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영년
- 감독
- 로베르토 로셀리니
- 제작년도
- 1948
- 출연
- 에드문드 모쉬케, 어네스트 피트샤우, 잉게트라우드 힌즈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중 (사진: “ jinu montage ”, 유튜브) 본 원고는 필자의 개인적 견해에 기반해 작성됐으며, 기관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함을 안내드립니다. * 이 글은 2024년 12월에서 2025년 12월까지의 한 무명 영화평론가의 도전기다. 다 쓰고 보니 비평에 관한 고차원적인 통찰은 없는 것 같다. 그걸 논하려면 실력적으로 좀 더 여물어야 한다. 그전에 평론가로서 생존해야만 했다. 이 글은 그 과정에서 만난 영화들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걸어온 길은 나를 다른 관점으로 좋게 보아온 이들의 눈을 통해서 [1] 만들어졌다.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Intro 바퀴가 되던가 바퀴에 깔리던가 난 다른 차선에 세우고 깜빡이 켜놔 - 이센스, <쉬게> “보안정책에 의해 차단 되었습니다.” 2026년 상반기에 잠시 일하는 곳에서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기로 한 영화를 예매 취소하려고 로그인하니 떡하니 보였던 문구다. 차단, 배제, 초대받지 못함 등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차단은 상당히 신선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갑자기 일을 하게 돼서, 평소에 가던 평일 오후 2시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주로 하는 언론배급 시사회는 당분간 못 가게 됐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영상자료원이나 서울아트시네마에 가기가 아직은 엄두가 나질 않는다. 퇴근 후 노트북으로 영화를 파편적으로 보거나 주말을 이용해 밀린 숙제처럼 영화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그것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니라고 여긴다. 내가 취소하려고 했던 영화는 로베르 브레송의 < 아마도 악마가 >(1977)였다. 손에 넣으려고 하면 언제나 그랬듯이 도망간다. 영화와 잠시 멀어졌지만, 근무지에서 사람들을 대하며 오히려 영화적인 순간을 최근 체험했다.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꼭 그러면 만난다. 하나는 친했던 옛 친구를 오랜만에 마주쳤다.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신세라 친구와 담배 하나를 같이 필 수 없었다. 아쉽게 손 인사만 하고 그를 떠나보냈다. 잠시 마주친 그 순간이 어쩌면 그 친구와의 마지막이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다른 하나는 답답해서 사무실을 나와 찬 공기를 마시는데 두 명의 영화배우가 지나갔다. 작년 《씨네21》 ‘프런트 라인’에 합류해 처음 쓴 비평이 두 배우가 나온 영화였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잘 움직였던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도로에 멈춰 선다. 그는 차 안에서 담배 하나를 피며 생각을 고쳐먹는다. 지금이 나에게 그런 시기 같다. 하는 일이 끝날 무렵, 시네필들이 안 좋아하지만 나는 애정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 오디세이 >(2026)가 아마도 용산 아이맥스관에서 시사회를 열 것이다. 놀란이 매달리는 ‘귀환’이라는 화두처럼 나는 다시 영화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시사회 인원수 제한에 컷 당하지 않고 무사히 입성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비평, 안녕하십니까? 글쎄 전혀 안녕하지 못하다. KMDb의 “비평, 안녕하십니까” 코너에 나는 언제 써보나? 영자원에 자주 가는 건 소용없다. 이들의 눈에 띄려면 어디서 놀아야 할까? 쟨 뭔데 50주년 리스트를 썼지? 왜 난… 이런저런 불만 섞인 질문들이 쏟아졌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점점 마음이 꼬여갔다. 늘 위기인 비평과 < 기생충 >(봉준호, 2019)으로 정점을 찍고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직격탄을 맞은 후 급격하게 추락 중인 한국영화보다 내가 더 걱정이었다. 그곳에 기생하는 존재라 숙주가 위기일 때 가장 먼저 떠날(능동) 혹은 떨어져 나갈(수동) 이들은 누구일까? 래퍼 이센스의 <A-G-E>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와중에 버는 놈들이 타짜지.” 그런 타짜들이 부럽다. 나도 타짜가 되어 전국을 누비며 한몫 챙기는 영화평론가를 꿈꿨지만, 지금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다. 타짜가 되기엔 애매한 재능 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악마의 저주일까? 이런 상황에서 영화와 비평을 고민하는 것 자체가 내겐 사치다. 위기라고 상정하고 파국이 된 그곳을 사유하는 것은 어찌 보면 안전거리가 확보된 이들에게 허락된 고상한 일은 아닌지 생각도 해본다. 그러기엔 내 눈앞에 놓인 현실이 비루하기 짝이 없다. 간단하게 말해서 일이 없는데 누가 누굴 걱정하겠는가. 영화 시장이라는 곳에서 나는 스스로를 내보이곤 있지만 매칭이 잘 이뤄지지 않는 매력적이지 않은 매물인 것이다. 비평가 자체가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다. 대(大) 인플루언서 시대에선 더욱이 말이다. 등단 이후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는데) 콩고물이 떨어지길 기대했던 것이 오산이다. 요즘은 등단 없이 혹은 등단 제도에 콧방귀를 뀌며 등장한 평론가들이 오히려 내가 원했던 그 자리에 더 빨리 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를 써준 분들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완성형 시네필로 등단한 케이스가 아니다 보니, 지금도 나를 쓴다는 것은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그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선 시네필-평론가들이 학창 시절부터 영화에 쏟아부었던 시간만큼 나 역시 영화에 투자해야 한다. 적게 잡아도 10~15년. 하지만 세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잡지는 싸움의 장소라기보다는 매칭 애플리케이션이 되었다. 크림처럼 실패한 비평가이자, 실패한 산문가는 오늘날에 잡지에서 그렇게 환대받는 작가는 아닐 것이다. 크림은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엄숙한 비평 스타일에서 탈피, 구어적이고 생생한 언어로 비평을 썼지만, 그의 지위는 어중간한 평론가로 머물며, 독자에게 호응받지 못했다.” 강덕구 평론가가 한예종 웹진에 기고한 “ 잡지의 전성기에 관한 영원한 수다 ”란 글의 한 부분이다.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실패한 평론가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의 눈에는 신기한 행보로 비칠 수도 있다. 근데 그 누군가는 어디에 있을까? 아예 안 되진 않는다. 뭔가 되기는 한다. 그게 저주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내가 원하는 타이밍이 아닌 뒤늦게, A를 바라면 B나 C를. 확실한 건 직행 티켓은 없다는 것! 우회를 거듭하며 돌고 돌아 영화라는 왕국에 잠시 머물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감질나게 맛만 보고 말이다. 2024년이 시작하고 《씨네21》에서 주는 리뷰만 쓰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나이는 차고 ‘젊은’ 시네필-평론가들이 새롭게 씬을 장악하는 상황에서 나는 시작도 안 한 것 같은데 끝난 느낌을 받았다. 리부트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뭔가를 도모할 동료도 없었다. 그저 혼자서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것만이 내게 남은 선택지였다. 또다시 등단을 시도해야만 했고, 단편이 아닌 장편을 만들어야만 했다. 도착 지점은 다름 아닌 영화제. 여태 안 불러줬는데 내년이라고 다를까… 이런 허무함이 나를 뒤엎을 무렵, 안 불러주면 ‘내가 직접 간다’라는 밑도 끝도 없는 오기가 작동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뭐라도 만들어서 도전해 보고 그러고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그래야 후회가 덜 남을 것 같았다.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영화제에서 일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그 정도야 나도 안다. 그 천운이 내게 안 떨어지는 걸 어떡하겠나. 뭔 수를 써서라도 그 근처라도 가는 수밖에. 내가 찾은 틈새는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전. 부산영평 출신 평론가들이 부산국제영화제 크리틱b상 심사위원을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이 우회로. 물론 그해 공모전 주제였던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좋아해서 쓴 것은 맞지만 앞서 설명한 저 욕망이 없었다면 글은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2025년. 김칫국을 드럼통째로 마시고 있었는데 연락은 없었다. 