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³
- 감독
- 민은정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민경성, 민은정
사진: “ 부천에서 우주 속을 걷다 뉴미디어 끝판왕 프로그램 ‘비욘드 리얼리티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아바타를 제외한 3D가 산업과 영화에서 사라진 것처럼, 새로운 영상의 미래처럼 울려 퍼지던 VR의 장밋빛 미래가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앞다퉈 VR 영화를 내세우던 영화제들은 AI가 등장하자, 이제는 AI가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꿀 것처럼 쉽게 갈아탔다. VR 영화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VR이 갖고 있는 잠재성과 미학을 아직 우리는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VR 360° 영상은 구면 전체(수평 360°, 수직 180°)를 제공하지만, HMD는 사용자가 고개를 돌리는 방향을 중심으로 장치에 따라 약 110°(수평) × 90°(수직) 안팎의 제한된 영역만 보여준다. 따라서 관객이 정면을 중심으로 머무를 때, 실제로 한 순간에 지각하는 영역은 구면 전체가 아니라 정면을 중심으로 한 제한된 시야다. 관객들은 VR 영화에서 360° 시야를 다 관람할까? YouTube VR 시청 분석에 따르면 사람들은 360° 영상에서 재생 시간의 75%를 정면 90° 안에서 보낸다고 한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정적인 360° 장면을 처음 접했을 때 관객들이 넓은 영역을 탐색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 영역으로 시선이 수렴하는 현상이 관찰되기도 했다. 360° 영상이 제공하는 시야와 관객이 실제로 사용하는 지각적 영역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360°의 공간 전체가 주어졌다고 해서 관객이 그 전체를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VR 영화 시청 시 관객은 주로 정면 영역의 요소에 집중하고, 고개를 크게 돌려야 하는 뒤쪽 영역은 덜 찾아본다. 관객이 몸을 움직여 돌아볼 때도 화면 안의 사건이나 서사가 제공하는 중심적 단서를 따라가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일부 VR 영화 제작 현장 가이드에서는 관객의 주의가 정면 중심 90° 원뿔 안에 집중되므로, 서사적 이미지는 정면 중심 90°~120°에 집중되도록 설계해야 한다고 안내한다. 360° 공간 전체를 활용하려면, 감독이 관객의 360° 시선의 이동을 설계하고 유도해야 한다. 지금까지 VR 영화 연출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의 시선을 특정 방향 중심으로 고정하거나 감독이 의도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집중해왔다. VR 영화 < 동두천 >(김진아, 2017)의 도입부, 동두천 역 앞에 배치된 360° 카메라가 롱테이크로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적하고 활기가 없어 보이는 거리, 역 앞이지만 오고 가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미군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역 앞을 지나간다. 프레임 안에 무엇을 따라가야 할지 모르겠다. 커다란 변화가 없는 화면이 계속된다. 관객의 시선을 유도하는 서사도, 명징한 피사체도 없는 화면이 지속된다. 이 지루한 화면이 VR이란 매체의 선입견과 만나면서 관객은 체험을 스스로 찾기 시작한다. 앞을 주시하던 머리와 시선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래도 자극적이거나 시선을 끄는 장면이 없다. 이제는 몸도 움직인다. 회전의자에 앉은 몸이 무언가를 찾아 돌기 시작한다. 머리와 몸이 움직이고 이 시간의 지속을 함께하다 보면 화면 안 낮은 해상도를 넘어 아주 사소하고 작은 움직임과 변화들이 나타난다. 바람이 부는 것 같다. 먼지가 날리고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린다. 평소에 관심도 갖지 않은 비닐봉지가 화면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인다. 이 비닐봉지는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관객의 머리와 몸이 360° 화면 안에서 그 위치를 향하고 있지 않다면 만날 수 없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화면 안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관객의 신체가 그 방향을 향하지 않는 순간에는 현재의 지각적 이미지가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컷에서는 어딘가 강아지가 들어온다. 내 몸이 놓인 위치에 따라 우연히 등장하는 이 강아지를 처음부터 목격할 수 있고, 내 몸이 다른 위치에서 시작되었다면 강아지가 프레임 인 될 수도 있다. 화면 안 피사체의 등장과 퇴장도 우연이지만, 그 피사체가 화면 안에 등장하는 시간도 나의 신체와 만나면서 우연적으로 구성된다. 이때 발생하는 이미지는 화면 안의 피사체와 헤드셋을 쓰고 멈춰 선 나의 신체가 만나 발생시키는 몽타주다. 아주 사소한 화면 안의 변화들을 따르거나 변화를 발견하지 못해도, 컷 안의 물리적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헤드셋을 쓴 머리와 몸이 회전한다. 