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왈로우(Swallow) - show (Live @ Bbang)
- 제작년도
- 2009
K정연과 알고 지낸지 거의 10년이 됐지만 함께 영화를 본 건 손에 꼽는다. 그와 많은 것을 했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도쿄에 가서 목욕탕에 가고 한 침대에서 자고 파리에서 햄버거를 먹고 전동 킥보드를 타고 전시를 보고 런던의 클럽에서 아마추어 밴드의 저주에 가까운 음악을 듣고… 그러나 영화를 같이 봤냐고 물으면 기억나는 건 단 한번 뿐이다. 임재철 평론가의 클래스에서 본 장 피에르 고랭의 <루틴 플레져 Routine Pleasures>(1986). 지난 글에서 말한 바 있는 이 영화를 서너명의 사람들과 어느 출판사 건물에 딸려 있는 강의실에서 봤다. 밤이었고 출판사에는 사람이 없었고 왜인지 우리가 허락도 받지 않고 몰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아무도 상영하지 않고 보지 않는 영화를 보기 위해 도시를 떠돌며 빈 건물을 일시적으로 점유하는 씨네-프레카리아트. <The Cinema of the Precariat>의 서두에 톰 자니엘로는 이렇게 쓴다. “프레카리아트는 미미한 존재감 때문에 언제든 끝장날 수 있음에도 계속 (영화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에.” 1) <루틴 플레져>는 장 피에르 고랭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두 남자가 작은 역의 벤치에 앉아 기차가 들어오길 기다린다. 한쪽이 자기 인생사를 들려준다. 난 언제나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로저가 이야기를 끝내면 내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장면: 살찌고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자와 그를 바라보는 장 피에르 고랭 미디엄 투샷) <루틴 플레져>의 오프닝 씬을 나와 K정연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쪽이 이야기를 끝내면 다른 쪽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느 쪽이 살찐 아저씨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건 결국 둘 다 말하고 둘 다 듣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이 과정은 일반적인 대화와는 약간 다르다. 영화와 관객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까? 영향을 주고받지만 실시간적으로 일어나는 교류나 상호작용은 아니다. 한쪽이 끝날 때까지 다른 한쪽은 기다려야 한다. 영화는 인터랙티브 아트가 아니다. 영화가 마주해야하는 건 즉각적인 응답, 반응, 참여가 아니라 어둠과 침묵 속에서 이어지는 불안정한 기다림이고 불현듯 잉태되고 사라지는 잠재성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내용 없는 인간>에서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행위를 시간의 지속성이 단절되고 차단된 느낌, 정신의 바깥, 근원적인 차원에 체류하는 사태로 묘사한다. 이러한 유보를 그리스어로 에포케epoche라고 한다. “즉 리듬의 에포케라는 바깥으로 떨어져 나오는 행위를 통해 예술가와 관람자는 그들의 본질적인 동맹 관계와 공동의 지반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2)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가 우정을 형성하는 방법이다. 영화는 우정의 한 형식이다. 정성일과 유운성 평론가의 평론집 첫 챕터 제목은 각각 다음과 같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영화 친구를 사귀는 방법에 관한 작은 가이드”. 3 ) “우정의 이미지들”. 4) 유운성은 세르주 다네를 인용한다. “유대 그리고 우정이라는 말은 아주 아름다운 말이다. 나는 한번도 우정이라는 관계 이외에 사람들과 다른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정말이지 영화만큼 우정을 사랑하고 의미화하는 예술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돈씨와 제가 10년 동안 같이 본 영화가 한편이라는 사실이 우리 관계를 증명해주는 같네요. K정연이 말했다. 뭘 증명하는데요? 우리가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 영화와 우정에 대한 K정연의 철학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친구였다면 더 많은 영화를 함께 봤을 거란다. 그 태도가 너무 단호해 나는 섭섭함과 함께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뭔가 반전이 있겠거니 했다. 예를 들면 우정은 친구 이상의 것, 자신 안에서 타자를 발견하는 탈주체화의 지각이자 게니우스genius적인 것과 스페키에스species적인 것과의 관계 맺음이며 극장과 카메라가 사라지거나 감춰진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의 변화한 상호주관적인 행위다, 등등. 그러나 K정연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2살 많잖아요. 헉. 앞으로 형이라고 하세요. K정연…!!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을 보니 오후 여섯시였고 나는 원고를 쓰다 지쳐 컴퓨터 앞에서 깜빡 낮잠이 든 거였다. 메일이 와 있었다. 