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놈즈
- 감독
- 존 스티븐슨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조니 뎁, 에밀리 블런트, 제임스 맥어보이, 매기 스미스, 마이클 케인, 치웨텔 에지오포, 스티븐 머챈트, 메리 제이 블라이즈
경기도로 이사한 후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한번 서울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서울 서대문구에서 태어났고, 마포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독립한 후에는 줄곧 은평구에 살았다. 부산 금정구 금정경찰서에서 보낸 군생활을 제외하면 서울의 서북 3구, 그 안에서도 반경 10키로미터가 넘지 않는 좁은 장소에서 평생을 산 셈이다. 개굴개굴. 그런 내게 사람들의 말은 토머스 울프와 이문열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두 작가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그들 모두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 경기도에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울로 돌아가고 싶기는커녕 오히려 꼭 서울에 살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건 내가 (갈 곳 없는) 프리랜서이고, 이사를 통해 아내의 출퇴근길은 (조금이나마) 편해졌으며, 아내와 나 모두 문화생활(정확히 말하면 외출)을 즐기지 않는 성격이고, 아이의 학군이나 사교육 같은 걸 신경 쓸 필요가 (아직은) 없는 데다가, 가족 중에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녀야 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전보다 적은 주거비용으로 삶의 질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높아졌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변화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게 요즘 제가 부동산에 꽂힌 이유에요. -그래서 이제 부동산 투자라도 하실 건가요. -아직은요. 대신 아내와 함께 일요일마다 ‘구해줘! 홈즈’를 챙겨보고 있어요. -그게 뭐지? 드라마에요? [셜록] 같은? -이사를 계획 중인 시청자가 사연을 보내면 연예인들이 대신 예산과 조건에 맞는 집을 보러 다니는 예능이에요. 열심히 보고 공부해서 부동산 전문가로 거듭나려고요. 지돈 씨도 나중에 이사 생각 있으면 말해요, 제가 잘 해드릴게요. -…그건 마치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출발! 비디오 여행’을 꼭 챙겨본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지돈 씨, 저는 ‘출발! 비디오 여행’ 같은 건 보지 않아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JD를 바라보았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접은 후로는요. 조셉 맨키위즈의 영화 <유령과 뮈어 부인>과 마그리트 뒤라스와 도미니크 노게즈의 대담집 [말의 색채]는 모두 부동산 이야기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루시 뮈어는 독립을 선언한다.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1년 전에 죽은 남편까지 들먹이며 만류하지만 뮈어 부인의 의지를 꺾진 못한다. 부동산을 찾은 루시는 수상할 정도로 저렴한 바닷가 저택을 발견하고, 중개업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임대 계약을 맺는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성격 더러운 전 주인의 유령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뒤라스는 대뜸 자신을 매혹시켜 < 나탈리 그랑제 >를 만들게 한 집에 대한 이야기로 대담을 연다. 생애 처음 소유한 집. 정원에 창고까지 딸린 집은 당시 그녀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매우 비쌌지만,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겨우 살 수 있었다고. 그러면서 대수롭지 않게 덧붙인다. "내 책을 각색한 영화들이 너무 좋지 않아서 내가 직접 해도 그 정도는 만들 수 있거나 그보다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1) 두 가지 교훈이 있다. 하나. 싸고 좋은 매물은 없고 집과 사람, 사람과 유령 사이에도 궁합은 있다. 둘. 혹시라도 문필 활동으로 생계를 꾸릴 생각이라면 최소한 프랑스에서는 태어났어야 한다, 그것도 백 년쯤 전에, 되도록이면 마르그리트 뒤라스로… 한국에도 부동산을 다룬 작품은 많지만 부동산 이야기로 시작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일단 떠오르는 건 이윤기 감독의 2008년 영화 < 멋진 하루 >다. 검은 화면 위로 오프닝 크레딧이 흐르면,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린다. -마석? 그게 어디야? -춘천 가는 길 어디라나 뭐라나? 아무튼 뭐 사자마자 두 배쯤 올랐대. 지금은 한 평당 70이라던데. -그럼 얼마나 번 건데? 걔는? -40에 샀다니까 30에 100해서… 삼 천? 그쯤 되겠네 -삼 천? (사이) 삼 천… -한 방에. 봐 봐, 얘 몇 주째 안 보이잖아. 전화도 잘 안 받아. 나는 구글에 '마석 땅값'을 검색한다. 가장 처음에 나오는 2019년 6월의 기사("'드디어 호재 터졌다!' 남양주 마석역 일대 땅값 후끈")에 따르면 GTX 건설과 지하철 6호선 연장 계획이 동시에 발표되면서 마석역 인근 당 평당 평균 가격은 2017년 250만원, 2018년 350만원이었던 것이 2019년에는 450만원으로 치솟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2020년과 2021년에는…? (알기 싫음) 담배를 나눠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이 향하는 곳은 스크린 경마장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부동산과 경마, 그리고 1년 전 350만원을 빌리고 잠적한 남자(하정우)에게 빚을 받아내기 위해 경마장을 찾은 여자(전도연)에서 시작하는 영화인 셈이다. 