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 소녀 캐트리
- 감독
- 사이토 히로시
- 제작년도
- 1984
- 출연
- 오이카와 히토미, 김진숙, 후루야 토오루, 시오야 요쿠, 타키자와 쿠미코, 코우사카 마코토, 마츠시마 미노리, 코바야시 유코, 이노우에 카즈히코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영화감독의 투신자살 시퀀스로 담긴 충격적인 영화가 있다. 심지어 연기한 사람은 해당 영화의 감독( 이장호 ) 본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인공들이 웃통을 벗어 던지고 국회의사당에서 기괴한 춤을 추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바로 1984년 개봉작, 영화 < 바보선언 >의 도입부와 결말이다. 개봉 연도를 보면 금세 눈치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제5공화국 전두환 독재 정권의 악행이 가장 극에 치달을 때 제작되고 개봉된 영화이다.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을 검색해 보면, 이 영화는 서슬 퍼런 정부의 검열을 피하여 어떻게든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자포자기한 상태(김동원, 2008)’에서 만들어진 괴작이자 걸작이라는 평이 대다수이다. 검열을 피하고자 극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행으로 채워놓고, 촬영조차도 기행 그 자체였던 사실 덕분에 역설적으로 1980년대 초반,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초현대적인 함의와 시사점을 주는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신군부 검열 당국이 풍자와 해학에 조예가 깊었거나, 혹은 영화를 보는 눈(교양)을 더욱 갖췄더라면 이 영화 또한 가위질을 당했을 수 있었겠으나 천만다행으로 그러지 못했던 듯 하다. 덕분에 우리는 1980년대 초반 서울을 중심으로, 비인간적인 현대사회(혹은 정치 환경)에서 소외당한 이들이 거니는 한국의 도시공간을 ‘괴상한 시각’으로 2024년 지금 이 시점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는 어떤 공간이 어떤 시각으로 담겨져 있는지 주요 장면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하월곡동 빈민가 영화의 인트로는 주인공인 동칠( 김명곤 )이 하월곡동 빈민촌 주거지를 걸어 내려오는 시퀀스로부터 시작된다. 수 초 동안 마을 주민들이 마치 축제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노는 모습을 카메라는 잠시 비추는데, 이 영화에서 ‘인간적인 도시공동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사실상 마지막 장면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다리가 불편한 동칠이지만, 수많은 자동차가 오고가는 큰길에는 횡단보도가 없기 때문에 육교를 지나가야만 한다. 40년이 지난 지금, 이 지역들에서는 재개발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며 영화 속에 담긴 야트막한 서민 주거지의 모습은 머지 않아 완전히 사라질 지도 모른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하월곡동 빈민가.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였다. 하월곡동의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한데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 이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인간적인' 장면일지도 모른다. 명동과 을지로입구 아마 동칠은 영화 속에서도 잠시 비춰진 8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한 것일까, 다음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명동과 을지로입구 일대를 비춘다. 깔끔하게 정리된 길가, 산뜻한 중형차(현대 그라나다), 고동빛깔의 미도파 백화점과 갓 개업한 롯데백화점 본점과 누가 봐도 썩 세련되지 못한 모습의 동칠은 내내 부조화를 이룬다. 카메라가 미도파와 롯데백화점을 올려다보는 씬은 영화 < 오발탄 >(유현목, 1961)에서 주인공 철호( 김진규 )가 이 부근을 걷는 씬을 연상케한다. 촬영 각도와 흑백·컬러 여부가 다르긴 하지만, 소외되었거나 불쌍한 시민과 화려한 서울 속 백화점 간의 대비만한 극적인 표현 수단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장면이다. 끊임없는 자동차의 행렬과 미도파 백화점(좌측), 롯데백화점 명동본점(우측)이 추레한 차림의 동칠 뒤편을 장식한다. 당대 최고급 승용차였던 현대 그라나다와, 명동 거리를 정처없이 누비는 동칠의 조우. 이대 앞과 신촌 이윽고 동칠은 청계5가 부근의 어느 빌딩에서 투신한 의문의 영화감독의 옷가지와 장신구 등을 탈취한다. 카메라는 빌딩의 옥상에서 청계고가도로와 그 인근 평화시장을 훑다가, 이화여대 정문 앞 번화가를 타임랩스로 추적한다. 장장 1분 동안 이어지는 이 시퀀스는 4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감탄을 절로 자아낼 정도로 지극히 현대적이다. 