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
- 감독
- 리산드로 알론소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후안 페르난데즈, 지젤 이라자발
경기도로 이사한 후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한번 서울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서울 서대문구에서 태어났고, 마포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독립한 후에는 줄곧 은평구에 살았다. 부산 금정구 금정경찰서에서 보낸 군생활을 제외하면 서울의 서북 3구, 그 안에서도 반경 10키로미터가 넘지 않는 좁은 장소에서 평생을 산 셈이다. 개굴개굴. 그런 내게 사람들의 말은 토머스 울프와 이문열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두 작가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그들 모두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 경기도에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울로 돌아가고 싶기는커녕 오히려 꼭 서울에 살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건 내가 (갈 곳 없는) 프리랜서이고, 이사를 통해 아내의 출퇴근길은 (조금이나마) 편해졌으며, 아내와 나 모두 문화생활(정확히 말하면 외출)을 즐기지 않는 성격이고, 아이의 학군이나 사교육 같은 걸 신경 쓸 필요가 (아직은) 없는 데다가, 가족 중에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녀야 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전보다 적은 주거비용으로 삶의 질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높아졌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변화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게 요즘 제가 부동산에 꽂힌 이유에요. -그래서 이제 부동산 투자라도 하실 건가요. -아직은요. 대신 아내와 함께 일요일마다 ‘구해줘! 홈즈’를 챙겨보고 있어요. -그게 뭐지? 드라마에요? [셜록] 같은? -이사를 계획 중인 시청자가 사연을 보내면 연예인들이 대신 예산과 조건에 맞는 집을 보러 다니는 예능이에요. 열심히 보고 공부해서 부동산 전문가로 거듭나려고요. 지돈 씨도 나중에 이사 생각 있으면 말해요, 제가 잘 해드릴게요. -…그건 마치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출발! 비디오 여행’을 꼭 챙겨본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지돈 씨, 저는 ‘출발! 비디오 여행’ 같은 건 보지 않아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JD를 바라보았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접은 후로는요. 조셉 맨키위즈의 영화 <유령과 뮈어 부인>과 마그리트 뒤라스와 도미니크 노게즈의 대담집 [말의 색채]는 모두 부동산 이야기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루시 뮈어는 독립을 선언한다.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1년 전에 죽은 남편까지 들먹이며 만류하지만 뮈어 부인의 의지를 꺾진 못한다. 부동산을 찾은 루시는 수상할 정도로 저렴한 바닷가 저택을 발견하고, 중개업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임대 계약을 맺는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성격 더러운 전 주인의 유령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뒤라스는 대뜸 자신을 매혹시켜 < 나탈리 그랑제 >를 만들게 한 집에 대한 이야기로 대담을 연다. 생애 처음 소유한 집. 정원에 창고까지 딸린 집은 당시 그녀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매우 비쌌지만,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겨우 살 수 있었다고. 그러면서 대수롭지 않게 덧붙인다. "내 책을 각색한 영화들이 너무 좋지 않아서 내가 직접 해도 그 정도는 만들 수 있거나 그보다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1) 두 가지 교훈이 있다. 하나. 싸고 좋은 매물은 없고 집과 사람, 사람과 유령 사이에도 궁합은 있다. 둘. 혹시라도 문필 활동으로 생계를 꾸릴 생각이라면 최소한 프랑스에서는 태어났어야 한다, 그것도 백 년쯤 전에, 되도록이면 마르그리트 뒤라스로… 한국에도 부동산을 다룬 작품은 많지만 부동산 이야기로 시작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일단 떠오르는 건 이윤기 감독의 2008년 영화 < 멋진 하루 >다. 검은 화면 위로 오프닝 크레딧이 흐르면,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린다. -마석? 그게 어디야? -춘천 가는 길 어디라나 뭐라나? 아무튼 뭐 사자마자 두 배쯤 올랐대. 지금은 한 평당 70이라던데. -그럼 얼마나 번 건데? 걔는? -40에 샀다니까 30에 100해서… 삼 천? 그쯤 되겠네 -삼 천? (사이) 삼 천… -한 방에. 봐 봐, 얘 몇 주째 안 보이잖아. 전화도 잘 안 받아. 나는 구글에 '마석 땅값'을 검색한다. 가장 처음에 나오는 2019년 6월의 기사("'드디어 호재 터졌다!' 남양주 마석역 일대 땅값 후끈")에 따르면 GTX 건설과 지하철 6호선 연장 계획이 동시에 발표되면서 마석역 인근 당 평당 평균 가격은 2017년 250만원, 2018년 350만원이었던 것이 2019년에는 450만원으로 치솟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2020년과 2021년에는…? (알기 싫음) 담배를 나눠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이 향하는 곳은 스크린 경마장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부동산과 경마, 그리고 1년 전 350만원을 빌리고 잠적한 남자(하정우)에게 빚을 받아내기 위해 경마장을 찾은 여자(전도연)에서 시작하는 영화인 셈이다. 과연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촉발된 전세계적인 경제위기의 한복판에 개봉한 영화답다고 할까. 돈이 없다며 느물느물하게 잡아 떼던 남자는 돈을 받기 전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여자에게 오늘 안으로 어떻게든 해결하겠다고 큰소리친다. 어떻게? 다른 여자들의 돈을 빌려서… 남자를 믿을 수 없는 여자는 남자와 동행하기로 하고, 카메라는 그런 둘을 따라간다. 옛 연인에게 돈을 갚기 위해 다른 여자들에게 돈을 빌려야 하는데도 어째선지 무사태평하기만 한 남자와 옛 연인에게 빌려준 돈을 받는데 어쩐지 본인이 직접 운전까지하며 돈을 꾸러 다니는 것만 같은 기분에 자꾸 울컥하는 여자의 하루. 그런데 나는 왜 여기서 영화의 줄거리를 꼬치꼬치 늘어놓고 있는 걸까? 서평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다. 