과연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촉발된 전세계적인 경제위기의 한복판에 개봉한 영화답다고 할까. 돈이 없다며 느물느물하게 잡아 떼던 남자는 돈을 받기 전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여자에게 오늘 안으로 어떻게든 해결하겠다고 큰소리친다. 어떻게? 다른 여자들의 돈을 빌려서… 남자를 믿을 수 없는 여자는 남자와 동행하기로 하고, 카메라는 그런 둘을 따라간다. 옛 연인에게 돈을 갚기 위해 다른 여자들에게 돈을 빌려야 하는데도 어째선지 무사태평하기만 한 남자와 옛 연인에게 빌려준 돈을 받는데 어쩐지 본인이 직접 운전까지하며 돈을 꾸러 다니는 것만 같은 기분에 자꾸 울컥하는 여자의 하루. 그런데 나는 왜 여기서 영화의 줄거리를 꼬치꼬치 늘어놓고 있는 걸까? 서평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다. 분량을 채우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영화가 캐릭터 무비라는 것,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대책없이 낙관적이고 유연한 성격의 남자와 안 그래도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이유없이 예민하고 불안한 성격의 여자가 티격태격 하면서도 그들에게 주어진 미션을 완료하고 헤어져 다시 각자의 길을 걸어가지만 함께 했던 짧은 시간의 영향으로 그들 모두 그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여운을 남기는 종류의 영화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변화하는 사람은 여자 한 명뿐이라고 해야겠지만.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을 남녀로 바꾼 다음 긴 이야기를 단 하루로 압축한 것 같은 이야기, '한국남자 조병운(하정우)' 같은 느낌으로… 영화가 중간을 지날 무렵, 경마장을 나설 때부터 남자가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의 비밀이 밝혀진다. 남자는 돈이 없어 전세금을 빼고 가방 하나에 살림을 넣은 채 친구 집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면 이 영화를 사업이 망하고 이혼까지 한 속편한 무주택자와 파혼하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해 언제 길바닥으로 나앉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하위 중산층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단지 그렇게 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한 마디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런 종류의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고, 혹은 내겐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고, 어쩌면 이 문제는 인생보다 큰지도 몰라. 나는 머리도 식힐겸 <멋진 하루>가 담고 있는 2008년 서울의 이곳저곳 -- 개발 이전의 용산과 잠수교와 종로 뒷골목과 이태원 언덕길과 서소문 아파트와 연희동 사러가마트 등 -- 을 직접 둘러보면서 시간 속에 잠시 존재했던 어떤 것을 영원에 가깝게 붙잡아 고정시키는 이미지의 유령적인 성격에 대해 생각하며 그것이 우리의 에세이필름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찬찬히 고민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서울을 향하는 9701번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 (편집자 주: 다음은 K정연이 JD에게 보낸 메일을 전재한 것이다. 시나리오를 위한 준비작업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K정연이 원고를 완성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록 불완전한 메모의 형식이나마 독자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JD의 동의를 받아 여기에 올린다. 전체적인 내용이나 분위기 모두 본 원고와는 동떨어져 있어 구태여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미리 밝힌다.) 서평을 쓰지 않는 서평가 K정연은 마감공포증 때문에 지금까지 그가 추구해오던 약간의 재치 있는 문필 활동을 그만두고 정지돈과 함게 한국 영화에 대한 에세이 필름을 만들기로 한다. 어느 날 그는 9701번 버스를 타고 서오릉을 지나던 중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영화 평론가 유운성을 우연히 마주친다. 구산역에서 내리는 유운성을 따라 충동적으로 버스에서 내리는 K정연. 구산동 도서관 마을에서 봉산의 이름없는 묘지로, 맘스터치에서 불광천으로 향하는 유운성의 행보를 쫓는 그의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 "희망 없이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편이 낫다. 희망 없이 수다를 떠는 데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냉소주의자의 태도다. 다만, 희망을 낙관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낙관이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둘러싼 요인들로 미루어볼 때 얼마간 바람직한 미래가 가능하다고 진단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주식시장이 낙관적이라거나 부동산 시장이 안정화도리 것이라고 전망하는 경제 전문가의 발언 따위를 떠올려보라. 