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부인
- 감독
- 임원식
- 제작년도
- 1966
- 출연
- 최은희, 남궁원, 박노식, 김혜정, 전계현, 한은진, 유계선, 김세라, 이기홍, 조덕성, 백송, 박순봉, 김상순
1926년 12월 2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함완섭은 진학을 위해 상경해 외숙부인 김성춘 조명기사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자연스레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장차 자신과 함께 작업하게 되는 영화인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일제강점기 <전과자>(김소봉, 1934)의 최진과 더불어 1세대 조선인 조명기사로 활동했던 김성춘은 해방 후 한국영화 조명기사의 계보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한국영화 기술자들에게 ‘오야지(おやじ, 親父)’로 통했던 인물이다. 기술학교인 홍아학원을 거쳐 1944년 경성전기공업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함완섭은 김성춘의 추천으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광희동 촬영소 조명부에 입사하면서 영화 조명 일을 시작했다. 1942년 9월 발족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는 조선영화령(조선총독부제령 제1호)에 의거해 기존 10개의 민간 영화사가 강제 통합되어 친일,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한 국책 영화사였지만, 200여 평의 촬영 스튜디오를 비롯해 녹음실, 현상소, 최신식 기자재 등을 구비하고 말단 기술진에게도 공무원 월급의 두 배를 지급했던, 당시로서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사진 1]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창립 기념 사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김성춘의 조명 조수로 최인규 감독의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1944), <사랑과 맹서(愛と誓ひ)>(1945), <신풍의 아들들(神風の子供達)>(1945)에 참여한 함완섭은 해방 후에도 김성춘을 따라 조선영화건설본부의 뉴스영화와 최인규가 설립한 고려영화협회의 <자유만세>(최인규, 1946), <독립전야>(최인규, 1948),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등에 조명 조수로 참여했다. 그리고 스물세 살 되던 해인 1948년 계몽영화인 <국민투표>(최인규)로 최연소 조명기사로 데뷔한다. [사진 2] 영화 <사랑과 맹서>(최인규, 1945) [사진 3] 영화 <자유만세>(최인규, 1946) [ 사진 4] 영화 <독립전야>(최인규, 1948) 같은 해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원작자였던 김성민의 감독 데뷔작 <사랑의 교실>(1948)로 극영화 조명기사로 정식 데뷔한 함완섭은 이후 조수 시절 인연을 맺은 최인규의 조감독 출신들인 홍성기, 신상옥, 정창화 등의 감독 데뷔작 조명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 <여성일기> 1948년 함완섭은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인 홍성기 감독의 데뷔작 <여성일기>(1949)에 조명기사로 참여했다. 바로 1년 전 일본계 미국인이 촬영한 기록영화 <무궁화동산>(안철영, 1948)이 컬러로 제작된 바 있지만, 순수 국내 자본과 제작진으로 만들어진 극영화로는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사진 5] 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의 신문광고(출처: 경향신문 1949년 6월 6일자 2면) ‘최초’라는 수식어답게 함완섭은 이 영화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컬러 영화의 조명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더 큰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자신은 물론 감독도 촬영기사도, 심지어 스승인 김성춘도 컬러 촬영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함완섭은 늘 하던 대로 흑백 영화 촬영 때처럼 조명을 했는데, 결과물을 보고선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한다. 컬러 필터를 쓰는 법도 몰라 낮에도 텅스텐 조명을 그대로 쓴 데다 마침 낙엽이 지는 가을에 촬영해 화면에 붉은색이 많이 돌았던 것이다. 더욱이 <여성일기>는 네거티브 단계 없이 원본 자체가 포지티브 프린트로 변하는 리버설 필름(reversal film)으로 촬영했는데, 이 때문에 러쉬(rush)를 뜰 수가 없어 원본 필름으로 편집해야 했고 프린트도 만들 수 없어 극장에 영사기 두 대를 설치해 원본 필름과 녹음 필름을 따로 걸어 상영했다고 한다. 흥행은 어느 정도 되었다지만, 기술적으로는 함완섭의 표현대로 “반쪼가리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함완섭은 <애국자의 아들>(윤봉춘, 1949), <여인애사>(신경균, 1950)를 거쳐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악야>(1952)를 촬영하던 중 전쟁을 맞았고, 피난 시절에도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최후의 유혹>(정창화, 1953), <출격명령>(홍성기, 1954) 등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홍성기 감독과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 한국전쟁 후 김성춘의 조명 조수 출신인 고해진, 이한찬 등과 함께 2세대 조명기사로 자리매김한 함완섭은 신경균, 윤봉춘, 이병일 등 원로 감독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홍성기, 정창화, 유현목 등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끈 젊은 감독들의 작품에 다수 참여했다. 특히 홍성기와의 작업이 많았는데, <열애>(1955), <애원의 고백>(1957), <실락원의 별>(1957), <별아 내 가슴에>(1958), <실락원의 별(후편)>(1958) 등 그의 전성기 시절을 함께했다. [사진 6] 영화 <애원의 고백>(홍성기, 1957)의 한 장면 [사진 7] 영화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1958)의 한 장면 사실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은 열악하고 부족했던 기재와 여건 등으로 인해 조명기사 고유의 미학적 조명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단지 화면을 밝히는 수준의 인물 삼점 조명(three point lighting) 같은 기본적인 조명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성기는 조감독 시절부터 함께 고락을 같이한 함완섭을 유독 신뢰했고 조명에 있어서만큼은 그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고 한다. 이 시기 홍성기 감독의 작품들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열애>는 당시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을 잘 보여준다. 세트 촬영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영화의 모든 공간을 오픈에서 촬영했는데, 실내 낮 장면에서 창문에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치고 촬영했던 것은 바깥의 광량을 커버할 만한 실내 조명이 부족해서였으며, 벽에 인물 그림자가 많이 지는 것은 세트 촬영일 경우엔 부감대 같은 높은 위치에서 조명을 할 수가 있지만 오픈에선 아무리 조명기의 키를 높여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8~11] 영화 <열애>(홍성기, 1955) 속 장면들. 