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인
- 감독
- 마이클 제이 화이트
- 제작년도
- 1996
제임스 베닝이라는 이름은 < 브레스리스 >(2023)를 관람하기로 결심한 이유인 동시에 관람을 망설인 이유였다. 장 뤽 고다르의 데뷔작 < 네 멋대로 해라 >(1959)의 영어 제목에서 따온 ‘브레스리스’라는 제목은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그저 영화의 한 부분을 뭉텅 던져 놓은 듯한 예고편은 불길한 예감이 들게 했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관람을 포기한 뒤, 그런 자신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날은 그래도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산을 가로지른 도로를 비추는 고정숏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화면 좌우로는 우거진 숲이 있고, 그 사이로 난 도로 오른편 갓길에는 ‘공사 중’이라 적힌 주황색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원경에는 인부들이 리프트가 설치된 차를 이용해 가지치기 작업을 하는 중이다.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소음을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당장 검색하면 볼 수 있는 스틸 이미지의 창백한 풍경이 끝을 알 수 없는 롱테이크로 지속된다. 처음 얼마간은 숏이 바뀌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숏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누군가가 극장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을 상상했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극장에 듬성듬성 자리한 사람들은 마치 이러리란 걸 예상했다는 듯 고요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수많은 잡념이 스쳤다. 왜 영화관에서 공사 소음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프로그래머는 무슨 생각으로 이 영화를 틀었을까, 나의 추천으로 함께 보게 된 옆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등등. 더러는 영화와 관련된 생각도 있었지만, 대부분 비평의 제재로 삼기에 곤란한, 사소하거나 엉뚱한 공상이었다. 과소한 시각적 정보는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를 과장했기에, 공사 소음을 부러지는 나뭇가지가 내는 비명이라고 상상하며 견뎌보기도 했다. 인부들의 노동을 보며, 언젠가는 AI로 대체될 성질의 노동일까 하는 질문도 스쳤다. 그러다가 눈앞에 있는 아무것도 아닌 풍경을 외우듯이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내가 똑같은 장면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고 해서 이 장면을 사진을 찍는 것처럼 기억할 수 있을까 자문했다. 그럴 순 없었다. 그렇다면 이보다 빠른 속도로 지나가게 마련인 대부분의 영화에서 놓치는 장면은 훨씬 많을 것이다. 누군가의 말과 글 속에서 나의 망각을 확인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그렇다면 영화를 본다는 건 기억하는 행위보다 망각하는 행위에 가깝다. 영화를 잘 본다는 건 무엇을 망각하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감각적으로 구분한다는 뜻일 거다. 영화는 내가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함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주지 않은 영화를 읽어내려는 욕망이 과도해진 나머지, 어느 순간 매직아이처럼 영화가 동영상이 아니라 스틸 이미지가 아닌지 의심이 피어올랐다. 재생된 소리가 움직임의 착각을 불러올 수 있는 상황에서 동영상임을 보증하는 것은 이미지 내부의 움직임뿐이다. 가깝거나 멀어진 그림자의 위치 변화, 이따금 움직이는 새의 존재, 이파리의 작은 흔들림 같은 세부를 확인하며 이미지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했다. 스틸 이미지라는 추정이 단순한 착각에 불과했다 해도, 영상이 스틸 이미지에 준하는 상태로 회귀 중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지되기를 희구하는 움직임은 고전적 사진 촬영 방식을 연상시킨다. 