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평양댁
- 감독
- 문평
- 제작년도
- 1965
- 출연
- 김진규, 도금봉, 이대엽, 김운하, 서영춘, 조항, 김장영, 김성희, 안성혜, 이윤경, 한미나, 박수정, 김웅, 김호연, 박성은, 박순봉, 석귀녀, 문미봉, 최명수, 남민, 최명섭, 최정애, 이정웅, 황인수, 김훈, 경윤수, 이일선, 홍동훈, 김월순, 노강, 유일로, 김규식, 김인, 정귀성, 김영배, 강영숙, 엄미
[사진] 김승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혈맥>의 한 장면 ● 연극으로 시작한 3대 독자 김승호는 1918년 7월 13일 강원도 철원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농사를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여 어려움을 모른 채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일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승적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본인은 이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양친께서 석왕사(釋王寺)에서 불교를 신봉하셨다” (『국제영화』 1959년 10월호) 고 말한 적이 있어 뜬소문만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어릴 때 이 복덩이에게 붙여진 이름은 해수(海壽)였다. 그가 네 살이 되자 부모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종로 청진동에 정착한 뒤 복덕방과 전당포를 하며 사림을 꾸려 나갔으나 얼마 못가 숙박업으로 전환하였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옥 맞은편 서울관광호텔 옆 골목에 있었던 대흥여관이 바로 그 출발이었다. 그가 입학한 수송국민학교는 집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래서 공휴일에도 조무래기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운동장에 나가 놀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명문인 보성(普成)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수재들과의 경쟁이 벅차서였는지, 1년 만에 그만 두고 말았다. 그 대신 집 근처에 있는 우미관이나 낙원동의 조선극장, 수은동의 단성사 등 극장을 찾아다니며 연극과 영화 보기를 즐겨 했다. 그때 이미 ‘분바른 무대 인생’의 길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스무 살 되던 해 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황금좌로 박진(朴珍)을 찾아갔다. 연출부장인 박진은 당돌하게 연극을 하게해 달라고 조르는 이 초면의 청년에게 대뜸 호떡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영문인지 잘 몰랐지만 그는 사실대로 잘 먹는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같이 고생을 하자”며 입단을 허용했다 .(김승호, 「나의 청춘과 예술의 편력」, 『국제영화』 1956년 3월호) 연구생 신분이었다. 그는 오래가지 않아 이 질문의 뜻을 알게 되었다. 공연지를 따라다니는 동안 정말 지겹도록 이 호떡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연극인들은 호떡으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했다. 그러나 김승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허기진 배를 참아가며 연극에 빠졌다. 선배들의 시중은 물론 단체의 잡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전원교향악>이란 연극을 공연할 때였다. 그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장님 역할을 맡고 있는 선배에게 떡을 사다가 권하며 아첨을 떨었다. 선배는 이런 호의가 기특했는지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런데 공연 시간을 앞두고 급히 먹은 떡이 체했는지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에게 대역의 기회가 왔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선배의 연기를 보며 익힌 보람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캐스팅되었다. 그 첫 작품이 홍해성 연출의 <임자 없는 자식들>이었다. 1938년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그 뒤 <백진주>, <아들의 심판>과 같은 연극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집에서는 이런 ‘광대 짓’을 못 마땅히 여겼다. 부모가 얼마나 완고했는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들의 연극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이 무렵 동양극장 무대에 올려 크게 성공한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6, 임선규 작, 홍해성 연출)가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극장주인 홍순언이 김승호를 주연인 황철의 친구 역으로 나오게 해주었다. 그런데 현상 기사가 실수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황문평, 『인물로 본 연예사: 삶의 발자국 1』 ‘서민의 우상 명배우 김승호’ 도서출판 선. 1998, 334쪽) 그는 해방 후 변기종이 주도한 자유극장으로 옮겨 연기부장을 맡아 박상익, 송재로, 김신재 황정순 등과 함께 2년 여 동안 활약했다. 그 뒤 서월영, 유계선 등과 함께 극단 청탑(靑塔)을 창단하기도 했다. 김영수의 <민중전(閔中殿)>(1945)과 <망향>(1946), <선구자>(1946) 등이 이때 공연한 레퍼토리였다. [사진 ] <박서방>의 한 장면, 황정순은 오랫동안 김승호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다 ● 특유의 발성법으로 연기력 과시 김승호는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한 시대를 누빈 대기만성형의 배우였다. 