부족한 실내 조명으로 인해 커튼과 블라인드로 광량을 조절해야 했으며, 그림자가 벽면에 가득 드리워졌다. 또한 당시 영화들에서 카메라에 감마(gamma) 필터를 끼워 낮에 밤 장면을 찍는 데이 포 나이트(day-for-night) 촬영이 많았던 이유는 산이나 해변에서 촬영할 경우 전기를 끌어올 재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지만, <열애>에서 영옥(염매리 분)의 집 앞 장면처럼 전기를 끌어오기 용이한 장소에서의 촬영은 당시에도 웬만하면 밤에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12, 13] 영화 <열애> 속 야외촬영 장면들. 촬영 장소의 전기 수급에 따라 촬영 방식과 시간을 바꿔야 했다. 화영공작소와 <자유결혼> 1950년대 중반 조명 기재는 김성춘이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시절 일본의 아라시간주로(嵐寛壽郎)프로덕션에서 수입해 보유하고 있던 조명기 150kw와 전쟁 당시 북한의 국립영화촬영소에서 노획해온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보유하고 있던 소련제 조명기 100kw, 미공보원(USIS)에서 썼던 미제 조명기 70kw 등이 있었는데, 파손이 심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대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 영화 한 편에 50~100kw 정도의 조명기가 필요했는데, 네 명의 기사가 동시에 사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보니 함완섭은 자신의 촬영을 마치고 급하게 김성춘의 작업 현장으로 조명 기재를 실어날라 가며 번갈아 사용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57년 함완섭은 자신이 대여해 쓰던 미제 조명기를 샘플로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총 120kw의 조명기를 자체 제작했다. 화영공작소는 김성춘의 문하에서 조명 조수로 일했던 김종철이 설립한 조명 기재 제작소로, 비록 수공업적 방식이긴 했으나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영화 조명기를 국내에서 제작할 수 있게 되어 한국영화 조명인들의 숨통을 틔워주었던 곳이다. [사진 14] 영화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세트 촬영 현장 <자유결혼>(이병일, 1958)은 함완섭이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제작한 조명기를 사용한 첫 번째 작품으로, 당시로선 나름 풍족했던 조명기 덕에 <열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된 조명이 보여진다. 오픈 실내 장면에서 벽에 드리워졌던 인물 그림자는 말끔히 사라졌고, 낮임에도 항상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쳐놓아 답답했던 화면도 커튼을 걷어냄은 물론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촬영해 시원한 느낌마저 준다. [사진 15~18] 영화 <자유결혼> 속 장면들 함완섭은 이러한 것이 풍부해진 조명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실내 장면을 세트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세트 촬영을 하면 조명기의 위치를 높일 수 있고 실외 광원 설정도 조명기로 조절할 수 있어 여러모로 오픈 촬영 때보다 작업하는 데 유리했다는 것이다. 최훈 감독과 광보영화사 함완섭은 홍성기의 조감독 출신인 최훈 감독의 데뷔작 <모녀>(1958)에서 조명을 맡은 후부터 <느티나무 있는 언덕>(1958), <사모님>(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 등 최훈과 호흡을 맞추어 나간다. 그렇다고 홍성기와의 작업을 곧바로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사진 19] 영화 <모녀>(최훈, 1958)의 한 장면 [사진 20] 영화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1958)의 한 장면 당시 제작 편수에 비해 조명기사가 부족해 기사 한 명이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함완섭은 3팀을 운용했으며 각 작품마다 제1조수가 책임을 맡고 자신은 세트 촬영이나 로케이션 밤 촬영 같은 어려운 촬영에만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같은 시기 작업한 홍성기의 <별아 내 가슴에>, <실락원의 별(후편)>도 당시 최고참 조수였던 방영원(방기찬)이 전담하고 있었는데, 함완섭은 <청춘극장>(홍성기, 1959)부터 아예 그를 독립시켰으며 이후에도 자주 홍성기의 촬영장을 찾아 일을 도왔다. <사모님>,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작업하며 기획⋅제작에도 관여했던 함완섭은 1959년 최훈과 함께 광보영화사를 설립한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해를 거듭할수록 풍작을 거두고 있었고, “영화가 흥행을 하면 몇 배가 남는 장사가 되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후죽순 영화사를 만들던 시기였다. 1958년에 제작된 작품 편수가 74편인데 반해 당시 영화사가 72개사일 정도였다. 1959년엔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100편대를 넘어 111편이 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작자로 변신한 함완섭에게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광보영화사로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 <아버지>(최훈, 1961) 등을 제작했는데, 하필 <어느 여교사의 수기>가 개봉할 때 4.19가 터졌고 <아버지>가 개봉할 땐 5.16 쿠데타가 일어나 흥행은커녕 손해만 크게 입었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2년 영화법이 제정되며 영화사 통폐합 조치가 내려졌고, 광보영화사는 동아영화흥업주식회사와 통합되고 만다. [사진 21] 영화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의 포스터 [사진 22] 영화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의 포스터 이후 함완섭은 동아영화흥업에서 제작 담당으로 일하며 <사랑의 승부>(최훈 ․ 이용호, 1962), <비밀통로를 찾아라>(이용호, 1962), <천동(天動)>(정승문, 1963)을 기획, 제작했지만, 동아영화흥업마저도 1963년 6월 영화사 등록요건이 더 강화된 제1차 개정 영화법의 시행으로 등록이 취소되었다. 신상옥 감독과의 재회 <에밀레종>(홍성기, 1961) 이후 조명을 중단했던 함완섭은 1964년 최훈 감독의 <눈물의 자장가>(1964)를 시작으로 다시 조명기사로 복귀했다. 그리고 홍성기 감독의 <대석굴암>(1964), <처녀성>(1964), 최훈 감독의 <울지마라 물새야>(1964), <파도>(1967), <밀어(密語)>(1967), <지금 그 사람은>(1968), <난풍(暖風)>(1968), 김묵 감독의 <폭력지대>(1965), <최후의 대결>(1967) 등을 작업하며 조명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1968년 함완섭은 신상옥의 부름을 받는다. <악야> 이후 16년 만이었다. <지옥화>(1958) 때부터 신상옥의 대부분 작품에서 조명을 담당했던 이계창이 1967년 3월 베트남에서 <여자 베트콩 18호>(강범구, 1967)를 촬영하던 중 불의의 폭파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 공백을 함완섭에게 대신 맡기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신상옥과 해후한 함완섭은 <여자의 일생>(1968)을 시작으로 <내시>(1968), <천년호>(1969) 등의 조명기사로 신상옥과 함께했다. [사진 23, 24] 영화 <여자의 일생>(신상옥, 1968) 속 장면들 당시 신필름은 안양촬영소를 인수하고 자회사를 설립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던 국내 최대의 영화사였고, 일본의 류덴샤(柳電社)에서 수입한 조명기 등 최신 기재를 보유하고 있던 꿈의 영화공장이었다. 