일부러 간판과 옷차림과 자동차만을 옛날 것을 가져다가 요즘 찍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1983년의 이대 앞은 40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건너뛰어 2024년 시청자의 눈동자에 내리꽂힌다. 나아가 이대 앞의 상권은 육교에서 동칠이 한눈에 반한 ‘가짜 여대생’ 혜영( 이보희 )이 도시적인 소비를 마음껏 누리는 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부족함 없이 해낸다. 실은 매춘부이지만 그림 같은 대학생의 생활을 동경하는 혜영과, 그 뒤를 쫓는 동칠, 그리고 이 둘을 포착하는 카메라를 통해 우리는 1983년의 대학가 상권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다. 번화하기 그지 없는 이화여대 정문 앞의 풍경. 지금도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대 앞 골목을 누비는 여대생들과 차량의 행렬. 40년이 지난 지금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로 이 씬을 재현하면 어떨까. 이런 혜영을 어떻게든 납치하고자 하는 동칠은 우연히 마주친 자동차 정비공인 육덕( 이희성 )의 택시에 올라타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포니 택시가 이대 앞과 신촌 기차역 앞을 위험천만하게 종횡무진하며 사실상 카 체이스와 비슷한 활약을 펼치는 점도 볼 만한 부분이다. 16분 언저리에 누가봐도 교통 통제라곤 없이 이대 정문으로 포니 택시가 돌진하는 씬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거 무슨 짓인가?” 싶을 정도로 제법 긴박한 느낌을 준다. 이대 정문으로 돌진하는 육덕의 택시. 깜짝 놀란 학생들과 달려나온 경비원의 모습이 뚜렷하게 담겼다. 청량리역 앞 광장 40분부터 45분까지 장장 5분 동안, 이번에는 청량리역 앞 광장에서의 시퀀스가 이어진다. 이대 앞 시퀀스가 그랬듯이, 제법 멀리서 망원렌즈로 인파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주인공들을 담아내는 데에 여념이 없다. 어떻게든 ‘장사’를 하려고 남자에게 접근하는 혜영,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고군분투하는 동칠과 육덕의 씬이 교차되는 와중에,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인파의 모습은 한 편의 역전 광장 다큐멘터리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영화 속 모습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지금은 화려하기 그지 없는 롯데백화점과 코앞에 들어선 200미터급 초고층 주상복합, 현대적인 버스 승강장으로 인해 이 시절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당시에 갓 등장했던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롯데리아의 광고, 청량리역 맞은편의 미주아파트와 그 상가건물의 모습만이 40년 전과 지금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여겨진다. 망원으로 담아낸 청량리역 앞 광장 씬. '장사' 대상을 물색하는 화면 정가운데의 혜영 너머로 지하철 출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당시의 고급 유행 식품이었던 롯데리아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육덕과 동칠의 뒷모습. 태안군 연포해수욕장 동칠과 육덕, 그리고 혜영은 매춘부의 거주지에서 도망쳐 나와 충남 태안군의 연포해수욕장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아마도 이 셋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사이 좋게 버스를 타고 태안으로 향했을 것이다. 54분경, 즐겁게 뛰노는 세 사람의 머리 위로 큼지막하게 비춰지는 ‘연포해변무대’라는 여섯 글자는 이 곳을 찾지 않았던 이라 할지라도 단박에 촬영장소를 캐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지금도 야외 무대는 리뉴얼을 거쳐서 그대로 존속하고 있으며, 부근에는 이 영화의 촬영 기념비까지 세워져 있다고 하니, <바보선언>의 ‘성지순례’ 코스로서 안성맞춤아라 할 수 있겠다. 연포해수욕장의 야외무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세 사람.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혜영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후, 동칠과 육덕은 대관령의 목장에서 그들의 방법으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픈 ‘장례’ 의식을 치러준다. 그리고 이 둘은 비가 쏟아지는 국회의사당 앞, 여의도 광장에서 또다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막판에 이르러서는 웃통까지 벗어 던진다. 이대 앞과 청량리역 앞 광장에서 그랬듯이, 이 장면도 사전에 촬영 허가 없이 기습적으로 찍은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이런 장면을 찍겠다고 사전에 촬영 허가를 낸다고 해서, 수리될 가능성은 0에 수렴할 것이다. 