그가 활동한 1958년부터 1968년까지의 10년간은 한국영화 전성기와 일치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명배우로서 부합될 만큼 큰 것이었다. 하지만 제작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1967년 처음 만든 <돌무지>의 흥행 성공과 제6회 대종상 최우수반공영화상 작품상 수상으로 받은 외화수입쿼터 보상에 힘입어 제작한 <영원한 모정>(원명 ‘머슴 칠복이’ 조긍하)이 실패한 뒤에도 부채를 안고 강행한 <7인의 밀사>(원제 사화산)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고혈압에 시달리다가 1968년 12월1일 아침 자택에서 세수를 하다가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서른 살에 얻은 외아들(김희라)이 1년 뒤 <독짓는 늙은이>(1969, 최하원)로 영화배우의 꿈을 이룬 모습도 보지 못한 안타까운 51년의 짧은 생애였다. [사진 ] 영화 <돌무지>(1967)의 한 장면 [사진 ] 김승호의 장례식 장면 혀와 입술 사이에서 더듬듯이 굴려 내는 독특한 발성법과 안면을 수축시키며 만들어내는 표정 연기는 김승호 연기의 특징이었다. <박서방>, <마부>, <혈맥> 등의 경우처럼 탁월한 연기력으로 어려운 현실에도 순응하며 살아가는 서민의 정서와 애환을 적절히 녹여내는가 하면, <시집가는 날>, <인생차압>, <로맨스그레이> 등에서 볼 수 있었듯이 ‘능청스런 익살’ 연기로 관심을 끌었다. 반면에 한 가장이 화목한 가정을 깬 죄책감으로 고행의 길을 걸어간 <육체의 길>(1959, 조긍하)에서는 오버액션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단연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서민 역할에서 빛났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대일본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 조선권번기생 오은희 한성권번기생 최옥진 종로권번기생 박금도 빠-「멕시코」 여급 김은희 영화여우 오도실 동양극장여우 최선화 경무국장게 보내는 아등의 서 삼교경무국장 각하여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여 줍시사고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하략)” 1)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며 경무국장에게 편지를 보낸 장안의 내로라하는 문화계 인물 중에는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卜惠淑(馬利),1904~1982)’도 있었다. 한국의 대중문화, 연예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예의 복혜숙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연극, 영화, 방송에서의 연기 생활은 물론 가수와 성우 활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연예사의 곳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빼놓을 분야는 없기 때문이다. 연극 연기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마호정, 이월화에 이은 세 번째 여성 영화배우로 이름을 올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영화계를 점령했던 예쁘장하고 다소곳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성 배우와는 거리가 멀었던, 배우 복혜숙은 초창기 조선영화에서 담대하고 현대적인 역할을 맡아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숨을 다하는 그날까지 복혜숙은 한국 대중연예사에 살아있는 성좌로, 원로 여성영화인으로 선구적인 역할을 해내며 60여년의 연기생활을 이어갔다. (사진1) 왼쪽부터 배우 전계현, 배우 복혜숙, 홍은원 감독 (사진2) 배우 최은희(가운데)와 함께 한 노년의 복혜숙 (오른쪽) 충청남도 대천에서 태어난 복혜숙은 서학을 공부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버지와 담대하고 영민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에게 한글은 물론 한학도 배워 당시 배우로서는 보기 드문 학식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화여자고등학교에 다니며 배운 수예에 흥미를 느껴 수예 선생이 될 요량으로,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갔다. 정작 일본에서는 영화, 연극, 가부키에 마음을 빼앗겼다. 특히 <충신장 忠臣藏>에 감동을 받아, 그녀는 연기자가 될 생각에 수예학교를 나와 시와모리 모리노무용소에 입학했다. 하지만 딸을 찾아 나선 일본까지 건너온 아버지는 복혜숙을 자신이 관여하던 강원도 금화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만들어 버렸다. 1920년,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상경한 그녀는 단성사의 인기 변사 김덕경의 소개로 김도산을 알게 되어 신극좌에 입단했다. 이듬해 복혜숙은 <오! 천명>으로 첫무대에 서게 되었다. 복혜숙은 극단이 지방 공연을 다닐 때면 악대를 앞세우고 공연 홍보를 위한 거리행진(街廻り)을 도맡았다. 또 일본에서 여러 번 관람하여 대사를 기억하고 있던 <대위의 딸 大尉の娘>을 각색한 <누교 淚橋>를 직접 쓰고 주연까지 맡아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사진3) 젊은 시절의 복혜숙 극단생활을 이어나가면서도 1925년에 복혜숙은 연기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현철이 세운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했다. 비슷한 시기 극단 토월회에도 입단했다. 토월회의 인기 배우 이월화를 대체할 배우로 복혜숙이 등장했던 것이다. 복혜숙은 토월회가 공연한 <춘향전>의 ‘춘향’ 역으로, <카쥬-샤>의 ‘카쥬-샤’ 역으로 이월화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됐다. 2) 그 뒤에는 조선극우회와 중앙무대로 옮겨 무대에 섰다. 무대에서 인기를 얻은 그녀는 1926년부터는 최초의 방송국 경성방송국에서 시험용으로 내보낸 첫 방송극 <새벽종>(1926)에도 성우로 출연했다. 3) 또 복음성가를 잘 부르던 복혜숙이 음반도 냈다. 