갑자기 《씨네21》의 김성훈 기자님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왔다. -이번에 부산 내려가시죠? -안 불러줘서 못 가요. -(다 함께) 하하하 30주년 기념으로 씨네21상이 신설되면서 심사위원으로 선정됐다는 반가운 섭외 전화였다. 왜 뽑혔는지 나름 예상은 했지만, 핵심은 작년에 부산영평에서 등단했다는 것. 글을 안 썼으면 열리지 않았을 문이다. 우회에 우회. 그렇게 부산에 내려가서 12편의 영화를 보라는 미션이 떨어졌다. 1. <아코디언 도어>: 월경(越境)의 이미지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비전’ 부문의 한국독립영화 12편 중 씨네21상은 손경수 감독의 < 아코디언 도어 >(2025)에게 돌아갔다. 위에서 하이라이트한 부분은 모두 이 영화의 대사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우선 영화를 다시 볼 수 있게 스크리너를 친히 내준 손경수 감독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영화제 심사 때 쓴 “CINEMA”라 적힌 노트를 다시 꺼내 봤다. 그때 미처 보지 못한 것을 영화를 다시 보며 발견했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아코디언 도어>에 왜 끌렸을까를 생각해 봤다. 작가(Writer’s Block) 한예종 전문사에 입학하면서부터 글 쓰는 캐릭터에 나도 모르는 새 빠졌던 것 같다. 이창동 감독의 < 버닝 >(2018)의 종수를 시작으로 이지은 감독의 < 비밀의 언덕 >(2022)의 명은이, 그 누구도 기회를 주지 않을 때 GV 모더레이터 데뷔를 시켜준 천재 김홍기 감독의 < 익스트림 페스티벌 >(2022)의 래오, 홍상수 감독의 <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2025)의 시인 동화 그리고 <아코디언 도어>의 지수까지. 영화평론가가 다양한 활동을 한다지만 기본이 되는 것이 결국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와 비평이 내 삶에서 멀어지려고 할 때, 작가의 형상이 아른거리는 영화를 마주하면 더 눈길이 갔다. 캐릭터들의 고민이 그 시기의 나의 고민과 공명한 것도 한몫한다. 초기엔 뭘 써야 할지(<버닝>), 얼마나 솔직해야 하는지(<비밀의 언덕>)를 고민했다. 그러다 최근엔 좀 더 현실적인 고민에 접어들었다. 글을 안 쓰고 있는 나의 게으름(<익스트림 페스티벌>)과 나이는 먹어가는데 평론가로서 자리를 못 잡고 있는 현실(<그 자연>)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초라한 상황과 상반되게 영화제는 너무나 화려했다. 그곳에서 본 <아코디언 도어>의 한 문장이 내 가슴을 후벼팠는지 노트에 많이 적혀있었다. “어차피 평범해질 운명이었다.” <아코디언 도어>에 대한 작품 비평은 이 영화의 개봉을 고대하며 뒤로 미루고 싶다. 대신에 이 영화의 전환점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수직의 움직임을 말하고 싶다. 타임라인 상 가운데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영화는 하늘 높이 풍선을 띄운다. 소제목에도 썼듯이 <아코디언 도어>는 경계를 넘는 이미지로 넘실대는 영화다. 크게는 지구와 우주,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도달하는 이 영화는 그 사이에 낀 ‘재능’이란 녀석을 주목한다. 물에서 뭍으로 사진: " 아코디언 도어 ", 부산국제영화제 /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과학 괴짜 종윤이가 우주 풍선을 쏘아 올린다. 성층권 33km까지 도달한 풍선, 그곳에서 내려다본 지구. 한계에 다다랐을 때 풍선은 터지고 지구로 추락한다. 지구에선 지수( 문우진 )가 강 아래로 추락하고 있다. 물에 빠진 건 이때뿐인데 <아코디언 도어>가 그리는 세계는 마치 수면 아래의 세계 같다. 영화 내내 간간이 들리는 파도 소리와 귀가 먹먹한 사운드 효과는 물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영화를 다시 감상하며 지수가 마치 물고기처럼 느껴졌다.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상태 역시 물과 관련됐다. 예를 들면 무언가에 심취(心醉)한, 몰입(沒入)한, 사랑에 빠진(fall in) 등등. 이는 모두 물과 관련된 혹은 연상되는 표현들이다. 그러한 물의 세계와 작별을 고하고 뭍으로 넘어온 지수는 대전환을 맞이한다.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유튜브에서 보고 적어둔 글귀가 있다. “물고기가 육지로 올라오는 것은 인간이 산소통 없이 달에 간 정도의 놀라운 기적.” 물에서 건져진 이후로 지수는 키가 자라고 털이 나기 시작한다. 일종의 진화라고도 볼 수 있는 육체적 성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능만 믿고 까불었던 지수는 새롭게 다가오는 환경에 적응해야만 했다. 모종의 사건이 벌어지고 지수는 빵을 만드는 마이스터고에 진학한다. 글 쓰는 것과는 상관없는 곳에서 지수는 무탈하게 지낸다. 그리고 글을 조심스럽게 다시 쓰기 시작한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거리감이었다. 매몰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글의 내용이 내레이션으로 나오고 여러 장면이 몽타주된다. 몇몇 장면에서 감독 본인이 지수의 어른 역으로 등장한다. 그가 출연한 사실 또한 영화를 다시 보며 엔딩크레딧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 나오는 그의 뒷모습에서 자신의 첫 장편영화를 만들기까지의 부침(浮沈)의 시간이 느껴졌다. <아코디언 도어>는 감독 자신을 영화에 각인시킨 에세이적인 면모를 지닌 흥미로운 픽션이다. 영화제에서 볼 때는 몰랐지만 해가 바뀌고 지수와 엇비슷한 상황에 놓여 영화와 잠시 멀어진 상태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니 묘했다. <아코디언 도어>는 내게 미래의 한 조각을 미리 보여준 셈이었다. 물 안에서 지수가 봤던 익사한 남자는 최악의 경우 나의 자화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시 아찔했다. 내시현상(內視現象) - 내 눈에만 보이는 벌레 사진: " 아코디언 도어 ", 부산국제영화제 /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재능이란 기생충을 CG로 선보이는 방식보다 지수의 시점 숏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놀라웠다. 영화제 때는 발견조차 못했던 장면이다. 그 장면은 지수가 잠에서 깰 때 등장한다. 무언가가 내 눈에만 보이는 내시현상, 의학 용어로 비문증(飛蚊症)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기생충이 지수의 신체 내부에 있는 실체인지 아니면 환영인지는 알 수 없다. 둘 중 어느 쪽으로도 환원시키고 싶지 않다. 그 두 개의 영역이 중첩된 숏이라 말하고 싶다. 기생충이 지수의 눈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낼 때의 조건이 흥미롭다. 무매개적인 조건이 아니라 빛과 커튼이 필요하다. 잠에서 깬 지수가 빛을 머금은 커튼을 바라볼 때 기생충의 모습이 잠시 등장한다. 영화의 영사 원리가 떠오르기도 한 장면이다. 하지만 스크린을 통해서 다 같이 볼 수 있는 영화와 달리 기생충은 지수 눈에만 보인다. 기생충이 몸에서 빠져나간 이후에 지수의 시점 숏이 같은 조건에서 다시 등장한다. 더 이상 지수에게 기생충이 떠다니는 불투명한 필터는 없다. 맨눈이 된다는 것의 두려움. 지수는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아물지 않은 어떤 상처가 이제 눈에 들어오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에도 지수의 시점 숏이 나온다. 이 영화의 엔딩은 여전히 내게 미궁으로 남아있다. 지수의 흐느낌, 멈춰버린 그의 몸, 시끄러운 기계음. 밀폐된 공간 속에서 시청각적으로 구성된 이 감각적인 엔딩은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당장에 비평의 언어로 재단하고 싶지 않다. 그저 내가 몽타주하고 싶은 것은 현재 지수의 멈춘 뒷모습과 그가 다시 쓰기 시작한 글에서 표현했던 미래의 자신의 뒷모습이다. <아코디언 도어>는 두 뒷모습 사이의 간극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2.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수인(囚人)의 이미지 두 뒷모습은 현실과 픽션의 간극처럼도 보인다. 현실은 잠시 멈춰있지만, 미래에는 좀 더 자유로워지길 바라며 써 내려간 희망의 픽션. 나 역시 현실의 고민을 픽션에 투영해 바라본 적이 있다. 그 영화는 기사 한 줄 없이 주목도 못 받았지만 그래도 영화제에 흔적은 남긴 지옥의 영화 <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2025)이다. 이것은 희망의 픽션은 아니다. 무언가를 내려놓지를 못하는 나를 산 정상에 올려다 놓고 장대비를 맞게 한다. 절벽 끝으로 몰아붙이는 느낌으로 말이다. 계속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하산할 것인지. 질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가 영화의 끝에서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내리는 비라는 사건은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것과의 우발적인 마주침” [2] 이다. 원래 엔딩은 “CINEMA”라 적힌 노트를 봉수대에 넣고 태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왠지 뻔해 보였다. 찬물을 끼얹고 싶었다. 그래서 빗소리를 붙여봤다. 썩 마음에 들었다. 기껏 노력해서 무언가를 했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는 느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제에 가기 위해 200자 원고지 50매 이상을 썼다. 이번엔 장편 분량의 에세이 영화를 만들었다. 어떤 평론가가 이럴까 싶지만, 방법이 그것뿐이니 어쩔 수 없었다. 감독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없다. 