머리와 몸이 작은 움직임을 찾아 따라 움직이다 다음 컷으로 전환된다. VR 360°의 특성상, 관객의 머리와 몸이 자신이 향하고 있던 방향에서 다음 컷의 첫 장면을 만난다. 두 번째 컷도 360°의 화면을 담고 있지만, 컷이 이어지는 순간 관객이 현재 향하고 있는 방향을 중심으로 한 제한된 시야에서 시작된다. 이때 만들어진 두 컷 사이의 몽타주는 전통적인 2D 영화에서처럼 하나의 공간적 관계로 완전히 결정된, 감독이 계산한 몽타주가 아니다. 감독이 결정하는 것은 두 쇼트의 시간적 순서와 절단의 순간이지만, 그 절단이 일어나는 순간 관객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는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사진: “ BIFAN의 순간들 Ⅶ : 비욘드 리얼리티 Beyond Reality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시간적 절단은 감독의 것이지만, 공간적 접합은 관객의 몸에 의해 발생한다. 관객은 변화를 좇거나 멈춘 자리에서 다음 컷의 첫 이미지를 만난다. 이렇게 이어진 두 컷의 몽타주는 편집실에서 하나의 관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관객의 몸이 찾고 머문 신체의 흔적을 통해 그때마다 다르게 발생한다. 관객의 몸이 변화를 찾다가 만난 이미지와 다음 이미지의 관계가 하나의 몽타주를 만든다. 화면 안의 체험을 따라 몸이 움직이고 몸의 반응에서 다음 컷을 만난다. 첫 번째 컷과 두 번째 컷의 연결로 발생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세 번째 컷에도 같은 관객의 신체가 만드는 몽타주가 발생한다. 이러한 몽타주가 축적되면서, 하나의 작품 안에서도 관객마다 서로 다른 이미지의 연쇄가 만들어진다. 한 명의 관객이 동일한 작품을 여러 번 봐도, 서로 다른 관객들이 같은 작품을 봐도 그때마다 동일한 상영 안에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미지의 관계가 계속해서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 VR 영화가 만날 수 있는 체험이 아닐까. 감독 개인의 생각과 의도로 배치되고 읽혀야 할 영화에서 감독은 시간에 대한 선택과 공간에 대한 카메라의 배치를 결정하고, 관객은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신체를 움직이며 자신이 만나는 이미지를 구성한다. 이때 관객은 감독을 대신하여 영화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도 자신의 신체가 만나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매번 다른 영화를 발생시키며 관객이 또 다른 창작자가 되는 순간이다. 영화의 완성된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적 경험을 통해 매번 다른 이미지의 몽타주를 발생시키는 관객이 되는 것이다. 감독과 관객의 위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화의 한 부분을 결정하는 권한이 감독에게서 관객의 신체로 이동하는 순간이 발생한다. 감독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관객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전통적인 영화의 관계와 달리, 관객 모두가 감독이 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VR 영화일지 모른다. <동두천>의 도입부는 그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 낮의 공간이 밤으로 바뀌고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컷들은 그 여인의 이동 경로를 따라 카메라가 서고 관객들은 어둠 속의 골목에서 어디론가 향하는 그녀만을 바라보게 만든다. 앞선 장면에서 관객의 몸이 스스로 공간을 탐색하고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했다면, 이 장면부터는 영화가 관객의 시선이 향해야 할 방향을 강하게 지정하기 시작한다. 또 다른 창작자로서 영화를 체험하고, 자신의 신체를 통해 영화의 공간적 관계에 참여하며 각자 다른 영화를 만나던 관객들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가게 만드는 감독의 개입으로 시선은 고정되고, 몸도 묶인다. 그리고 어느 방으로 안내된다. 방 안에 카메라는 오랫동안 머문다. 하지만 첫 컷이 준 이미지와 달리 이후의 장면은 보다 강력하게 시선을 유도한다. 영화가 처음에 스스로 열어놓았던 VR 영화의 잠재성이, 하나의 강력한 의미와 서사 안으로 다시 수렴한다. 어쩌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VR은 바로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360°의 공간이 아니라, 관객의 몸이 영화의 구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비로소 발생하는 새로운 영화적 관계 속에. <열차의 도착> 중 / 사진: IMDb( 1 , 2 ) 뤼미에르 < 열차의 도착 >(루이 뤼미에르, 어거스트 뤼미에르, 1895)이 상영되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오는 기차를 처음 경험했다. 그 강렬한 체험으로 시작된 영화는 기존의 지각을 바꾸고,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첫 영화의 등장은 객석이라는 고정된 공간에 관객의 신체를 묶어 놓은 채 일어난, 강제적이며 수동적인 지각과 사유의 변화였다. 