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 감독
- 김혜영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이레, 진서연, 정수빈, 손석구, 이정하
배우 최은희 의 이력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화려하다. 1943년 연극무대로 데뷔한 최은희는 1947년 < 새로운 맹서 >( 신경균 )로 스크린에 데뷔한 후 1950~196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부동의 ‘스타’였다. 따라서 박남옥 , 홍은원 에 이은 한국영화사상 세 번째 여성감독이라는 칭호는 배우 최은희의 화려한 명성을 장식하는 ‘특별한 이력’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닌 세 번째라는 위치도 그러하거니와 홍은원 감독의 표현처럼 “「신필름」이라는 대 메이커에다 손발이 척척 맞는 스탶들을 거느리고 진행을 했”고 박남옥 감독이나 홍은원 감독의 “고통 같은 것은 느낄 필요도 없이 여유만만하게 작품을 탄생시켰” 1) 기에 최은희의 감독 이력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감독 데뷔 당시에도 하락하는 인기를 만회하기 위한 ‘선전효과’로 크레디트에 이름만 올린 것이라는 세간의 의심과 비판이 따라붙기도 했다. 이러한 시선에 대해 최은희는 ‘인기의 하락’과는 선을 긋되 자의보다는 신상옥 감독의 꾸준한 권유로 연출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연출 배경에 대해 줄곧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때로는 연기자로서 새로운 공부를 하기 위해 결심했다는 동기를 부연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데뷔작인 < 민며느리 >(1965)를 시작으로 < 공주님의 짝사랑 >(1967), < 총각선생 >(1972)까지 ‘감독 최은희’보다는 ‘스타 최은희의 감독작’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이에 대해 최은희 자신은 활동 당시 특별한 감독의 변을 내놓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회고에서도 ‘ 신상옥 감독의 권유’가 가장 큰 동기였다고 재차 밝혔다. 2) “메가폰을 든 스타 최은희” 3) 에 대한 시선과 평가는 최은희 개인보다는 ‘196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의 상황과 신필름 그리고 스타 최은희의 이미지’라는 큰 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속에서 감독 최은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감독 최은희는 신필름의 위기와 변화 국면마다 등장했다. <민며느리>가 발표된 1965년 한국영화계는 200여 편에 가까운 제작편수, 청춘멜로드라마‧스릴러액션‧만주활극액션 등 다양한 장르 영화들의 인기, 새로운 스타들의 등장으로 호황을 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생필름의 부족, 컬러영화와 와이드스크린의 도입 그리고 물가 상승에 따른 제작비 증가로 영화산업 내부에서는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또한 배급‧상영 환경에 비해 과잉 생산되는 제작편수로 한국영화 내부의 경쟁은 더욱 더 치열해진데다 <007> 등 스파이 물을 중심으로 한 외국영화와의 경쟁력에서도 뒤처지는 형편이었다. < 성춘향 >(신상옥, 1961) 이후 승승장구하던 ‘대 메이커’ 신필름 조차 부채로 위기에 처한 것이 바로 196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의 상황이었다. 신필름은 경영 위기에 처하자 홍콩과의 합작영화 제작, 문예영화 제작, 인기 드라마의 영화화 등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흥행을 위한 홍보 아이디어로 떠오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최은희의 감독 데뷔였다. ‘스타 최은희의 감독 데뷔’는 신필름의 시스템 하에서 안전한 방향으로 기획되었다. 신필름은 최은희의 스타 이미지를 활용할 수 있는 사극 장르 중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이서구 원작의 TV 연속극 <민며느리>를 데뷔작으로 선택했다. 