이 시퀀스는 사전 지식 없이 보더라도, 동칠과 육덕이 작중에서 겪어 온 부조리함과 그에 기인한 울분을 국회의사당으로 대표되는 ‘국가’를 향해서 남김없이 토해내는 의미로 단박에 이해될 수 있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촬영할 당시의 제11대 국회에는 야당다운 야당이라곤 일절 존재하지 않았으며, 전두환이 속한 여당 민주정의당과, 국가가 개입한 ‘관제 야당’만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만큼 이 시퀀스는 더더욱 그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군사정권의 거수기 역할을 하던 제11대 '괴뢰 국회' 앞에서 반라의 광기를 보여주는 동칠과 육덕의 뒷모습. 이상으로 꼭 40년 전에 개봉한 영화, <바보선언>의 주요 공간을 짧게나마 돌아보았다. <바보선언>은 감독 스스로가 평했듯이 제대로 ‘각을 잡고’ 찍은 것이 아니라 군부독재와 검열이라는 사회적 한계를 어떻게든 비집고 들면서 제작된 덕분에, 당대의 공간적 배경이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꾸밈없이 담겨진 영화가 되었다. 40년 전과 비교하여 물질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도시 곳곳이 말끔하게 새단장을 거친 지금이지만, 영자원 한국고전영화 유튜브 채널 에 올라온 이 영화의 덧글란에 ‘걸작’이라는 상찬이 계속해서 달리는 것은 분명 이 영화가 지금의 우리 사회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는 뜻일 것이다. 참고문헌 김동원, “ 사전검열이 만들어낸 명작 <바보선언>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2008. 9. 2. 김성욱, “ [한국영화걸작선]바보선언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홈페이지, 2012. 11. 28. 김영준(도시공학 연구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 독수리 >는 올해(2022년) 네마프(Nemaf: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에서 관람했다. 아무 기대 없이 홈페이지 이미지만 보고 선택했는데, 영화가 너무 좋아 그날 본 다른 영화들은 생각이 안 날 정도였다. 그런데 함께 영화를 관람한 멤버의 한 마디가 우리의 마냥 좋음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16mm필름으로 21세기 캐나다 깡시골의 풍경을 담은 영화잖아.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새롭지? 필름 가지고 한 이런 작업들 많잖아. 우리가 너무 매끈한 디지털 작품만 보다 오랜만에 필름작업을 봐서일까.” 영화가 너무 좋은 건 당연한데 어느새 우리는 그 좋음마저 혹시 동시대 기술매체에 대한 염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지 스스로 의심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를 향한 우리의 반응이 지난 세기에 발명된 매체를 향한 향수에 그칠 수 있어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독수리는 색다른 영상미와 주제의식으로 무장해 우리의 영화적 지식을 충족시켜주는 그저 그런 영화로만 남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의 잔상이 꽤 오랫동안 우리 곁을 맴돌았고, 어느새 우리는 멤버가 던진 질문을 시작으로 이 영화를 해부해 보았다. <독수리>의 전체 구조는 약 2분 가량의 영상 조각들이 몇 초 간의 공백을 두고 여러 장의 사진처럼 느슨하게 연결돼 있다. 풍경사진 몇 장을 넘겨 보는 듯한 단조로운 구성이지만, 그래서 각 장면의 자연 배경과 동물들의 몸짓에 깊게 몰두하도록 만든다. 내용도 별 다를 게 없다. 목장의 울타리 안에서 소, 말, 돼지, 염소, 닭과 같은 가축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다. 울타리 밖 인간들도 함께 농사를 짓고 풀을 뽑고 가축들을 보살핀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들의 삶은 계속 될 것이다. 그런데 이 평범해 보이는 농촌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영화 자체에 몰두하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목초지 위에서 동물들은 끼리끼리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하며 자유롭게 뛰고 먹고 마시고 쉬길 반복한다. 그러다 커다란 말이 인간에 의해 강제로 울타리 밖으로 끌려 나가는데, 몇 번의 실갱이 끝에 말은 인간의 손을 벗어나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다시 울타리로 돌아온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주변의 검은 소들이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 탈출한 말이 뛰자 자기들도 그 뒤를 따라 뛰기 시작한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선 긴장감이, 종이 다른 동물들 간엔 유대감이 생성되는 순간이다. 이미 동물들은 독수리가 그렇듯 서로 싸우지 않고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가운데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동물들을 가두고 통제하려 하는 인간만이 철저한 외부인처럼 울타리 밖에 갇힌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울타리 밖에 있던 인간이 카메라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면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해진다. 