반면 VR은 관객이 몸을 구속받지 않고 능동적 신체로 맞이할 수 있는 체험이다. VR 영화는 <열차의 도착> 이후 가장 큰 체험과 사유의 변화를 품고 있다. 영화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한 지점에서 회화를 감상하는 시각이 아니라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촉각을 갖게 되었다. 그 지각의 변화는 인습적인 사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다. 감각이 바뀌면 지각이 바뀌고, 지각이 바뀌면 사유가 바뀌며, 행동과 삶이 바뀔 수 있다. 그것이 영화가 갖고 있는 사유의 능력이다. 들뢰즈는 세계가 이미지들의 체계이며, 영화는 그것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영화는 이미 도래했지만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들뢰즈는 영화가 인간적 지각을 넘어설 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지각을 만나고, 그 지각이 사유를 연다고 말한다. 그 출발점에 신체를 둔다. 『시네마 2(Cinéma II)』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내게 신체를 달라. 이것은 먼저 일상적 신체 위에 카메라를 걸쳐 놓는 것이다.” [1] 들뢰즈에게 신체는 화면 속 인물의 신체였다. VR 영화는 카메라를 관객의 신체 위에 얹는다. 헤드셋을 쓴 관객의 머리가 곧 카메라의 방향이 되고, 관객의 몸짓이 이미지와 이미지의 관계를 만든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매번 앞의 장면을 지우면서 현재의 장면을 만난다. 현재의 새로운 지각은 때로는 기억과 만나 내 안에 다른 이미지를 만든다. VR에서는 같은 영화를 봐도 관객마다 서로 다른 지각의 경로가 생긴다. 동일한 이미지의 공간 안에서 누군가는 왼쪽을 보고, 누군가는 뒤를 본다.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만나고, 서로 다른 영화를 경험한다. 각자의 신체를 통해 서로 다른 영화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관객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여러 지각들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며 도래한다. 들뢰즈에게 ‘민중’은 이미 존재하는 집단의 재현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집단으로 불러내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집단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집단이다. VR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은 새로운 매체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다. 관객의 몸이 영화의 구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발생하는 새로운 영화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지각의 집단, 아직 구성되지 않은 영화적 주체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서로 다른 방향을 선택한 몸들이 하나의 시선으로 통합되지 않은 채, 같은 영화 안에 함께 있다. 어쩌면 이것이 도래하지 않은 민중의 도래일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신체가 서로 다른 지각의 관계를 만들면서 하나의 작품 안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관객 모두가 창작자가 되어, 관객의 몸이 영화의 구성에 들어와 매번 다른 영화를 발생시키는 것. 어쩌면 VR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n명의 감독을 도래시키는 매체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영화를 통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민중의 도래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 [1] 질 들뢰즈, 『시네마 2(시간-이미지)』, 이정하 옮김, 시각과언어, 2005, 378쪽. More Than 라이브 액션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박홍열(촬영감독·다큐멘터리 감독) l 홍상수 감독의 < 하하하 >(2010)에서 < 밤의 해변에서 혼자 >(2016)까지 10여 작품, < 원더랜드 >(김태용, 2024),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박동훈, 2021), <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2016), < 간신 >(민규동, 2014) 등 100여 편이 넘는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현대미술 등의 촬영감독으로 활동. < 반칙왕 몽키 >(2026), < 음악만세 >(2026), < 풍경드리프팅 >(2024), <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2023),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1 , 2 ) 등 다큐멘터리 연출. 현재 《씨네21》에서 ‘박홍열의 촬영미학’ 기고 중.