평론가로서 나를 알리기 위해 만들었을 뿐이다. 그게 과연 통했을까? 프랑수아 트뤼포의 명언이라고 잘못 알려진 ‘시네필 3법칙’을 등단한 이후에 몸소 실천했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보고, 영화 비평을 쓰고, 직접 영화를 만들기.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영화와 좀 더 멀어진 것 같다.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중 (사진: “ jinu montage ”, 유튜브) 부산 무사이극장에서 당연히 만들면서도 알았고, 실제도 다 만들고 나서는 더욱 더 난감했다. 이걸 받아 줄 만한 영화제가 있을까? 어느 영화제에 붙여놔도 안 어울렸지만 그냥 일단 다 출품해 봤다. 그래도 받아 줄 만한 곳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였다. 당연히 떨어졌다. 그것에 낙담한 적은 없다. 떨어질 만한 영화기 때문이다. 서울독립영화제 빼곤 남은 카드가 없었다.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떨어진 것 같았다. 때마침 부산의 김영광 평론가가 운영하는 1인 시네클럽 ‘시네마 언노운’에서 상영작 공모가 시작했고, 인스타그램에서 홍보 게시물을 보자마자 바로 보냈다. 그렇게 다시 부산에 가게 됐다. 부산국제영화제 일정이 끝나고 바로 다음 주 화요일인 9월 30일에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이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하게 된 것이다. 부산 무사이극장에서 진행된 상영회에서 김영광 평론가는 3시간에 육박하는 GV를 진행했다. 그는 ‘뉴웨이브’가 올 것 같냐고 물었다. 그것은 초청된 모든 감독에게 물어본 공통 질문이었다. 그때는 이걸 왜 물어보나 싶었다. 최근에서야 알았다. 그는 3월 7일에 열리는 ‘뉴웨이브 전초전’이란 대규모 행사를 그때 이미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당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당분간 뉴웨이브는 안 올 것 같다. 지금은 기획자를 원하는 것 같다. 저런 거(<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만들지 말고, 영화를 틀어야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시네마토그래프의 ‘이윤영’ 씨가 지금 스타다. 비평계에선 ‘김병규’ 평론가가 스타고 그 이후엔 없다. 등단하고 나서야 안 것이지만 이미 학창 시절부터 시네필이고 파워블로거고 그 집단을 끌고 들어왔다는 점, 다시 말해 인터넷 인간들을 우군으로 끌고 왔기에 리더다. 밑도 끝도 없이 온 나의 경우는 지지기반이 아예 없는 거고… 지역 기반이 있거나 혹은 업계 사람들을 많이 알아서 일을 따가고 잘 나가도, 그처럼 아이콘은 될 수가 없다. 래퍼 더 콰이엇의 명언이 이곳에도 적용된다. “스타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고 사람들과 시대가 원해서 나타나는 것에 더 가깝다. 근데 스타가 안 나온다는 것은 그걸 안 원한다는 거예요. 이 시대가… 근데 때가 되면 나타날 겁니다.” 비평이라면 그것을 소비하는 블로그, 커뮤니티, SNS 사용자를 끌고 와야 하는 것인데, 다음은 어떤 매체일까? 비평을 담을 수 있는 마지노선이 블로그가 아니었을까. 혼자서는 버겁다. 잘난 사람들도 뭉치는 판이다. 아이돌 그룹처럼 모여서 팀으로 활동한다. 소리그림, 키니마 등등. 현장에선 얼추 비슷하게 말했던 것 같고 상영 이후에 정리한 말들이다. 평론가의 역할이 좀 더 확대되고 있었다. 나 역시 상영 기획을 해야 하나, 영화를 수입/배급해야 하나 별별 생각이 들었다. 평론가의 다음 단계가 있다면 그것은 감독이 아니라 프로그래머나 수입/배급업자가 아닐까? 활황인 관객 프로그래머와 시네클럽들. 프로그래밍의 외주화. 영화제와 영화관은 이들과 손을 잡고 ‘멋(hip)’을 뽐내고 있는 중이다. 이를 통해 기획, 상영, 비평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융합형 인재가 양성되고 있었다. 새로운 종의 출현인 것이다. (새로운 것은 아닐 수 있다. 잠복기를 거쳐 다시 부상한지도 모르겠다. [3] ) 나는 단종된 이전 모델의 길을 걷고 있는 퇴화하는 평론가의 종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러한 압력은 상당한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어떤 영화를 어떻게 쓸 건지보다는 어떻게 상영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생존에 유리해졌다. 글도 잘 못 쓰는데 시장에선 그런 사람들을 더 반기니 말이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선 이러한 시류를 반영이라도 하듯 ‘클럽 시네마’란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소리그림과 키니마가 그 첫번째 주인공으로 참여해 시네토크를 했다. 여태 이 글을 읽었거나 혹은 영화제를 간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나는 해당 영화제에 영화로도, 평론가로도 초대받아 일해 본 적이 아쉽게도 없다. 작가로서의 평론가만 지나치게 고수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점검하게 됐다. 과감하게 집어던지고 건너편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비평은 일종의 패시브 스킬이 된 것은 아닐까? 세상은 바뀌고 있는데 나는 그 스킬을 익히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렇게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은 영화를 보러온 동지들(김영광, 강원우 평론가, 마산영화구락부의 김준희)과 화명역 근처에서 새벽까지 소주 먹고 대단원의 마무리가 되는 줄 알았다. 마지막 남은 한 발이 먹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공식 발표 하루 전날 서울독립영화제 사무국에서 전화가 왔다. 페스티벌 초이스 장편 쇼케이스 부문에 선정됐다는 전화였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시네마테크KOFA 기획전 “영화로 영화쓰기” 중 섹션 “오진우 단편선”(상영작 중략) 그전에 7월 15일에 “오진우 단편선”이란 제목으로 그간 만든 영상들을 틀 기회가 있었다. 다른 평론가들이 상영 기획으로 저변을 확대하며 예비 프로그래머로 성장할 때, 나는 영상을 만들어왔다. “ 영화로 영화쓰기 ”라는 프로그램 안에서 내 영상들이 가장 이질적이었다. 다른 상영작들과 어울릴 수 없는, 그래서 단독으로 꾸려졌을 것이다. 특색이 있다지만 일종의 갈라파고스. 나도 다른 창작자들과 교류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도마 위의 생선이 되겠다는 것이다. 평론가와 프로그래머는 칼을 들고 도마 위의 영화라는 생선을 바라본다. 일종의 게이트 키퍼로서 영화를 선별한다. 나도 그렇게 남의 영화를 바라보고 싶었는데 스스로 생선이 되었다. 비평의 세계에서 영화 창작의 세계로. <아코디언 도어>의 지수처럼 나 또한 물고기 같았다. 지수는 변화한 환경에 적응했다. 나는 이것이 진화인지 아니면 퇴화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후자에 마음이 쏠린다. 애초에 내가 평론가로서 잘 풀렸다면 영화까지 만들었을까? 아닐 것 같다.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타입의 영화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계속해서 비평의 끈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비평을 놓아버리고 건너편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미련하게…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KMDb에 이렇게 글을 쓰기 전에 웹진 아카이뷰에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또한 우회. 그 글 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비디오 에세이와 에세이 영화는 내게 고치지 못한 습관 혹은 만성적인 질환처럼 남게 됐다. 이 증상으로서의 시네마 를 발견해 준 담당 프로그래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린다. 향후 미래에 다시 누군가가 이 분야를 디깅했을 때 재발견되어 한국 영화비평사의 B-Side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까지, 설령 그날이 안 와도 영화로 가는 길을 계속 걷는 수밖에 없다.” “오진우 단편선”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나를 최초로 발견한 은인 황민진 프로그래머님의 제안 덕분에 성사된 일이다. 좀 더 강단 있고 잘나가고 예술적인 평론가였다면 행사의 흥행을 위해서 고사를 했을 텐데, 아쉽게도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보통 일이 들어오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다. “네, 가능합니다.” 황민진 프로그래머가 쓴 노트를 살펴보자.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비디오 에세이,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뮤직비디오를 아우르는 오진우 감독/평론가의 작업은 단일한 규정으로는 묶이지 않는다.” 맞는 말이다. 동시에 저 모든 걸 안 하고 있기도 하다. 정확히는 못한다. 저 장르로 나아가 아예 감독이 돼서 뭘 만들 줄을 모른다. 자본화되지 않는 기술력인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감독을 꿈꾼 것도 아니고, 영화과 출신도 아니고, 제작 워크숍을 경험한 적도 없다. 평론가로서 다급해져서 만든 성과일 뿐이다. 내 영상은 그간 본 것들의 총합이다. 다양한 것들을 가져와서 믹스하는 것이다. 황민진 프로그래머가 분석한 나의 작업의 특성은 유운성 평론가가 정의한 ‘에세이 영화’의 형식과 공명한다. 