동물들은 별 거부감 없이 카메라 앞에서 가만히 눈을 껌뻑이는가 하면 편안하게 누워 햇볕을 쬐고 뛰어다닌다. 아마도 촬영은 목장의 울타리 안과 밖, 창문, 경작지 등 정해진 장소에서 꽤 오랫동안 지켜보고 기다리는 가운데 이뤄졌을 거다. 영화의 처음 몇 장면은 필름 촬영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의 노이즈만 존재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미지 위에 굵고 강한 훼손의 흔적이 드러난다. 작가는 영상의 중반쯤에서 풀을 뽑고 그걸 끓이는 짧은 장면을 제시해 필름의 훼손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졌는지 대략이나마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영상 끝부분에 필름에 쓰인 재료가 공개되는데, 여러 종류의 꽃과 열매 같은 식물들이 주재료다. (참고로 우리는 식물들을 우려낸 액체에 며칠이건 담근 감독의 필름을 발효 필름이라 부르고 있다.) 실험영화와 사진 매체에서 곰팡이와 먼지 등을 이용해 필름의 물질적인 변형을 가한 작품들이 있다. 필름의 물성을 변화시켜 매체의 시간성과 이미지의 우연성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름이 만들어진 과정의 일부를 보는 동안 어쩐지 인간이 채집하고 끓여서 만든 재료를 필름으로 하여금 소화시켰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비약하자면 이 영화에서 필름은 단순히 훼손되고 실험되지 않는다. 필름이 먹은 풀은 목장의 동물들과 하늘의 새들이 먹는 자연의 풀과 꽃, 열매 등이다. 돼지가 소의 젖을 빨고 있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있다. 돼지가 젖을 빠는 동안 소는 풀을 뜯어 먹고, 그 뒤에서 작은 새들이 들판 위에 떨어진 뭔가를 쪼아먹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맞은 편에 카메라 한 대가 놓여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풀과 꽃과 소금 등에 의해 발효된 16mm 필름이 뱃속에서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꽤 오래된 카메라일 것이다. 자연의 재료를 한 차례 소화시킨 카메라 앞에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다. 자연의 풍경과 생명체의 행위, 햇볕과 바람까지 완벽하게 차려진 만찬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멀리서 들리는 트랙터 소리는 인간이 만든 다소 거칠고 소박한 취향의 플레이트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오직 카메라를 든 인간만이 목장의 울타리 안에서 동물들과 공존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장에 인간이 나타나면 묘한 긴장감이 맴돈다. 목장의 주인인 인간은 먹이와 따뜻한 물을 주지만, 주변에 울타리를 쳐서 동물들을 통제하고, 때때로 고삐를 틀어쥔 채 강제로 끌고 나가기도 한다. 그랬던 인간이 카메라를 들면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다. 아마도 감독이 오랫동안 울타리 안에서 촬영하는 동안 동물들은 카메라를 든 인간만큼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함께 풀 뜯어 먹고 조용히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카메라를 든 인간은 경작하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들과 다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카메라를 든 인간 또한 그들과 함께 머무르며 아름다운 풍경을 섭취하고 자연으로부터 채집한 물질을 먹임으로써 그들과 밥상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때문에 이 영화를 단순히 매체의 특성을 이용한 실험영화나 목가적인 영화로만 볼 수 없었다. 식물을 섭취한 필름이 드러내는 건 시간이나 우연과 같은 관념적인 개념이 아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회화작품인 Homer Watson의 The Floodgate는 경작하는 인간과 가축화된 동물의 오랜 관계망을 보여준다. 유일하게 독수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아이는 동물과 동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사자는 독수리의 위치를 통해 먹이감을 찾고, 독수리들은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한다. 이건 단순히 아이가 들려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속 목장의 동물들 또한 독수리와 사자, 혹은 독수리 무리처럼 먹고 마시며 공생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가 여타의 환경/자연 영화와 다른 지점은 막연하게 생명체의 공존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실제의 공존과 균형은 갈등과 긴장감의 조절을 통해 유지되기도 한다. 영화에서 동물들은 끊임없이 먹는다.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 경작한다.