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운
- 감독
- 나루세 미키오
- 제작년도
- 1955
- 출연
- 다카미네 히데코, 모리 마사유키, 마리코 오카다, 야마가타 이사오, 나카키타 치에코, 카토 다이수케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영화를 좋아해 자주 극장을 찾는 편이었지만, 유난히 집중적으로 영화를 보았던 시기가 있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파리에서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시절이다. 그때 나는 북역(北驛) 근처의 작은 스튜디오에 살았다. 아랍인, 인도인, 중국인, 아프리카인 등 여러 지역에서 흘러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거리는 낡고 허름했지만, 이상한 활력과 혼돈으로 가득했다. 향신료 냄새가 뒤섞여 풍기는 공기에는 흥분과 불안이 실려 있었고, 길을 지날 때 들려오던 언어들은 바벨탑에서나 흘러나왔을 법한 다성(多聲)의 소음이었다. 그 자체로 ‘영화적’이던 이 온갖 감각들이, 마치 모래시계의 바닥에 쌓여가는 부스러진 시간처럼, 서서히 나의 내부에 침전되어 갔다. 여가라 부를 만한 것이 없던 일상에 유일한 출구가 있었는데 그것이 극장이었다. 파리는 시네마의 도시였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영화관이 서너 개 있었고, 생미셸의 낡은 옛날 극장들에서는 고전영화가 끊임없이 돌아갔다. 일 년 내내 열리던 회고전들, 퐁피두센터의 특별 상영들,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작품들, 한국 감독들의 전작(全作), 영화 교과서에서 이름만 보았던 옛날 작품들을 관람하는 기회를 누렸다. 논문을 쓰던 스튜디오와 극장은 삶의 두 극점(極點)이었다. 외로움, 침잠, 우울의 극을 이루는 스튜디오. 그리고 놀라운 이미지들이 주는 충격, 활력, 기쁨의 극을 이루는 극장. 나는 이 두 지점 사이를 오가던 진자와도 같았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은 특별한 외출이 아니라 습관화된 생활 방식의 하나였다. 영화를 연구하거나 전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내가 몰두한 공부는 이미지의 문제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나는 벤야민의 저술들을 탐구하고 있었고,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그의 이미지 철학과 (수업에서 다뤄지던) 아비 바부르크의 문화학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미지의 물질성, 역사성, 능동성, 생명력에 대한 감수성을 이론적 사유의 동력으로 전환한 사람들이다. 특히 바부르크와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의 길을 연다. 바부르크가 바라본 이미지는 태어나고 변이하며,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생명 현상이었다. 이미지에 스며 있는 이 시간적 리듬을 그는 ‘잔존(Nachleben)’이라 불렀다. 이미지도 생명체처럼 고통을 겪고, 변형되며, 살아 나간다. 파토스(pathos), 곧 겪음, 시련, 고통이라는 문제의식이 바부르크의 사유를 관통한다.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지진파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지진계처럼, 그것이 행사하는 힘을 겪어내는 일이다. 바부르크가 “파토스적 패러다임” [1] 을 실험한 이론가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디-위베르만은 바부르크가 던진 주제들을 한층 더 밀고 나가, 로고스를 중심으로 조직된 예술사 전통을 해체하고, 이를 징후학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각 경험 고유의 현상학적 특성, 다시 말해 ‘본다(voir)’는 행위가 언제나 ‘응시당한다(regarder)’는 역관계와 함께 작동한다는 사실이었다. [2] 그는, 주체가 자신이 보는 것에 의해 찔리고 상처 입는 촉각적 경험, 그리고 이미지가 주체 내부로 스며들어 탈주체적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이미지란 유령이자 파토스이며, 동시에 징후다. 이는 이미지를 의미나 사실, 표상으로 고정하고 물화하여 상징계에 예속시키려는 지적 경향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당시에는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파리에서 천착하던 이미지 철학은 (지금 나에게 익숙한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다음의 세 가지 항목으로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째, 이미지는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 동등한 위상을 갖는 생명이며 힘이며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존재론). 둘째, 인간이 이미지를 선험적 인식의 틀에 포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가 인간에게 침투하여 그를 흔들고 변화시키는 행위자라는 점(정동론). 셋째, 이미지를 보는 인간은 이러한 실효적 이미지에 의해 감응되어 변형되는 감수자라는 점이다(페이션시의 이론). [3] 『세계에 대한 믿음』 중 소개된 작품들 (상) < 부운 >(나루세 미키오, 1955), < 황혼의 빛 >(아키 카우리스마키, 2006) 중 (사진: “ Ukigumo ”, “ Laitakaupungin valot ”, IMDb) (하)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나의 해방일지 >(김석윤, 2022) 중 (사진: “ 헤어질 결심 ”, 네이버영화 / “ 나의 해방일지 ”, JTBC) 서설이 길어진 이유는, 작년 겨울에 출판된 『세계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지를 (청탁을 받은 후에) 곰곰이 떠올리다 보니 그 기원이 20여 년 전 파리 시절의 이미지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집필의 실제 시간대만 놓고 말하자면, 저 책은 2021년에서 2024년 사이에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서울리뷰오브북스》, 『안과밖』, 《뉴래디컬리뷰》 같은 지면에 발표한 영화평들을 책으로 묶었고, 거기서 다룬 작가들은 나루세 미키오, 타르코프스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지아장커, 코엔 형제, 아키 카우리스마키, 켈리 레이카트, 박찬욱 , 박해영 등이다. 