순종적인 성품의 민며느리가 온갖 고초를 이겨내고 꼬마 신랑과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이야기는 전작인 < 벙어리 삼룡 >(신상옥, 1964)으로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을 거둔 최은희의 고전적인 이미지를 이어갈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민며느리>는 ‘인기 드라마를 영화화해 추석에 개봉하는 최은희 감독‧주연의 신파 사극’의 모습을 갖추고 ‘최은희의 감독 데뷔’에 홍보 포커스를 맞췄다. 원작의 이름값과 신필름이라는 브랜드를 생각한다면 영화의 제작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인기 드라마 원작과 감독 최은희에 중심을 두는 대신 주‧조연 배우진은 상대역인 아역 장원배 외에 황정순 , 한은진 , 박노식 , 김희갑 , 서영춘 으로 최소화하고 단역배우들은 신필름 연기실의 연구생들을 동원해 제작규모를 줄였다. 결과적으로 톱스타 최은희의 감독 데뷔는 큰 화제가 되어 <민며느리>는 1965년 추석 대목 프로 12편(한국영화 6편, 외국영화 6편) 중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했다. 기대한 ‘선전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아 흥행에서는 평균 수준인 5만 여명을 동원하며 현상 유지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최은희의 감독 데뷔는 간판스타 최은희의 건재를 알리는 동시에 새로운 기획에 도전하는 신필름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외유로 끝날 줄 알았던 최은희의 감독 이력은 1967년 <공주님의 짝사랑>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연출작 역시 신필름이 직면한 새로운 위기 상황에서 등장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했다. 신필름은 1966년 안양촬영소를 인수하며 명실상부한 메이저 스튜디오의 모습을 갖췄지만 무리한 확장으로 다시 한 번 심각한 경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거대한 스튜디오의 운영과 영화법에 따른 제작쿼터 달성은 메이저 영화사인 신필름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필름이 제작 편수를 늘리기 위해 설립한 자회사인 안양필름이 <공주님의 짝사랑>의 제작을 맡았다. 신필름은 새롭게 출발한 촬영소와 영화사 그리고 신필름 연기실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공주님의 짝사랑>을 제작하며 다시 한 번 ‘감독 최은희’라는 브랜드를 활용했다. 따라서 <공주님의 짝사랑>은 <민며느리>에 이어 ‘신필름의 건재와 새로운 출발’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된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민며느리 촬영 중인 최은희 감독 <공주님의 짝사랑> 역시 사극 영화였지만 데뷔작인 <민며느리>와는 차별화된 지점을 보여주었다. 제목 그대로 짝사랑에 빠진 공주님이 적극적으로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을 소동극으로 <공주님의 짝사랑>은 온전히 스타 최은희의 브랜드에 기대었던 <민며느리>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기획되었다. 첫 번째는 선택과 집중을 들 수 있다. 신필름은 사극 장르 안에서 신파보다는 로맨틱코미디를 채택하고 주연배우에도 떠오르는 스타였던 남정임을 캐스팅해 보다 젊은 관객을 흥행 타깃으로 삼았다. 최은희는 배우의 역할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감독의 역할만 맡았다. 두 번째 변화는 제작규모에 있었다. 궁중사극이라는 배경을 활용한 다양한 로케이션과 스튜디오 촬영, 화려한 의상과 소품, 신필름 연기실 연구생들을 활용한 군중 신 등에서 <민며느리>에 비해 눈에 띄게 커진 스케일이 드러났다. <공주님의 짝사랑>과 <민며느리>를 비교하면 2년 사이 규모가 성장한 신필름의 제작 시스템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화려한 의상과 소품이 돋보이는 다양한 군중 신들에서는 한홍 합작영화 < 달기 >( 최인현 ‧악풍, 1964)와 < 대폭군 >( 임원식 , 1966)의 한국 촬영을 계기로 대형 사극영화의 제작 노하우가 쌓였다는 것을 증명했다. 