영화대본을 직접 연기하듯 읽어 녹음하는 영화극 음반인 <장한몽>(1929)이 그 시작이었다. 이어서 <쌍옥루>, <부활>, 그녀가 출연한 <낙화유수>에서 주인공의 비련의 운명을 담은 주제곡 ‘강남 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강남달>을 선보였다. 그 후로도 <숙영낭자전>, <심청전>, <춘희> 등의 수많은 음반을 취입했다. 곧 1930년 <애(愛)의 광(光)>을 발표하고는 장안 최고의 재즈가수로 불리기도 했다. 4) 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다재다능한, 명실공이 그녀는 ‘만능 탤런트’였다. 물론 그녀가 이렇듯 많은 재능을 발휘하게 된 데에는 한국 대중문화사 초창기의 한계적 특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중문화에 투신했던 인원이 적기도 했거니와 연극배우, 영화배우, 성우나 가수 등의 역할 분할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복혜숙은 한국의 개척기 대중문화사에서 빛나는 공적을 쌓은 선구자이자 연예계의 지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주요 활동 영역은 영화였다. (사진4) 영화 <농중조>(이규설, 1926)의 현장. 복혜숙은 아버지의 엄한 감시 때문에 새장 속의 새처럼 집안에 갇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여학생 화숙을 연기했다. 연극계에서는 이미 장안에 이름이 났던 복혜숙은 1923년 영화에도 출연을 시작한다. 첫 출연은 마호정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계몽을 목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윤백남이 연출을 맡은 위생 영화 <방역 防疫>이었다. 5) 출연료 2원을 받은 영화에서 그녀는 길거리에서 파는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눕는 주인의 딸 역할을 했다. 곧 극영화에도 출연하는데, 첫 출연작은 당시 인기 있었던 일본 제국키네마의 <농중조 籠の鳥>(松本英一, 1924)를 번안한 이규설의 <농중조 籠中鳥, 새장 속의 새>(1926)였다. 유교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에서 젊은이들의 자유연애를 다루어 당시로서는 퍽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사랑을 쫓는 신여성 화숙으로 분한 복혜숙은 다리를 노출하기도 하고 안식(이규설)과 손을 잡는 러브신이 있어 인구에 회자되었다. 통속 신파 번역극이라는 비판 속에도, 남녀 학생들에게는 큰 환영을 받았다. 6) (사진5) <낙화유수>(이구영, 1927)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복혜숙은 주인공 기생 역할을 맡았다. (사진6) <낙화유수>(이구영, 1927)에 참여한 스태프들 이듬해 복혜숙은 조선배우학교 시절 선생님이던 이구영이 연출하는 〈낙화유수〉(1927)를 찍었다. 배우학교의 동기생 이원용이 남자 주인공이었다. 이번에는 기생 역할이었다. 당시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기구하게 기생이 된 여인과 젊은 화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린 이 신파극은 개봉 당시 장안의 기생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라며 치맛자락을 휘감고 구경들을 와 더 화제가 되었다. 7) 실연의 마음을 가누지 못해 여인이 투신하는 장면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는데, 장마철에 한강에 자살하기 위해 뛰어드는 장면을 회고하는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오고가는 행인들이 여자가 자살한다고 구경이 났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대담한 연기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당대의 다른 여배우와는 달랐다. 그녀는 연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배웠다. 서예를 배우는가 하면 창과 러시아 댄스, 유도는 물론 자동차 운전을 배우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8) 그렇게 배운 솜씨들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사진7) 감독이자 배우 이규설. 복혜숙은 이규설의 작품 <농중조>(1926), <홍련비련>(1927), <순정은 신과 같다>(1928)에서 주연으로 열연했다. 그 뒤 ‘현대학생극’으로 불리던 〈홍련비련〉(이규설, 1927) 9) 에서 복혜숙은 지극히 우정이 깊은 두 대학생 김일과 현진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배우 편실 역할을 했다. 이어 이규설 감독과의 세 번째 작업은 <순정은 신과 같다>(1928)였다. 둘은 지주의 아들 이규설과 소작인의 딸 복혜숙로 만나 부부로 연기했다. 같은 해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에서 복혜숙은 어부의 딸 역을 맡아 사랑에 빠지는 연기를 선보였고, 만주 현지 촬영으로 이월화와 함께 출연했던 〈지나(支那)가의 비밀(일명 흑진주)〉(유장안, 1928)에서는 중국인 거리에 인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을 맡았다. 주연으로 활동하던 이 시절 ‘얼굴이 땡그랗’던 복혜숙은 쾌활하고 발랄한 왈가닥 ‘잇 걸(It girl)’로 불린 클라라 보(Clara Bow)를 닮았다는 말을 듣곤 했다. 10) 해방 이전은 배우 복혜숙의 전성기였다. (사진8)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의 한 장면, 복혜숙은 사랑에 빠지는 어부의 딸 역을 맡았다. (사진9) <지나 가의 비밀>(유장안, 1928) 신문 광고. 만주 현지 촬영을 감행한 이 영화에서 복혜숙은 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이었다. 《동아일보》 1928년 5월 25일자 6면 하지만 배우 활동만으로 생활을 꾸려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1928년부터 8년간 카페 비너스를 운영했고, 이때 결혼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두 젊은이들의 사랑의 도피를 다룬 영화 박기채의 <춘풍>(1935)에 출연으로 영화계에 복귀했다. 