유운성 평론가는 에세이 영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에세이란 고전적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부정하는 대안적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포괄하고 자신의 특수한 사례들로 만드는 보편적 형식이다.” [4] 에세이에 관한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실제로 에세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와닿는 정의가 바로 저 문장이다. < 영상자료원 가는 길 >(2022)과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이 저 정의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겠다. “오진우 단편선”을 본 몇 안 되는 관객 중 유운성 평론가님이 계셨고 유일무이하게 리뷰를 남겨주셨다. 글의 일부분을 옮겨 보자면 다음과 같다. (상) <영상자료원 가는 길> / (하) <Hong Sang-soo: Gravity and Grace> 사진: “ jinu montage ”, 유튜브 / “ MUBI ”, 유튜브 “(…) 최근작인 <홍상수: 중력과 은총>(2025)은 비평적 몽상의 발걸음이 홍상수 영화를 일렁이게 하는 은밀한 저류와 짜릿하게 만나면서 그것을 드러내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다만, 이전 작업들에서 두드러졌던 ‘캐릭터로서의 비평가’는 여기서 훨씬 은근한 형상으로, 수줍은 자취로만 감지된다.” 바로 직전 작업인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에서 ‘캐릭터로서의 비평가’를 전면에 내세워서 반작용이 있었던 걸까? 하긴 이 영화에서도 내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이 영화 또한 직접 보러 와주신 유운성 평론가님은 다음 작품에서는 본인이 직접 출연해 보라고 조언해 주셨다. 나는 숨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라지고 싶었던 것일까. 어디로부터?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영상자료원 가는 길>과 마찬가지로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도 영화제 맛을 본 작품이다. 여기에 <Hong Sang-soo: Gravity and Grace>라는 비디오 에세이는 해외 영화제에서 상영 후 MUBI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됐다. 나름 괄목할 만한 성과임에도 불구하고 아시다시피 기사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은 부산을 찍고 서울에 입성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 내가 원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서울독립영화제의 자랑인 ‘독립영화 매칭 프로젝트: 넥스트링크’란 프로그램이 있다. 보통의 영화들은 개봉이 목표다. 서독제의 넥스트링크는 배급사와의 미팅을 주선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2025년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상영작 중 배급사 미정인 작품이 이 프로그램의 자격 조건이다.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이 조건을 갖췄으나 (양심적으로) 개봉이나 배급사를 둘 정도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이 영화가 내가 바라는 다음 스텝을 위한 땔감이 되길 희망했다. 마침 그런 장면이 이미 영화 안에 있기도 했다. 이 영화를 통해 얻은 것은 감독의 자리. 내가 바라고 원했던 자리는 평론가의 자리인 모더레이터가 앉은 저 자리. 장편 분량의 영화를 만들고 고작 바라는 게 그것이냐고 묻는다면, 당장은 그렇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하지만 여기서 일단 마무리가 됐다. 이 영화를 통해서 영화제 측에 나를 처음으로 알렸다. 그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나를 말이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영화만 틀고 끝날 수도 있다. 개막식 때로 시간을 돌려보자. 개막작 < 무관한 당신들에게 >(2025)를 기획한 문주화 평론가님을 보면서 깨달았다. “아! 일은 저렇게 보는 거다.” 지난 1년간 내가 걸었던 길이 구태(舊態)라고 느껴졌다. 그녀는 최근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발탁됐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나는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관객석으로 그리고 엉뚱한 사무실로 점점 영화와 멀어졌다. Outro 이것이 나의 지난 1년 간의 이야기다. 손경수 감독이 쓴 <아코디언 도어>의 연출 의도가 떠오른다. “잘해서가 아니라 좋아해서 계속할 수 있다는 단순한 답은 계절처럼 한 템포 늦게 찾아왔다.” 비록 잘한 적도 없지만 좋아해서 계속할 수 있다는 단순한 답은 아직 내게 도착하지 않았다. 올해는 어떻게 될까? 그 사이 계절은 겨울에서 봄이 됐다. 영화에 대한 사랑보단 돈… 거짓말이라도 돈 말고 영화를 사랑한다고 외쳤어야 했다. 모든 것이 내가 자초한 일이기에 별다른 변명도 할 수 없다. 많은 분의 도움으로 영상자료원 로그인 차단은 해제되었다. 차단 해제 이후 영상자료원에서 처음 본 영화는 오구리 코헤이의 < 진흙강 >(1981)이었다.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명작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끝으로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진흙강>은 인물들 간의 거리감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우동집 아들 노부오는 창문을 통해 강 건너편에 정박한 배 한 척을 본다. 그것은 그에게 신기한 매혹의 세계였고, 잔혹한 진실의 세계였다. 비가 퍼붓는 날 다리 위에서 노부오는 배에 사는 키이치를 만나 친구가 된다. 배에는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하나는 남매의 방으로,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방으로. 배는 벽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됐지만,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세계였다. 들어도 못 들은 척 고통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세계 속에서 남매는 살아간다. 두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는 식사 장면이다. 키이치와 그의 누이 긴코는 우동집에 초대를 받아 밥 한 끼를 맛있게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때 긴코가 즐겁게 노는 동생을 쳐다보는 장면이 있다.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잠시 누린 이 행복이 내 것 같지 않은 느낌. 다른 하나는 마지막 장면이다. 진실을 목격한 노부오는 남매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다음 날 배가 떠나기 시작한다. 노부오는 강을 따라 배를 뒤쫓기 시작한다. 그는 연신 친구 키이치를 불러보지만, 배는 무심하게 아무 말 없이 떠난다. <진흙강> 중 / 사진: <진흙강> 중 (“ Doro no kawa ”, IMDb) * 지난 여름과 겨울에 제 영화를 보러 와주신 관객분들, 감독님들, 평론가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영화제 이후 자신의 영화를 내어준 < 관찰자의 일지 >(2025)의 임정환 감독님과 < 겨울날들 >(2025)의 최승우 감독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글을 쓰지 않고, 영화를 만들지 않았으면 볼 수 없었던 길이기에 그저 꿈만 같다. “영원히 꿈을 꾸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5] 이제 꿈에서 깰 시간. *** [1] 배우 권해효의 멘트를 문장에 맞게 변형해서 사용했다.( 링크 ) [2] 질 들뢰즈, 김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313쪽. [3] 한국영상자료원의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세대가 다른 시네필들이 만났다. 비슷한 연장선상에서 읽히는 “영화서클”은 지금 활황인 시네클럽의 부상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전 세대의 시네클럽은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추적하는 고고학적인 방식의 프로그램 같다. [4] 유운성 평론가는 장 뤽 고다르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 인디아 >(1959)에 대해 남긴 짧은 글로부터 ‘에세이’라는 형식을 다음과 같이 도출한다.(유운성, 『유령과 파수꾼들』, 미디어버스, 2018, 310쪽.) [5] <관찰자의 일지>에 나오는 대사다. 영문 자막이 흥미롭다. “… Dreams can’t last forever … is the theme.” 비평, 안녕하십니까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오진우(영화평론가) l 2020년 《씨네21》 영화평론상으로 데뷔했다. 이후 2021년 한국독립영화협회, 2024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전에서도 수상한 바 있다. 에세이 영화 <영상자료원 가는 길>(2022),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2025)과 비디오 에세이 <Hong Sang-soo: Gravity and Grace>(2025)를 만들었다.