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 있는 동안 영화는 멀리서 들리는 트랙터 소리 같은 사운드 효과로 자꾸 이곳이 누군가가 농사 짓고 가축 키우며 먹고 사는 곳이란 걸 잊지 않게 만든다. 눈앞에 보이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동물이 어우러진 생태계의 균형이 실은 식량과 먹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비로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영화의 흐름은 매우 정적인데 그 안의 동물들은 생기있고, 인간들은 쉴 틈 없이 일한다. 정원이 딸린 집과 잘 정돈된 경작지, 나무 울타리와 농기계, 그리고 아이들까지 모두 인간이 만든 것들이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제외한 모든 장면이 운전 중인 트랙터 소리로 뒤덮여 있다. 발효된 필름의 노이즈와 백색소음처럼 깔린 이 농기계 소리로 인해 캐나다의 어느 시골마을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대한 환상이 지워진다. 사람이 먹기 위해 내는 소리는 이상하게도 동물들이 먹고 있는 모습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인간은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도 하루종일 땅을 일궈야 하고, 동물은 인간이 관리하고 통제한 너른 목초지에서 비로소 배를 채울 수 있다. 독수리의 먹이 또한 여기 이 땅 위에 있다. 트랙터 소리는 오늘날 이 땅의 생태계가 어떤 순환을 통해 완성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이 영화의 모든 실험/시도가 가리키는 곳에 막연한 관념이나 개념은 없다. 오히려 감독은 자신의 신체와 카메라가 놓인 구체적인 삶의 현장, 즉 그가 먹어 삼키고 소화시킬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 우리는 각자 어떤 물질적 조건 속에서 얼마나 깊이 숙고하고 관찰하며 실험/시도하며 작업하고 있는가. 영화에서 어린 아이가 독수리는 서로 싸우지 않고 살아간다는 말에 그의 아버지로 보이는 어른이 답한다. “I didn’t know that” 농부이자, 목장주이며, 혹은 카메라를 든 감독일 수도 있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등장한 어른의 목소리다. 기회가 돼서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아이와 아버지의 대화를 몇 번이나 다시 들었다. 우리가 듣고 싶었던 말이 거기에 있었다. AI가 시를 쓰고 그림도 그리고 심지어 영상도 찍는 시대다. 인간과 기계, 예술에 대한 단정적인 말들이 너무 많이 들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물론 인간이 일방적으로 무너지고, 좌절하고, 끝났다며 판정패 당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미 누군가가 이전에 모든 걸 다 시도해봤고, 만들었다며 지금에 와서 인간이 자기 손으로 작품을 창조하는 게 무슨 의미냐는 회의적인 말들을 너무 많이 듣고 있다. 이런 말들의 효과는 한없는 무력감과 지나친 강박 외에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 그 단정적인 말들 속에서 남자의 대답은 확실히 다르다. 그의 대답은 동물들 사이에 삼각대를 세우고, 필름에게 먹일 식물을 구하기 위해 목초지를 이리저리 뒤질 수 있게 만든다. 지금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이 이뤄진 상태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I didn’t know that”에서부터 시작되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정주리 감독이 밉다. < 도희야 > 같은 엄청난 데뷔작을 내놓고 아직도 차기작을 내놓지 않으니 말이다. 아니다, 말은 바로 해야 된다. <도희야>를 만든 감독이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차기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한국영화산업이 정말로 문제다. 이번 칼럼은 의심과 취약성의 정동이 영웅 서사를 변형하는 방식에 대한 것인 동시에, 정주리 감독의 차기작을 갈급하게 요청하는 사심 가득한 글이기도 하다. <도희야>는 한국 스릴러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던 ‘섬에 들어온 외부인’ 설정을 따른다. 그 설정은 대체로 다음의 서사를 따른다. “자기들만의 도덕과 관행으로 똘똘 뭉친 시골 마을에 외부인이 들어와 공동체의 문제들을 들춰내기 시작하자, 착하고 순박하게만 보였던 사람들은 불쾌한 이면을 드러내며 외부인을 위협한다.” <도희야>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외부인이 레즈비언이라는 설정이 추가되면서 익숙한 관습의 궤도에서 벗어난다. 서울에서 온 엘리트 경찰 영남(배두나)은 바닷가 작은 마을의 파출소 소장으로 발령받는다. 동성애자인 그는 아우팅을 당한 피해자지만 경찰조직은 ‘말하지도 묻지도 말라’며 품위손상을 이유로 도리어 그에게 징계를 내린다. 간부와 선배들은 징계를 내리면서도 레즈비언이나 동성애자라는 단어가 병이라도 옮기는 듯 분명하게 입 밖으로 내뱉지도 않는다. 피해자인 영남은 그 자체로 잘못된 존재가 되어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히는 이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그는 저항하지 못하고 결국 문제는 경찰조직이 아니라 영남이 된다. 