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수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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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보
박진수
- 참여 작품
- 한희작의 러브러브 (1991), 전선 2대 (1990), 탈출명령 (1982), 복수는 내게 맡겨라 (1981), 땅울림 (1980), 수병과 제독 (1978), 둘도 없는 너 (1977), 캐논청진공작 (1977), 별하나 나하나 (1976), 아이 러브 마마 (1975), 흑조 (1973), 불장난 (1972), 항구의 등불 (1972), 오빠 (1971), 타인의 집 (1970), 잊을 수가 있을까 (1970), 사나이의 부르스 (1969), 청춘을 다바쳐(일명 보리피리) (1969), 남의 속도 모르고(남에 속도 모르고) (1969), 첫날밤 갑자기 (1969), 눈보라 (1968), 아빠 아빠 우리 아빠 (1968), 아네모네 마담 (1968), 그대 이름은 (1968), 추억 (1968), 성난 대지 (1968), 파란 눈의 며느리 (1968), 청춘고백 (1968), 대괴수 용가리 (1967), 섬마을 선생 (1967), 맨주먹 청춘 (1967), 후회 (1967), 내멋에 산다 (1967), 타인들 (1967), 원죄 (1967), 검은 무늬의 마후라 (1966), 초우 (1966), 종점 (1966), 흑발의 청춘 (1966), 여대생 사장 (1966), 친정어머니 (1966), 불타는 청춘 (1966), 오늘은 왕 (1966), 불량소녀 장미 (1965), 말띠신부 (1965), 내 주먹을 사라 (1965), 용사는 살아있다 (1965), 이 땅에도 저 별빛을 (1965), 가을에 온 여인 (1965), 란의 비가 (1965), 압록강아 말하라 (1965), 아름다운 눈동자 (1965), 원앙선 (1964), 남과 북 (1964), 위를 보고 걷자 (1964), 십년세도 (1964), 떠날 때는 말없이 (1964), 맨발의 청춘 (1964), 명동아줌마 (1964),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다 : 추적의 휘나레 (1963), 청색아파트 (1963), 이주사 (1963), 푸른 꿈은 빛나리 (1963), 가정교사 (1963), 김약국의 딸들 (1963), 천안삼거리 (1963), 칠십칠번 미스김 (1963), 언니는 좋겠네 (1963), 사나이의 눈물 (1963), 천하일색 양귀비 (1962),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1962), 악인은 없다 (1962), 아내를 빼앗긴 사나이 (1962), 신입사원 미스터 리 (1962), 아낌없이 주련다 (1962), 어머님 안심하소서 (1961), 내몸에 손을 대지 마라 (1961), 5인의 해병 (1961), 밤에만 흐르는 강 (1961), 이복형제 (1961), 역부의 딸 (1961), 바보 칠성이 (1961), 청춘의 윤리 (1960), 울려고 내가 왔던가 (1960), 오형제 (1959), 실례했습니다 (1959), 태양의 거리 (1959), 여인숙 (1959), 청춘비가 (1958), 오부자 (1958), 진리의 밤 (1957), 자유전선 (1955)
박진수
- 참여 작품
- [마이 아티 필름] 카리나 : 업 (2024), 수운잡방 (2023), 어린 의뢰인 (2019), 아내를 죽였다 (2019), 출동! 케이캅 극장판: 제5원소의 비밀 (2016), 박수건달 (2012), 패는 여자 (2011), 최종병기 활 (2011), 포화 속으로 (2010), 무법자 (2010), 잘못된 만남 (2008), 맨데이트: 신이 주신 임무 (2008), 김관장 대 김관장 대 김관장 (2006), 로망스 (2006), 하류인생 (2004), 맹부삼천지교 (2004), 남자 태어나다 (2002), 엽기적인 그녀 (2001), 용가리 (1999)
박진수
- 참여 작품
- 타짜 전설의 땁 (2022), 공조2: 인터내셔날 (2022), 소울메이트 (2021), 마루이 비디오 (2020), 미션 파서블 (2020), 내안의 그놈 (2018), 남한산성 (2017), 유리정원 (2016), 희생부활자 (2015), 위험한 상견례 2 (2014), 찌라시 : 위험한 소문 (2013), 용의자 (2013), 감기 (2013), 음치클리닉 (2012), 댄싱 퀸 (2012), 고死 두 번째 이야기: 교생실습 (2010), 섹스 볼란티어: 공공연한 비밀 첫 번째 이야기 (2009), 여자없는 세상 (2009), 해운대 (2009), 7급 공무원 (2009), 파주 (2009), 초감각 커플 (2008), 인디애니박스: 셀마의단백질커피 (2008), 사랑은 단백질 (2008), 멋진 하루 (2008), 무림 여대생 (2007), 복면달호 (2007), 리튼 (2007), 미스터주부퀴즈왕(Mr.주부퀴즈왕) (2005), 피터팬의 공식 (2005), 6월의 일기 (2005),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2004), 실미도 (2003), 아나모픽 (2003), 보스 상륙작전 (2002)
수집자료
구술사: 박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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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조명 - 박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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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조명 - 박진수
- 매체규격
- DVC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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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수] 영화를 향해, 뜨겁게!
- 실물구분
- 아날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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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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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도 구술채록 자료집 박진수 [조명]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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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도서관(상암)
달리고 또 달린다
- 실물구분
- 아날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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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구술로 푸는 한국영화사 미스터리] 한국영화 '야인시대'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2022년 노만 선생님의 생애사 구술 인터뷰 를 진행하며 굉장히 흥미롭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하여튼 그때 내 임화수 씨를 처음 알게 됐고, 임화수 씨는 또 젊은 나를 굉장히 좋아했어. (웃음) 그래서 보통 우리가 아는 임화수하고는 전연 달러. 주먹이지만 굉장히 뭐라고 그럴까, 겸손해요. - 노만(영화평론가, 2022, 90쪽) 아마도 위 발언에서 ‘보통 우리가 아는 임화수 ’란 SBS 드라마 < 야인시대 >(2002~2003) 속 캐릭터로서의 임화수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방영 당시 최고 시청률 51.8%, 평균 시청률 30%를 찍었던 이 드라마에서 임화수라는 캐릭터는 픽션적 상상력이 더해지긴 했지만 그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각종 ‘썰’들을 대체로 반영하고 있고, 또 해당 역을 맡은 배우의 살벌한 연기 덕에, 시청자들에게 아주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에 비열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위 구술에서 이어지는 “겸손해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모르는 사이에 ‘겸손’의 뜻이 바뀐 건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국제영화》 1959년 7월호 속 임화수 하지만 임화수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평가는 1950년대 활동했던 영화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양반이 스태프들한테는 잘했어요. 거기서 말썽 일으킨 거는 저, 돌아가신 김희갑 씨 때려가지고선 갈비가 부러졌다, 그때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스태프들한테는 난 잘했다고 생각을 해요. … 또 영화에 투자도 많이 하고요. 이런 얘기하면 뭐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도 영화산업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난 생각을 해요. - 이도원 (편집, 2004) 내가 생각하기에 임화수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본질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성격이 나뻐,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원래 깡패 출신 아니에요? … 나는 임화수의 덕을 많이 본 사람이에요. - 박진수 (조명, 2007, 53~54쪽) 아주 연예계에선 임화수라고 하면 알아줘야돼, 그때. 뭐 배우고 뭐고, 연예계에 하여튼 가수고 뭐 할 거 없이 임화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그렇게 돼 있었다고, 그 당시에. 근데 임화수 씨하고 나하고는 아무런 마찰이 한 번도 없었고. … 그리고 임화수는 배운 게 없지마는 머리는 잘 돌아가고 약았어. 그때 그래가지고 무슨 문화부장관인가, 응? 박마리아 여사한테 가 붙어가지고 그때 문화부장관인가 뭐 발령이 났다가, 사건이 터져가지고 고만뒀든가, 아마 그렇게 됐어. 그 얼마나, 그 사람 위대해. 위대한 사람이야. 학교 못 다녀도 그런 정도로 했다면, 응. - 이지룡 (배급, 2012, 171쪽) 그러나 위 구술에서 중요한 것은 ‘정말 임화수가 괜찮은 사람이었느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어떻게 1950년대 활동한 영화인들에게 임화수가 깡패이면서도 ‘위대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었는가이다. 사실 구술자들이 임화수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중 일부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관계에 기대고 있다. 즉, 자신이 개인적으로 덕을 봤거나, 그와 특별히 마찰을 겪지 않아 그의 나쁜 점을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구술자들이 이야기하는 그에 대한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의 기억을 조금 우회하면서 한국영화사에서 그의 ‘공적(功績)’이라고 이야기되는 것들이 어떻게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는 1950년대 중후반의 한국영화 산업을 이해하는 것과도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앞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한국영화의 역사가 ‘임화수’라는 한 인간을 통과하며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이다. 