안종화의 <역습>(1936)에는 살인자의 아내 역으로 출연하면서 카페 비너스를 제작 사무실로 제공하면서 실질적인 제작에 참여했다.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는 배우가 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정희와 함께 방을 쓰는 음반회사 직원으로 등장했다. 조선인들의 영화 제작이 힘들어진 식민지 말기에는 <감격의 일기 感激の日記>(신경균, 1943), <그대와 나 君と僕>(허영, 1944)를 비롯한 다수의 어용영화에도 출연했다. (사진10) <역습>(안종화, 1936)의 한 장면 (사진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 음반회사 직원 모경숙 역의 복혜숙 1920년대 말 자유분방한 신여성의 아이콘이던 복혜숙이 연기를 전환하게 된 계기는 최인규의 <수업료>(1940)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동시녹음이 진행된 이 영화에서 30대 복혜숙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자식 내외가 행상을 하러 도시로 나가자 소학교에 다니는 손자 영달을 돌보기 위해 넝마를 주우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할머니 역을 맡았다. 당시 그녀 나이 37세였다. 이 영화 이후 그녀는 노역을 주로 맡았다. 인자한 어머니,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상인, 유난스런 할머니 같은, 그녀는 연기력을 요구하는 조역으로 이후 300여 편의 영화에 얼굴을 비쳤다. 또 텔레비전 드라마 <아내의 얼굴>(KBS, 1962), <아씨>(TBC, 1970), <옛날 나 어릴 적에>(MBC 신년특집, 1981) 같은 작품에도 종종 출연하였다. (사진12) <수업료>(최인규, 1940)에서 복혜숙은 병상에 누워서도 어떻게든 손자 영달이의 수업료를 마련해보려는 애달픈 할머니를 연기했다. 해방 후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재와 필름이 부족해 영화제작이 열악했던 시기,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계에서 그녀 역시 주조연을 마다않고 성실히 한몫을 했다.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에 간호사 혜자(황려희)의 어머니를,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에서는 똘똘이의 어머니를 맡았다. 또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여명〉(안진상, 1948), 〈수우〉(안종화, 1948),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도 작은 역이나마 출연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에 입대해 공연을 하며 전장을 누볐고, 잠시 머물렀던 마산에서 촬영한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에서는 전선에서 실명한 아들(최현)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주는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3) <여명〉(안진상, 1948) 신문광고 (사진14)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 신문광고 (사진15)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광고. 아들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 주는 어머니 복혜숙이 보인다. 전후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한국영화계에서 복혜숙은 전성기를 넘은 나이에도 활동을 이어나가는 거의 최초의 여성 배우였다. 더 이상 주연을 할 만한 시나리오가 없었지만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 <아리랑>(김소동, 1957), <조춘>(유두연, 1959), <삼등과장>(이봉래, 1961), <청춘교실>(김수용, 1963), <여판사>(홍은원, 1963), 그리고 미공보원(USIS-Korea)이 제작한 문화영화 <황토길 Litany of hope>(양승룡, 1962)에서 어머니와 할머니 역할을 전담하면서 꾸준히 식지 않은 연기력과 열정 보여주었다. (사진16)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에서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중학교 교사 명호(황해)의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7) <삼등과장>(이봉래, 1961) 구소장(구봉서)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사진18) <황토길>(양승룡, 1962)에서 한센 병을 앓고 있는 시인 한하운(김웅)의 어머니로 출연한 복혜숙 (사진19) <청춘교실>(김수용, 1963)에서는 손녀 셋을 거느린 왈가닥 할머니로 등장했다. (사진20) <여판사>(홍은원, 1963)에서는 치매를 앓고 있어 우연히 독을 마시게 되는 시할머니 역할을 했다. 김수용 감독이 배우 복혜숙이 자신의 영화에서 열연했던 강렬한 장면을 회고한 적이 있다. 해방촌 빈민들의 군상을 그린 김영수의 희곡을 영화화한 <혈맥>(1963)에서 김덕삼(김승호)은 새로 얻은 아내가 자신의 돈을 훔쳐 달아나자, 중신을 선 대폿집 주인(복혜숙)에게 무작정 따지러 간다. 아내를 찾아내라는 어깃장을 놓는 덕삼과 이 어이없는 주장에 맞서는 꼿꼿이 맞서는 대폿집 주인 아낙의 대단한 육탄전이 펼쳐진다. 이 장면에서 복혜숙은 담배를 입에 물고 김승호와 몸싸움을 하면서 거칠게 대거리를 하는데, 그녀는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생활 전선에 나서야했던 강단 있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몸소 보여준다. 김수용의 또 다른 영화 <사랑의 조건>(1979)에서 일흔이 넘은 복혜숙은 어린 손자를 데리고 필사의 힘으로 한 겨울 눈 내리는 대관령을 넘는 할머니로 특별출연을 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모진 날씨 따위에는 아랑곳없던, 여전히 두 눈에서는 광채를 내뿜으며 서슬 퍼런 연기를 해내던 노년의 복혜숙을 잊지 못한다. 12) (사진21) <혈맥>(김수용, 1963) 중 김덕삼(김승호)과 대폿집 주인(복혜숙)의 육탄전 복혜숙은 평생을 배우로 무대 위와 또 카메라 앞에 있었다. ‘남들이 안하던 때에 배우로 입문해 연예계의 여러 방면에서 초창기 증인으로 또 산 역사 노릇’을 했다. 