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
- 감독
- 아리 애스터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토니 콜렛, 밀리 샤피로, 가브리엘 번, 알렉스 울프, 앤 다우드, 재커리 아서
최근 선댄스영화제가 발굴한 재주꾼 중 한 명은 알폰소 고메즈-레존이다. 두 번째 장편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로 2015년 선댄스 드라마 부문의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던 그는 NYU(뉴욕대)와 AFI(미국영화협회)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1990년대 초부터 영화 현장에 뛰어들었다. 세컨드 유니트 디렉터로, 혹은 프로덕션 어시스턴트로, 아니면 연출부의 일원으로 그가 ‘모셨던’ 감독들의 명단은, 혹시 이 사람에게 수집벽이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히 쟁쟁하다. 마틴 스코시즈,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노라 에프런, 시드니 루멧, 마이클 만…. 최근엔 벤 애플렉 감독의 < 아르고 >(2012) 세컨드 유닛을 이끌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건 2010년부터였다, 시작은 TV 시리즈였고 < 글리 >(2009~15)나 <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2011~ ) 등에 참여했다. 2014년엔 드디어 첫 장편영화 <일몰이 두려운 마을 The Town That Dreaded Sundown>을 내놓는다. 전형적인 슬래셔 호러 장르에 나름의 스타일과 플롯 비틀기를 가미했지만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하지만 두 번째 작품인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서 그는 환골탈태한다. 제시 앤드류스의 첫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장르적 전형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스토리텔링 방식과 비주얼을 결합한다는 점에서 <일몰이 두려운 마을>과 유사한 방식의 시도였다. 하지만 드라마의 깊이와 캐릭터의 매력은 전작과 비교할 수 없이 발전했다. 틴에이저 장르 안에서 이토록 유쾌하고 엉뚱하면서도 진지하게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작은 기적이다. 제목이 말하듯 이 영화는 ‘나’인 그렉(토머스 만)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하이스쿨 졸업반이 된 그렉. 그는 8년째 투명인간처럼 학교 생활을 해온, 거의 모든 성향의 집단들과 어울릴 수 있는, 좋게 말하면 친화력 좋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 색깔 없는 ‘왕따’나 마찬가지인 십대다. 유일한 친구는 얼(알제이 사일러)이다. 유치원 때부터 함께 어울린 둘의 공통점은 고전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 그들은 단순한 마니아를 넘어, 영화사를 아로새긴 걸작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리메이크(라기보다는 패러디)한다. 역사 교사 매커시(존 번탈)의 방에서 빈둥대거나 영화 찍는 것 말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하지만 ‘죽어가는 소녀’ 레이첼(올리비아 쿡)과 만나면서 그들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할리우드 틴에이저 무비는 겉으로는 얄팍해 보이지만 의외로 성찰적인 장르다. 십 대들의 불안한 삶은 지향점을 알 수 없는 저항으로 치닫고,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에 빠지고, 세상의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고, 때론 힘겨운 운명의 짐을 지기도 한다. 학교와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친구, 연인, 교사, 부모 등의 한정된 캐릭터로 이뤄지지만, 이 제약적인 토대 위에서도 틴에이저 무비는 매우 풍성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도 마찬가지다. 전반부가 제법 발랄한 톤의 루저 코미디를 통해 십 대들의 냉소적 불안감을 담아낸다면, 후반부로 가면서 영화는 어른스럽고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가면, ‘쿨’하게 시작해 점점 온도를 올렸던 영화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이런 드라마의 힘은 ‘죽어가는 소녀’ 레이첼과 ‘나’ 그렉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하이스쿨 시절을 마감하고 대학으로 가는 관문인 졸업반 시기. 