한눈에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듯, 저들을 묶는 단일한 주제나 특정 경향, 시대나 지역적 동질성 같은 것은 없다. 아마도 가장 느슨한 공통점은 내가 저들의 작품에 깊게 감응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책을 쓰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시네필’이나 ‘비평가’가 아니라 영화를 겪는다는 의미의 ‘시네-페이션트(cine-patient)’라고 불렀다. 시네-페이션트는 이미지를 겪는 자다. 영화에 의해서 변형되는 자. 영화를 바이러스처럼 삼켜 그것과 함께 하나의 어셈블리지로 생성되는 숙주다. 최근에 내가 제안한 한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봄의 겪음(suffering seeing)”의 주체라고 부를 수도 있다. [4] 이런 존재는 도대체 영화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쓸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이 책의 저변에 흐른다. 나는 영화를 정신분석이나 기호학, 또는 사회학이나 매체이론으로 ‘분석’하는 대신, 영화가 가져온 감각적, 감정적, 지적 변용을 ‘보고’하는 방식을 선택한 셈이다. 이는 책에서 자주 인용된 들뢰즈의 방식이기도 하다. 영화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동맹자로 만드는 것. 감독을 철학자로, 사상가로, (또는 나의 경우에는 사회학자로) 대우하는 것. 영화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영화에 ‘의해’ 감응되어 쓰인 글. 이것이 내가 책에서 시도했던 비평의 한 방식이라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앞에서 언급한 디디-위베르만과 바부르크의 ‘파토스적 패러다임’에 닿아있다. 시네-페이션트는 영화가 눈동자에 던지는 세계의 이미지들을 겪고, 견디고, 앓는다. 나는 책에서 여러 차례 영화의 힘의 바탕에 이런 수동성이 자리 잡고 있다고 썼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봄을 겪는다.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태를 겪는다. 극장에서, 우리의 눈동자는 그 안으로 세계가 침투하는 열린 상처, 또는 벌어진 구멍이 된다. 상처가 상처를 통해 상처를 바라본다. 기쁨이 기쁨을 통해 기쁨을 바라본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볼 때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런 체험의 파편들이 책 곳곳에 흩어져 있다. < 스토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79) 중 (사진: “ Stalker “, IMDb) 아쉽게도, 이제 영화를 이런 방식으로 살아내는 이들을 만나는 일은 매우 드물어졌다. 우리는 이미 포스트-시네마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영화의 황혼이며, 극장의 황혼이며, 영화를 보러 가던 마음의 황혼이고, 영화를 보고 난 뒤 스며오던 그 막막하고 어둡고 따스한 기분의 황혼이며, 그 기분을 나누는 대화와 관계의 황혼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슬프지는 않다. 쇠퇴해가는 매체만이 마지막 순간에 방출하는 구원의 힘(벤야민)을 믿기 때문일까? [5] 『세계에 대한 믿음』은 영화를 통해 인간과 세계와 맺는 관계를 고민해 온 한 시네-페이션트의 기록이다. 이미지가 우리를 통과하는 겪음의 시간이 어떻게 사유와 행위로 전환될 수 있을지를 묻는 소박한 실험. 이 책이 독자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지를 겪고 말할 수 있는 영감을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시네-페이션트가 또 다른 시네-페이션트에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당신은 무엇을 보는 것을 겪었는가? *** [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잔존하는 이미지』, 김병선 옮김, 새물결, 2022, 270쪽. [2] Georges Didi-Huberman, 1992. Ce que nous voyons, ce qui nous regarde , Paris. Minuit, 1992. [3] 페이션시는 행위능력(agency)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감수자의 위치, 경험, 힘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하는 힘이 아니라 겪는 힘이며, 겪음을 통해서 형성되는 잠재력이기도 하다. [4] 김홍중, “시대횡단의 징후학1.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중심으로”, 『사회와이론』 52, 2025. [5] 로절린드 크라우스, 『북해에서의 항해』, 김지훈 옮김, 현실문화A, 2017, 87쪽. 김홍중(사회학자) l 사회이론과 문학, 예술, 문화사회학을 전공한다. 그간 인간의 심적 활동이 어떻게 사회를 형성,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심리사회 연구를 수행해 왔다. 최근에는 21세기 생태파국에 대한 대안적 사회이론과 새로운 문화적 실천들을 탐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마음의 사회학』(2009), 『사회학적 파상력』(2016), 『은둔기계』(2020),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2024), 『가까스로-있음: 브뤼노 라투르와 파국의 존재론』(2025)이 있다.
