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비를 타고
- 감독
- 진 켈리, 스탠리 도넌
- 제작년도
- 1952
- 출연
- 진 켈리, 도날드 오코너, 데비 레이놀즈, 진 헤이근, 밀러드 미첼, 시드 채리스, 더글라스 파우리, 리타 모레노
2012년 4월 부산 중앙동에 개소한 모퉁이극장은 올해 6년 차를 맞이한다. 그동안 관객잡지를 두 권 펴냈고, 국내 최초로 관객영화제를 개최하는 등 관객들이 주축이 되어 활약하는 다양한 영화프로그램을 만들어오고 있다. 이 활동들을 한정된 지면에 담아내기 어려워 고민하던 중 모퉁이극장이 말하는 관객이 어떤 것인지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간접적으로나마 이 글이 모퉁이극장의 관객운동에 주목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추후 기회가 된다면 관객잡지를 만든 이야기라든지 모퉁이극장에서 운영하는 관객문화교실, 애프터시네마클럽, 관객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도 전하고 싶다. ‘영화의 관객들에게 ★ 모퉁이극장’ 이것은 모퉁이극장이 시작된 2012년부터 서명처럼 사용해온 문구이다. 이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모퉁이극장에서는 관객을 ‘영화의 관객들’이라고 부르는데, 관객운동을 준비하던 즈음인 2011년, 영화제를 다니며 접한 영화와 강연을 통해 그 단서를 얻었다. 관객운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방향 모색을 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이 ‘관객’이라는 어휘였다. 모퉁이극장에서 말하는 관객이 매스컴에서 소개되는 천만 관객과 같이 통계적 수치로 수렴되는 익명적 존재가 아니라면 과연 어떤 관객을 말하는지 제대로 전할 수 있어야 했다. 2011년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부산영화포럼(BCF) 발제자로 왔던 영화학자 더들리 앤드류(Dudley Andrew)는 < 400번의 구타 >의 바다와 < 우게츠 이야기 >의 바다를 보여주며 “이 바다와 이 바다는 이어져 있다”는 말로 누벨바그에 대한 설명을 대신했다. 그 방식이 매우 영화적이어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는 누벨바그가 당시 프랑스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일본영화의 새로운 미학적 시도들 속에도 있었다고 했다. 영화학자 더들리 앤드류가 누벨바그를 설명하면서 보여준 < 400번의 구타 >와 < 우게츠 이야기 >의 바다 이미지 그해 겨울에는 영화의 전당에서 개관 기념 영화제가 열렸다. 그때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프랑수아 트뤼포에 관한 강연을 했었다.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의 시민권이라는 비유를 들면서 세상에 태어난 모든 영화가 동등하다고 한 프랑수아 트뤼포의 견해를 전해주었다. 지금 세세한 내용까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 오데트 >와 진 켈리, 스탠리 도넌 감독의 < 사랑은 비를 타고 >가 같은 해인 1954년에 나왔다. 하지만 이 두 영화 중 어느 영화가 더 뛰어난 작품인지 말할 수 있는가, 라고 했을 때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두 영화는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로 이루어진 세상이 있다면 모든 영화들은 세상에 나오면서 고유한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저마다 평등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어 보이는 영화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의 영화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의 설명을 통해 영화의 시민권이라는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 모든 영화들은 저마다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는 내용이 담긴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평론집 개관 기념 영화제의 상영작이었던 장 뤽 고다르의 < 영화사 >에서는 “이탈리아 영화가 위대한 것은 오비디우스와 베르길리우스, 단테와 레오파르디의 정신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내레이션이 깊은 울림을 주었다. (국내 출시된 DVD에서는 '언어가 형상으로 승화되었다'고 번역되어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본 후 더들리 앤드류가 ‘이 바다와 이 바다가 이어져 있다’고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Histoire Du Cinema(1997)에 인용된 이탈리아 영화들 그렇다면 < 400번의 구타 >의 바다가 < 우게츠 이야기 >의 바다로 이어지는 이 운동성이 곧 누벨바그의 본질이 아닐까. 