올해 4월 12일, 한때 오시마 나기사의 진정한 라이벌 가운데 하나였고 일본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이기도 한 마츠모토 토시오(松本俊夫)가 세상을 떠났다. <장미의 행렬 薔薇の葬列>(1969)과 <수라 修羅>(1971)와 같은 마츠모토의 장편극영화는 국내의 시네필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영화와 혁명 특별전’(2005.7.27~8.15), 한중일 아티스트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 신시각(新視角)의 서울 전시행사로 2009년에 열린 ‘LINK!! 미디어아트전’(2009.9.4~9.13), 그리고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플랫폼 2010: 프로젝티드 이미지’(2010.11.3~11.19) 등을 통해 그의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작업이 꾸준히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오시마의 『전후영화: 파괴와 창조』와 같은 해(1963년)에 출간되어 새로운 영화를 모색하던 1960년대 일본의 젊은 영화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알려진 마츠모토의 평론집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도 2004년에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 경력 초기의 그가 영화와 관련해 쓴 주요한 글 대부분이 수록되어 있는 『영상의 발견』이 번역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츠모토 토시오의 영상작업(특히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이 그가 개진한 이론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본의 경우, 사카모토 히로후미가 편집 책임을 맡은 총 네 권짜리 마츠모토 토시오 저작집 출간이 2016년 2월부터 시작되었는데, 현재까지는 1953년부터 1965년까지 마츠모토가 쓴 글들을 모은 제1권만이 나와 있다.) 이론적 맥락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없이 마츠모토의 영상작업을 보는 일이 무의미하다거나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서만 새로운 영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스스로를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영상작가 - 마츠모토는 자신을 ‘에이조사카’(映像作家)라 칭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하나다. - 로 규정하게 된 것은 왜인지 등을 살펴보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의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거리 혹은 ‘괴리’가 있다. 그런데 그의 영상작업과 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생하고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리 혹은 ‘괴리’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거리 혹은 ‘괴리’는 작가로서의 그가 개인적 능력의 부족이나 한계로 인해 극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영상의 근본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린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 표지 간략하게나마 『영상의 발견』에서 개진되고 있는 마츠모토의 영화론을 살펴보자. 그에게 있어서 영상의 근본문제란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는 모든 것의 총합으로서 하나의 사물”(「네오다큐멘터리즘이란 무엇인가」)이 된 영상, 바꿔 말하면 ‘사물로서의 영상’을 출현시키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물’ 혹은 ‘모노’(もの)란 과연 무엇인가? 영어로는 통상 ‘thing’으로 번역되곤 하는 이 개념은 『영상의 발견』에 수록된 마츠모토의 글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물이란 본디 직접적으로 지각될 수 없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대상들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활동을 통해 그리고 오직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만 인지되는 실재(reality)라고 할 수 있다. 마츠모토 자신은 이처럼 집요한 응시를 눈을 감는다고 해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사물과 맞닥뜨리게 하는 ‘잔혹을 응시하는 눈’(残酷を見つめる眼)에 빗대고 있다(「잔혹을 응시하는 눈: 예술적 부정(否定)에 있어서 주체의 위치에 관하여」). 일견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을 집요하게 응시하다 보면 대상들이 낯설게 보이고 사물이 출현하는 순간이 ‘우연히’ 발생하기도 하는데, 카메라가 이러한 순간과 대면할 때 생성되는 것이 영상이고 다큐멘터리의 이념은 이러한 영상을 부단히 발견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짐작했겠지만, 마츠모토의 영상 개념은 기술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mechanically produced image’, ‘projected image’ 혹은 ‘video’ 같은 영어식 표현으로는 그 뜻이 대단히 불충분하게만 전달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견해는 마츠모토만의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2차 대전 이후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하나다 기요테루의 저서 『아방가르드 예술』(1954), 러시아 형식주의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 개념, ‘두려운 낯설음’(unheimlich)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고, 그리고 무엇보다 초현실주의 운동 등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다큐멘터리 방법론과 결합된 것임은 익히 알려져 있으며 마츠모토 스스로도 숨김없이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초현실주의 작가 루이 아라공의 다음과 같은 글을 위에서 약술한 마츠모토의 사물론과 비교해 보라. “나는 어떤 장소들, 어떤 광경들이 내게 행사하는 커다란 힘을 느꼈는데 이 매혹의 원리는 알지 못한 채로 그러했다. 내게 있어 일상의 몇몇 대상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러한 수수께끼의 일부를 간직하고 있었고, 나를 그러한 수수께끼 속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어떻게 그리되는지(méthode)는 모르지만 어떻게 하는지(pratique)는 알고 있었던 이 도취상태를 사랑했다. [……] 내가 그것을 보는 방식에 따라 하나의 대상은 변형되었는데, 그것은 알레고리적 외양을 띠는 것도 아니었고 상징적 특성을 띠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관념을 표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바로 그 관념 자체였다.”(루이 아라공, 『파리의 농부』) 아라공이 자신만의 보기의 방식을 통해 대면한 ‘관념 자체’라는 것이 마츠모토의 사물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상 언어의 용법에서 사물과 관념이 종종 대립되는 의미를 띤다는 점에 집착하지 않고, 이러한 용어가 아라공과 마츠모토 각각의 글의 문맥에서 기능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마츠모토가 루이스 부뉴엘의 < 안달루시아의 개 >(1929)나 제르맹 뒬락의 <조개와 성직자>(1928) 같은 영화들은 물론이고 초현실주의 운동 자체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종종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의 긴장보다는 내부세계 자체에 비합리적으로 몰두(혹은 도취)한다는 데 불편함을 느꼈다. (바꿔 말하자면,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실천에 내재한 응시의 방법론은 충분하다 여겨질 정도로까지는 잔혹하지 않았다.) 여기서 내부세계란 인간의 무의식에서부터 비가시적인 사회구조까지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라고 이해해도 좋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가시적 내부세계에 대한 마츠모토의 관심은 1960년대에는 전자로부터 후자로 이행해 가는 경향을 보였고, 멀티프로젝션 방식을 실험한 확장영화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つぶれかかった右眼のために >(1968)와 그의 장편 데뷔작 <장미의 행렬>은 후자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에 제작된 작품이다.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프레임들 마츠모토는 ‘사물과의 대결’(ものとの対決)이란 “응시하는 사람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비합리를 그 외부의 비합리와 깊이 관련짓는 것”(「영화예술의 현대적 관점」)이라고 보았지만, 내부와 외부를 관련짓는 노력 자체는 그 둘의 긴장에 항상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고 있는 합리적 주체의 의식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를 끊임없이 주체적으로 관련시키려고 하는 엄격함을 결여하고 있는 것”(「전위기록영화론」)이었다.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라는 구분을 도입하는 것이나 이러한 구분에 바탕을 두고 다큐멘터리의 의의를 찾으려 하는 것은 하나다 기요테루의 논변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지적되곤 한다. 