분량을 채우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영화가 캐릭터 무비라는 것,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대책없이 낙관적이고 유연한 성격의 남자와 안 그래도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이유없이 예민하고 불안한 성격의 여자가 티격태격 하면서도 그들에게 주어진 미션을 완료하고 헤어져 다시 각자의 길을 걸어가지만 함께 했던 짧은 시간의 영향으로 그들 모두 그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여운을 남기는 종류의 영화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변화하는 사람은 여자 한 명뿐이라고 해야겠지만.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을 남녀로 바꾼 다음 긴 이야기를 단 하루로 압축한 것 같은 이야기, '한국남자 조병운(하정우)' 같은 느낌으로… 영화가 중간을 지날 무렵, 경마장을 나설 때부터 남자가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의 비밀이 밝혀진다. 남자는 돈이 없어 전세금을 빼고 가방 하나에 살림을 넣은 채 친구 집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면 이 영화를 사업이 망하고 이혼까지 한 속편한 무주택자와 파혼하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해 언제 길바닥으로 나앉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하위 중산층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단지 그렇게 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한 마디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런 종류의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고, 혹은 내겐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고, 어쩌면 이 문제는 인생보다 큰지도 몰라. 나는 머리도 식힐겸 <멋진 하루>가 담고 있는 2008년 서울의 이곳저곳 -- 개발 이전의 용산과 잠수교와 종로 뒷골목과 이태원 언덕길과 서소문 아파트와 연희동 사러가마트 등 -- 을 직접 둘러보면서 시간 속에 잠시 존재했던 어떤 것을 영원에 가깝게 붙잡아 고정시키는 이미지의 유령적인 성격에 대해 생각하며 그것이 우리의 에세이필름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찬찬히 고민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서울을 향하는 9701번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 (편집자 주: 다음은 K정연이 JD에게 보낸 메일을 전재한 것이다. 시나리오를 위한 준비작업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K정연이 원고를 완성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록 불완전한 메모의 형식이나마 독자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JD의 동의를 받아 여기에 올린다. 전체적인 내용이나 분위기 모두 본 원고와는 동떨어져 있어 구태여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미리 밝힌다.) 서평을 쓰지 않는 서평가 K정연은 마감공포증 때문에 지금까지 그가 추구해오던 약간의 재치 있는 문필 활동을 그만두고 정지돈과 함게 한국 영화에 대한 에세이 필름을 만들기로 한다. 어느 날 그는 9701번 버스를 타고 서오릉을 지나던 중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영화 평론가 유운성을 우연히 마주친다. 구산역에서 내리는 유운성을 따라 충동적으로 버스에서 내리는 K정연. 구산동 도서관 마을에서 봉산의 이름없는 묘지로, 맘스터치에서 불광천으로 향하는 유운성의 행보를 쫓는 그의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 "희망 없이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편이 낫다. 희망 없이 수다를 떠는 데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냉소주의자의 태도다. 다만, 희망을 낙관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낙관이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둘러싼 요인들로 미루어볼 때 얼마간 바람직한 미래가 가능하다고 진단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주식시장이 낙관적이라거나 부동산 시장이 안정화도리 것이라고 전망하는 경제 전문가의 발언 따위를 떠올려보라. 희망은 여건에 비추어 미래를 낙관하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 자체를 응시하는 일이다. 희망은 낙관이라고 하는 타협을 용인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긍정하는 일이다. 주식시장이나 부동산 시장에 대한 전망을 내놓기보다는 그것들을 없애버리자고 요구하는 것이 희망이다…" 2) 창백해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K정연.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문자 메시지 보낸다. -JD, 당신은 시네마가 인생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나요? 쏘옥, 문자가 발송되는 소리와 함께 K정연 쓰러지면 손에서 미끌어지는 핸드폰. 띵 하는 메시지 수신음과 함께 JD의 문자가 액정에 표시된다. -JD: ??? 시간 흐르면 비 내리는 밤의 불광천. 헤드랜턴을 쓴 JD가 수풀 사이를 뒤지고 있다. 아! 탄성을 지르는 JD. 정신을 잃은 채 반쯤 개천에 잠긴 K정연의 모습이 보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담요를 뒤집어 쓰고 코코아를 마시던 K정연이 대답한다. -유운성 선생님을 만났어요. -유운성쌤 이요? 유운성 쌤은 어디 갔는데요? -모르겠어요. 천변의 벤치에 앉더니, 저 멀리 레인보우 브릿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있잖아요, 과거의 문 같은 거. 움직이지도 앉고 한참을 앉아 있더군요. 저는 가야했어요. 마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마감을 생각하자마자 갑자기 어지러워지더니 모든 게 깜깜해졌어요. 이렇게 말하는 지금도… 병원 진료실. 의사가 K정연에게 말한다.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마감공포증입니다. -선생님, 담당 편집자에게 제가 입원을 해야 해서 원고를 마감할 수 없다고 전화 한통만 해주시겠어요?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K정연.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그런데 놀지도 않고 일도 안 한다면? 빠르게 교차 편집 되는 장면들. 다양한 시간, 다양한 날씨 아래 거리에 있는 K정연. 불안한듯 고개를 돌리면 시선 끝에 걸리는 빨간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남성의 흐릿한 모습. 유운성이다. 쫓아가보지만 매번 잡히지 않고 사라지는 유운성. 절규하는 K정연. 캄캄한 공간. 푸른 조명이 켜지면 수백 수천 개로 보이는 K정연의 모습. 거울 방이다. 잠시 후 붉은 조명과 함께 거울 속 K정연의 모습이 유운성의 뒷모습으로 바뀐다. 다시 장면 바뀌면 다양한 시대, 다양한 공장을 나서는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그런데 모두 유운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중 한 명의 유운성을 뒤쫓는 K정연. 