬 수밖에 없었다. (몇몇 필자들의 올해 리스트엔 여전히 이 영화가 있다! 아, 다들 무시하고 버텼나보다.) 더 아쉬운 영화는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사아마, 2019)이다. 영상자료원이 준 진짜 진짜 진짜 최종 마감일이 11월 8일. 프라이드 영화제에서 내가 이 영화를 본 건 11월 9일. 어쩔 수가 있나. 안 본 영화를 미리 리스트에 올릴 수는 없다. 언제나처럼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일단 올해는 한국 영화를 많이 넣었다. < 우리집 >, < 아워 바디 > 그리고 < 벌새 >(!)는 올해 극장에서 상영한 영화 중 가장 내 뇌 속에 오래 남았던 영화들이다. 봉준호 의 < 기생충 >은 2019년에 나온 영화 중 가장 흉악하게 재미있는 작품일 것이다. 사악한 즐거움은 < 더 페이버릿 >도 만만치 않다. 극도로 개인적이고 거의 기이하기까지 한 특별한 개인사를 냉전시대 역사로 보편화시킨 심술궂은 영화 < 콜드 워 >도 있다. 리미티드 시리즈인 <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와 < 체르노빌 >은 영화와는 다른, 텔레비전 매체 고유의 스토리텔링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경계선 >, < 어스 >, < 미드소마 >는 판타지와 호러 영역에 속하는데, 여기엔 내 취향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지만, 우린 이 영역의 영화들이 슬슬 게토에서 벗어나 진지한 목소리로 인정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워 바디>( 한가람 , 2019) 이야기를 하자. 이 영화가 나에게 올해 최고의 영화였느냐. 그건 아니다. 하지만 가장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 반응을 뒤에서 구경하는 것도 그만큼이나 재미있었다. 굉장히 심술궂은 재미를 방사능처럼 발산하는 영화이다. 여담이지만 올해 내가 재미있게 본 영화 대부분은 심술궂은 표정의 여자를 한 명 이상 품고 있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자영도 예외는 아니다. 설정만 보면 건전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시험을 포기해버린 8년차 행정고시생인 자영은 어느 날 동네에서 달리기를 하는 현주라는 여자를 만난다. 현주의 모습에 매료된 자영은 달리기를 시작하고 현주의 친구가 된다. 자영은 서서히 건강을 되찾고 친구가 소개해 준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인턴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열심히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으면 정직원이 될 가능성이 열린다. 이 정도면 거의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바탕을 둔 생활 체육 홍보 영화처럼 보인다. 자영과 현주의 관계는 로맨스의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건전해보인다. 운동을 하면 건강도 얻고 사랑도 얻고 취직도 할 수 있다니 이렇게 노골적인 프로파간다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영화는 그 방향으로 안 간다. 사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 도 원래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유베날리스가 한 말은 기껏해야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까지 깃들기를 기도하라’ 정도였다. 육체의 건강과 질병은 분명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건강한 몸의 영향이 건전한 방향으로만 향하는지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육체가 정신의 건전함이 뭔지 어떻게 아는가? 군인과 검투사의 나라에 살았던 풍자 시인이 설마 그 자명한 사실을 몰랐을까. <아워 바디>는 유베날리스의 회의적인 관점을 충실하게 따른다. 영화는 자영에게 건강한 몸을 준다. 하지만 8년의 고시 생활 중 피폐해진 정신까지 치료하지는 않는다. 이 뒤틀릴 대로 뒤틀린 정신이 운동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면 어떻게 될까? 슬슬 <위험한 독신녀>의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토론토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몇몇 평론가들이 이 두 영화를 비교했었다. 다행히도 자영은 그 방향으로는 안 간다. 덜 뒤틀린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뒤틀림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더 나쁜 방향으로 진행되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만 자영이 현주의 몸에 티끌만큼이라도 상처를 내는 건 여전히 상상하기 어렵다. <아워 바디>는 현주, 정확히 말하면 현주의 몸에 대한 자영의 욕망에 대한 영화이다. 