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녀유혼
- 감독
- 진위문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임해붕, 원영의, 황점, 황민민, 양채니, 여서은, 진혜림, 진소춘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라고 이를 기리려는 사회 각계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영화계에서도 식민지시기의 항일을 다룬 영화들이 여러 편 기획되었다. 1월에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 < 말모이 >가, 2월에는 유관순 열사에 관한 영화 < 항거: 유관순 이야기 >와 ‘자전차왕’으로 불렸던 엄복동 이야기를 다룬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가 개봉하였고, 3월에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여성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 < 1919 유관순 >가 개봉한다. 이 중에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영화만 2편으로, 3.1운동의 상징으로서 유관순 열사가 지니는 위상을 새삼 말해준다. ‘3.1운동’이라는 키워드로 한국영상자료원의 KMDb 를 검색하면 십여 편의 영화가 뜨는데, 이 중 반절은 유관순 열사에 대한 전기물이다. 이와 같이 유관순 열사는 독립투사 중에서 독보적으로 여러 번 영화화되며 3.1운동 하면 떠오르는 표상을 형성했다. 3.1운동 백주년에 개봉하는 유관순 열사에 대한 두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극영화, <1919 유관순>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유관순 열사가 식민지시기부터 널리 알려졌던 것은 아니다. 그가 3.1운동을 대표하는 위상을 지니게 된 것은 해방 이후 남한 단독정부가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며 정체성을 구성해가는 과정과 맥을 함께 한다. 충남 천안의 양반가 출신이며, 1919년에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부모는 돌아가시고 오빠와 숙부는 투옥되는 등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났음에도 일제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투쟁하다 열여덟의 나이에 옥중에서 죽어간 이화학당 학생이 기독교계와 국가 차원의 지원 속에 남한의 영웅으로 발굴된 것이다. 1) 북한에서는 유관순 열사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의 역사 서술에서조차 결락되어 있다는 사실 2) 은 분단 시대 남북한 영웅 발굴의 상이한 맥락을 방증한다. 이러한 유관순 열사가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데에는 무엇보다 ‘국민학교’ 교과서의 영향이 컸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한국전쟁 이후 꾸준히 음악 교과서에 실렸던 동요 「유관순」이다. 이 동요는 「삼월의 하늘」이라는 제목의 동시로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으며, 박두진의 「3월 1일의 하늘」과 함께 유관순 열사를 ‘누나’로 호명하며 3.1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이 가사는 「스승의 은혜」, 「코끼리 아저씨」 등 우리 귀에 익숙한 수많은 동요를 작사했던 아동문학가 강소천이 지은 것이고, 곡을 붙인 이는 한국전쟁 직후 문교부 편수관이었던 나운영이었다. 이 노래는 1953년 휴전 직후 새로운 동요들이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실렸고, 3) 수십 년 뒤까지 아이들의 고무줄놀이에서 불릴 정도로 애창되었다. 그 결과 남한 사회에서 형성되어 오랜 세월 지속된 유관순 열사에 대한 대중적 표상은 노래의 첫 문장이 말하고 있듯이 봄이 오면 환기되는 ‘국민 누나’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미지는 두 번째 문장이 말하고 있는 내용, 즉 감옥에서도 만세를 부르다 고통스럽게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포하는 강직한 성격과 비참한 죽음에 이르는 수난은 유관순에 대한 서사의 핵심이 되었고, 이는 영화로 재현되며 한층 선명한 이미지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 시작은 1948년 계몽문화협회에서 제작하고 윤봉춘 이 감독한 < 유관순 >이다. 이 영화는 1947년에 본격화된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되었고, 당시 기념사업에는 기념비와 동상, 기념관 설립, 도서 출간 및 보급, 국민 교육, 매봉 녹화(綠化)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4) 그 성과로 1948년에 최초의 평전인 『순국처녀 유관순전』(전영택 저, 승문사 간)이 출간되고 5) 영화 <유관순>이 개봉하였다. 1948년 3월부터 이 전기와 영화는 정치적 이벤트와 더불어 묶여 홍보되기도 했는데, 6) 내러티브 면에서도 이후 유관순 이야기에서 널리 회자되는 화소를 공유한다. 