정확한 시대도 장소도 알 수 없는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가다 마침내 유운성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한다! 벽을 보고 선 유운성에게 다가가는 K정연.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데 유운성의 셔츠를 쥐는데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유운성. K정연이 쥐었던 손을 펴면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USB. -루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K정연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JD. 서럽게 우는 K정연에게 묻는다. -무서운 꿈을 꾸었나요. -아니요. -슬픈 꿈을 꾸었나요. -아니요. -그럼… -하룬 해도 파로키 하지 않는 꿈이었습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JD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K정연. -지돈 씨, 저는 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가끔은, 실은 자주, 너무 지겹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요. -세상에는 두 부류의 평론가가 있습니다. 진과 성. 진 쪽의 평론가에는 이동진과 김영진이 있고, 성 쪽의 평론가에는 정성일과 유운성이 있는 식으로요. -그건 성명학인가요. -분류학이라고 해두죠. -하지만 저는 진도 아니고 성도 아닌 걸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자리도 있는 법이죠. 이를테면, 진과 성의 사이 같은 곳이. -?? -진과 성의 사이에 있는 정. 그게 바로 정연씨의 자리랍니다. 자, 저를 따라해보세요. 진! 정! 성! -진 정 성…? -바로 그겁니다! 진정성!!! K정연이 JD에게 손을 내민다. 손바닥 위에 놓인 USB. 겉면에는 "cinema, 2004"라는 글씨가 흐릿하게 보인다. -이건…? -꿈 속에서… 제게… -2004년이라면, 라브 디아즈의 < 필리핀 가족의 진화 >일까요? -글쎄요… -리산드로 알론소의 < 죽은 사람들 >일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 도플갱어 >? 그건 2003년이지. 그럼 < 밝은미래 >? 아냐 그건 2002년이고. 아니면 홍상수의 <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보면 알겠죠. 조심스럽게 노트북에 USB를 꼽는 K정연. 곧바로 자동재생으로 영화가 재생된다. 주인공이 불분명한 예식장안 풍경 예식이 끝난 듯 신부의 부케를 받으려 한쪽으로 몰려서는 여자들 신부가 등뒤로 부케를 던지고 날아오르는 부케를 향해 손을 뻗는 여자들 부케가 첫 번째 손을 튕겨서 다음 손을 거쳐서 통통 튕겨나가고 이 손 저 손을 차례로 튕겨나가다가 허공을 뱅그르르 돌던 부케가 왠 막대사탕을 들고 있는 손안으로 쏙- 들어간다. 카메라 빠지면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고선 이빨이 빠진 여자 아이가 방긋하고 웃는다. 여자아이 손에 들린 부케를 놀란 눈으로 보는 여자들. 그 위로 타이틀. “어린신부” 3) 1) 마르그리트 뒤라스.도미니크 노게즈, [말의 색채], 유지나 옮김, 미메시스, 2006 2) 유운성, '시네마, 역량과 유령 사이에서', [씨네21] 1300호 3) 필름메이커스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어린 신부> 시나리오에서 인용했다. https://www.filmmakers.co.kr/koreanScreenplays/54717 *** 그 외에도 히치콕의 < 현기증 > 뤽 베송의 < 루시 > 하룬 파로키의 <110년 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황인찬의 시 '무화과숲' 중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등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힌다.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한국영상자료원에 제출한 10편의 나의 영화 목록은 자료원이 제시한 기한 내에 속하되‘극장에서 본 영화들’을 기준으로 했으며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유들까지 작동한 결과 작성된 사실상 위부터 아래로의‘순위별’이며, 그러므로 최고의 영화는 홍상수 의 < 자유의 언덕 >이다. 다만 나는 내게 훨씬 복잡하고 중요한 영화여서 좀 더 오래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느끼는 <자유의 언덕> 대신 지금 이 자리에서는 리산드로 알론소의 < 하우하 >에 관하여 쓰기를 택했다. 나로서는 최상의 것 대신 최적의 것을 택한 것인데, 어떤 목록의 제시 이후에 그 목록에 관한 해명의 글이 요구되는 자리라는 점에서 최적의 예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하나의 경험이 계기가 됐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 하우하 >를 본 몇몇 동료들은 내게 물어오곤 했다. “이 영화의 무엇이 좋았는가?” 올해 칸 영화제에서 <하우하>를 보고 난 뒤 내가 이 영화를 영화제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기 때문일 것이다. 비교적 최초로 강력하게 호감을 표방한 자의 구체적인 의견이 궁금했던 것 같다. 더하여 그 질문은 대개 두 가지 반문을 괄호 안에 포함하고 있었다. 이 영화의 무엇이 좋았는가(그다지 좋지 않던데?), 이 영화의 무엇이 좋았는가?(좋은 것 같기는 하지만 무엇이 좋다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던데?). 나는, 면밀하고 치밀하다 해도 사실상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한 화답으로는 거의 무용한 어떤 적극적 반론(나는 이만큼 정확하다) 혹은 작품과의 대면에서 발생한 불안정한 감각적 전압을 견디고 표현하는 지난한 과정은 회피한 채로 기존의 참조적이며 이론적인 용어들에 기대어 짐짓 우월한 지위를 점유한 척 하는 과시주의적 거드름(나는 이만큼 알고 있다)을 피우는 대신에, 거칠지만 솔직하고 미완적인 비평적 화답의 한 방편으로서 내가 이 영화를 관람하며 겪어 나간 순간순간 마다의 감각적 체험의 추이 자체를 복기하고 싶어졌다(나는 이만큼 느꼈다). 작품과 나 사이의 감각의 전압을 혹은 내가 작품에 빠져든 침잠의 상태를 할 수 있는 한 기록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하우하>를 관람한 이들을 주요 대상으로, 설득 대신 수기를 택한 것이다. <하우하>를 보지 못한 독자들의 경우라면 상당한 난독증을 겪을 것이 예상되는데도 어쩔 수 없이 이런 방식을 택하게 됐다. <하우하>라는 영화 장면들의 흐름을 따라, 그 장면들을 보며 떠올랐던 나의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단상의 수준과 순서를 그대로 드러내며, 그러니 당연하게도 어떤 부수적이며 탈 맥락적인 또 다른 단상들의 개입까지도 허용하며, 그것들이 이 글의 구성에도 반영되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애석하게 부산에서는 일정상 영화를 다시 보지 못했으므로 기억의 흐릿함과 부정확함이라는 무능까지 포괄하면서, 그 체험의 시간을 돌아보려 한다. 