함완섭은 <내시>를 작업할 때 당시 보통 영화 한 편에 소요되던 광량의 두 배에 달하는 1,200kw를 썼을 정도로 풍족한 환경이었다고 기억한다. 촬영 스튜디오에는 300kw 이상의 기본 전력이 들어왔고, 한 장면에만 100kw 이상 쓴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었다. [사진 25, 26] 영화 <내시>(신상옥, 1968) 속 장면들 [사진 27, 28] 신상옥 감독의 영화 <천년호>(1969) 속 장면들 하지만 그 호사(好事)도 오래가지 않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영화산업은 장기 불황에 빠져들었고 신필름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그 조짐은 함완섭이 신상옥의 작품에 참여하기 시작할 때부터 보였었다. 큰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양산해야 했지만, 흥행 성과는 미미했고 빚만 불어나는 악순환이 이미 그때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더욱이 신필름은 1970년 시설 기준 미달로 등록이 취소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규모가 대폭 줄어든 안양영화제작주식회사로 재설립된다. 함완섭은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를 작업한 후 1972년부터 최은희가 교장으로 있던 안양영화예술학교에서 조명과 전기 등을 관리하는 시설감독으로 근무했다. 이후 1973년 <삼일천하>(신상옥)에 조명기사로 참여하기도 하지만, 1975년 7월 신상옥이 외화 쿼터를 획득하기 위해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되는 등 어수선해지자 퇴사했다. [사진 29] 영화 <삼일천하>(신상옥, 1973)의 한 장면 [사진 30] 영화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의 한 장면 <세종대왕>과 마지막 작품 함완섭은 한동안 일선에서 물러나 지내다 1978년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대작 사극 <세종대왕>(최인현)에서 조명 책임을 맡게 된다. 자신이 조명기사로 참여한 59편의 작품들 중 가장 애착하는 작품으로 꼽기도 한 이 영화에서 함완섭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작업했다. 낮 장면에 쓰는 데이라이트(daylight) 조명기 10대를 홍콩에서 전구를 수입해와 자체 제작했고 경복궁 오픈 촬영에서 유용하게 사용했다. 기존의 텅스텐 조명기도 당시 모을 수 있는 최대의 물량을 동원해 유려한 롱 쇼트 밤 장면을 구현해내기도 했다. 더욱이 1년여의 긴 촬영 기간에 로케이션과 오픈 촬영이 많아 고생을 많이 한 작품이었지만, 그해 대종상 후보에까지 오르고 수상은 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사진 31~33]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영화 <세종대왕>(최인현, 1978) 속 장면들 이후 함완섭은 1979년부터 현진영화사에서 조명실장으로 재직하며 직접 나서기보다 후배들을 돕는 일에 매진했다. 그리고 1980년 <느티나무 있는 언덕>에서 촬영기사와 조명기사로 만나 오랫동안 친구로 인연을 맺어온 심우섭 감독의 <난 모르겠네>를 마지막으로 극영화 조명을 그만두었고, 1986년 아시안게임 기록영화의 조명을 끝으로 은퇴했다. [사진 34~36] 함완섭이 참여한 마지막 극영화 작품 영화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속 장면들
임원식 감독의 대표작은 일제감정기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에 관한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일 것이다. 임원식 감독이 연출, 제작한 작품 중 두 편이 상영중지를 당했는데 그 중 한 편이 이 작품이다. 이 영화는 명보극장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의 지시로 간판이 내려졌는데 당시 옥중에 있던 사회운동가 문익환 목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는 이에 항의해 중앙정보부 남산 대공분실에 갇히기도 했다. (사진1) 임원식 감독이 대표작으로 뽑은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포스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개봉 전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제작사인 합동영화사는 포상으로 외화수입쿼터를 받았다. 임원식 감독은 그 전해에 새마을정신을 구현한 영화 <어머니>(1976)를 연출해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황해도 월남민 출신인 그는 남한에 대한 첫 인상으로 ‘육탄 10용사’의 용맹함을 꼽을 정도로 애국심 투철한 인물이었음에도 당시 정부의 강박증적인 검열 관행은 피할 수 없었다. 해방정국과 월남, 한국전쟁을 거치며 성장했고 한국영화의 황금기에 감독으로 데뷔해, 70,80년대 검열로 위기를 겪고 파산해서 재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은 줄곧 아이러니하고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사건들은 때로는 예기치 않은 실패로, 때로는 뜻밖의 행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임원식 감독은 1932년 생으로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누천리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의병 출신인 부친 슬하의 3남 2녀 중 막내로 자랐고, 곡창지대의 부농이었던 집안 덕에 일제 강점기는 큰 고통 없이 보낸다. 하지만 해방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그의 가족은 월남을 결심한다. 먼저 월남한 서북청년단 특공대장인 큰 형님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 24일 38선을 넘어 서울 회현동 적산가옥에 자리 잡는다. 서울에 정착하기 위해 그는 얼마간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의약품을 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거리에서 장사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고 경제적 안정을 찾을 무렵 서울 성도중학교에 입학한다. (사진2) 1948년 경 서울 성도중학교(현재 용문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임원식 감독 (사진3) 임원식 감독은 서울 성도중학교 시절 학도호국단 간부로 지냈다.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있고 찍은 사진 중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4)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야외훈련 중인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전쟁 초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잔류하게 된다. 징집연령이었던 그는 집에서 숨어 지내다 배고픔 때문에 결국 인민의용군에 입대한다. 하지만 전선으로 배치되기 직전 탈출해 누나와 함께 전주로 피난한다. 9.28 수복 직후 피난지 전주에서 임호 라는 예명으로 학도의용군에 지원한다. (사진5) 1950년 학도의용군 서북지구대가 전주에 주둔하던 당시 단체사진이다. 아래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6) 1950년 학도의용군 특공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찍은 것으로 오른쪽이 당시 특공위원회 특공대장으로 있던 임원식 감독이다. 