영화의 규모와는 별개로 <공주님의 짝사랑>의 홍보는 여전히 ‘스타 최은희’에 포커스를 맞췄다. 하지만 <민며느리>가 감독 못지않게 주연배우인 최은희를 강조한 것과는 달리 <공주님의 짝사랑>은 주연을 맡은 신예 남정임 , 김광수 와 발랄하고 이색적인 러브 스토리를 강조하며 젊은 관객에게 어필했다. 대신 최은희라는 브랜드는 ‘제2회 작품’을 발표한 전문 감독으로 자리했다. ‘감독 최은희’는 남정임 외에도 한은진 , 조미령 , 전계현 , 강미애 등의 스타진과 함께 이 영화를 ‘여성영화’로 홍보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신필름은 개봉 전 ‘여류인사 초청 시사회’ 4) 를 개최해 <공주님의 짝사랑>이 여성 감독과 여성 배우 중심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것을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스타 최은희의 브랜드를 유지하는 동시에 젊고 새로운 이미지를 내세워 관객층을 확산하려던 신필름의 기획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총각선생 촬영 중인 최은희 감독 신필름이 내리막길에 있던 1972년 최은희는 세 번째 작품 < 총각선생 >을 연출했다. 신일룡 , 나오미 가 주연한 이 영화는 최은희가 감독한 첫 번째 현대물이었으며, 제작도 신필름이 아닌 새한필름이 맡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홍보는 ‘스타 최은희의 제3회 감독작’에 맞춰졌다. 한 가지 덧붙여진 점이 있다면 앞 선 두 편의 영화에서 신필름 연기실의 연구생들을 동원했던 것처럼 <총각선생> 역시 최은희가 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안양영화예술고등학교의 학생들을 총출연시키며 감독 최은희 뿐만이 아니라 연기를 지도하는 ‘교육자 최은희’의 이미지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총각선생>은 2만 여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실패했다. 최은희와 신상옥의 관계가 파국을 맞고, 그들의 납북사건이 일어나며 남한에서 최은희의 감독 이력은 끝을 맺었다. 그리고 1984년 북한에서 발표한 <약속>까지, 최은희의 감독작은 총 4편으로 마무리되었다. 감독 최은희라는 브랜드가 비록 신필름이라는 시스템과 기획에서 탄생되었고, 최은희 자신조차 연출 배경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긴 했지만 제작 상황과 작품의 캐릭터를 통해서 최은희 개인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감독 데뷔를 앞둔 당시 최은희는 배우로서 여러 가지 편견과 한계에 직면해 있었다. ‘선전효과, 내리막길에 들어선 인기, 나이’ 등이 ‘감독 전향’의 이유로 제기되었다. < 맨발의 청춘 >( 김기덕 , 1964)으로 시작된 청춘영화의 붐과 고은아 , 남정임, 문희 등 대형급 신인 배우들의 등장은 한국영화의 세대교체를 알리는 신호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우 최은희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새롭게 대두된 젊은 관객들에게 최은희는 여전히 ‘성춘향’을 상징하는 대 배우였을지는 몰라도 유행을 주도하는 청춘스타는 아니었다. 신필름에도 최은희라는 스타 브랜드가 장점이 되기도 했지만 대중에게 고착된 지고지순한 여인상으로서 최은희의 이미지는 단점이 되기도 했다. 최은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역할의 한계 때문에 연기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없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녀는 “천편일률적으로 남편에 순종하고 어떠한 고생도 감수하는 주체성이 없는 단순한 도덕적인 여인”을 벗어나 “극한 상황에 처한 적나라한 여성의 역할” 5) 을 꿈꿨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어진 감독이라는 길은 어쩌면 연기에 대한 갈망을 풀어낼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영화를 통해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배우이자 감독 최은희의 욕망을 읽을 수 있다. <민며느리>의 경우 비록 순종적인 민며느리라는 캐릭터의 한계가 있지만 세밀한 설정과 연기를 통해 마냥 수동적이지만은 않은 역할을 만들어냈다. 