본격적으로 영화제작에 뛰어들기 전인 1957년, 마츠모토는 오시마 나기사, 요시다 기주, 하니 스스무 등 (조만간 일본영화계에 새로운 기운을 몰고 올) 젊은 영화인들이 멤버로 있던 스터디 그룹 ‘영화와 비평 모임’(映画と批評の会)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그룹에서 발간한 잡지 『영화비평』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이 모임은 하나다가 만든 ‘밤의 모임’(夜の会)을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고 한다. 하나다의 주장 가운데 일부를 마츠모토의 그것과 비교하며 음미해 보자. “새삼스레 밝힐 필요도 없이, 내부세계의 구체적인 것은 외부세계의 구체적인 것의 반영에 지나지 않으며, 외부세계의 사물 자체와 대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영 내부세계의 무의식적인 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하나다 기요테루, 「기계와 장미」) “감춰진 세계라는 것을 단순히 마음 내부의 문제에 한정된 것으로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일면적이며 차라리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내부의 감춰진 왜곡이란 최종적으로는 모두 외부의 감춰진 왜곡에 의해 규정되며 그것을 반영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유물론적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내부라는 것은 외부의 연장이며 그 둘 사이를 절대적으로 구별 짓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마츠모토 토시오, 「감춰진 세계의 기록: 다큐멘터리에 있어서 상상력의 문제」) 겨냥하는 것은 부조리한 ‘감춰진 세계’(隠された世界)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시적이고 외부적인 것을 통해 의식적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큐멘터리란 이러한 가시성에 천착하는 ‘장르’로서 이해된다. 하지만 마츠모토의 눈에 종래의 다큐멘터리는 내부세계와의 관련을 상실한 채 소박하게 외부세계에 밀착하는 ‘자연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것처럼 비쳤다. 그리하여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지양한 것과 마찬가지로 종래의 다큐멘터리를 지양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때 그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이 알랭 레네의 단편 <게르니카>(1950)이다. 표면적으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지만, 피카소의 그림 전체를 한눈에 보여주는 일 없이 그림 자체를 파편화하고 낯설게 보이게 함으로써 오히려 레네가 본 어떤 ‘비전’ 자체를 형상화하고 있는 듯한 이 영화에 마츠모토는 깊이 매혹되었다. 피카소가 회화적 평면의 합리성을 의식적으로 해체해 버리는 작업을 통해 전쟁이라는 부조리에 상응하는 사물로서의 회화를 출현시켰다면, 레네는 어떤 정합적인 영화적 공간도 구성하지 못하는 몽타주를 용의주도하게 구사함으로써 피카소의 회화를 통해 환기되는 세계의 부조리에 상응하는 사물로서의 영화를 출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레네의 영화에서 마츠모토는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를 이중적으로 지양하는 새로운 리얼리즘, 즉 ‘전위기록영화’ 혹은 ‘네오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쓰인 글이 1958년 5월 『기록영화』지에 발표된 「전위기록영화의 방법에 대하여」이다. 오시마 나기사가 “처음 읽었을 때 느낀 충격을 잊을 수 없다”고 토로한 바도 있는 이 글은 ‘전위기록영화론’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영상의 발견』에 수록되었다. (이 글을 읽다 보면 < 히로시마 내 사랑 >(1959)이 나오기도 전에 이 영화의 방법론을 예견하는 듯한 어조로 알랭 레네라는 작가를 ‘발견’하고 있는 ‘비평가’ 마츠모토의 혜안에 놀라게 된다.) 잔혹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눈에 대한 강조는 이미 이 글에서 분명히 표명되고 있는데, 가령 레네는 “사드의 눈으로 상황을 응시할 수 있는 많지 않은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든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애매한 인간성 따위를 한번 철저히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때 그러하다. 마츠모토가 그의 전위기록영화 방법론을 레네의 선례를 따라 충실히 적용해 본 사례 가운데 하나는 TBS 방송국의 의뢰를 받아 만든 단편 <돌의 노래 石の詩>(1963)이다. 이 영화는 어니스트 사토가 찍은 사진들을 부분적으로 재촬영한 이미지들만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마츠모토가 그의 전위기록영화 혹은 네오다큐멘터리 방법론을 가장 래디컬하게 밀고 나간 것은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에서다. 이것은 1968년 4월, 소게츠아트센터(草月ア―トセンタ―)에서 ‘무언가 말해줘, 지금, 찾고 있어’(なにかいってくれ、いま、さがす)라는 표어 아래 5일간 열린 ‘EXPOSE 1968’ 행사에서 첫 공개된, 3대의 16mm 영사기를 사용한 멀티프로젝션 작품이다. 이 작품이 공개되기 불과 두 달 전 벌어진 김희로 사건 - 재일한국인 김희로가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자신을 모욕한 야쿠자들을 살해하고 이후 스마타쿄의 후지미 여관에서 투숙객들을 인질로 삼은 뒤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며 경찰과 대치한 사건으로 김영빈 감독이 < 김의 전쟁 >(1992)으로 영화화한 바 있다 - 에 관한 텔레비전 뉴스화면과 보도사진을 비롯해 신주쿠역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예술가들과 구경꾼들의 모습, 당대의 게이 문화를 담은 사이키델릭한 영상, 거리에서의 데모 광경, 오토바이 및 자동차 경주를 촬영한 기록영상, 각종 광고영상과 사진과 포스터, ‘준비!’(用意)나 ‘스타트!’(スタ―ト) 같은 문자들과 화살표나 물음표 같은 기호들이 언뜻 보기엔 두서없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마츠모토가 작성한 ‘그래프콘티’를 보면 멀티프로젝션에 사용된 3벌의 프린트 각각이 대단히 꼼꼼한 계획에 따라 제작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그래프콘티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는 후루하타 유리코 같은 논자가 지적하고 있듯 1960년대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화두 가운데 하나였던 당대의 ‘액추얼리티’(アクチュアリティ―)를 포착하는 데는 분명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을 보다 보면 당대 일본 사회를 감싸고 있던 저널리즘적 기호들이 한꺼번에 끓어 넘치는 용광로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떠오르는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액추얼리티란 것이 과연 영상의 사물성과 곧바로 등치 될 수 있는 것일까?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힘이란 어쩌면 마츠모토가 그토록 강조했던 응시의 잔혹함과 집요함을 보기의 현장감과 기민함으로 대체함으로써 얻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일상성과 응시」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에 대해 숙고하면서 이 영화들에서는 “대상과 주체의 관계가 목격하는 시선에 의해 결합”되어 있음을 간파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 전화의 저편 > 같은 영화에서는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목격하는 시선 [……] 응시하는 것 자체가 영상화”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영상 그 자체에 의해 대상이 주체화되고 또한 주체가 객체화되는 과정의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외부와 내부의 관계를 사물을 통해 결합시킨다는 「영화예술의 현대적 관점」의 논지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츠모토에게 있어서 영상, 응시, 사물이라는 개념이 종종 상호교환적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을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와 관련해 생각해보자. 대상들(당대 일본과 관련된 시청각적 기호들)이 주체화되는 것은 영상 그 자체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시선 없이 객체화된 주체의 의식, 즉 구성(그래프콘티)을 통해서이고, 게다가 대상들은 주체화되기 무섭게 영상의 액추얼리티가 선사하는 사이키델릭한 산만함 속에서 다시 객체화되어 버리고 마는 것처럼 보인다. 마츠모토는 사회의 비가시적 구조를 사물-영상으로서 드러내기를 겨냥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구조로부터 파생된 다종다양한 가시적 현상들을 포괄적으로 끌어들이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구조는 더욱 수수께끼 같은 것이 되고, 몇몇 현저한 현상들에만 집중하다 보면 스스로가 신랄하게 비판한 종래의 다큐멘터리의 소재주의나 자연주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는 대중사회 상황에 있어서 일상성(이라는 사물) 자체와 대결하는 일은 가시적인 것에 대한 집요한 응시를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낸다고 하는 네오다큐멘터리 방법론 이상의 노력을 필요로 함도 깨닫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상성 그 자체는 여전히 두루뭉술한 채로 일견 포착할 곳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아다치 마사오의 <약칭: 연쇄살인마 略称: 連続射殺魔>(1969) - 1968년에 서로 다른 도시에서 네 명을 살해한 18세의 연쇄살인범 나가야마 노리오가 여행 과정에서 보았음직 한 일련의 풍경들만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1975년에 이르러서야 개봉되었다 - 에 ‘풍경론’이라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이들을 사로잡은 고민도 마츠모토와 같은 종류의 것이었을 터다. 