그것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유관순은 기독교 정신에 충실했던 구국 소녀로 대한민국의 잔다르크다. ② 유관순의 집안은 충효 사상을 지키는 유서 깊은 선비 가문이다. ③ 유관순의 가족은 3.1운동에 참여하여 부모는 죽고 오빠는 체포되었으며 어린 두 동생은 고아가 되었다. ④ 유관순은 체포되어서도 항거를 계속하다 모진 고문 끝에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 중에서 영화를 통해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던 것은 ③과 ④이다. ③에서 부모가 일본 헌병에게 학살당하고 관순이 어린 동생만 남겨둔 채 체포되는 형국은 ‘누나’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한다. 이 부분에서는 일본 헌병이 동생들이 있는 집에 기름을 붓고 불까지 지르는 것으로 설정하여 일제에 대한 분노를 극대화하기도 했다. 이러한 참담한 상황임에도 ④에서 유관순이 항거를 멈추지 않고 고문에도 굴하지 않음으로써 ‘민족의 누나’가 된다. 무엇보다 유관순이 받은 고문에 대한 묘사는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부분이었다. 이영일 또한 작품해설에서 이 점을 언급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격렬한 충격과 통분(痛憤)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일헌(日憲)에 잡힌 관순이 재판정에서도 항일절규(抗日絶叫)하는 열화(烈火)와 같은 모습과 옥중투쟁(獄中鬪爭), 그리고 끝내 간독(奸毒)한 일제(日帝)에 의해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蛮行)으로 고문치사(拷問致死) 당하는 부분이다.” 7) 영화가 현전하지 않으므로 시나리오로 보자면, 유관순은 체포되어 주모자와 배후를 심문받는 과정에서 “열 손가락을 못으로 찌르고 어린 젖가슴을 불로 지지는” 8) 고문을 당했으며, 수감된 이후에도 밤 9시만 되면 만세를 불러 간수들에 의해 온갖 폭행을 당했다. 그 잔혹함이 절정에 달하는 부분은 간수들이 유관순을 지하실로 끌어가 하복부에 호수를 대어 자궁을 파열시키고 칼로 내려쳐 일곱 토막을 내는 것이다. 증언에 의하면 유관순 열사가 옥중에서 구타를 당하여 방광 파열상을 입었고 그로 인한 합병증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되며 더운 날씨에 방치되어 시신이 부패하기는 했어도 절단된 바는 없다고 한다. 9) 유관순 열사가 일제에 굽히지 않고 항거하다 옥사한 것은 사실이나 이를 유난히 잔혹하게 묘사한 것은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러한 잔혹함이 십대 소녀의 여성성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구체화된 것은 히스테릭하다. 유관순 열사를 잔다르크와 같이 신의 말씀에 따라 민족을 섬기는 순결한 처녀로 주조해 놓고 그 신체를 무참하게 유린함으로써 극적 대비를 통한 일종의 국민 선동 효과를 노리고 있는 점은 현재의 시각으로는 도착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당시 이 영화는 “서울 총인구의 1할 이상 동원”하는 흥행 10) 을 했고, 이후 유관순 열사에 대한 영화들에 기본 틀을 제공했다. 윤봉춘은 <유관순>을 1959년과 1966년에 두 번 더 제작한다. 2019년에 <항거: 유관순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유관순 열사에 대한 극영화는 4편 제작되었는데 그중 3편을 윤봉춘이 연출한 것이다. 그리고 1970년에 또 하나의 유관순 전기인 『타오르는 별: 유관순의 일생』(박화성 저, 문림사 간)이 출간되면서, 이를 저본을 한 영화 < 유관순 >( 김기덕 , 1974)이 제작된다. 필름이 현전하는 것은 1959년, 1974년 영화뿐이고 1966년 영화는 1948년 버전과 마찬가지로 시나리오만 남아있다. 11) < 유관순 >(윤봉춘, 1959)의 포스터. < 폭군 연산 >(신상옥, 1962)에서 장녹수를 연기하면서 요부(妖婦)로서의 이미지가 굳어지기 전의 도금봉이 유관순 역할을 맡았다. 1959년 영화에서는 도금봉 이 타이틀 롤을 맡아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난 유관순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유관순의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과 주인공 내면의 거리를 좁히려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개봉 당시 그다지 좋은 평을 듣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1958년을 기점으로 한국영화가 질적으로 비약하는 분위기 속에서 윤봉춘의 ‘안이한 연출’이 비판을 받았다. 또한 < 황진이 >( 조긍하 , 1957)로 데뷔하여 ‘팜므파탈’의 이미지가 있는 데다 주로 발랄한 도회 여성을 연기했던 도금봉의 페르소나는 대중이 기대하는 유관순의 표상과는 어긋남이 있었던 듯하다. 재기 넘치는 유관순의 캐릭터는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신선한 면이 있으나 당시에는 “내면적 공감을 못 주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12) < 유관순 >(윤봉춘, 1966)과 <유관순>(김기덕, 1974)의 포스터. 1966년 영화에서는 엄앵란 이, 1974년 영화에서는 문지현 이 유관순 역할을 맡았다. 1966년 영화는 시나리오로 볼 때 민족 단결이 전반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1959년 영화에서는 일본 앞잡이로 끝났던 ‘임’이 1966년 시나리오에서는 유관순의 활동을 눈감아 주고 마지막에는 만세 시위에 동참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1959년 영화에서 관순의 오빠 관옥은 친구의 자백으로 체포되는데, 1966년 시나리오에서는 친구가 관옥을 도망시키고 희생된다. 