초기 사진 촬영술에서 사진에 포착될 수 있는 대상은 오랫동안 한자리에 정지한 것들뿐이다. 그처럼 영화도 최후의 풍경이 카메라 내부에 저장되길 기다리는 중이다. 감독 제임스 베닝의 다른 작품 속 풍경 (상2) < 미국 >(2021) / (하2) < 알렌스워스 >(2022)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촬영이 곧 편집인 <브레스리스>는 실시간으로 촬영되는 순간에 배석한 느낌이 들게 한다. 시차는 있겠지만, 카메라 뒤의 존재는 나와 같은 풍경을 보고 있다. 그런데 과연 카메라 뒤에는 감독이 있을까. 인부들 외에는 인적이 드문 장소이기에 카메라를 세워놓고 자리를 이탈해도 무방하며, 오히려 그편이 효율적이다. 만약 카메라 뒤에 감독이 있다면 그는 대체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몇 가지 단서로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촬영 장소는 거의 차들만 지나다니는 곳이기 때문에 감독이 차를 가지고 지나가다가 출입을 통제하는 푯말을 보고 멈추어 서서 촬영을 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 경우 푯말을 회수하고 통제가 해제되었을 즈음 영화는 끝난다. 하지만 도로 통제가 해제된 뒤에도 카메라는 계속 그 자리에 남아있다. 만약 카메라를 세워둔 채 감독이 사라진 것이라면, 카메라를 방치한 감독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누군가가 카메라를 강탈해 도망가거나 예기치 않게 종료되는 순간? 만약 그런 순간이 담겼다면 고다르의 <브레스리스>를 급진적으로 다시 쓰는 영화가 되었을지 모른다.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추정은 감독이 물리적인 제한에 의해 일시적으로 도래한 끝을, 진짜 끝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통제되었기에 갈 수 없었지만, 이제는 너무 오래 기다린 나머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잊어버린 상태로서의 정지된 카메라. 시작되지 않았기에 끝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던 영화의 끝은 의외로 싱거웠다. 감독은 고다르의 테마를 연상시키는 짧은 멜로디와 함께 영화를 간단히 끝내버린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끝까지 기다림의 보상을 마련하지 않은 영화가 준 조용한 충격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거의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영화가 수많은 생각을 촉발하며, 영화를 보는 동안 내 머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투명하게 인식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영화는 기다림 없는 기다림을 보여주면서 영화를 찍는 행위와 감상하는 행위가 기다림의 본질로 서로 이어져 있음을 인식하게 했다.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우연이 포착되는 순간. 감독의 의도가 드러나는 순간, 배우가 등장하는 순간. 눈물이 흐르는 순간,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마음이 일렁이는 순간, 화가 나는 순간. 놀라거나 감탄하는 순간, 어쩌면 이 순간을 기다려왔음을 영화가 노출하고 내가 감지하는 순간. 영화가 끝나는 순간, 혹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을 순간. 올해 내 마음에 들어온 영화는 대부분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기다림 자체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당신은 올해 어떤 영화와 함께 무엇을 기다렸나. 영화와 그 너머의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게 되는 시간이다. 김소희(영화평론가) l 영화 비평 쓰는 사람. 영화 글쓰기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실험 중. 2015년 씨네21 영화평론상 당선 이후 영화평론가로 활동.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영화의 이론에 관한 교과서를 읽으면서 모두 알고 있지만, 누구나 의문을 품고 있는 개념들이 있다. 그래서 이 개념은 지식에서 멈추고 영화를 만들면서 외면하는 이론들이 있다. 나는 영화사의 순간들을 뒤져나가면서 차례로 질문을 던져볼 생각이다. 