희망은 여건에 비추어 미래를 낙관하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 자체를 응시하는 일이다. 희망은 낙관이라고 하는 타협을 용인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긍정하는 일이다. 주식시장이나 부동산 시장에 대한 전망을 내놓기보다는 그것들을 없애버리자고 요구하는 것이 희망이다…" 2) 창백해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K정연.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문자 메시지 보낸다. -JD, 당신은 시네마가 인생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나요? 쏘옥, 문자가 발송되는 소리와 함께 K정연 쓰러지면 손에서 미끌어지는 핸드폰. 띵 하는 메시지 수신음과 함께 JD의 문자가 액정에 표시된다. -JD: ??? 시간 흐르면 비 내리는 밤의 불광천. 헤드랜턴을 쓴 JD가 수풀 사이를 뒤지고 있다. 아! 탄성을 지르는 JD. 정신을 잃은 채 반쯤 개천에 잠긴 K정연의 모습이 보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담요를 뒤집어 쓰고 코코아를 마시던 K정연이 대답한다. -유운성 선생님을 만났어요. -유운성쌤 이요? 유운성 쌤은 어디 갔는데요? -모르겠어요. 천변의 벤치에 앉더니, 저 멀리 레인보우 브릿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있잖아요, 과거의 문 같은 거. 움직이지도 앉고 한참을 앉아 있더군요. 저는 가야했어요. 마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마감을 생각하자마자 갑자기 어지러워지더니 모든 게 깜깜해졌어요. 이렇게 말하는 지금도… 병원 진료실. 의사가 K정연에게 말한다.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마감공포증입니다. -선생님, 담당 편집자에게 제가 입원을 해야 해서 원고를 마감할 수 없다고 전화 한통만 해주시겠어요?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K정연.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그런데 놀지도 않고 일도 안 한다면? 빠르게 교차 편집 되는 장면들. 다양한 시간, 다양한 날씨 아래 거리에 있는 K정연. 불안한듯 고개를 돌리면 시선 끝에 걸리는 빨간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남성의 흐릿한 모습. 유운성이다. 쫓아가보지만 매번 잡히지 않고 사라지는 유운성. 절규하는 K정연. 캄캄한 공간. 푸른 조명이 켜지면 수백 수천 개로 보이는 K정연의 모습. 거울 방이다. 잠시 후 붉은 조명과 함께 거울 속 K정연의 모습이 유운성의 뒷모습으로 바뀐다. 다시 장면 바뀌면 다양한 시대, 다양한 공장을 나서는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그런데 모두 유운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중 한 명의 유운성을 뒤쫓는 K정연. 정확한 시대도 장소도 알 수 없는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가다 마침내 유운성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한다! 벽을 보고 선 유운성에게 다가가는 K정연.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데 유운성의 셔츠를 쥐는데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유운성. K정연이 쥐었던 손을 펴면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USB. -루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K정연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JD. 서럽게 우는 K정연에게 묻는다. -무서운 꿈을 꾸었나요. -아니요. -슬픈 꿈을 꾸었나요. -아니요. -그럼… -하룬 해도 파로키 하지 않는 꿈이었습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JD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K정연. -지돈 씨, 저는 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가끔은, 실은 자주, 너무 지겹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요. -세상에는 두 부류의 평론가가 있습니다. 진과 성. 진 쪽의 평론가에는 이동진과 김영진이 있고, 성 쪽의 평론가에는 정성일과 유운성이 있는 식으로요. -그건 성명학인가요. -분류학이라고 해두죠. -하지만 저는 진도 아니고 성도 아닌 걸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자리도 있는 법이죠. 이를테면, 진과 성의 사이 같은 곳이. -?? -진과 성의 사이에 있는 정. 그게 바로 정연씨의 자리랍니다. 자, 저를 따라해보세요. 진! 정! 성! -진 정 성…? -바로 그겁니다! 진정성!!! K정연이 JD에게 손을 내민다. 손바닥 위에 놓인 USB. 겉면에는 "cinema, 2004"라는 글씨가 흐릿하게 보인다. -이건…? -꿈 속에서… 제게… -2004년이라면, 라브 디아즈의 < 필리핀 가족의 진화 >일까요? -글쎄요… -리산드로 알론소의 < 죽은 사람들 >일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 도플갱어 >? 그건 2003년이지. 그럼 < 밝은미래 >? 아냐 그건 2002년이고. 아니면 홍상수의 <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보면 알겠죠. 조심스럽게 노트북에 USB를 꼽는 K정연. 곧바로 자동재생으로 영화가 재생된다. 주인공이 불분명한 예식장안 풍경 예식이 끝난 듯 신부의 부케를 받으려 한쪽으로 몰려서는 여자들 신부가 등뒤로 부케를 던지고 날아오르는 부케를 향해 손을 뻗는 여자들 부케가 첫 번째 손을 튕겨서 다음 손을 거쳐서 통통 튕겨나가고 이 손 저 손을 차례로 튕겨나가다가 허공을 뱅그르르 돌던 부케가 왠 막대사탕을 들고 있는 손안으로 쏙- 들어간다. 카메라 빠지면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고선 이빨이 빠진 여자 아이가 방긋하고 웃는다. 