황정순과 한은진의 캐릭터에도 적극적인 여성상을 녹여냄으로써 신파영화의 어머니상에 변주를 주었다. <공주님의 짝사랑>의 경우 궁중법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쩌면 배우 최은희가 꿈꾸던 또 다른 자아를 표출한 것일지도 모른다. 남성과의 대등한 관계를 위해 스스로 공주의 자리를 내려놓는 영화의 결말은 “픽션의 세계인 영화에서”나마 최은희가 보여주고 싶어 했던 “주체성 있는 적극적인 여성” 6) 을 구현해냈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1) 홍은원, 「한국의 여류영화감독들-한국은 여류영화감독의 선진국」, 『영화』, 1981년 1월호, 영화진흥공사. 2)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강의」, 2000년 3월 24일. 3)「메가폰을 든 최은희」, 『주부생활』, 1965년 10월호, 학원사. 4) 『경향신문』 , 1967년 7월 19일자 5면. 5) 「나의 순정파 연기는 모든 여인상의 모태」, 『주부생활』, 1966년 1월호, 학원사. 6) 위의 글.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당시
※ 섬뜩한 이미지들이 많으니 심약한 분들은 주의를 요합니다 한국 공포영화의 주기는 파란만장하다. 196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장르는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상상력은 다양했다. < 악의 꽃 >(1961, 이용민)처럼 흡혈 식물을 소재로 한 영화도 있었고, < 불가사리 >(1962, 김명제)와 < 대괴수 용가리 >(1967, 김기덕)같은 괴수 영화도 있었다.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였던 이용민 감독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 살인마 >(1965)나 < 목 없는 미녀 >(1966) 같은 걸작을 내놓았다. < 월하의 공동묘지 >(1967, 권철휘)는 한국 공포영화의 정전이 되었고, 유현목 감독의 <한>(1967)은 큰 흥행을 기록하며 ‘옴니버스 호러’의 전통을 세웠고 속편으로 이어졌다. 당대 최고의 영화사였던 신필름도 이 장르에 결코 무관하지 않았는데 < 천년호 >(1969, 신상옥), < 사녀 >(1969, 신상옥)는 당대의 흥행작이었다. 박윤교 감독의 <마계의 딸>(1983) 1960년대에 ‘준 메이저’ 장르로 시작한 한국 호러는 197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용민, 박윤교, 이유섭, 김인수 등의 감독들이 꾸준히 작품을 이어갔고 사극의 서브 장르로서 1960년대의 유산을 양적으로 확장시켰다. < 설야의 여곡성 >(1972, 임원직), < 며느리의 한 >(1972, 박윤교) 등이 이때 등장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크리처 쪽으로 트렌드 변화가 왔다. < 반수반인 >(1975, 김기)의 늑대 인간, < 정형미인 >(1975, 장일호)의 고양이 인간, < 원무 >(1976, 박윤교)의 미이라 등 더 이상 소복을 입지 않는 공포영화가 등장했다. 대만, 홍콩, 필리핀, 태국 등과도 합작이 활발히 이뤄졌다. 남자의 등을 어루만지는 귀신의 손길. <삼국여한>(1982. 김인수)의 한 장면. <깊은 밤 갑자기>(1981. 고영남)의 이기선은 세련되면서도 당돌하지만 한편으론 백치미를 지닌, 복합적 이미지의 배우였다. 1980년대 마지막 호러인 <하녀의 방>(1987. 김인수). 이 시기에 이르면 호러와 에로의 경계를 거의 무너진다. 1980년대 호러의 가장 큰 특징은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exploitation film)의 경향이다. 즉 ‘노골적인 상업영화’라는 강력한 상업적 의지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 급격하게 진행된 한국영화의 산업적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1970년대에는 크리처와 합작이 그 타개책이었다면, 1980년대엔 에로티시즘과 하드고어였다. 1980년대 호러에 새로운 것은 없다. 대신 표현 수위의 강도를 상승시키며 생존하려 했다. ‘여인의 한과 피맺힌 복수’라는 전통적 가치는 오롯이 살아 있지만, 그 정서와 방법론과 비주얼은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 ‘에로틱 호러’의 창궐은 시대정신에 발맞춘 것이었다. < 애마부인 >(1982, 정인엽)을 기점으로 충무로에 불기 시작한 ‘살색 열풍’은 모든 장르를 잠식했다. 