마츠모토가 새로운 리얼리즘의 과제로 제시한 다음과 같은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눈에 보이는 것밖에 비추지 못하는 카메라로 그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응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일상성과 응시」) ※ 마츠모토 토시오의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작품들은 우부웹(www.ubu.com/film/matsumoto.html)에서 감상할 수 있다. 마츠모토는 <장미의 행렬>과 <수라> 이후에 <16세의 전쟁 十六歳の戦争>(1973)과 <도구라 마구라 ドグラ マグラ>(1988) 두 편의 장편극영화를 더 연출하기도 했다. 마츠모토의 영상론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고 싶다면 영문으로 된 문헌들 가운데서는 후루하타 유리코의 『Cinema of Actuality: Japanese Avant-Garde Filmmaking in the Season of Image Politics』(2013)의 1장과 2장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마츠모토의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유양근 옮김, 동국대학교출판부, 2004)와 더불어, 이 글을 쓰면서 주로 참고했던 것도 이 책이다. 후루하타의 박사논문 「Refiguring Actuality: Japan’s Film Theory and Avant-Garde Documentary Movement」(2009), 그리고 2002년 여름호 『Positions』지에 게재된 아베 마크 논스(Abé Mark Nornes)의 「The Postwar Documentary Trace: Groping in the Dark」도 유용하다. 본문에서 인용한 하나다 기요테루의 「기계와 장미」는 사카모토 히로후미의 박사논문 「전위기록영화론의 전후적 의미: 1970년까지의 마츠모토 토시오의 여러 활동을 바탕으로 前衛記 録映 画論の戦後的意味: 1970年までの松本俊夫諸活動をもとに」(2017)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이 논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사이트(dl.ndl.go.jp/info:ndljp/pid/10357205)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이 논문에는 부록으로 마츠모토의 <안보조약 安保条約>(1959), <니시진 西陣>(1961), <돌의 노래>의 구성표와 내레이션이 수록되어 있다.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 제작을 위해 마츠모토가 작성한 그래프콘티의 사진 또한 이 논문에 부록으로 실린 것을 사용했다.
지금으로부터 66년 전, 제4회 칸영화제에서는 루마니아 태생의 스물여섯 살 청년이 만든 한 편의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적잖은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2년 전에 출간한 책으로 외설 논란을 일으키며 잠시 수감되기도 했던 이 청년 작가는 칸영화제 한 달 전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 작품이 “시네마를 철저하게 바꿔놓을 것이며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경로로 밀고 나갈 것”이라고 호언장담까지 한 터였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작 칸의 공식 초청을 받은 작품이 아니었고 그저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동안 한 차례의 상영회가 마련되어 있을 뿐이었다. 1951년 4월 20일 금요일, 칸의 복스(Vox) 극장에서 마침내 영화가 공개되었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영화였지만 그때까지 편집이 마무리되지 않았던 탓에 2장과 3장은 이미지 없이 사운드만 흘러나왔고, 그나마 꼴을 갖춘 1장마저도 이미지와 사운드의 연계를 파악하기 힘든 요령부득의 작품이었다. 관객과 기자들은 분노했다. 반면 칸에서 이 영화를 본 장 콕토는 “영화제 기간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스캔들”이라 불렀고 이듬해 이 영화가 파리에서 개봉될 때는 포스터를 그려주기까지 했다. 개봉 당시 이 영화를 본 평론가 시절의 에릭 로메르는 다소 양가적인 감정으로 작품에 거리를 두면서도 1장만큼은 “내가 지금껏 본 그 어떤 최고의 비상업적 영화들보다도 천 배는 나를 사로잡았다”고 「카이에 뒤 시네마」에 썼다. 1953년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의 상영회를 통해 이 영화를 보았던 스탠 브래키지는 훗날 작가에게 편지를 띄우면서 그것이 “내가 영화작가로서 발전하는 데 있어 가장 심원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킨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고백했다. 이상은 이지도르 이주와 레트리즘(Lettrism) 영화의 시작을 알린 그의 데뷔작 < 타액과 영원에 관한 논고 Traité de bave et d’éternité >(이하 <논고>로 표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 이 영화는 영미권에서는 ‘독설과 영원’(Venom and Eternity) 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왔고 여전히 그러한데, 이는 ‘타액(침)’과 ‘독설’이라는 뜻을 모두 지니고 있는 프랑스어 ‘bave’를 잘못 해석한 데서 나온 제목이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면 오해의 여지가 전혀 없다. 이는 과격한 레트리즘 텍스트를 낭독할 때 입에 고이거나 흘러나오는 침을 뜻하는 것이다.) 장 콕토가 디자인한 <타액과 영원에 관한 논고> 포스터 이주가 1946년에 출간한 저널 「레트리스트 독재 La Dictature Lettriste」로 모습을 드러낸 레트리즘 운동(첫 멤버는 이주 자신과 가브리엘 포메랑 둘 뿐이었다)은 문학, 회화, 영화 등에서부터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에 이르는 영역까지를 겨냥하는 무정부주의적 실천이었는데, 이에 영감을 제공한 것은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특히 다다이즘이었다. 이 운동에 레트리즘이란 명칭이 붙은 이유는 애초에 그것이 문학, 특히 시적 언어의 전복을 꾀하는 작업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레트리즘 시는 시어에서 모든 의미를 제거하고 시를 전적으로 문자(letter) 그 자체, 그리고 소리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 이런 문학적 시도는 다다이스트들의 음향시(Lautgedicht) 작업은 물론이고 그들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러시아 미래파 작가들이 고안했던 초이성적(super-rational) 언어인 자움(zaum) 또한 떠올리게 한다.) 1955년, 오슨 웰즈는 영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오슨 웰즈와의 세계 일주 Around the World with Orson Welles>의 한 에피소드에서 레트리즘 그룹 멤버들(이지도르 이주, 모리스 르메트르, 자크 스파카냐)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이 레트리즘 시를 낭독하는 광경을 담은 바 있다. <논고>는 레트리즘 영화의 이념과 방법론을 한꺼번에 드러낸 선언문이자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이미지들 간의 관계는 대단히 불투명하고, 이미지와 사운드는 동조화되지 않은 채 서로 무관하다 싶을 만큼 자율적으로 흘러간다. 이주는 이를 불협몽타주(montage discrépant)라고 불렀다. <논고>에서 이주 자신이 연기(?)한 다니엘은 “나는 눈이라고 하는 영화의 지배자로부터 귀를 분리시키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불협의 원리에 따라 분리된 이미지와 사운드는 이른바 ‘끌질’(cisèlement) 작업을 통해 물리적, 물질적 특성을 고스란히 노출하게 된 대상들이다. 이주는 날카로운 도구들로 필름 표면을 긁어내거나 그 위에 잉크를 칠하기도 했다. 영화의 사운드는 일단 레코드판에 녹음된 뒤에 광학 사운드트랙으로 옮겨졌는데 이로 인해 자글거리는 소음이 시종일관 들리게 되었다. 또한 이주는 이 영화를 위해 새로 촬영한 이미지들 외에도 상당 부분 뉴스릴 등 기존의 영상자료를 재활용하고 있다. 영상자료들을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 내고, 끌질을 통해 변형시키고, 임의로 다른 것들과 결합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독’한다고 할 수 있는 <논고>는, (1951년에 레트리즘 그룹에 가입한) 기 드보르에 의해 후일 상황주의(Situationism)의 정치미학적 전략으로 정교화될 전용(détournement)의 방법론까지도 예시하고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논고>는 어느 정도는 에세이영화이고, 어느 정도는 추상영화이고, 어느 정도는 낭독영화이고, 또 어느 정도는 파운드푸티지 영화이기도 한 대단히 복합적인 작품이다. 편집이 마무리되지 않아 영화의 2/3가량이 사운드만 흘러나오는 프린트를 상영해 칸영화제에서 물의를 일으킨 것도 반쯤은 의도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 다니엘은 “시네마가 일종의 라디오처럼 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라고 따져 묻는다. - <논고>는 필름 퍼포먼스 실천이기도 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심지어 라디오 방송극처럼 펼쳐지는 연애담도 포함되어 있다!) <논고>는 영화가 이제 스스로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철저히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그것들을 분해하고 해체한 뒤에 가능한 여러 대안적 결합의 양상을 모색하는 (보다 과격하게는, 결합의 모든 가능성을 폐지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논고>의 복합성은 그러한 복합성 자체를 추구해서 얻어진 것이라기보다, 이처럼 영화가 새로운 단계로 이행했다는 전제에 입각해 이주가 연역적으로 수행한 이런저런 작업의 산물이라 봐야 한다. 