단지 그 욕망이 어떤 의미인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데에서 이 영화의 재미가 있다. 자영과 현주는 당연히 모르고 관객들도 모르고 이들의 창조주인 한가람도 확신하지는 못하는 거 같다. 이해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흐름은 있다. <아워 바디>가 멀쩡하고 건강한 영화였다면 자영과 현주는 섹스를 했을 것이다. 적어도 영화의 구조를 보면 둘이 만나는 순간부터 그게 유일하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아워 바디>의 드라마는 영화가 이 당연하기 짝이 없는 지점으로 가는 길에서 끊임없이 일탈하다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자영이 이성애자이거나 이성애자로 정체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영은 현주의 몸에 집요하게 집착하고 있지만 이것을 성애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를 선망으로 정의하고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테니까) 현주를 모방하려는 시도까지는 정상이다. 이는 얼마든지 건강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길로 안 간다. 영화 중반에 현주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면서 자영은 죄의식에 휩싸인다. 이 죽음이 자살인지 사고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영에게 불건강한 죄의식을 제공해주기엔 충분하다. 자영은 현주에게 정말 드물게 다가간 ‘여자친구’였다. 현주는 남의 시선을 받기 싫어 한동안 런닝 머신만 뛰었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가 아닌 내면을 읽어주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만든 ‘여자친구’가 지금까지 만난 어떤 남자들보다 자신의 몸과 외모에만 집착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 <아워 바디>가 두 사람이 나누는 섹스와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 역시 건강한 진행이 가능했다. 아름다운 몸에 대한 사랑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두 사람이 이성애자여도 상대방과 자신의 몸을 사랑하며 같이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없다. <아워 바디>의 작은 세계에서 이성애는 모든 건강한 전개를 막는다. 그러고보니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멀쩡하고 건강한 섹스를 나눈 사람들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과 엘로이즈라는 게 생각난다. <아워 바디>에 대한 반응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의 섹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자영이 살아있는 다른 사람과 나누는 섹스는 매력적인 구석이 단 하나도 없고 대부분 불쾌하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기 전에 나눈 마지막 섹스는 비루하기 짝이 없다. 현주의 죽음 이후 달리기 모임의 남자와 한 섹스는 남자의 자기 도취와 그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자영 때문에 공허하다. 직장상사인 중년 남자와 나눈 섹스는 문장 자체가 불쾌한 이유를 품고 있다. <아워 바디>를 싫어하는 몇몇 관객들은 이 영화를 ‘중년남자와 섹스하는 영화’라고 부른다. 마치 젊은 여자가 중년 남자와 하는 섹스가 한국 영화에서 흔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고보면 마지막 섹스에서 영화는 이 상황이 얼마나 불쾌한지 인식하게 하는 뜻밖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관객들이 이 영화의 섹스신을 싫어하는 이유는 동성애 기반에 바탕을 둔 것일 수도 있고 이성애 기반에 바탕을 둔 것일 수도 있다. 자영과 현주의 관계만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은 이성애 섹스가 지겨울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관객들은 영화가 그리는 모든 이성애 섹스의 환멸에 찬 묘사가 더 신경 쓰일 것이다. 보다보면 숨이 막힌다. 주인공은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믿는데 이성애엔 답이 없다. 그리고 다들 질겁하는 마지막 섹스는 따지고 보면 자영이 할 수 있는 가장 동성애에 가까운 섹스이다. 자영이 현주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욕망을 대신 실천한 것이니까. 이를 통해 자영과 현주는 한 몸이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현주가 자영에게 한 말들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단 하나도 없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영은 현주의 내면에 대해 전혀 모른다. 