절대로 튀지 말라는 선배의 조언대로 애인까지 버리고 1년 정도 숨죽여 있으려 했던 영남은 그 동네에 도착하는 처음부터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영웅은 여러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누가 지금 구원을 요청하고 취약한 상태에 있는지를 예민하게 인지하는 자질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약자가 언제나 크게 비명을 질러 자신의 피해사실을 명백하게 알려줄 수 있는 조건에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존재의 취약성에 대한 예민함은 타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까지 향해야 한다. 취약한 자는 취약한 자를 한눈에 알아본다. 따라서 강함만 있어서는 영웅이 되기 어렵다. 영남은 그러한 영웅의 자질을 갖고 있는 캐릭터이다. < 양들의 침묵 >에서 클라리사 스털링(조디 포스터)이 어린 시절 양떼목장에서 죽어가던 양들의 울음소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여전히 들려와 구하지 못한 죄책감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 역시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을 갖고 있는 이 취약한 영웅들은 상처받고 약한 자들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 실제로 영남은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차로 인해 크게 물이 튀여 피해를 입었는데도 괜찮은지 확인하려 하자, 잽싸게 도망가 버리는 소녀 도희(김새론)를 발견한다. 그 이후 도희는 계속 영남의 눈과 귀에 뜨인다. 취약성에 대한 감각의 예민함을 표현하기 위해 <도희야>는 영화적이고 서사적인 층위 모두에서 소리를 강조한다. 욕하고 때리는 계부 용하와 할머니의 학대하는 소리, 계부인 용하와 할머니에게 맞아 비명 지르고 도움을 요청하는 도희의 소리,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자신의 피해를 말하지 못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침묵의 소리, 피해자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불면증인 영남이 술을 따르고 마시는 소리,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생수병에 소주를 옮겨 담는 소리, 소주가 담겨있던 빈 플라스틱 생수병이 부딪히고 구겨지는 소리, 영남과 도희가 목욕하는 소리, 도희가 영남이 목욕하고 있는 화장실에 들어와 소변보는 소리까지 영화적 사운드가 외화면과 내화면에서 지속적으로 도드라진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소문과 험담의 소리는 다양한 존재들을 위축시키고 허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웅 외에도 취약한 자를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 이가 또 있다. 그는 착취와 학대를 가해도 자신에게 문제가 안 생길 정도로 취약한 이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타인의 치명적인 약점을 빠르게 알아챈다. 박용하(송새벽)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마을의 주요 생계인 가두리 양식장의 운영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처리해주는 용하는 동네의 유일한 젊은 사람으로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를 두둔한다. 마을 사람들은 직접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험담과 소문으로 자신의 이익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려 한다. 동네 사람들은 “젊은 년이 계급장 달았다고 동네를 들쑤시고 다닌다”며 대놓고 욕을 하고, 용하는 첫 만남부터 “솔찬히 미인이어서 소장인줄 몰랐다”는 성희롱에 가까운 농담을 던지며 영남을 공격한다. 영남이 애인과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했던 용하는 영남이 이주노동자를 보호하려는 결정적 순간에 “서울서 내려온 여자하고 뭘 하는 걸 봤으면 하는데 어느 한 새끼라도 나한테 물어봤으면 좋겠네, 입이 근질근질하네”라고 협박하기도 한다. ‘젊은’ ‘여자’ ‘동성애자’는 모두 영남의 다층적인 취약점이 된다. 영남이 동성애자인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 용하는 ‘성적 대상’으로 영남을 지시하며 그가 가진 권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그러나 영남이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오히려 그는 성적 착취자가 된다. 도희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그의 모든 행동은 성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여기서 정주리 감독은 관객들에게 미묘한 질문을 던진다. 