또 하나 1966년 시나리오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만세 시위를 밀고하겠다고 애덕(관순의 사촌이자 동지)을 협박하여 혼인 약속을 받아내는 칠성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아우내 장터에서 애덕과 함께 죽음으로써 파렴치한 거래는 무화되고 그의 죄 또한 무마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만세운동은 유관순이라는 영웅 한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먹구 살기 위해” 숨죽이고 있었던 조선인들의 “양심, 눈물, 조국과 겨레를 향한 사랑”이 터져 나온 것으로 의미화된다. 이와 같은 주제의식이 잘 드러나는 지점은 매봉에서의 기도 장면이다. 이전 영화에서는 관순 홀로 매봉에 올라 기도했던 것과 달리 1966년 시나리오에서는 애덕과 을순이 관순을 따라가 셋이 함께 기도한다. 또한 1948년 시나리오와 1959년 영화에서는 형량을 낮추려는 변호사의 노력에 아랑곳없이 유관순이 끝까지 항거하며 일제의 잘못을 논리적으로 비판했는데, 1966년 시나리오에서는 유관순의 대사가 변호사의 몫이 되고 청중이 이에 호응하는 것으로 변개된다. 요컨대 1966년 시나리오에서는 당시 모든 조선인은 한마음 한뜻으로 독립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음을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1974년 영화에 가면 전체적인 서사구조 면에서는 앞의 영화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면서도 가부장적인 위계와 남녀유별(男女有別)이 강조된다. 이는 유신체제하의 위계적인 분위기와 함께 원작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박화성의 『타오르는 별』은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2장이 ‘효도의 길’이다. 이 부분에서 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기집애”가 아비 말을 거역하고 말대꾸를 한다는 이유로 관순의 뺨을 때리고는, 여자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을 시작으로 가문의 위대함과 충효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13) 1974년 영화에는 이 부분이 그대로 삽입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유교적인 도덕관념이 강조된다. 그러면서 이전 영화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유와 평등이 있음을 세계만방에 고”하기 위해 “대한의 잔다르크”가 되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봉화를 올렸던 관순이 1974년 영화에서는 거사를 다 조직해 놓고도 “여자의 신분으로 너무 앞에 나선다는 인상을 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니 어르신들께서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달라” 하는 이중적인 성격이 된다. 이에 1948년 윤봉춘의 시나리오에서부터 강조되었던 기독교 이념은 가부장적 민족주의와 결속하며 협소해지고 단선화된다. 그럼에도 관순이 아버지의 비합리적인 행동에 대해 따지는 부분에서는 1970년대 젊은 세대의 변화와 함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감지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그 다음에 이어지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더욱 시대착오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다가오며,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분열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제작된 영화들은 역사에 묻힐 뻔했던 유관순이라는 무명 여성투사를 세상에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이 영화들에서 유관순이라는 인물은 놀라운 신념과 결기의 소유자로서 경이롭고 거리감을 주는 ‘민족의 영웅’이었지 그녀의 고뇌와 아픔에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문제적 개인’이 아니었다. 그녀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녀에게 내적 갈등은 없었는지 등에 대한 성찰은 이 영화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유관순은 본래 기개 있는 양반가에서 태어난 데다 근대 교육을 받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므로 용감하고 헌신적으로 일제와 싸울 수 있었고 장렬하게 죽어갈 수 있었던 ‘본투비 열사’일 뿐이다. 이와 같이 인물을 화석화시키는 편의적이면서도 경직된 이야기 틀은 입이 찢어지면서도 공산당이 싫다고 외치다 죽어갔다는 소년의 전설을 방불케 하는 면이 있다. 