물론 이는 하나의 통일된 방향이 아니라 마치 빛이 프리즘을 지나 여러 갈래로 굴절해 뻗어나가는 것처럼 다양한 결과들로 귀결될 것이다. 깡패는 왜 ‘극장’을 좋아했을까? 그럼 먼저, 임화수와 영화산업에 접근하기 이전에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내가 영화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꼬꼬마 시절에 < 장군의 아들 > 시리즈(임권택, 1990~1992)를 볼 때도, <야인시대>를 보면서도 항상 궁금했던 것은, ‘왜 저 사람들은 자꾸 극장 앞에서 싸우지?’ 하는 것이었다. 물론 싸움에 적당한 장소로서 극장 앞에 공터가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우리가 흔히 ‘김두한’ 하면 ‘우미관’이라는 극장을 떠올리는 것처럼 당시 깡패들은 이상하게 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장군의 아들>(임권택, 1990)의 한 장면. 오른쪽에는 김두한의 주 활동무대인 ‘우미관’이 보인다. 물론 이때 제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돈이 되니까’일 것이다. 실제로 당시 극장은 아주 수지가 좋은 현금 장사였다. 임화수처럼 직접 극장을 운영함으로써 *주1 수익을 얻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흥행업은 주먹 패거리들에게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였다. 나는 경리만 보고 돈만 계산하고. 표 받고 뭐하고 하는 거는 주먹이 댕겨요. 극장에 가면 극장마다 그 동네 깡패들이 있어. 그러면 이놈들은 날마다 극장은 상시출입이야. 지 맘대로 돈은 안 내고. 얘네들이 내려가면 전국적으로 유명한 주먹이니까 딱 오면 “아, 형님 오셨습니까.” 절대로 그냥은 못 들어와. 그리고 또 유명한 게 그 당시만 해도 지방 가면, 입장료가 500원이다 그러면 400원 가지고 와서 그냥 들어가려고 그런다고, 현찰로. 그러면 지금은 표를 찍고 그러지만, 여기 딱 궤짝이 있고 구멍이 뚫려있는데, 표를 받으면 여기다 넣는 거야. 그런데 이제 이 궤짝을 주먹쟁이가 깔고 앉아. 극장 직원이 표를 받아서, 돈도 받으면 그걸 그 궤짝에 넣는 거야. 이 궤짝이 그날 전체 수입이야. … 이걸 가지고 극장 사무실에서 쏟아 가지고 표는 표대로 돈은 돈대로 해서 다 계산을 해요. 그리고 ‘오늘 얼마가 들어왔다’고 극장에다가 먼저 들이민다구. 그러면 극장에서 마지막날 전체 수입이 얼마다 계산해서, 당시 극장이랑 3:7이야. 극장이 3이고 단체(공연/연극단을 말한다)가 7할 가져가는 거거든. 그렇게 계산해가지고 거기서 세금 떼고 돈 딱 주면 그걸 봉지에 다 넣고 계산서 딱 붙이고, 봉투를 딱 여매서 신주 모시듯, 잊어버리면 큰일나니깐. 그런 식으로 지방을 돌고 올라와요. - 김인기 (제작/기획, 2004) 구술자 김인기는 임화수와 어린 시절 같은 집에 세를 들어 살았던 인연으로, 후에 성인이 되어 임화수가 연예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을 때 그의 회사 경리로 일하며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김인기에 따르면, 극장마다 일명 기도(木戸, ‘문지기’를 뜻하는 일본어)라고 불리는 힘 꽤나 쓰는 ‘주먹’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역할은 입장권을 사지 않고 몰래 극장에 들어가려 하거나 과감하게 ‘자체 할인’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막고, 표나 돈이 다른 곳으로 새지 못하도록 돈통 지키는 일을 했다. 그리고 아마도 공연단과 함께 극장을 돌며 간혹 배우들에게 시비 거는 사람들을 때려주는 일도 했던 것 같다. 그때는 깡패들이 한몫을 한 게 있어, 흥행계에서는. 그런 일 많지. 배우가 유명하면 또 명동서 술먹고 놀다가도 얻어맞기 일쑤고, 댄스홀에서도 곤조부리고 그런 거지. 그런 거 많어. - 황남 (배우⋅제작/기획, 2004) 이처럼 극장의 기도 또는 수표주임은 극장 운영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력이었는데, 이들을 지정해주는 것 역시 그 지역을 관리하는 주먹 패거리들이었다. 1950년대 명보극장 부사장을 지냈던 구술자 이지룡은, 명보극장 의 수표주임으로 명동파 이화룡 이 보내준 사람을 썼다고 말했다. 명보극장의 전경과 내부 이화룡이라고 있어. 무섭긴 이화룡이 더 무섭지. 이화룡이는 명동파야. 임화수는 종로파고. 근데 극장 하나 시작을 한다 하면은, 그 기도주임이라는거, 수표주임이야, 응? (이화룡은) 바로 극장이 자기 극장인 거처럼 생각하고, “이 사장, 수표주임은 내가 보낼 테니까 그 사람 쓰시오.” 이렇게 된 거야. (질문) 수표주임은 임화수랑 이화룡이 보내주는 사람을 무조건, 모든 극장이 다 쓰는 거예요? 응, 대부분 아마 그랬을 거야. 내 알 건댄 그래.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착취해 먹는 게 아니고, 다 자기들 따르는 그 나름대로의 제자들이거든? 그러니까 밥벌이 하라고 취직을 시켜주는 거지. - 이지룡(제작, 2012, 170~172쪽) 그런데 이 정도뿐이라면 깡패들치고 매우 성실하고 건전하게 극장과 공존하며 수익을 나눠 갖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이 당시 깡패들이 극장으로부터 수익을 얻는 가장 주된 방법이기는 했지만, 좀 더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삼류관인께 한 푸로 4일간, 그러면 네(4) 푸로를 해야 돼. 회장이 한 푸로, 써금써금헌 놈 영화사 아무거나 그냥 공이로 갖다가 붙여먹고 많든 적든 수입 가져가. 그때 유지광 이가 그다음 꼬붕이여. 유지광이가 대. 그러믄 인자 극장 앞 부근에 이런 놈 있어. “사장님, 우리도 먹고 살어야 된다”고 … 그럼 9일을 뺏겨 갖고 21일 갖고 장사를 허니 미치제. - 전경섭 (배급, 2007, 80쪽) 전경섭은 해방 이후 제국관 (동방극장으로 명칭 변경)을 불하받은 형 전기섭의 밑에서 극장 운영을 배웠고, 호남 지역의 영화 배급일도 맡았었다. 이후 전기섭은 서울 동대문 천일극장을 운영하게 되는데, 천일극장은 광장시장 앞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평화극장 과 매우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구술자 전경섭은 천일극장이 평화극장과 경쟁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화수가 자신들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천일극장이 이정재의 권역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위 구술은 당시 이정재가 천일극장으로부터 어떻게 수익을 챙겨갔는지 설명하고 있다. 천일극장은 재개봉관으로 영화 한 편을 상영하면 평균 4일 정도 상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정재와 유지광, 그리고 그 밑에 깡패들이 영화사로부터 낡은 영화 한 편씩을 공짜로 가져와서는 극장에 상영하게 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수익은 자신들이 가져갔다. 그러면 극장 측은 한 달 중 열흘 *주2 정도는 영업을 하고도 한 푼 벌어들이지 못하니,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극장 주변의 깡패들은 대체로 영화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대중오락으로서 인기가 있었던 영화 흥행을 이용해 쉽고 빠르게 현금을 챙기고자 했다. 그러나 임화수는 단순히 극장 경영을 돈벌이로만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단체를 조직하고, 더 나아가 영화 제작에 돈을 투자했으며, 영화 정책에도 관여하고자 시도했었다. 그의 이러한 영화산업에 대한 욕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국산영화면세조치에 대한 기억 그때 그 면세조치운동이요, 지금 그거를 어떻게들 평가할런지 모르지만, 사실은 임화수가 나쁜 짓도 했지만 좋은 짓도 했어요. 임화수가 그 국산영화면세조치를 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 강대선 (감독⋅제작/기획, 2004) 1950년대 영화 기자로 활동한 바 있고, 이후 영화 연출, 영화제작⋅기획을 했던 구술자 강대선은 임화수와 관련하여 그의 가장 큰 공(功)으로 ‘국산영화면세조치’를 꼽았다.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비오는 날이었어요. 내가 기억하기론 여름인데, 돌아가신 김승호 란 배우가 있었는데,아주 유명한, 동남아시아를 석권했던 명배웁니다. 이 양반이 하얀 모시저고리를 입고 단성사 극장 흙탕물에 털썩 주저앉아서 땅을 쳤던 일이 있어요. 각 신문 사진기자들이 (담기에) 좀 좋아. 당대 최고의 스타가 말이지 비오는 날 말야 물구덩이에 앉아서 땅을 치면서, 또 연기는 좀 잘했겠어? (웃음) 연기자인데. 이거를 전부 그냥 사진을 찍어가지고 곽영주 경무관이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을 가리킨다)한테 드린 거라. 이 박사가 그냥 특명을 내려가지고 이기붕 씨가 손수 나서서, 말하자면 국산영화에 대한 면세조치를 해줬지. - 강대선(감독⋅제작/기획, 2004) 구술자가 이야기하는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영화배우 김승호는 당시 임화수가 경영했던 한국연예주식회사 소속 배우였다. 즉 임화수는 자기 회사의 소속 연예인을 이용하여 극적인 그림을 만들어냈고, 평소 친분이 있었던 곽영주를 통해 이 그림과 함께 ‘국산영화면세조치’에 대한 청을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전달했다는 것이다. 영화 < 해떨어지기 전에 >(강대진, 1960)에서의 배우 김승호. 구술자가 말하는 상황과 대략 비슷할 것 같은 사진을 골라보았다. 구술자의 증언이 너무 극적이고, 눈앞에 그려질 듯 생생해서 하마터면 덜컥 믿어버릴 뻔했다. 그렇다고 구술자가 말하는 상황 자체가 꾸며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약간 기억의 왜곡이 작용한 듯 보인다. *주3 사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국산영화뿐만 아니라 흥행물에 대해서도 입장세 인하 요구는 꾸준히 예술인들에 의해 주장되어왔다. 그 결과 국산영화제작 진흥의 일환으로 1954년 3월 31일 공포⋅시행된 입장세법에는 ‘국산영화에 대해 입장세를 면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다시 말해 임화수가 극장 및 연예단체 운영자로 활동하던 시기에 이미 국산영화에 대한 면세조치는 이루어져있었으며, 그는 오히려 이러한 특혜조치에 따른 이득을 누리기 위해 영화계로 영역을 확장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게다가 김승호가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동남아시아 영화시장에 이름을 알린 것도 1957년 < 시집가는 날 >(이병일, 1956)이 동남아에 수출되고, 제4회 아시아영화제 에서 최우수희극상을 받은 뒤부터였다(물론 이전에도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연극계에서 더욱 이름이 높았다). 따라서 강대선이 기억하는 저 화려한 퍼포먼스는 적어도 1958년 이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주4 비록 몇 가지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기억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위 구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임화수라는 인물이 ‘김승호’라는 명배우를 동원할 수 있는 힘과, 동시에 국가 최고 권력에 닿을 수 있는 ‘끈’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영화계에 들어와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해외 진출 시도와 실패 임화수는 영화계에 첫발을 딛는 동시에 과감하게도 해외로 진출했다. 