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감독
- 김미례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아라이 마리코, 아라이 도모코, 에키타 유키코, 우가진 히사이치, 도모노 시게오, 나카노 히데유키, 오타 마사쿠니, 이케다 히로시, 우치다 마사토시, 다이도지 지하루, 지츠카타 후지오, 후지타 다쿠야
올해 로테르담 국제 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한 <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August at Akiko’s >(크리스토퍼 마코토 요기, 2018)는 연초에 봤음에도 연말이 된 지금까지 나에게 생생하게 남아있는 영화다. 하와이 배경의 음악 영화인데, 하와이 출신의 음악 애호가이자 하와이 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인 앤더슨 리가 일찍이 작품을 보고 귀띔해줬던 덕에 미리 로테르담 영화제 ‘관객과의 대화’ 사회를 보기로 자청하고 갔었다. 긴 설명 없이 “작은데 잘 만들었어. 데뷔 장편 영화고. 한 번 봐봐”라던 앤더슨의 말에 믿음이 갔다. 또 그 친구가 추천한 만큼, 화이트워싱 논란을 일으켰던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알로하Aloha>(2015) 같은 영화들과는 달리 하와이의 모습을 좀 더 현실성 있게 그리기도 하겠지 싶었다. 실제로 가보면 관광객을 포함한다 쳐도 하와이에는 백인이 소수라는 느낌이 확연히 들 정도로 아시아 태평양계의 인종이 많다. 토속 하와이인들뿐만 아니라 수 세대 전서부터 하와이에 이민 가서 정착한 아시아계 가족들, 앤더슨네와 같이 좀 더 최근에 들어간 가족들 등등 다양하다는 걸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만든 크리스토퍼 마코토 요기 감독도 일본계 하와이 출신이다. 증조부모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일본에서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갔다가 끔찍한 노동 조건과 부당한 계약에 혹사를 당했다고도 한다. 호놀룰루에서 태어난 크리스토퍼는 도시 소년으로 잘살았지만, 그 전 가족 중에 하와이섬을 야반도주한 증조할머니뿐만 아니라 자살한 여러 명과 마약 중독과 학대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은 가족 사이의 소곤거림으로 알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아시아계 가족인 만큼 이런 트라우마의 역사는 드러내놓고 회자된 이야기들은 아니었다고 한다. 감독은 전 세대들이 고생하고 고통스러워했던 덕에 잘 살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얼굴 없는 조상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영화 예술 MFA를 받고 본토에서 생활하게 된 그는 이런 조상들과 끊긴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서 1년 넘게 하와이섬에 살면서 영화 준비를 했다고 한다. 올해 유난히 한국 영화 관객과의 대화가 많았던 것 같은 로테르담에서 나는 숨이 턱에 걸려 뛰어다니다가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는 상영 당일이 돼서야 관객과 함께 처음 보게 됐다. 관람 전 심기를 잠시 말하자면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속된 말로 빡친 상태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부 상피까지, 여러 가지 일을 둘러싼 고질적인 문제들부터 시작해서 그날 영화제 센터에서 꽤 떨어진 극장을 찾아가는데 나타나지도 않아놓고 차비를 청구한 우버 예약 차량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일로 빡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관람을 시작한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는 이런 내 안의 모든 불협화음을 더욱더 심하게 진동시키다가 궁극적으로는 무장해제 시켜버렸다. 좀 상투적인 표현을 쓰자면 <어거스트 앤 아키코즈>는 ‘힐링 영화’다. 음악가 '더티 비치스Dirty Beaches'로도 알려진 알렉스 장 후앙타이가 주연이다. 대만 태생으로 하와이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는 영화 속에서도 ‘알렉스’라는 이름의 30대 중반 음악가 역이다. 인생의 뭔가 안 좋은 전환점이나 방황기를 맞은 것 같은 모습으로 오랜만에 하와이에 도착해서 할머니 집을 찾아가지만, 당황스럽게 집은 사라졌고 모르는 사람의 새집이 공사 중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전화를 걸어본 엄마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걸 그때까지 몰랐다는 것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게 믿어지질 않아.” 가족 관계의 근절이 나타나는 순간이다. 사라진 어린 시절 하와이의 모습과의 근절도 느끼는 알렉스는 더욱 방황하는데, 결국 흘러 들어간 곳은 ‘아키코즈 부디스트 베드 앤 브렉퍼스트 (Akiko’s Buddhist Bed and Breakfast)’이다. ‘아키코’라는 일본계 미국인 할머니가 운영하는 민박 시설로 새벽에는 명상도 하고 낮에는 요가도 하는 곳이다. 푸르른 자연 속에 옛 일본계 농장 가옥들을 개조한 B&B는 고양이들이 느긋하게 돌아다니고 개구리들이 밖에서 합창으로 울어대는 곳이기도 하다. 