<백룸> 중 (사진: IMDb / © A24) 기억에 남는 불안이 있다. < 1917 >(샘 맨데스, 2019)에서 데번셔 연대의 무모한 돌진을 막아낸 스코필드가 블레이크의 형을 찾아 야전병원 막사에 당도했을 때, 나는 영화가 쌓아온 서스펜스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불안에 사로잡혔다. 막사 저 멀리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화 내내 스코필드에게 밀착해 있던 카메라가 거의 유일하게 인물을 놓아두고 홀로 날아오르기 시작했고 끝내 그 나무 아래서 이야기의 문을 닫는다. 눈을 뜬 남자가 한바탕 소동을 끝내고 다시 나무 아래서 눈을 감는 이야기. 헛웃음이 나올 만큼 도식적인 수미쌍관 구성은 경탄스러운 카메라 무빙을 한 편의 허탈한 동화로 바꿔놓았다. 극장을 나서며 이렇게 적었다. “대체로 무용(無用)한 것들을 사랑하는 편이다. <1917>은 카메라의 쓸모, 자신의 효용을 수다스럽게 떠들어대는 것 같아 왠지 안쓰러웠다. 문득 침묵할 줄 알았던 카메라들이 그립다.” 당시 편협한 판단을 요약하면 이렇다. <1917>은 촬영 방식이 제일 앞자리에 놓인 영화다.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 스스로 밝혔듯 이 영화에서 물리적인 아날로그 롱테이크는 최장 7분 남짓, 나머지는 교묘한 트릭으로 이어 붙인 착시다. 끊어지지 않는 카메라를 위해 서사가 설계됐는데, 결과적으로 이야기 구성은 기이하리만치 게임에 가까워졌다. 참호에서 트럭으로, 불타는 마을에서 강물로 이어지는 여정마다 이름난 배우들이 마치 게임 속 NPC처럼 배치되어 병사를 다음 구간으로 안내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서사를 위한 카메라가 아니라 카메라를 위한 서사가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1917>의 연결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의 결과가 아니라 ‘연결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 유려한 롱 컨티뉴이티 숏은 전장을 재현하는 대신 관객을 안전한 가상현실로 소환해 버린다. 영화적인 것,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을 극한까지 추구한 결과가 역설적으로 영화로부터 멀어지는 기이한 종착지에 다다른 셈이다. 2020년 무렵의 나는 그 어긋남을 두고 ‘영화를 향한 향수병’이란 딱지를 붙였다. 한없이 가까워지고 싶지만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며 앓는 병. 향수병은 애초에 돌아갈 수 없음을 전제로 성립하는 상태이므로 그리움에 사로잡히는 순간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뒤늦게 고백한다. 그땐 일말의 허세와 더불어 형식주의자를 향한 결벽 비슷한 감정이 작동했던 것 같다.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에 유난히 위화감을 느끼는 편이다. 스타일에는 목적과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싶은 말이 어떤 결과물로 이어진 형태가 곧 형식이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렇기에 방향과 결과, 의지와 형태가 어긋난 순간들을 만나면 한참 생각에 잠기곤 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원래 하고 싶었던 게 뭘까. 시간이 흘러, 정확히는 새로운 세대의 물결을 겪으며 질문의 방향이 슬며시 바뀌는 중이다.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입에 올리던 ‘영화적인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런 고정불변의 대상이 있긴 한 걸까. 영화가 무엇인지 묻는 것만큼 본질적이고 동시에 바보 같은 질문도 없다. 그건 목적지라기보단 그저 지향에 불과하다. 본래 큰 질문에서는 답을 이끌어내기 어려운 법이다. 현 시점 내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영화적인 것’이란 지표에 절대성 따윈 없다는 믿음이다. 아주 협소한 경험에 근거하여, 영화적인 것의 실체는 ‘경험에 근거한 익숙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한 시절의 관습이다. 심지어 이 관습의 수명은 길어야 20~30년, 대체로 한 세대보다 짧은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체험을 절대적인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1950년대에 완성된 몇몇 형식들을 ‘시네마틱’이라 일컫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거칠게 말해 오늘날 영화적인 것이라며 유통되는 상당수의 기법은 1950년대 이후, 좁게 잡으면 1970~80년대에 유행하거나 영향을 미친 스타일에 가깝다. 