영자원 담당자에게 온 메일로 마감 시한을 고지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K정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꿈 얘기는 하지 않았고 우리가 써야할 원고에 대해서, 우리가 만들 에세이 필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정연씨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쓸 테니 어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21세기 한국영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고견을 들려주세요! K정연이 말했다. < 고양이를 부탁해 >(2001)는 계급과 주거,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영화다, K시네마를 주거와 부동산의 역사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주택자의 영화, 다주택자의 영화, 전세사기꾼의 영화, 메타버스 가상부동산 업자의 영화… 홍상수와 김기덕은 홈리스 영화의 대표적인 두 형상이다, 한쪽은 돈이 많아서 집 없이 전국을 떠도는 모텔-호텔 생활자, 다른 한쪽은 돈이 없어서 강바닥과 절을 떠도는 (검열)… 등등. K정연은 이사를 한뒤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고 했다. 나는 동료 소설가인 오한기도 부쩍 부동산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왜 사람들은 집에 관심이 많은 거예요? 지돈씨도 결혼하고 애 낳으면 알 거예요. K정연……. 네? 아니에요. 모든 한국의 연극영화과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다녔던 학교에는 이상한 문화가 있었다. 선배를 무조건 형이나 누나, 언니 또는 오빠라고 불러야 했다. 선배를 선배라고 하면 하극상으로 끌려가서 얼차려를 받았다(대체 왜?). 자신보다 어린 선배를 선배라고 하면 기강이 해이해진다는 이유였다. 형, 누나야말로 윗사람을 대하는 진정한 호칭이란다(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정상…). 이것 말고도 학교에는 이상한 문화가 많았지만 이 자리에서 다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선배들을 피해다녔다. 형, 누나 호칭이 입에 붙지 않아서였다. 외동으로 자란 탓일까? 사람들은 왜 형이나 누나, 오빠, 언니라는 호칭을 좋아할까. 나는 생각했다. 내가 영화를 찍지 않는다면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유사 가족 문화권에서는 진정한 시네마가 태어날 수 없다고. 가족은 우정이 아니라 혈연이고 K시네마의 혈연은 가부장제와 연결되며 가부장제는 남성연대와 여성혐오로 이어지고 결국 신자유주의적 가치 체계를 내면화한 청년 남성으로 과대표화된 담론과 정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고양이를 부탁해를 다시 보자고 한 거예요. K정연이 말했다. 영화야말로 젠더를 생산하고 그 성격을 결정짓는 “젠더 테크놀로지”입니다. 5)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지 않았다. 영화 개봉 당시 생물학적 여성인 친구들이 너무 좋다고 말하며 등장 인물들의 대화와 행동을 흉내내고 논평했던 게 기억나지만, 나는 보지 않았다. 그건 단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컴퓨터 스크린으로 혼자 영화를 보는 것만을 유일한 낙으로 생각한 웹친화형 K-시네필이었기 때문일까. <고양이를 부탁해>를 검색했다가 잊고 있었던 단어를 발견했다. “와라나고”. 와라나고는 수작이지만 블록버스터에 밀려 극장에서 제대로 상영 못한 영화를 네티즌이 발굴해낸 영화 다시 보기 캠페인이었다. < 와이키키 브라더스 >(2001), < 라이방 >(2001), < 나비 >(2003), <고양이를 부탁해>. 문득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영화들이 생각났지만, 다시 한번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와라나고 캠페인에 속한 어떤 영화도 보지 않았다. 이런 내가 21세기 한국영화에 대한 에세이필름을 만들 자격이 있을까. 이렇게 영화를 안 보는데? 학교 선배들이 왕가위와 이와이 슌지, 미야자키 하야오를 보지 않는다고 훈계를 했던 해묵은 일도 기억났다. 어떻게 <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를 안 볼 수가 있어? < 화양연화 >도 안 봤다고? 제정신이니? 넌 영화과라고 할 수가 없구나. 과거가 떠올라서일까, 아니면 단지 원고를 쓰고 에세이필름을 만드는 일의 어려움과 지속불가능성, 때때로 급습하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와 공포 때문일까. 나는 K정연에게 다음 문장으로 끝나는 긴 메일을 보냈다. “…… 건강하고 밝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데 그건 무리겠죠? 격일로라도 밝게 살았으면 좋겠다.” 다음날, K정연에게 전화가 왔다. 지돈씨. 그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왜 K정연인지 알았어요. 왜요? 키아누 리브스가 뉴욕타임즈 비평가 선정 21세기 가장 위대한 배우 4위인 거 아시죠? 키아누 리브스 생일이 9월 2일이거든요. 그리고 제 생일도 9월 2일. 지난 원고에 이 이야기를 쓴다는 걸 깜박했네요. 그걸 왜 써요…. 오늘은 오전에 나윤이(K정연과 박지은 사이에 태어난 딸을 뜻함) 문화센터에 데려다주고 작업실로 가는 버스를 탔거든요. 버스에서 상우씨가(이상우 소설가를 뜻함) 추천해준 젠하이저 이어폰을 끼고 넷플릭스로 <키드 디텍티브>를 보며 응암으로 가는데 문득 기분이 이상한 거예요. 세줄 뒤에 앉은 덩치 큰 중년 남자가 저를 쳐다보는 것 같더라구요. 그게 누군지 아세요? 