처음, 보다 제목이 < 하우하 >였다(부산영화제에서의 상영 제목은 < 도원경 >이었는데, 이 제목을 듣자마자 멋진 번역이라고 무릎을 쳤다. 모국어로서 이보다 더 근사하게 의역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이 제목은 앞으로도 유용될 만한 높은 가치가 있다. 그럼에도 혼선을 무릅쓰고 지금 구태여 <하우하>라고 적은 데에는,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마주했을 때 이와 같은 제목으로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감독이 영화의 제목에 관하여 했던 어떤 말이 기억에 남아서다.“무엇보다‘하우하’라는 단어의 소리가 주는 느낌이 좋았다. 뭔가 인디언들의 지명처럼 들리기도 하고 이국적이면서도 불가사의한 것 같고,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부터 그 오묘함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씨네21,957호). 알론소의 이 말은 중요한 것 같다. 단지 작명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 영화의 연출에 관한 감독의 어떤 감각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뜻의 제목이 아니라 소리의 제목이며 기의의 제목이 아니라 기표의 제목이고 해석의 제목이 아니라 감각의 제목이다). 심신이 지쳐가던 칸 영화제 중반 즈음, 사물함을 열어 보니 이 영화의 전단지가 들어 있었다. 포스터를 보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 어두운 밤 혹은 새벽, 검은 대지의 지평선 너머로 푸르스름한 별과 빛이 보이고 가까이에는 기도하는 것인지 절망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제복을 입고 칼을 찬 채 눈을 감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비고 모르텐슨의 모습이 보였다. 포스터의 이미지만 보고도 이 영화와의 교감은 예감됐다. 그런 포스터들이 있다. 영화의 홍보가 전부인 것이 아니라 그 영화의 성질을 일견 담아내어 미리 느끼도록 하는 포스터들. 예컨대 홍상수 영화의 포스터는 내 느낌에 정확히 < 밤과낮 >부터 그런 중요한 존재물 혹은 일종의 부수적 예술 행위로 급상하였다. 가령 <밤과낮>의 포스터가 그렇다. 반바지를 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어느 여자의 하반신, 계단 아래에 쪼그려 앉아 걸레질을 하다 말고 그걸 올려다보는 어느 남자의 어색한 자세와 시선, 그런데 그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담고 있는 저 불가사의한 분위기가 그렇다. 그런 불가사의한 분위기의 일종을 <하우하>의 포스터를 보며 느꼈다. 알론소의 전작들에 솔직히 그다지 큰 애정과 기대가 없는 편이었던 나는 어떤 막연한 기대에 부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극장에 들어섰고 첫 장면을 마주하자 그 즉시 전율이 일었다. 1.33:1의 화면비 안에 놓인 인물들의 정확한 자리 혹은 우아한 형상이 그 전율을 일으켰다. 나는 첫 장면에서 이미 이 영화에 관한 호불호가 갈린다고 확신한다. 이 장면을 아름다움의 성취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름다움을 가장한 위악적 제스처로 규정할 것인가, 나는 전적으로 전자라고 받아들인 관객이다. 알론소는 이 영화를 1.85:1로 촬영했으나 후반 작업 중 지금과 같은 화면비로 바꾸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 화면비를 바꾼 다는 건 컬러로 찍은 뒤에 흑백으로 바꾸는 것만큼이나 대단히 위험하고 모험적인 결정이다. 그런데 이 위험한 모험은 적어도 이 영화에 관한한 옳았던 것 같다. 1.85:1의 <하우하>가 아름다울 리 없다고 나는 짐작한다. 화면비는 단순히 화면의 크기나 모양이나 비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형상과 화면이 서로 맺고 공유하고 결탁하여 일으키는, 이 말이 어쩌면 착란에 해당할지라도, 지각적으로는 밀도의 문제라고 나는 늘 느낀다. 화면비는 구도의 문제가 아니라 밀도의 문제인 것이며 어떻게 얼마나 채워져 있는가의 느낌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첫 장면, 바위위에 앉아 있는 아버지와 딸의 장면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딸은 카메라 쪽을 바라보고 앉았고 아버지는 뒤로 돌아 앉았다. 인물들은 정중앙의 정확한 자리에 꽉 차 있었다. 아름답게 꽉 차 있었다. 그들의 몸은 화면 안에서 중대한 권위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화면의 모서리에서부터 그들 몸 까지 이어지는 어떤 거리와 여백 그리고 정중앙을 점유하고 있는 그들 몸의 밀도의 팽팽함 때문에, 나는 아직 감동의 원인을 찾아내기도 전에 감동부터 먼저하고 있었다. 칼 드레이어의 후기 영화를 볼 때 이런 벅찬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내용의 전개와 무관하게 저 인물들의 밀도 높은 육체성이 화면에서 차지하고 있는 어떤 중대한 아름다움으로서의 권위와 지위가 그 감동적 경험의 요인이 되곤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점은 성공적일 때에만 그러하다. 예컨대 자비에 돌란이 < 마미 >에서 과감하게 선택한 1:1의 화면비는 유효하지 않거니와 치장에 가까워서 영화 내의 밀도를 허투루 만들어버린다. <마미>의 화면비 선택은 형상을 그 화면안에‘어떻게 채울 것인가’하는 지점이 아니라 화면의 양 옆을‘얼마나 잘라낼 것인가’하는 것에 치중한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잠시 1.85:1의 화면비를 구사하는 대목에서야 <마미>는 가장 아름다운 화면을 보유하게 된다. 알론소가 <하우하>의 화면 네 모서리를 둥글게 구부려 놓은 건 물론 디자인적 발상인 것 같다. 누군가는 이걸 싫어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젠체하는 장난 짓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둥근 곡선을 이 영화가 현실 안에서 비현실을 껴안는 자세로서 갖춘 우아한 시각적 은유 또는 이 영화가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동화가 되기 위해 갖추었어야 할 충분히 필요한 시각적 보충물로 받아들였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화면의 조건과 배경에 얼마간 눈이 익숙해지자 그리고 아버지와 딸의 육체를 벗어나자 이제 파타고니아의 드넓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SF영화가 세계의 어떤 기원을 강조하려 할 때마다 선택하는, 시간이 무화된 지리적 풍경이다. 하지만 나의 감탄의 다음 대상이 그 광대하며 원시적인 풍경은 아니었다. 오히려 좁은 실내 장면을 보며 두 번째 감탄사를 뱉었다. 아버지와 딸이 머무는 작은 텐트 안 장면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우하>를 보고 나서 존 포드의 < 수색자 >를 거론했다. 대표적으로 내가 칸 영화제 베스트 리스트를 청탁했던 평자 제임스 콴트는“형언하기 어려운, 알랭 레네가 연출한 것 같은 <수색자>”라고 <하우하>를 묘사했다. 충분히 공감할 만하지만 그건 <하우하>의 내용에서 기인한 감상이다. 공감할 순 있지만 내가 이 영화에 매혹된 이유는 아니다. <하우하>를 보며 내가 존 포드를 심각하게 떠올린 건 어느 한 대목인데, 딸을 찾아 나선 아버지라는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가 아니라, 딸이 떠나기 전 아버지의 잠자는 모습을 우두커니 보는 장면의 특정한 앵글에서였다. 