단지 ‘야한 영화’가 양산되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크게 보면 ‘선정주의’의 확장이었다. 성적 표현뿐만 아니었다. 액션 스펙터클이든 폭력 묘사든 감정 표출이든 ‘80년대식 표현’은 이전에 비해 한두 눈금 더 올라가 있었고, 호러 장르는 그 표현에 최적의 토양이었다. 당대의 에로티시즘 영화와 일맥상통했던 ‘1980년대산 호러’는 비주얼의 관능성과 폭력성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김인수 감독은 상징적 인물이었다. 1990년대엔 비디오 시장으로 건너가 <젖 소부인 바람났네 >(1995)를 연출하며 거대한 족적을 남긴 그는, 1980년대에 마치 그 예행연습이라도 하듯 끈적끈적한 공포영화를 선보였다. 그가 1982년에 연출한 < 삼국여한 >의 예고편 문구인 “치정과 욕정이 얽힌 성인용 공포 드라마”는 당대 공포영화 감독들의 좌우명이었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옴니버스 호러였던 <삼국여한>은 단순한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도착적 성을 다룬 ‘섹스 과잉 공포’로서 여기에 하드고어를 결합했다. 그의 < 미녀 공동묘지 >(1985)에는 시체와의 섹스까지 등장하니, 1980년대 한국 호러의 성적 상상력은 에로티시즘에서 사도마조히즘을 거쳐 네크로맨틱에 이르는 여정이었던 셈이다. ‘호러 장인’ 박윤교 감독의 < 춘색호곡 >(1981)의 오프닝도 ‘섹슈얼 호러’라 불러도 될 만큼, 그의 전작들과는 확연히 다른 톤이었고 < 천년백랑 >(1983)에서는 근친적 삼각관계를 보여준다. <춘색호곡>과 <한녀>(1981, 이유섭)의 ‘귀신 액션’. 스타일과 비주얼도 더욱 자극적이며 적나라한 양상을 띠었다. 그 결과물 중 하나는 호러와 무협 액션의 결합이었다. 이 시기 귀신들에게 텀블링은 기본이었으며 피아노 줄을 달고 경공술을 선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춘색호곡>은 대표적이며, 한중일 콘셉트의 옴니버스 영화인 만큼 <삼국여한>은 중국식 무협과 사무라이 액션 등을 선보였다. 남기남 감독의 < 흑삼귀 >(1985)는 강시 영화를 좀 더 하드고어 버전으로 만든 듯한데, 1970년대 액션 전문 배우였던 권영문이 등장하며, 도사 캐릭터의 활약이 펼쳐진다. <천년백랑>의 후반부는 호러보다는 무협 액션에 가깝다. <깊은 밤 갑자기>는 다양한 광학 효과로 그로테스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효과는 1980년대 호러의 클리셰였다. <천년백랑>에서 사람이 여우로 변하는 장면. 디졸브를 이용해 꽤 그럴듯하게 변신을 표현한다. <공포의 축제>와 <월하의 사미인곡>. 특수분장의 기술적 발전을 토대로 호러 비주얼을 만들어낸다. <삼원녀>의 잘린 팔과 <제4의 공포>의 잘린 머리. 다양한 효과들이 호러 장르의 시각적 쾌감을 위해 사용되었다. 1980년대 호러는, 지금 보면 약간 조잡하게도 느껴지지만 다양한 광학 효과를 통해 기괴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화면을 흐리는 블러 효과를 비롯, 렌즈를 통해 왜상을 만들고 프리즘 효과를 냈으며, 이중노출이나 디졸브 등을 통해 변신이나 빙의를 표현하기도 했다. 여기엔 대부분 자극적인 사운드가 결합되어 그로테스크한 기운을 더했다. 특수효과와 특수분장도 빼놓을 수 없다. 소복 소매에서 흰 연기가 나오는 <원한의 공동묘지> 스타일의 초보적 수준도 있었지만, 때론 실감나는 수준을 보여주었다. 이 분야의 기술적 발전 역사에서 1980년대는 초기에 해당하는데, 자본의 취약성에 때문에 그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당시 공포영화가 원하던 ‘쎈’ 표현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켰다. 신체를 절단하고 괴물 같은 얼굴을 필요로 했던 하드고어 콘셉트가 대거 등장할 수 있었던 건 그런 이유다. 특히 김철석(특수효과)과 장인한(분장)이 만난 < 월녀의 한 >(1980, 김인수), < 마계의 딸 >(1983, 박윤교), < 제4의 공포 >(1984, 노진섭), < 월하의 사미인곡 >(1985, 박윤교) 등은 이 분야의 초석이 된 작품들이다. 기술적 발전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영화도 있다. 