게다가 계몽과 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반복된 영웅화의 관습 속에서 유관순 열사가 나이 어린 여성으로서 겪은 형극이 전시되며 대중의 흥미를 끄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유관순이라는 이름에 따라다니는 수많은 괴담들이 주로 화장실이나 목욕탕과 같은 음습한 공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가장 성스러운 존재로 추앙하면서 결과적으로 한 인간을 ‘처녀와 형극’의 틀에 가둔 영웅 도식의 그늘을 드러낸다. 관객들에게 유관순 열사는 그만큼 우리와는 다른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을 수 있다. 또한 애국애족에 가려진 한 여성의 고통과 원한을 대중이 감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유관순 열사는 한 시대를 뜨겁게 살다간 한 인간의 이야기로, 젊은이, 학생, 여성, 시민의 관점에서 다시 접근되고 서술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40여 년간 유관순 열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여러 매체로 다루어졌음에도 그 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더구나 국책영화 시대가 끝나면서 극영화로는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단일한 역사에 대한 반성과 해체가 시도되며 역사 주체의 다원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기존의 영웅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탐구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들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극영화 < 항거: 유관순 이야기 >( 조민호 , 2019)가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그 동안 축적되어 온 유관순 열사에 대한 사료와 고증을 바탕으로, 비로소 인간 유관순을 조명한다. 이전 영화들이 민족 영웅으로서의 형상화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근대 기독교 교육을 받아 이상주의적 신념을 지녔지만 나이가 어려 경험이 없었던 학생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이 영화 또한 유관순의 형상화에서 빠지지 않았던 순결한 처녀의 형극이라는 요소를 취하고 있으나 그 배치를 달리한다. 여기에서 시공간을 유관순이 죽어갔던 서대문형무소의 1년으로 한정하고 여감방 8호실에 집중한 것, 그리고 흑백을 사용한 것은 주효했다. 우선 여성성은 8호실에 함께 수감되었던 동료들과의 연대를 통해 포착되고, 그녀가 겪은 수난은 내면의 재현으로 이어지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유관순이 서대문형무소에 도착한 첫날 낯선 감방에서 이화학당 선배를 만났을 때 흘리는 눈물, 간수가 관순을 끌고 나갈 때 그 앞을 막아서는 동료들, 고문 받고 돌아온 관순을 보살피는 손길들, 그리고 자신을 고변한 여인의 아기를 위해 젖은 기저귀를 체온으로 말리는 관순의 배려는 남성 옥사의 상황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연대를 보여준다. 그래서 유관순의 내면이 가장 사무치게 다가오는 부분은 특별 감형으로 모두 석방된 8호실 감방에 고문 받고 돌아온 관순이 홀로 누웠을 때다. 모두가 앉을 자리조차 없이 좁아 터졌던 감방이 훌쩍 넓어져 있는데, 만신창이가 된 몸에 표정 없는 얼굴로 누운 관순을 둘러싸고 있는 사면의 벽은 그녀의 내면을 통절하게 대변한다. 이는 지금까지의 유관순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인간 유관순의 외로움이다. 유관순을 고문한 정춘영의 표현대로라면 “조금만 비겁했으면 될 것을”, ‘바보 같이’ 그러지 못했던 한 십대 소녀가 대면한 엄혹한 고독, 그것에 굴하지 않은 것이 결국 ‘항거’였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이로써 이전 영화들이 노정해온 포르노그래피와 같은 전시성 대신 배운 대로 실천하며 밝고 굳세게 살고자 했던 한 학생, 부모를 한날한시에 잃고 절망과 원한에 사무쳤던 한 소녀, 대단한 대의를 위해서라기보다 차마 비겁할 수 없었던 인간 유관순이 살아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성과로 개정된 현행 헌법의 ‘전문’은 긴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서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적 정통성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3.1운동을 비롯한 이 역사적 사건들을 한국영화가 어떻게 재현해 왔는지 살펴보면 그 앙상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며 정부는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여 최고등급으로 격상시켰다고 한다. 이는 물론 합당한 일이지만 더불어 실천되어야 할 것은 유관순 열사처럼 역사에 묻혀있던 무명의 독립투사들을 역사화하는 일일 것이다. 이와 함께 이제 ‘민족 영웅’에도 '민주주의적'으로 접근하는 다양한 영화들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1) 유관순 열사가 3.1운동의 상징적 표상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논문이 제출된 바 있다. 