현주가 정말 이성애자인지도, 자영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자영이 뒤늦게 참회하며 스스로 재구성한 현주는 몇몇 의미없는 단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허구에 불과하다. 자영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식의 브레이크는 걸리지 않는다. 아, 어쩔 수 없지. 우리의 몸과 정신이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욕망은 결코 온전하게 납득이 가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한마디로 <아워 바디>는 엄청나게 심술궂다. 종종 심술궂기로는 만만치 않은 <기생충>을 능가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모든 교훈은 파괴되고 두 주인공과 관객의 욕망은 단 하나도 실현되지 않으며 이들이 가는 길은 최악의 모양으로 배배 꼬여있다. 정말로 성격 안 좋은 이야기꾼이 킬킬 웃으면서 만들었을 것 같은 영화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아워 바디>는 우리가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처음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욕망의 사각을 비춘다.
소설가 스티븐 킹이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유명해졌을까. 이런 질문으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스티븐 킹의 유명세에 비해 한국에서 도통 그의 번역된 소설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시기에 그를 인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는 영화였다. < 캐리 >(1976), < 샤이닝 >(1980), < 스탠 바이 미 >(1986), < 런닝 맨 >(1987), < 공포의 묘지 Pet Sematary >(1989), < 미져리 >(1990)의 원작자가 모두 한 사람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면서 ‘스티븐 킹’이라는 이름을 각인했고, 그의 책들을 찾아보려는데 번역본이 왜 이리 없단 말인가, 라는 놀라움과 탄식을 동시에 내뱉어야 했던, 아마도 그 시기는 1990년대 초중반이었을 것이다. 대학 도서관에서 검색 키워드로 ‘스티븐 킹’을 넣고도 그 결과가 허름해 절망하며 겨우 빌린 옛날 판본의 「캐리」를 기숙사 침대 위에서 읽으며 소름 끼쳐 했던 기억이나, 피터 스트라우브와 공저이긴 하지만 비로소 신간 소식으로 스티븐 킹의 소설이 나왔다는 신문 단신을 보고 기쁨에 복받쳐 곧바로 서점에 달려가 사버렸던 「부적 The Talisman」에 대한 기억, 대학교 교직원이 「신들린 도시 It」 읽는 걸 보고 동지를 발견한 듯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날렸으나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던 순간, 후배에게 「멈춰버린 시간 The Langoliers」(「스티븐 킹, 미스터리 환상특급 Four Past Midnight」에 실린 중편)의 줄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이야기해줬던 심야의 자취방 추억. 이때만 하더라도 이 글로벌 스타 작가는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나만의 작가이기도 했다. 주변에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 슬슬 많은 스티븐 킹의 소설들이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프랭크 다라본트의 <쇼생크 탈출>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후, 2000년대 초 황금가지에서 스티븐 킹의 대표작들을 시리즈로 내놓으면서 나는 나만의 작가를 놔줄 수밖에 없었다. 예정된,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로부터도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그는 지금도 내가 읽는 속도보다 더 빨리 글을 쓰는 건 아닌가 할 정도로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성공적이거나 실망스럽거나 관계없이 그의 원작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들도 매년 시도되는 중이다. 특히 올해 여름은 빌 호지스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엔드 오브 왓치」가 번역 출간되었고, 미국에서는 1부인 「미스터 메르세데스」의 드라마가 막 시작되었다. 8부작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다크 타워」를 영화화한 작품이 곧 개봉되며 9월이면 많은 사람들이 꼽는 그의 대표작 < 그것 >이 이전 TV 미니시리즈 이후로 처음 영화화되어 개봉한다. 스티븐 킹의 단편 <더 미스트>를 10부작으로 각색한 TV 시리즈가 현재 미국에서 방영 중이고, 이 드라마는 국내에서도 넷플릭스를 통해 8월 중 공개될 예정이다. 