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 감독
- 가와세 나오미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무라카미 니지로, 요시나가 준, 스지모토 테타, 마츠다 미유키, 와타나베 마키코, 무라카미 준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영화들은 대부분 그녀의 고향인 나라의 숲을 배경으로 한다. 칸느 영화제에서 환대를 받은 < 너를 보내는 숲 >이나 < 수자쿠 >는 아예 바람이 불어오는 나라의 숲으로 영화의 오프닝을 열었다. 그녀의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들, 예컨대 바람에 흔들리는 숲, 마을을 훑어가는 일렁이는 바람은 인간을 품은 자연과 그 속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포함해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어루만지는 손길처럼 기능한다. 이제는 매우 익숙해진 이야기이지만 그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소중한 이들과 이별하고 그 상실에 몸부림치면서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을 터득해 왔다. 때로 이별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죽음이라는 근원적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실의 가장 결정적인 형식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은 인간의 이해와 이성적인 대응 능력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체험임에 분명하다. 그 처연하고 압도적인 체험 앞에서 그녀는 고통을 응시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그의 인물들은 거대한 자연의 섭리에 맞서기보다는 순응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려 애쓴다. 결국 그러한 노력은 그의 영화에 ‘치유의 영화’라는 레테르를 붙여 주었다. 이 모든 일들은 나라의 숲을 배경으로 일어난다. 그런데 이 영화 <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는 숲이 아닌 바다에서 시작한다. 계절은 여전히 여름이고 햇볕이 쨍하던 날씨에 순식간에 폭우가 쏟아지는 것 역시 다를 바 없지만 이 곳은 나라의 숲이 아닌 아마미의 낯선 바다다. 영화의 첫 장면은 거대한 파도가 방파제를 넘어 몰려오는 바다에서 시작한다. 그 날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등에 문신을 한 사내가 죽었고 그것을 소년 카이토와 소녀 쿄코가 목격한다. 그 죽음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사건’인가 ‘사고’인가 분분해 한다. 그것이 사건이든, 사고든 이제 소년과 소녀는 그들 앞에 도발적으로 던져진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12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을 헤쳐 가야 한다. 이 도발적인 오프닝 장면 직후에는 오랜 세월 바다를 지켜온 카메 할아버지가 염소를 죽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에서 그는 두 번 염소를 죽인다. 첫 번째 염소의 목을 그어 피를 받는 장면에서 염소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확인한 노인은 “수고했어”라고 위로하듯이 염소의 등을 토닥인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두 번째 참수 장면에서는 카이토와 쿄코가 함께 제의에 참여한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어내는 염소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쿄코는 염소의 나지막한 최후의 신음 소리가 멈췄을 때 “영혼이 빠져 나갔어.”라고 조용히 말한다. 이렇듯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대면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워 간다. 영화는 초지일관 묻는다. 죽음은 무엇이며 그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쿄코의 엄마는 신을 모시는 무녀이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카메 할아버지는 “사람은 누구나 죽어. 신도 다 죽는거야.”라고 말한다. 그렇게 영화는 죽음을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실 죽음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곧 삶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곧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가와세 나오미 영화에 무수히 등장하는 질문은 바로 “살아있습니까?”라는 것이었다. 거칠게 말하면 그녀의 영화는 “살아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살아있어!”라고 응답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 너를 보내는 숲 >에서 스님과 주인공 시게키가 ‘살아있음’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장면을 기억해 보자. 이 장면은 시게키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전에 “나는 살아있습니까?”라는 그의 목소리부터 도발적으로 던지면서 시작된다. 여기서 감독은 ‘나는 살아있습니까?’라는 질문이 특정한 개인의 질문이 아니라 영화가 던지는 화두임을 분명히 한다. 33년 전에 죽은 아내에 사로잡혀 있는 시게키 못지 않게 여주인공 마치코 역시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의 플래시백 속에서 남자는 그녀를 밀치며 거칠게 거듭 묻는다. “왜 유세이의 손을 놔버렸어? 왜 나는 살고 유세이는 죽은거야? 왜 난 산거냐?” 