아키코는 항상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열대 꽃을 한쪽에 꽂은 채, 주로 민소매 차림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70대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다소곳한 일본 할머니는 절대 아니다. 거의 락커 할머니 느낌이다. 인생을 좀 사신 분이다. 긴말을 묻지 않고도 알렉스가 방황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나름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 가이드 해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호놀룰루 태생의 일본 이주민 3세 아키코 마수다가 영화 속 아키코 역을 맡았다. 배경이 되는 B&B도 실제 그녀의 것이다. 현실과도 매우 비슷한 두 인물의 설정 때문에도 그렇지만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지만, 이 두 사람과 많이 협업하고 즉흥 연기도 많이 장려했다고 한다. 알렉스는 자기 안의 갈등과 상실감, 죄책감 등으로 힘들어할 때 색소폰으로 울부짖는 불협화음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아키코와 함께 앉아 명상을 하다가 그녀가 해주는 기도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동네 꼬맹이와 놀아 주기도 하고, 공동체 봉사활동을 하기도 하면서 자아 밖으로 시선과 성찰을 돌리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불협화음과 소음이다. 왠지 일본식 불교 명상과 기도를 할 때면 완벽한 정적이 강구되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아키코는 인생의 시끄러움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예를 들어 거의 정글 같은 수풀 속의 가족 묘지를 정돈하러 가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사람들과 둘러서서 기도할 때,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철학으로 알렉스도 불협화음과 갈등 속에서 맑은 색소폰 소리와 마음의 평화를 찾아 나가기도 한다. 영화의 제작비는 $100,000 (원화로 1억1천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으로 미국 영화치고 초저예산인데, 갖가지 현물 지원과 심지어 밥을 해서 갖다 주는 지역 주민들의 도움까지 있었다고 한다. 예산이 작았음에도 아름다운 전경들과 빛과 소음까지 하와이의 모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감독과 스태프는 현지 로케이션의 모든 것을 활용한 것 같다. 소위 말하는 “프로덕션 밸류”는 뒤지지 않는 영화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로스앤젤레스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서 촬영상을 타내기도 했다. (이 작품의 조은수 촬영 감독은 < 해어화 >(박흥식, 2015) 등을 찍기도 한 한국인이다.) 브루클린에 근거지를 둔 ‘팩토리 25’라는 독립 영화 및 음반 제작〮배급사가 내년 3월부터 미국에서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를 개봉시킬 예정이다. 그렇지만 영화의 제작자들은 아직 해외 배급을 찾고 있는 상황이다. ‘새라 킴’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한국계 미국인 프로듀서 김사화는 “우린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한정적으로라도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이 영화와 그 속에 담긴 힐링의 메시지들을 최대한 나누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전한다. -에필로그- 워낙 연초에 본 영화라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다시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2018년 11월 도쿄 필멕스 심사위원으로 와서 쟁쟁한 경쟁작 10편을 진하게 보는 와중에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를 다시 보게 됐다. 이날 숙소로 들어오기 전에 본 것은 230분짜리 < 코끼리는 그곳에 있다An elephant sitting still >(후 보, 2018)라는 작품이었다. 멀리 만저우리에 있다는 코끼리를 꿈꾸는 네 명의 주인공이 중국의 소도시에서 하루 동안 겪는 일련의 우울하고 화나고 끔찍한 사건․사고들을 따라가는 수작이다. 중국의 현재 자화상을 그렸다며 베를린 국제 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당시부터 찬사를 받은 영화다. 소설가 후 보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은 절망적인 상황 속을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서로 ‘하지만 어디 가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다른 곳으로 떠난다 해도 인생은 다 이래’ 식의 담담한 대사를 읊기도 하는 영화다. 29세의 젊은 나이로 이 영화를 완성할 즈음, 후 보 감독이 자살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엔드 크레딧 올라갈 때, 그의 웃는 모습이 담긴 추모 사진이 나오는 순간, 우린 방금 어느 한 사람의 성명서를 본 것인가, 삶의 무게와 아픔을 못 이기겠다는 자살 편지를 본 것인가 싶기도 했다. 