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계단
- 감독
- 서정민
- 제작년도
- 2006
- 출연
- 이 샘, 이지연, 박영희
이만희 감독은 한국영화사에서 몇 안 되는 천재로 회자된다. 15년간 만든 51편이란 숫자도 놀랍지만, 작품 간 기복이 심하지 않고 꾸준히 일정 수준을 유지했다. 유독 비범한 영화도 있고, 1970년대 영화처럼 범작처럼 보이는 영화도 있지만 이만희의 치밀한 미장센과 유려한 리듬, 자기파괴적인 운명과의 싸움 같은 인장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1955년 제대한 후 조감독 생활을 했다. 이후 < 주마등 >(1961)으로 데뷔했고 (고작) 다섯 번째 영화인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을 통해 미학적 성취와 흥행 성적 모두를 성공시켰다. 그는 이 영화로 한국전쟁영화의 원형을 만들어냈으며, 그해 관객동원 1위의 기록을 갖게 되었고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다. 이만희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리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뛰어난 대중영화, 사실적으로 전쟁에 접근한 전쟁영화의 장인, 사실성을 위해 실탄을 쏠 정도로 영화에 미쳐 있는 완벽주의자, 반공 이데올로기에 타협하지 않는 강한 품성의 소유자, 높은 개런티를 받는 A급 감독으로의 도약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이듬해 느와르의 관습을 과감하게 몰아붙인 < 검은 머리 >와 호러의 법칙을 보다 치밀하게 고안한 < 마의 계단 >을 만들었는데, 두 영화 모두 고유한 무드를 따라 넘실거리는 정념과 가혹하고 파괴적인 운명과 대결하는 캐릭터를 보여줬다. 이만희가 연달아 발표한 걸작 < 물레방아 >(1966), < 귀로 >(1967), < 휴일 >(1968)도 전작들의 분위기를 이어받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과감하게 넘어선다. 귀기 서린 여인의 얼굴과 새하얀 버선, 그 아름다움에 홀린 남성의 집착과 파멸이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흐리고, 서울의 낮과 밤을 부유하며 자신이 정한 계율과 투쟁하다 죽음을 선택한 여인의 불안과 공허는 무심히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와 공명한다. 또 담배 한 개비조차 편히 피울 수 없는 젊은 룸펜과 그의 연인의 육체를 날려버릴 만큼 강력한 모래바람의 운동처럼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은 우연히 튀어나올 리 없는 창조적 역량과 그의 무드가 온전히 결합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유작 < 삼포 가는 길 >(1975)까지 이어지는 이만희의 영화들은 반공영화와 문예영화처럼 국가와 영화산업의 필요에 따른 규칙을 뛰어넘어 살아 생동하며, 원작과 다른 정취를 표현함으로써 고답적인 한계에 갇히지 않았다. 또 전쟁영화, 멜로드라마, 스릴러, 첩보물, 만주 웨스턴 같은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고 장르의 규범을 탈바꿈시켰으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넘나들며 인간과 삶, 가변적인 감정과 불변하는 운명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갇힌 인물의 도덕성을 가혹할 정도로 밀어붙였다. 이만희는 프레임에 인물의 감각과 감정을 새겨 넣고 그 시대의 무드를 기입했으며 빛과 어둠을 새롭게 조직하고 그만의 속도와 리듬을 창조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인간됨에 대한 믿음과 캐릭터의 생생함, 스펙터클과 정감을 조율하는 뛰어난 영화적 감각, 운동하는 존재와 갇힌 존재가 숏 안에 배치되고 격돌하는 미장센과 리드미컬한 편집을 갖추고 있다. 이 영화는 인천상륙작전에서 시작해 서울 수복을 거쳐 인해전술을 펼치는 중공군과 대치한 전선에서 끝을 맺는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가장 강력한 사건을 향해 점진적으로 확대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만희는 마지막 참호전을 위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찍은 것처럼 느껴질 만큼 중공군과의 전투에 모든 힘을 쏟는다. 이를테면 첫 번째 전쟁 시퀀스인 상륙작전은 오프닝에 등장해서 이 영화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드러낸다. 두 번째 전투 시퀀스인 텅 빈 건물에서 벌어진 매복과 총격전은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시민들의 주검으로 이어지는데, 시선의 방향에 따른 빈틈없는 편집과 시각적 스펙터클 뿐 아니라 심리적 긴장까지 녹여낸 유장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압권은 마지막 전투 장면이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전선에 합류한 분대원들은 “적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진지를 방어하는”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한다. 