여자아이 손에 들린 부케를 놀란 눈으로 보는 여자들. 그 위로 타이틀. “어린신부” 3) 1) 마르그리트 뒤라스.도미니크 노게즈, [말의 색채], 유지나 옮김, 미메시스, 2006 2) 유운성, '시네마, 역량과 유령 사이에서', [씨네21] 1300호 3) 필름메이커스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어린 신부> 시나리오에서 인용했다. https://www.filmmakers.co.kr/koreanScreenplays/54717 *** 그 외에도 히치콕의 < 현기증 > 뤽 베송의 < 루시 > 하룬 파로키의 <110년 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황인찬의 시 '무화과숲' 중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등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힌다.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1. 2015년, 뜬금없이 눈앞에 다시 나타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의 매혹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36년 만의 귀환이다. 특히 1981년에 개봉했던 < 매드 맥스 2 >와 비교하자면, 이 영화는 크게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인다. 이미 이 당시 <매드 맥스 2>는 묵시록 이후,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펼쳐내면서 당대 유행했던 사이버 펑키한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흙먼지 날리는 웨스턴의 풍경으로 되돌렸었다.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낙후할 것이며, 이성과 합리성이 아니라 동물적 생존 본능과 폭력의 강인함이 지배할 것이라는 잔혹한 비전은 당대 날것처럼 생생했다. <매드 맥스 2>는 영화의 혼종성이 성취할 수 있는 쾌감을 이미 보여준 작품이었다.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풍경으로 제시되었다. 불모한 서부의 풍경이 미래 사회의 폐허를 대체한 것이다. 보수주의가 득세했던 80년대 초의 살벌한 정치 사회(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공세)는 야만과 폭력이라는 무정부 상태와 디스토피아적 환상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폐허의 풍경을 지배하는 것은 단 하나! 속도전이었다. 지금 이 영화 속에서 당신이 보고 있는 세계가, 과거가 아니라 미래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자동차’로 대변되는 문명의 흔적뿐이었다. 굉음과 속도로 질주하는 그것은 그들의 권력과 생존의 유일한 무기이자, 사실 이 영화 <매드 맥스 2>에서 가장 중요한 스펙터클의 동인이 되는 것이다. 2015년에 귀환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는 다시금 그 지점으로 되돌아간다. 서사의 측면이나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속도전의 전략에서 이 영화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 이 영화 개봉 이후 많은 글들이 페미니즘적 요소와 대사가 필요 없는 무성 영화적 수사학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나, 과연 그러한 요소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쾌락할 수 있게 하였는지는 의문스럽다. 이 영화가 즐거웠던 것은 여성들이 연대하고 해방을 이끌어서도 아니었으며, 또한 대사가 억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성영화를 끌어들이는 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좋은 근거도 되지 못한다. 2. 최근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영화들 중 유독 나의 주목을 끄는 작품들이 있다. 할리우드의 대자본과 기술적 숙련도, 그리고 산업 내 작가주의적 성향을 지닌 감독들에 의해 추동되는 일련의 SF 대작 영화들 말이다. < 프로메테우스 >의 리들리 스콧, < 그래비티 >의 알폰소 쿠아론, < 인터스텔라 >의 크리스토퍼 놀런.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가능한 미래’를 재현해 왔던 < A.I. > < 우주전쟁 > < 마이너리티 리포트 >의 스티븐 스필버그. 이들과 좀 다른 위치에서 주목할만한 감독으로서는, ‘쾌락’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정치적 올바름이나 이데올로기 문제란 개의치 않는 마이클 베이, 올드한 리버럴리스트 마인드와 고전적 영화 서사를 고수하는 < 아바타 >의 제임스 캐머런,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실사(live action) 영화의 경계가 무너졌음을 이미 오래전부터 개의치 않고 작업하고 있는 < 하늘을 걷는 남자 >의 로버트 저메키스. 그리고 드디어 36년 만에 자신의 존재를 새삼 입증한 < 매드 맥스 >의 조지 밀러가 그중 한 명이다.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를 위에서 열거한 작품들 중 어느 한 지점과 유사점을 찾아야 한다면, 아마도 손쉽게 언급될 수 있는 것이 리들리 스콧의 < 프로메테우스 >일 것이다. 70년 이상의 삶을 훌쩍 살아낸 두 노장들이 할리우드 내에서 여전히 대규모 예산의 SF영화들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할리우드 시스템의 노련함과 영악함에 경탄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감독은 이제는 ‘아날로그’로 치부되는 이미지의 ‘물질성’에 천착하는 감독들이다. 흔히 ‘실재의 힘’ 또는 ‘지표(index)의 힘’(퍼스와 마노비치의 개념으로서)이라고 부를법한 그들의 영화적 스펙터클의 공통점은, 영화란 여전히 ‘그리는 것’이 아니라 ‘찍는 것’이라는 데에 방점을 둔다는 점이다. 70년대부터 영화계에 적용되기 시작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훨씬 더 급진적으로 영화계 전반을 대체해가기 시작했다. 