자 다시, 약간 변형된 질문. 소설가 스티븐 킹은 이제 한국에서 유명한가. 말해 뭐하겠는가. 오래된 스티븐 킹의 팬으로서 이런 여름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고 그래서 KMDb에 미니 연재를 기획하게 되었다. ‘스티븐 킹, 여름, 영화’라는 두루뭉수리 한 칼럼 주제 아래 세 명의 필자를 섭외했다. 「다크 타워」 시리즈를 번역한 장성주 번역가의 「다크 타워」에 대한 글을 시작으로, 이다혜 북칼럼니스트의 ‘스티븐 킹의 무시무시함을 의외로 영상으로 옮기기 힘든 이유’와 그다음으로 조원희 감독의 ‘그럼에도 내가 사랑하는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들’에 대한 글이 1주일에 한 편씩 차례로 올라간다. 모두 내로라하는 스티븐 킹의 팬이다. 올여름은 유독 비가 많다. 어둡고 음산한 여름 하늘 아래 여러분은 검은빛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꼬마아이의 한쪽 팔을 뜯어간 피에로가 도사리고 있는 검은 하수구, 돼지 피를 뒤집어쓴 십대 여자아이가 살육을 벌이기 직전 번쩍이는 검은색 눈동자, 리타 헤이워드의 대형 포스터 뒤에 은밀하게 감춰진 검은 동굴, 죽은 시체를 살려 돌려보내는 어둡고 깊은 인디언 묘지, 끝없이 걸어야 하는 소년들을 향해 장전되어있는 검은색 총구, 1963년의 역사를 바꿔버린 후 도착한 현재의 검게 휘몰아치는 하늘, 끝없이 희지만 암흑의 그림자로 가득한 오버룩 호텔의 미로 정원, 사랑한다 말하며 도끼로 내려찍는 애니의 검은 입, 가족에게 떨어져 길을 잃은 소녀가 헤매는 암흑의 숲, 전기의 힘으로 죽음을 초월하려는 목사가 불러내는 어둡고 끔찍한 사후 세계, 진흙이 잔뜩 묻은 이불이 별도 없는 시커먼 한밤에 선사하는 기이하고도 둔탁한 공포. 예상했겠지만 이 목록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리고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재개발이 진행 중인 인천, 원준( 백승기 )은 동네 대소사에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맘씨 좋은 청년이지만 정작 본인은 ‘서른 살까지 한 번도 못해봤다’는 성적(性的)열패감으로 고민이 많다. 그 콤플렉스의 여파인지 아직 변변한 직업도 없는 원준, 비슷한 처지에 틱장애를 앓는 절친 영진( 성충경 )과 서로 ‘호구’라 농짓거리하며 소일하는 나날의 연속이던 그 앞에 정체불명의 생명공학 박사( 조한철 )가 나타난다. 박사가 발명한 마성의 아바타( 손이용 )에 원준의 의식을 탈착식 USB처럼 오가게 해주겠다는 희대의 제안. 실랑이 끝에 생체실험에 동참한 원준은 정말 그 효험을 누리기 시작한다. 아바타의 탈을 쓴 원준의 고만고만한 픽업에 이성들이 홀린 듯 넘어오는 인생 대반전. 그렇게 누리던 뒤늦은 향락은 동네 북카페에서 일하는 지나(박지나)를 만나며 알맞게 스탑, 생애 최초로 누군가에 대한 순정을 호구 취급 받지 않고 키워가는 호시절이 시작되려는 순간, 존재냐 의식이냐 양자택일하란 뜻밖의 통첩이 떨어지고... 이 희한하게 친근한 이야기의 연출과 주연을 맡은 백승기 감독은 실제로 인천 배다리 마을의 터줏대감이다. 정든 아이콘들이 재개발로 인해 사라져가는 고향에서 영진 역의 성충경과 함께 미술교사를 하고 문화축제를 이끄는 한편 ‘꾸러기 스튜디오’라는 이름의 자칭타칭 C급 영화제작소의 운영에 열정을 쏟아왔고 (이들의 자족적인 전작 중에는 캠코더를 개조해 3D효과를 재현한 <아바타의 눈물> 등 어마어마한 패러디물이 많다. 동네 상영회에는 손수 셀로판지로 제작한 3D안경을 돌렸다는 후문) 마침내 부천영화제 장편부문에 < 숫호구 >를 올렸다. 전문인력 아닌 친목을 기반으로 한 무리들이 만들어낸 영화이니만큼 단점도 뚜렷하다. 촬영은 거칠고 편집은 서툴다. 런닝타임은 다이어트가 필요하고 비전문 배우들의 연기는 살짝 아쉽다. 여성 캐릭터들은 대상으로 호명된 것 외엔 별다른 입체감이 없으며, 대화를 살리기 위해 동원된 육두문자는 극의 필요에 비해 과잉이다. 그런데 그 아쉬운 투입요소들이 어우러져 ‘최선을 다해 막 만든’ 영화의 개성을 웅변한다. 그러니까 핸디캡이 오히려 관전 포인트가 되는 지점들. 가령 ‘마성’이어야할 아바타의 외모가 생각보다 아쉽지만 수줍은 호남을 섭외한 후 그 개성을 밀고 가는 우직함이 또 매력이다. 그밖에 아쉬운 동시녹음을 메꾸느라 반창고처럼 삽입된 더빙의 귀여운 이물감, 감당 못할 롱테이크를 뒤늦게 점프컷으로 만회하느라 생긴 운율 등등. 아이러니 하나 더. 주인공이 자조하듯 읊어대는 대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지만 오히려 무성영화적인 순간에 감독의 재능이 반짝인다. 한껏 부푼 마음을 대변하듯 밤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던 폭죽이 동행의 뜻밖의 말을 듣자마자 시든 소변 줄기마냥 하강하는 장면이라든지. 아바타의 몸을 빌린 주인공이 연인에게 “나를 사랑해요? 정말 나를 사랑해요?” 묻곤 “예, 사랑해요” 라는 대답에 통곡하듯 제 가슴만 두드리는 (그 `나`는 내가 아니기에) 역설까지. 타인에 몸을 의탁한 주인공과 달리 이 `꾸러기`들은 지역공동체의 아쉬운 쌩얼만으로 영화를 직조했고 (이것은 왜 독립영화가 아니란 말인가) 이제 막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견적과 경험의 한계를 긍정한 채 그 자구책을 고민하는 예술가에게 사람들은 반응하는 법. 꾸러기여, 영원히 꾸러기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