영화에서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한 이 장면은 4번의 전투 시퀀스로 구성되어 휴지기/전투의 반복과 확장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증명하는 주검으로 뒤덮인 참호로 향한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에 개성이 강한 분대원들과 호랑이 분대장(장동휘)이 전쟁이란 무엇인지 자문하고,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체념을 수시로 체험하며, 군인으로서의 의무와 전우애를 뼈저리게 느끼고, 후방에 맡겨둔 아이 영희(전영선)의 편지를 받고 눈물 흘리는 집단 초상화에 가까운 얼굴들이다. 분대원 각각의 클로즈업은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드러나는 반면, 군인이라는 유대감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사람 살아가는 곳 어디에나 있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총원 42명”이던 분대원들이 하나씩 프레임에서 사라져 2명만 남게 되는 순간, 우리는 분대장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얼굴에 압도된다. 마찬가지로, 죽어가면서도 “내가 없으면 누가 웃겨주니?”라고 너스레를 떨던 봉구(구봉서)의 죽음에 애통해하는 분대원들은 진흙과 피와 눈물로 얼룩진 개인의 얼굴로 포착된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뛰어든 분대원들에게 “14시 이후의 생존자는 집으로 돌아가라.”며 죽지 말고 살아남길 당부한 분대장의 말은 마지막 전투 시퀀스에서 살아남은 대원에게 “너희 둘만은 꼭 살아 돌아가서 전쟁의 증인이 되어라.”는 명령과 연결된다. 살아남으라는 말이 채 가시기 전에 구일병(이대엽)마저 죽어 엎드러질 때 눈물 흘리는 최해병(최무룡)과 흐느끼는 분대장의 얼굴은 전쟁의 실체를 겪은 자의 무참함을 드러낸다. 셀 수 없는 주검과 진흙과 피로 범벅이 된 분대원의 얼굴, 전쟁 후 복구되지 못한 당시의 황폐한 산천도 참담하고 고통스런 얼굴에 다름 아니다. 이만희의 실제 경험과 영화적 역량이 여실히 드러난 전투 장면과 전쟁의 무의미함에 대한 고백과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선언하는 것도 놀랍지만,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백미는 전투를 치르지 않는 후방의 막사나 럭키 클럽에서 드러나는 분대원 개개인의 놀랍도록 선명한 기질처럼 세부적인 것들이다. 영희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별명을 듣고 껄껄 웃거나 불만을 표하는 모습, 시가전에서 잡은 인민군 포로에게 그 흔한 매질 한 번 없는 모습, 눈이 녹은 땅을 보며 “전장에도 양지는 있구나.”라며 감탄하던 봉구의 구성진 말소리, 최해병이 건넨 총을 받아들고 그의 손에 이끌려가는 분대장의 휘청거리는 발걸음, 어린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심겨진, 민둥산에 가까운 산등성이의 나직하고 고운 모습 등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해병대원이 몇 천 명 참여했고, 탱크와 총기를 지원받아 실탄을 쐈다는 기록보다 귀중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실제를 방불케 하는 스펙터클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당대 영화인들의 노력과 이만희의 천재적인 연출력과 서정민의 역동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카메라 움직임처럼 다양한 힘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감동적이다. >> 돌아오지 않는 해병 고화질 VOD 보러가기 <<
구술사로 조명하는 1960~1970년대 액션영화 연간 200여 편이 넘게 제작되며 대중문화의 유행을 선도하고 산업적인 전성기를 이끈 1960년대 한국영화는 다양한 방면으로 연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와 깊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급속도로 확대‧성장한 매체의 특성으로 짧은 시간 동안 유입된 영화계의 많은 인력을 살펴보는 것은 녹록하지 않은 일이다. 