필름의 역사로 대변되는 영화의 프로-필르믹한 속성(실재를 기록-촬영한 것)은 디지털카메라와 제반 기술의 변화로 더 이상 ‘찍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에 기반한 ‘그리는’ 작업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캐머런 감독의 판도라 행성도, < 스타워즈 >의 우주공간도,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도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적 실체일 뿐이다(이런 점에서 애니메이션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 프로메테우스 >와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두 노장들은 여전히 영화적 이미지를 ‘찍는’ 행위에서 창조하고자 한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 실재하는 대상이 발휘하는 물질적 크기와 중력의 힘을 믿는다. 그 묵직한 존재감이 카메라를 통해 포착되면 관객에게 이미지와 시각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그들은 증명한다. (< 인셉션 > < 인터스텔라 >의 크리스토퍼 놀런도 대부분 실제 이미지를 찍는다) 그리고 시네필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그 긴장이 여느 그려진 세계들과는 차원이 다른 체험이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간혹 의구심도 생겨난다. 괴력의 영화적 체험을 제공했던 <프로메테우스>나 < 매드 맥스 >의 힘은 정말 ‘실재의 힘’, ‘찍는’ 영화적 힘에서 생겨난 것일까? <인톨러런스>(위) <카리비아>(아래) 3. 폴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 중, “영화, 그것은 ‘나는 본다’가 아니라 ‘나는 난다’이다”라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비릴리오는 비행술과 영화가 19세기 말,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미래파의 속도와 운동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영화적 비전과 유사한지, 무엇보다도 전쟁과 비행과 시각 사이의 접합으로서 항공투시법의 순간성과 ‘질주하는 관찰’이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특히 이를 설명하는 중에 D.W 그리피스의 좌절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피스가 < 인톨러런스 >라는 작품으로 위대한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을 무렵, 뒤늦게 미국에서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 지오바니 파스트로네의 1914년 작 < 카비리아 >를 보고 의기소침해진다. 그 영화에 비하면 자신의 영화가 너무 뒤처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카비리아>는 “기술효과와 시점 촬영의 역동적 완벽성을 높이기 위해 시나리오의 내러티브적 특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작품이었다. 파스트로네는 3차원적 공간에 집착하면서, 카메라를 지속적으로 움직여 시각적 구도를 분리함으로써 깊이의 환상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고안한 이동 촬영기(카렐로)를 사용하고 남용하면서, 카메라가 사물의 크기와 차원을 조작하고 위조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전쟁과 영화, 60-62p) 나에게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영화가 창조하는 시간과 운동. 그리고 속도의 문제. 이러한 키워드는 위에서 언급한 최근 할리우드 특수 장르 영화의 디지털 미학으로서 주목받는 지점과 다시금 연결된다. < 그래비티 >의 탈육화된 롱테이크 쇼트와 유동적 프레이밍, 이냐리투가 < 버드맨 >에서 위장된 롱테이크를 통해 만들어내는 공간의 통제와 시간의 재창조, < 인터스텔라 >에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병렬하거나 중첩된 어떤 것으로 간주되는 시간적 디제시스, 그리고 이 영화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제시되는 속도와 시간. < 매드 맥스 >에서의 시간 역시 여러 층위로 구성된다. 일단 두 시간에 달하는 러닝 타임으로서의 시간, 영화적 디제시스에서 제시되는 비확정된 미래사회-포스트 묵시록적 세계의 시간, 그리고 각 쇼트가 각자의 자율성(고속과 저속 촬영 등)을 통해 획득하는 파편화되고 분리된 시간. 그런데 이 모든 시간에 대한 창조와 감각은 하나의 목표로 집중된다. 그것은 ‘속도’라는 개념이다. 다시 비릴리오로 돌아가자면, 그는 영화가 사진과 다른 지점을 카메라의 운동이 만들어내는 시점의 유동성에서 읽어낸다. “영화에서 가짜인 것은 원근법의 효과가 아니라, 깊이 그 자체이며, 투사된 공간의 시간 거리다. 여기서 속도는 이미지의 본원적 위대함으로써 나타나며, 깊이의 근원으로서 나타난다” <제너럴>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기계 4.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를 초창기 영화와 연결짓는 지점은 대사의 억제가 아니라 이 영화가 온전히 영화라는 매체의 시간체험(속도체험)을 목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초창기 영화연구에서 제기된 일명 ‘매혹의 시네마’라는 개념은 오늘날 디지털로 재구성된 영화 전략의 주요 수사학이기도 하다. 초창기 영화 관객들에게 영화가 제공했던 것은 서사나 주제의식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의 새로운 형식 그 자체였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매체-시각 ‘체험’, 그리고 그 체험의 핵심에는 영화가 현실의 속도와는 대비되는 새로운 속도를 구성하고 질주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자리 잡았다. 