다방면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여성으로서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 ‘복혜숙 여사의 연기생활 40주년 기념하는 스타의 밤’에는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기꺼이 함께 해줄 만큼 평생 한국영화를 지켜온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평가를 받았다. 또 ‘뭐든 뒤로 미루지 못하는 성격 탓’에, 또 연예계를 통찰하는 식견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로 영화인들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13) 18세부터 연기해 온 그녀의 일대기가 특별드라마 <얼굴>(1981, KBS)로 만들어질 만큼 그녀의 생 그 자체가 한국 대중연예사이기도 했다. (사진22) <대한뉴스>(제 387호, 1962) 연예계 소식 중. 962년 10월 12일부터 2일간 시민회관에서 복혜숙의 연기생활 40주년을 기념하는 스타의 밤‘ 행사가 열렸다. 당시 이원우 공보부 장관이 복혜숙에게 표창을 수여하고 있다. 스크린 밖에서도 그녀는 영화계의 원로로서 업계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발 벗고 나섰다. 1954년 한국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선봉에 섰고, 한국영화협회가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에도 앞장 서 힘을 보탰다. 1955년 대한영화배우협회를 창설해 10년간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1962년부터 한국영화인협의의 연기분과 위원장으로 배우들의 뒷바라지에 힘을 쏟았다. 그녀의 은막 인생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영화는 진용(박재호)의 할머니 역을 맡은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였다. 하지만 78세의 그녀는 아직도 ‘못 다한 일 많아 은퇴할 생각이 없’ 14) 었다. (사진23)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 포스터. ‘윤봉춘 복혜숙 지휘’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진24)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에서의 복혜숙 1)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삼천리》 1937년 1월호 9권 1호, 162~166쪽. 2) “명우와 무대(7), 복혜숙 양의 『카쥬-샤』, 부활의 여주인공으로, 토월회 무대에”, 《삼천리》 제5권 4호, 1933년 4월, 11쪽. 4) 복혜숙의 생애는 다음 자료들을 참고해 요약 기술하였다. 『여성실화: 빛나는 성좌 복혜숙』, 명서원, 1976: 이영일, 「스크린을 빛낸 예도 60년-복혜숙」, 『한국영화인열전』, 영화진흥공사, 1982; 황문평, 「여성 연예계의 선구자 복혜숙」, 『삶의 발자국』(1), 선, 1988; 조영만, 「여배우 복혜숙의 활약」, 『30년대 문화예술인들: 격동기의 문화계 비화』, 범양사, 1988;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복혜숙·이구영 편』, 도서출판 소도, 2003, 이순진, 「복혜숙」, 이승희 외 지음,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도서출판 소도, 2006; .한상언, “한상언의 <한국영화스타>3 :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한국영화의 어머니 복혜숙”, 오마이스타, 2004년 10월 13일,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214631 4) 이동순,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한국 최초 재즈가수 복혜숙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조선Pub, 2013년 10월 18일, 조선Pub 홈페이지 http://pub.chosun.com 5)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복혜숙 편」, 월간 《영화》 1974년 1월호, 53쪽;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3> 영화계 데뷔”, 《동아일보》 1981년 5월 6일 7면. 6) “영화평 농중조 조선키네마 작품”, 《동아일보》 1926년 6월 27일 5면. 7) 안종화, 앞의 책, 157쪽; 김남석, 「배우 복혜숙 연구」, 『인문과학연구』 13,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5, 123~125쪽. 8)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1>”, 《동아일보》 1981년 4월 29일 7면. 9) KMDb에는 이필우가 감독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문지상에는 이규설이 감독으로 명시되어 있다. “홍련비련”, 《동아일보》 1927년 2월 5일 5면. 10)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앞의 책, 144쪽. 11)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32세 때부터 노인역만”, 월간 《영화》 1974년 3월호, 68쪽. 12) 김수용,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탄 복혜숙: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2014년 2월 26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http://siwff.tistory.com/503 13)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97> 첫 TV드라마”, 《동아일보》 1981년 5월 26일 7면. 14)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100> 복혜숙 연예생활 60년”, 《동아일보》 1981년 5월 30일 12면.