이제 영화사의 순간들이 이론의 입구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그 첫 번째 질문을 쿨레쇼프 효과 (Kuleshov effect), 라고 부르는 개념에 던져보겠다. 이 효과는 편집의 기술, 혹은 효과, 또는 개념에 속하지만 이 효과가 정말 문법적으로 성립하나요, 라는 질문을 견뎌야 하는 현장에서 연출에 관한 실용적인 관점으로 다시 질문하면 누구라도 대답을 망설인다. 먼저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복습하는 기분으로 읽어 주기 바란다. 먼저 어떤 연기도 하지 말고 아무 표정도 짓지 않은 배우의 얼굴을 찍는다. 그런 다음 이 쇼트를 동일한 세 개의 카피본으로 만든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 카피본을 A라고 부르겠다. 그런 다음 빵을 찍은 쇼트를 1, 칼을 찍은 쇼트를 2, 어린 아기를 찍은 쇼트를 3, 이라고 부르겠다. 이제 1 + A를 하면 A의 쇼트에서 배우의 얼굴에 배고픔을 보게 되고, 2 + A를 하면 A 쇼트의 배우 얼굴에서 두려움을, 그리고 3 + A를 하면 A 쇼트 배우 얼굴에서 자애로움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의 이론적 근거는 변증법적 종합화에 따른 세 가지 특징, 모든 것은 상호작용 법칙에 따라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서로 다른 대립물 사이에서 변화하며, 모든 것은 질적으로 변화한다, 는 도그마에 따른 것이다. 물론 헤겔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한 적이 없으며, 마르크스는 그렇게 도식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으며, 레닌은 그렇게 교시를 내린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실험은 볼셰비키 1917년 11월 혁명이 성공으로 끝나고 급하게 유물변증법을 공부한 다음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먼저 생각해 주기 바란다. 레프 블라디미로비치 쿨레쇼프는 이미 1918년경에 이와 유사한 실험을 했다. 이 ‘아이디어’를 처음 끌어낸 것은 쿨레쇼프가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의 < 국가의 탄생 >(데이비드 W. 그리피스, 1915)을 보고 난 다음이다. 그런 다음 변증법에 근거하여 정식화시켰다. 그는 영화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이 효과를 빌려 연극과 분리해내서 당대의 배우이자 연극연출가였던 스타니슬랍스키의 ‘메소드 액팅’을 영화에서 부정하였다. 이 실험을 하면서 배우 이반 모주힌을 ‘모델’로 사용하였다. 쿨레쇼프는 다른 실험도 했다. 전혀 다른 장소에서 찍은 거리의 쇼트들을 방향을 맞추어서 연달아 편집하면 영화에서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을 ‘창조적 지리학’이라고 불렀으며, 포괄적 의미에서 이 편집 방법을 ‘쿨레쇼프 효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 방법은 텔레비전 방송국 드라마, 혹은 외부 촬영과 스튜디오 촬영을 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외부 장소 촬영에서 스튜디오로 이동할 때 정말 동일한 장소로 ‘속는지’, 아니면 만드는 쪽과 보는 쪽이 서로 양해하면서 마치 협상하듯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논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수많은 트릭 촬영 기술들과 토키 영화 이후 사운드 브릿지 기술이 발명되었다)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데이비드 W. 그리피스, 1915) 중 1920년 5월 1일 레프 쿨레쇼프는 국립영화학교 VGIK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이 실험을 교실에서 소개했으며, 제자들은 이 실험을 바탕으로 각자의 몽타주 이론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 교실에는 프세볼로트 푸도프킨, 보리스 바르네, 미하일 롬, 세르게이 코마로프, 블라디미르 포겔도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쿨레쇼프 효과의 설명 과정은 푸도프킨이 자신의 강의에서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푸도프킨은 이 효과의 발명자가 자신의 스승 쿨레쇼프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쿨레쇼프 효과는 국경을 넘어서서 영화문법에서 하나의 교리가 되었다. 