그때 아버지와 딸을 각각 나눠서 찍고 있는 카메라, 거기서 느껴지는 어떤 기이한 애환과 존엄함이 문득 존 포드의 어떤 장면들의 무드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존 포드 영화의 앵글은 서사적으로 중요한 국면이 아닌 순간들에서조차 어떤 애환과 존엄함의 분위기를 엄중하게 품고 있는 경우들이 많다. 지금 당장 해명하기는 어렵지만 연달아 특정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의 첫 장면과 <러틀리지 상사>에서 병사가 전장에서 호각을 불기 위해 화면 중앙에 우뚝 서 있던 그 장면들이 그 때 문득 스쳐 지나갔다. 그 인물들을 찍어내는 앵글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어떤 존엄함과 애환이, 서사적 흐름과 무관하게 닥쳐오곤 했던 그 무드가 딸이 아버지를 두고 떠나려 하는 그 순간에도 문득 내게도 느껴진 것이다. 그렇게 좁은 실내의 앵글이 별안간 존 포드를 상기시키며 흥분의 상태로 나를 몰아간 것이라면, 떠나간 딸을 찾기 위해 아버지 군너가 텐트를 걷고 외부로 나가자 이번에는 거기 버티고 있던 빛과 색들이 나를 쓰러뜨렸다. 딸은 젊은 남자와 함께 막사에서 도망쳤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딸을 찾아 나서려 한다. 그가 쓸쓸하게 제복을 주워 입고 칼을 차고 천막을 걷고 나와 맞은 그 새벽의 빛과 색 때문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모든 것이 어둠과 빛의 교차였고 모든 색은 자기들의 원색을 생생하게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로써 이 슬프고 힘겨운 순간에조차 영화는 도발적이었고 도취적이었다. 하늘은 짙은 청록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풀들은 녹색이었다. 저 멀리 산과 대지는 아직 칠흑같이 어두운 검정색이었고 덩그러니 놓인 텐트는 하얗고 하얀 흰색이었으며 텐트 옆의 모닥불은 주황색으로 활활 타고 있었고 그 옆에 갈색과 붉은 색이 반반씩 섞인 제복을 입은 이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많은 영화를 촬영해 온 촬영 감독 티모 살미넨이 촬영을 맡았다는 사실은 그 뒤에 알게 되었다. 칸 영화제에서 내가 본 영화들 중 여기에 견줄만한 빛과 색의 마술을 부린 작품은 토미 리 존스의 < 홈즈맨 >(촬영 로드리고 푸리에토)과 예시카 하우스너의 <아모레 포르> 단지 두 작품뿐이다(촬영 마틴 쉴라츠). 우리는 오즈 야스지로가 미루고 미룬 끝에 선택한 아그파 필름의 저 냉랭하고 음험한 색이 그의 영화에서 어떤 기이한 영화적 인상을 불러일으키는지 알고 있다. 더러 누군가는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오즈 야스지로에게 바쳤던 과장된 헌사를 기억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특히나 존경의 이유로서 오즈 영화의 그 붉은 색을 거듭 찬미했다. 그러한 특별하고 특정한 빛과 색의 효능이 <하우하>에도 있었다. 평론가 켄트 존스도 <하우하>를 보고 유사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이 영화의“거의 모든 이미지가 색과 빛의 모험이며 어떠한 외양적 술수나 조작도 없이 마네의 천부적인 색의 가치를 수행해내고 마는 많은 대목들이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므로 이 새벽 이후에 이어지는 장면들이 오랫동안 낮 장면들이라는 사실은 내게 중요해 보인다. 이후에 군너는 쏟아지는 햇볕 아래 드넓은 대지를 대책 없이 해매고 돌아다니게 된다. 인상주의 화폭안에 담긴 듯 했던 강렬한 빛과 색은 이제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도래하기 전까지 잊히고, 한동안은 오직 백주 대낮의 태양 아래 쓰러지기 일보 직전으로 걸어다니는 군너의 처량한 여정뿐이다(문득, 정말 낮장면만 한동안 계속됐던가 의심이 든다. 내가 기억하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 글은 이러한 기억과 망각의 활동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니, 그에 근거하여 계속 전개해보려 한다). 그러니 빛과 색에서 받았던 나의 감동은 그의 허무하고도 피로한 움직임과 동선에 기인하여 또 다른 축으로 옮겨와 있었다. 군너의 움직임과 동선은 이 영화의 화면비율과 또 다른 긴장의 국면에 놓이기 시작했다. 예컨대 그는 거의 매번 수평으로 움직이는 법 없이 수직 혹은 대각선으로 화면을 질러 다녔다. 수평과 수직의 동선이 이론적으로 어떤 인지적 차이를 가져오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거의 정사각형의 화면을 오르내리락 반복하는 그의 움직임이 갑갑하고 무용해서 더 피곤해 보였던 건 사실이다. 무료하기는커녕 손에 땀을 쥘 정도의 긴장감으로 넘쳐나는 장면들의 연속이었다. 군너의 반복적이고 지난하고 피곤한 물리적 여정이 그러한 긴장감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물리적 여정은 지겹거나 단순하지 않다. 예컨대 군너의 그 한 낮의 여정은 파트 1과 2로 교묘하게 나뉜다. 파트 1, 군너는 말을 타고 딸을 찾아 다닌다. (그러다 딸과 함께 도망친 젊은이 코르토가 혼자 죽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딸의 행방은 묘연하다. 군너의 근심은 더해진다. 하지만 그때 군너는 숨어 있던 원주민에게 총과 말을 탈취당한다. 때문에...) 파트 2, 군너는 이제 터벅터벅 걸어다녀야만 한다. 그는 더 느려졌고 더 피곤해졌으며 더 절망적이다. 말과 총을 잃어 버리는 사건 하나가 끼어 들어 내러티브 구조에 일단락의 임시적 균열을 일으키자, 그의 육체의 피로도와 심리의 긴장 상태는 급속하게 훨씬 더 아득한 늪으로 빠져 들었고, 동시에 그의 움직임과 동선과 속도감의 차원에도 더 큰 변화가 아니 더 큰 절망적 분위기가 배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도대체 이 정처없고 무력한 수색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때쯤 문제의 털빠진 들개가 나타나 그를 한 명의 노부인에게 인도한다. 그리고 나의 감동의 정체도 그 개의 출현을 따라 서서히 다시 또 바뀌기 시작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있다. 영화 속의 시간도 낮이 아니라 밤으로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 다가올 장면들에서 내게 감동스러운 것은 동선도 움직임도 아닌 그 밤이며 비통한 음악의 자리이며 몸의 흔적이며 폐쇄적 공간이며 기이한 대화이며 그걸 거치자 엄습해 오는 우주적이며 상대적인 시간에 대한 멜랑콜릭함이며 현실에서 어느새 비현실로 옮겨간 시간의 차원적 전환성이었다. 예컨대 군너가 노부인을 만나게 되는 대목에서부터 그녀와 헤어져 돌아가는 대목 사이에서 그러한 것들을 느꼈다. 들개를 쫓다가 밤을 맞은 군너가 기진맥진한 채로 장검을 옆에 벗어 놓고 바위 위에 털썩 드러 누운 그 순간, 밤하늘의 별들이 무수하게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그 순간 기타리스트 버켓헤드가 연주하는 기타의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길고 험한 육신의 피로와 심리적 상처의 아픔을 기타의 연주가 대신 울고 있었다. 저 뒤로는 지금 일군의 별자리들이 반짝이고 있고 군너의 잠이 혼란스럽게 깊어질수록 별들은 대지를 향해 세상이 끝날 것처럼 무리지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장면을 보며 어떤 앞선 장면을 기억해 낼 것이었다. 