열차 체험이 근대적 시각 경험의 혁명이었던 것처럼, 영화 역시 <열차의 도착>과 함께 관객들에게 도착했다.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라프 상영관에서 관객들이 정면으로 다가오는 열차에 놀라 뒤로 도망쳤다는 그 유명한 일화는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대 관객들 역시 자신들이 보는 것이 환영이고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놀란 것은 이미지의 사실성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지각하는 이미지 매체의 낯섦이었다. 낯선 이미지 형식이 제공하는 두려움과 경이. 그것이 근대의 새로운 ‘경험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초창기 영화는, 할리우드가 영화를 서사적 체계로 표준화하기 이전, 지각과 경험의 새로운 ‘형식 그 자체’로서 소구되었다. 이 형식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구성하는 경이로운 매체였다. 버스터 키튼의 < 셜록 주니어 >에서, 꿈을 꾸는 영사기사가 스크린 내부의 세계로 들어가 경험하게 되는 시공간의 불가해 한 전환능력은 초기 영화적 매혹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어쩌면 버스터 키튼이 < 제너럴 >에서 당대의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증기기차의 육중한 무게와 속도감, 무엇보다도 그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인간의 지배능력은 2015년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가 취하고자 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경험하는 영화: <그래비티>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하늘을 걷는 남자> 5. < 제너럴 >에서 버스터 키튼은 질주하는 증기 기관차를 빈번하게 부감의 롱숏으로 제시한다. 이 거대한 기계와 그것을 담아내는 공중에서의 롱숏은 관객에게 이 모든 시각적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부여한다.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영화의 많은 쇼트들은 나미비아 사막을 조망하는 공중 쇼트로 구성된다. 미래사회의 폐허를 증명하는 쇼트들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관객에게 쇼트-이미지에 대한 지배의 위치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지배에 대한 감각은 초기 영화에서 골똘했던 ‘경험’의 사실주의와 연결된다. 즉 자신이 보고 있는 이미지가 가짜임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허구적 이미지를 진짜 경험으로 쾌락하는 이중적 인식의 문제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전략. 영화라는 매체를 진짜 경험처럼 느끼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매체의 흔적 자체를 지워야 한다. 매체의 새로운 형식을 쾌락하면서도 매체 자체를 지우는 일, 즉 ‘비매개적 매체’의 환각-가상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최근 디지털 시네마의 최전선에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주력하는 것은 서사의 촘촘함이 아니라, 거대한 스펙터클의 속도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일이다. < 그래비티 >에서 한없이 지속되는 공중회전의 순환이나,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단순하게 반복하는 추적의 스펙터클과 카니발적 회전운동을 구성하는 쇼트들에는 서사적 요소가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메키스 감독의 <하늘을 걷는 남자>의 후반부, 오로지 텅 빈 공간을 오가는 행위 말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에 대해 관객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과 결국은 같은 것이다. <그래비티>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가속화된 시간에 대한 지배를 제공한다면, <하늘을 걷는 남자>는 위태롭게 한발 한 발 내딛는, 지연된 시간의 감각을 제공한다(영화의 후반부를 지배하는 이 시퀀스들은 두 개의 경험적 위치를 제공하는데 하나는 줄 위를 걷는 남자의 주관적 시선으로 관객을 연루시키는 자리이며, 다른 하나는 빌딩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관람객들의 자리이다. 극장의 관객은 두 자리의 시선을 교차하며 3D 체험의 미장센으로 극대화된 영화적 시간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속도가 어찌하든 이러한 영화들은 모두 영화적 시간성을 영화의 비매개적 경험의 핵심 장치로서 구축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오인한다. 영화, 그것은 ‘내가 본다’가 아니라 ‘내가 경험한다’라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비릴리오의 말을 살짝 비틀자면, ‘난다’라는 개념은 ‘경험’의 자리를 관객에게 전지적으로 제공하는 주요한 쇼트들이다. 물리적 현실에서 발생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며, 쇼트와 프레이밍의 새로운 자리를 지배하는 자리이다. 2015년 첨단의 전략으로 무장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는 결국 초창기 영화에 해당하는 < 제너럴 >과 유사한 쇼트의 시간 감각에 집중한다. 