그중에서 쿨레쇼프 효과를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은 알프레드 히치콕이었다. 그는 트뤼포와 긴 인터뷰를 하면서 < 이창 >(알프레드 히치콕, 1954)에서 제임스 스튜어트의 얼굴과 그가 훔쳐보는 맞은편 아파트 창문 너머의 풍경을 쿨레쇼프 효과에 의지해서 어떻게 연결 시켰는지 설명했다. 푸도프킨의 설명과 디테일에서 다소 다르지만 그건 요점이 아니다. 히치콕은 1964년에 한 번 더 쿨레쇼프 효과를 다소 다르게 설명했다. 먼저 자신의 두 개의 얼굴, 하나는 무언가 못마땅한 얼굴을 A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인 미소 짓는 얼굴을 B라고 부르겠다. 그런 다음 A와 B 사이에 한 번은 공원에 젊은 여자가 어린 아기와 함께 있는 장면 1을, 다른 한 번은 같은 공원 같은 자리에 같은 여자가 비키니를 입고 일광욕을 하는 장면 2를 끼워 넣었다. 그러면 A – 1 – B에서 B의 히치콕의 미소는 자애로운 신사로 보이지만 A – 2 – B에서 동일한 B의 히치콕의 쇼트에서 관객은 음흉한 노인의 미소를 본다는 것이다. 히치콕은 이 효과를 “순수하게 영화적인 것(pure cinematics)”이라고 불렀다. 히치콕이 종종 배우를 가축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을 때 이 과격한 결론은 여기서 온 것처럼 보인다. <이창(Rear Window)>(알프레드 히치콕, 1954) 중 히치콕이 설명한 쿨레쇼프 효과 하지만 많은 영화감독, 교실의 학자들, 그리고 비평가들은 쿨레쇼프 효과가 정말 스크린에서 벌어지는지에 대해서 의심하였다. 1992년에 이르러 행동 심리학자가 조사방법론에 참여한 실험이 행해졌다. 스티븐 프린스와 웨인 E. 헨슬리는 137명의 실험 대상자를 상대로 쿨레쇼프 효과에 관해 설문지를 나눠주고 실행해보았다. 결과적으로 이 효과에 대해서 신뢰할 수 없다는 답을 얻었다. 하지만 이 실험은 단 한 번 이루어졌으며, 게다가 데이터 처리방식에서 문제가 있다는 이의 제기를 받게 되었다. 2006년 딘 몹스가 주도하는 실험이 다시 실행되었다. 이번에는 슬픈 장면 다음에 아무 표정도 없는 배우의 얼굴에서 실험 대상자들은 슬픔을 보았고, 기쁜 장면 다음에 동일한 배우의 얼굴에서 기쁨을 보았다. 2016년에 다니엘 배러티는 좀 더 복잡하게 실험 상황을 설계하였다. 행복한 장면, 슬픈 장면, 배고픈 장면, 무서운 장면, 성적인 장면에 역시 아무 표정이 없는 동일한 배우의 얼굴을 차례로 연결시켰다. 그 결과 실험 대상자들은 쿨레쇼프 효과가 설명한 방식으로 반응하였다. 여기까지 읽은 다음 아, 쿨레쇼프 효과는 증명되었군, 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내가 쿨레쇼프 효과를 영화에서 보면서 매번 마주치는 것은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게 다른 영화의 다른 장면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쿨레쇼프 효과를 믿는다. 하지만 항상 믿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질문을 실험에 맡기는 대신 매번 서로 다른 영화의 서로 다른 장면에 질문해야 할 것이다. 쿨레쇼프 효과는 분명히 존재하는 영화의 마법이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 (2003) 인터뷰 진행,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2010) , 『 필사의 탐독 』 (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스왈로우> ≠ 스릴러 영화? 의외로, 사람들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것은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이미지가 아니라, 내 몸속에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이 있어 어딘가에서 피가 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일지도 모른다. 매년 여름, 호러 영화만 모아 상영하는 CGV의 ‘CAV(Cinema Adult Vacation) 기획전’에서 주목을 받은 작품은 카를로 미라벨라 데이비스 감독의 <스왈로우>였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은 영화의 비주얼적인 공포가 부족하다며 기대 이하라는 평가를 내렸다. 심지어는, 후반부로 갈수록 몰입도가 떨어진다며, 긴장감을 스릴러의 핵심 요소라고 판단한 관객들은 <스왈로우>를 스릴러 영화로 인정하지 않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스릴러 영화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스왈로우>는 ‘싸이코 스릴러(psycho thriller)’인 셈이다. 