김인수 감독의 <제4의 공포>와 < 공포의 축제 >(1986)는 기형적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영화다. < 한녀 >(1981, 이유섭)은 경성 시대를 배경으로 성형 수술을 소재로 한다. < 삼원녀 >(1981, 김시현)와 <삼국여한>엔 팔이나 머리가 잘리는 신체 절단 요소가 있으며, <월하의 사미인곡>이나 <여곡성> 등 1980년대 중반 사극 호러에 오면 더욱 괴물 같은 메이크업을 선보인다. <관 속의 드라큘라>와 <흡혈귀 야녀>. 서양의 뱀파이어 캐릭터는 1980년대에 직접 도입되거나 귀신으로 변형된다.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인 <괴시>, 좀비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는 <육체의 문>. <제4의 공포>와 <여곡성>. 메이크업을 통한 섬뜩한 ‘괴물적 캐릭터’의 탄생. ‘스네이크플로이테이션 무비’(snakeploitation)라고 불러도 무방할 <인사대전>. 이 영화에서 뱀은 무차별한 학살의 대상이며, 건물 한 채를 혼란에 빠뜨리는 재난의 원인이며, 인간과 액션 대결을 하는 가공할 만한 크리처다. 1960~70년대의 전통적 공포영화에서 벗어나 더욱 자극적인 요소로 호소하려는 1980년대 호러의 노력 중 하나는 이국적 요소의 도입이었다. 중국인 며느리의 한을 담은 <삼원녀>나 중국과 일본의 요소를 끌어들인 <삼국여한>, 혹은 국적 불명의 <흑삼귀> 등은 대표적이다. 여기에 한동안 한국영화에선 선보이지 않았거나 최초로 등장하는 호러 크리처들이 등장했다. 흡혈귀들이 대표적인데, 사극 공포영화에서 여자 귀신들은 종종 흡혈을 하며 <삼국여한>에는 관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받아먹는 귀신마저 등장한다. 주목할 만한 영화는 < 관 속의 드라큘라 >(1982, 이형표)다. 영미권의 호러 캐릭터인 드라큘라를 도입해 한국적 맥락에서 퇴마를 가한다. < 흡혈귀 야녀 >(1981, 김인수)는 기존의 사극 귀신에 흡혈의 모티브를 두드러지게 결합시킨다. 좀비 영화도 등장한다. < 괴시 >(1981, 강범구)는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로 평가되는데, 해충 박멸을 위한 초음파 실험이 시체들을 깨어나게 한다는 설정이다(방사능이 원인이 되었던 조지 로메로의 <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1968)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기환 감독의 <육체의 문>(1981)엔 좀비 연쇄살인마가 등장해 여자들을 연달아 살해한다. <제4의 공포>엔 화상으로 흉측한 얼굴을 지니게 된 남자가 마치 미이라처럼 얼굴을 붕대로 휘감고 등장하며, <여곡성>엔 괴물처럼 변해버린 마님이 등장한다. 독사에 물린 여자가 뱀파이어가 되는 < 몽녀한 >(1984, 강범구)과 기형 인간이 등장하는 <공포의 축제>도 언급할 만한 영화다. 동물들도 한몫 했다. 고양이, 뱀, 까마귀 등의 동물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한의 매개체’가 되는 전통적 소재였는데 1980년대에 와서는 더욱 끔찍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바로 ‘학살’의 대상이 된 것. 홍콩과의 합작 영화인 < 인사대전 >(1983, 김선경)은 < 홀로코스트 >(1980, 루게로 데오타도)를 연상시킬 정도로 수많은 뱀들을 무차별로 죽인다. <원한의 공동묘지>에선 수많은 고양이들이 죽임을 당하는데, 이런 살풍경은 이전 호러에선 좀처럼 접하기 힘든 잔인한 스펙터클이었다. <여곡성>엔 전설의 ‘지렁이 국수’ 장면이 있다. <망령의 웨딩 드레스>의 계단 신. 김기영 감독의 미장센을 연상시킨다. <깊은 밤 갑자기>에서 무당의 딸인 하녀는 주술적 위력과 함께 섹슈얼한 힘으로 집을 장악한다. 1980년대 공포영화의 트렌드 중 하나는 별장이나 외딴 곳의 저택을 배경으로 하는, 굳이 이름 붙인다면 이른바 ‘맨션 호러’의 등장이다. 할리우드의 ‘하우스 호러’가 집에 깃든 악령이나 저주로부터 섬뜩한 기운을 가져온다면, ‘맨션 호러’는 집 자체에 영혼을 부여하진 않는다. 대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젊은 여자와 중년 남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며, 여기서 억울한 죽음과 복수극이 벌어진다. 그런 면에서 < 하녀 >(1960, 김기영)나 < 마의 계단 >(1964, 이만희) 같은 1960년대 한국 스릴러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할 듯하다. 1980년대 ‘맨션 호러’는 공포 장르의 공간을 확장하려는 의도 속에서 과거의 유산을 되살리는 시도였다. 