영화산업 성장의 근간이 되는 제작규모와 그에 따른 인력 배치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그나마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는 장르별, 제작사별, 시기별로 구분해 흐름을 살피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불안정한 제작 시스템과 상영관 규모 대비 과도한 제작 편수로 인해 분류화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규모에 상응하는 방대한 영상사료와 문서사료를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수행되어야 할 방법론이 구술사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구술사방법론은 역사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사건이나 주변부의 인물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또 다른 방면에서 역사를 바라보게 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 구술사 프로젝트에서 다양한 직능별로 이루어진 인력 구술은 이와 같은 여러 방면에 걸친 새로운 방식의 역사쓰기에 일조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배우 김영인의 구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1960~1970년대 액션영화의 흐름과 변화이다. 2016년 한국영화 주제사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한국영화산업의 변화’에서 장르영화의 배우를 대표하여 이루어진 이 구술은 문서사료에는 기록될 수 없는 세밀한 현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의 구술은 특히 1960~1970년대 여러 장르가 번성하는 가운데 제작편수의 큰 부분을 차지한 액션영화를 다채롭게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시기별로 변화하는 액션연출과 액션연기의 변화에 대한 설명은 장르영화의 성장과 확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특정 사례가 될 수 있다. 일례로 그는 1대1 액션과 군중신의 촬영비화, 무술지도의 원칙 등을 큰 틀로 하여 1960~1970년대 액션영화의 특징을 구술한다. 그가 데뷔한 1961년부터 활발하게 활동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우연히도 액션영화의 성장과 쇠퇴와 맞물려있는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1960년대 규모가 확대되기 시작한 한국영화산업의 성장 이면에서 인력의 유입과 이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그림1) 김영인 한국영상자료원 구술에서 특징적인 점 중 하나는 영화의 특성상 다양한 분야의 스태프 구술이 상당수 이루어졌다는 점인데, 특정 감독이나 배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뒷스태프’는 방대한 사료가 무색할 만큼 제대로 된 기본자료 하나 찾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의 크레디트에 기록되지 않은 경우도 자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오롯이 구술자의 기억과 필름이 보존된 영화를 중심으로 구술을 완성해가야 한다. 때문에 영화의 기본 제작정보를 기반으로 구술자와 연구자가 내용을 쌓아 구술자가 활동하던 시기의 네트워크를 그려내야 한다. 배우 김영인의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활동 기간이 비교적 긴 반면에 조연으로 오랜 기간 활동한 탓에 매체 노출이 거의 없었고, 구술이나 회고록 등의 작업물도 없어 1차 자료를 수집하기가 어려우며 한국영상자료원의 데이터베이스 자료와 영상물 외에는 참고할 자료가 미비하다. 이럴 경우 최선의 방법은 예비접촉을 통해 질문지를 구성하는 것인데, 이러한 예비접촉을 바탕으로 구성한 김영인 구술의 큰 항목들은 첫째, 영화계 입문 배경, 둘째, 배우 데뷔 후의 연기활동, 셋째, 무술지도에 관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데뷔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력을 회고함으로써 액션배우 김영인의 활동이 완성되었다. (그림2) 액션영화 촬영현장에서 ‘날으는 배우’의 탄생과 액션영화의 생생한 현장이야기 1) ‘스턴트맨’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도 않던 시절, 김영인은 <5인의 해병>(김기덕, 1961)에서 주인공들의 액션 장면을 대신하며 ‘날으는 배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본인이 출연한 장면이 대역이란 것도 모를 정도로 영화제작 시스템에 어두웠던 그는 1966년 김기덕 감독의 조언으로 <불타는 청춘>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중 있는 배역이란 언급에 큰 맘 먹고 빚까지 내 신사복 세 벌을 맞췄다. 