< 순교자 >(1965)는 김은국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미국에 수출한 첫 번째 한국영화이다. 영화를 연출한 유현목 감독은 한국전쟁에서 아버지와 형제를 잃고 나머지 가족들과 남쪽으로 내려와 실향민으로 살아야 했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신자’가 되었고 자신의 신앙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실존주의가 크게 자리하게 된다. ‘인간들의 절망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전쟁을 겪고 미국으로 건너간 김은국의 「순교자」(1964)는 이 절박한 질문의 답변 같은 소설이었다. 1950년 10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은 평양에서 후퇴하기 직전에 목사 14명을 처형한다. 그런데 한국군에서 진상을 알아보니 한 목사와 신 목사가 살아있다. 포로로 잡힌 인민군의 증언에 따르면, 12명의 목사 대부분은 믿음을 부정하고 살려달라고 짐승처럼 애걸했다. 한 목사는 여기에 충격을 받아 실성을 했지만, 신 목사는 당당하게 맞섰다. 그래서 두 명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한국군이 12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만들어 인민군의 만행을 부각시키려고 할 때, 현장에 있었던 신 목사의 증언이 절실해진다. 신 목사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이 대위에게 “일생동안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은 없다. 천당도 지옥도 없다. 전쟁의 비극과 학살에 희생당하는 인간만 있을 뿐이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믿는 진실이 절망에 빠진 인간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덧붙인다.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에게는 진실보다 ‘천국이 가까이 있다’는 ‘환상’이 훨씬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 목사는 12명의 목사가 흔들리지 않는 믿음 속에서 순교했다고 증언하고 유다 같은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그는 진실 대신 거짓을 말함으로써, 기꺼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진짜 순교자’가 된다. 여기서 신 목사는 최후의 만찬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남아서 믿음을 전파할 의무를 떠안은 사도 바울에 가깝게 보인다. < 순교자 >는 한국전쟁을 매개로 해서 기독교의 믿음과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유현목 은 이 영화가 로베르 브레송의 < 시골 사제의 일기 >와 잉마르 베리만의 < 제7의 봉인 >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김은국은 기독교를 소재로 해서, 인간이 전대미문의 사태 앞에서 어떻게 절망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 전쟁을 겪어야 했던 한국사의 비극에 방점을 두고, 극한의 고통 속에서 최선을 다해 ‘순((殉)’하는 인물 군상을 제시하려 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의 부조리를 고발하려 했다. 유현목은 실존주의 문학에 속하는 원작에 이끌리면서도 기독교 신자로서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기독교의 신앙과 실존주의 사이의 불화를 미묘하게 봉합하는 각색을 했다. ‘인간의 구원’을 강조하고, ‘신을 위해서든 인간을 위해서든, 참된 믿음과 봉사를 선택한 사람이 곧 순교자’라는 점을 더 부각시켰다. 신 목사뿐만 아니라 환자들을 위해 희생을 선택하는 의사의 경우처럼. 그러나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기독교계의 거센 반발과 관람거부운동이 벌어졌다. 유현목 은 방송에 출연해 “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꽃이나 나비를 보아도 거기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했다. 영화 내내 황폐한 화면 밖에서 울려 퍼지는 교회의 종소리와 끊임없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유현목이 믿는 하나님, 존재하지만 숨어 있는 신의 현현이다. 이 영화를 둘러싼 또 다른 제약은 반공영화가 아니면 한국전쟁을 다룰 수 없었던 시대의 억압이었다. 따라서 원작과 달리 영화는 ‘피에 굶주린 공산주의자들이 동족상쟁의 침략전쟁을 일으켰다’고 하는 이 대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 대위가 ‘죽을 때까지 조국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제 한국전쟁은 오래 전의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절망적인 인간의 실존을 견디기 위해서는 비록 거짓이라 해도 희망을 줄 수 있는 환상이 필요하지 않은가?’라는 문제 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원작과 영화가 여전히 의미심장한 이유이다.