이를테면 슬로우 시네마가 롱테이크를 거쳐 시간을 활용하는 방식이 그렇다. <1917>의 롱 컨티뉴이티 숏이 증명하고자 한 ‘영화적인 접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도 그저 본인이 만들어온(그리고 지나온) 영화라는 영토에 대한 향수에 잠긴 게 아닐까 싶은 의심. <1917> 중 (사진: IMDb / © Amblin Entertainment, ㈜스마일이엔티, ㈜씨제이이엔엠) 의심을 심화시킨 건 <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2019)이었다. 그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내내 윤단비 감독의 심경을 상상했다. 이 젊은 창작자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무엇일까. 윤단비 감독의 영화에는 지난 세기의 끝자락, 그 언저리의 여름이 고여 있다. 2층 양옥집과 낡은 선풍기, 대야에 담긴 수박, 한없이 늘어지는 오후. 흥미로운 건 영화가 재현한 그리움에 정확한 원본이 없다는 점이다. 적지 않은 시네필들이 직접 살아보거나 겪어본 적 없는 1980년대 대만 뉴웨이브의 골목을 그리워한다. 요컨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추억하기, 원본 없는 노스텔지어라고 해도 좋겠다. 엉뚱한 고백 하나 하자면, 나는 이 영화를 보다가 헤어진 적 없는 연인을 그리는 노래들을 떠올렸다. 최신 K팝, J팝을 들으며 애틋한 이별을 앓는 요즘 세대와 마찬가지로 돌이켜보면 나 역시 신승훈의 노래를 들으며 아직 겪은 적 없는 사랑을 먼저 배웠다. 그 감정은 가짜인가. 당연히 아니다. 경험의 원본이 없을 뿐, 패턴과 표현 방식을 공유하는 순간 감정은 실제로 발생한다. <남매의 여름밤>의 공간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인식 하에서 존재한다는 것처럼. 지정학적 시간에 얽매이지 않은 채 그리움의 새로운 층위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하여 그 여름밤은 감독의 것도 나의 것도 아니면서 결국 우리 모두가 지나온 무언가를 자극한다. 직접 겪지 않아도 향수병을 앓을 수 있다. 이 단순한 사실이 내게는 작지 않은 균열을 남겼다. <남매의 여름밤> 중 / © 오누필름 최근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유튜버들을 보며 다시 생각에 잠긴다. < 백룸 >(케인 파슨스, 2026)과 < 옵세션 >(커리 바커, 2026)은 흥미롭게도 모두 고전적 문법의 영화다. 10대의 침실에서 태어난 유튜브 영상 <백룸>은 캐릭터도 서사도 없이 노란 방과 형광등 소음의 이미지를 가운데 두고 해석과 재창작을 댓글창과 위키트리에 맡긴 열린 텍스트다. 반면 영화 <백룸>은 오리지널 각본 위에 배우의 얼굴을 세우고 트라우마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통과하는 닫힌 이야기다. 배우 중심의 단단한 서사, 처음과 끝이 닫힌 세계. 하지만 정작 케인 파슨스는 <백룸>을 영화화하면서 자신을 스타로 만든 유튜브의 작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니 그럼에도 젊은 관객들이 극장으로 몰려들었고 함께 집단체험을 공유했다.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극장에서 본 인생 공포영화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소가 주는 경험의 확산은 바야흐로 새로운 세대가 극장영화로 융합되는 신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것이 한 번에 변하는 경우는 없다. 어떤 것은 바뀌고 어떤 건 바뀌지 않으며 디졸브 된다. 기성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그러하듯 프리 프로덕션 중심의 예술이다. 현장에서 찍는다는 행위 자체에 무게가 실린다. 반면 디지털 미디어는 포스트 프로덕션 중심이다. 렌즈가 포착한 진짜보다 소프트웨어로 빚어낸 진짜를 신뢰한다. <백룸>의 VHS 질감이 아날로그 카메라가 아니라 무료 3D 소프트웨어의 후반작업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파슨스가 극장에 가져온 것은 유튜브의 문법이 아니라 유튜브의 프로세스였다. 문법이 아니라 프로세스의 융합. 무엇보다 그는 새로운 문법에 집착하지 않았다. 새로움을 향한 과도한 집착이 오히려 길을 가릴 수도 있는 법이다. 디지털 네이티브가 소프트웨어로 아날로그의 유령을 위조해낸 이 제작 방식이야말로, 겪지 않은 것을 그리워하는 우리 시대의 뒤틀린 향수에 대한 완벽한 은유 아닌가. <백룸>의 배경은 1990년, 화면의 질감은 VHS다. 주 관객층인 20~30대는 그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백룸>의 모방된 질감이 의도와 달리 그들에게 기이한 안락함을 주었으리라 짐작한다. 왜냐하면 <백룸>의 리미널 스페이스는 연결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쓸모를 강요받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디지털에는 그리워할 게 참 많다. 사진을 지브리풍으로 바꾸는 필터가 유행하고, 멀쩡한 고화질 영상을 VHS 질감으로 되돌리는 레트로 변환이 놀이가 된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아도 상관없다. 