하지만 그가 맡은 역할이 ‘깡패’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맞춤옷들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결국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한 구제 점퍼가 ‘유니폼’이 되었다. (그림3)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신문광고 데뷔작 이후 김영인은 <어명>(강조원, 1967), <실록 김두한>(김효천, 1974), <동백꽃 신사>(이혁수, 1979) 등의 영화부터 2000년대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류승완, 2002), <아라한 장풍대작전>(류승완, 2004)까지 지난 반세기 동안 다수의 액션영화에서 활약했다. (사진 4) <피도 눈물도 없이>(류승완, 2002)의 백골 역의 김영인과 불곰역의 백찬기 (사진 5) <아라한 장풍대작전>(류승완, 2004) 왽쪽부터 김영인, 김지영, 안성기, 윤주상, 백찬기 1940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한 그는 학창시절에는 권투를 비롯한 다양한 운동을 섭렵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특히 1960년대 유명한 권투선수들을 배출한 한국체육관에서는 꽤 높은 순번인 ‘27번’을 받아 아마추어 시합에도 출전할 정도였다. 이 때 익힌 권투와 유도, 가라테 등은 후일 본인의 액션 연기뿐만 아니라 액션 지도를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김영인의 구술은 본인이 출연하고 지도한 영화들의 액션 장면과 관련한 에피소드들을 세세하게 풀어놓는다. 그의 구술로 1960~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의 관습적인 장면이 어떤 배경으로 탄생했는지 알 수 있다. 죽고 싶지 않은 배우와 필름을 아끼고 싶은 감독 사이의 신경전으로 “‘으아아악!’ 하구 그냥 멫 바꾸 돌아가서 그런 척을 했다가 쓰러져 가주구선 그냥 죽어야 될 텐데 안 죽구 풀 있는 거 풀 다 뽑구선 일어났다가 죽었다”는 에피소드나 한겨울 촬영한 사극에서 “말이 뛰구 돌아야 하는데 대개! 횃불 있는 데 가서 다 죽어” 있는 에피소드는 당시 한국영화 제작현장의 열악함이 만들어낸 장르적 관습을 보여준다. (그림6) <어명>(강조원, 1967) 포스터 액션영화에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조직원들’의 반응 쇼트는 카메라를 한 번이라도 더 받기 위한 조·단역 배우들의 열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팔에 찬 단도를 보여주기 위해 괜스레 소매를 한 번 걷어 올린다거나 일부러 눈에 띄기 위해 우스꽝스럽게 보이더라도 양 손목에 시계를 찬다거나 단추라도 하나 더 달았다거나 하는 에피소드들은 그만큼 카메라 뒤에서 벌어지는 경쟁이 치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소품 전쟁”에서 180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은 구술자가 액션 영화에서 꾸준히 활약하는 데 자산이 되었다. 액션 연기와 지도에서 구술자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현장감과 타이밍 그리고 약속이다. 이를 바탕으로 아무리 작은 장면일지라도 실제 ‘싸움’에서 볼 수 있는 ‘몸짓’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액션 영화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과장이 필요하더라도 실전과 너무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액션 지도를 할 때 가장 강조한 것 중의 하나가 리허설을 통한 ‘약속’이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실록 김두한>의 박치기대장 성팔이의 액션과 <동백꽃 신사>의 클라이맥스 액션은 이러한 약속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실록 김두한>의 대미를 장식하는 종로 거리 액션은 안양촬영소에서 3일에 걸쳐 촬영했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중요한 장면이었다. 성산일출봉에서 촬영한 <동백꽃 신사>의 마지막 장면은 “틀림없이 죽어야 되는 장소”인 벼랑 끝에서 한 촬영이라 감독은커녕 카메라조차 대동하지 못했는데, 오히려 이러한 악조건 때문에 이대근과의 생동감 넘치는 일대일 액션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림7) <동백꽃 신사>(이혁수, 1979) 포스터 1960~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의 성장과 변화 1960년대 초중반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 정창화, 이만희 등을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스릴러와 만주물 등이 관객의 사랑을 받으며 한국 액션영화의 성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대형사극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사극영화의 군중신 등도 액션영화가 다양화되는 데 역할을 했다. 다양한 액션영화의 등장에 맞춰 액션연출도 시기별로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김영인의 출연작을 큰 줄기로 하여 액션연출과 액션연기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구술자가 한국영화 역사상 ‘거의 최초’의 스턴트맨으로 활약한 <5인의 해병>에서 주인공 5인의 액션연기는 지금 보면 단순한 움직임에 불과하지만 그 시기 전쟁 액션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기본적인 액션의 상황들을 보여주고 있다. 