근 4시간 동안 그의 영화와 함께 호흡한 끝에 압도적인 충격과 슬픔이 몰려왔다. 히비야의 밤거리를 헤매다시피 하여 숙소로 돌아왔다. 와이파이가 자꾸 끊기는 일본 부띠끄 호텔 쪼끄만 방구석에서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 재관람을 해야 한다는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이 영화에 나오는 갈등과 부조화는 <코끼리는 그곳에 있다>의 것과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우리에 갇혀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이나 혼란스러움은 누구나 겪을 수 있다. 이 두 영화에는 사뭇 다른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다. <코끼리는 그곳에 있다>에 나오는 코끼리의 거친 울부짖음은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에 나오는 알렉스의 색소폰 울부짖음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알렉스의 색소폰 소리는 거친 울부짖음 끝에 차차 맑은 조화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영화를 재관람하면서 다시 치유 받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너무 안타까웠다. 평소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후 보 감독도 영화를 만들고 나서 아키코즈 부디스트 베드 앤 브렉퍼스트 같은 델 경험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와이의 햇볕과 터프한 할머니의 온기, 다른 곳에 가면 가끔은 기적 같은 만남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했더라면 말이다. 중국 영화인들이 대면하고 있는 억압인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 안이한 상상일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말이다. 애달픈 젊은 예술가의 죽음을 애도하며, 하와이의 푸르른 숲과 그 속에 있는 민박집에 마주 앉아 눈 감고 명상을 하며, 기도를 하듯 노래도 하고, 색소폰도 불고, 눈물도 흘리는 두 사람 알렉스와 아키코를 생각하며 동경에서의 새벽을 맞이했다.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김천/성주’ 영화 < 소성리 >가 상영되는 극장의 불이 꺼지면, 영사기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통해 가장 먼저 스크린에 맺히는 상이 바로 위의 문구다. 5초 동안 유지되는 그 화면을 보고 있으면 두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간다. 하나의 마침표를 찍은 감흥보다 앞으로 해나가야 할 행동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책임감’이란 말속에 숨어 있는 찐득한 피로감을 떨치기 위한 안간힘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미디어를 활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카메라를 다루는 건 기본이고 제작한 콘텐츠를 인터넷으로 방송하는 건 옵션, 생방송으로 자신의 현재를 손쉽게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각 지역에 미디어 센터와 영상위원회가 생겨 마음만 먹으면 미디어를 활용해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장을 지키는 미디어 활동가와 영화감독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미디어로 행동하라!’(이하 미행)는 더 많은 시민들이 현장과 결합할 수 있도록 제작 경험을 나누고, 현장의 목소리를 어떻게 세상에 알릴지 고민하며, 그러면서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모이게 되었다. 2014년 10월 9일, 삼척의 작은 마을에 원자력발전소의 건설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미행팀은 투표 방해를 감시하고, 삼척 주민들의 속마음을 듣고, 주민투표의 의미를 담기 위해 삼척으로 향했다. 다음 해 6월 11일은 밀양 765kV송전탑을 건설하기 위해 폭력적으로 행정대집행을 강행한 지 1년이 지난날이었다. 미행팀은 지옥 같았던 행정대집행을 기억하기 위해 괴물 같이 솟아 있는 송전탑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할매들의 주름을 담고 송전탑을 뽑겠다는 의지를 확인하면서 도리어 큰 힘을 얻고 돌아왔다. 미행이 세 번째로 ‘in’한 곳은 충북 지역이었다. 충북에는 노조파괴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유성기업’을 비롯해 ‘보쉬전장’, ‘콘티넨탈오토모티브일렉트로닉스’, ‘청주시노인전문병원’, ‘PLA’ 등이 있었고, 노동자들은 오랜 시간 이어진 회사의 탄압으로 힘겨워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 시간을 공유하며 함께 분노했다. 