버스터 키튼은(존 포드 역시 그랬던 것처럼) 남북전쟁이 한창인 광대한 공간들 사이를 통과하는 기차의 물질적 거대함과 속도를 강화하기 위해 개별 쇼트들의 속도를 전략적으로 달리한다. 즉 빨리 감는 방법으로 대상의 긴박감을 배가하는 것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워보이들을 소개하는 쇼트들은 자동차들의 질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속도를 조작한다. 마치 다른 종류의 인류를 목격하는 듯한 엑조티즘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철저하게 전쟁기계로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후 이 영화는 질주의 숙명을 위해 내달린다. 육중한 기계들이 자신들의 물질성을 증명하듯, 폐허의 사막을 모래바람과 함께 질주하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폭풍 속 자기장 속으로 질주한다. 거대한 폭발들과 그 순간 누군가의 시점인지 모를 상태로 제시되는 파편화된 쇼트들 (오로지 폭발의 외양을 가장 스펙터클하게 제시할 수 위치에서 구성된 쇼트들)은 이미지의 지배적 위치를 보장하기 위해 주로 공중 부감 쇼트와 롱숏들로 구성된다. 이 순간 관객들이 체험하는 영화적 속도는 일명 ‘라이딩 영화’라 불리는 체험 영화로서 구성된다. (실제로 1950년대, 미국에서 영화산업이 위축되자, 산업은 TV와 다른 영화적 체험을 강조하기 위한 거대한 스펙터클 구성에 골몰한다. 이때 등장한 것이 3D의 광범위한 활용, 와이드 스크린,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네라마나 아이맥스와 같은 그 어떤 매체도 제시할 수 없었던 거대한 크기의 제공이었다. 특히 시네라마나 아이맥스는 서사가 아니라 주로 공중에서 촬영한 나이아가라 폭포나 롤러코스터 같은 이미지들을 롱테이크로 포착해 관객들로 하여금 체험을 하는 듯한, 라이딩 영화 경험을 제공하였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6. 2015년,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서사를 배제하는 경향으로 나아간다. 거의 유아적 수준의 지능만 있다면 이해하고도 남을 스토리와 캐릭터가 제시되고 영화의 대부분은 거대한 ‘스펙터클’로 구축된다. 이 스펙터클이 가 닿고자 하는 끝점에는 롱테이크 전략(탈육화된 시선의 전능성과 지배의 감각) 혹은 극단적 쇼트 분할(주로 극사실주의에 기반한 클로즈업 쇼트들)로 제시되는 ‘영화적 체험’의 쾌락이 자리한다. 영화는 백 년 이상의 역사적 서클을 한 바퀴 순환하고 결국 초창기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테크놀로지 매체가 구성할 수 있는 형식적 쾌락으로 되돌아왔다(매혹의 시네마). 디지털을 동원한 할리우드 영화들이 가 닿고자 하는 것은 결국 3D와 이미지의 극사실주의(라이브 액션과 CG의 구분이 불가할 정도의 사실주의)를 통해 비매개의 환상을 획득하는 영화적 체험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영화의 최전선일까? 초창기 영화가 그랬고, 50년대 극장의 위기와 함께 찾아왔던 영화체험의 극대화가 그랬듯, 지금 영화도 어떤 전환점(디지털의 광범위한 확장과 산업 시스템의 전환,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매체 시대에 반복되는 극장의 위기)을 돌파하는 하나의 방법처럼 보인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이 강조하는 테크놀로지 그 자체의 경이로움과 매혹에 탐구하는 역사적 순환의 한 국면 말이다. 어쨌거나 산업이 추동했던 영화 미학과 매혹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된다. 초창기 영화나 지금 영화나 그것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영화는 운동이며, 질주이며, 그래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경험하는 매혹의 스펙터클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번 충무로뮤지컬영화제 프리페스티벌(ChungmCHIMFF 2015)의 폐막작은 영화가 아니라 시나리오 리딩 공연이었던 ‘< 만추 >를 읽다’였다. 혹시 보셨는지? 나는 영상자료원에서 했던 공연을 먼저 보았다. <만추>는 네 번이나 리메이크되었지만 이만희 의 원본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우리가 이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녹음대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런 공연뿐이다. < 만추 >를 읽다, 공연 현장 이 칼럼에서 내가 맡은 역할도 필름이 사라진 영화를 재구성하는 일이니, ‘< 만추 >를 읽다’의 작업은 내 작업과 여러모로 겹치는 구석이 있다. 그렇다면 내 식으로 시나리오 리딩 공연의 작품을 선정해보면 어떨까? 몇몇 ‘거장’의 작품들을 놓고 고민한 끝에 김기영 의 64년 작 < 아스팔트 >를 골랐다. < 하녀 >와 같은 걸작을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결점이 많은 작품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런 낭송에 어울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김기영의 그 독특한 대사 톤을 따라 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후반부의 몇몇 액션은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대사의 비중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제목의 의미는 뭐냐고? 도입부의 내레이션을 보라. 여기에 누가 어떻게 살고 있나 그건 아무도 모른다. 검은 거미줄과 같은 아스팔트 길위로 서로 노리고, 서로 겨누고, 아는것은 단 한사람 자기뿐일거다. 김진규 가 연기하는 김 형사가 석원근이라는 강도를 체포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시작부터 이런 대사들이 속사포처럼 튀어나온다. 노파: 석원근의 어머닙니다. 형사 머리 깐 죄는 얼마나 더 받아야죠? 김형사: 공짭니다. 