이러한 흐름이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으리라는 점에서 누벨바그는 어느 한 시대의 영화사조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영화의 정신, 태도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장 뤽 고다르의 생각처럼 이탈리아 영화들이 위대한 것이 그 영화들에 선조들의 정신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면, 관객들에게도 그 정신이 흐르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정성일 평론가가 전해준 트뤼포의 ‘영화의 시민’, 앤드류 더들리가 보여준 ‘이어져 있는 바다’의 이미지, 그리고 장 뤽 고다르가 들려준 ‘영화에는 정신이 흐른다’는 메시지가 ‘영화의 관객들’을 설명하는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2011년 당시에는 그 메시지들을 하나로 연결시켜 정리해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기록을 보면 내가 본 영화들의 영향으로 그때부터 관객을 ‘영화의 관객들’이라고 표기하며 모퉁이극장을 준비하는 멤버들과 이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때 사용한 ‘영화의 관객들’은 장 뤽 고다르의 영화에서 얻은 메시지인 ‘정신이 흐른다’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말이다. 영화와 관객을 이어주는 ‘의’는 영화의 정신과 관객의 정신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표지로서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퉁이극장에서 말하는 관객은 ‘관객’도 ‘영화 관객’도 아닌 ‘영화의 관객들’이 된 것이다. 그렇게 한글로는 ‘영화의 관객’이라는 말 속에 관객의 의미를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관객’이라는 의미를 영문으로 쓰려니 관객의 의미로 통상적으로 쓰이는 audience나 spectator로는 그 의미가 불분명한 것 같아 한동안 고민을 많이 했었다. 2012년 4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앙리 랑글루아의 다큐멘터리 <시티즌 랑글루아>(1995)를 관람했다. 영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앙리 랑글루아의 삶에서 관객운동이 나아가야 할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영화를 통해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를 처음 방문한 감독들의 감격, 장 비고가 죽은 후 그가 살던 집으로 이사한 랑글루아의 면모 등 영화에 대한 그의 애정을 엿볼 수는 있었지만 내가 기대한 관객운동의 방향을 잡는데 구체적인 영감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이 모든 파편들이 하나로 모이면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앙리 랑글루아의 영화를 봤던 기억을 더듬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앙리 랑글루아에 관한 영화의 제목이 <시티즌 랑글루아>였다. 이 시티즌이라는 표현은 분명히 프랑수아 트뤼포가 말한 ‘한 편의 영화가 지닌 영화 세계의 시민권’을 말할 때의 의미와 같은 뜻이리란 기대에 앙리 랑글루아에 관한 정보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에 관한 책 한 권을 발견했는데 그 책의 제목이 <Henri Langlois, First Citizen of Cinema>였다. 이 타이틀을 보자마자 내가 그동안 머릿속으로 그려오던 관객의 의미가 ‘시티즌 오브 시네마’라는 어휘 속에 오롯이 담겨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앙리 랑글루아의 평전 <Henri Langlois: First Citizen of Cinema> ‘시티즌 오브 시네마’는 ‘영화의 시민권’을 관객의 입장에서 번역해서 ‘가상의 영화 나라에 시민권을 가진 관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장 뤽 고다르의 사색처럼 어떤 영화의 정신이 내게도 흐르고 있다고 믿는 관객들이다. 이러한 영화와 관객의 관계성을 담고 있는 ‘영화의 관객’의 영어 표현으로 Citizen of Cinema만큼 적절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2012년 6월 8일, 시티즌 오브 시네마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012년 모퉁이극장 페이지의 메인화면으로 사용되었던 영화의 관객들 이미지 모퉁이극장이 말하는 관객은 이렇게 영화문화로부터 온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해 영화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진 관객들의 상상력과 연대의 토대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앙리 랑글루아의 삶 그 자체를 대변하는 ‘First Citizen of Cinema’를 통해 관객을 ‘시티즌 오브 시네마’라 부를 수 있었고, 이탈리아 영화를 유심히 관찰한 장 뤽 고다르를 통해 영화에는 정신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에 우열이 없고 각 영화마다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한 프랑수아 트뤼포, 그 이야기를 발췌해서 강연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해준 정성일 평론가에게까지 영화의 정신은 이어져 흘러왔고 이제는 그 흐름이 모퉁이극장의 관객운동에까지 흘러온 것이다. 그렇게 2012년 우리는 관객을 ‘영화의 관객들, 시티즌 오브 시네마’로 부르기 시작했고 최초로 펴낼 관객잡지의 이름이 ‘영화의 관객들’이었으면 했다. 그리고 몇몇의 관객들 앞에서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관객잡지의 창간취지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영화의 관객들> 창간 취지문 영화의 관객들은 스크린의 빛 아래 낮은 자리에서 영화로 투사되는 관객의 시선에 담긴 마음을 담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관객의 권위라는 새로운 위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향유하는 모든 이들이 관객으로서 평등하게 자신의 시민권을 갖는 새로운 영화의 주체를 탄생시키고자 합니다." 2015년 국내 최초로 만든 관객영화제의 영문명 시티즌 오브 시네마 페스티벌(citizen of cinema festival)