많은 당대의 영화인들이 꼽는 그의 두 번째 ‘공적’이 바로 이 해외와의 합작 시도이다. 그는 1957년 한국연예주식회사에 소속된 배우와 스태프들을 데리고 홍콩으로 갔다. 홍콩에 도착한 이들을 맞이해준 것은 동남아 지역에 대규모 극장 체인과 스튜디오를 소유하고 있는 유명 영화사 쇼브라더스였다. 처음에 홍콩에 도착을 했더니, 트랩에서 내리는데 정말 배우생활 60년 동안에 그런 카메라 세례를 받아본 건 처음이야. TV기자라든가 잡지사, 신문사 기자들 한 50명이 트랩 밑에서 후레쉬를 터뜨리는데, 정말 야! 정신이 없더라구요. … 그날 저녁, 우리가 파티 저녁을 먹는데 그쪽 뉴스에 “한국배우들 도착” 그리고 합작영화 소개가 뉴스 시간에 나오더라구. 그러니깐 그때부터 우리 일행들은 좀 흥분이 되고, (웃음) 새롭게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왜냐하면 아시다시피 50년대 우리 영화계는 아주 빈약했고, 또 촬영현장 가도 카메라래든가 조명이래든가 여러 가지 기재가 아주 구닥다리였고. … 근데 가서 촬영현장을 보니까 쇼브라더스의 스튜디오라든가, 조명기구, 카메라 그리고 기술적인 그 흐름이 아, 역시 우리가 처음 보는 그런 환경에서 연기한다는 게 참 신기스러울 정도로, 변화를 느끼게 됐죠. - 윤일봉 (배우, 2015, 11~12쪽) 영화 < 이국정원 >(전창근, 도광계, 와카스기 미쓰오, 1957)의 스틸컷. 왼쪽이 구술자 윤일봉이다. 쇼브라더스 측에서는 일찍이 1956년부터 한국 정부에 자신들이 보유한 영화와 한국영화를 교환하는 방식의 무역 거래를 요청해왔다. 이 시기 쇼브라더스는 동남아시아를 넘어 한국과 일본으로 시장의 확장을 꾀하고 있었고, 한국도 1955년 제2회 동남아시아영화제에 옵저버 자격으로 참여했던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해외 진출(한국영화의 수출과 합작을 통한 기술 교류)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던 참이었다. 이렇게 서로의 필요가 맞닿은 찰나에 적극적으로 그 기회를 잡은 것이 임화수였다. 그리고 그가 다른 영화사들에 비해 더 적극적일 수 있었던 것 역시 임화수에게 닿아있던 정부 권력 덕분이었다. 1950년대 중후반 합작영화 제작이 어려웠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당시에는 여권을 받아 해외로 출국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 때였다. 그때는 국제적이라는 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합작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나 홍콩을 자주 왕래할 수도 없었고. … 아주 여기서 허가 내는 데 어려왔어요. 절대로 못 나가는 거예요, 그때는. (22~23쪽) … 나라에서는 여권이라든가 그 편의는 문화공보부, 그땐 공보부에서 ‘많이 편의를 봐줘라. 이거 대한민국을 위해서 외화수입만 의존하지 않고 이제 우리도 합작을 해서 우리 걸 제대로 국제적으로 이 무대에서 나가는 거니까 도와줘라’ 그래서 스무스하게 왔다갔다 하는 거는 참 잘했어요, 우리가. - 문금순 (제작, 2014, 22쪽) 하지만 무엇보다 합작 진행 과정에서 가장 힘든 것은 외화(外貨)를 국외로 반출하는 일이었다. 쇼브라더스와 한국연예주식회사는 합작 당시 제작비를 5:5로 분담하기로 했다. 영화제작이라는 것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거액이 필요한 사업이었고 그 절반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그러나 1950년대는 국내 보유 외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외화의 사용은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고, 매년 상공부의 무역 계획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규모가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계획에도 없는 거액의 외화를 갑자기 필요에 의해 갖고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대한 불만은 임화수가 ‘썼다는’ 칼럼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 해외시장 확보에 목적한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투자를 자유스럽게 해야 하겠는데 우리 영화제작계에는 외화(外貨)가 없고, 또한 있다 해도 자유롭게 해외에 투자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속히 정부는 선진국의 예를 따라서도 해외시장진출을 목적한 영화제작에 제작비를 보장 내지 보상해주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투자의 자유스러운 길을 열어주어야만 우리 영화도 우방국가의 영화와 대열을 같이 하여 해외시장을 어느 만큼이라도 점유할 수 있고 따라서 발전과 향상을 기하리라 생각된다. - 임화수, "합작영화의 가능성", 《조선일보》, 1958. 2. 20. 4면 기사 중 어쨌든 이런 장애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화수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때그때 외화를 조달해가며 합작을 진행했다. 합작영화라면 외화 유출을, 인제 보내줘야 되잖아요? 근데 대체로, 송금하고 이게 아니라 이 양반이 싸 가지고 갔다고. 왜냐면 세관이라든가 이게 외화유출로, 법적으로 걸릴 수도 있는데 이이는 용감했어요. 그리고 또 세관 사람들 다 알고. 임화수 하면은 뭐 다 그때는 통할 때니까. “아, 오늘 누구 엄마 연락해서 몇 만 불 좀 사라.” 뭐 이래서 현금 주고. 자금줄이라는 게, 그이가 그렇게 돈이 많고 이러지는 않더라고요. 그때 평화극장 하면서 뭐 갈쿠리로 긁을 정도로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이니까 현금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거기는 그거 갖고는 제작비 감당이 그렇게 쉬운 건 아니에요, 잔돈푼은 될지언정. 대개 재택이 엄마가 계모임을 조직해서, 그거 어… 동대문시장 상인연합회에 7형제라고 있어요. 그 부인들하고 계조직을 하면은 계모임에서 그 돈을 가져오고. 또 두 번째 부인을 통해서. 자기 본부인하고 둘째 부인하고 경쟁을 시킨 거예요. “얼마가 오늘 필요한데, 며칠날 홍콩 가는데 돈이 있어야 되니까 해오라”고. 양쪽에서 해오는데 어떤 때는 안 되는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되면, “크, 그냥 너는 아주 최고다.” 막 이러고. 그날 인제 좋은 분위기로 그 집을 가는 거고. 안 되면 “야, 넌 그것도 못 해오냐”고, “기분 나쁘다”고 막 싸우는 수도 있고. (18쪽) … 각 극장에서도 좀 도와준 것 같아요. 극장주들이 많이 도와줬고, 또 나름대로 주위의 고리대금하는 사람들도 슬슬 흘려서 빌려줬어요. 이자를 다른 데보다 싸게. … 하여튼 저는 열심히 그냥 명동에 달라 아줌마한테 가서 받아다 드리고. (30~32쪽) 그냥 야미(뒷거래)지. 그러니까 주머니에 넣고 가서 쓰고. 또 홍콩 자체에서 필요해서 교포들하고 거래로 해서 우리나라 돈 주고서 하는 수도 있고. 무슨 수든지 하여튼 우리 걸 분담은 다 깨끗이 했기 때문에 그 영화가 나온 거겠죠. (35쪽) - 문금순(제작, 2014) 한국연예주식회사와 쇼브라더스가 합작한 영화 < 천지유정 >(김화랑, 1957) 양국 참여 스태프 단체사진 그런데 이렇게 힘들게 동원된 막대한 자금은 제작비로도 사용되었지만, 대체로 경비로 나갔다고 한다. 보은의 뜻으로 자기한테 충성했던 사람들을 홍콩 구경시켜 준다고 많이 갔어요. … 외국에를 나갔으면 좋겠는데 영화를 핑계로 나갈 수 있는 길이 트였다고 굉장히 선호도가 좋았어요. 배우들이고 뭐, 엑스트라라도 좋으니까 홍콩 좀 한번 갔다 왔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조금 이쁘게 보이면 그냥 “이번에 너 데려간다” 이렇게 해서. 그런 경비가 좀 많이 나갔어요. - 문금순(제작, 2014, 40~44쪽) 제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한중 합작영화 제작의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상을 수상한 임화수(왼쪽에서 세 번째) 이런 식으로 3편의 합작영화를 제작했지만, 흥행에서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하자 그는 합작에서 손을 뗐다. 비록 임화수는 합작에 손을 뗐지만, 이후에도 합작에 대한 국내 영화사들의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특히 1962년 제정된 영화법에서 합작영화를 법제화하여 그 기준을 정하고 정식 공보부의 허가 절차를 통해 자금 출자도 가능하게 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물론 이와 같은 규정이 만들어진 바탕에는 어쨌든 앞서 합작을 시도했던 임화수의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영화법이 제정된 후 가장 활발하게 합작에 나선 것은 신상옥 감독이 이끌던 신필름이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초까지 신필름(신프로덕션)을 거쳐간 많은 영화인들은 쇼브라더스와의 합작을 통해 새로운 영화기술과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또한 196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서 홍콩 무협영화의 인기가 높아지자 다수의 한국 영화제작사들이 합작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것이 1970년대에는 위장합작 문제를 야기시켰고 이로 인해 합작영화에 대한 여러 제한 규정들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이는 그만큼 당시 합작영화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한국영화산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 시기를 기억하는 영화인들에게는 처음 합작을 시도했던 임화수의 공이 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임화수는 자신이 세운 공든 탑을 버리고 다른 선택을 했다. 이맘때부터 그는 반공예술단을 결성해 소속 연예인들을 관제행사에 동원하는가 하면, <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신상옥, 1959)과 같은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 영화는 <만송 이기붕>이라는 제목의 문화영화와 함께 1960년 3월 15일 이루어질 정부통령선거를 위한 선전영화로 전국 극장과 군(軍)에서 상영되었다. 여전히 연예계에서 활동하며 영화를 만들고 있었지만, 정치깡패로서 정권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선택이 그에게 가져온 결말은 모두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깡패냐, 예술인이냐 3.15부정선거의 결과로 4.19혁명이 일어났고, 임화수는 이후 3.15부정선거 개입과 고대생 시위대 피습사건 등 정치폭력 혐의로 체포되어 여러 차례의 재판 끝에 1961년 12월 21일 사형에 처해졌다. 재판 최후진술에서 임화수는 자신이 ‘예술인’임을 강조하며 “국가에 공로는 있을지언정 죄를 지은 일은 없다” *주5 고 주장했다. 5.16 이후 진행된 혁명재판의 최후진술에서도 그는 다시 “자유당을 위해 <청년 이승만>의 영화를 만드는 등 이용만 당하다가 억울하게 고대생 습격범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으니 잘 살펴달라” *주6 며 자신이 ‘문화사업가’임을 강조했다. 