그리고 올해, 2017년 평화를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불법적으로 배치된 사드를 온몸으로 막으며 평화의 본질을 외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러 성주와 김천으로 향했다. 미행 미행은 4박 5일 동안 동거동락하며 활동한다. 첫날 설레는 마음으로 모여 현장의 상황을 주민과 활동가에게 듣고, 자신이 관심 있는 미디어를 선택한다. 영상이나 소리(음악 및 라디오), 잡지 중 하나의 미디어를 선택한 사람들은 각자 주제를 정한 후 함께 나눈다. 서먹하지만 의지 충만하고 웃음 가득한 하루가 지나면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간다. 낮 동안 촬영과 녹음을 진행하고, 밤에는 작업실에 돌아와 모니터를 하며 녹취를 푼다. 다음 날도 같은 일정이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들의 입가에서 점점 웃음기가 빠지고, 한숨이 늘어난다는 것뿐. 날이 갈수록 잠자리가 마련된 숙소는 무용지물이 된다. 촬영과 녹음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날, 몇몇은 작업실에 남아 편집을 시작하고 몇몇은 보충 녹음 및 촬영을 하러 현장으로 향한다. 그들의 뒷모습에서 어떤 분노와 짜증이 뿜어져 나오는 건, 부디 나의 착각이길 바랄 뿐이다. 발표회 전날 밤 작업실은 마치 전쟁터와 같다. 마지막 내부 시사회를 한숨으로 마치고 나면 여기저기서 싫은 소리가 커지고, 잠을 못 이긴 이들이 작업실 구석을 메운다. 겨우 잠을 이겨낸 이들은 다음날 발표회에서 발표하지 못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서로를 부축해가며 작업을 마무리한다. 그렇게 3년, 네 번에 걸친 현장의 이야기가 영상 19편, 라디오 9편, 음악 9곡, 잡지 2권에 담겨있다. 어쩌면 미행을 계속해서 해나갈 수 있는 큰 원동력 중 하나는 주민들과 활동가들을 모셔놓고 결과물을 나누는 발표회 때 느끼는 충만함 때문일 것이다. 한 미디어 활동가는 발표회가 끝나고 내게 다가와 속된 말로 “현장 뽕을 맞는다는 게 이런 거군요~”라고 속삭이며 눈물을 훔쳤다. 나 역시 발표회 때마다 ‘이런 순간을 위해서 영화 만들고 활동을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기쁨을 만끽한다. 현장에서 하는 발표회는 주민들이 지나온 시간들을 함께 살아내는 것이고, 낯설고 어색했던 이곳이 나의 공간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삼척에선 주민투표의 결과를 기다리며, 밀양에서는 송전탑을 뒤로하고 잔치를 벌이며, 청주에서는 작은 극장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성주에서는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마을회관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미행의 결과물을 나눴다. 발표회는 미디어가 연결해주는 연대의 힘을 서로서로 주고받는 빛나는 순간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성주와 김천에서 5일간의 미행을 마치고 내게는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더 있었다. 올해 초 미행을 기획할 단계부터 미행을 마무리하고 나면 그 힘을 연장해 인터뷰를 중심으로 한 중장편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미행의 강점이자 약점은 느슨한 네트워크 형식의 프로젝트라는 것이다. 누구나 부담 없이 함께 할 수 있지만, 그 결과물을 배급 유통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형태이다. 그래서 매해 평가 회의에서 우리가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지 못했던 한계가 지적되었다. 마침 이전에 미행이 찾았던 지역의 이야기는 다른 콘텐츠로 대신할 수 있었지만, 성주의 경우 지금 당장 해야 할 이야기들이 충분히 외연화 되고 있지 못하다는 판단에 완결성이 있는 다큐멘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심 영화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의 미행을 실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3개월간의 짧은 제작 기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힘겹고 버거웠던 제작기는 이 지면에서 삼간다. 아무튼 영화 <소성리>는 완성되었고 다행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소성리>를 고리로 한 미행의 출발은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모으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불법적 사드 배치에 대한 사과와 무용지물인 사드 철회를 요구’하는 연명을 받아 255인의 영화인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영화제 기간 중 1인 시위를 통해 시민들에게 ‘사드 가고 평화 오라!’는 메시지를 전했고, 극장에서는 매회 상영이 끝날 때마다 관객과 함께 피켓 퍼포먼스를 이어갔다. 소성리 주민들 역시 영화제를 찾아 ‘사드 뽑고 평화 심자’는 퍼포먼스를 레드카펫에서 우아하게 펼쳤다. 