허나, 그 버릇 어머니가 가르쳐 주셨읍니까? 노파: 모두가 내 죄지요. 그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론 짐승보다 다 가난해서 그애에게 맛있는 음식도 못 먹이고 깨끗한 옷도 못 입혀 애미 구실을 못했어요. 그래, 나쁜짓을 해도 염치가 없는것 같아 채찍을 못들었어요. 김형사: 언젠가 절도로 잡힌 젊은 사람의 어머니가 찾아와서 살려달라기에 놔줬더니, 얼마 못가 살인을 저질렀읍니다. 말하자면, 내가 살인을 한 셈이죠. 그날부터 난 용서없이 죄인을 형무소로 보냅니다. 그리 사실적이라고 할 수 없는 대화지만 압축률과 속도가 엄청나다. 대화가 두 번씩 오갔을 뿐인데 벌써 김 형사가 어떤 인물인지 보인다. 김 형사( 김진규 ) 하여간 그는 20년 경력의 민완 형사이다. 범죄자를 잡은 상으로 받은 ‘양옥집’에서 아내, 애 둘과 함께 사는데 (잠깐, < 하녀 >와 공간과 설정이 은근히 비슷하지 않나?) 미국에서 과학수사를 공부하고 왔다는 인텔리 후배들에게 벌써 치이고 있다. 위의 대사가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체포되었던 석원근이 병원을 탈출해, 그 엘리트 후배 신 형사와 다시 잡으러 가야 한다. 석원근의 집으로 간 두 형사는 그의 누이동생인 현숙을 만나는데 김기영은 이 캐릭터에게 오좀싸개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신 형사가 현숙에게 수작거는 대사를 들어보라. 신형사: 아가씨, 별명이 오좀싸기라면서요? 현숙: 처녀 쌍통 깨는군요! 신형사: 절도를 저즐렀다면서? 현숙: 향수가 탐이 났어요. 신형사: 아--. 애인 때문에? 현숙: 몸에서 냄새가 나서요. 이동리엔 목욕탕두 없거든요. 신형사: 으-- 오좀 냄새 때문이군! 분명 신 형사는 현숙에게 호감이 있는데 이런 여자에게 한다는 소리가 “아-- 휴, 오좀냄새 나는구나! 하하하...”라니 참 김기영 스럽게 원초적이라고 할 수밖에. 척 봐도 석원근은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영화가 그의 가족에 집중하는 것은 김기영이 이 영화를 만들면서 그가 젊은 시절에 보았던 암흑가 배경의 30년대 프랑스 멜로드라마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상업적 타협을 할 수밖에 없어 중간엔 <케이프 피어> 비슷하게 변했지만. 그래도 이 영화에는 범죄자와 형사 가족의 일상 묘사가 기대보다 훨씬 많은 편이다. 신 형사와 현숙은 데이트를 하고 김 형사의 가족 묘사도 상당히 길게 볼 수 있다. 그러는 동안 탈출한 석원근이 현숙의 밀고로 잡히고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석원근은 형무소에서 최태원이라는 미치광이를 만났다. 그는 체포 과정 중 일어난 총격전으로 아내를 잃었는데 그는 곧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다. 그가 과연 자기 아내를 죽이고 그 사건의 상금으로 ‘양옥집’을 산 형사를 용서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는 복수를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화가 아니랄까 봐, 이 영화에서도 부동산 재산은 엄청 큰 무게를 가진다. 김형사: 양옥집이 원수다. 내가 상금을 받았다는 영수증처럼 자리잡고 있는 거다. 그때 나는 지휘자였고 내가 상금을 타고 내가 계급이 올라간것이 최태원 뿐만 아니라 세상이 내가 그의 처를 죽인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출옥한 최태원의 복수 목표가 그가 아닌 그의 아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셰익스피어스러운 독백이 하나 더 이어진다. 시나리오 리딩 공연이 현실화된다면 이 대사도 한번 듣고 싶다. 김형사: 어쩌면 좋으냐! 어제까지 무서운 것이 없든 형사가 여편네를 죽인다는 바람에 고양이 머리처럼 아물아물하게 생각되고 열병을 앓고난것 처럼 내 팔의 힘을 뺏어갔다. 최태원이는 내 처를 죽이러 온다. 도망 보낼까? 안돼? 내 처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줄 순 없다. 김기영 은 김 형사 역의 김진규 이미지가 지나치게 우유부단해서 미스캐스팅이었다고 불평했던 모양인데, 이런 독백들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고도 그렇게 생각한 건 좀 너무했던 거 같다. 이 영화의 김 형사는 더티 해리보다 햄릿에 더 가깝다. 그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결국 김 형사는 사표를 제출하고 경찰은 그를 미끼로 최태원을 잡기로 결정한다. 사방에 경찰이 깔리고 마침내 최태원은 그에게 협박 전화를 건다. 그와 아내가 ‘양옥집’ 테라스에 앉아 그의 표적이 되지 않는다면 살인이 일어날 것이다. 정말 총격이 일어나지만 셜록 홈스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던 게 분명한 트릭으로 김 형사의 부인은 목숨을 건진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부인은 가출하고... 그렇다. 또 독백이다. 김형사: 처는 갔다. 처가 없는 생활, 그건 죽엄의 생활이었고나! 오늘 절실히 느꼈다. 세상에 의지했던 것이 싫거나 좋거나 내 처였다는걸 이제 생각하니 내 처에게 너무 무관심했고 너무 고생시켰어.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나의 처는 날 원망할지도 모른다. 이 뒤에 벌어지는 최태원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그렇게 재미있거나 설득력 있지는 않다. 하지만 시나리오 리딩에서 굳이 이 부분에 집중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김 형사의 가족 묘사(“난 이제 더 못먹겠어. 배가 부르니 대통령두 부럽지 않어!” 같은 대사를 하는 형사 아들 연기는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나 석원근 가족의 묘사는 건질 게 많을 것이며 여러 의미로 빵빵 터질 대사들도 많다. 그리고 김 형사 역의 배우에겐 앞으로 정복해야 할 수많은 독백들이 남아있다. 그의 마지막 대사도 독백이다. “내버려 두자, 울어본 사람이...” 하지만 이것까지 다 읽어줄 필요는 없겠지. 시나리오의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