물론 그의 이러한 발언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구차한 발버둥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예술인’으로 여기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가 자신을 무엇으로 규정하든 크게 문제될 바는 없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가 이 ‘예술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에 있다. 임화수는 무궁화악극단과 코리아악극단이라는 당시 굵직한 두 개의 악극단을 연합하여 한국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하고는 소속 연예인들을 빈번하게 자신의 명예와 문화적⋅정치적 지위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영화산업에 뛰어든 후에는 자신이 가진 뒷배를 동원하여 합작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속시켜 제도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제작비를 긁어모아 지인들과 선심성 여행을 다니기에 바빴다. 이렇다 보니, 이른바 그가 한국영화사에 남긴 공로라는 것도 단지 ‘예술인’ 또는 ‘문화사업가’가 되고 싶었던 한 깡패의 허세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임화수는 비슷한 길을 걸었던 화성영화사의 이화룡과 비교가 된다. 이화룡은 앞서 구술에서도 나온 것처럼 명동파 어깨두목으로 1958년 일명 ‘명동깡패사건’으로 기소되어 1959년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 사건이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몰라도 그는 1960년 화성영화사를 설립하며 영화제작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4.19 이후에는 임화수와 마찬가지로 ‘단체적 폭력행위’로 혁명재판에 기소되어 6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주7 1963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에도 영화인으로서의 생을 살며, 한국영화계에 자신의 족적을 남겼다. < 신세계 >(박훈정, 2012)에서 정청이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는 이자성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제 고만 선택해라. 그래야 니가 살아”)처럼 임화수는 어느 순간엔가 자신이 영화인으로서 살 것인지, 정치깡패로 살면서 언젠가는 몰락할 정권과 그 운명을 같이 할 것인지, 둘 중에 하나의 길을 선택했어야 했다. 따라서 분명한 선 긋기에 실패한 이 예술하는 정치깡패는 한국 연예계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고 여러 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는 데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기는 했지만, 끝끝내 죽는 순간까지 대중에게 ‘예술인’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 주1. 임화수는 해방 후 적산(敵産)이 된 제일극장(일제시기 미나도좌)을 불하받은 뒤, 평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했다. 주2. 영화 한 편에 4일 상영이니까, 이정재, 유지광, 그 아래 깡패가 한 편씩만 들고 와도 총 12일간은 극장 수익이 없는 셈이다. 구술자는 9일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구술자의 단순한 계산 오류일 수도 있겠으나, 이 날짜가 그만큼 유동적이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3.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연예주식회사에서 회계 담당 직원으로 일했던 문금순도 구술에서 “한국영화 세금 안 내게 한 사람이 임화수 씨”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데 문금순은 면세조치가 이루어진 과정이 강대선과는 또 다르다. “‘우리 한국영화를 위해서 말이야 면세조치를 받아야 되는데 재무부장관 집에 새벽에 쳐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래 갖고 김승호 씨, 김희갑 씨, 복혜숙 씨, 고선애 씨, 이향자 씨 이런 사람들 … 막 끌어내고. 그래서 새벽 일곱 시에 재무부장관 집을 가는 거예요. … 재무부장관이 허락해야만 되니까. 그래 갖고 그걸 뚫고 면세조치가 돼서 한국영화 세금 없이 상영관에 상영을 했어요.” (공영민, 『 2014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문금순 박행철 안정무 편 』, 한국영상자료원, 2014, 23~24쪽 참조.) 그러나 이 역시 잘못된 기억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아마도 임화수는 자신의 의견을 중앙에 전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4. 국산영화면세조치 덕분인지는 몰라도, 1955년 이후 한국영화는 제작편수 면에서나 흥행 면에서나 눈에 띄는 상승세를 보였다. 이에 따라 타 무대연예예술이나 외국영화와 비교해봤을 때, 국산영화만 특별히 입장세를 면해주는 것이 형평성에 맞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 1958년 즈음이다. 그리고 1959년 자유당에서 제안한 입장세법 개정안(국산영화와 외화 모두 극장의 등급에 따라 세율을 차등 부과)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이에 반대하는 영화인들의 시위가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국회 앞에서 배우들 진정", 《조선일보》, 1959. 12. 27. 3면 기사 참조) 구술자 강대선이 봤다는 시위는 1958~1959년 즈음에 있었던 이 배우들의 시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위가 입장세법 개정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1960년 개정⋅시행된 입장세법에 따라 국산영화에 대해서도 2~4%의 입장세가 부과되었는데, 대신 1958년 문화공보부 고시를 통해 우수 국산영화를 제작한 영화사에 외화수입배급 쿼터를 1편씩 추가로 배정하는 ‘국산영화제작장려 및 영화오락순화를 위한 보상특혜’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임화수는 외화 배급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보상정책이 수립되는 데에 그의 입김이 얼만큼 닿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주5. "법정스냎-말끝마다 예술인/임화수, 국가공로 있다고", 《동아일보》, 1960. 9. 6. 3면 기사. 주6. "임화수⋅유지광 최후진술", 《경향신문》, 1961. 8. 22. 조간 2면 기사. 주7. 이때 그의 범죄혐의는 ①국도극장 임검순경 폭행 ②명보극장 사장을 협박하여 권리행사 방해 ③투자액 반환을 요구하는 공연 투자자 폭행으로 인한 상해 등 세 가지였는데, 모두 영화사 설립 이후 극장 흥행과 관련한 폭력 행위로 이전에 명동파로 활동하던 때의 범죄로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을 받았다.
[초이스]국경의 왕
이 영화는 동유럽 낯선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공항에 도착해 생수를 단숨에 들이켜는 유진( 김새벽 )의 첫 쇼트는 호기심과 긴장이 교차하는 여행자의 시선으로 반짝인다. 캐리어를 끌고 가는 그녀의 몸짓에서 매혹적인 여행지의 마법을 기대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내 엉뚱한 사건과 상황이 중첩되며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같은 인물 비슷한 대사가 반복되고 시간과 공간이 모호하게 혼재된다. 이야기를 좇는 길목마다 퀴즈를 푸는 만만치 않은 모험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난 캐릭터, 거침없는 대화, 자유로운 연기, 예상치 못한 사건이 빚어내는 젊은 패기와 활력이 영화를 힘있게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폴란드에 도착한 유진은 한국 남성들을 우연히 만나고 고려인에게 행운의 꽃을 선물 받는다. 선배 동철( 조현철 )과 만난 바에서 인상 나쁜 한국인을 다시 만나자, 유진은 언짢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친구 원식(정혁기)을 만나러 우크라이나로 간 동철은 세르게이(박진수)가 벌이는 위험한 사업에 말려든다. 이 과정에서 원식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되고 동철은 원식과 함께 도망 중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맞는다. 여기까지가 ‘국경의 왕’ 챕터이다. 이어지는 ‘국경의 왕을 찾아서’ 챕터에 동일 인물이 다시 등장하지만 전혀 다른 설정이다. 구성상 ‘국경의 왕’은 허구이고 ‘국경의 왕을 찾아서’는 실제이다. 거칠게 구분하면 ‘국경의 왕’은 동유럽에서 영화를 찍고자 하는 유진과 동철이 쓰고 있는 허구의 시나리오고, ‘국경의 왕을 찾아서’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여행하는 유진과 이곳에 거주하는 동철의 이야기이다. 은경(이유진)을 가운데 두고 만나는 이들은 영화와 미래에 대해 얘기하고 새로운 친구(정혁기, 박진수)를 사귀기도 한다. 후반의 챕터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유진과 동철의 실제 경험과 감정이 어떻게 각자의 시나리오에 반영되었는지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다. 우연히 여행지에서 만나 동행한 친구가 범죄 장르물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타인이 겪은 경험과 이야기가 시나리오에 천연덕스럽게 배치된다. 말 못하는 관계의 감정 또한 조심스레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시나리오고 어디까지가 실제라는 주장은 그리 간단치 않다. 영화의 구분점이 무색하게 이야기가 파편적으로 전개되고,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인물의 장난스런 말과 행동은 앞뒤의 개연성에 의존하지 않고도 충분히 유머러스한 완결성을 가진다. 정교한 내러티브 서사를 포기한 순간 죽은 사람이 다시 일어났다 해도 농담이라 퉁치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감독이 절친한 동료와 실제 여행하며 영화를 찍었다는 제작 배경은 영화 속 작은 퍼즐을 압도한다. 전작 < 라오스 >에 이은 이러한 방식의 영화 만들기는 진짜와 가짜, 허구와 실제에 대한 논의를 본질적으로 확장시킨다. 전작과 비교했을 때 이번 작품 <국경의 왕>은 더욱 복잡하고 미묘한 인간의 심상을 탐구하고 있다는 인상을 두드러지게 받게 된다. 영화 속엔 인기 아이템 포켓몬에 열중하며 손쉽게 일확천금을 꿈꾸는 유치한 세대의 표상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론 여행하며 영화와 인생을 고민하는 진지하고 고독한 개인이 존재한다. 마음, 소원, 믿음 등 이성적 세계와 동떨어진 종교적 언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따뜻하며 기이한 정서는 불현듯 등장하는 유령( 임철 )의 존재처럼 영화에 일정한 태도와 방향을 지시하고 있는 것 같다. 왁자하고 떠들썩한 인물 가운데 도시를 여행하는 유진의 걸음이 부지런하다. 카메라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회색의 풍경을 가로지르는 미지의 가능성과 불안을 묘하게 포착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할 것인가? 마음에 평화는 찾을 수 있을는지.