앞으로 영화 < 소성리 >를 매개로 극장 안팎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올해 미행을 준비하는 동안 정권이 교체되었고,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지난 9월 7일 소성리에 전 정권과 별반 다르지 않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드가 배치되었고, 그 참혹한 현장을 지켜본 조영삼 씨가 사드 철회의 마중물이 되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언론 보도는 거의 없었다. 우리 곁에는 여전히 국가 폭력으로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크게 닿지 않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국가 폭력에 저항하고, 우리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고, 결과적으로 세상이 조금씩 변할 수 있게끔 역할을 해내고 있는 현장이 있는 한 미행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미행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이 미행의 역할을 잘 알고 있지만 인력과 예산의 부족으로 다음을 이야기는 게 쉽지 않다. 지난 3년 동안 몇몇 활동가들이 힘겨운 여건을 딛고 미행을 이끌어왔다. 책임감과 사명감을 등에 업고 개인이 희생하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 우리들은 미디어로 행동하는 가치를 함께 이야기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우리가 제작하는 영화와 음악으로, 영상과 팟캐스트로, 수많은 미디어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우리 함께 미디어로 행동하자! *미디어로 행동하라! https://www.facebook.com/mihaeng/?ref=bookmarks *영화인 성명서 http://ozifilm.tistory.com/333 *소성리 주민들 부산에서 평화를 심다 https://vimeo.com/239768367 *소성리 뮤직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RktoH8Jc1HA (소성리 뮤직비디오는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성주/김천’의 결과물인 영화 < 소성리 >와 음반 <새 민중음악 선곡집 - 소성리의 노래들>의 콜라보 작업이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들어선 1990년대 말에도 개봉작을 볼라치면 으레 종로와 충무로에 소재한 극장들을 찾았다. 그중 하나가 명보극장으로 5개의 상영관을 갖춘 쾌적한 시설과 주변의 오래된 맛집들 때문에 자주 찾는 극장이었다. 명보극장은 2008년 폐관돼 현재는 명보아트홀이란 이름의 공연장으로 운영 중인데 그중 한 관이 실버영화관으로 간신히 극장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많은 사람이 명보극장이 배우 신영균 의 소유였다고 기억하는데, 그보다 앞서 명보극장을 세운 영화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세아영화사의 이지룡 대표다. 명보극장은 6?25전쟁 후 충무로에 처음 세워진 현대식 극장으로 개관일엔 당대 정치 실세이던 이기붕과 박마리아 여사를 비롯해 많은 귀빈이 족적을 남겼다. 사실 명보극장은 그 이름부터 이지룡의 역사가 묻어 있다. 극장 설립에 대한 기사가 나가고 극장 이름도 공모해 명성이라는 이름이 당선될 뻔했지만, 영화광이었던 자신의 청년기를 회상하며 함흥 출신인 그가 자주 드나들던 함흥 명보극장을 떠올려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당선시키며 붙인 이름이었다. 함흥 출신 서울시민에겐 가슴 뭉클한 이름이었을 것이다. 물론 29세의 나이에 거대 자본이나 의지할 만한 건 설사 없이 일단 극장을 세우고 보자는 아찔한 자신감은 그간 사업에서 승승장구해왔던 그의 이력을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는 함흥에서 대흥상업을 나와 함산금융조합에서 일했고 장사를 시작해 재미를 보려던 차에 6.25전쟁이 나 월남했다. 그의 청년기는 빠른 셈과 화술 등 사업가로서의 자질을 확인하고 토대를 닦아가던 시기였다. 피난 시절 부산에서 창고업과 함흥냉면 장사로 대박을 터뜨리며 사업에 눈을 떠갔다. 휴전 즈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로 올라와 건설업에 몸담았지만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 무렵 외화 수입을 하며 친척이던 수도극장 부사장 이회극의 사무실을 드나들다보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들이 몰려드는 극장 사업에 매력을 느껴 서서히 빠져들었다. 때는 마침 1950년대 중반으로 한국 영화제작의 르네상스기가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극장을 짓기로 결정한 이지룡 은 인맥이 있던 삼양물산을 투자사로 유치하고 고향 친구인 양봉식 (연방영화사 부사장)과 합심해 수도극장 맞은편 332평의 소유주 17명을 설득해 부동산을 매입하고 고향 선배였던 서울시 도시계획 위원장 주원에게 추천받은, 프랑스 유학을 막 마치고 돌아온 건축가 김중업에게 설계를 맡겼다(사실 극장이 완공된 뒤 설계를 무시하고 건축해 설계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김중업이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공사를 맡길 건설사를 찾던 때 국회 부의장인 조경규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하여 국회 부의장의 추천을 받은 일신산업이 시공을 맡게됐다. 