딸이 사라지기 직전, 영화 속 딸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연인 코르토에게 했던 중요한 말이 있다. 아마도 그들이 사랑을 나눈 뒤쯤이었을텐데 풀밭의 돗자리에 앉아 딸이 코르토의 등에 새겨진 반점들을 보고 매만지며 “꼭 별자리 같다”고 말한다.“쏟아지는 별처럼 아름답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말하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별자리 그리고 아름답게 쏟아지는 별들은 장면이 흘러 군너의 그 밤에 이르러서야 시각화 되는 것이다. 연인의 육체위에 새겨져 있던 그 아름답게 쏟아지는 별자리라는 모반에 관한 인상은, 딸을 찾는 아비가 바위 위에 지친 육신을 눕힌 그 밤에 이르러 실존의 풍경이 되어 있다. 누군가의 사랑은 누군가의 슬픔이 되었고 누군가의 등은 누군가의 하늘이 되었고 누군가의 모반은 누군가의 별자리가 되었다. 그 내부와 외부, 나와 타자, 육체와 우주의 기이한 설화적 이접이 나는 아름다웠다. 물론 이런 장면은 요설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이 요설을 과장되어서 허위적인, 단지 지나친 형식주의로서의 탐미적 자세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반문할 필요조차 없었다. 나 자신에게 기입되어 있던 감탄의 경험들이 깨어나는 걸 느낄수 있었다. 저 멀리 불꽃 축제가 열리고 미끄러지듯이 나아가는 자동차의 수평 움직임속에서 도노반의 <허디거디맨>이 음울하게 들려오는 < 조디악 >의 첫 장면. 바비 빈튼의 <블루벨벳>이 고즈넉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정원의 한 남자가 뒷목을 짚으며 쓰러지고 풀숲의 잘린 귀로 카메라가 불길하게 이동해가던 < 블루벨벳 >의 첫 장면. 고되고 성스러우며 유머러스했던 종교적 여행길의 마지막에 이르러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 앞에 넙죽 업드려 경외를 바치는 그 순간 장엄하게 노래가 울려퍼지던 <새들의 노래>의 클라이맥스 장면. 시름에 젖은 여인이 슬로우 모션으로 국수통을 들고 좁다란 계단을 오르내리는 가운데 우베마야시 시게루의 현음악이 들려오던 < 화양연화 >의 국수집 장면. 그리고 수시로 그와 같은 순간들을 영화의 접히고 펼치는 접경지대로 사용하곤 하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들. 그것들에 황홀해 한 만큼 <하우하>의 이 장면에서도 황홀했다. 그리고 영화는 나의 황홀을 뒤로 하고 또 다시 앞으로 나아 갔다. 음악과 풍경의 장면들이 지나가고 빛의 장면들이 다시 도래했다. 하지만 이 번에는 다소 다르게 돌아왔다. 군너가 동굴 안으로 들어가 노부인을 만나자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특별한 (어둠과) 빛의 효능이 이들을 감쌌는데 여기 특별하게 새로 개입해 들어온 것은 적절한 연극적 공간성이었다. 핀조명과도 같은 푸르스름한 한 줄기 빛을 받으며 군너와 노부인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군너가 노부인에게 병정 인형을 주니 그녀가 좋아한다(군너의 딸은 그 병정 인형을 갖고 도망쳤지만 군너는 그 인형을 딸을 찾는 도중에 발견했다). 둘의 대화는 가까워졌다가도 조금씩 빗나간다. 이 노부인은 누구인가. 노부인은 군너가 잃어버린 딸의 노년의 모습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그렇게 애매해지는 사이에 어떤 사물과 제스처는 놀랍도록 다시 돌아와 자기 자리를 차지하면서 우리를 자극한다. 딸에게 그토록 중요했던 나침반과 병정 인형은 군너와 노부인 사이에서 화제에 오르고 마침내 첫 장면에서 딸이 아버지의 어깨에 살짝 고개를 기대었던 것처럼, 노부인이 군너의 어깨에 그렇게 기대며 같은 제스처를 보일 때, 마침내 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사실로서 일치짓고 확정짓는 것과 무관하게, 말하자면 사실관계와 무관하게 그 인상관계 때문에 아득한 애처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첫 장면에서 딸이 자신은 언제쯤 개를 가질 수 있는 것이냐고 물었던 질문을 떠올렸다. 지금의 노부인이 오로지 개를 가졌을 뿐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아직은 남아 있는 에필로그에서 현대의 어느 대저택에 사는 소녀가 털빠진 개를 또 한 마리 갖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세 마리 개만이 실마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즈음에 영화적 사태를 직감한다. 우리가 군너의 움직임과 동선을 좇아 다니는 동안 군너의 실종된 딸은 그녀의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군너가 그의 물리적 시간을 사는 동안 딸은 그녀의 서사적 시간을 살아갔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앞에 있는 저 노부인이 군너가 그토록 찾아 해멘 그의 딸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거듭 말해도 그것은 사실 관계가 아니라 인상 관계로서 그러하다. 딸을 찾아 헤맨 군너의 시간관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걸 가능하게 하는 시간관은 무엇인가. 이것이 중요한데, <하우하>를 본 내가 이때쯤 직감하게 된 것은, 우리가 군너의 여정을 따라다니는 동안 실제로는 더없이 동화적이며 설화적이어서 상대적인 시간의 대지를 건너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근거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에서 밤 장면은 기껏해야 한 번 정도 등장한 것 같다(나는 여전히 나의 이 기억과 진술이 의심스럽다. 하지만 이 의심에 바탕해서 감상을 지속하려 한다. 며칠 밤이 등장했다 해도 사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밤과 낮의 등장 시간으로만 측량하자면 군너는 단 하루의 시간 동안 딸을 찾아 헤맨 것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그럴 경우 단 하루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하지만 알론소가 군너의 그 무수했던 밤들 중 오로지 어느 하룻 밤만을 특화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이 영화의 시간이 하루라고 우린 단정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럴 경우 이 영화는 하루처럼 보이도록 구성된 수많은 날들로 구성된 영화다. 물론 여기에는 군너의 변하지 않은 외양이라는 또 다른 모순점이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어느쪽이건 군너가 그렇게 오래 낮의 장면들을 해메야 했던 이유 중에는, 그리고 우리가 그걸 보아야만 했던 이유 중에는, 구조적 혼돈을 통한 시간의 상대적 성립이라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밝음과 어둠으로 계산되는, 그리고 그것때문에라도 실제로는 계산이 아리송해지는 낮과 밤의 시간의 흐름과 군너라는 인물의 동선에 따른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심리적 시간의 흐름이 동화적이고 설화적인 이 영화의 상대적 시간의 빅뱅을 가능케 하고 있다. 시간의 초점을 모순되게 하고 중첩시켜 상대화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건 알론소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점時點이 중첩된다면 시점은視點 전환된다. 