레이첼은 백혈병에 걸려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렉은 그 어떤 꿈도 없다. 같은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불운한 우정’이 시작된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레이첼의 백혈병이다. 그렉은 “가서 친구가 되어 주라”는 엄마(코니 브리튼)의 말에 못 이겨 레이첼의 집에 갔고, 어색하게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어느덧 졸업반 내내 이어진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렉은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고, 레이첼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더욱 절박한 상황에 처한 레이첼이 그렉의 삶을 채찍질하고 이끈다는 점이다. 레이첼은 그렉 대신 대학 입학처에 편지를 보내고 그를 격려한다. 하지만 그렉은 오히려 레이첼의 호의와 헌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그렉은 조금씩 껍질을 깨나가며 삶의 이치를 깨닫는다. 이러한 성장 영화의 측면이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의 진지한 얼굴이라면, ‘나’ 그렉과 ‘친구’ 얼이 만들어낸 수많은 영화들의 목록은 시네필들이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다. 이 영화엔 수많은 영화들이 언급된다. 그렉과 얼은 역사 선생 방에서 컴퓨터로 베르너 헤어조크의 < 피츠카랄도 >(1982)에 대한 메이킹 다큐멘터리인 < 버든 오브 드림스 >(1982)를 본다. 그렉의 아버지(닉 오퍼맨)도 헤어조크의 팬으로 < 아귀레 신의 분노 >(1982)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렉의 방엔 프랑소와 트뤼포의 < 400번의 구타 >(1959) 포스터가 붙어 있으며, 그는 실의에 빠졌을 때 이 영화를 보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렉이 얼과 함께 만드는 영화들의 제목들 역시 가관이다. 잉마르 베리만의 < 제7의 봉인 The Seventh Seal >(1957)에서 모티브를 얻은 <일곱 마리 물개 The Seven Seals>에선 기사와 죽음의 사자가 황당한 체스를 둔다(‘seal’엔 봉인과 물개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마이클 파웰의 ‘엿보기’에 대한 범죄 영화 < 저주의 카메라 Peeping Tom >(1960)는 <똥싸는 톰 Pooping Tom>으로 바뀌었는데, 주인공은 뚫어뻥의 공격을 받는다. 이외에도 스탠리 큐브릭의 < 시계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 >(1971)가 <양말장치 오렌지 A Sockwork Orange>가 되고, 데이비드 린치의 < 블루 벨벳 Blue Velvet >(1986)이 <원숭이 맥주 Brew Vervet>가 되고, 루키노 비스콘티의 < 베니스에서의 죽음 Death in Venice >(1971)이 <테니스장에서의 죽음 Death in Tennis>이 된다. 과거 8mm 시대 영화광을 연상시키는 그렉과 얼의 이러한 ‘영화 장난’들은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 독특한 결을 부여한다. 전작인 <일몰이 두려운 마을>에서도 ‘영화 속 영화’의 컨셉트로 연쇄살인극을 구성했던 고메즈-레존 감독은 두 번째 영화에선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의 영화 유희적 본성을 드러내며, 그 기발함과 유머는 자칫하면 느슨해질 수 있는 루저 스타일 틴에이저 무비를 활기 찬 소동극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영화 만들기’라는 행위는 결코 영화의 양념이 아니라, 가장 결정적 순간을 위한 토대가 된다. 그렉과 얼은 태어나 처음으로, 기존에 있는 영화를 비트는 것이 아닌 순수한 창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바로 레이첼을 위한 영화다. 그러나 ‘진짜 영화’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야심은 곧 난항을 겪고, 결국 얼이 그만 둔 상태에서 그렉 혼자 영화를 완성한다. 병원에 있는 레이첼과 그렉이 그 영화를 함께 보는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데… 여기서 말을 아껴야 할 것 같지만, 아무튼 이 장면이 환기시키는 감정의 진폭은 상상 이상이다.