아마도 한국에서는 처음 있는 대대적인 마틴 스콜세지 회고전을 환영하며, 팬으로서 기쁜 마음으로 그의 실패작 두 편을 추천하고자 한다. 이 말에는 어떤 아이러니도 없다. A4 한 장 분량의 소개 글에서 새삼 < 비열한 거리 > < 택시 드라이버 > < 성난 황소 > < 코미디의 왕 > < 좋은 친구들 > < 순수의 시대 >를 언급하는 것은 민망한 지면 낭비다. 그보다는 이럴 때가 아니고서야 언제 극장에서 볼 기회가 있을까 싶은 작품, 본다고 한들 누가 뭐 얼마나 얘기할까 싶은 작품, 그러나 널리 알려진 수작들과 마찬가지로 스콜세지를 이해하는 데에 빛을 던져줄 만한 작품 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 뉴욕, 뉴욕 >은 < 택시 드라이버 >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탄 후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오만해진 스콜세지가 매우 방만하게 만든 뮤지컬이다. 스콜세지는 제대로 된 각본 없이 많은 것을 즉흥에 의지해 계속 카메라를 돌렸는데, 처음 편집본에서는 두 주인공이 만나는 첫 장면의 길이만 한 시간에 달할 지경이었다. 그런 방만한 만듦새에다 로버트 드 니로가 재능 있는 트럼펫 연주자로 나와 역시 재능 있는 가수를 연기한 라이자 미넬리를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괴롭히는 진절머리 나는 이야기인데 흥행할 리가 있나. 영화는 대폭 삭제되었고, 실패를 맛보았다. 그러나 지미 도일의 패악질을 어떻게든 참아낼 수만 있다면, < 뉴욕, 뉴욕 >은 그렇게 실속 없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광 스콜세지는 여기에서 고전기 할리우드의 뮤지컬에 헌사를 바친다. 여기 나오는 뉴욕은 스콜세지가 나고 자란 비열한 거리가 아니라, 그가 어린 시절 TV로 보고 꿈꾸었을 인공적인 세트 속의 형형색색 아름다운 가짜 뉴욕이다. 예술가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연인을 학대하는 남자 예술가의 이야기는 4~50년대의 뮤지컬 <내 꿈은 당신의 것My Dream Is Yours>(1949)이나 <스타 탄생A Star Is Born>(1954)에서 가져왔다. 어쩌면 라이자 미넬리를 주연으로 삼은 것도 한편으로는 고전기 뮤지컬의 대표 감독 빈센트 미넬리와 스타 주디 갈랜드에게 바치는 간접적인 헌사였을지 모른다. 특히 대미를 장식하는 ‘해피 엔딩’ 장면은 50년대 이후로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MGM 뮤지컬의 화려함을 한껏 뽐낸다. <악대차The Band Wagon>(1953) <파리의 미국인An American in Paris>(1951)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1952) 같은 옛 뮤지컬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눈물을 글썽일 만하다. 두 주인공의 권력 균형이 좀 더 맞았더라면, 지미 도일이 그토록 자연재해 같은 인간만 아니었더라면 더욱더 보기 좋은 영화가 되었을 텐데. 그래도 스포일러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스콜세지는 지미 도일 같은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 덮은 채 ‘해피 엔딩’으로 갈등을 무마할 정도로 몰염치한 창작자는 아니다. 조금만 참아주시기를. < 비상근무 >는 어떤 면에서는 < 뉴욕, 뉴욕 >과 정반대의 상황에 놓인 작품이다. 90년대 초 뉴욕의 야간 근무 구급요원을 다룬 이 영화에서, 스콜세지는 다시 한 번 < 택시 드라이버 >의 세계로 돌아간다. 뉴욕의 밤은 불타는 지옥이고, 니콜라스 케이지가 연기한 주인공 프랭크 피어스는 그 안에서 구원을 찾아 헤맨다. 단,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 비클이 피로 도시를 정화하고자 하는 복수의 천사라면, 프랭크는 피 흘리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한 명이라도 살리고 싶어하는 성자다. 일종의 과대망상과 강박관념에 빠졌다는 점은 마찬가지일지 몰라도, 그는 스콜세지 영화의 남자 주인공치고는/니콜라스 케이지가 연기한 것치고는 놀랄 만큼 제정신이다. 여기에 로버트 리처드슨이 촬영한 뉴욕은 마이클 채프먼이 촬영한 <택시 드라이버>의 뉴욕과 마찬가지로 빨갛고 파랗고 노란빛이 어둠 속에 번지면서 화려한 추상미를 자랑한다. 거의 무게 없이 허공을 활강하듯 춤추는 카메라와 빠른 편집으로 대표되는 90년대 스콜세지의 스타일도 눈을 홀릴 만하다. 스콜세지의 음악 선곡 실력이야, 가장 좋지 않은 영화에서도 빛을 발하는 부분이고. 요컨대 < 비상근무 >는 이번 상영작 중 가장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큰 불편 없이 주인공에게 이입할 수 있으며, 눈과 귀를 만족시킬 자극도 충분하다. 그런데 왜일까, < 택시 드라이버 >의 심란함이 빠져나가자 스콜세지의 정수가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어쩌면 스콜세지의 정수는, < 좋은 친구들 >에서처럼, 끔찍하지만 누리고 싶은 권력의 세계 앞에 느끼는 매혹과 혐오 모두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그 불온한 균형 감각에 있는 것이 아닐까? <비상근무>에서처럼 안전한 거리를 확보한 채 바라보는 지옥의 풍경은 오히려 관찰자를 게으르고 위선적인 구경꾼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비상근무>는 부재를 통해 거꾸로 스콜세지 영화의 힘이 지닌 성질을 검토하도록 이끈다. 따라서 로버트 드 니로를 비롯한 스콜세지 세계 남정네들의 갖은 난동을 보고 이런 건 정말 싫다고 질색하신 분들께 충심으로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