정상우, 「3.1운동 표상 ‘유관순의 발굴」, 『역사와 현실』 제74호, 한국역사연구회, 2009.12, 235~263면; 임종명, 「탈식민시기(1945.8~1948.7) 남한에서의 3.1의 소환과 표상」, 『대동문화연구』 제66호,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9.6, 297~333면; 정종현, 「3.1운동 표상의 문화정치학: 해방기~대한민국 건국기 3.1운동 표상을 중심으로」, 『한민족문화연구』 제23집, 한민족문화학회, 2007.11, 239~276면; 「유관순 표상의 창출과 전승: 해방 이후 제작된 유관순 영화의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연구』 제36집,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9.6, 155~209면 참조. 2) 허동찬, 「3.1운동을 보는 북한의 시각」, 『북한』, 1989.3; 정종현, 위의 글(2009.6), 157면에서 재인용. 임경석, 「3.1운동을 보는 남과 북의 시각」, 『통일시론』 2, 1999; 정상우, 「3.1운동 표상 ‘유관순의 발굴」, 『역사와 현실』 제74호, 한국역사연구회, 2009.12, 236면에서 재인용. 3) 최은경, 「한국 동요·동시 정전화 연구」, 박사학위논문, 인하대학교 한국학과, 2015.2, 62면. 4) 정상우, 앞의 글, 250면. 5)「유관순」 노래를 작곡한 나운영이 문교부 편수관이었듯이, 유관순에 대한 최초의 평전 『순국처녀 유관순전』(1948)을 쓴 전영택도 문교부 편수관이었다. 이 책은 2015년에 새로 출간되었다.-늘봄 전영택, 『순국처녀 유관순전』, 늘봄, 2015. 6) 「새로 나온 책」, 《경향신문》, 1938.3.27.,2면;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3.27.,2면; 「조선영화사상의 금자탑/ 누구나 한 번은 보셔야 할 영화 순국의 처녀」, 《동아일보》, 1948.4.7.,2면. 7) 이영일, 「<유관순> 작품해설」, 『한국 시나리오 선집 제1권(초창기~1955)』, 영화진흥공사, 1982, 312면. 8) 윤봉춘, 「유관순」, 『한국 시나리오 선집 제1권(초창기~1955)』, 영화진흥공사, 1982, 337면. 9) 이정은, 『유관순: 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 2004, 416~430면. 10)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윤봉춘 편』, 도서출판 소도, 2004, 184면. 11 <유관순>의 역대 시나리오에 나타난 서사의 변이에 대해서는 정종현, 앞의 글(2009.6) 참조. 12) 「내면적 공감 못 주어 <유관순>」, 《동아일보》, 1959.5.31.,4면. 13) 박화성, 『타오르는 별』, 문림사, 1970, 33-61면. <유관순>(윤봉춘, 1959) VOD 바로 보기 KMDb VOD 기획전 < 1919: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보러 가기 시네마테크KOFA < 평화와 화합을 노래하다: 3.1 운동 100주년 기념전>(2019.3.1~13) 보러 가기
세월의 흐름의 무상함을 모든 사람이 말하고 있지만 유명을 달리한 친지를 다시 떠올려 생각할 때만큼 절실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나 자신 원고 청탁을 받고 나서야 그이가 내 곁을 떠난 지 벌써 5년이란 시간의 공백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이와의 첫 만남은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차태진 사장과 극동흥업이라는 영화제작사를 창업하고 전속감독 겸 전무이사라는 이름뿐인 직함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주로 돈을 벌 수 있을 만한 작품을 주로 만들고 있었으며 예술성이 높은 문예물을 외부에서 감독을 초빙하여 만들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몇 친구 중에 군에 장교로 몸담고 있는 괴상한 청년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 회사로 왔을 때 복도에 걸린 스틸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한 듯 입에 침이 마르지 않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은 연기자가 있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 이낙훈 '' 아형이다. 당시 그이는 한운사 선생 원작, 유현목 감독의 < 아낌없이 주련다 >에 출연 중이었다. 그이의 존재를 내게 알려준 그 청년장교는 군인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다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문화예술 부문에도 전문가 이상의 혜안을 갖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 이낙훈 이란 배우는 앞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연기자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하였다. 