박남옥 , 홍은원 , 최은희 의 뒤를 이어 네 번째로 한국 여자감독이 된 황혜미 는 1970년대 유일하게 활동했던 여성감독이었다. 홍일점 영화감독 자체로도 유명했지만, 더욱 그녀의 명성을 뒷받침한 것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프랑스 소르본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는 거의 정설처럼 회자되었던 소문이었다. 간혹 남편과 함께 미국 조지타운 대학을 졸업했다는 낭설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이후 다큐멘터리 < 아름다운 생존 >에서 프랑스에 잠시 가있었을 뿐 소르본느를 졸업하지도 않았고 조지타운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고 스스로 밝혔지만, 활동 당시에 그녀는 내내 여류감독과 소르본느를 졸업한 재원이라는 수식어로 규정되었다. 황혜미는 1936년 만주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제3공화국 시절이었던 1963년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황종률이며, 아마도 부친이 일본 규슈제국대학 졸업 후 만주국에서 관리로 재직하고 있을 때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이화여고를 거쳐 1959년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였고, 1961년 미국에서 김동수와 결혼했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잠시 학교를 다녔지만 바로 미국으로 가느라고 등록만 해놓고 수업을 거의 불참했고 대신 하루에 3편을 볼 정도로 열성적으로 영화관에 다녔다고 술회한다. 1) 인터뷰에서는 그 당시 < 400번의 구타(Les 400 Coups) >(1959) 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본 추억을 생생히 기억해내고 있다. 황혜미는 어릴 때부터 이미 영화광이었는데 중학교 2-3학년이었던 부산 피난시절부터 미성년자 입장불가의 극장을 출입하는데 능숙했었다고 한다. 이 시기 기억나는 영화로 < 무도회의 수첩(Un Carnet de Bal) >(1937)이나 < 망향(Pepe Le Moko) (>(1937)을 몰래 보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때부터 유럽영화에 깊이 심취해있었으며 프랑스 유학시절에는 유럽 모더니즘 영화, 특히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황혜미는 인터뷰에서 스스로 전후 세대로 규정하면서 성장과정에서 카뮈나 사르트르에 영향받았고 헤르만 헤세 소설을 즐겨 읽었다고 언급하면서 특히 영화제작에 대해서는 푸도프킨의 서적을 중요하게 참조했음을 밝혔다. 2) 첫 경험 미국에서 돌아와 김승옥 의 소설을 읽고 매료되었던 황혜미는 남편 김동수 의 도움으로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을 영화화하게 되었다. 김수용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 안개 >(1967)의 감독을 맡기 위해서 소공동의 사무실에서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엘리트’였던 제작자 김동수와 황혜미 커플을 만났고 그 자리에는 당시 신문에 열정적으로 글을 쓰던 이어령도 참석하고 있었다. 3) 태창흥업의 대명제작을 하는 프로듀서로 황혜미는 <안개>를 통해 처음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였고, 그녀의 표현처럼 ‘처음이라서 재미있으니까 일일이’ ‘로케이션 헌팅까지 쫓아다니’면서 완성한 영화였다. 상업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아방가르드’한 기획을 밀어붙여 제작했지만 이 영화는 흥행에서도 성공을 하였고 젊은 여성 기획자로서 황혜미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문예영화 <안개>의 성공으로 획득한 2편의 외화수입권은 영화계의 초짜였던 황혜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4) 차기작으로 < 감자 >(1968)를 선택했고 김승옥에게 감독을 맡겼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검열에 시달렸던 <감자>는 원래 기획의도와 멀어지면서 흥행에도 실패하였다. 이러한 힘든 경험을 겪은 후 김동수와 황혜미 부부는 1970년 마벨코리아라는 영화사를 세우고 첫 작품으로 황혜미 각본, 감독의 < 첫경험 >(1970)을 제작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말 영화사는 보한산업주식회사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첫경험>은 1970년 11월 27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였다. 평단의 호평과 더불어 『영화예술』에서 선정한 1970년 베스트 영화 4위에 올랐다. 그해 백상예술대상에서 황혜미는 신인상을 받았고 흥행 역시 무난히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을 황혜미는 실감하지 못했는데 영화가 개봉하기 전 “우리영화의 시장조사 및 수출-입 문제에 관한 현지답사”를 위해서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황혜미에게 이러한 성공을 안겨준 영화 <첫경험>은 중년을 바라보는 부부인 기준( 남궁원 )과 지숙( 김지미 )은 권태로운 일상을 다룬다. 5) 부산으로 출장을 가는 비행기에서 기준은 대학자퇴생 인애( 윤정희 )와 만나게 되고 밀회를 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를 눈치 챈 지숙은 방황하게 되고 탈선을 시도한다. 그러자 인애가 기준과의 지난날을 소중한 첫경험으로 남겨두고 떠남으로써 그들의 가정은 파탄직전에서 구출된다. 당시 유행하던 불륜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이야기 자체만 본다면 평범할 수 있으나 권태로운 부부의 일상 그리고 탈선 및 좌절을 섬세하게 그려낸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였다. 