질감 그 자체가 그리움의 대상이, 마음을 눕힐 안정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남매의 여름밤>으로 대표되는 시네필 세대 창작자들과 본질적인 패턴은 다르지 않다. 사실 이건 봉준호 , 박찬욱 같은 앞 세대도 마찬가지였다. 비디오 가게와 시네마테크에서 자란 이들에게 영화는 태어나기 전의 시간까지 소급되는 고향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영화라는 고향에서 시간을 초월해 만난다. 심지어 디지털은 이 영토를 무한정 확장해 우리 앞에 소환 중이다. <백룸> 중 / 사진: IMDb( 1 , 2 ) / © A24 <백룸>을 극장에서 본다는 건 시간의 때가 묻은 노란 벽지와 형광등 불빛, 낡은 카펫에서 안식을 찾는 세대가, 인류가 가장 오래 사용해 온 어두운 방에 모여 함께 악몽을 꾸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극장이야말로 현실에서 두 시간 동안 잠시 미끄러져 나가는 이행의 공간,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리미널 스페이스다. 그리하여 출구 없는 방은 무섭고, 동시에 그립다. 아무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공간이 과잉 연결의 시대를 사는 세대에게는 지옥이면서 동시에 도피처가 되는 셈이다. 무서움과 그리움이 한 몸이라는 이 양가성이야말로, 겪지 않은 것을 추억하는 마음과 함께 한 세대를 극장으로 데려온 힘일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고전적인 영화는 그리워할 대상인가. 그럴 수 있다. 그럼 그 시절의 감각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향수병에 빠진다, 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향수에 빠진 사람들은 가만히 병을 앓는 대신 온갖 것을 시도한다. 로저 디킨스는 끊어지지 않는 카메라로, 윤단비는 원본 없는 여름밤으로, 파슨스는 위조된 VHS의 유령으로. 어쩌면 새로움은 바로 그 발버둥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도달할 수 없지만 계속 향할 수밖에 없는 욕망. 일치할 수 없음에도 한없이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 그것은 영화와 현실의 관계이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창작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1917>을 향수병이라 명명했을 때 내 감정의 바탕은 안타까움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겪어보지 못한 것을 얼마든지 추억할 수 있는 시대라면,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사실은 더 이상 병의 조건이 아니라 창작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자면 애잔함보다는 멈추지 않는 도전과 활력을 느낀다. 그 시절 나는 극장을 나선 뒤에도 질척거리며 달라붙어 있는 영화를 더 보고 싶다고도 썼다. 어쩌면 그건 시대를 구분하며 벽을 치는 태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실시간으로 마주하는 건, 매체 간 문법이 섞이면서 공유되는 확장의 순간들이다. 침묵할 줄 알았던 카메라들이 그립다는 문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이제 그 그리움은 앓는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빚어내는 소리로 들린다. 향수병은 나을 수 없다. 하지만 어떤 불치병은 도리어 불사의 동력이 되기도 하나 보다. 문득 윌 스미스 주연의 < 나는 전설이다 >(프란시스 로렌스, 2007)가 떠오른다. 이것이 절멸의 길인지 아니면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길인지 아직 단언할 순 없다. 내가 서 있는 장소가 구 인류의 땅인지, 신 인류에 편입될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이미 무언가 변했고 부지런히 더듬어가며 뒤따르는 중이다. <백룸> 중 (사진: IMDb / © A24) 다시, 비평 과거에 봤던 영화가 요즘은 달라 보인다면, 관점은 언제부터, 어떻게, 어떤 이유로 달라진 걸까. 시간을 따라 서로 다른 형태와 색깔을 남긴 비평의 궤적을, 필자가 직접 뒤따라가 봅니다.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 씨네21 》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