포탄 폭발, 전투 사격 등에 맞춰 몸을 좌우 혹은 상하로 움직여주는 연기들은 다양한 앵글로 표현되지 못한 탓에 액션의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군중 신의 경우도 롱 쇼트로 지나가는 경우가 많기에 그 규모를 세밀하게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날으는 배우’의 진면목은 여간해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시기 전쟁액션의 제작스타일을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불과 2년 후에 제작된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에서 이만희 감독과 서정민 촬영감독의 스타일로 완성된 화려한 전쟁액션과 비교해본다면 1960년대 초기의 액션의 규모가 가늠될 것이다. (그림8)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군중 액션 <어명>을 통해서는 1960년대 중후반 수입되기 시작한 홍콩 무협영화와 한국에는 수입될 수 없었지만 흥행이나 스타일면에서 아시아 각 전역의 영화에 영향을 끼친 <자토이치> 시리즈를 필두로 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들이 한국 액션영화에 미친 파급력을 추측해볼 수 있다. <어명>은 영화의 스타일 자체가 홍콩 무협영화와 일본 검객영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일본인 무술감독 나카하라 신(中原伸)의 영입은 이와 같은 스타일의 영향을 한국 액션영화에 녹여내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영인은 구술에서 나카하라 신이 연출한 액션 신을 언급하며 홍콩영화와 일본영화에서 활용하는 ‘검술액션 연기’를 “세밀한 동선을 기본으로 지도하는 무용과도 같았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의 구술을 통해 일본인 무술감독의 영입이 한국의 검객영화에서 액션을 좀 더 유려하게 연출하는 데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9) <방랑의 결투>(호금전, 1966) 신문광고 (그림 10) <자토이치> 포스터 (그림11, 12, 13) <어명>(강조원, 1967)에서 나카하라 신이 지도한 액션 장면 1960년대 후반 영화 <샹하이부르스>와 <사나이 삼대>를 통해서는 한국 현대물 액션영화에서 액션연출이 좀 더 세밀해지고 화려해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아마도 1960년대 <007> 시리즈와 마카로니 웨스턴 시리즈로 대표되는 서양 액션영화의 폭발적인 인기가 한국의 영화 관객과 한국 액션영화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대 후반 영화계에 새롭게 유입된 젊은 남성 배우들은 대규모 군중 신을 필수로 하는 현대물 액션과 무협 액션이 다수 제작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인력의 확대는 이전의 영화들과 비교해봤을 때 규모면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었으며, 액션 연출의 측면에서도 규모의 성장뿐만 아니라 좀 더 깊이 있고 화려한 액션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14, 15, 16, 17) <샹하이부르스>(김기덕, 1969) 액션 장면 (세번째 사진에서 왼쪽이 김영인) <김두한> 시리즈(김효천)는 이러한 액션연출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TV 연기자까지 인력의 풀을 확대한 이 영화는 제작 규모도 컸지만 다양한 배우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대규모 액션 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전의 영화들에서 군중 액션 신의 조연 연기자들이 단체로 명시되거나 인식될 뿐 각각의 캐릭터 액션은 힘들었던 것에 비해 이 영화는 급격하게 커진 액션 규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군상들의 캐릭터들을 창조해 액션의 특기를 하나씩 부여함으로써 ‘캐릭터 액션’을 만들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인 <실록 김두한>의 엄청난 흥행은 이러한 캐릭터 액션의 성공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었으며, 캐릭터의 성공적인 안착은 시리즈물이 연달아 성공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김두한> 시리즈의 성공은 1970년대 합작액션영화들과 함께 캐릭터를 기반으로 하는 시리즈 액션물이 유행하는 데 도화선이 되었다. 따라서 1970년대 후반 이후의 액션영화들이 이야기 중심보다는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시리즈 액션물 중심으로 번성한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실록 김두한>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이다. (사진 18, 19, 20, 21, 22)<실록 김두한>(김효천, 1974) 종로거리 액션. 