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는 현재 할리우드 틴에이저 장르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이며 자유로운 작품이다. 관객과 대화하듯 진행되는 내레이션, 별나면서도 진정성 있는 캐릭터, 묵직한 드라마와 코미디를 자연스레 결합하는 솜씨 등 이 영화는 많은 영화적 미덕을 지녔다. 그러면서 영화는 어느새 ‘삶과 죽음’에 대해, 아니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묻는다. 피상적으로 “우리에겐 꿈과 희망이 있잖아?”라며 대충 얼버무리며 끝나는 청춘 영화와 비교하면 이 영화의 메시지는 훨씬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 사족 하나. 이 영화의 위트 넘치는 카메라 워크가 궁금해 크레디트를 유심히 살펴봤다면, 우린 의외의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Cinematography by Chung-hoon Chung’. 맞다. 이 영화의 촬영감독은 바로 한국의 정정훈이다. 박찬욱 감독과 < 올드보이 >(2003)부터 호흡을 맞추었고, < 스토커 >(2013)로 함께 할리우드에 진출한 정정훈 촬영감독은 미국에서 솜씨를 인정받았고, 로빈 윌리엄스의 유작인 < 블러바드 >(2014)에서 우울하고 정적인 촬영을 선보이더니 세 번째 할리우드 영화 <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에선 마치 날개를 단 듯 역동적이며 재미있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가 만들어낸 비주얼들 역시, 이 영화를 꼭 ‘봐야’하는 이유 중 하나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의 집’은 단순히 놀이로만 규정하기엔 지극히 연구대상이다. 장난감 인형 하나의 문제 같지만 이 ‘놀이’에는 꽤 복잡하고 정교한 세계가 구현된다. 대게 소유주인 아이를 중심으로 일종의 역할극이 완성되는데, 인형이 기거할 집안에는 가재도구가 즐비하며 남녀로 구성된 부모와 (대게 말 안 듣는) 아이들이 있다. 아이가 경험한 실제 세계에 따라 인형의 집은 가정을 넘어 학교, 상점으로 확장되며 가재도구의 수준도 달라진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자면 ‘놀이’처럼 규정되지만 인형의 집 놀이는 절대 놀이로 끝나지 않는다. 성장의 단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나이에 맞는, 자신의 이상을 투영한 ‘인형의 집’을 필요로 한다. 첫 장면을 웨스 앤더슨 방식의 정갈한 인형의 집으로 시작한 < 문라이즈 킹덤 >은 이제 소녀를 어린 동생들과 다르게 만드는, 캠핑으로 안내한다. 좋아하는 소년과 함께하는 일탈에, 소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챙겨 넣은 가방을 챙겨 들고 나간다. 텐트는 이제 소녀의 세계를 완성할 다음 단계의 ‘인형의 집’으로 자리한다. 조던 복트-로버츠Jordan Vogt-Roberts 감독의 코믹 드라마 < 킹 오브 썸머 The Kings of Summer >(2013)는 < 문라이즈 킹덤 >과 같이 자기만의 영역을 갈구하는 사춘기 소년들의 이상이 투영된 일종의 ‘인형의 집’ 놀이다. 영화의 또 다른 제목으로 알려진 ‘Toy’s House’로 설명하면 조금 더 그들이 목적하는 바가 뚜렷해진다. 사춘기에 접어든 열다섯 살 소년 조(닉 로빈슨)는 간섭이 심한 아빠를 피해 집을 나갈 궁리를 한다. 숲 속에 어른들이 모르는 집을 짓기로 결심한 그는 절친한 친구인 패트릭(가브리엘 바쏘)을 설득한다. 위험천만한 이 도전에 흥미를 느낀 친구 비아지오(모이세스 아리아스)가 가세하면서 이들 도주 멤버가 완성된다. 조의 집짓기 프로젝트는 학교에 있는 비밀 공간을 아지트로 삼는 것과는 스케일부터 다르다. 그들이 발견한 숲은 도심과는 한참 떨어져 있어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있는 완벽한 도피의 공간이며, 통나무집 설계도는 실제 집의 구조를 연구해 차근차근 그럴듯하게 만들어진다. 건축의 재료 역시 여기저기서 주워온 재활용이긴 하지만 통나무집의 재료로 하등 손색이 없는 것들이다. 그렇게 완성된 집의 모양새도 나쁘지 않다. ‘전원라이프’같은 이름을 가진 잡지 커버로 소개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통나무집 조와 친구들에게 통나무집이 주는 자유의 크기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 통나무집에서의 아침, 찬란한 햇빛에 눈을 뜬 패트릭에게 조는 말한다. “숲에는 시간이 없어.” 숲의 생활은 규칙, 규율, 복종, 명령이 존재하는 바깥세상과 다르게 돌아가는 이상향, 유토피아다. 