십년세도
반복한다는 것. 같은 이야기를 두 번 찍는다는 문제는 한국영화에서 종종 제기되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김기영 . < 하녀 >를 1960년에 찍은 다음 거의 같은 이야기로 1971년에 < 화녀 >를 칼라 버전으로 찍었다. 그런 다음 약간의 변형을 가한 < 충녀 >를 이듬해에 만들었고 십년 뒤에 다시 < 화녀 82 >를 찍었다. 마치 하녀 역을 연기할 새로운 여자 배우가 나타나기만 하면 김기영은 언제든지 다시 찍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김기영은 이 영화들이 서로 완전히 다른 영화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영화사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세기가 바뀐 다음 같으면서 다른 버전으로 임상수 가 2010년에 다시 < 하녀 >를 찍었다. 이만희 가 1966년 < 만추 >를 만든 다음 김기영은 같은 시나리오로 < 육체의 약속 >을 1975년에 만들었다. 그리고 같은 이야기로 다시 김수용이 < 만추 >를 1981년에 찍었다. 무대를 미국의 시애틀로 옮긴 다음 김 태용 은 전면적인 개작을 해서 다시 < 만추 >를 2010년에 찍었다. 나는 지금 단순하게 리메이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기보다는 그 이야기가 먼저 있고 영화가 거기에 다가갔다는 전도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이 영화들을 무언가의 중심 안으로 환원시키고 싶다는 유혹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들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 우리들은 거기서 매번 다시 시작하는 순간을 낚아채야 한다. 그런 다음 사라져 가버린 것들을 놓치면 안 된다. 그것들이야말로 서로 흩어진 이야기들이 그 스스로 차별 지어져 존재하게 만드는 진정한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그 이야기들 사이의 매듭을 찾아야 한다. 이 세 가지 운동을 모두 발견했을 때에만 비로소 따분한 반복과 사소한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논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 망부석 >과 < 십년세도 > 오프닝타이틀 임권택 의 < 십년세도 >는 같은 반복 안에서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영화를 만들기 일 년 전에 임권택은 같은 회사인 세기흥업에서 < 망부석 >을 찍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이 영화에 대해서 썼다) 그런 다음 이듬해 <십년세도>를 찍었다. 두 편의 영화를 연이어 보면 조선시대에 관한 다소 이상한 연표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두 영화는 서로 비스듬히 겹쳐 있으면서 동시에 같은 이야기에 대해서 서로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어떤 것이 되돌아온다는 문제. 그 안에서 무엇을 망각하고 무엇을 남겨놓아야 할까. 간신히 끝냈다고 생각한 이야기의 어느 지점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 느끼는 망연자실함. 거기에 마치 어떤 진실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되돌아왔음을 발견했을 때 거기서 소스라쳐 놀라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여기서 임권택은 이미 지나가 버린 자기 영화에 대해서 마치 지금 다르게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한 방법으로 다시 한번 시작하고 있다. 후렴구처럼 반복하고 싶은 말. 다시 한 번 다르게. 임권택은 숙종에서 장희빈을 거쳐(< 요화 장희빈 >) 경종에서 영조로 이어진 다음 사도세자의 뒤주에서의 죽음을 둘러싼 비화(<망부석>)를 거쳐 그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22대 왕 정조의 즉위와 그의 정치적 투쟁에 관한 이야기(<십년세도>)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나는 지금 여기서 조선왕조실록의 고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는 일이다. 또한 사‘劇’영화에서 관점에 따라 비평적인 질문과 전술적으로 필요한 대답을 위하여 그 이면과 표면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전선을 형성할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영화에서는 역사가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먼저 환기시키고 싶다. < 망부석 >에서 영조 살아생전 그의 아들 사도세자는 화완옹주와 그 무리들의 음모에 빠지고 그만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야기는 여기서 일시적으로 중단된 다음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아들인 정조가 아직 즉위를 하지 못했지만 어른이 된 이후로 건너뛴다. 그런 다음 정조는 여전히 화완옹주의 독살 음모 속에서 (영화를 위해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인) 정조를 사모하는 여인 꽃봉이의 목숨을 건 희생으로 위기를 벗어나서 왕위에 즉위한 다음 이야기는 끝난다. 여기서 실록에도 등재된 정조의 충신이었던 홍국영(1748년~1781년)은 그저 꽃봉이가 화완옹주의 요구로 독약을 들고 정조의 처소를 찾았을 때 그 음모를 밝히는 인물로 잠시 등장한 다음 사라진다. 그는 완전히 이야기 외곽에 놓여있으며 주의 깊게 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 십년세도 >의 주인공은 홍국영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그의 아버지 홍성원이 국경수비 대장이자 당시 영조의 신임을 받던 간신 장지항의 음모에 빠져 참수를 당한 다음 간신의 아들이라 하여 과거도 보지 못한 채 저잣거리를 떠도는 홍국영에게서 시작한다. 허나 그의 어머니로부터 큰 꾸지람을 듣고 더 이상 허송세월을 보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한 홍국영은 음모를 꾸며 자격을 취득한 이후 장원급제한다. 이미 사도세자는 세상을 떠난 뒤이며 영조는 아직 살아있고 정조는 지금도 화안옹주의 위협적인 음모와 힘겹게 싸우는 중이다. < 망부석 >에서 정조를 연기하는 김운하 < 십년세도 >에서 정조를 연기하는 이수련 < 십년세도 >에서 영수를 연기하는 김운하 우선 역할(들) 사이의 반복과 차이. 두 영화 모두에 반복해서 나오는 정조를 한번은 김운하 가 연기하고(< 망부석 >) 다른 한번은 이수련이 한다. (< 십년세도 >) 하지만 임금을 연기했던 김운하가 이번에는 가장 밑바닥의 상놈을 연기하면서 (<망부석>에서) 자신을 모셨던 홍국영에게 (<십년세도>) 그의 누이를 사랑했다는 죄로 고문을 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다. 두 영화 사이의 차이는 고작 일 년이기 때문에 이런 배역 사이의 교환이 기이한 착각의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영조는 최남현 에서 김동원 으로 바뀌었고, 또한 화완옹주도 도금봉 에서 이민자 로 바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홍국영 역을 신영균 으로 바꾸었다. (<망부석>에서 홍국영 역을 한 배우의 이름은 자료에 나와 있지 않다) 나는 볼 때마다 두 영화에서 만일 동일한 배우들이 동일한 배역을 연기했더라면 어떠했을까, 라는 불가능한 상상을 하곤 한다. 두 영화의 차이는 단지 정조로부터 홍국영에로, 임금에서 신하에로, 위에서 아래로 관점을 이동한 데서 멈추지 않는다. <망부석>이 사도세자의 죽음에서 시작해서 정조가 어른이 된 다음 임금의 자리에 즉위하는 데까지를 다루었다면 <십년세도>는 어른이 된 정조가 영조의 신임을 얻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다음 영조의 가신들(이자 간신들)을 모두 물리치고 진정한 왕위를 수립하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망부석>이 시작된 다음 그 중간에 이르렀을 때 <십년세도>는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그러나 두 영화 사이의 시간적 간극은 고작해야 일 년에 불과하다. < 십년세도 >의 독살 시도 두 영화 사이의 동일한 에피소드에 대한 다른 장면. < 망부석 >에서 화완옹주는 정조를 독살할 계획을 세운 다음 그의 처소에 드나들 수 있는 꽃봉이에게 독약을 탄 보약을 들려 보낸다. 하지만 꽃봉이는 그 보약을 사도세자가 죽은 다음 망부석이 세워진 곳에 감춰놓고 그냥 빈손으로 찾아가 정조를 마지막으로 만난다. 물론 그다음 장면은 대신 꽃봉이가 독약을 탄 보약을 마시고 죽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 십년세도 >에서도 화완옹주는 정조를 독살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옹주의 가신 중의 한 명이 독약을 품에 넣은 다음 정조의 처소에 몰래 찾아가 그가 늘 즐겨 마시던 술이 담겨있는 호로병에 털어 넣는다. 바로 그 순간 처소에 들른 홍국영은 한눈에 음모를 간파하고 그를 그 자리에서 붙잡은 다음 화완옹주 일파를 척결하기에 이른다. 물론 두 장면을 동일한 에피소드로 보는 대신 동일한 방법을 두 번 사용한 서로 다른 장면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두 개의 장면을 놓고 진위를 가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내 관심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망부석>에서 꽃봉이는 영화를 위해서 만들어낸 인물이지만 그녀가 아니라면 실존했던 인물인 화완옹주의 음모를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서는 가상으로 실재의 침입을 막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이 영화의 후반부는 꽃봉이의 심리적인 정념에로 옮겨간다. 만일 잠시 동안 등장한 사도세자를 (이제 막 청춘‘스타’가 된) 신성일 이 연기하기 때문에 필요했으리라는 상업적인 배려의 짐작이 아니라면 이 영화의 (전반부의) 절반은 다소 어리둥절하게 보인다. 우리는 영화의 대중성에서 스타의 거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신성일이 연기하는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뒤주에서 죽임을 당한 이후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플래시백이 없다. 그런 다음 갑자기 시간을 건너뛰어 정조 주변에서 꽃봉이의 덧없는 사랑의 정념이 어떻게 궁궐 안의 권력 다툼에 착취당하고 교활한 전술에 강요당하는지를 애처롭게 지켜본 다음 그 과정에서 그녀 자신이 내려야 하는 행위의 결정이라는 순간과 마주쳤을 때 결국에는 해야 하는 행동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무능하게 쳐다보게 된다. 이 장면은 <망부석>의 이야기 중심에 놓여있으며 사실상 이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겠다. 이 에피소드는 이 영화의 중심을 차지하며 이 장면을 구심력으로 하여 다른 장면들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때 이 장면에서 꽃봉이의 행동이 자살에로 이끌리기 때문에 시종일관 거의 모든 제스처,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 무심한 정조에게 바치는 대사의 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음악이 비극의 정조에 휩싸여있다. 마치 그러한 기호들은 그녀를 옭아매는 운명의 사슬처럼 보일 정도이다. 임권택 은 이 장면에서 씬들을 할 수 있는 한 길게 늘여놓고 있다. 