하지만 자본도 장비도 기술도 없던 일신산업은 공사비만 받고 삽질만 해놓은 채 철수한다. 공사는 중단된 채 자금은 떨어지고 건설사도 없는 위기 속에서, 파헤쳐진 땅 가장자리에 위험하게 위치한 박산부인과 원장은 이지룡 에게 대림산업을 소개한다. 대림산업 이석구 대표에게 찾아가 다시 한 번 극장업의 밝은전망에 대해 피력하고 투자와 공사재개에 대한 약속을 받아낸다. 하지만 퇴로가 없는 상황에서 6대 4의 조건으로 대림산업이 더 많은 주식을 갖게 된다. 대기업의 횡포, 갑의 월권 등 익숙하고 예측 가능한 비극은 극장이 개관된 후 운영 체계가 잡혀갈 무렵 시작된다. 한동안은 영화계의 특수성을 이해하는 전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명보극장이 개관할 때 지역구인 명동 주먹 이화룡(화성영화사 대표)이 직접 수표주임을 정해주는 업계의 전통(?)은 문외한이라면 이해하기 힘들지 않았겠는가. 이 수표주임이 동대문 주먹 유지광과 싸움이 붙어 신문지상을 시끄럽게 한 소소한 일화도 있었으니 극장 경영은 꽤나 다채로웠을 것이다. 대주주인 대림산업은 상무 양봉식을 해고하고 부사장이던 이지룡 과 삼양물산을 몰아낸다. 결국 그는 투자금마저 회수하지 못한 채 명보극장을 떠난다. 이지룡 이 그만두고 난 뒤 대림산업은 극장 공사비 허위신고와 입장세 포탈 혐의로 물의를 일으켰지만 그는 이미 떠난 뒤였기에 기억하지 못했다. 자유당 시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명보극장의 설립 이야기다. “연출자가 뭐 하는데 밀어줘야지” 억울하게 퇴출당한 이지룡 은 주식을 찾을 수 있다는 변호사의 말에 대림산업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한다. 하지만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헌법 적용이 일시 중지된 후 변호사로부터 사건을 덮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알고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 이지룡의 명보극장 이야기는 “…그래가 재수가 없었지”라고 담담하게 끝이 난다. 그러나 이지룡 은 영화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 대명으로 영화제작에 뛰어들어1966년 아세아영화사를 설립한다. 영화사 이름답게 홍콩과의 합작영화도 7편이나 제작했고, 정창화 감독이 홍콩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도 했다. “정창화 감독한텐 내가 이긴 적이 없지, 연출자가 뭐 하는데 밀어줘야지”라고 말하는 이지룡은 정창화 감독의 영화를 가장 많이 제작한 국내 제작자이기도 하다. 정창화 감독과의 첫 작품은 <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1965)인데 일제 말기 일본군의 버마전선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이다. 광릉수목원에 버마전선을 만들어 촬영한 작품으로 제작자와 감독이 미공보부에 들어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버마전선의 영상을 찾아 고증하고 일부를 복사해 영화에 사용하는 등 사실적이고 충실한 재현을 위해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작품이다. 정창화 감독이 쇼브라더스에 스카우트되는 계기가 된 영화 < 순간은 영원히 >(정창화, 1966)도 그가 제작한 작품이다. 첩보영화인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위기X7호>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제목을 바꾸라는 공보부의 요구로 <순간은 영원히>라는 다소 멜로스러운 제목이 붙게 됐다. 홍콩 유린영화사와의 합작품으로, 홍콩에서 로케이션을 하고 개봉한 이 작품을 본 쇼브라더스의 런런쇼는 이지룡에게 감독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이지룡은 정창화 감독에게 당분간 액션영화를 제작할 계획이 없으니 홍콩으로 가 기량을 펼치라고 홍콩행을 적극 권유했다. 이지룡 은 1971년 < 20인의 여도적 >이라는 작품을 직접 연출했고, 1973년에는 <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 >( 이성구 )를 일본의 고즈시마 섬에서 올로케로 제작했다. 1989년 <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를 제작하며 노장의 면모를 보여준 뒤 1992년 은퇴한다. 이지룡 은 흥남철수작전 때 서호진에서 간신히 수송선을 타고 월남한 자칭 ‘삼팔따라지’로 극장, 수입, 제작 등을 아우르며 영화계에서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짧은 지면에서 밝히지 못한 그의 다양한 활동은 채록문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구술자는 아세아영화사 이후 유림흥업, 다남흥업 등의 제작사를 만들며 1990년대까지 제작을 이어간 영화계의 산증인임에도 불구하고 면담자의 부족한 지식과 기술로 제작의 묘수, 합작의 묘수, 제작자와 언론 및 관료들과의 관계 등 제작 이면의 이야기는 자세히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순간들 혹은 말하지 않는 순간들이 주는 뉘앙스를 통해 추측하고 상상할 수 있는 여지와 재미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