나를 박제한 송곳을 삼켜 버리다 모든 공포의 요소는 헌터의 히스테릭한 정신 상태에서 시작된다. 헌터는 부잣집 남편과 결혼한 이후로는 호화로운 집에만 박혀 있는다. 남편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예쁘게 화장도 하고, 인형 같은 옷을 입고, 새로운 집에 커튼은 어떤 것을 놓아야 할지 고민을 하지만 남편은 헌터의 모습에 시큰둥한 모습을 보이고 자신의 옷을 잘못 관리해 망가트린 것에 욱해 소리를 지르는 모습도 보인다. 무엇을 해도 자신은 이 집의 부속품에 불과한 느낌이 들고, 자신은 곧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그에겐 이 모든 것을 하소연할 가족도 없다. 헌터가 결혼을 할 때도, 아이를 가졌을 때도 그 큰 경사를 자신의 가족과 나누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헌터의 가정 환경에 대한 단서는 시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대충 알 수가 있다. 자신을 따뜻하게 대하다가도, 마치 자신의 아들을 만난 뒤로 팔자가 싹 폈다는 듯 흘리는 말은 헌터를 불안하게 한다. 모든 게 자연스럽고 완벽한 배경에 헌터만 송곳에 콕 박혀 박제가 된 것처럼, 혼자 맞지 않는 역할을 혼자 감내하는 헌터의 모습을 보며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고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아이가 생겼다. 남편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부모님께 전화를 돌린다. 자신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남편의 품에 안긴 헌터는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헌터는 이제 진정한 가족 취급을 받기 시작한다. 온 가족이 새 아기를 돌보는 건지, 아니면 그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돌보는 건지 모를 정도로 과분한 보호에, 헌터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다. 어느 날 우연히 본 태교 비디오에서 본 내용대로, 헌터는 결심한다. 그동안 하지 않던 것을 시도해보기로. 그렇게 헌터는 위험한 사물들을 삼키기를 시작했다. 내 아’만’ 잘 낳아도 자신들의 아기가 잘 있는지 초음파 검사를 통해 확인하려던 시댁에서는 새 아기의 뱃속에 얌전히 있어야 할 작은 생명체뿐만 아니라 어딘지 익숙하고 위험하게 생긴 하얀 이미지들이 가득하다는 걸 알고 기겁을 한다. 시부모님들이 생각해낸 결론은 딱 한 가지였다. “아이는 무사해야 해”. 그들은 정신과 상담을 다닐 것,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는 도우미 ‘루아이’와 함께 집에 있을 것을 설득하기 위해 헌터를 어르고 달랜다. 집에서 혼자였던 헌터가 어느덧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감시를 받고 빠져나갈 곳은 잃는 것은 <악마의 씨>에서 악마를 잉태한 뒤 살이 무너지게 마를 정도로 이웃들의 감시를 받게 되는 로즈마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 역시 결혼을 했거나, 미래에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여성들이 보았을 때 공포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된다. 그렇지만 숨 막힐 정도로 감시가 지속되면, 어떤 사람이든 결국 일을 내고 만다. 몰래 쇠붙이 따위를 삼키려다 응급실까지 가게 된 헌터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겠다고 판단한 가족은 결국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고자 결정한다. 보통 여기까지 왔을 때 대다수의 관객들은 이미 보았던 수많은 여성과 정신병원이 관련된 영화들을 떠올리며 헌터가 무력하게 희생되고, 결국 아이를 낳고 버려지는 결말에 이르게 될 것을 예상한다. 그러나 바로 이 시점에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캐릭터 ‘루아이’를 개입시켜 헌터의 조력자로 만들며, <스왈로우>는 그동안 여성의 고통을 포착하는데 집중한 소위 ‘불행 포르노’를 재생산하지 않았다. 그렇게 영화는 새로운 국면에 맞이하게 된다. 과거가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란다 영화는 헌터가 생부를 찾아가는 에피소드를 통해 성폭행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헌터의 출생은 평생에 걸쳐 그를 괴롭혀온 문제였다. 