슬픈 꽃잎이 질 때 이후로 황혜미는 < 슬픈 꽃잎이 질 때 >(1971)와 < 관계 >(1972)를 연이어 제작, 각본, 감독한다. 황혜미가 사업차 3개월의 외유 끝에 돌아와서 집필한 작품인 <슬픈 꽃잎이 질 때>는 고아인 서은희( 문희 )가 수녀님의 소개로 부호인 엄상훈(남궁원)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시작한다. 상훈은 이름난 바람둥이 홀아비이고 방치 속에 자라는 두 자녀는 개구쟁이들이다. 은희는 지속적으로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결국 아이들과 친해진다. 이 과정에서 점차 상훈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시기한 전부인의 가족이 벌인 흉계에 휘말린다. 결국 상훈과 은희는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가게 되지만 돌아오는 길에 사고로 은희는 죽게 된다. 이 영화의 이야기 전개 및 등장인물들의 구도는 < 제인에어 (Jane Eyre)>(1944)와 <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1965)의 구조를 차용한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 영화는 혹평을 받았고 흥행도 크게 실패하였다.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작품성보다는 상업성에 치중한 기획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하였다고 평가한다. 관계 세 번째 작품인 <관계>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 < 졸업(The Graduate) >(1967)을 패러디한 것인데 원래의 설정에서 남녀를 변경한 영화이다. 홀어머니( 김신재 )와 살고있는 인애( 박지영 )은 근무하는 회사의 전무 기택( 남궁원 )의 유혹에 몸을 버리게 되자 직장을 그만두고 이를 알게된 어머니는 충격으로 숨진다. 여행사에 취직한 인애는 손님인 준호( 신영일 )의 적극적 구애로 사귀게 되고 준호의 부모님과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준호의 아버지가 기택임을 알게되고 결혼을 피하게 된다. 힘들어하는 준호에게 기택은 모든 것을 고백한다. 인애는 자살을 기도하나 준호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된다. 너무 힘들어하는 준호를 보던 준호의 어머니( 문정숙 )은 사실 준호가 기택의 자식이 아님을 밝힌다. 진실을 알게 된 기택은 깊은 참회에 괴로워하고 인애는 병실에서 나와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고속버스를 타고 떠나지만 준호는 차를 몰고 와서 버스를 막아서며 인애와 재회한다. 이 영화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다. 성역할을 변경시켰을 때 그 이야기는 당시 흔한 불륜의 소재 이상이 아니었다는 점과 결국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준호와 인애가 맺어질 수 있다는 결론은 한 신문평의 언급처럼 “<졸업>의 경우 기존윤리를 정면에서 초극하려했던데 비하면 <관계>는 끝내 한국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6) 현재 황혜미가 감독한 이 세 영화 모두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 그녀의 작품은 감각적인 영상미로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이 부재는 안타깝다. 이 한계는 황혜미의 문제의식과 그 영화들이 가지는 당대의 의미를 가늠하는 것을 힘들게 한다. 그러나 본인의 인터뷰와 당대의 평가들 및 관련 자료를 통해 조망해볼 때 우리는 당시 남성감독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감성 혹은 윤리적 길항을 읽어낼 수 있다. 우선 황혜미가 감독으로 활발하게 작업했던 1970년대 초반을 다시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첫경험>이 상영된 해인 1970년을 평가하면서 이영일 은 해당년도 영화계에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하고자 했다. 하나는 멜로드라마의 트렌드로 떠오른 < 미워도 다시한번 >류의 범람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을 주제로 한 영화가 확연한 흐름으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7)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는 1,2,3편 모두 흥행에 성공하면서 1970년대 초반 멜로드라마의 주류서사가 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항상 ‘한 남자의 비틀거리는 행위 때문에 그의 아내와 다른 하나의 동거여인 사이에 ...끝없는 자기희생’을 반복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8) 반면 이러한 보수적 이데올로기 반대편에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성을 그린 성 주제 영화들이 존재했다. 이영일은 <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 >(1960) 나 < 페드라(Phaedra) >(1962) 처럼 파격적인 윤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성을 타부시했던 한국의 상황에서 성을 주제로 한 이 영화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반체제적인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9) 황혜미의 <첫경험>은 위의 두 경향이 기묘하게 길항하고 있다. 당시 유행하는 불륜의 소재를 차용하지만, 불륜으로 인한 신파적 희생은 부재하다. 더구나 불륜 자체는 등장인물들에게 기성의 사회가 가지는 틀에 박힌 질서나 윤리의식을 벗어나는 상황으로 변주된다. 이처럼 불륜이 무겁지 않게 그려지고 있는 것은 성에 대한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중년의 남성과 젊은 여성은 별다른 윤리적 고민없이 자연스럽게 섹스를 하게된다. 