키아누 리브스? 유운성 평론가. 헉. 그래서요? 그래서…. K정연이 말했다. 그래서… (다음 화에 계속) 1) <The Cinema of the Precariat: The Exploited, Underemployed, and Temp Workers of the World >(Thomas Zaniello, Bloomsbury Academic, 2020) *본문에서 괄호 안은 옮긴이가 추가한 내용이다. 2) <내용 없는 인간>(조르조 아감벤, 윤병언 옮김, 자음과모음, 2017) 3)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정성일, 바다출판사, 2010) 4) <유령과 파수꾼들>(유운성, 미디어버스, 2018) 5) “섹스리스 K-시네마: 한국영화 속 젠더 배치의 문제”, <21세기 한국 영화>(손희정, 앨피, 2020)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스왈로우> ≠ 스릴러 영화? 의외로, 사람들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것은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이미지가 아니라, 내 몸속에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이 있어 어딘가에서 피가 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일지도 모른다. 매년 여름, 호러 영화만 모아 상영하는 CGV의 ‘CAV(Cinema Adult Vacation) 기획전’에서 주목을 받은 작품은 카를로 미라벨라 데이비스 감독의 <스왈로우>였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은 영화의 비주얼적인 공포가 부족하다며 기대 이하라는 평가를 내렸다. 심지어는, 후반부로 갈수록 몰입도가 떨어진다며, 긴장감을 스릴러의 핵심 요소라고 판단한 관객들은 <스왈로우>를 스릴러 영화로 인정하지 않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스릴러 영화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스왈로우>는 ‘싸이코 스릴러(psycho thriller)’인 셈이다. 나를 박제한 송곳을 삼켜 버리다 모든 공포의 요소는 헌터의 히스테릭한 정신 상태에서 시작된다. 헌터는 부잣집 남편과 결혼한 이후로는 호화로운 집에만 박혀 있는다. 남편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예쁘게 화장도 하고, 인형 같은 옷을 입고, 새로운 집에 커튼은 어떤 것을 놓아야 할지 고민을 하지만 남편은 헌터의 모습에 시큰둥한 모습을 보이고 자신의 옷을 잘못 관리해 망가트린 것에 욱해 소리를 지르는 모습도 보인다. 무엇을 해도 자신은 이 집의 부속품에 불과한 느낌이 들고, 자신은 곧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그에겐 이 모든 것을 하소연할 가족도 없다. 헌터가 결혼을 할 때도, 아이를 가졌을 때도 그 큰 경사를 자신의 가족과 나누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헌터의 가정 환경에 대한 단서는 시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대충 알 수가 있다. 자신을 따뜻하게 대하다가도, 마치 자신의 아들을 만난 뒤로 팔자가 싹 폈다는 듯 흘리는 말은 헌터를 불안하게 한다. 모든 게 자연스럽고 완벽한 배경에 헌터만 송곳에 콕 박혀 박제가 된 것처럼, 혼자 맞지 않는 역할을 혼자 감내하는 헌터의 모습을 보며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고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아이가 생겼다. 남편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부모님께 전화를 돌린다. 자신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남편의 품에 안긴 헌터는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헌터는 이제 진정한 가족 취급을 받기 시작한다. 온 가족이 새 아기를 돌보는 건지, 아니면 그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돌보는 건지 모를 정도로 과분한 보호에, 헌터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다. 어느 날 우연히 본 태교 비디오에서 본 내용대로, 헌터는 결심한다. 그동안 하지 않던 것을 시도해보기로. 그렇게 헌터는 위험한 사물들을 삼키기를 시작했다. 내 아’만’ 잘 낳아도 자신들의 아기가 잘 있는지 초음파 검사를 통해 확인하려던 시댁에서는 새 아기의 뱃속에 얌전히 있어야 할 작은 생명체뿐만 아니라 어딘지 익숙하고 위험하게 생긴 하얀 이미지들이 가득하다는 걸 알고 기겁을 한다. 시부모님들이 생각해낸 결론은 딱 한 가지였다. “아이는 무사해야 해”. 그들은 정신과 상담을 다닐 것,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는 도우미 ‘루아이’와 함께 집에 있을 것을 설득하기 위해 헌터를 어르고 달랜다. 집에서 혼자였던 헌터가 어느덧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감시를 받고 빠져나갈 곳은 잃는 것은 <악마의 씨>에서 악마를 잉태한 뒤 살이 무너지게 마를 정도로 이웃들의 감시를 받게 되는 로즈마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 역시 결혼을 했거나, 미래에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여성들이 보았을 때 공포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된다. 그렇지만 숨 막힐 정도로 감시가 지속되면, 어떤 사람이든 결국 일을 내고 만다. 