그리고 학도의용군과 함께 대구로 이동한 후 전선에 배치되기를 기다리다, 대구에서 홀로 국민방위군에 입대한다. (사진7, 8) 1950년 19살의 앳된 나이에 국민방위군 즉 자신보다 나이 많은 민간인으로 구성된 대원 2천명을 인솔해 도보로 경남 사천에서 한산섬으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을 때이다. 완장을 차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국민방위군에서 그는 대원 2천명을 경남 사천에서 한산도로 도보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다시 대구에서 벨기에 부대의 보급부대로 종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240명의 부대원과 240개의 지게를 기차에 싣고 대구를 출발, 고랑포에 도착해 벨기에 부대에 합류한다. (사진9) 1951년 임원식 감독이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써 함께 종군했던 29영국 여단 벨기에 부대의 군복으로 환복해 입은 모습이다. 이제 그는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 벨기에 부대와 함께 전방에서 종군한다. 그는 고지에서 전투 중인 벨기에군에게 총탄을 조달하기 위해 지게에 총탄을 싣고 고지를 오르내리는 민간인 보급부대를 이끌었다. (사진10) 1951년 한국전쟁기 벨기에 부대 군복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0대 후반의 앳된 얼굴이다. (사진11) 벨기에 부대와 배구를 하던 네트 너머로 천막으로 된 막사가 보인다.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고 왼쪽은 함께 종군한 국민방위군 18중대 취사병이다. 국민방위군은 벨기에군이 제공하는 부식과 벨기에 군인들이 주는 팁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전쟁은 길어지고 전투도 생활이 되어가자 국민방위군은 주둔지 주변의 주저 않은 집터를 뒤져 주인 잃은 쓸 만한 물건들을 내다 팔고 때로는 피난민들이 버리고 간 농작물을 거두어 팔아가며 생존을 이어갔다. 위험을 무릅쓰고 군인으로 위장한 뒤 외인부대가 있는 전방까지 들어온 양공주들 또한 그가 목격한 전쟁의 참혹한 일상이다. 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외인부대와 함께 종군하는 국민방위군 부대원들은 적절한 대우와 보수가 주어지지 않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원들의 불만에 공감한 중대장 임원식은 대구로 내려와 국민방위군 본부, 육군본부를 다니며 국민방위군의 권리와 보상에 대해 묻고 따졌지만 어느 하나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소득 없이 부대로 복귀하기 직전 우연히 대구의 우체국에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아버지를 만나 가족의 소재를 알게 된다. 그는 10대 후반의 어린나이에 겪은 전쟁을 통해 성장해갔다.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다양한 생존의 형태들을 목격하며, 요령 있게 살아 나가는 방법을 배우며 성숙해갔다. 그리고 감악산 전투 등 치열한 고지전을 치르고 난 뒤 국민방위군이 해체되는 시기에 가족들이 피난 중이던 제주도로 내려간다. 제주도로 내려온 그는 오현고등학교에 입학해 평범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간다. (사진12) 1952년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교복을 입고 제주도의 돌담위에 올라가 있는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13)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부산으로 수학여행 가 찍은 사진으로 평범한 고등학생의 생활을 보여준다. (사진14) 제주도 오현고등학교에서도 임원식 감독은 자연스럽게 학도호국단 간부로 활동했다. 학도호국단 대대장 복장을 한 임원식 감독으로 배경으로 보이는 초가지붕들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때 그는 제주도 육군훈련소 군예대로 내려와 있던 문화예술인들이 주체가 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인 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며 연극에 눈을 뜨게 된다. (사진15, 16) 한국전쟁기 제주도에 주둔했던 군예대가 주최한 학생연극경연대회에서 남자 학교에 배당되었던 <붉은 기 땅에 떨어지다>라는 연극의 한 장면이다. 임원식 감독은 제주도의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상경해 고등학교 시절의 연극경험을 살려 서라벌예술대학 2학년으로 편입한다. (사진17) 1954년 남산 후암동 교사 시절 서라벌예술대학 본관 앞에서 찍은 연극영화과 학생들의 단체사진이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고, 앉아있는 인물 중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연출가 김규대,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세 번째가 무용가 은방초, 앉아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첫 번째가 촬영감독 전조명이다. (사진18) 8.15 해방 기념 시가행진에 참여한 서라벌예술대학 사진으로 임원식 감독은 이때도 서라벌예대 학도호국단 대대장이었다. 서라벌예술대학 시절에는 대학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연출가 김규대 선생을 필두로 학생들과 함께 실험극단 창조극회, 원방각, 청협을 만들어 활동했다. (사진19, 20)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재학 시절 대학연극경연대회 참여 작 유치진의 <통곡>에 출연한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사진21) 1960년 극단 원방각의 연극 입센의 <유령> 공연모습이다. (사진22) 학생들이 주축이었던 젊은 극단인 창조극회의 멤버들이다. 아랫줄 왼쪽부터 임원식 감독, 황용하 감독, 성우 남성우, 연극배우 조광일, 윗줄 왼쪽부터 촬영감독 전조명, 연극배우 김광도, 연극연출가 장순환, 사진에는 없는 배우 김보애까지 더해져 창조극회가 탄생했다. 그러나 창조극회를 기성극단 청협으로 만들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서라벌예대 재학시절 제주도 출신 여성과 이미 결혼했던 임원식 감독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HLKY 기독교방송에서 성우와 연출자로 활동했고 이광래 선생의 추천으로 육군본부 정훈감실로 옮겨가 대북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극단과 방송에서는 임무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국방부 정훈국에서 제작한 김수용 감독의 군영화인 <윤 일등병>(1957)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23) 김수용 감독의 <윤 일등병>(1957)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임원식 감독(미개봉 추정) 영화계로의 진출을 꾀하던 그는 일본 교포 출신인 유진식 감독의 <불멸의 성좌>(1959)와 <대원군과 민비>(1959)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다. 유진식 감독이 일본으로 돌아가자 그는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으로 <연애전선>(1960), <부부독본>(1961)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신필름에서 제작하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조감독으로 참여하게 된다. <돌아온 사나이>에는 4.19 당시의 거리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 신상옥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서 시위하는 군중을 촬영한 장면을 영화에 사용한 것이다. (사진24)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 촬영 당시, 4.19로 인해 촬영이 중단됐을 때 신필름이 있던 광화문 동아빌딩 옥상에서 스태프들이 시위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이다. 