한 지붕 아래에서 작품을 함께 하고 있지는 않지만 작업을 같이 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러한 엄청난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웠으며 그 부끄러움은 커다란 관심으로 바뀌어 그이를 가까이 만나보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을 급속도로 가깝게 만든 것은 같은 K고등학교 동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당시만 해도 봉건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 사상이 팽배해 있던 시절이다. K고를 나와서 무엇이 할 일이 없어 연극쟁이나 탈렌트 또는 영화판에 몸을 담아야 하느냐고 주위의 멸시와 냉대를 받아야 했던 그런 세상이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나이는 필자가 두 살이 위였고 학년으로는 그이가 나보다 하나 아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직업상으로만 가까웠던 것이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친형제 이상의 교분을 유지하며 상호 간의 집안 대소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돈독한 관계를 지키는 사이가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두 사람은 신혼초였고 우연히도 안사람들의 나이가 동갑내기여서 안사람들끼리의 교분은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능가할 만큼 돈독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하여 그이가 신혼초에 함께 모시고 살던 홀어머니의 소천시에는 ''호상''이라는 중책(?)을 맡아 모든 제의를 주재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필자는 그이의 친가 쪽뿐만이 아니라 처가댁의 여러 친척분들과도 친족 이상의 관계를 맺고 왕래하는 사이가 되었었다. '' 이낙훈 '' 아형은 필자가 감독한 많은 작품에 출연해 주었다. 역할의 크고 작음을 떠나 기꺼이 출연하여 직간접적으로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러 하나하나 모두 연대별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 늦어도 그날까지는 >, < 친정어머니 >, < 용사는 살아있다 >, < 결혼반지 >, < 원죄 >, < 동과 서 >, < 그대 이름은 >, < 섬마을 선생 > 등등이 주요 작품들이다. 그이는 참으로 만능의 연기자였다. 라디오 연기(성우)로 시작하여 연극, TV드라마 그리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매체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그 특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연기를 개발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이의 연기력이 얼마나 원숙하였는가 하는 것은 제1회 동아연극상 주연상 수상, 한국연극영화 최우수 연기상, TV부문 수상, TBC연기대상 주연상 수상, KBS연기대상 수상 등이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이는 고교 재학시절부터 연극활동을 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학과에 진학하여서도 그의 연극 활동은 계속되었으며 미국의 MIAMI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하면서도 연극에 대한 집념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이와 같은 특별한 경력이 그로 하여금 원숙한 연기자로 성공할 수 있는 토양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이와 함께 한 작품 촬영중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 원죄 >라는 작품의 촬영중이었다. 주인공 역으로 연기와는 거리가 먼 신인 0군을 발탁하여 썼을 때의 일이다. 장면의 내용은 여름 장면이었고 촬영 시기는 한겨울이었으며 장소는 난방이 전혀 안된 세트장에서의 일이다. 살을 에이는 것 같은 추위 속에서 런닝셔츠만을 입은 상태로 촬영을 하는 장면이었다. 등장인물은 이낙훈 씨와 신인인 0군이었는데 0군의 연기가 너무 미숙하여 도저히 그대로 촬영할 수가 없었다. 리허설을 거듭하고 거듭해도 0군의 연기는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모든 스탭들도 기다리기에 지쳤고 그날의 촬영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감독인 필자도 체념을 하고 현장을 떠나 대기실로 물러났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이낙훈 씨만은 포기하지 않고 현장에 남아 0군의 연기를 차근차근 지도하여 몇 시간 후에는 촬영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끌어갔다. 덕분에 이낙훈 씨는 심한 감기에 걸려 상당기간 고생을 했다. 연기자의 처지와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그이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된다. 그후 신인 0군은 그시대를 대표하는 주연급 스타로 성장하여 팬들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일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이는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후덕한 인품을 지닌 그런 사람이었다. 그이는 참으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다방면에 걸친 해박한 지식과 기지에 찬 유머 감각은 항상 주변의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고 특히 그의 팔도 사투리는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달인의 경지에 있었다. 