© CoMix Wave Film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들은 카메라와 렌즈의 광학적 특성을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가져와 정교하게 구사한다. 신주쿠 공간의 실사 이미지를 작화의 배경으로 가져온 것으로 유명한 < 언어의 정원 >(2013)은 이러한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은 실사와 달리 현실의 재현으로부터 자유롭다. 작화와 배경, 캐릭터와 서사의 개연성까지 현실을 넘어서는 세계를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카메라의 시선만큼은 의외로 인간의 눈높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은 인간의 시선을 반영한 리얼리티 속에서 샷을 구성한다. <언어의 정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독특하다. 인간의 시선을 넘어 비인간의 시선과 높이에서 바라보며 사물과 사물 사이의 시선을 연결한다. 그 사이에 인간이 놓인다. 영화가 시작되면 수면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며 동심원을 만든다. 카메라는 천천히 틸업한다. 일반적으로 팬이나 틸은 시작과 끝이 분명한 하나의 운동을 완성하지만, 이 첫 컷의 틸업은 끝에 도달하지 못한 채 다음 컷으로 전환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컷은 광각 렌즈로 전철에 밀착한 채 함께 달리는 바퀴를 보여준다. 카메라는 선로보다 낮은 위치, 인간의 신체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공간에 놓여 있다.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실사영화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시점이다. 카메라가 마치 땅속에서 전철에 붙어 함께 달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컷은 고정된 카메라가 화면 가득 수면을 응시하고, 두 번째 컷은 전철과 함께 바닥을 질주한다. 이 두 컷은 시선의 높이뿐 아니라 대상과의 거리, 피사체의 속도감, 운동까지 극단적으로 벌려 놓는다. 쉽게 연결될 수 없는 두 개의 시선을 과감하게 이어 붙이며 영화는 처음부터 가장 먼 간격을 만들어낸다. 사운드 역시 마찬가지다. 정원의 빗소리는 전철 바퀴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기계음과 충돌한다. 두 번째 컷의 마지막에는 반대편 선로를 달리는 전철이 교차하고, 그 순간 선로는 진동으로 흔들린다. 전철에 밀착된 카메라는 그 진동을 고스란히 받아낸다. 선로의 떨림은 더 이상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관객이 직접 체험하는 감각으로 전환된다. 비인간의 위치에 있던 카메라는 진동을 통해 하나의 신체를 획득한다. 세 번째 컷은 다시 정원으로 돌아온다. 마치 첫 번째 컷의 틸업이 끝났다면 도달했을 풍경처럼, 물 위로 가지를 드리운 나무가 화면을 채운다. 빗방울은 잦아들며 동심원도 적아진다. 빗소리 역시 작아지며 전철과 선로가 만들어낸 거친 진동과 대조를 이루며, 정원의 고요 속으로 관객을 이끈다. 사진: IMDb( 1 , 2 , 3 , 4 ) / © CoMix Wave Film 이때부터 타카오의 1인칭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그러나 내레이션 위로 이어지는 쇼트들은 그의 시선을 따르지 않는다. 전철 내부 천장 시점, 선로 바닥에서 플랫폼을 올려다보는 시점, 전철역 플랫폼 바닥과 전철 외관에 밀착한 시점 등은 어느 인물의 시점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타카오가 전철에서 내린 뒤 바라보는 도쿄 시청 역시 그의 시점과는 어긋난 구도로 제시된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인물의 시선을 재현하기보다 인간이 존재할 수 없는 위치, 혹은 사물들의 위치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언어의 정원>은 처음부터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사물의 시선으로 세계를 조직한다. 사진: IMDb / © CoMix Wave Film 타카오가 비 내리는 정원으로 들어선다.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포착한 첫 샷은 초점이 먼저 뒤편의 배경에 놓여 있다. 타카오의 얼굴은 잠시 흐릿하게 뭉개져 있다가 뒤늦게 초점이 맞는다. 렌즈 초점 이동으로 화면 전체가 숨쉬는 듯하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보기 드문 선택이다. 카메라가 단순히 인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렌즈의 광학적 움직임 자체를 이미지의 리듬으로 만든다. 타카오와 유키노가 공원에서 만나는 정자 안 초반 투샷들은 대부분 바닥 가까운 낮은 위치에서 두 사람을 바라본다. 앞서 전철 바퀴를 따라 달리던 카메라와 플랫폼을 올려다보던 선로의 시점이 그대로 이어지는 듯하다. 때로는 나무나 흔들리는 풀 너머 두 사람을 바라본다. 첫 투샷에서는 흔들리는 풀이 유키노의 얼굴을 가리며 그녀의 감정을 대신한다. 두 사람을 함께 바라보는 카메라의 위치는 인간의 눈높이가 아니다. 카메라는 사물의 자리에서 두 사람을 바라본다. <언어의 정원>에서 인간의 시선에서 벗어난 또 다른 이미지는 색수차의 빛이다. 색수차는 렌즈 안에서 빛이 분산되며 부서진 무지개 빛처럼 나타난다. 