오른쪽부터 편집기사 오성환, 그 옆이 임원식 감독, 왼쪽 첫 번째가 배우 정동일이다. <돌아온 사나이>의 조감독이었던 그가 스웨덴 대사의 집에서 촬영한 가든파티 장면 준비를 탁월하게 해내자 신상옥 감독은 그를 스카웃한다. 신필름에 입사하게 된 그는 신상옥 감독을 도와 신필름이 다작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데 일조한다. 신필름에서 여러 번의 감독 데뷔 기회가 있었으나 1965년 개봉한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가 그의 데뷔작이 된다. (사진25)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 1960)의 촬영장소였던 경복궁에서 민비를 연기한 최은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실 임원식 감독의 초기 연출작 중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품은 <숙부인>(1966)이다. (사진26) <숙부인>(임원식, 1966) 포스터 당시 신필름의 제휴극장이었던 명보극장에 걸기로 한 영화에 문제가 생겨, 신필름에서는 열하루 만에 누군가가 작품을 완성해야 했다. 이때 임원식 감독이 <숙부인>을 9일 만에 완성시켜 검열을 받고 무사히 개봉 한 것이다. 신필름은 당시 전속 감독의 월급이 15만원이었는데 <숙부인>을 단시간에 무사히 완성하자 보너스로 15만원을 더 받았다고 한다. (사진27) <숙부인> 촬영현장의 임원식 감독 이후 그는 쇼브라더스와 신필름의 합작영화 <대폭군>(1966)의 연출을 위해 홍콩으로 건너간다. <대폭군>의 로케이션 촬영은 한국에서, 세트촬영은 중국에서 이뤄졌다. (사진28) 1966년 <대폭군>의 촬영을 위해 홍콩에 갔던 시기 쇼브라더스가 초대한 식사 자리이다. 서있는 왼쪽 끝 남자는 쇼브라더스의 엄준 감독이고 그 아래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엄준 감독의 부인이자 주연 배우인 리리화이다. 가운데는 묘장왕 역을 한 김승호가 앉아있고 서 있는 남자들은 오른쪽부터 장군역을 맡은 배우 성소민, 임원식 감독, 최경옥 감독이다. 앉아있는 오른쪽 끝 여자는 배우 고선애이다. 나머지는 쇼브라더스의 여배우들이다. (사진29)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의 모습으로 감독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뒤편에 안경을 쓴 이가 홍콩 측 프로듀서 미스터 주이다. 그 옆으로 미첼카메라를 잡고 있는 홍콩촬영감독과 조수가 보인다. 연출자가 신상옥 감독이 아니라는 이유로 홍콩 스태프들의 파업이 있었지만 신상옥 감독이 홍콩에 들려 무마시키고 임원식 감독이 스태프들과의 갈등을 극복하며 <대폭군>을 완성한다. (사진30)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에서 홍콩 여배우 리리화와 세트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의 배경에 있는 다리모형은 세트로, 한국의 팔당에서 찍은 강 장면에 이 다리를 합성하기 위해 무척 정교하게 촬영해야만 했다. 촬영현장에서의 갈등도 극복해야 하고, 대규모 촬영에 특수촬영까지 해야 하는 부담 속에서도 비자 갱신을 위해 들른 대만에서 <나는 매국노>(1966)까지 연출한다. 1년여를 홍콩의 쇼브라더스에서 머물며 대규모 합작영화를 연출한 것보다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은 쇼브라더스의 라이브러리와 편집실에서 당시 유행하던 일본의 검객 영화들을 보며 연구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 돌아와 <풍랑객>(1968), <영>(1968), <맹수>(1969) 등을 연출하며 검술액션영화의 유행을 이끌게 된다. 독고성을 주인공으로 한 검객 영화 <영>은 사무라이액션과 <장고>(세르지오 코부치, 1966)같은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를 참고해 만든 작품으로 평단에서는 비현실적이고 만화 같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사진31) <영>(1968)에서 요동 실향민 마을에 등장한 주인공 영(독고성)의 모습이다. (사진32) <영>(1968)에서 마적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다. (사진33, 34) <영>(1968)에서 독고성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그는 후속작으로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남정임을 협객으로 출연시킨 <풍랑객>을 직접 제작하려고 했으나 신상옥 감독의 설득으로 제작을 양보하게 된다. (사진35) <풍랑객>(1968)에서 남정임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모습인데 그는 남정임에게 액션시범을 보이다 다리가 부러져 보름간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충무로에서 액션을 바탕으로 한 장르영화의 연출력을 인정받은 임원식 감독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는 신필름 파견 감독으로 대양영화사와 세기상사에서 여러 작품을 연출한다. 제작자 한갑진의 요청으로 대양영화사에서 액션영화 <심야의 대결>(1969)과 액션사극 <의적 홍길동>(1969)을 연출했고 세기상사에서는 오수미 주연의 멜로드라마 <벌거벗은 태양>(1970)을 시작으로 검술액션사극 <민비와 마검>(1970), 공포영화 <춘색한녀>(1971), <설야의 여곡성>(1972), 에로틱사극 <대감신랑>(1971), 액션영화 <분노의 세얼굴>(1972) 등을 연출한다. (사진36) <설야의 여곡성>(1972)의 촬영현장으로 분장을 한 신인 여주인공 윤세희의 모습이 보인다. 윤세희는 당시 유명한 워커힐 카지노 딜러 출신으로 세기상사의 국쾌남 사장이 발굴한 배우이다. 1970년대 중반 임원식 감독은 신필름에서 충무로로 나와 프리랜서 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하는데, 그가 선택한 첫 작품은 삼영필름의 우수영화인 <아리랑>(임원식, 1974)이다. (사진37) <아리랑>(1974)의 촬영현장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었다. 그는 나운규 감독의 원작을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장윤환과 시나리오 작가 장천호 형제가 야심차게 각색한 각본을 보고 반해 이 작품을 선택했다. 참의원 출신 부호의 아들 영진이 영화 <아리랑>을 보고 감화되어 광화문에서 만세운동을 벌이자 일본 경찰이 그를 박해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작을 왜곡했고 선동적이라는 이유로 문공부 시나리오 사전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제작기간이 늘어지자 제작사는 원작대로 각본을 수정하도록 권했고 제작비가 들지 않는 방향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길 바랬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임원식 감독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한데다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어 그에게 아쉬운 작품으로 남게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삼영필름은 외화수입쿼터를 받게 된다. 임원식 감독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한국교구에서 안수를 받은 장로였다. 어느날 이사례 여사가 찾아와 이기풍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순교보>라는 영화의 연출을 그에게 의뢰한다. 그러나 그는 유신 초기,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벌이던 기독교계를 예의주시하는 정부의 분위기를 고려해 교회전도용 영화로 만들자 설득해 이 작품을 16미리로 연출한다. 