그런 다음 자살의 장면을 향해서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그때 우리들은 꽃봉이를 따라가면서 그녀의 삶에 관한 작은 희망의 기호를 찾아내기 위해 예민해진다. 하지만 물론 그 과정은 좌절의 심화에 다름 아니다. <십년세도>에서 동일한 에피소드는 홍국영의 지혜롭고 영민하며 순간적인 판단에 따라 정조의 처소 안에서 벌어진 현장에서 행위에로 즉각 옮겨가면서 화완옹주의 음모를 막아낼 뿐만 아니라 이를 기회로 삼아 그들을 일거에 섬멸하는 계기가 된다. 나는 이런 사건이 정말 있었는지, 그래서 이를 기회로 삼아 화완옹주 일파에게 그 죄를 물어 멸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비교적 단순하게 찍혔고, 그런 다음 이 사건은 영화 안에서 두 번 다시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둘 사이의 차이는 자명해 보인다. <십년세도>는 홍국영의 영웅적인 행위를 위한 사건으로 다루어지지만 <망부석>은 꽃봉이의 비극적인 선택으로 인한 자살에로 이끌린다. 둘 다 국면의 전환을 가져오지만 이야기를 이끌고 가던 주인공의 운명에는 정반대의 결과로 다가온다. 나는 그 결과에 대해서 좌절한 운명의 실패인지 아니면 반대로 성공적인 기회를 만든 사건인지, 라는 방식으로 그 둘을 나누고 싶지 않다. 두 편의 영화를 일 년 사이에 연달아 찍은 임권택 이 두 개의 장면이 같은 에피소드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마치 임권택은 < 망부석 >을 찍은 적이 없다는 듯이 < 십년세도 >를 찍었다. 하나의 사건. 두 개의 장면. 서로 다른 배치. 이 둘 사이에는 좀 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바보 같은 설명도 가능하다. 세기흥업은 <망부석>의 흥행에 성공했고 그들은 같은 영화를 다시 한 번 더 찍고 싶었으며 그래서 주인공을 달리하여 이번에는 스타 신영균을 주연으로 하여 만들자고 임권택에게 제안해서 <십년세도>를 찍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게 사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사극은 돈이 많이 들고 성공적인 흥행은 그것을 시장에서 다시 한 번 손쉽게 반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을 했을 것이다. 그 둘은 같은 이야기이고 그러므로 같은 에피소드를 다룬 장면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산업적 설명이다. 좋다. 하지만 우리는 좀 다른 관점에로 옮겨서 질문을 더 밀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임권택의 난처한 곤경이 숨어있다. 임권택은 에피소드를 반복하고 있지만 의미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때 이것을 인물(들) 사이에 놓인 구성의 차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하기에는 다소 까다로운 반문이 기다리고 있다. 반복이 다른 반복의 깊이를 가져오는 대신 반복 안에서 잠재적인 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섰을 때, 그래서 그 반복으로 하여금 동일한 시대를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을 때, 그로 인해 세계의 정념이 바뀌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태인 것일까. (적어도 1964년의) 임권택에게 세계는 주어진 것이어서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삶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질서가 아니라 관점에 따라 주관적인 이동을 통해 재구성되는 일종의 원근법적 도착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마치 여기에는 두 개의 조선시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두 개의 정조에 관한 기록이 있다. 내 질문의 시작은 여기에 있다. 임권택은 세계 안에 살고 있다기보다는 나와 세계 사이의 매개의 문제라는 방식으로 이 질문에 접근한다. 물론 <십년세도>가 이 문제에 정교하게 대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망부석>과 <십년세도>가 기괴할 정도로 동일한 구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두 편의 공통점은 단지 정조를 다루었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영화에서 정조를 다룬 영화는 수없이 많다. 심지어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준익 이 송강호 를 주연으로 ‘아마도’ 정확하게 같은 시기, 영조에서 정조에로 왕권이 이행되는 과정을 다룬 < 사도 >를 찍고 있다. 방송드라마를 포함하면 걷잡을 수 없어질 것이다. 내 말은 대중들에게 영조와 정조의 이야기는 조선왕조사에서 매우 친숙하다는 뜻이다) 두 편의 영화가 절반을 진행한 다음 갑자기 중단되고 나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망부석>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은 다음 갑자기 십 년 세월을 건너뛴 다음 마치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영화가 시작한다. 두 번의 시작. 영화의 시작 영화의 절반 대목 그런데 더 이상한 쪽은 < 십년세도 >이다. 이 영화의 시작은 < 망부석 >이 절반을 나눈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나는 이미 두 영화가 비스듬히 겹쳐있다고 말했다. 물론 방점이 홍국영에게 놓여있기 때문에 그가 궁궐에 들어가기까지의 우여곡절을 다룬 이야기가 앞에 놓여있지만 이미 사도세자는 죽은 지 한참 전이고 정조는 혜경궁 홍씨와 함께 궁궐 바깥으로 내쳐졌다가 다시 영조의 부름으로 들어온 그 시기에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 다음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 홍국영의 어린 시절로 불현듯 되돌아간 장면(flash_back)에서 어린 홍국영은 아버지 홍성원이 간신으로 몰려 참수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데 기록에 따르면 홍국영의 아버지는 홍성원이 아니라 홍낙춘이며 그는 간신으로 몰리지도 않았으며 참수를 당하지도 않았다) 물론 이 장면은 누구라도 어린 정조가 영조의 명에 의해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장면과 어떤 공명현상을 불러일으킨다. 도식적으로 설명하면 어린 정조가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장면이 준 충격이 홍국영에게도 동일한 충격의 외상으로 남아있으며 (실재적 아버지의 죽음?) 그들은 동일한 오이디푸스적 결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친화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들의 아버지들은 동일하게 영조의 명에 따라 죽임을 당했으며 동시에 그들은 영조에 의해 그들 각자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임권택 은 재빨리 어른 홍국영에로 돌아온 다음 그가 과거를 보고 장원급제하여 정조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는 장면에로 넘어간다. 그리고 화완옹주의 독살음모를 밝혀내고 그들 일파를 모두 멸한 다음 정조를 안전하게 왕위에 즉위시킨다. <망부석>은 여기서 끝난다. 그런데 <십년세도>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마치 여기서 일부가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시작한 지 48분이 되는 대목에서) 이야기를 중단시킨 다음 다시 시작한다. 그걸 마치 알리기라도 하듯이 처음 영화를 시작했을 때와 똑같은 장면들이 반복해서 나온다. 무효가 되어버린 절반. 이 반복은 몹시 불길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십년세도>의 시작 장면은 지금 임금인 영조가 치세를 잘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탐관오리들에게 수탈 당하는 모습을 연달아 이어지는 쇼트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봉건체제에서 할 수 있는 가능한 해결은 다음 임금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기대가 <망부석>의 마지막 장면에 담겨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중간에서 동일하게 다시 반복할 때 그것은 단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정조의 치세가 실패했음을 설명하는 것이 된다. 영조를 정조 위에 겹쳐놓기. 여기서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순간적으로 마치 앞에 이미 본 쇼트들이 무언가 잘못 편집되어서 다시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반복되는 동일한 장면들. 이때 <망부석>에서 외관상 보이는 해피엔딩은 사실상 그 ‘이후’의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실패에 대한 즐거운 위장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십년세도>는 정확하게 <망부석>의 그 자리를 겨냥한다. 그래서 <십년세도>는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했다기보다는 마치 이미 한 이야기의 오류를 수정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역사의 반복에 대한 우울한 악순환의 반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회귀의 필연성. 한없는 반복. 그러므로 나쁜 시간은 되돌아온다. 임권택은 부지불식간에 역사에서 결정적인 한 번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는다고 고백을 하고 만다. 결정적인 한 번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사회에 대한 단절.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로의 도약.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임권택은 영화에서 단 한 번도 그런 희망에 이끌려본 적이 없다. 봉희와 영수 홍국영 둘째, 내가 말하려는 핵심은 여기서 좀 더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 절반에 이르기까지 두 영화의 차이는 하나가 완전히 비극으로 이끌리는 데 반해서 다른 하나는 영웅적인 승리에로 이끌린다는 것이다. 그 둘은 서로 전혀 다른 정감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사건 속에서 서로 정반대의 인물에 의해 그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역사의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허구적인 인물과 실존했던 인물. 멜로드라마와 전기. 그런데 이 절반을 나누는 시퀀스를 보여준 다음 홍국영은 이제까지 자신이 어떤 정치적 이상을 가지고 행동했던 것과 반대로 마치 자신의 자리에서 가졌던 이상이 강요된 선택이었던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물론 명분은 탐관오리들의 배후세력이자 사리사욕에 눈이 먼 수비대장 장지항이 선왕의 신임을 받고 유언에 따라 정조가 그의 부정을 우유부단하게 눈 감는 것에 대신하여 그 스스로 엄벌을 내리기 위해 세력을 확장하고 왕권을 배후에 얻을 수 있는 권력을 얻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그 순간 그의 정의는 권력의 네트워크 안에서 정치적 게임이 된다. 여기에는 동일한 주체가 겪어야 하는 분열의 고통이 뒤따라온다. 