그 전형은 < 망령의 웨딩드레스 >(1981, 박윤교)다. 회사를 운영하는 남자는 우연히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여자를 자신의 별장 하녀로 고용한다. 그녀는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마치 <하녀>의 하녀처럼 남자를 차지하겠다고 위협한다. 이에 남자는 여자를 죽이고 우물에 던져버리지만, 마치 <마의 계단>처럼 그녀는 다시 출몰한다. 귀신인지 산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구도는 < 귀화산장 >(1981, 이두용)에서 병원장과 간호사의 관계로 변주되며, <깊은 밤 갑자기>에선 주술적 요소가 가해진다. 특히 <깊은 밤 갑자기>는 전원 저택의 안주인(김영애) 캐릭터에 초점을 맞춰 망상 속에서 미쳐가는 여성을 보여준다. <살인마>를 리메이크 한 < 목없는 여 살인마 >(1985, 김영한). 외딴 폐가와 병원을 오가는 <제4의 공포> 등도 같은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작품들. 한편 < 악녀의 밀실 >(1984, 김선경)이나 < 요색유희 >(1985, 강대선)는 집에 깃든 악령의 존재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1980년대, 작게나마 호러 전문 배우진이 형성된다. 정세혁과 박암은 대표적. 사진은 <망령의 웨딩 드레스>와 <삼국여한>이다. <미녀 공동묘지>의 진봉진과 곽은경. 그들도 1980년대 한국 공포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배우들이다. 1980년대 호러엔 이국적 이미지의 배우들이 종종 등장했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괴시>의 유광옥, <여곡성>의 홍명진, <월녀의 한>의 박병순, <제4의 공포>의 정현숙. 서양의 호러가 가톨릭 사제를 주로 퇴마사로 내세운다면, 한국의 공포영화엔 대사나 법사의 존재가 있었고 십자가 대신 불교의 상징인 ‘卍’(만)이 있었다. <여곡성>과 <월녀의 한>에 등장하는 ‘卍’. 1980년대 한국 공포영화는 흥행을 위해 좀 더 강렬한 이미지와 스토리로 관객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영화산업의 전반적인 침체와 낙후한 자본 구조 속에서 장르적 진화를 이루지 못하고 클리셰를 반복했다. 그 결과 1980년대 중반이 되면 충무로에서 더 이상 호러는 생산되지 않는 멸종 상황에 이르며, 이 암흑기는 < 여고괴담 >(1998, 박기형)이 등장할 때까지 이어진다. 10년 넘게 제작되지 않은 셈인데, <여고괴담> 이후 2000년대 초중반에 왕성하게 부활한 호러는 2010년 이후엔 다시 침체기에 들어섰다. 한국영화의 수많은 장르들 중에서 가장 격렬한 흥망의 사이클을 보여주는 장르, 호러. 지금은 잠시 침체되었지만 언제 또 새로운 모습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며 등장할지 모른다. <원한의 공동묘지>의 마지막 신을 장식하는 자막은 그 이유를 잘 설명한다. “원한은 죽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 가슴속에 맴돌고 있다.”
영화 < 웰컴 미스터 맥도널드 >를 기억하는 영화 팬들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생방송 라디오 드라마를 녹음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배우, PD, 작가,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무용담(?)을 리얼타임에 가깝게 그린 코미디로 벌써 17년 전 작품이다. 이 영화는 일본을 대표하는 코미디 극작가/각본가/감독인 미타니 코키의 이름을 한국 관객들에게 선명하게 새겨준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여러 인물들이 점입가경의 상황에 한데 뒤섞이는 소동극 장르의 재미와 가치를 각인시켜준 코미디이기도 하다. 작년 연말 개봉한 류훈 감독의 < 커튼콜 >을 보면서, 이 <웰컴 미스터 맥도널드>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반가웠다. 공간만 연극 무대로 바꿨다뿐이지, 의도치 않게 점철되는 악조건을 뚫고 작품을 마쳐야 한다는 주인공들의 그 의지와 노력은 분명 최근의 상업영화나 독립영화 모두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배경과 시선이었다. 세상은 ‘삼류’라 칭하지만, 그들에게도 꿈은 있기 마련이다. 