그리고 시점視點의 전환을 따라 시제의 전환까지 이루어진다. 기이한 건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비주얼이 아니라 보이스라는 데 있다. 노부인의 동굴을 나온 다음 군너는 힘없이 무릎을 꿇는다. 내가 포스터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자세로 그는 절망한다. 내 기억으로는 바로 이때쯤 여인의 보이스 오버가 들려왔고, 군너의 저 여정을 설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번역된 영어 자막에 근거하자면) 과거형이었다. 노부인의 보이스 오버로 그렇게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정리해내자 이 영화는 갑자기 그간의 서사에서 완전히 돌아서, 군너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의 어떤 회상의 이야기인 것 같은, 그것도 그녀가 과거에 겪었던 회상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은, 시점 주체의 전환 및 시제의 전환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 것이다. 보이스 오버의 출현에 따른 시점視點과 주체와 시제의 변경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영화에 그어지는 또 하나의 곡선이었다. 군너가 동굴을 빠져 나와 걷는 그때 목소리는 묻는다.“무엇이 삶을 움직이게 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그리고 잠시 뒤 군너가 대지에 무릎을 꿇을 때 그 말은 한 번 더 반복된다.“무엇이 삶을 움직이게 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디졸브가 일어나 장면이 바뀌고 이 영화의 2부에 해당하는 짧은 에필로그가 등장한다. 동시대의 어느 대저택에서 어느 소녀는 잠이 깬다. 앞선 이야기는 꿈이었을까. 소녀는 개를 끌고 산책을 나가고 아버지를 만난다. 앞서 딸을 찾는 아버지 군너의 긴 수색이 있었다면 에필로그에는 아버지를 스쳐 지나간 딸의 짧은 산책이 있다. 소녀는 숲속에서 병정 인형을 줍지만 잠시 손에 쥐었다가 무심하게 호수에 휙 던져버린다. 병정 인형이 동심원의 파장을 일으키고 그 물결에 군너가 해멨던 19세기 파타고니아의 풍경이 잠시 비쳤다가 사라진다. 무엇이 삶을 움직이게 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나는 생각했다. 다시, 보다 나의 두 번째 관람도 짧은 에필로그에 해당한다. 알론소의 인물들은 전작에서도 대체로 “외로운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종종 누군가를 찾아 나서거나 향해갔고, 광대한 풍경을 혹은 폐쇄된 장소를 느리고 오래 유영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주인공의 내용적 여정에 새롭게 인위적이고 구조적으로 어떤 성질과 상태가 부여됐다는 점일 것이다. 알론소는 아르헨티나 시인인 파비앙 카사스가 쓴 시나리오에서 자신이 취하고 싶은 것들을 취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혔는데, 개인적인 바람을 말하자면, 알론소가 카사스와 지속적인 작업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카사스가 알론소 영화의 수준을 급상시켰다고 나는 생각한다. 알론소는 전작들에서 시각적 인위와 연관된 사건의 매듭을 고안하는데 매우 불철저하거나 무관심하거나 그렇게 무관심해야만 좋은 영화라고 믿는 경우들이 많았다. < 하우하 >는 다르다. 인물과 사건의 매듭이 전체 구조에 보다 긴밀하면서도 중요한 관계를 맺으며 영화 전체의 신비로운 리듬이 배가됐다. 그의 전작들은 인위적 구조에 무관심한 대신, 앵글에 담기는 장소의 리얼한 공기의 농축에 치중했는데, 자신이 취하고 싶은 만큼 완전치 못해서 원하는 만큼 충분히 물질적이지 못하거나 얼마간 지루했다. 알론소의 영화들은 무언가 조금씩 미비했고 그걸 자신의 형식적 진지함으로 덮곤 했다. 그런데 티모 살미넨의 참여가, 카사스의 시적인 개입이 알론소의 세계를 고양시킨 것 같다. 어쩌면 동시대의 감독들을 신중하게 의식한 긍정적인 결과일 수도 있겠다. <하우하>는 확실히 알베르 세라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들을 의식하고 있다. 현실에 인위적 구조를 더하여 비현실을 풍요롭게 끌어안으면서 다시 현실 쪽을 바라보게 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이 긍정적이면서도 은밀한 모사의 성취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더 지켜보아야겠다. 다만 어떤 영화와 닮았는가 하는 것은 중요치 않을 수도 있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부터 빅터 시외스트룀의 어드벤처물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와 닮았다고 거론되는 수편의 영화들에 관해 나는 들었지만, 그 지적들이 중요하게 들리지 않는다. 어떤 영화와 닮았는가 지적하는 것 보다는, 어떤 영화를 느끼는 방식으로 이 영화도 느낄 것인가, 묻는 건 어떨까. 알베르 세라의 미치광이 기사와 우스꽝스러운 동방 박사들을,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주정꾼들과 길 잃은 소년들을,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승려와 군인과 요괴들을 느꼈던 감상의 방식과 흡사하게 느껴보는 건 어떨까. 이른바, 불가사의함에 관한 시적 무드의 설화 내지는 동화라고 간주하며 감상해보는 것은 어떠할까. 나는 그렇게 느꼈다. 알론소의 영화가 얼마나 더 신비롭고 도발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는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단지 나는 이러한 감각의 과정들을 체험하며 <하우하>에 깊이 도취되었고, 좀처럼 거기에서 깨고 싶지 않을 뿐이다.
영화는 (리산드로 알론소가 지금까지 고수했던 몇 가지 고집 중의 하나인) 검은 화면의 붉은 폰트로 영화의 제목이자 고대 전설로부터 알려진 ‘풍요의 땅(Jauja)’을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그 곳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길을 잃게 된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이 설명은 세계 여느 전설에도 있을 법한 상상의 공간에 대한 통속적인 소개에 불과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영화에 대한 짐짓 익살스러운 예고이자 경고같이 들린다. 데뷔작인 < 자유 La Libertad >(2001)부터 일관되는 리산드로 알론소의 영화적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사실 길을 잃기 십상이다. 어디론가 향하는 주인공의 행로를 따르다 보면 막다른 곳에 이르고, 가냘픈 서사의 고리들을 이어가려 애쓰다 보면 최소한의 진술도 어려워지는 비-서사의 영역에서 헤매게 되며, 어떻게든 관람을 이어가려 애쓰다 보면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쯤 되면 내가 영화관에 앉아있는지, 스크린-세계 안에 들어가 있는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지 말 그대로 길을 잃어버린 셈이다. 알 수 없는 땅으로서의 목적지 혹은 목적 없는 여정이란 낯설 뿐만 아니라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는 이 여정은 그래서 경이로운 순간들을 제공할 수 있다. 