정의의 주체는 자신이 세계와 거리를 유지할 때에는 투명해 보이지만 일단 세계 안으로 끼어들어 가서 갑자기 결정에 관한 선택을 하는 순간 선택이 정의를 불투명하게 만든다. 이때 정의는 그 개념과 목표 아이에서 그 둘이 서로 자기의 편에 두기 위해 잡아당기면서 찢겨져 나가기 시작한다. 홍국영은 결정적인 시험에 든다. 그는 내빈과 금슬의 정을 나누지 못하는 정조에게 자신의 여동생 홍봉희를 들이고자 한다. 하지만 홍봉희는 오빠의 결정에 격렬하게 저항한다. 왜냐하면 아직 그의 오빠가 과거 급제하기 전 몰락한 가문의 과년한 처녀로 지내던 시절 영수와 정분을 나누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적 서사의 되풀이. 오래된 궁정연애의 장치들. 하지만 임권택 은 여기서 이상한 내기를 시작한다. 몰락했다곤 하지만 홍봉희는 양반 가문의 자식이었고 영수는 상놈 출신이어서 그의 아버지는 엄중한 목소리로 “오르지도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충고한다. 이 장면은 영화 앞부분에 놓여있어서 이미 비극을 예고하고 있다. 그래서 홍국영이 과거 급제했을 때 영수는 그녀의 집을 찾아와 절망적인 목소리로 오빠의 소식을 알려준다. 홍봉희가 오빠 홍국영을 따라 입궐한 다음 그리움에 지친 영수는 담장을 넘어 홍봉희를 찾아와 그녀에게 사람들이 모르는 곳으로 함께 떠나자고 조른다. 이 말은 예전 홍봉희가 영수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그 둘은 급히 짐을 꾸리지만 우연하게 내당을 지나던 집사의 눈에 띄고 만다. 홍국영은 한걸음에 내달려 그 자리에서 영수를 포박한 다음 무자비하게 매질을 하면서 이는 나라의 법에 따른 것이며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것, 이라고 울며 매달리는 여동생 홍봉희에게 매정하게 대꾸한다. 여기까지는 이미 예정된 이야기의 수순을 따라간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들은 단지 이것을 역사적 배경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비애를 한껏 과장하고자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이 수순은 < 십년세도 >가 오히려 다른 사극의 유형을 그대로 베끼듯이 뒤따라가는 것이다. 이제 서로 길이 갈라지는 것은 홍봉희의 선택에 달려있게 된다. 여기서 홍봉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빠의 뜻을 따를 테니 영수를 풀어달라고 부탁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거래. 님을 위한 희생. 하지만 영수는 그 희생을 고마워할까. 홍국영의 나라를 위한 가혹한 정의의 집행과정. 그러나 반대로 영수의 자리에서 상실한 정의는 어디서 거래가 되어야 할까. 임권택은 여기서 영수를 괄호 친다. 홍국영은 집사에게 영수를 다시는 뭍에 오르지 못하게 제주도로 보내라고 명한다. 이 장면 이후 우리는 영수를 영화에서 다시는 보지 못한다. 혹은 그의 생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오빠와의 약속에 따라 홍봉희는 정조의 원자아기 씨를 받기 위한 원빈 홍씨가 된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사극의 이름으로 비애의 장르가 자기의 법칙을 수행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임권택이 상황을 만든 다음 거짓말을 이용하여 진실을 설명하는 정의의 오작동 방식은 멈춰 서서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임권택은 진실을 진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온통 거짓말로 가득 차 있는 < 길소뜸 >의 절반 이후를 떠올리고 있다. 혹은 < 서편제 >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빠 동호와 여동생 송화가 만난 다음 나누는 거짓말을 떠올려보라. 이때 거짓말과 진실은 둘 사이의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삼자 관계로 이루어진 긴장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나머지 하나란 무엇인가. 거짓말을 통과해야만 도착할 수 있는 진실 안의 내밀한 진실. 영수를 가운데 앉혀놓고 홍국영과 홍봉희는 서로 거짓말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홍국영은 영수를 포박하여 주리를 틀며 매질을 하는 것이 상놈에게 자신의 누이를 빼앗긴 것에 대한 상실감이 안겨준 모욕 때문이기라도 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면서 홍봉희에게 양자택일의 길, 그러니까 사랑하는 남자를 희생시킨 다음 자기의 뜻을 거절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를 희생하고 오빠의 뜻을 따르는 대신 저 남자 영수를 살릴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내기의 상연을 한다. 홍봉희도 홍국영이 하는 퍼포먼스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홍봉희가 오빠의 뜻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 홍국영은 마치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기라도 한 것처럼 영수에 대한 매질을 멈춘 다음 그를 홍봉희로부터 멀리 떼어놓으라는 명을 내린다. 물론 매질은 홍봉희의 대답을 재촉하기 위한 일종의 효과이다. 이때 홍봉희가 홍국영에게 하는 약속은 이중적이다. 그녀가 오빠의 말을 따르겠다는 것은 정조의 내빈이 되기 위해 입궐하겠다는 뜻이지 마음을 바꾸어 영수를 포기하고 정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시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홍봉희의 대답은 절반만 진실이고 나머지 절반은 거짓말이다. 그걸 홍국영도 알고 있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핵심은 이 나머지 절반이 정조에게는 전체를 거짓말로 만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홍국영은 정조에게 거짓말의 행위를 수행하려는 것이다. 이때 여기서 사라진 장면이 있다. 홍봉희의 진술을 들은 다음 홍국영은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어떤 설득도 하지 않으며, 또한 임권택도 그런 장면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설혹 설득에 실패할지라도 해야 하는 (그래서 적어도 내 생각에는 있어야 하는) 그런 장면이 없다. 그때 홍국영이 수행하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가장 쉬운 대답은 홍국영이 정의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거짓말이 불가피하다고 따분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 대답을 금방 곤경에 빠트릴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정의는 어디에 있나요? 지금 홍국영의 행위는 정의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중이다. 임권택은 여기서 정의를 위해서 언제든지 진실을 희생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그때 거짓말은 진실을 대신해서 정의를 수행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한다. 홍봉희가 오빠의 명령을 따른다면 홍국영은 정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홍국영도 자신이 희생자라는 관점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제 이 희생의 논리는 일종의 도미노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려는 희생의 교환으로 약속한 오빠의 명령에 따라 내빈이 되는 홍봉희의 행위를 사랑이라고 착각한 정조도 그런 의미에서 거짓말의 희생자인 동시에 정의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이때 정의가 진실보다 상위 개념에 놓여있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홍국영의 행위는 무조건 정의라는 매우 주관적이고 허약한 가설을 밑바탕에 깔고 버티는 중이다. 논점을 피하려고 현실에서의 정의의 실행을 위해서 우리는 좀 더 관대하고 유연하게 진실에 관한 예외의 규정을 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이때 누군가는 즉각적인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 예외가 누군가의 진실에 침해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영수를 셈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가장 간단한 해결방법은 영수가 스스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홍봉희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그저 그녀를 겁탈하기 위해서 담을 넘었을 뿐이에요. 홍봉희는 그 대답을 듣고 마음을 돌려 자발적으로 오빠의 명에 따라 입궐하여 정조의 곁으로 갔을 것이며 어쩌면 진심으로 보필했을지도 모른다. 홍국영은 구태여 누이에게 거짓된 행동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며 또한 그는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얻기까지 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잔인한 해결방법이다. 영수는 모두의 진실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 다음 이 게임에서 자신을 삭제하는 일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간단하게 거짓말과 진실의 게임이 작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때 선택을 오작동시키는 척하면서 진정으로 이들 사이의 핵심을 건드리는 것은 영수의 고백이 홍봉희를 위한 거짓말인 경우이다. 좀 더 복잡해질 수 있다. 그 거짓말을 홍봉희가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홍국영도 그것을 알고 영수가 진정으로 자기의 누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임권택은 이런 경우의 수를 선택하지 않고 그 전에 멈추었다. 영수는 여기서 침묵을 지키면서 마치 각자의 선택을 지켜보는 것이 자기의 할 일이라는 듯 그들을 쳐다본다. 이때 희생은 홍봉희에게로 모아진다. 영수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긴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상놈인 그가 한성에 있으나 제주도에 있으나 사실상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영수가 한성에 남아있을지라도 상놈인 그에게는 어떤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담을 뛰어넘은 영수의 행위는 홍국영의 선택에 덧셈이 되었을 뿐이다. 만일 영수가 아니었다면 홍봉희를 그의 명에 이렇게 쉽게 굴복시킬 수 있었을까. 이 장면은 희생의 논리에 대한 검토를 요구한다. 진실과 거짓말 사이를 매개하는 고리가 희생될 때 진실은 이중의 무게를 견뎌야만 한다. 하나는 물론 거짓말이고 다른 하나는 희생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여기서 정의가 다시 되돌아온다. 나는 논점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런 우여곡절에도 뒤이어 장지항을 바로 책임을 물어 파직시키지 못한다. 여전히 홍국영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결심을 내리지 못한다. 