관객들이 영남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시점에 도희와 영남이 함께 욕조에서 목욕하는 장면, 영남이 목욕을 하고 있는 와중에 외화면에서 도희가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리는 장면, 용하와 할머니에게 맞은 도희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영남을 보여주며 둘만의 내밀한 순간들을 공들여 연출한다. 그리고 이 장면들은 지나칠 정도로 반복된다. 사실 용하와 형사들이 영남에게 소아성애자라는 혐의를 씌우기 전에 관객들은 여기서 이미 이상한 긴장감을 느낀다. 게다가 영남의 스타일을 따라하고 그의 애인을 질투하며 집착하는 도희의 모습도 평범해 보이진 않는다. 이 긴장감과 불편함의 근거는 무엇일까? 어떤 면에서 정주리 감독은 연출적으로 소위 ‘오해의 여지’를 점점이 뿌린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정말로 이 행동들이 그렇게 설명 불가능한 것인가? 심지어 영남은 경찰로서, 즉 폭력 피해자를 상대해본 전문가로서, 도희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영남은 도희가 “폭력에 길들여진 위험한 상태여서 특별한 보호가 필요”했고, “아이가 나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경찰 제복을 입고 있고 나쁜 짓 하는 남자들 혼내줄 수 있는 힘이 있어 보여 그러는 것이라고” 매우 타당성 있는 전문적인 해석을 내린다. 영남은 도희의 애착이 버려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자기 보호와 생존의 욕망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더불어 영남 스스로도 도희와 지나친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관계의 거리를 의식적으로 성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장면들에서 일말의 불편함과 긴장감이 흐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남은 곧 성인 여성으로서 그리고 경찰로서 보호자로서의 정체성을 충분히 인식하며 도희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전에 멈칫하다가도 그를 품어준다. 그렇다면 그 긴장과 불편함을 성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누구인가? 레즈비언인 것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행동들이 갑자기 어떻게 성착취의 증거가 되는가? 관객들은 정말로 경찰과 마을 사람들의 생각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가? 존재에 자체에 대한 의심과 혐오의 씨앗은, 그것이 막연한 긴장감과 불편함에 불과할지라도 질문하지 않고 놓아두면 언젠가 그 존재의 모든 행동을 오염시킨다.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 혹은 동성애자가 영웅이 되기 위해선 소문과 낙인, 존재 그 자체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그래서 소수자가 영웅이 되는 것은 더 어렵다. 소수자 영웅은 타자를 구원해 더 크고 강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존재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는 취약성을 드러내게 되고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영남은 도희에게는 ‘맞지 말고 저항하라’고 했지만, 오히려 자신은 경찰조직의 억압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말하지 않고 묻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피해자임을 부인하고 거부해 왔다. 그리고 그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은 어떤 면에선 더 많은 고통을 불러왔다. 자신뿐 아니라 애인에게도. 그러나 끝까지 도희를 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영남은 다시 가해자의 외피를 쓴 피해자가 된다. 여기서 영남은 도희의 구원을 받는다. 도희는 ‘순수한’ 피해자와는 거리가 멀다. 도희는 더 이상 맞지 않기 위해 할머니가 추락한 것을 보고도 구하지 않고 계부를 함정에 빠뜨려 감옥에 보내 자신과 영남을 구한다. 여기서도 전화의 사운드가 이용된다. 도희는 추문을 추문으로 막는다. 도희는 자신이 약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취약성은 때로 존재를 단단하게 만든다. 영남은 도희를 두고 혼자 떠나려다가 도희가 “어린 괴물” 같다는 후배 경찰의 소리에 차를 돌려 도희를 데려간다. 존재에 대한 의심과 오염이 얼마나 그 존재를 갉아먹는지를 잘 알고 있는 영남은 도희를 버려둘 수 없다. 이 선택은 그녀의 경력을 무너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정체성과 존재 자체도 오염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존재를 걸고 자신의 취약성을 받아들이며 영웅이 되기를 선택한다. 어떤 면에서는 영남과 도희 모두 서로의 취약성을 발견하고 나서야 서로를 구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취약성을 통해 영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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