목적이라는 영화의 (혹은 삶의) 거대한 허구를 삭제했을 때 비로소 포착할 수 있는 어떤 진실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존재와 세계, 주체와 역사, 관념과 물질을 매개하는 동시에 그 관계를 조직하는 시네마의 진실이라는 맥락에서 < 도원경 >은 리산드로 알론소의 전작들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19세기 말 아르헨티나 남단의 파타고니아. 원주민과 대치하면서 영토 확장에 나선 아르헨티나군의 소위 ‘사막의 정복’을 지원하기 위해 덴마크 장교인 군나가 딸 잉게보그와 함께 부임해온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잉게보그는 젊은 군인 코르토와 함께 행방불명이 되고 군나는 딸을 찾기 위해 말에 올라 홀로 길을 떠난다. 딸을 찾기 위한 군나의 여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영화의 초반부 < 도원경 >은 알론소의 전작들과는 사뭇 다르게 최소한 고전 서사영화의 흐름을 따르려 하는 듯 보인다. (비교적 많은) 등장인물들, 대사를 비롯한 인물들 사이의 행위들, 최소한으로 제시되는 극적 갈등과 장르적 지시(웨스턴) 등은 비고 모텐슨이라는 거물 배우의 이름과 함께 이 작품을 알론소의 전작들과 살짝 구분시켜주기도 한다. 하지만 초원과 물을 지나 바위로 가득한 험준한 산을 거치는 군나의 행보는 결코 그를(관객을) 딸에게로(이야기의 목적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지칠 대로 지친 군나가 산꼭대기에서 만나는 정체 모를 여성의 등장과 그녀와의 대화, 그 뒤를 잇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서사가 최소한으로 설정해놓은 시공간과 인물의 허구적 관계를 모두 뒤죽박죽으로 연결 지으면서 서사적, 장르적 관습에 기인하는 기대를 송두리째 저버린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잠에서 깨는 소녀 잉게보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21세기 덴마크 교외의 저택으로 이동한다. 그녀가 정원에서 주운 병정 인형(이 인형은 영화 초반부 바닷가에서 코르토가 잉게보그에게 준다)을 매개로 군나와 잉게보그, 19세기의 아르헨티나와 21세기의 덴마크는 느슨하게 연결되지만, 영화는 그 기묘한 공존에 대해서 어떤 서사적 설명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가 제공하는 그 어떤 현실감각과 서사적 핍진성에도 부합하지 않은 채 연결되는 < 도원경 >의 시공간, 그리고 그 경계를 넘나드는 알론소의 인물들은 판타지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판타지의 비현실성이 구성된 (허구적) 현실의 또 다른 호명이라는 점에서 <도원경>에서 파괴되는 현실감각은 실재에 다가가고자 하는 알론소 영화의 핵심 원리인데, 이런 맥락에서 <도원경>은 일상을 구성하는 소소한 행위들과 그 행위들이 점유하는 공간들을 세밀하게 담아내는 다큐적 카메라와 최소한의 서사 등 < 자유 >와 < 죽은 사람들 Los Muertos >에서 < 리버풀 Liverpool >까지 알론소의 영화력을 관통하는 그의 미학적 관심과 양식적 고민을 공유한다. 이는 결국 영화의 탄생에서부터 시작된 궁극적인 고민인 영화-리얼리즘의 제문제, 즉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현실과 대면하게 할 것인가라는 형식적, 정치적, 윤리적 문제와 다름없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대답으로서 알론소의 영화에는 항상 공간에 대한 복잡한 시선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시선들은 서사의 영역 안에서 조화롭게 구성되어 총체적인 (허구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각각의 시선이 구성하고자 하는 세계-관을 훼손하고 파괴한다. 풍경들은 결코 서사의 배경이나 독립적인 캐릭터로 머물러 있지 않다. 파타고니아 해변가와 바위산, 고지 평원의 숨 막히듯 아름다운 풍경들은 서사와 주인공의 응시 바깥에 머물면서 이국적 경관을 넘어 낯선 미지의 땅, 장소성을 상실한 불가지의 영역이라는 위상을 갖는다. 4:3의 아카데미 비율(acedemy ratio)과 모서리를 둥글게 만든 프레임은 우리가 < 도원경 >에서 보게 되는 풍경들이 매개된 공간임을, 허구적 현실을 구성하는 동시에 그 현실을 담고 있는 단자적 세계임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장치다. 공간을 기록하는 정지된 카메라, 그 프레임을 통해 등장하고 퇴장하는 인물들은 공간들을 점유하거나 통제하지 못한다. 끝내 찾을 수 없는 딸을 찾아 헤매는 군나는 공간의 점유와 그 안에서의 거주가 불가능한 어떤 난국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다. 알론소의 정지된 카메라와 가시적 프레임이 영화-관객(주체)-현실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영화형식의 물리적 조건들로 부각된다면,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의 공존, 종착지 없는 여정의 흐름 안에서 부유하는 인물들은 시간성이라는 맥락에서 같은 문제들에 접근하는 또 다른 전략이다. < 도원경 >의 중반 이후는 잉게보르를 찾아 파타고니아 고산지대를 힘겹게 지나가는 군나의 여정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그 추적의 플롯은 그 어떤 단서들도 제공하지 않는다. 공격당해 쓰러져있는 코르토를 무참하게 살해하는 군나의 모습이나 위협적인 원주민의 등장은 서사적 추동력을 전혀 갖지 못한다. 잉게보르가 막사에서 발견하고 취한 나침반은 이런 추적의 방향 없음을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자신을 잉게보르와 동일시하는) 중년여성의 동굴에서 다시 등장한다. 추적이라는 서사의 장르적 쾌감 대신 우리가 계속 경험하는 것은 공간들을 힘겹게 지나치는 군나의 여정 그 자체, 혹은 그 여정이 갖는 시간의 흐름이다. 목적이 삭제된 여정이 가진 공간의 연쇄,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시간의 흐름은 영화가 매개하는 시간성의 경험이라는 알론소의 또 다른 고민을 보여준다. 그 시간은 목적을 향해 흐르며 목적지에 도달하면 사라져버리는 도착자의 시간이 아니라, 이동하는 공간들 하나하나에 내재하고 있는 지나가는 자의 시간이다. 이 지나가는 자의 시간은 19세기 말 아르헨티나라는 역사적 시간, 그리고 ‘사막의 정복’이라는 근대 식민적 욕망과 중첩되면서 시간에 대한 관념적 사변을 넘어 역사적 시간과 기억이라는 화두로 이어지며 그것은 또한 ‘누구’의 역사이며 기억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실패한 탐정의 토포스를 갖는 군나는 결국 < 도원경 >이 지시하고 있는 역사 안에서의 주체, 즉 근대 유럽의 식민자라는 주체의 훼손된 판본이다. 이 실패자와 그의 주변에 서 있는 인물들. 사라진 잉게보르와 꿈에서 깨어나 병정 인형을 줍고 또 이를 다시 버리는 잉게보르, 괴물 같은 원주민의 형상, 자신을 잉게보르와 동일시하던 중년여성. 그들과 목적론적 히어로의 가면을 쓴 군나 사이 그 어딘가에 관객의 자리가 있다. 공간의 점유를 위협받는, 혹은 아예 공간을 그저 지나가는 자로서의 알론소의 주인공들은 고전적 서사가 제공하는 주체의 ‘어떤’ 허구에서 관객을 해방시키는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가 된다. 그 사라진 히어로의 자리를 메우는 것은 공간-주체-시간에 대한 또 다른 사변의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