그들이 느끼는 탈선의 근거는 징후적으로 소품이나 이미지를 통해 보여지거나 간결한 플래시백으로 제시된다. 설명이 결여된 채 이미지의 단상들을 통해 관객은 그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일상의 권태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평론가들이 호평하였던 영화의 도입부인 기준과 지숙의 섹스 장면은 “차가운 금속성의 탁상시계 소리를 에펙트로 넣고 그 속에서 부부의 냉각된 섹스”를 보여줌으로써 “부부의 성 자체가 이미 단순한 생활 속의 반복으로 리듬같은 일상으로 변했음”을 드러낸다. 10) 인애 역시 대학이라는 제도 자체에서 막 벗어난 젊은 여성으로 둘은 부산이라는 비일상적 휴양지에서 해방 혹은 일상의 틀에서 벗어났다는 기분에 쉽게 섹스를 할 수 있었다. <미워도 다시 한번>류의 영화들에서 섹스와 불륜은 엄중한 도덕적 문제였다. 성은 대부분 여성들에게 결혼을 전제로 하는 약속된 행위여야만 했고, 남성의 기만에 속아서 순결을 지키지못한 여성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첫경험>에서 섹스는 그러한 과정을 겪지 않는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둘의 밀회는 계속되고 눈치를 챈 지숙은 배반감에 탈선을 시도한다. 기준은 아들과 아내가 있는 가정이 점차 무너지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 인애 역시 유부남이라는 현실과 마주했을 때 그 무게감이 점점 힘들어진다. 지숙의 탈선시도는 아슬아슬하게 멈추게 되고 인애는 담담하게 기준을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게 한다. 벼랑 끝에서 다시 일상은 봉합된다. 게다가 ‘첫경험’을 한 인애가 파멸을 한다는 암시도 없다. 영화는 치정이나 불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감정적 격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일상성을 강조하며 영상언어를 통해 그 감성들을 유려하게 그려나간다. 공허함을 느낀 지숙이 아들이 동물원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거대한 코끼리와 대조되는 지숙의 왜소함을 이미지화함으로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성이 느끼는 위축감을 드러내거나 기준과 인애의 이별 장면에서 문을 사이에 두고 외부에 있는 남성과 내부의 젊은이들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젊은 여성을 보여줌으로써 각각 속해있는 세대 차이를 강조하는 장면 등 11) 은 어떠한 발화적인 설명 없이 결국 각자의 벗어나려했던 기존의 틀로 돌아가는 행위의 당위성을 납득시켜준다. 12) <첫경험>의 불륜을 보는 여성적 시선이나 <관계>가 드러내는 한 여성을 둘러싼 부자관계의 비윤리성은 한국사회의 기본 윤리에 대한 저항적 도전이었다. 그러나 황혜미는 결국 가정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친아들이 아니었다는 안도할만한 결론을 내면서 그 저항의 칼끝을 무디게 만들었다. 이 무뎌지는 저항의 감각이 그녀 본래의 윤리의식의 한계인지 상업성의 압박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상업적 압박이 아니었다면 황혜미는 더 강하게 도전적인 시도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개>를 제작하는 도중이었던 1967년 9월, 그녀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실험적인 시도는 하고 싶지만 당분간은 “밑지는 일이 싫어 월리엄 와일러같은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13) 아이러니 하게도 <안개>는 황혜미가 관여한 영화 중 가장 예술적이고 전위적인 작품이 되었을 뿐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을 했다. 그러나 <첫경험>과 이후 작품을 통해 작가적 의식과 상업성은 점차 균형을 잃었다. ‘월리엄 와일러’같은 분위기의 상업영화들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그녀가 가진 성과 결혼에 대한 시대감각, 그리고 1970년대라는 현실상황은 매끄럽게 조화되지 못했다. 황혜미는 세 편을 끝으로 영화활동을 접었으며 몸담고 있던 보한산업주식회사 역시 1973년 이후에는 제작을 중단했다. 1) 「영화제작계의 홍일점 황혜미씨」, 경향신문, 1967.9.2.8면. 2) 이 글에서 주가 없는 황혜미의 소회나 발언 및 인용문은 모두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여성영화인이 말하는 영화> (2001)에서 채록한 것이다. 3) 김수용, 『나의 사랑 시네마』, 시네21, 2005. 105쪽. 여타 자료나 당시를 회고하는 글들을 참조하면 이어령은 시나리오의 감수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4) 황혜미, 「연패 끝에 <첫경험>의 메가폰」, 『여성동아』 1970년 12월호, 179쪽. 5) 기준이라는 이름은 <안개>의 남주인공 이름과 동일하다. 그 연결점을 의도적으로 설졍한 것으로 보인다. 6) 「타협으로 끝난 애정모럴의 갈등- <관계>」, 동아일보 1972.4.25.8면. 7) 이영일, 「마비와 혼미의 시대」, 『영화예술』 1970년 12월호, 32-36쪽. 8) 이영일, 위의 글, 34쪽. 9) 이영일, 위의 글, 35쪽. 10) 이서림, 「참신한 영화감각의 가작」, 『영화예술』. 1971년 1월호, 72쪽. 11) 「<첫경험>, 처녀의 불장난을 영상화」, 동아일보, 1970.11.28. 5면. 12) 이러한 서사구조와 영상미의 성취는 당시 프랑스 영화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 1966)와 <파리의 정사>(Vivre Pour Vivre, 1967)의 표절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13) 「영화제작계의 홍일점 황혜미씨」, 경향신문, 1967.9.2. 8면. 황혜미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