몰래 쇠붙이 따위를 삼키려다 응급실까지 가게 된 헌터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겠다고 판단한 가족은 결국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고자 결정한다. 보통 여기까지 왔을 때 대다수의 관객들은 이미 보았던 수많은 여성과 정신병원이 관련된 영화들을 떠올리며 헌터가 무력하게 희생되고, 결국 아이를 낳고 버려지는 결말에 이르게 될 것을 예상한다. 그러나 바로 이 시점에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캐릭터 ‘루아이’를 개입시켜 헌터의 조력자로 만들며, <스왈로우>는 그동안 여성의 고통을 포착하는데 집중한 소위 ‘불행 포르노’를 재생산하지 않았다. 그렇게 영화는 새로운 국면에 맞이하게 된다. 과거가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란다 영화는 헌터가 생부를 찾아가는 에피소드를 통해 성폭행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헌터의 출생은 평생에 걸쳐 그를 괴롭혀온 문제였다. 헌터의 문제는 정신과 상담을 통해 드러나게 되지만, 그는 ‘이미 해결된 문제’라며 언급을 망설인다. 그러나 직접 마주하지 않고는 트라우마를 해결할 수 없다. 정신병원으로 이송되기 전에 저택을 도망친 헌터가 마주한 현실은 자신의 출생 배경이 가족에게 부담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계에 내몰린 그가 선택한 것은 자신의 인생을 망가트려 놓은 생부를 찾아가는 것이다. 드디어 자신의 트라우마와 대면하게 된 헌터는 날이 서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떤다. 마치 금방이라도 생부가 분노를 터트려 헌터를 해칠 것만 같은 이 순간이야말로 영화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다시 영화는 새로운 길을 택해 주인공에게 구원을 주고자 한다. 생부가 자신의 행동을 깊이 뉘우치고 있으며, 자신은 죗값을 치렀고,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헌터의 탄생은 저주가 아니었음을 말한 것이다. 성폭행으로 인해 태어난 딸인 헌터에게 어떻게 태어났든 자신은 중요한 존재라는 것은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말이다. 이 순간 헌터는 비로소 새로운 인생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삼키세요. 그러면 모두 끝나요.’ 영화가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임신 중절이라는 소재를 택한 것은 아주 전략적인 선택이다. 헌터가 임신 중절을 선택하고 그것을 진행하는 일련의 과정은 아주 간략하고 담담하게 그려진다. 게다가 그저 알약 몇 알을 ‘삼키기만’ 하면 되는 방식까지도 영화의 주제가 헌터를 비롯한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간 많은 영화들이 여성의 삶과 임신 중절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지만 타협적이거나 지나치게 강한 어조로만 이야기해 다수를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스왈로우>는 여성의 생명에 있어 그 주인은 여성 자신이라는 주제를 스릴러라는 장르 영화의 문법을 빌려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데 성공했다. 영화는 크레딧이 올라가는 긴 시간 동안 헌터가 머물고 사라진 공중 화장실을 비춘다. 아니, 그곳을 들어왔다 나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본다. 나이와 생김새가 다양한 여성들이 헌터가 낙태를 했던 화장실 칸에 들어가고, 손을 씻고, 립스틱을 고치고 나간다. 그들은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같은 장소를 수없이 오가는 여성들을 보며 비로소 헌터가 겪었던 그 긴 모험은 비단 헌터만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화장실 칸막이에서 쓴 눈물을 삼키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치 헌터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친 얼굴로 화장실을 나가 군중 틈으로 사라졌던 것처럼, 모든 여성들이 그렇게 다시 일상을 영위한다. 헌터는 모든 여성을 대변하는 캐릭터인 것이다. <스왈로우> = 스릴러 영화! 이렇게 <스왈로우>가 스릴러 영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영화는 여성이 은연중에 느끼고 있던, 그렇지만 표면적으로는 꺼내지 못했던 공포들을 민감하게 긁어내면서 불안감을 일으킨다. 여성의 일상 속 공포를 소재 삼아 스릴러라는 영화 장르에 맞게 스토리를 직조했다는 점에서 이권 감독의 <도어락>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여성 주인공의 트라우마를 다루고, 그것을 주인공이 극복한다는 것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제럴드의 게임>과 비슷한 결을 보이기도 한다. <제럴드의 게임>이 공개되었을 당시에도 성별에 따른 관객 평점 차이가 상당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를 넘어서, 관객이 새로이 제작되고 있는 서사에 공감하는지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왈로우>가 스릴러 영화가 아님을 단정 짓던 관객들에게 말을 전하고 싶다. 이제 스릴러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의 규칙이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