이 영화는 후에 그가 종교영화로 재기하는데 교두보가 된다. 1975년에는 몇몇 영화계 인사들과 함께 새마을연수원 지도자교육을 받는다. 이신명, 변장호, 최하원, 고영남, 임권택 감독 등이 임원식 감독과 함께 새마을연수원에 입소했다. 연수원에서 교육받는 동안은 술, 담배를 끊어야 했기에 고영남과 임권택 감독은 금단현상 때문에 퇴소한다. 새마을연수원의 교육내용에 감동받은 임원식 감독은 정부에서 영화계에 의뢰한 새마을영화의 연출자로 선택된다. 이때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상이군인에게 시집온 여성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의 영화 <어머니>(1976)를 감독협회 기획, 합동영화 제작으로 연출하게 된다. (사진38) 새마을영화 <어머니>(1976)의 한 장면이다. 상이군인(이순재)에게 시집 온 여성(윤연경)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관객수 10만이 넘으면 홈런이라고 여기던 시절 16만이 넘는 관객이 들어 흥행에도 성공하고 15회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포함해 3개 부문의 상을 수상한다. 그 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를 합동영화사에서 연출한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다룬 종교영화로 이 작품은 문화공보부의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합동영화사는 외화수입쿼터를 받는다. 그러나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상영중지가 내려진다. 상영중지에 항의하는 임원식 감독은 남산 정보부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지만,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유신시대에 탄압받고 있던 종교지도자를 떠올려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중앙정보부의 설득에 그는 결국 상영중지를 받아들인다. (사진39) 주기철 목사의 순교를 다룬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의 촬영 현장이다. 977년 상영중지를 당했으나 1981년 재개봉되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기록한 작품이다. 1981년 이 작품의 해금이 풀려 재개봉되자 20만 1천명의 관객이 들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차지한다. 그 덕에 1982년에 그는 영화인협회에서 흥행영화 감독들에게 주는 할리우드 연수여행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개봉이 중지되고 고초를 겪다보니 그의 작품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합동영화사에 들어가 전무이사 겸 기획실장으로 5편의 작품을 기획했고, 2년 뒤에는 화풍흥업의 기획실장으로 4편의 작품을 기획하며 영화계활동을 이어갔다. 1980년에는 김태수 대표의 제안으로 태창흥업의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외화는 김태수 대표가 맡고 한국영화는 임원식 감독이 책임지는 구조였다. 중견영화사인 태창흥업의 사장으로 처음 제작한 영화는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조용필을 주인공으로 한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이다. (사진40)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 사장으로 취임한 뒤 처음으로 제작한 작품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의 포스터이다. 일류 배우의 개런티가 2백만 원이던 시절 그는 조용필에게 5백만 원의 출연료와 추가로 2백만 원의 작곡료를 주고 캐스팅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과도한 개런티로 영화인들의 빈축을 사 영화인협회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작 전에 이미 제작비의 두 배가 넘는 지방 투자자들의 투자금이 몰려들었고 완성 후 흥행에도 성공해 큰 수익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두 번째 제작 작품은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이다. 첫 제작 작품의 상업적 성공 이후 인권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그는 『기름밥』이라는 논픽션 단편에서 영감을 받아 버스안내양의 실상에 대한 각본을 작가 김승옥에게 맡긴다. 무사히 잘 완성되고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었으나 이 작품은 개봉 후 위기를 맞게 된다. (사진41)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에서 두 번째로 제작한 작품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의 한 장면이다. 자동차노조와 한국노총의 상영중지 요청이 제기된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삥땅검사, 알몸수색, 운전기사와 안내양의 부적절한 관계, 노조를 어용화해 묘사한 점 등이 운수노동자들의 인격을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 작품은 상영 7일 만에 자진해서 간판을 내리게 된다. 영화계에는 이 사건에 대해 노동부와 문공부가 노동자들의 상영중지 여론을 종용했다는 의혹이 떠돌았고 영화인들은 소재선택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4군데 장면을 자르고 1군데 장면을 재촬영해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을 다시 받은 후 1982년 6월에 재개봉을 했지만 흥행은 요원했다. 결국 임원식 감독은 지방 흥행사들의 이어진 손해배상 소송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고 재기불능 상태로 제주도로 낙향하게 된다. 제주도에서 영화계와는 거리를 두고 지내던 중, 그는 교계에서 만든 종교영화제작소로부터 선교영화 연출을 제안 받는다. 그가 연출한 선교영화는 곧 교인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게 되고 그 즈음 비디오문화가 확산되어 그가 제작한 종교영화 비디오테이프 판매 또한 급증했다. 1990년대 중반 케이블텔레비전이 등장하던 때에는, 기독교방송국의 초대 전무이사 겸 방송본부장을 역임하게 된다. 그리고 방송국을 퇴직하고 난 뒤 1999년부터 8년 동안 20대, 21대 영화감독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춘사영화제를 재개하고 스크린쿼터 투쟁을 벌이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고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2001년에는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사진42) 1999년부터 8년간 한국영화감독협회 제20, 21대 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임원식 감독 모습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제주도에서 지내며 제주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을 지냈고 제주 4.3항쟁에 관한 현기영의 소설을 영화화 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임원식 감독의 구술은 어린시절 고향인 사리원의 풍경, 청소년기 월남민으로 한국사회에 적응해갔던 경험, 한국전쟁기 국민방위군으로 종군한 경험, 학창시절 학도호국단 활동 등 한국현대사의 다양한 면을 살필 수 있는 경험들로 가득하다. 또한 영화계에 입문한 뒤에는 거대 영화 기업 신필름의 체계와 쇠락, 한홍합작영화 경험, 유신시기 영화검열의 폐해 등에 관해 의미 있는 증언이 확인할 수 있다.