이번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에서는 나루세 미키오가 만든 여든아홉 편의 영화 중 약 1/3에 해당하는 스물아홉 편을 상영한다. 몇몇 작품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줄거리나 배우를 보고 영화를 고를 필요 없이 무조건 많이 섭취하시라는 당부 말씀드리고 싶다. 한 감독의 영화를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접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며, 특히 나루세의 영화는 여러 편이 한데 모여 확장되면서 진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반드시. 많이. 보실 것. 우선 특별전이 구정 직후에 시작함에 착안하여 비교적 유명한 5~60년대 영화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들을 아내와 가족이라는 주제로 묶어 권하고자 한다. 나루세 영화 중에는 집념 어린 사랑의 이야기 < 부운 >이나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독립을 다룬 <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처럼 집단의 관념 바깥으로 이탈하는 여성들을 다룬 작품이 특히 유명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그 여성들을 안에서 붙잡는 가족의 존재가 있다. 나루세는 이 가족을 ‘어쨌든 우리는 가족’이라는 식으로 끌어안는 대신 안으로부터 생긴 균열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명절 가족 모임에서 원치 않는 내상을 입었다면 (현실 도피가 아닌) 살풀이로 이만한 영화들도 없다. < 아내 >는 < 밥 >, < 부부 >를 잇는 ‘부부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세 편 모두 아이를 갖지 않은 채 권태기에 빠진 부부를 다루는데, 그중에서도 <아내>의 설정은 거의 진부하게 들릴 지경이다. 남편이 아내 귀한 줄 모르고 바람을 피운다. 끝. 그런데 핵심은 여기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남편이 상대와 다른 살림을 차리지도, 부부가 대판 싸우고 별거하거나 이혼하지도, 아내가 남편을 용서하지도 않는다. 끊임없이 집을 나가고 들어오며 이 부부를 흔들어 놓는 세입자와 친구들의 참견이 뜻밖에 코믹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미결정과 불확실의 상태는 가실 줄을 모른다. 아마도 고통스러운 이야기일 테지만, 사건에 변화를 주어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 이전에 상황 자체를 세밀히 직시하는 담담한 시선이 주는 쾌감이 있다. < 아내의 마음 >의 가족은 규모가 더 크다. ‘아내’에게는 남편뿐만 아니라 아이도 있고, 시어머니도 있고, 시동생도 있고, 동서도 있고, 조카도 있다. 게다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부부에게 시동생네 가족이 기약 없이 신세 지러 온다는 설정이다. 그렇다고 고성이 오가는 난장판을 기대하면 금물. 이 가족 중 누구도 ‘아내’에게 악의를 품지 않으며, 뒷공론을 하거나 서운함을 토로하는 데에 열을 올리지도 않는다. 막장 드라마에 단련된 관객에게 이 시어머니나 동서는 차라리 천사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집안 곳곳에서 상대를 마주치고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점점 더 이들을 견딜 수 없어진다. 급기야 두 인물이 한 화면에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비명을 지르고 싶어진다. 사건이나 인물의 성격 이전에 공간과 동선이 가족의 불편함을 전달한다. 이번 특별전의 포스터에 쓰인 사진이 바로 <아내의 마음>이니 궁금하셨던 분들은 참고하실 것. 참, 그리고 여기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페르소나인 미후네 도시로도 출연한다. 목소리와 동작이 굵고 커서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배우에게 나루세가 어떤 역할을 주어 어떻게 활용하는지도 재미난 볼거리다. < 딸, 아내, 엄마 >는 나루세 가족 영화의 총결산 같은 영화다. 가족의 규모는 더욱 커지고, 하라 세츠코와 다카미네 히데코를 필두로 과거 나루세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가 다수 출연한다. 이들이 이전에 맡았던 역할이 남긴 잔상을 끌고 들어오거나 변주하면서 안 그래도 큰 가족을 더욱 확장한다. 달라진 점이라면 젊은이들이 더 늘어났고, 그들은 가족이라는 관념 앞에 더욱 냉정하다는 것. 집안에 갑자기 닥친 위기 앞에 오 남매가 모여 모든 감정적인 반응을 배제하고 실리를 따지며 대책을 논의하는 대목은 나루세의 가족 영화 중 가장 지독하고도 상쾌한 순간이다. 또 아내라기보다는 거의 식모처럼 나와서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화면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다카미네 히데코가 불현듯 카메라를 독점한 채 그간 품어왔던 시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토로하는 대목은 가족을 폐기처분하지도, 숭앙하지도 않는 가운데 공존의 조건을 모색해 온 나루세의 결론처럼 들린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어떤 유명한 배우가 등장하는 순간, 일본 영화가 빚어낸 전통 가족이라는 하나의 우주가 휘청거린다. 반드시, 하지만 가능하면 나루세의 다른 가족들을 일별하신 후에, 보실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