말하자면 <논고>는 대단히 소크라테스적인 정신의 산물인 셈인데, 이는 훗날 고다르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인디아>(1959)를 보고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그러한 정신이다. <타액과 영원에 관한 논고>의 프레임들 하지만 <논고> 이후 이주는 더 이상 영화작업을 지속하지 않았다. 그가 열어젖힌 문 안으로 본격적으로 뛰어든 이는 모리스 르메트르였다. (그는 <논고>의 후반 작업 당시 프린트를 늘어놓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끌질’ 수작업을 프레임 단위로 수행한 장본인이다.) 이주의 영화가 칸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나서 7개월 후, 파리의 한 시네클럽에서 르메트르의 첫 영화 <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 Le film est déja commencé? >가 공개되었다. 여기서 르메트르는 이주가 <논고>에서 제시한 불협몽타주와 끌질의 전략을 더 밀고 나갔다. 전체 영화의 대부분 숏이 수작업으로 채색되었고 이미지의 추상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사운드트랙의 구성은 정말이지 파격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에 대한 사색에서부터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가 상영되는 영화관 환경 및 상영 도중 영화관에서 벌어지는 소란과 말다툼(“이런 영화를 보려 하다니 미쳤군! 원한다면 내가 돈을 줄 테니 커플이라면 차라리 그걸로 호텔에나 가시오!”)에 대한 묘사, 그리고 심지어 이 영화에 대한 언론의 리뷰들(물론 꾸며낸 것이다)까지 읊조려지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돌연 영화가 끝나버린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극장 매니저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방금 영사기사가 르메트르 씨 영화의 마지막 릴을 찾을 수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어디에 잘못 둔 것인지 배달이 안 된 것인지는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 여하간 상황이 이렇게 되어 상영을 끝까지 마칠 수 없게 되어 참으로 유감입니다. (사탕과 초콜릿 그리고 아이스크림 있어요!)” 오늘날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를 르메트르가 의도한 바의 모습으로 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에게 있어 영화란 비단 기계적으로 재생되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총체만이 아니었고, 그것이 상영되는 특정한 공간과 시간과 결부된 - 바로 그때 바로 그곳에서 벌어진 - 사건들의 고유성과 다양성을 함께 끌어안는 개념이었다. 또한 스크린은 백색의 직사각형이 아닌 다른 형태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고, 영화 상영 중 관객에게 요구되는 침묵과 부동의 상태 또한 얼마든지 위반해도 좋은 것이었다. 즉,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의 사운드트랙에 재현된 일련의 소란은 비단 영화 내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영화가 상영되는 환경에서 실제로 수행(performance)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가 구상한 상영환경을 개략적으로 묘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가 상영될 영화관 입구에는 핑크색으로 칠해진 이동식 스크린이 설치된다. 상영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부터 영사기사는 이 이동식 스크린에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 같은 고전 영화들을 상영한다.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면, 관객들은 채색된 천들과 이런저런 움직이는 물체들로 스크린이 어지러이 가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상영이 시작되면, 르메트르가 미리 ‘심어둔’ 연기자들이 영화관 안에서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을 가리면서 소리를 질러댄다. 얼마 후에는 다른 이가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칼로 스크린을 자르고 그 너머로 간다. 관객들 가운데는 항의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이 과격한 퍼포먼스에 동조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여하간 상영은 계속된다. 그리고 또 …. 이러한 영화적 실천을 르메트르는 종합영화(syncinéma)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다.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의 프레임들 이러한 실천은 <반개념 L’Anticoncept>(1952) 상영 시 헬륨가스가 든 지름 2미터짜리 구형 풍선의 표면을 스크린으로 활용한 질 J. 울망 등에 의해 레트리즘 영화의 주요 전략으로 자리 잡게 된다. 1960~70년대에 걸쳐 본격적으로 만개한 확장영화(expanded cinema) 작업들이 나오기 이전, 이미 레트리즘 그룹은 라이브 퍼포먼스의 도입을 통해 영화를 다시 사고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예술제도는 이러한 반제도적 실천마저도 제도의 일부로 끌어안은 지 오래다. 지금의 우리가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를 르메트르가 의도한 모습 그대로 보기가 어려운 것은, 그가 구상한 종합영화적 실천을 실행에 옮기는 게 까다로워서가 아니라, 더 이상 우리가 그러한 실천을 스캔들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의 정치학은 예술이 스캔들을 일으킬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지만, 이제 스캔들은 정치에 고유한 것이 되었고 예술은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가 되었다. 예술과 관련된 스캔들은 있어도 예술의 스캔들은 없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레트리즘을 돌아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타액과 영원에 관한 논고>와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 이후 레트리즘 운동의 전개 과정, 그리고 레트리즘 그룹과 상황주의 그룹의 관계 등에 대해 서술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이런저런 무용담과 전설과 영웅 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에 대한 반응과 평가가 당대에 어떠했는지를 저릿한 기분으로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스콧 맥도널드와의 인터뷰에서 P. 애덤스 시트니가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고백한 것을 보고 나서다. “1963년 파리 […]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바깥에 서서 제게 적대적인 문건을 나눠주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저는 당시 그 사람을 무시하라는 제 프랑스 친구의 말을 들었던 것을 후회합니다. 그 사람은 레트리즘 영화작가인 모리스 르메트르였어요. 그는 제가 침입자이면서 그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거대한 음모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이라 여겼어요. 그리고 그가 느끼는 감정에는 얼마간의 진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프랑스인들은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에 극도로 적대적이었는데, 반면 미국 작품을 받아들이고 있던 프랑스인들은 「카이에 뒤 시네마」와 누벨바그에 의해 규정된 그림자 내에서 움직이지 않는 프랑스 영화작가들은 죄다 무시했어요.” ※ 위 글에서 언급된 레트리즘 영화와 관련된 여러 사실들은 2014년에 출간된 카이라 M. 카바냐스(Kaira M. Cabañas)의 「오프-스크린 시네마: 이지도르 이주와 레트리즘 아방가르드 Off-Screen Cinema: Isidore Isou and the Lettrist Avant-Garde」를 참고로 해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영어로 출간된 레트리즘 영화에 관한 첫 단행본이다. 이지도르 이주의 <타액과 영원에 관한 논고>, 모리스 르메트르의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 질 J. 울망의 <반개념> 그리고 기 드보르의 <사드를 위한 울부짖음 Hurlements en faveur de Sade>(1952)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역시 2014년에 출간된 니콜 브레네즈(Nicole Brenez)의 「레트리즘 영화 입문 Introduction to Lettrist Cinema」도 참고할 만하다. 소책자이기는 하지만 레트리즘 그룹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서부터 1960년대 이후 이 운동의 전개 과정과 그것이 후대에 미친 영향까지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웹사이트 www.mauricelemaitre.org 에서는 레트리즘의 정의와 연대기, 그리고 르메트르의 작품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