대학로에서 ‘19금’ 연극을 연출 중인 민기( 장현성 )가 그런 부류다. 지금은 생계에 쫓겨 야시시한 연극을 쓰고 연출하지만, 마음속 한편엔 예술이, ‘햄릿’이 자리하는 예술인이다. 그런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으니, 컴퓨터 게임을 하던 극단주의 “이러니 요즘 누가 연극을 보냐”는 한 마디에 극단 해체가 결정된 것. 실의에 빠진 민기는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과거 학생 시절의 꿈을 떠올리고, 동반자와 같은 프로듀서 철구( 박철민 )와 극단 배우들을 설득해 <햄릿>을 연극제 무대에 올리기로 맘먹는다. 물론 극단주에게는 이 사실을 극비로 남긴 채. 영화적인 톤은 민기의 판타지에서 잘 드러난다. 연극에 대한 꿈으로 가득 찼던 10대 시절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도 모자라 <햄릿>을 연출하라고 추동하는 셰익스피어의 캐릭터들이 출몰하기도 한다. 주인공 민기의 심적 알리바이를 위해 마련된 판타지다. 여기에 < 커튼콜 >은 또 한편으로 민기와 배우들의 가족들을 등장시켜 훈훈함을 연출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커튼콜>은 예술과 사람에 대한 주제적인 관심을 코미디라는 외피와 무대라는 공간에 접목시켰다고 보면 맞다. 그리하여 배우진이 완성되고, 연습이 이어진다. 그리고 예상 가능한 상황이 펼쳐진다. 각각 사연을 품은 배우들은 무대 안팎에서 황당한 실수와 반전과도 같은 장기(?)를 터트리고, 민기와 철구의 번뇌와 임기응변은 <햄릿>이 내용마저도 바꿔놓게 된다. 그럼에도 연극은 계속돼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듯, <커튼콜>은 시트콤과 같은 상황을 버무리고, 캐릭터들 간의 반목과 화합을 조율한다. 악역은 없다. 선의나 열정, 각자의 입장이 빚어내는 한바탕 소동이 존재할 뿐이다. 민기의 스승인 노배우는 치매를 앓고 있고, 그토록 말이 없던 아이돌 출신 여배우는 흥분하자 사투리를 쏟아내며, 배우들 간의 애정사가 <햄릿>의 이야기마저 바꿔 버린다. 카오스가 되어 버린 이 무대를 민기는 어떻게 마무리하고, 무사히 ‘커튼콜’에 이를 수 있을까. 중, 후반부를 고스란히 채우는 무대 상연 장면이야말로 < 커튼콜 >의 핵심이며 제작진이 가장 공을 들인 긴 시퀀스다. 그만큼 코미디로서 <커튼콜>의 형식은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아는 그 <햄릿>의 이야기가 우스꽝스럽게 변모하는 가운데, 해프닝과 연결되는 캐릭터 간의 관계, 성격, 전사들이 촘촘히 엮여 있어야만 영화 안팎의 관객들에게 그 설정을 납득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커튼콜>은 이 지점에서 하나의 거대한 산에 봉착한다. 연이은 배우들의 슬랩스틱과 실수가 <햄릿>의 이야기를 변모시키는 와중에 객석을 지킬 충성도 있는 관객이 실제로 얼마나 되겠는가. 더욱이, ‘현실성’을 가장 중시 여기는 영화 밖 현실의 한국 관객들이 그러한 설정을 감내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와 <커튼콜>의 결정적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라디오 창작드라마 생방송에 관객은 없다. 목소리만 듣는 청취자만이 존재한다. 배우들과 제작진이 그 어떤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러도 목소리만, 이야기만 흘러가면 그만이다. 대신, 그 해프닝을 스크린 밖에서 관람하는 현실의 관객들은 포복절도할 수 있다. 반면 <커튼콜>은 망가지는 <햄릿>을 관람하는 스크린 안 관객들의 인내를 스크린 밖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는지를 간과했다. 영화는 배우들의 ‘커튼콜’로 마무리된다. 다시금 무대 안팎을 그려낸 영화의 형식미가 강조된다. 극 속에서 고생한 배우들의 노력이 마치 무대극을 실제 보는 것 같은 감동을 자아내는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 커튼콜 >은 독특한 형식의 코미디를 만들기가 얼마나 악전고투와 같은지를 영화 안팎으로 보여줬던 작품이라 할 만하다. 더욱이 저예산의 제작비로 대형 투자/배급사의 손길을 거치지 않으면서 작년 연말 극장가에서 흥행의 쓴맛을 봐야 했다. 코미디란 장르 자체를 점점 쉬이 만나기 어려워지는 극장가에서 분투했던 <커튼콜>은 분명 곱씹을 만한 희귀종과 같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