마지막 사진의 가운데가 김영인 김영인 구술의 의미와 평가 상기한 것처럼 김영인의 구술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의 액션영화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와 더불어 그의 구술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학창시절 외국영화 관람의 경험이다. 1회라는 한정된 시간 때문에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짧은 시간 구술자가 예로 든 관람 환경과 예시로 든 영화는 흥미롭다. 학생 입장에서 개봉관은커녕 2번관도 가기 힘들어 3번관 이하의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했는데, 이 영화들은 주로 서부영화였으며, 데뷔 후 이 영화들의 액션을 많이 참조했다는 내용이 그것인데, 이러한 구술은 외국영화가 배우의 디테일한 연기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군중 신의 촬영 뒷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액션영화 촬영현장의 풍경이다. 액션영화의 특징 중 하나로 조직 대 조직의 대결을 들 수 있겠는데, 구술자는 장면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동시에 카메라에 띄기 위해 노력하는 조·단역 배우들의 모습들을 다양한 예시를 통해 재현한다. 소품과 미술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조·단역들의 경우 어떤 방식으로 극 중 인물을 표현했는지가 구술을 통해 자세하게 드러난다. 1960~1970년대 한국영화 환경의 특성상 한정된 배우 풀로 여러 장르를 생산해야하는 현실 안에서 동일한 배우들이 장르영화에 어떻게 적응하고, 표현해내는가를 지엽적이나마 살펴볼 수 있는 구술이라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1970년대 액션지도 방식이다. 구술자는 학창시절 권투와 가라테를 수련했고 영화계 입문 전 자칭 주먹 좀 쓰는 ‘개구쟁이’ 시절을 거쳤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의 싸움과 액션 연기의 차이를 구별하되, 연기에서 ‘리얼함’을 살리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액션 연기를 구성하고 지도했는지를 설명한다. 1대1 액션 장면, 현장에서의 소도구 이용 등의 구체적 예에서 구술자의 경험이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었는지 자세하게 드러난다. 말하자면 실전의 경험을 열악한 영화제작 환경에서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액션지도는 즉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감독과의 사전 협의 하에 액션 콘티를 작성할 만큼 면밀히 이루어졌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1) 이 부분은 『영화천국』Vol. 55에 실린 「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액션영화의 뒤편에서 뛰다」를 수정·보완했다.
2004년 | 컬쳐캡미디어 감독: 김호준 | 각본: 유순일 | 각색: 조중훈 김요석 | 제작: 최순식 | 촬영: 서정민 | 미술: 윤도환 | 음악: 히드라 CAST 박상민: 김래원 | 서보은: 문근영 | 보은 조부: 김인문 | 상민 부: 한진희 | 상민 모: 김혜옥 | 보은 부: 송기윤 | 보은 모: 선우은숙 | 혜원: 신세경 | 동구: 류덕환 2004년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은 무엇이었을까요? < 실미도 >( 강우석 , 2003)에 이은 두 번째 ‘천만 영화’ < 태극기 휘날리며 >( 강제규 , 2004)였습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1위였죠. 당시 충무로가 만들 수 있는, 아니 당시 충무로의 수준을 뛰어넘는 대단한 작품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2위는 어떤 영화였을까요? 놀랍게도 < 어린 신부 >였습니다. 비수기인 4월 초에 개봉한 이 영화는 전국 관객 315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권상우 를 스타덤에 올린 < 말죽거리 잔혹사 >( 유하 , 2004), 정우성 손예진 의 < 내 머리 속의 지우개 >( 이재한 , 2004),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 < 범죄의 재구성 >(2004), 류승완 감독의 액션 판타지 < 아라한 장풍 대작전 >(2004), 원빈 신하균 의 < 우리 형 >( 안권태 , 2004), 강동원 조한선 의 < 늑대의 유혹 >( 김태균 , 2004)... 이 모든 영화들을 <어린 신부>가 제쳤고, 당시 대한민국은 ‘국민 여동생’ 문근영 신드롬으로 들끓었습니다. <어린 신부>는 24살 대학생 상민과 16살 여고생 보은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보은의 할아버지는 꾀병을 부려, 죽기 전에 보은이 상민과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하죠. 