조에게는 ‘욕실에서 마스터베이션하는 것’을 부끄럼 없이 지적하고, 여자 친구와 전화 통화에도 물색없이 끼어드는 창피한 아빠로부터의 도피를 뜻하며, 패트릭에게는 ‘햄버거 먹은 뒤에 감자튀김 먹는’ 것도 ‘주머니 없는 파란 셔츠’를 입었다고 사사건건 지적하는 아빠와 알레르기가 생길 정도로 귀찮게 질문을 퍼붓는 엄마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저 괴짜처럼 보이지만 ‘나한테는 성별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비아지오에게도 사회로부터 자체적으로 격리된 이 공간이 이상적으로 다가오는 건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집을 나간 후 경찰서에 신고하러 간 부모들은 ‘납치범의 소행’임을 확신한다. 하지만 어른들이 보기에는 “가출할 이유가 전혀 없는” 당신의 아이들이 집을 나갈 이유는 족히 100가지도 넘는다. 사춘기는 그런 나이다. < 킹 오브 썸머 >에는 1950년대 미국, 약자인 여성들을 억압하던 제도에 맞선 소녀들의 일탈을 그린 로랑 캉테의 < 폭스파이어 >(2012)를 연상하게 만드는 지점들이 많다. 소녀들은 세상을 향한 복수를 꿈꾸며 자신들만의 비밀동맹을 맺고 함께 살 공간도 마련한다. 하지만 애초 가졌던 동맹의 순수성과 달리 남성과 권력, 자본이라는 사회에 맞서 복수를 하는 과정에는 점차 과격한 행동과 범죄가 수반된다. 소녀들은 이로 인한 내부의 분열을 감당할 해결책을 결국 찾지 못하며 그들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어른의 통제를 벗어난 4주간 감행된 숲에서의 생활, <폭스파이어>의 소녀들이 꿈꾸던 거창한 전복에서 오는 실패와는 강도를 달리하지만 <킹 오브 썸머>의 소년들의 생활에도 점점 고통이 뒤따르기 시작한다. 조는 패트릭에게 닭고기를 자급자족했다고 하지만, 실은 식료품점에서 구입해 와서 갈등이 깊어진다. 통나무집에 기거하는 근본취지에 대한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사춘기 이성 간의 꼬인 관계를 푸는 것도 쉽지 않다. 조가 좋아하던 소녀는 실은 자신이 아닌 패트릭에게 마음이 있었다. 상처받은 조의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공고했던 그들의 우정에 금이 가고 즐거웠던 공동체 생활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숲이라는 대안을 찾기 전, 조가 먼저 독립해 집을 나간 누나에게 자신도 아빠에게서 벗어나게 제발 데려가 달라고, 집을 나가게 해달라고 조르는 장면이 있다. 그때 누나는 “2년만 지나면 아빠가 널 못 보내서 안달일 걸”이라며 그를 설득한다. 조와 친구들이 그토록 절실히 열망했던 도피의 시간은 그 반항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신기루 같은 것일 수 있다. 소년들에게 결코 짧지 않은 4주간의 여름. 그들은 아무런 고통이 없는 무균실 같은 도피처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소년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반목했던 어른들과 화해하며, 그렇게 각자의 성장하는 시간이 지나간다. < 킹 오브 썸머 >(위), < 스탠 바이 미 >(아래) < 킹 오브 썸머 >는 지금 시대로서는 좀 유별난 형태의 고전적 성장담이다. 조는 ‘말 안들을 거면 내 집에서 나가’라며 소유권을 주장하는 아버지의 독단에서 벗어나 ‘삐뚤어질 때로 삐뚤어지겠다’고 마음먹지만, 의외로 자연의 공간인 숲으로 발길을 돌린다. 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도심으로 가 악행을 저지른다거나 익명의 공간인 SNS로 숨어들어 분노를 표출하는 요즘 아이들의 해소 방식과 비교해보자면 풋풋하기 그지없는 선택이다. 아무리 봐도 이 정도면 사뭇 건전한 비행이다. 이 영화의 숲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컴컴하고 무시무시한 공포영화의 배경과는 달리, 시종 햇살이 비치는 밝고 명랑한 숲이다. 잔뜩 기대를 품고 숲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는 조, 여름 한낮을 숲에서 낚시하고 뛰어노는 소년들의 모습, 모닥불이 타오르는 정경, 숲 속의 동식물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몽타주 장면들이 주는 감흥은 마치 집나간 아이들의 성장담을 그린 지난 세대의 걸작 < 스탠 바이 미 >(1986)의 소년들의 모습과 포갠 듯 겹쳐진다. 