렌즈의 광학적 한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인간의 수정체가 발견할 수 없는 빛이다. 타카오가 집 안에서 구두를 만들 때 방안을 밝히는 광원들에서 색수차의 빛 플레어가 빛난다. 오래된 집의 불안정한 전기구조를 반영하듯 이 색수차 플레어가 미세하게 떨린다. 이 색수차의 빛은 유키노의 집 안에서도 등장한다. 장마가 끝난 뒤 뜨거운 여름의 강렬한 햇빛 아래 도쿄의 풍경 위로, 비 내리지 않는 정원에서도 이 빛은 흔들리며 나타난다. 서로 다른 공간에 홀로 떨어져 있는 두 인물의 감정은 카메라만이 포착할 수 있는 분산된 빛으로 화면 안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렌즈 안에서 갈라진 색수차의 빛은 만나지 못하고 말 못하며 머뭇거리는 두 사람의 감정을 미세하게 떨리는 빛으로 표현한다. <언어의 정원>은 렌즈의 불완전성과 결함의 흔적을 이미지 안으로 가져온다. 완벽한 인간들의 사랑이 아니라, 불안하고 외로운 인간의 감정을 흔들리고 부서진 빛을 통해 연결한다. 렌즈 안에서 발생한 광학적 흔적은 인물들의 감정적 흔들림과 겹쳐진다. 사진: IMDb( 1 , 2 ) / © CoMix Wave Film 오랜만에 정원 정자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비에 옷을 말리러 유키노 집으로 간다. 타카오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유키노는 선생님이라 부르라 하며 다음 주 이사를 간다고 말한다. 그 말에 타카오는 아직 마르지 않은 옷을 입은 채 집을 나간다. 이 순간 영화의 인트로에 등장했던 카메라의 지각이 다시 소환된다. 타카오가 문을 열고 나간 뒤 이어지는 컷은 그가 마시던 컵이다. 처음에는 초점이 배경에 머물러 컵이 흐릿하게 보이다가 뒤늦게 컵으로 초점이 이동한다. 영화 인트로였던 타카오의 정면샷 이후 처음 등장하는 초점이동 컷이다. 다음 컷에서는 카메라가 벽을 따라 왼쪽으로 트랙킹하며 초점이 나간 상태로 울고 있는 유키노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유키노의 버스트샷이 보여지는데, 한 번 더 초점이 나간 상태의 유키노를 먼저 보여준 후 뒤늦게 초점이 맞는다. 그리고 그녀는 타카오를 쫓아 밖으로 뛰어나간다. 영화 초반 타카오에게 적용했던 초점이동은 후반에 유키노에게 반복된다. 렌즈의 광학적 움직임은 두 사람을 같은 리듬 안에 놓으며, 끝내 서로에게 닿지 못했던 감정을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한다. 이때 영화 내내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던 분산된 무지개 빛 색수차도 화면의 중앙으로 들어온다. 영화의 마지막, 두 사람은 아파트 외부 계단에서 위아래로 마주보고 선다. 타카오가 울음을 떠뜨리며 유키노에게 감정을 쏟아낸다. 두 사람의 감정이 가장 격정적으로 치닫는 순간, 카메라는 두 사람의 얼굴이 아닌 계단 난간 밖에 위치하고 모서리에 초점을 놓는다. 이어지는 두 사람의 넓은 OS샷에서도 초점은 둘 중 누구에게도 머물지 못한 채 둘 사이를 오간다. 유키노가 타카오에게 뛰어가 끌어안는다. 내리는 비 사이로 강렬하고 따뜻한 햇빛이 들어와 두 사람을 감싼다. 색수차도 두 사람을 감싸고 완벽한 원의 색수차가 도쿄 풍경 위로 떠오른다. 사진: IMDb( 1 , 2 , 3 , 4 ) / © CoMix Wave Film 언어의 정원은 카메라의 지각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가장 섬세하게 풀어낸 애니메이션이다. 감각은 인간의 지각보다 카메라의 지각 위에서 생성된다, 렌즈의 광학적 흔적과 사물의 위치에서 언어 이전의 감각을 포착하고, 언어가 이미지로 발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감각은 언어화 될 수 없다. <언어의 정원>은 결국 언어의 정원이 아니라 감각의 정원이다. More Than 라이브 액션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박홍열(촬영감독·다큐멘터리 감독) l 홍상수 감독의 < 하하하 >(2010)에서 < 밤의 해변에서 혼자 >(2016)까지 10여 작품, < 원더랜드 >(김태용, 2024),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박동훈, 2021), <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2016), < 간신 >(민규동, 2014) 등 100여 편이 넘는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현대미술 등의 촬영감독으로 활동. < 반칙왕 몽키 >(2026), < 음악만세 >(2026), < 풍경드리프팅 >(2024), <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2023),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1 , 2 ) 등 다큐멘터리 연출. 현재 《씨네21》에서 ‘박홍열의 촬영미학’ 기고 중.
| No | 분류 | 리스트명 | 영화 수 | 상세 |
|---|---|---|---|---|
| 1 | 국내 | [씨네21] 레퍼런스 100 (2018) | 100편 | |
| 2 | 국내 | [씨네21] 한국영화를 빛낸 영화 30편 (2019) | 30편 |