헌터의 문제는 정신과 상담을 통해 드러나게 되지만, 그는 ‘이미 해결된 문제’라며 언급을 망설인다. 그러나 직접 마주하지 않고는 트라우마를 해결할 수 없다. 정신병원으로 이송되기 전에 저택을 도망친 헌터가 마주한 현실은 자신의 출생 배경이 가족에게 부담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계에 내몰린 그가 선택한 것은 자신의 인생을 망가트려 놓은 생부를 찾아가는 것이다. 드디어 자신의 트라우마와 대면하게 된 헌터는 날이 서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떤다. 마치 금방이라도 생부가 분노를 터트려 헌터를 해칠 것만 같은 이 순간이야말로 영화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다시 영화는 새로운 길을 택해 주인공에게 구원을 주고자 한다. 생부가 자신의 행동을 깊이 뉘우치고 있으며, 자신은 죗값을 치렀고,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헌터의 탄생은 저주가 아니었음을 말한 것이다. 성폭행으로 인해 태어난 딸인 헌터에게 어떻게 태어났든 자신은 중요한 존재라는 것은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말이다. 이 순간 헌터는 비로소 새로운 인생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삼키세요. 그러면 모두 끝나요.’ 영화가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임신 중절이라는 소재를 택한 것은 아주 전략적인 선택이다. 헌터가 임신 중절을 선택하고 그것을 진행하는 일련의 과정은 아주 간략하고 담담하게 그려진다. 게다가 그저 알약 몇 알을 ‘삼키기만’ 하면 되는 방식까지도 영화의 주제가 헌터를 비롯한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간 많은 영화들이 여성의 삶과 임신 중절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지만 타협적이거나 지나치게 강한 어조로만 이야기해 다수를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스왈로우>는 여성의 생명에 있어 그 주인은 여성 자신이라는 주제를 스릴러라는 장르 영화의 문법을 빌려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데 성공했다. 영화는 크레딧이 올라가는 긴 시간 동안 헌터가 머물고 사라진 공중 화장실을 비춘다. 아니, 그곳을 들어왔다 나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본다. 나이와 생김새가 다양한 여성들이 헌터가 낙태를 했던 화장실 칸에 들어가고, 손을 씻고, 립스틱을 고치고 나간다. 그들은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같은 장소를 수없이 오가는 여성들을 보며 비로소 헌터가 겪었던 그 긴 모험은 비단 헌터만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화장실 칸막이에서 쓴 눈물을 삼키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치 헌터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친 얼굴로 화장실을 나가 군중 틈으로 사라졌던 것처럼, 모든 여성들이 그렇게 다시 일상을 영위한다. 헌터는 모든 여성을 대변하는 캐릭터인 것이다. <스왈로우> = 스릴러 영화! 이렇게 <스왈로우>가 스릴러 영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영화는 여성이 은연중에 느끼고 있던, 그렇지만 표면적으로는 꺼내지 못했던 공포들을 민감하게 긁어내면서 불안감을 일으킨다. 여성의 일상 속 공포를 소재 삼아 스릴러라는 영화 장르에 맞게 스토리를 직조했다는 점에서 이권 감독의 <도어락>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여성 주인공의 트라우마를 다루고, 그것을 주인공이 극복한다는 것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제럴드의 게임>과 비슷한 결을 보이기도 한다. <제럴드의 게임>이 공개되었을 당시에도 성별에 따른 관객 평점 차이가 상당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를 넘어서, 관객이 새로이 제작되고 있는 서사에 공감하는지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왈로우>가 스릴러 영화가 아님을 단정 짓던 관객들에게 말을 전하고 싶다. 이제 스릴러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의 규칙이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