임원식 (林元植)은 1960년대 김기영 , 유현목 과 함께 한국영화 전성기를 주도한 트로이카 디렉터 가운데 가장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신상옥 사단이 배출한 감독이다. 신상옥은 일제시대에 등장하여 광복기까지 우리나라 영화계를 이끌다가 납북된 < 자유만세 >이 감독 최인규 (崔寅奎)의 조감독 출신으로 그 밑에서 연출 수업을 받고 데뷔한 인재만도 강대진 (1959년 데뷔), 이형표 (1961), 장일호 (1961), 최인현 (1962), 임원식(1965), 나봉한 (1965), 변장호 (1967), 이경래(1971), 이장호 (1974) 등 10여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는 강대진, 최인현의 경우처럼 고인이 된 사람도 있지만 오늘날 한국영화의 대들보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다. 임원식 감독은 그 중 한 사람이다, 한국영화감독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어서만이 아니다. 그는 단체장은 처음이지만 영화사의 임원과 사장으로서 현장을 지키며 역할을 수행해 왔다. 남들이 스스로 좌절하여 영화계를 떠나가너 세를 형성하여 조직에 뛰어들 때 그는 이에 관계없이 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해방 이후 어느 때보다 신구의 갈등이 심한 영화계의 현상을 감안할 때 그가 뒤늦게 6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로 영화감독협회 회장의 자리를 맡게 된 이유는 자명하다. 급격한 세대 교체의 격랑 속에서 몰락해 가는 원로층을 감싸고 젊은 감독을 포용하는 일은 작품 활동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30명의 회원을 이끄는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의지는 일부의 우려를 씻고 안정적으로 협회를 운영해 나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임원식 은 1935년 1월 22일 황해도 평산에서 유고적 가풍이 강한 천도교 집안의 3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임수동(林壽東)은 한말 의병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고 귀가한 후엔 집안을 일구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래서 소작농을 부릴 만큼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얼마못가 찾아온 조국의 해방은 그들에게 오히려 시련을 안겨 주었다. 북한 공산주의 정부는 부친을 지주로 몰아 더 이상 농토를 지킬 수 없게 만들었다. 그나마 고향에서 누천(漏川)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해방이 되던 1945년 12월 성탄절에 월남하여 4년제 휘문중학을 나온지 몇달 만에 이번에는 예기치 못한 6.25전쟁이 일어났다. 정부가 대전으로 옮기면서 그는 학도병으로, 가족들은 대전에서 제주도로 피란했다. 얼마 후 그는 제주에서 부모들과 합류했다. 황해도 태생인 그가 졸지에 제주도에까지 내려오게 된 것은 운명적인 일이었다. 여기에서 일생의 반려가 된 고경희 여사를 만나 뒷날 영화감독이 된 종호 (우뢰매), 종재 ( 우리들만의 세상 ) 두 아들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부친의 죽음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주에서 오현고등학교를 다녔다. 동기생 가운데는 뒤에 국회의원과 농림부장관을 지낸 강보성과 서강대 명예교수인 문학평론가 박철희가 있었고 2년 후배로 시인이며 영화평론가인 김종원 이 있었다. 그때 임감독은 이 학교의 총학생회 회장이었다. 후배들이 떨만큼 확실하게 ''군기''를 잡아 나갔다. 도내의 어떤 ''어깨''도 그에게는 시비를 걸지 못했다. 그야말로 배포와 카리스마가 있는 학생회장이었다. 이 무렵 그는 제주여고 학생과 연애중이었다. 꽤 알려진 미인이었다. ' 임원식 이 삼성여관 딸과 연애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교정을 넘어 타교 학생들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였다. 학생의 연애가 금기시되던 당시의 사회 통념으로 더욱이 공공연한 소문이 나돌 만큼 둘의 관계가 발전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자 대학생인 신분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종로의 중앙예식장(지금의 종로예식장)에서였다. 가마타고 올리는 색다른 것이었다. 그다운 결행이었다. 대학은 용산구 후암동에 있던 서라벌예술학교였다. 이에 앞서 동국대학 국문과에 들어갔으나 연극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선 보다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믿어 선택한 결과였다. 서라벌예술학교 연극영화과로 옮기면서 그는 1년을 월반했다. 동기생 가운데는 졸업 후 영화계로 진출한 전조명 (田朝明), 장석준 (張錫俊)이 있었다. 유명 촬영감독이 된 실력파들이었다. 그리고 연기 쪽에는 성우로 이름을 떨친 남성우 등이 있었고, 1년 후배로 강대진 (姜大振), 김기덕 (金基悳) 등이 있었다.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를 장식한 연출 인재들이었다. 스승으로는 극작가 이광래 (李光來), 연출가 김규대(金圭大) 선생을 모셨는데 예술정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들이었다. 이때 서라벌예술학교에는 초대 학장으로 윤백남 (尹白南)이 있었다. 초창기 한국영화를 개척한 최초의 영화감독으로서 그는 이따금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였다.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특유의 억양으로 들려주는 영화, 연극의 역사는 재미가 있었다. 임 감독은 이무렵 학교 연극공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를테면 <나상(裸像)>(이광래 작), <꿈>(유치진 작), <유령>(헨릭입센 작), <순동>(유치진 작)과 같은 연출상을 받아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만큼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 신협에 맞선다는 의욕과 패기로 창립하여 명동 시공관 무대에 올린 청협(靑協)의 <통곡>(1954. 김규대 연출)의 공연 때는 주연을 맡기도 했다. 1954년부터 55년 사이의 일이다. 임원식 은 학업을 마치자 기독교 방송의 공개 모집을 통해 입사하였다. 연출 겸 성우 일이 맡겨진 임무였다. 그때 성우로는 정상급인 정은숙, 천선녀, 남성우, 주상현 등이 있었다. 1957년께였다. 그가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선민(宣珉)영화사의 사원 모집이 계기가 되었다. 재일교포 영화감독 유진식 (劉振植)의 < 불멸의 성좌 >(1959. 최현 , 이빈화 주연) 촬영 때 제3 조감독으로 채용된 것이다. 어안렌즈까지 갖추고 촬영한 시네마스코프 규격이었다. 잇달아 그의 감독 작품 < 대원군과 민비 >(1959. 김승호 , 김지미 주연) 제작 때는 제1 조감독을 맡게 되었다. 김수용 감독과 인연이 닿게 된 것은 그의 여섯번째 작품 < 연애전선 >(1960. 김진규 , 김아미 주연)의 제1 조감독으로 기용되면서부터였다. 김 감독 밑에서 또 한편의 영화 < 돌아온 사나이 >(1960. 김진규, 최은희 주연)의 제작을 돕고 자연스럽게 신필름에 자리를 잡았다. 이 영화가 신필름 제작이었기 때문이다. 임원식은 이곳 연출부에 소속되면서 제작 시스템이 변화를 건의했다. 일본의 경우처럼 감독의 권한을 위임받아 조감독이 역할을 수행하는 이른바 파견 감독제 안을 내놓은 것이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기구 개편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는 신상옥 사단에 합류하면서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를 비롯한 < 열녀문 >(1962), < 강화도령 >(1963) 등 제작에 참여, 제1 조감독으로서 현장의 일을 완전히 익혔다. 철저한 연출 수업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책임 아래 메가폰을 잡는 일이었다. 그러나 쉽게 오는 듯 싶던 연출의 기회는 몇차례의 실기끝에 어렵게 찾아왔다. 신필름의 조감독 생활 4년만에 이루어진 ''입봉''이었다. 사극 < 대원군과 민비 >(1965. 김승호 , 최은 희 주연)는 그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데뷔작으로서 화려한 만큼 곡절도 있었다. 당초 이 영화의 개봉은 1년 전 구정 대목 프로로 예고돼 있었다. 