시게키의 장면과 마찬가지로 목소리부터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이 장면에서 마치코는 힐난하는 남자를 향해 그저 “미안해”라고 말한다. 왜 그녀는 사과하는가? 그녀의 죄책감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과거의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들에게 현재는 온전한 시간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이 고통의 응어리를 풀어야 한다. 사라진 것을 보내주지 못하는 마음, 죄책감, 외로움, 상실감을 비워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스러운 일이다. 마치코와 시게키가 살아가는 유령같은 현재는 그나마 과거의 진실을, 부재를, 상실을 부인함으로써 근근이 유지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부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나마 삶을 지탱시켜 온 환상 혹은 망상이 깨어짐을 의미한다.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죽음을 부인할 기제가 완전히 파괴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순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가능한 한 그 시간을 유예시켜 왔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다. 언제까지 그 시간이 유예될 수는 없다는 것을. 언젠가 상(喪)은 끝날 것이다. 영화가 끝날 무렵 두 주인공은 비로소 각자의 시간을 받아들이고 비로소 마음 속에 붙잡고 있던 이들을 떠나 보낸다. 제의를 마친 뒤에 마치코는 “우리 살아있죠?”라고 묻고 시게키는 “살아있어.”라고 대답한다.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바로 이 영화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실감(實感), 에너지의 시간일 것이다. “살아있습니까?”라는 질문은 가와세 나오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에서도 변함 없이 지속된다. 차이가 있다면 < 너를 보내는 숲 >의 주인공들이 매우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야 상실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애도하면서 고통을 끊어내는 것과 달리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의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영화 속 어른들은 이미 삶의 체험을 통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방식을 터득한 듯 하다. 카메 할아버지도, 쿄코의 엄마 이사도, 아빠도. 그리고 카이토의 아빠도. 문제는 아직 어린 소년과 소녀이다. 죽음을 자연스런 섭리로 받아들이기에 그들은 아직 너무 어리다. 그럼에도 쿄코는 엄마 이사의 죽음을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려 한다. 마을 사람들과 이사의 가족은 죽은 이를 위한 노래인 “이쿄 캬나안”을 부르면서 그녀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다. 이사 역시 춤을 추며 자신의 마지막 길을 간다. 이 제의에 쿄코 역시 진심으로 동참한다. 이 순간 죽음은 그저 회피하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 삶과 연결된 하나의 국면이 된다. 그러한 인식 속에서 그들은 죽음이라는 상실의 고통을 넘어선다. 이러한 선택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오랫동안 죽음과 상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탐구해 온 가와세 나오미의 깨달음의 결과일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영화의 공간을 바다로 옮겨온 선택과도 관련 있어 보인다. 가와세 나오미는 그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 아주 오래 전 이혼을 하고 딸의 곁을 떠난 부모를 대신해 그녀를 키워준 양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양어머니가 태어난 아마미의 바다로 가기로 결심했다. 한 존재의 죽음의 순간에 그 존재가 시작된 곳, 탄생의 기원을 떠올린 것이다. 그것은 가와세 나오미 자신의 방식으로 양어머니의 죽음을 수용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낯설고 두려운 곳, 자연이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 인간 존재의 미약함을 깨닫게 하는 바다에 대한 두려움은 도쿄에서 온 소년 카이토의 심리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수영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는 “바다는 무서워. 바다는 살아 있잖아.”라고 말한다. 카이토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런 카이토에게 이 영화의 서사는 순식간에 삶을 집어 삼키는 바다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그것과 융합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것이 카이토 방식의 치유이다. 쿄코와의 첫 섹스를 주저하던 카이토가 마침내 쿄코와 섹스를 한 뒤에 완전한 나신으로 바다에서 헤엄치는 마지막 장면은 소년 소녀가 그들을 사로잡은 두려움과 상실의 공포를 극복하고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바다와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바다와 하나 되는 순간이 있다”는 아빠의 말을 전하며 그게 “섹스와 비슷한 것 같다”던 쿄코의 당돌한 말처럼 소년과 소녀는 섹스를 하면서 어른이 되고 바다라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간다. 그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소년 소녀의 성장이다. 