바로 이때 홀연 원빈 홍씨가 오빠의 말에 대한 메아리처럼 나타나 홍국영의 말에 뒤이어 백 년 사직을 위해 용단을 내리셔야 한다고 웅변하듯이 말하면서 정조의 마음을 바꾸어 놓는다. 이 장면에서 임권택 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자기를 원망하면서 지낼 줄 알았던 여동생이 마치 자신의 충언이 끝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나타나 자기편을 들면서 임금을 설득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의혹과 기쁨 사이에서 짓는 표정(insert_shot)의 변화이다. 이때 원빈 홍씨의 말은 그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태도에 있다. 임권택은 대사를 할 때 그 사람을 바라보거나(point_of_view_shot) 그 사람을 바라보는 상대방을 바라보기는(point_of_view_reaction_shot)하지만 대사를 하는 상대방의 대사 사이를 파고 들어가면서 바라보는 쇼트는 거의 없다. 만일 이 장면을 (적어도) < 잡초 > 이후에 마주쳤다면 원빈 홍씨가 대사를 하는 동안 그냥 홍국영의 표정을 찍었을 것이다. 내가 하려는 설명은 임권택의 영화 언어가 점점 더 단순해지면서 내적으로는 비가시적이 되어가는 진화에 대한 (어쩌면 과도한) 추측이 아니다. 여기서 임권택의 카메라가 멈춘 것은 원빈 홍씨의 태도가 뜻밖이라는 듯한 홍국영의 표정이다. 이때 홍국영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반대의 표정을 지었다면 여기는 홍국영이 자신의 대의를 누이인 원빈 홍씨가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서서 오빠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망쳐버린 누이의 사랑과 (더 나아가) 삶에 대해서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의 고문에 가까운 감정적인 투쟁을 정의라는 이름의 베일 저편으로 감춰놓는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오해라는 환상의 장막. 거의 물신이 되어버린 정의. 거기서 진실이 거의 질식해서 죽어가는 중이다. 우리는 홍봉희의 자리에서 오빠 홍국영이 괴물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처음 홍국영이 누이에게 정조의 내빈의 자리에 가라고 말했을 때 그녀가 보인 저항을 생각해보라. 왕실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에 대한 단호한 거절. 그런 다음 영수가 담을 넘어 그녀 곁에 오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난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낯선 장소에로 함께 도망칠 결심을 했었다. 홍봉희는 쇠락한 양반 집안에서 영수와 아무런 허물없이 지내면서 상놈들과 거의 같은 수준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 도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자, 홍국영의 대의는 잘 알겠다. 그런데 홍봉희에게 오빠 홍국영의 대의는 지켜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나는 홍국영의 표정으로 되돌아오고 싶다. 그가 원빈 홍씨의 도움에 의혹과 기쁨을 느끼며 바라보는 까닭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 행동이 의외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만큼의 고마움의 표현이다. 여기서 홍국영의 세 개의 표정의 쇼트는 정확하게 정의가 구현되고 있는 만큼 거짓말이 실현됨으로써 도덕법칙이 파괴되고 있는 증거이다. 내가 여기서 멈춘 것은 임권택이 자신의 영화 전체에서 내내 마주치게 될 거짓말과 도덕 사이의 대결을 이야기 속에서 끌어내 상황을 만든 다음 하여튼 다시 시네마틱 센스로 각색하려 드는 순간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이 문제가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무엇이 무엇 위로 가야 하는가. 그는 이 문제를 개념적으로 다가가는 대신 한국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상황, 그 상황 중에서도 조선에서 일제 강점하를 지나 해방 직후와 거기에 마치 꼽추의 혹처럼 달려있는 한국전쟁을 거친 다음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역사 속 일회적인 존재방식을 쳐다본다. 만일 단 한 번이라는 개념이 임권택에게 던져진다면 그것은 삶 그 자체이다. 그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 안에서의 개념들의 위계질서의 내기. 그런 다음 예기치 않은 장면이 그 뒤에 기다리고 있다. 정조는 원빈 홍씨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수비대장 장지항을 불러 파직하고 재산 전체를 몰수하자 그 자리에 홍국영이 나타나 자신의 승리를 마음껏 즐긴다. 하지만 뒤이어 원빈 홍씨는 하얀 한복을 입고 (그래서 흑백화면으로는 마치 소복처럼 보이며) 미루어 짐작건대 독약이 들었을 법한 사발을 들고 그녀의 마지막 대사를 한다. “오빠, 이제 소원대로 되었사오이다. 이젠 소녀도 소녀의 길을 가야 할 때가 왔사옵니다. 살아서 이루지 못한 사랑 저승에 가서야 이루어보겠습니다. 저승에 또한 오빠 같은 분이 계셔서 뜻을 이루지 못하오면 그땐 상놈의 딸로 다시 태어나렵니다. 오빠, 굽이 살펴주시어요” 원빈 홍씨의 자살은 그 행위 때문이 아니라 시점 때문에 기이한 질문이 된다. 무자비한 대꾸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감상적인 연인들의 실패한 사랑의 이야기에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운명을 수없이 보았다. 그러므로 원빈 홍씨의 자살이 우리를 놀라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기라도 하듯 자살을 하는 대신 그에 앞서 홍국영이 장지항의 파직을 간청할 때 그 곁에 나타나 오빠를 위해, 자기의 사랑을 망쳐놓고, 자기의 삶의 방향을 바꿔놓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매질로 주리를 틀면서 자기에게 굴복을 요구한 다음 그것을 이루자 제주도로 쫓아낸 사람을 위해, 기꺼이 거짓말을 한다. 아뇨, 그건 사실이 아니던가요. 장지항은 부패한 지방 관료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들을 보호한 파렴치한 간신이 맞지 않던가요. 물론이다. 그 말의 내용은 사실일 것이다. 나는 홍국영의 간청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빈 홍씨는 여기서 오로지 오빠의 정의를 위하여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는 중일뿐이다. 여기서 그 말의 내용을 중심으로 놓는 대신 약간 그림을 비튼 다음 그 측면도법에 따른 왜상효과(anamorphosis)처럼 그 말의 그림자를 원상복구 시켜보자. 이때 원빈 홍씨의 진실은 정확하게 오빠의 대의와 대립하는 것이다. 홍국영은 조선이라는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가족, 자신의 누이를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이때 우리를 역겹게 만드는 것은 홍국영이 홍봉희를 자신의 대의를 위한 도구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만일 원빈 홍씨가 홍봉희의 자리로 돌아가 자살하는 장면이 없었다면 그 둘 사이의 상호교환이라는 질문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원빈 홍씨가 오빠 홍국영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 모든 진실, 자신이 왜 당신 곁에 있는 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좀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 홍국영이 간청할 때 그저 침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우리들이 예상한 것과는 정반대로 홍봉희는 대의를 위해서 (몹시 아이러니한 표현이지만) 자신의 복수를 배신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무엇을 얻었는가. 쟁점은 그렇게 함으로써 홍봉희는 자신이 자살할 명분을 얻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녀는 대의를 위하여 필요한 그녀의 몫을 모두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빈 홍씨가 홍국영의 편을 들어 정조에게 간하는 것과 그녀의 자살은 과정안의 서로 대립덫염甦ㅐ?아니다. 임권택 이 여기서 노리는 것은 무대에 오른 이 모든 개념들의 변덕이다. 그런 다음 그는 영화 속에 역설적인 상황을 반복해서 만들어나가면서 실망하고 또 실망한다. 마치 실망이 자신의 목표이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 놀랍게도 지치지 않고 그것을 매번 다시 시도한다. < 십년세도 >가 걸작은 아니지만 비로소 임권택 이 임권택이 된 첫 번째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영화에는 비로소 임권택에게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마주치게 될 질문의 도래가 있다. 그걸 임권택 자신이 < 망부석 >을 반복하면서 스스로 오류를 수정하듯이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느린 걸음. 그것도 아주 느린 걸음. 그래서 처음 보았을 때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방법의 발견. 이때 임권택은 <망부석>을 수정하면서 마치 <십년세도>에서 양보할 수 없는 전도를 시도하고 있다. 핵심은 전도라는 그 관점의 이동 자체에 숨어있다. 말하자면 임권택의 반복은 한편으로는 오류를 수정하는 척하면서 변덕의 심연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절망적인 행위이다. 매번의 예외. 이때 임권택이 수수께끼처럼 생각하는 것은 변덕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진실이 지켜지느냐에 있다. 물론 그사이에 운명처럼 끼어든 다음 덧없이 사라지는 매개의 희생이 아니라면 이 진실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진실은 가냘프고 애처로운 것이다. 때로는 완전히 부서지고(< 길소뜸 >) 가끔은 그 파편들이 남아서 가까스로 자기의 존재를 남겨놓기도 하며(< 티켓 >) 거의 불투명 속에 머물면서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만다라 >) 너무 때늦게 도착해서 거의 놓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짝코 >, 아마도 < 서편제 > 혹은 < 하류인생 >) 그래도 여전히 남겨져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 축제 >, 그리고 < 천년학 >) 나는 멀리서부터 임권택이 왜 갑작스러이 인본주의(人本主義)라는 말에 이끌렸는지를 생각하는 중이다. 여기에는 인간이 어디에 놓여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실험이라는 말처럼 내게 읽힌다. 그러므로 그사이에는 희생을 무릎 쓰고 횡단해야만 하는 환상이 있다. 물론 그 횡단의 순간에 종종 점핑이 실패로 끝나버려 추락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임권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계속) 1964년 93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극동흥업 각색 이진섭 , 임권택 촬영 장석준 조명 박진수 편집 김희수 음악 김용환 신영균 홍국영 김동원 영조 이수련 정조 김신재 혜빈홍씨 김운하 영수 이민자 화완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