극장 간판까지 올라가 있었으나 상영 당일 개봉이 무산되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진행되던 한일회담에 자극을 주어 영향을 미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해 3월 대다수 국민과 야당은 물론 서울 시내 대학생 5천 여 명이 매일 굴욕 반대 데모에 참여하여 정국은 폭발 직전이었다. 이 일은 결국 서울 일원에 걸쳐 계엄령이 선포되는 6.3 사태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임원식 의 영화 인생은 출발부터 순탄치 못했다. 그후의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977. 신영균 , 고은아 주연)나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 도시로 간 처녀 >(1981. 유지인 . 금보라 주연) 등에 이르기까지 그가 걸어온 20여년의 영화의 길은 수난의 역정이었다. 이런 일들은 외부에 알려진 경우도 있지만 설령 알려졌다해도 ''임원식의 수난''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그가 애써 고난으로 포장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활달한 인상과는 달리 그는 스스로를 부풀리는 데에 서툰 내성적인 일면이 있었다. 그 자신이 가장 아끼는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합동영화사 제작) 역시 개봉 첫날부터 상영이 중단되는 돌발적인 사고에 직면했다. 일제 지배 아래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가 겪는 수난을 그린 이 영화가 박정희 정권의 눈총을 받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강행되는 유신헌법 철폐운동을 벌이다가 투옥된 문익환, 박형규 목사의 일을 상기시켜 일반인들에게 종교 탄압의 인상을 심어줄까 우려해서였다. 기대에 부풀어 극장 앞에 왔다가 휴관 안내문을 보고 분노한 임 감독은 거의 이성을 잃은 채 서울극장 옆 조흥은행 지점 빌딩에 있던 중앙정보부 선무공작과를 찾아가 이유를 묻고 항의 했다. 그러나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욕설과 폭력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남산의 감찬관실로 끌려가 4일 동안 곤욕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임 감독은 이 영화에 앞서 16밀리로 < 순교보(殉敎譜) >(1974)라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었다. 이기풍 목사의 항일 의지를 소재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나리오 검열 단계에서 반려되었다. 앞과 비슷한 이유였다. 결국 공산치하에서 싸우다가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플릇을 바꿔 반공적 요소를 가미한 뒤에야 통과되었다.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를 만들게 된 것은 <순교보> 때 겪은 좌절을 만회하려는 일종의 보상 심리였다. 하지만 그에게 더욱 심각한 좌절감을 안겨 준 것은 전례없는 애착을 갖고 김수용 감독에게 연출을 의뢰하여 직접 제작한 < 도시로 간 처녀 >(태창흥업 제작)가 상영된 지 9일 만에 각서를 쓰고 도중하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삥땅''협의를 받은 버스 안내양이 알몸 수색을 당한데 분노하여 회사 측에 항의하다가 옥상에서 투신한다는 내용으로 현실고발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었다. 버스 노조가 ''삥땅''과 ''알몸수색''의 묘사를 들어 전체 버스 노동자이 명예를 훼손했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이 영화의 주제로 보아 정작 불만을 표시해야 할 쪽은 노조가 아니라 버스회사 측이어야 했다. 문제의 확산이 당국이 방관한 데 있었다. 민간조직이 내용에 불만을 갖고 압력을 가한 이 사태는 영화 표현의 자유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도시로 간 처녀>는 상영 중단이라는 영업상의 손실뿐 아니라 대종상에 출품하는 기회조차 원천 봉쇄 당하였다. 주무당국이 접수를 미루다가 마감이 지났다고 기피함으로써 작품을 통해 평가받을 자리마저 얻지 못하였다. 영화평론가협회는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 중단 사태에 대해 성명서를 내 ''창작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유감스런 행위''라고 항의하였다. 이 영화는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제작자인 임원식 감독에게서는 집 한 채를 뺏어갔다. 임 감독은 대종상 여우주연상( 최은희 )과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박노식 )을 안겨준 데뷔작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이후 촬영에서 현상까지 10일 만에 완성한 통속시대극 < 숙부인 >(1966. 최은희 주연)을 비롯하여 홍콩과의 합작영화 < 대폭군 >(1966. 최은희 주연), 방랑검객의 신명난 복수극 < 석양에 떠나가다 >(1969. 오지명 주연), 원수인 양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묵비권을 행사하는 청년의 이야기 < 벌거벗은 태양 >(1970. 윤양하 주연), 나운규 의 원작을 뼈대로 한 < 아리랑 >(1974. 신성일 주연), 전처 소생의 오남매까지 도맡아 헌신과 사랑으로 가정을 일으키는 장한 모상을 부각시킨 대종상 작품상 수상작 < 어머니 >(1976. 윤연경 주연) 등 모두 36편을 내놓았다. 그의 작품은 현대물보다 사극, 통속 시대극이 많은 편이다. 정적인 작품보다는 < 영( 影)>(1968)이나 < 항구 8번가 >(1969)의 경우처럼 액션이 강한 역동적인 화면을 선호한다. < 벌거벗은 태양 > 등을 제외하고는 멜로드라마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번거로운 것보다는 명쾌한 것을 좋아하는 그의 기질이나 성격과도 무관하지는 않다. 임원식 의 영화미학은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 < 대폭군 >,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등ㅇ 나타나고 있듯이, 활력을 추구하면서도 모두 분출시켜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끌어들여 반추하는 여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일찍이 겪었던 시련의 자취로 볼때 마음속에서 익혀 왔으나 이루지 못한 어떤 한(恨) 같은 구상이 남아 의식 주변을 맴도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사색적이기보다 행동적인 그의 작품세계에 저항적인 일면이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필 1935. 1. 22 서울 출생 1956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 졸업 1962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 데뷔 1976 합동영화(주) 전무이사겸 기획실장 역임 1980 태창영화(주) 대표이사 사장 역임 1990 (주)한국기독교영화제작소 대표이사 역임 1995 (주)기독교TV방송 전무이사겸 방송본부장 역임 1999 한국영화감독협회 제20대 회장 역임 2002년 월드컵기독시민운동 협의회 부회장 취임(현) 2000- (사)한국영화감독협회 초대 원장 피선, 춘사 나운규 영화예술제 집행위원장 대종상 집행위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조직위원 2001- 춘사 나운규 기념사업회 회장 작품명 1962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1963 대폭군 , 숙부인 1968 영 / 풍랑객 1969 석양에 떠나가다 / 의적 홍길동 1970 민비와 마검 / 벌거벗은 태양 1971 대감신랑 1974 박수무당 / 아리랑 1976 어머니 / 내마음 나도 몰라 1977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980 통천노호 1982 소림사 물장수 1992 불행한 아이의 행복 등 40여 편 감독 및 제작 수상 경력 1926 대학 연극 경연대회 연출상 수상 1962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 대통령 최우수 작품상 수상 1976 < 어머니 >로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 수상 2001 문화관광부 보관훈장 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