그의 영화를 통해 수없이 반복되던 질문과 외침 “살아있습니까?” “난 살아있어.”처럼 소년 소녀는 살아서 펄떡거린다. + 어느새 가와세 나오미의 포용력이 한결 더 커진 것 같다. 긍정의 힘 역시 세졌다. 그녀의 전작들이 토해내는 영화였다면, 그리고 차안과 피안 경계의 이쪽에서 조심스럽게 멈춰 선 영화였다면, <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는 그 경계를 넘어간다. 이제 가와세 나오미는 자신을 치유하는 영화에서 타인까지도 치유하는 영화를 만들게 된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보내는 법을 배운다. 얼마전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인의 죽음을 대하고 그의 미소 짓는 영정 사진 앞에서 수없이 고개를 가로 젓는 와중에 이 영화를 무수히 떠올렸다. 희미한 미소를 띠고 춤을 추며 떠난 이사를 생각하면서 나는 그 죽음을 힘겹게나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해외에 비해 자국 내에서 비교적 저평가되고 있는 감독이다(고바야시 마사히로 감독도 그러한 예이다). <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가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 되고, 가와세 나오미가 ‘자신의 최고 걸작’이라고 소감을 밝혔을 때도 일본 내의 반응은 무덤덤한 편이었다. 칸에서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 일본 내의 이러한 반응은 좀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도쿄를 떠나 고향인 나라 현을 기반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아웃사이더이며(그녀는 자그마한 규모이기는 하지만 나라국제영화제도 개최하고 있다), 순탄치 못한 개인적 삶을 살아온 여성감독이다. 지역의 독립영화와 굴곡진 삶을 살아온 여성감독에 대한 편견이 그녀를 거장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는 확실히 그녀의 영화경력에 있어 정점에 서 있는 작품이다. ‘가족’과 ’자연’은 그녀가 지난 20여 년간 천착해온 주제이다. 특히, 가와세 나오미 감독에게 있어 자연은 인간의 삶 그리고 죽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신비의 존재이며, 또한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아마미의 조그만 섬마을. 고등학생인 카이토는 아버지와 헤어진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고, 카이토와 가깝게 지내는 교코는 암에 걸린 어머니 이사의 임종을 앞두고 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이사는 가족들 품에서 숨을 거두고, 어머니의 불륜을 의심한 카이토는 태풍으로 인해 소식이 끊긴 어머니가 살아있음에 안도한다. <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에서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자연에 귀의하는 죽음을 말한다. 이사가 죽음을 맞이할 때,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노래와 춤으로 보낸다. 섬마을 사람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은 철저하게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다. 이사의 임종의 마지막 순간,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릴 때 이사는 ‘엄마’를 부르며 숨을 거둔다. 어쩌면 바람이 곧 엄마였을지도 모른다. 또한, 가와세 나오미감독은 자연과 인간의 삶을 ‘순환’의 의미로 바라본다. 이사가 세상을 떠난 뒤, 카이토와 교코는 그들만의 성년의식을 치른다. 그리고, 바다를 두려워하던 사이토는 바다에서 교코와 함께 수영하며 자유와 평온함을 얻는다. 그들은 이렇게 성장해 가며 훗날 누군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며, 세대는 그렇게 이어져 간다. 그리고, ‘순환’에는 ‘희생’과 ‘고통’이 따른다. 영화의 도입부에 노인이 염소를 죽이는 장면 역시 이러한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이처럼,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에서 인간의 삶의 순환구조는 자연과 다를 바 없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보여주는 자연과 인간의 삶에 대한 이러한 통찰력은 구도와 카메라 워킹, 편집, 사운드 등 모든 영화적 기법에 녹아 들어가 있다. 섬마을 바닷가의 거친 파도, 약하거나 거세게 부는 바람, 마당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수백 년 된 반얀 트리,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등은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미묘한 심리변화, 그리고 성장 과정을 담아내는 상징적 의미로 작용한다. 그리고, 따사로움과 슬픔, 격정, 아름다운 기억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숱한 감성을 담아내는 그릇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면 하나하나는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고, 사운드 역시 이들 장면들과 세심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결국 영화 전편을 통해 장면 하나하나가 어떻게 의미를 연결하고 있는 가를 되새겨본다면, 이 작품은 퍼즐 맞추기와 같은 흥미를 선사한다. 이처럼,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현존하는 감독 중에서도 가장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그녀의 철학은 그녀만의 영화적 스타일과 맞물려 진화하고 또 깊어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