그와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기지에 찬 유머와 팔도사투리는 필자를 포복절도케 하여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단편이 되었다. 그이는 팝송에서 프로를 능가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북창동에 ''MEXICO''라는 조용하고 아늑하고 정겨운 살롱이 있었는데 우리 두 사람은 그곳 분위기가 너무 좋아 자주 찾곤 했었다. 당시 그곳에서는 ''코코부러더스''라는 이름으로 장우 씨와 박상규 씨가 라이브로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갈 때마다 그이는 두 사람의 권유로 무대 앞에 나가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세 사람이 빚어내는 하모니의 앙상블은 그곳을 찾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연속적인 앙콜을 유발하기도 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포근한 추억의 한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적으로나 개인 활동에 있어서 그이처럼 행복한 나날을 즐겼던 사람은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할까. 그이에게는 오랜 동안 고통을 주었던 지병이 있었다. ''당뇨병''이 그것이다. 불치의 병이라는 ''당뇨병'' 평생을 함께 해야 한다는 ''당뇨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용하다고 이름난 의사는 다 찾아다녔고 병에 좋다는 처방을 다 써보았으며 효험이 있다는 민간요법을 찾아 전국의 방방곡곡을 누비다시피 했다, 병마를 이기고자 하는 그의 투병 모습은 옆에서 지켜 보기에는 너무나도 안타깝고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해의 추석 무렵으로 기억된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의 부고가 내게 날아든 것이다, 아연실색한 필자는 곧바로 그의 영전으로 달려 갔다. 유족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간단한 검사를 받겠다고 제발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 눈깜짝할 사이에 의식을 잃고 손쓸 사이도 없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 노릇이다. 62세 한창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만큼 귀여운 딸 정화 양과 아들 상구 군을 남겨두고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등질 수 있단 말인가? 그이는 한 사람의 연기자이기데 앞서 종교적으로 신앙심이 두터운 가톨릭신자였다. 그이의 친가나 처가댁 모두가 독실한 신자 집안이다. 천주님께서도 너무나 무심하시지 어찌하여 이제 정말 뭘 좀 알고 일할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그이를 천주님 곁으로 불러간단 말입니까? 망연한 허탈감과 그동안 그이에게 너무나도 무심했던 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으로 나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너무나도 큰 별을 잃은 것이다. 앞에서 나의 친구가 단언했듯이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커다란 연기자를 잃은 것이다. 중후하고 품위있는 그의 외모와 원숙한 연기력, 정답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 포근하고 따뜻한 그의 마음씨 이 모두를 우리는 그이와 함께 잃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이가 남기고 간 사랑하는 유족들은 그이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그이가 다 이루지 못한 유업을 잇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부인 최윤주 여사는 불우 이웃을 돕는 사회봉사로 눈코 뜰새없이 바쁘시고 딸 정화 양은 뉴욕대학에서 컴퓨터 아트를 전공하고 돌아와 아티스트로의 길을 다지고 있으며 아들 상구 군은 미국대학에 유학하여 연출을 전공하고 돌아와 현재는 단국대, 순천향대, 경인대, 한국사이버대학 등에서 후학지도를 하는 한편 한양대 박사 과정을 이수하느라고 여념이 없다고 한다. 이 자리를 빌어 이들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유명을 달리한 고인에게는 두 손 모아 명복을 빈다. 김기덕 (예술원회원) / 2003년 <프로필> 1936년 3월 27일 서울 출생 1998년 10월 7일 타계 1954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학과 2년 수료 후 도미 1961년 미국 마이애미 유니버시티 사학과 수료 1965년 김수용 감독의 < 갯마을 > 데뷔 <주요 경력> 탤렌트 협회회장, 제11대 국회의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주)범진흥업 대표이사 등 <수상 경력> 동아연극상, 한국연극영화 최우수연기상, 백상예술대상, 연기대상, 공로상, 특별상 제11회 한국방송프로듀서상 공로상수상 등 다수 수상 <주요 작품> 갯마을 , 용사는 살아있다 , 돌의 초상 , 돌종 , 목소리 , 연합전선 , 꽃네 , 동과 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