그렇게 ‘어린 신부’는 탄생합니다. 촬영 공개는 바로 그 결혼식 신이었습니다. 촬영이 공개된 날은 2003년 12월 17일이었습니다. 청담동에 있는 어느 결혼식장이었는데요, 날씨가 엄청 추웠습니다. 배우들은 촬영이 없을 땐 추위를 막기 위해 두꺼운 옷을 입어야 했죠. \ 현장에서 짬이 날 때 전화 통화를 하는 문근영의 모습입니다. 당시 문근영은 실제로 극중 나이와 같은 16세였고, <어린 신부>의 리얼리티는 배우와 캐릭터의 연령대 일치에서 생겨난 셈입니다. 김래원도 캐릭터와 같은 연령대였고요. 문근영이 주로 부각되었지만, <어린 신부>가 성공할 수 있었던 토대엔 분명 김래원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있습니다. 당시 TV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로 승승장구 하던 김래원은 <어린 신부>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남자 주인공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게 되죠. 신부 입장을 기다리는 문근영의 모습입니다. 영화 속에서 하객들이 “예쁘다, 정말 예쁘다”라며 감탄하던 그 장면이죠. 당시 문근영은 TV에서 영화로 옮겨 오면서 < 장화, 홍련 >( 김지운 , 2003)으로 영화배우로서 자리를 굳히던 시절이죠. 그리고 <어린 신부>가 이어집니다. 사실 <장화, 홍련>의 수연과 <어린 신부>의 보은은, 극과 극의 감정을 필요로 하는 캐릭터죠. 1년 사이에 그 극단을 오가는 건 10대 중반의 배우에겐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문근영은…… 그 어려운 걸 해냅니다. 이 영화의 모든 사건은 바로 보은의 할아버지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인문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특유의 구수하면서도 정다운 연기가 이 영화에서도 관객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죠. 이 영화에서 양가 부모 캐릭터는, 주로 TV에서 활동하시는 중견 연기자들이 맡았습니다. 상민의 아버지는 한진희 씨, 어머니는 김혜옥 씨가 맡았습니다. 곧 있으면 신혼 여행을 떠날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충고를 하지만, 아들은 듣는 둥 마는 둥이네요. 보은의 엄마 역은 선우은숙 씨가 맡았습니다. 아직 어린 딸이 안쓰럽기만 한 표정입니다. 대신 상민의 엄마는 며느리가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어린 신부>는 김호준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일본에서 영화를 전공한 김 감독은 1990년대 초부터 충무로 연출부 생활을 했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 축제 >(1996), 이정국 감독의 < 편지 >(1997) 등을 거쳐 10여 년의 도제 시스템 끝에 자신의 첫 영화를 만들게 되었죠. 한편 카메라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서정민 촬영감독이 잡았습니다. 지난 번 < 몽정기 >( 정초신 , 20002) 포스팅 에서 자세히 설명 드렸던, 바로 그 분입니다. 촬영 당시 70세셨고, 2015년에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영화 속에서 결혼식은 보은의 수학여행 날에 치러집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보은의 결혼 사실을 모르죠. 단, ‘베프’인 혜원은 예외였는데요, 당시 14세였던 신세경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문근영보다 어린 유일한 배우? 당시 두 사람은 같은 소속사(나무 액터스)였는데요, 지금도 그곳에 함께 있네요. 상민의 선배인 지수 역은 김보경 이 맡았습니다. < 친구 >( 곽경택 , 2001)의 진숙 역으로 떠오른 그녀는 이 영화에 특별 출연을 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양가 부모가 딸과 아들을, 며느리와 사위를, 배웅합니다. 보은 아빠 역은 탤런트 송기윤 씨가 맡았습니다. 선우은숙 씨 옆에 보은의 동생 동구 역을 맡은 류덕환이 보이네요. 실제로는 문근영보다 한 살 많은 오빠지만 영화에선 동생으로 등장했습니다. 아담한 웨딩 카. 그리고 그 안의 신혼 부부입니다. 실제 촬영 때는 아니고 차 안에서 대기하는 모습입니다. 결혼식 신에 대해, 김래원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거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신”이라고 말합니다. 한편 문근영은 “어떤 마음으로 연기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편하게 촬영한 신”이라고 말합니다. 호기심 많은 성격인 보은이 ‘결혼 그 자체’만 생각하고 있다는 설정이었다고 하네요.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