특히 배경이 된 오하이오 주의 숲과 어우러진 오리지널 스코어는 심각하지 않은 소년들의 일탈을 완성해주는 훌륭한 재료다. <쥬라기 월드>의 테마파크에 발을 들인 자크 역으로 알려진 닉 로빈슨이 조 역할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는데, ‘미소년’의 모습이 가장 빛을 발하는 시기의 포착인지라 보는 순간 빠져들 각오를 해도 좋다. 2013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상영해 호평을 받은 작품으로, 호수로 뛰어드는 아이들의 순간을 캡처한 포스터의 이미지가 이 영화로 들어갈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정확한 규칙이 오히려 익숙하고 편해진, 일탈이 딱 싫은 어른의 나이를 지금 통과하는 중이라면,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 나만의 룰을 원했던 그 시절의 열망을 떠올리게 하는 이 소소한 감상의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엄태화 , 엄태구 형제의 < 잉투기 >를 보는 내내, 엉뚱하게도 미국영화 < 브릭 >이 떠올랐다. 이제는 스타 배우이자 감독이 된 조셉 고든 레빗이 고등학교 내 살인과 마약과 범죄를 해결하는 ‘고딩’을 연기했던 <브릭>은 그해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로저 에버트에게 “고전 미스터리 탐정물의 자세를 현대적인 캘리포니아의 한 고등학교로 완벽하게 바꾸어놓았다”는 인상적인 평을 받은 바 있다. 뜬금없이, 2008년 개봉한 청춘 필름누아르 영화의 기억을 길어 올린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 브릭 >은 저예산에 20일이란 짧은 촬영 기간 동안 젊은 배우들을 데리고 신인 감독(이후 조셉 고든 레빗과 < 루퍼 >를 함께 만든 라이언 존슨)의 아이디어와 연출력, 그리고 7년을 준비했다는 시나리오로 승부해 ‘작품’을 만들어낸 케이스다. 개인적으로 <브릭>이 뇌리에 각인된 이후 종종 리얼리즘과 작가주의에 과하게 경도되는 우리 독립영화들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는 언제 이같이 (단순비교는 힘들지만) 저예산임에도 장르성을 경유하는 동시에 단단한 이야기와 캐릭터, 개성을 갖춘 튀는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바람과 근심을 지녀왔었다. 그러기를 수년째, 드디어 < 잉투기 >가 왔다. ‘잉여’ 담론이 흥했던 2013년을 관통한 <잉투기>에서 < 브릭 >의 그 활력과 생동감을 맛본 것은 실로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영자로 대변되는 파닥파닥 살아 숨 쉬는 캐릭터, 피해자인 칡콩팥 ‘태식’이 미스터리한 가해자 ‘젖존슨’의 실체를 파악해 나가는 내러티브 구조, 10대부터 30대까지라면 꽤나 널리 공감할 ‘갤러리’, ‘현피’, ‘먹방’ 등 인터넷 ‘루저’ 문화에 관한 생생한 묘사, 그리고 태식과 희준으로 대변되는 하릴없이 부유하지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청춘’들에 대한 복잡미묘한 시선까지. 특히나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지질할 수밖에 없는 ‘잉여’들을 극의 중심에 끌어들이는 것 자체로 (20대들의 박탈감이나 ‘일베’의 일면을 연상시키는)동시대성을 획득하는 한편 위로와 관조, 냉소를 넘나드는 거리 두기에도 성공한다는 점에서, 엄태화 감독의 연출력은 장편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 브릭 >이 필름누아르 안에 청춘과 성장 기운을 녹여내는 기성품으로서의 활력이 도드라진다면, < 잉투기 >는 성장영화의 내러티브를 지속적으로 비틀면서도 탈주까지는 시도하지 않는 묘한 활력을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간다. 전형적이고 획일적인 장르성은 거부하지만 동시대 영화관객들과의 친밀도는 계속 높여나갈 수 있을 만큼의 영화적인 전형성과 보편성은 획득해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자의 반 타의 반 방임과 자학과 인정욕구를 넘나드는 이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드는 공력이 실로 놀라웠다. 엄태화 감독은 레퍼런스로 < 400번의 구타 >와 < 허공에의 질주 >, <바보들의 행진> 등을 꼽았다고 한다. < 잉투기 >의 요소요소를 되새기게 하는 리스트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잉투기>에는 분명 저 작품들 모두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젊은이의 고민들이 2013년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얼굴에 가로 새겨져 있다. 데뷔작에서 확인시켜 준 동시대성과 활력이라면, 엄태화 감독은 청춘의 이야기를 넘어 어떤 장르든 제식대로 요리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부디, 묵직한 듯 싱싱하고 반골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차기작으로 이내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